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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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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충칭시 중국공산당 지방위원회 제16대 서기
보시라이
[ruby(薄, ruby=Bó)][ruby(熙, ruby=Xī)][ruby(來, ruby=lái)](薄熙來, 박희래) | Bo Xilai
파일:보시라이_2009122331347259.jpg
출생 1949년 7월 3일 ([age(1949-07-03)]세)
중화민국 화북인민정부[1] 베이핑시
학력 베이징대학 (역사학과 / 학사)
중국 사회과학원 (석사)
신체 182cm, 75kg
종교 무종교 (무신론)
소속 정당
(1980~2012)
(2012~)[2]
경력 다롄시
랴오닝성
중화인민공화국 상무부
충칭시 당위원회 서기
중국마오쩌둥주의공산당 당수[3]

1. 개요2. 일생
2.1. 문화대혁명2.2. 결혼이혼, 재혼2.3. 출세2.4. 충칭 시위원회 서기 / 상무부장2.5. 창홍타흑2.6. 왕리쥔 사건2.7. 몰락
3. 몰락의 원인
3.1. 보시라이의 권력남용3.2. 구카이라이의 살인 및 도덕적 타락3.3. 결과
4. 장웨이제 실종 사건 연루설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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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정치인이자 前 다롄 시장, 前 충칭시위원회 서기.

2000년대 중국공산당에서 가장 핵심적인 유력 인사 중 하나로 꼽혔으며, 엄청난 정치적 권력과 뒷배로 인하여 가장 강력한 주석 후보로 늘 꼽혔던 인물이다. 그러나, 본인의 실책과 범죄로 인하여 한순간에 범죄자로 전락하고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중국공산당 내의 여러 모순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으며, 시진핑 1인 체제로의 변화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혁명원로의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 파벌의 일원으로, 그의 아버지는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4] 상무부주임과 국무원 부총리, 재정부장을 역임한 보이보(薄一波 박일파, 1908~2007)다. 보이보는 이른바 8대 원로[5][6] 중 한 사람이라 보시라이는 태자당 중에서도 성골 중의 성골이었다.[7] 거기에 182cm인 장신의 훈남. 머리도 좋아서[8] 베이징대학 역사학 학사와 중국사회과학원 석사 학위를 따서 학벌까지 갖췄다. 언변도 굉장히 탁월해서 인터뷰, 연설을 했다하면 허구한 날 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실제로 기자들이 가장 많이 달려들었던 정치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공산당의 엄친아였다. 행정 능력도 뛰어나서 빈부격차 해소와 복지정책 확충이라는 괜찮은 비전도 제시했다. 그 일환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고 이를 TV를 포함한 각종 매체에 열심히 내보내어 시민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거기에 옛 공산당의 사상을 전파하는 정치활동으로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주는 정치인이 되어 유력한 차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본인의 엽색 행각, 아내의 살인 은폐 시도, 당시 주석이었던 후진타오를 도청하려 했다는 의혹 등 엄청난 사건들이 연이어 공개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무리수를 두다가 그대로 몰락하였다.

2. 일생

2.1. 문화대혁명

한창 고급중학교에 다녔을 때 문화대혁명이 터졌는데, 마오의 직계세력을 제외한 혁명공신들이 대부분 반동으로 몰려 비판받았고, 그 자녀들은 모두 시골로 하방되어 삽질을 하게 되었다.[9] 하지만 보시라이는 영민하게도 직접 홍위병에 가담해 이 위기를 넘겼다. 이 당시에는 홍위병의 분파인 연동(連動)의 멤버였는데, 연동에서는 "뿌리가 붉으면 곧은 싹이 나온다", "아버지가 영웅이라면 아들은 호걸, 아버지가 반동이면 아들은 바보" 등의 혈통론을 선전했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가 반동으로 몰려 자신의 '반동혈통'으로 출세길이 막힐 뻔하자 홍위병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두들겨 패 갈비뼈 2개를 부러뜨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들겨맞으면서도 속으로는 '제대로 정치인의 자질이 있구나' 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10][11]
"강청이 나를 반동분자로 선포하자, 나의 아들인 어린 시라이까지도 나에게 철권을 날렸다. 나는 눈앞이 시커멓게 되면서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 독한 어린 아들은 다시 앞으로 나와서 발로 가슴을 몇 번 밟았다. 당시에 늑골 3개가 부러졌다. 이 육친불인, 손속이 독하고 마음이 악독하고 부친마저도 죽이려 할 정도인 것을 보면, 이 어린 아들은 우리 당의 미래 후계자로서 좋은 재목이다. 나중에 분명히 잘될 것이다."

결국 보시라이 역시 문혁의 가해자였으면서도, 다른 측면에서는 마오쩌둥과 같은 이들에게 놀아난 피해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훗날 다롄시와 충칭시에서 보여준 행정적 성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보시라이는 분명 공공선에 기여하는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재능의 싹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홍위병 시절 터득한 군중 동원 기술과 권위와 폭압을 동원한 권력 행사의 방식을, 모양새만 세련되게 다듬었을 뿐 고위 정치인이 된 뒤에도 그대로 구사하다 덜미가 잡힌 것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88px-Boyibo1946.jpg
38세의 보이보(1908-2007). 장수하여 아들 보시라이가 그 덕을 볼 수 있었다. 참고로 보시라이 본인도 아버지의 후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인데,[12] 밑에서 이 사람의 결혼 생활이 포함된 사건을 보면 이런 것도 유전인가 할 정도로 닮았다.

문혁 시절에는 교육기관도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보시라이는 이 시기에 대학도 안 가고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2.2. 결혼이혼, 재혼

이때 같은 혁명공신 리쉐펑의 딸 리단위와 중매로 결혼한다. 이후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보시라이는 뒤늦게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13] 이 결혼은 6년 만에 이혼으로 끝났는데, 이유는 보시라이가 대학을 다니면서 리단위의 오빠의 부인의 동생(그러니까 큰처남댁의 동생) 구카이라이(谷開來)와 눈이 맞았기 때문이었다.[14] 이때 이미 보시라이와 리단위는 아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이혼했다. 아들 왕즈는 다른 여자에게 간 아버지를 증오한 나머지 성을 어머니를 따라 리씨로 바꿨다고 한다.

2.3. 출세

보시라이는 태자당으로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구카이라이는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다. 보시라이를 출세길로 올린 것은 다롄 시장직이었다. 이때 보시라이는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많은 깡패들을 잡아 소탕했고, 반부패운동도 벌여 부패 공무원을 추방했다. 이에더해서 시의 미관에도 많은 힘을 기울여 다롄을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미항으로 변모시켰다. 시정을 잘 운영한 결과, 보시라이는 당시 다롄 시민들은 축구, 패션과 함께 다롄의 3가지 보물로 일컫여졌고, 퇴임할 때는 다롄 시민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았다. 이때 한국도 자주 방문하는 등, 지한파 중국 정치인으로 꼽혔다.

다롄 시장을 역임하면서 쌓은 공적으로 보시라이는 차세대 대권주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때 다롄 공안국장이었던 왕리쥔(王立軍)을 심복으로 두게 되는데, 왕리쥔은 지나치게 저돌적인 성격이었고, 그 덕분에 보시라이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무리수 때문에 많은 적을 두게 되었다. 이런 관계는 후에 악연으로 끝난다.

2.4. 충칭 시위원회 서기 / 상무부장

이후 랴오닝성 성장을 역임하면서 2002년 장관급 중앙위원 자리를 꿰찼으나, 아버지인 보이보가 노력했음에도 튀는 성격과 대놓고 금수저인 가족배경 때문에 많은 견제를 받아 성정부의 1인자인 성위서기에는 오르지 못하고[15] 2004년에는 중앙정부의 상무부장에 임명되어 2007년까지 중앙정부에서 일을 했다. 이 시기 중국은 고속성장을 거듭하여 일본독일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며 보시라이 역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으나, 중앙정부의 부장 자리는 이후 승진에 유리하지 않아[16] 다른 한 편으로 최고지도부를 향한 질주는 한 풀 꺾이게 된다.

이렇게 보시라이가 시진핑에게 밀린 데는 당내 역학구도도 영향을 미쳤는데, 보시라이의 아버지 보이보천윈의 친우로 당내 보수파의 대표격이었으며, 모든 공청단파의 뿌리나 다름없는 후야오방 축출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인물이다. 반대로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후야오방 축출 당시 원로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반대의사를 드러냈다. 이러니 같은 태자당이지만 보시라이는 공청단파에게는 반드시 막아야 하는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고, 시진핑은 상하이방뿐만 아니라 공청단파와도 무난한 관계였으니 공청단파가 목숨걸고 막을 이유는 없었다. 이러니 사실 둘 다 8대 원로라지만 실제 영향력은 보이보가 시중쉰보다 훨씬 컸음에도 후계구도 경쟁에서는 시진핑이 앞설 수 있던 것.

2006년 뭄바이에서 인도 총리 만모한 싱이 "미래는 아시아의 시대가 아닌 자유의 시대"라 중국을 에둘러 까자 다음날 "데모할 자유는 민주주의가 아니다"음?이라는 말로 인도를 공격하며 "민주주의 논쟁"을 일으켰다. 항목 참조. 또 같은 해 중국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중국 제품과 식품은 안전하다"라는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기도 했다.

이후 충칭 시위원회 서기[17]로 승진하며 당의 핵심 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에 진입한다. 다만 충칭시 서기는 정치국원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지는 자리로, 이 때부터 보시라이는 정치국 상무위원 입성을 위해 당중앙과 대립하며 점점 더 심한 무리수를 두게 된다. 이와 함께 로펌을 설립한 부인도 남편이 공산당의 고관이라는 배경에 힘입어 사업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외동아들인 보과과를 12세부터 영국의 해로 스쿨(Harrow School)[18]유학 보냈다.

이때 보시라이는 충칭이 소득재분배 정책 시범 추진지역으로 선정되면서 임대아파트 보급 등 복지제도의 대대적인 도입 및 인프라 건설사업을 주도하게 되었고, 이러한 정책이 큰 성과를 거두면서 충칭시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런 정책들은 충칭 모델로 불리며 대외적인 주목까지 함께 받게 된다. 그 이전까지 마오주의 노선과는 철저하게 거리가 멀었던[19] 보시라이는 당 중앙상무위원회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정책에 좌파적인 색채를 씌우기 시작했다.

2.5. 창홍타흑

보시라이는 차기 대권주자로써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휘해서 창홍타흑(唱紅打黑)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중국의 개방화와 함께 무너져가고 있던 공산당 문화의 부흥을 외쳤다. 이에 앞장선 것이 몽골계 심복 왕리쥔이었다.

'타흑'이란 부패한 자를 몰아낸다는 뜻으로 1500명이나 되는 부패·폭력 범죄자를 체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탈법이나 편법이 판쳤다는 잡음이 심하게 일었다. 가령 재력가를 고문하여 재산을 상납하게 하고 중죄인으로 처리해버리는 식으로 축재를 했다고 전해진다. 전임자의 측근도 비슷하게 처리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당시 최고의 부패경찰으로 악명높았던 충칭시의 사법 국장인 원창(文强)을 본격적으로 탈탈 털면서 부정축재, 성폭행 혐의를 캤는데 이때 연못 밑에 방수처리를 하고 그 밑에 돈을 깔아놓는 수법을 쓴 원창을 까발리는 것을 전국적으로 방영하며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환호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원창을 공개재판 1심 사형, 2심 사형으로 바로 처형해버리면서 이 인기에 불을 붙였다.

이런 행동으로 전임 충칭시 서기, 당시 광둥성 서기였던 왕양, 왕양의 전임이었던 당시 중앙기율위 서기 허궈창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어버렸다. 누가 봐도 원창을 중용했던 자신들을 겨냥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왕양은 충칭 모델과 대비되는 광둥 모델로 주목받으며 공청단파에서 차기 상무위원으로 밀고 있던 유망주였기 때문에 이는 단순히 개인간의 대립을 넘어 계파간의 사생결전이 되어버린다. 보시라이는 상무위 진입을 놓고 왕양과 직접 경쟁하는 처지였던지라 승부수를 띄웠던 것.

'창홍'은 이른바 唱红歌, 读经典, 讲故事, 传箴言라고, 옛 경전을 읽히고 공산당 문화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으로, 공산당의 선전가를 부르는 운동이 일어난 것은 물론 문자 메시지며 마이크로 블로그 등을 통해 옛 경전의 글귀나 명언 등이 널리 퍼졌다. 공산당 선전과 관련된 문구가 있었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인 광고가 충칭 지역 방송에서 금지되었는데,[20] 이에 대한 일화가 있다. 2011년부터 지역 방송국에서 광고를 빼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과 관련된 프로를 틀도록 지시했는데, 관계자들이 '광고가 다 팔렸다'라며 반발했지만 보시라이는 이를 무릅쓰고 밀어붙였다고 한다.(홍콩 SCMP)

또 보시라이는 사회주의적 가치인 분배를 강조하는 발언을 여러차례 해서 가난한 중국 서민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이를 위해서 저가 임대주택을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이것을 '충칭 모델' 나아가 '차이나 컨센서스'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포퓰리즘"적인 정책, 즉 민중의 인기를 얻고 공산당의 지도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로 보여져 정적들의 경계를 샀다.

그가 정치적 스승 저우융캉의 뒤를 이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인 정치법률위원회 서기를 노린다는 소문이 많았다.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은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과 5부 요인(국회의장, 국무총리, 대법원장, 헌재소장, 선관위원장)급이고, 정치법률위 서기는 대법원, 법무부, 검찰, 국가정보원, 무장경찰을 지휘하는 당서열 9위의 자리다. 민주국가의 대법원장,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국가정보원장, 경찰청 정보국장, 내무부 무장보안군 사령관을 지휘하는 말 그대로 국가정보와 법률에 대한 최고의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였고 이에 쿠데타의 위협을 느낀 중국공산당은 정치법률위원회 서기를 정치국원으로 낮추어 상임위원회의 지휘통제를 받도록 제도를 수정했다.

2.6. 왕리쥔 사건

그런데 갑자기 2012년 3월 초, 보시라이는 그동안 타흑창홍을 지휘하던 측근인 왕리쥔을 공안부장에서 해임하고 문화담당 부시장으로 발령냈다. 이는 표면상 승진이었으나 실제로는 실권 없는 자리로의 좌천이었다. 왕리쥔 본인이 보시라이가 정적들에게 부패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시켜 버리는 것을 지휘한 당사자였으니, 한번 좌천된 이후에 그가 입막음용으로 암살당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좌천 직후 왕리쥔은 청두미국 영사관을 통해 망명을 시도한다.

이 사건의 원인을 두고 말이 많은데, 일단 중앙정부에서 보시라이에 의심을 품고 조사하기 시작하자 보시라이는 이를 왕리쥔에게 떠넘기려고 했고, 이를 위해 좌천시켰다가 이에 불안을 느낀 왕리쥔이 망명을 시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별개로 왕리쥔은 중국의 기밀 정보를 대량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의혹이 있었으며, 보시라이가 자신을 버리려 한 것에 분통을 터트려 망명하려 했다는 의혹도 널리 퍼졌다.

백악관의 지시로 왕리쥔의 망명은 거부되었고[21] 보시라이는 왕리쥔의 신변을 확보하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치부가 낱낱이 밝혀져서 목숨이 달아날 판이었다. 얼마나 급했던지 보시라이는 자신의 관할 지역을 넘는 것은 물론 외교적 무례와 뒷일조차 신경쓰지 않고 충칭 공안차량 70대를 보내 청두 미국 영사관을 포위해버렸다.

문명국 간 외교에서 있을 수 없는 엄청난 결례에 당연히 워싱턴은 미쳤냐며 격노했고[22], 놀란 중앙당에서도 급히 쓰촨성 공안병력을 출동시켜서 충칭시의 공안병력과 대치시키게 된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결국 보시라이의 충칭 공안병력들은 철수했고, 왕리쥔은 국가안전부[23]에 연행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된 후에 보시라이의 치부를 까발리기 시작했다.[24]

그러자 보시라이는 한술 더 떠 아버지 보이보가 창설했던 윈난성의 14집단군을 방문했다. 중앙군사위 소속도 아닌 일개 지방 당서기 따위가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대놓고 군부대를 방문하는 짓을 벌였으니 이는 여차하면 아버지 때부터 보씨 가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군대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언론 보도에 의하면 실제로 군을 움직이려고 시도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전에 보시라이의 동선을 입수하고 한 발 빠르게 움직여 군부의 충성을 재확인한 후진타오원자바오의 대처로 보시라이의 계획은 좌절되었고 이 시점에서 보시라이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7. 몰락

보시라이는 자신이 부패 혐의의 조사 대상이라는 의혹을 부정했다. 하지만 결국 3월 8일, 원자바오 총리가 직접 담화에서 보시라이의 이름을 거론하며 실명 비판했다, 게다가 "문화대혁명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라는 발언을 함으로써 보시라이는 치명타를 입었다.

중국 정계에서 문화대혁명은 하나의 금기인데, 비록 현재 주류 세력인 덩샤오핑 계열이 反문혁을 모토로 하고 있기는 하나 문혁을 지나치게 까고 부정하기만 하면 기존의 극좌 세력들이 반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문혁을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라고 규정하여 그의 과오 중 하나에 포함시키긴 했지만 그 이상의 과격한 평가나 파고들기는 하지 않은 채 적당히 거리를 둔 것이다.

헌데 원자바오의 발언은 보시라이의 창홍타흑이 곧 "인민을 선동하여 중국 공산당의 체계를 망가뜨리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행위라고 매우 극단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중국 정치권이 문혁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게 문혁을 좋게 평가해서가 아니라 까고 싶지만 까기에는 부담이 너무 커서일 뿐임을 고려한다면 답이 나오는 문제로, 보시라이는 촉망받던 차세대 대권주자에서 문혁급의 대형 사고를 친 범죄자로 찍혀 거의 모든 직책과 권력을 잃고 몰락하게 되었다.

3. 몰락의 원인

외부의 관측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의 지도부가 대중운동으로 권력을 강화하려 하는 보시라이의 행태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몰락의 원인이라고 한다. 보시라이의 정변시도 당시 후계자였던 시진핑이 최고지도자로 등극하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몸을 낮추던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행실을 보였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 푸젠이나 저장에서 특별한 일을 꾸미지 않고 당중앙의 방침에 복종했던[25] 시진핑과는 달리, 다롄과 충칭을 거치며 자신의 업적을 화려하게 포장하고 홍보했던 재기발랄한 스타일의 보시라이는 이미 왕리쥔 망명시도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있었다.

사실 공산당 고위간부들 중에서는 공식석상에서 당중앙의 방침을 전달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 없는 덕담만 하는지라 좋게 말하면 매우 조심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한 사람들이 많다. 정치적 갈등이 있어 의사표현을 할 때도 여러 층의 은유를 쌓아두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 책잡힐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이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후진타오리커창 같은 공청단파 지도자들의 경우 공산당이 제공하는 공식 설정프로필 외에는 가족이나 개인적 면모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시진핑의 딸 시밍쩌도 보과과처럼 하버드 유학을 다녀오기는 했지만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게 없다시피 하다. 이는 중국 지도자들은 인민의 직접적 투표 대신, 각 계파의 타협을 통해 선출되기 때문에 소수의 우군을 만드는 것보다는 조심스럽게 처신해 반대파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출세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시라이는 대놓고 외신기자들을 가까이하면서 특유의 직설적 언어로 떡밥을 열심히 던져주는 정치인이었고, 아내와 아들도 부와 권력을 과시해, 미국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셀러브리티 노릇을 하며 전형적인 서구 정치인 일가처럼 행동했으니 보수적인 원로들에게 보시라이는 당 말아먹을 놈으로 보일 수밖에 없던 것.

거기 더해 시진핑은 팔대원로의 자손임에도 이를 내세우는 대신 겸손한 자세로 그가 모셨던 샹난, 자칭린, 쑹더푸 등의 선임 성 간부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이들은 시진핑과 배경도 정치적 입장도 달랐음에도 출세하는 과정에서 어김없이 도움을 주었다.[26] 그런데 보시라이는 막강한 아버지를 믿고 다롄시장 시절에는 차오보춘 시위서기와, 랴오닝 성장 시절에는 원스전 성위서기와, 상무부장 시절에는 부총리 우이와 싸우기에 바빴고(...) 당연히 이들은 중요한 순간마다 보시라이만큼은 안 된다며 그의 출세길을 막아섰다. 같이 중앙후보위원 직에 도전했던 1997년 15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원로들이 중앙후보위원 수를 151명으로 늘려 없던 자리까지 만들면서 승진시켜줬지만 보시라이는 반대표가 쏟아져 하위 5% 안에 들며 탈락했으니 사실 높은 자리에 오르기에는 인망이 너무 떨어지는 인물이었던 것. 게다가 보시라이는 앞에서는 反부패를 부르짖으면서도 뒤로는 엄청난 재산을 빼돌리고 100명이 넘는 정부()를 두는 등의 엽색행각을 벌였음이 들통나서 더욱 위기로 몰렸다. 빼돌린 재산으로 볼 때는 사형[27]에 해당하여 보시라이는 차세대 권력 바로 앞에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다.

거기다가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의 아들인 보과과는 영국 명문 해로우 스쿨을 거쳐 옥스퍼드 대학교, 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했는데, 파티나 여자에 탐닉하는 등의 행각을 벌여 안그래도 위태로운 아버지의 위신을 더욱 땅에 떨어뜨렸다. 후에 하버드 교지인 더 크림슨에 "남들이 내가 돈이나 배경으로 여기 입학했다고 하는데, 나는 공부 잘했음"이라는 글을 기고하는 드립을 치기도 했으나...옥스퍼드 시절 보과과는 정학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하버드 진학을 꿈꾸던 보과과가 담당 교수에게 추천서를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버드에 합격을 하였다. 분명 고등학교 시절 A-Level에서 올A를 받은 수재임은 분명하나, 이후 대학 생활에서 삐뚤어진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 붙은 건 여러모로 다른 요인이 보과과의 하버드 합격에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 된다.[28] 보과과는 2019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전해졌다.케네디스쿨보다 더 좋은 학교 같은데

2012년 4월 결국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이후로 별다른 변동이 없던 중국 정치계에서 불어닥친 폭풍이었다. 이젠 같은 태자당으로 꼽히던 시진핑마저도 보시라이를 보호하지 않고 쳐내게 되었다. 다만 시진핑과 보시라이는 태자당 내에서는 정적 같은 관계로 평가되기도 한다.

3.1. 보시라이의 권력남용

보시라이가 사설 도청조직을 운용하여 주석인 후진타오를 도청(!)하려고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국으로 치면 일개 도지사가 대통령을 도청하려고 한 셈이니 당의 고위층들도 넘어갈 수가 없다.

3.2. 구카이라이의 살인 및 도덕적 타락

또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谷开来)가 체포되었다. 구카이라이는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청산가리독살하고, 보시라이는 그것의 은폐를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닐 헤이우드는 보시라이 부부와 가까운 사업가였으나 최근 이권으로 다투고 있었다.##

보도에 의하면 충칭의 한 호텔에서 구카이라이의 부하들이 헤이우드에게 강제로 청산가리를 먹였다고 한다. 헤이우드를 죽인 이유는 보시라이 일가의 재산을 빼돌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던 헤이우드를 중앙정부가 조사하면 자신들의 치부가 모두 나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시라이가 지배하는 충칭의 공안국은 헤이우드의 시신을 검시도 하지 않고 자살로 결론을 내서 서둘러 화장했다고 한다. 헤이우드는 전직 MI-6 요원이었으며, 이 때문에 영국 정부에서는 헤이우드의 죽음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도록 중국 정부에 요청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사건을 조사하다가 보시라이의 비리 혐의가 포착되어 일련의 사건이 벌여졌다고 한다.

게다가 헤이우드와 구카이라이가 불륜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보과과가 영국에 유학 갔을 무렵 아이를 뒷바라지한다고 영국을 장기방문해서 헤이우드와 호텔에서 동거했다고 한다. 남편은 100여 명이 넘는 정부를 두고, 아내도 맞바람에 엄청난 부패혐의까지, 참으로 막장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도 국회의원이나 장관급 정치인이 이런 의혹의 1/10 정도 일어나면 정치생명이 끝장인데, 보시라이는 겁도 없이 장관보다 높은 부총리급에, 차기 주석 후보로 간주되던 핵심 정치인이었음에도 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셈이다. 중국에 부패가 만연하고 고위직 공무원이 서슴없이 짓는 죄가 많다지만, 이 정도 수준은 들통난 이상 어쩔 방도가 없다.

3.3. 결과

2012년 8월 구카이라이는 사형에 2년 집행유예형[29]이 확정되었다. 이 형량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많았다. 살인범은 사형에 처하는 게 원칙인 중국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면하려면 정말 누가 봐도 우발적인 살인이거나 정상참작의 여지가 극히 커야 하는데 구카이라이는 거꾸로 명백한 계획살인에다가 선처의 여지도 없었는데 사형을 면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치적인 배려가 들어간 것이다.

구카이라이 재판이 일단락 된 이후 보시라이에 대한 재판도 열렸는데, 부부가 법정에서 자신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서로 불리한 증언을 하는 추태를 보였다고 한다. 특히 보시라이는 구카이라이가 문제가 된 왕리쥔과도 내연관계였다고 폭로하고, 구카이라이는 보시라이의 부패행위를 증언하는 등 법정에서 콩가루 부부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다만 아래에서 언급되는 장웨이제 사건에 대해서는 나란히 입을 다물었고 별도의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 사건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2013년 9월 결국 보시라이는 부패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이후 항소도 기각되어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물론 부정 축재로 모은 재산도 모두 몰수.[30] 보시라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보시라이는 시진핑과 리커창에 버금가는 위치였으나, 이제는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다만 앞으로 수감 생활을 할 고위층 전용 감옥은 호텔 못지 않은 시설을 갖추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듯. 그의 형량은 이후 고위급 인물의 정치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의 상한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저우융캉도 역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그 와중에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 둘째아들 보과과 대신, 전처 리단위의 아들로 연을 끊고 살았던 장남 리왕즈가 보시라이의 재판을 돕고 옥바라지에 나서며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구카이라이와의 결혼생활이 파탄난 것도 관계 회복에 영향을 줬을 듯.[31] 권력에서 밀려나고 다시 찾은 가족

한편 보시라이 몰락의 계기가 된 왕리쥔은 15년형을 받았다.

놀랍게도 2017년 6월 28일 간암으로 가석방됐다. 다만 류샤오보처럼 간암 말기[32]에 석방된 것이 아니라 초기에 석방되었고, 장쩌민과 후진타오 등 최고위 지도자들이 머물렀던 휴양처에서 최고 수준의 의료진들에게 극진한 간호를 받고 있다고 한다. 다만 치료가 되면 감옥으로 다시 복귀할 예정이다.시진핑: 살려 드릴게 한편 구카이라이는 감옥에서 수형생활에 별 문제가 없었는지 2014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지금도 복역중인데, 보시라이와 달리 별다른 질병이 없는 것인지 계속 감옥에서 지내고 있다.[33]

여러모로 중국과 중국공산당 정치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 대외정책이 조금씩 강경해지는 것에 대한 우려는 있었지만, 당시 중국공산당의 대외 이미지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등 전문가 지도부가 국익만을 잣대로 치열한 토론을 거쳐 결정을 내린 뒤에는 깔끔하게 승복하는 문화를, 이전투구를 일삼는 우리 정치권은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보수매체에 종종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나 타협을 통해 원활하게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던 집단지도체제는 사실 공청단과 태자당, 상하이방 사이의 계파간 균형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었기 때문[34]에 가능했고, 실제 속은 곪아터지기 직전이었다는 것이 보시라이 사건을 통해 외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보시라이와 같은 지방 간부가 죄없는 사람들을 수없이 사법살인하고 거액의 재산을 탈취하는데도 중앙에서는 손쓸 도리가 없었고, 명목상 총서기이자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던 후진타오는 군부조차 온전히 장악하지 못해 정변 시도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게 백일하에 드러난 것. 거기다 상하이방은 반역죄를 저지른 게 분명했던 보시라이의 직을 거두는 것까지는 합의했어도 그 이상의 처벌은 거부하면서, 시진핑이 한동안 사라지고 당대회가 기약없이 연기되는 등 정국은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아무리 이견이 커도 공식석상에서만큼은 일치단결을 과시하던 당의 평소 연출의 허구성을 중국공산당에 가장 우호적인 관찰자조차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4. 장웨이제 실종 사건 연루설

보시라이는 1990년대 후반에 중국 다롄[35] 방송국의 인기 아나운서였던 장웨이제[36]와 불륜관계를 맺었다. 그러다가 장웨이제는 1998~2004년 사이에 보시라이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남편의 불륜을 참지 못한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37]가 장웨이제를 다롄 방송국에서 퇴출시킨 이후로 실종된 후 행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중국 웹사이트에서 장웨이제 행방에 대해 여러 루머가 있는데 그중 인체의 신비전에 나온 임산부 시신 중 하나가 장웨이제와 비슷해 보인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인체의 신비전에 시신을 공급하던 다롄시 인체 표본 공장의 총 책임자가 구카이라이였다. 또 장웨이제는 임신 8개월 때 실종되었는데 표본의 태아 역시 8개월 정도 추정된다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기에 음모론은 증폭됐다. 만약 군터 폰 하겐스가 시신의 출처를 정확히 공개했거나 기증한 사람의 신상을 밝히기 싫었다 해도 최소 중국인이 아니라는 것만 증명해줬어도 음모론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이 맞지만 정확하게 밝힐 순 없다고 하는 바람에 음모론을 증폭시켰다. 대개 사형수 시신을 공급받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중국에선 임산부는 사형이 금지이며, 더군다나 출산이 임박한 만삭의 임산부를 사형할 리는 없을 것이다.[38] 또 비극적인 임신 8개월 산모의 시신을 돈받고 프릭쇼에 팔아넘기는 유족도 쉬이 생각하기 어렵다.

인체 표본 공장의 총 책임자인 구카이라이가 남편의 내연녀인 장웨이제에게 증오를 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고 이미 방송국에서도 퇴출시켜 버렸다. 더군다나 구카이라이가 평범한 행보를 보였다면 설마 죽이기까지야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시신 공장 책임자라는 다소 섬뜩한 직함에 더해 자신의 내연남조차 이용가치가 떨어지니 가차없이 죽였던 구카이라이였기에 장웨이제를 죽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아예 시신을 표본으로 만들어 복수할 수 있지 않았겠냐는 추측이 나왔다. 더군다나 군터 폰 하겐스는 시신을 지인에게 받았다고 밝혔는데, 중국인 임산부 시신을 넘길 정도의 중국인 지인이라면 시신 공장 책임자인 구카이라이가 유력하다 보니 음모론에 불을 지폈다. 가히 현대판 '여태후의 인간돼지 사건'과 비견될 정도의 음모론이다.

오비이락을 감안해도 중국인 임신 8개월 임산부가 실종된 후 중국인 임신 8개월 시신이 모형으로 전시되었고 그 실종 임산부가 시신 공장의 총 책임자와 원한 관계였다면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 있다. 구카이라이의 인성 자체도 내연남을 태연히 살해할 정도로 사이코패스적인 면모도 있으니 설령 장웨이제가 운좋게 '현대판 척부인'은 면하여 인체의 신비전에 직행하진 않았어도 최소한 실종에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4년 7월 20일 방영분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라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2021년 4월 29일 방영분에서도 해당 사건을 다루었다.#


다만 해당 전시회에 나온 임산부 시신이 장웨이제의 것이라는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 군터 폰 하겐스의 진술은 그냥 기증한 사람의 신상을 밝히기 싫어서 한 말일 수도 있다. 즉 장웨이제가 아니라 해도 굳이 주목받기 위해 그 사실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관련자들의 여러 증언은 있어도 물증이 전혀 드러난 게 없는 상황이라 이 사건으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단 여기까지 살해 혐의가 인정됐다면 거의 무조건 사형이었다. 중국에서 내려지는 처벌이 우발적 살해나 계획살해라도 정상참작 여지가 있으면 사형집행유예로 내리는 식으로 이전보다 좀 관대해진 건 사실이나 그래도 미국, 일본 등에서도 사형이 원칙인 2인 이상 살해나 유괴살해 같은 범행은 예외다.

이외에도 다양한 루머가 존재하는데, 중국 사이트에서는 장웨이제가 보시라이로 부터 일정 금액의 돈을 받는 대신에, 보시라이의 딸을 낳고 해외로 잠적해버렸다는 루머도 있다. 그리고, 그녀의 실종 이후 그녀의 부모님과 친구들도 그녀의 실종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했지만, 보시라이의 정치압력에 눌려 오히려 자신들이 위험해질 것 같다고 인터뷰에서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루머이며 중국사이트에서는 그녀가 결국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딸을 낳고, 이름도 개명하는 동시에 해외로 잠적해버렸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보시라이가 몰락한 뒤에도 딱히 드러나지 않는 걸 보면 생존 중이라 해도 내부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치부에 얽혀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 치부를 숨기려는 높으신 분들에게 바로 살해당할 처지에 놓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실 가장 확실한 것은 시신의 유전자 검사를 해보는 것이지만 해당 시신이 장웨이제라고 의심되는 정황만 있을 뿐, 증거는 없는지라 시신에서 DNA를 채취하기는 힘든 듯하다.

5. 여담

6. 관련 문서



[1] 华北人民政府[2] 2012년 9월 28일 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의해 당적 박탈[3] 본인 부정[4]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는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 8인(덩샤오핑, 천윈, 보이보, 양상쿤 등)의 모임이다. 보이보가 원로로서 활약하던 시기에는 법치보다 '인치(人治)', 즉 권력자의 권위가 법과 제도보다 현실 정치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강한 정치가 행해지는 시기였다. 일종의 중국식 원로원상황 정치를 8인 원로가 합의하여 구성한 것이며 마오쩌둥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8인 원로들의 발언들 하나하나에 실린 힘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이들의 의견을 처리하는 실무진 급으로 조종하는 역할을 했다. 이 특수기구는 중국공산당 중앙지도층의 신구교체를 처리하고, 젊은 관리들을 뽑아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 진입시켜 실무를 보게하는 역할을 부여했다(즉 정식적인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은 따로있지만 주임을 맡던 덩샤오핑이나 천윈이 뒤에서 그 역할을 하고 당을 총관리하는 총서기후야오방 같이 따로 있지만 실제적 역할은 중앙고문위원회 실무책임인 위원회 상무부주임 보이보가 이 역할을 한 것).[5] 80~90년대 중국 공산당을 이끈 8명의 원로를 말하며 前 최고영도자 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 덩샤오핑, 前 국가주석 양상쿤, 前 중앙고문위원회 주임 천윈, 저우언라이의 아내이며 혁명의 여성 원로인 덩잉차오 등이 포함된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니 보이보의 위상을 알 수 있다.[6] 8대 원로는 사람에 따라 조금식 다르게 말해지기도 하는데, 보이보는 덩샤오핑, 천윈 등과 함께 어떻게 따져도 8대 원로에 반드시 포함되는 거물이었다. 덩샤오핑과 천윈 등 원로들이 당 운영을 좌우하기 위해 설치한 중앙고문위원회 실무를 관장하는 상무부주임에 10년간 재직하면서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당대 대표적인 개혁파였던 후야오방의 해임에 앞장선 인물이라 중국 민주파 인사들에게는 욕을 바가지로 먹는 인물.[7] 태자당과 대비되는 파벌로 공청단, 상하이방파가 있으며, 前 주석이었던 후진타오장쩌민은 각각 공청단, 상하이방이다. 후계 주석으로 낙점된 시진핑은 태자당에 속한다. 하지만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한 인물이 양쪽에 걸쳐 있기도 하다. 위의 구분과는 별도로 공산당 지도급 인사들 상호 간의 관계는 천차만별이라서 체계를 갖춘 정파보다는 인맥에 바탕한 느슨한 연대 정도로 보는 게 좋다.[8] 문화대혁명 때문에 제대로 된 대입시험은 1976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1977년에 대입시험이 부활했을 때 이걸 패스한 최초의 엘리트 학번이다.[9] 나중에 대권을 잡는 시진핑도 이 당시 시골로 끌려가 삽질을 했고, 이 당시 계속 입당신청서를 냈지만 반동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번번히 당에서 거부했다.[10] 차라리 두려움에 제 한 몸 살고자 연극으로서, 생존 수단으로 그랬다면 정당화라도 되련만, 이 시기 홍위병 엘리트들은 그래도 이런 미친 짓거리를 막으려고 시도를 할 정도의 양심과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이런 패륜 직후에 앞장서서 다른 '반동' 출신 홍위병들을 공격했다.[11] 그러나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히면 가족들도 무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일부러 다른 가족을 보호하려고 오버했다는 말도 있다. 예를 들어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은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에게 박해를 견디다 못해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홍위병들이 건물 밖으로 내던졌다는 설도 있다.) 평생 불구자로 지낸 것을 봐도, 차라리 홍위병에 가담해서 아버지를 팬 게 오히려 보신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12] 보이보의 비서와 간통으로 얻은 아들이다. 보이보는 멀쩡한 전처와 이혼하고 바로 비서와 결혼했다.[13] 문화대혁명 당시 대학은 문을 닫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나고서야 제대로 입학생을 모집한다.[14] 리단위와 그의 아들 입장에서는 새언니의 동생 때문에 남편과 이혼한 것이고, 외숙모의 동생이 계모가 된 것이다.[15] 이 자리에는 리커창이 부임해오면서 랴오닝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5년 뒤에는 상무부총리를 맡으며 정치국 상무위원회까지 진출한다. 어찌보면 보시라이와 리커창의 운명을 가른 분기점이었던 셈.[16] 윗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지방정부의 책임자가 유리하다. 같은 시기 시진핑은 저장성 서기, 리커창은 랴오닝성 서기를 맡으면서 보시라이를 따돌리게 된다.[17] 중국은 시나 성의 당서기가 실질적으로 시•도지사고, 성장이나 부성장은 서기를 보좌하는 정무부시장이나 행정부시장•부지사 역할을 한다. 중앙정부의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의 관계와 유사하다. 중국의 국립대학도 총장이 있지만 그 위에 대학 당위원회 서기가 있어 이사장 노릇을 한다. 광둥성의 당서기와 베이징 톈진 상하이 충칭의 4개 직할시의 당서기, 그리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당서기는 부총리급, 당서기를 보좌하는 성장 혹은 시장은 장관급이고, 나머지 성의 성위서기와 성장은 장관급이다.[18] 이튼, 윈체스터와 함께 영국의 상류사회 자제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친교를 쌓는 최고 명문 사립기숙학교다.[19] 젊었을 때 홍위병 활동을 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젊었을 때 홍위병 활동을 한 사람은 많기 때문에 보시라이가 마냥 특별한 인물은 아니었다.[20] 그러나 전국 단위 국영방송이나 타 지역 위성 방송에서 틀어주는 광고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21] 실제로 저런 상태에서 외국 현지공관에서의 현지인의 망명은 거의 불가능하다. 외교 관례상 허용되는 일이 아니다. 예외적으로 1989년 천안문 6.4 항쟁때 미국 대사관으로 도피한 이들은 미국과의 교섭 끝에 국외 추방 형식으로 망명이 허가되었다. 이 때는 인권 문제 때문에 부각될수록 중국이 불리해서 그렇게 해결될 수 있었다는 견해가 많다. 왕리쥔의 경우 중국의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자국 내에서 범법 의혹을 받고 있는 고위공직자였으므로 해당 망명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셈. 물론 사법 분야의 고위공직자였던 왕리쥔이 그런 국제관례를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고, 후의 상황을 종합하면 일단 살고 보자는 마음에 그나마 보시라이의 영향력이 적은 곳으로 택했을 것으로 보이며 망명이 받아들여지면 최선이겠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안전한 미국 영사관에 머무르며 보시라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이 컸을 것이다.[22]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조차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그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격노함과 동시에 사건 주동자들이 싹다 물갈이 됐을 정도로 엄중하게 취급되었을 정도인데 외교청사를 포위하는 짓은 있을 수 없는 극악무도한 일이다. 왕리쥔 사건의 수습을 위해 당시 부주석이었던 시진핑이 1주일 뒤 미국을 직접 방문해 미 고위층에 해명해야 했을 정도이다.[23] 한국의 국정원 같은 기관이다.[24] 이때 국가안전부가 청두 미 영사관에서 직접 왕리쥔의 신병을 인계받아 보시라이가 손쓸 수 있는 여지를 차단했다. 결국 보시라이가 숙청당하면서 왕리쥔도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어쨌든 목숨만은 건지는 데 성공한 것. 보시라이 손에 들어갔으면 원창이 당했던 것처럼 바로 형장의 이슬행이었을 테니 왕리쥔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25] 물론 지방관의 성과를 중시하는 공산당 특성상 담당했던 지방의 경제성장률이 특별히 높지 않아 악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안정감 때문에 상하이 서기 천량위가 비리로 낙마했을 때 대체자로 선택받아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26] 이렇게 중국 정치에서는 서로 다른 계파에 속하는 인사들도 짝을 이뤄 같이 일하는 처지다보니 개인적 관계도 상당히 중요한 편이다. 그러다보니 의외로 반대 계파에 속하는 사람들끼리도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태자당이나 공청단 같은 분류는 참고용으로만 보는 게 좋다. 100% 순혈 상하이방임에도 시진핑이 전임 서기 천량위 숙청 이후 상하이로 급작스럽게 부임해왔을 때 시장 자리에서 시진핑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장쩌민계가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이 관계를 바탕으로 상무위원까지 승진한 한정이 좋은 예.[27] 중국에서는 부패 정도가 일정 액수를 넘으면 사형선고를 한다.[28] 사실 하버드 대학교를 포함한 많은 영미권 대학 같은 경우 세계 각국의 명문가 자제들은 물론 졸업생의 직계가족 등에게는 입학할 때 가산점을 부여하여 일반인에 비해 입학이 매우 쉬운 편으로 학교에서 의도적으로 학교 명예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 넣어주는 경우가 많다.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미국의 대학 입시가 꼭 한국보다 더 공정한 건 아니다. 아들 부시예일 대학교를 학점 2.3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에 입학했다.[29] 즉 수감 중 별다른 사고를 안치면 자동적으로 2년 후 무기나 장기징역으로 감형하는 것.[30] 단 아들이 여전히 이전 같은 생활을 하면서 유학까지 다니는 걸 보면 그러고도 남은 재산이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31] 생부에게 도리를 다하는 것과 별개의 실리적 차원에서도 리왕즈에게 손해될 일이 없는 게, 보시라이의 악명과는 별개로 중국 사회에서 보이보의 손자라는 후광은 여전히 엄청나기 때문이다. 리왕즈가 보시라이를 뒷바라지한다고 해서 아버지의 죄에 연좌될 위험도 크지 않았던 게, 구카이라이가 전부인과 그 자녀들을 보시라이 주변에서 철저히 배제한 것은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다.[32] 류샤오보는 사실상 죄수들을 진료하는 의사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확신을 해서 풀어준 것이고 실제로 출소 후 금방 사망했다. 애초에 류샤오보는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지도자로서 탄압받다 죽은 것이고, 보시라이는 단순 권력형 비리범죄라서 서로 클라스가 다른 사람이다.[33] 다만 중국은 다른 국가라면 가석방없는 종신형 내릴 범죄는 그냥 사형시키고 대신 무기징역이라도 20~25년 복역하면 어지간해서는 다 가석방해준다. 이런 점은 사형제도가 가석방없는 종신형으로 바뀐 것만 제외하고 다른 구공산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34] 예를 들어 왕리쥔 망명 사건 전까지, 공청단파의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리커창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의 상무위원은 충칭을 방문해 보시라이를 격려하고 충칭 모델을 적어도 대외적으로는(허궈창처럼 개인적으로는 보시라이와 크게 척을 진 상황일지라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반수의 상무위원을 우군으로 확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시라이가 후진타오나 원자바오와 대립할 수 있던 것이다. 그런데 망명 사건 이후 정국이 불안정해진 상황에서 권력을 안정적으로 승계받기 위해 태자당의 시진핑과 허궈창이 공청단파의 상무위원 3명과 협력하기로 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단 내 분위기가 보시라이 처벌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진핑의 3연임 이전까지는 계파간 견제가 어느 정도 작동하여 어느 한 파벌이 일방적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내 균형이 유지될 수 있던 것이다.[35] 보시라이는 1993-2000년 다롄 시장이었다.[36] 張偉傑. 칭화대학 항공우주학과 졸업. 중국 뉴스기사에 1993년도 대학졸업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65~1970년생으로 추정.[37] 보시라이의 아내. 1958년 출생. 보시라이 사이에 슬하 1남[38] 애초에 전근대에도 사형수가 임신 중이면 최소한 출산을 한 뒤에 형을 집행하는 게 기본이었다.[39] "김용옥은 대만에서 공부한 대만파인데 중국 본토 정치를 어찌저리 잘 아는 건지 모르겠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는데, 김용옥은 2010년부터 중국 대학에 자주 특강을 나가고 있다. 대만의 국어와 대륙의 보통화는 본질상 같기 때문에 중국어로 문제없이 강연한다. 당연히 현지에서 여러 관계자들과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여러 문서를 보면서 많은 정보를 습득했을 것이다.[40] 의료제도가 대표적 예시이다. 지방병원이나 민영병원들은 질낮은 의료서비스와 의료사고 때문에 불신을 많이 받기때문에 대형병원으로 몰려드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의료보험도 비급여부분이 많아 기초적인 의료는 제공하지만 상당수 질병은 의료비가 비싸서, 재산이 많지 않으면 가산탕진까지 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 때문에 중국은 체계적인 의료보험제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비싼 의료비로 유명한 미국보다 평균수명이 여전히 2년 가량 짧다.[41] 두 자가 같이 쓰인 표현으로는 '하후상박' 등이 있겠다.[42] 쉬밍 회장은 2015년 12월 수감 도중 사망한다.[43] 국가에 노동자로 등록되어 국영기업(전체 기업의 80%)에 소속된 인민에게는 웬만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제공하지 않는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이 제공된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개발 과정에서 도시로 올라온 농촌 출신 노동자들은 국가에는 농민으로 등록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사회보장 혜택에서 제외되며 소속도 좆소기업 영세 개인기업에 소속되어 저임금과 낮은 생활수준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이를 농민공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