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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현재의 보은행궁터 전경[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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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의 행궁. 세조가 속리산에 갈 때 머물기 위해 지은 행궁이다.2. 위치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에 있었다. 으로, 현재는 이른바 '장재리 행궁터' 등으로 불린다.말티고개 입구인 장재마을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행궁터 표지석이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3. 상세
1464년(세조 10년)에 세조가 속리산에 거둥하면서 행궁을 이용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이와 별개로 법주사에도 행궁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세조실록》 32권 / 세조 10년 2월 28일 신해 1번째기사 / 1464년 명 천순(天順) 8년
속리사[2]와 복천사[3]에 행행하고 쌀·노비·전지 등을 하사하다
임금이 속리사(俗離寺)에 행행(行幸)하고, 또 복천사(福泉寺)에 행행하여, 복천사에 쌀 3백 석, 노비(奴婢) 30구(口), 전지(田地) 2백 결(結)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082) 에 행궁(行宮)으로 돌아왔다.
행궁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조 이외에는 왕이 보은에 행차한 기록이 없어, 그 이후로는 사실상 버려진 듯 하다. 그렇게 방치되다가 건물 스스로 자연스레 무너지거나 또는 훼철당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속리사[2]와 복천사[3]에 행행하고 쌀·노비·전지 등을 하사하다
임금이 속리사(俗離寺)에 행행(行幸)하고, 또 복천사(福泉寺)에 행행하여, 복천사에 쌀 3백 석, 노비(奴婢) 30구(口), 전지(田地) 2백 결(結)을, 속리사에 쌀·콩 아울러 30석을 하사하고 신시(申時)082) 에 행궁(行宮)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