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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카므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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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카므쉬 전투
(Sarıkamış Muharebesi)[1]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
파일:사리카미스 전투.jpg
날짜
1914년 12월 22일 ~ 1915년 1월 7일
장소
러시아 제국 카르스도 사르카므쉬군 근처
교전국
[[오스만 제국|]][[틀:국기|]][[틀:국기|]]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러시아 제국|]]
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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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깃발 명칭
]][[이스마일 엔베르|
이스마일 엔베르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니콜라이 유데니치|
니콜라이 유데니치
]]
병력 11만 8천 명 6만 4천 ~ 6만 5천 명
피해규모 전사 3만 3천 명[2]
병사, 아사 및 동사 3만 명
부상 1만 명
포로 7천 ~ 1만 5천 명
사상 1만 6천명
질병 1만 2천 명
결과
러시아 제국의 승리
영향
오스만 제국캅카스 방어선 약화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자행

1. 개요2. 배경3. 오스만 제국의 공세 준비4. 오스만 제국의 공세
4.1. 오스만군의 자멸4.2. 사르카므쉬 전투
5. 결과

[clearfix]

1. 개요

1914년 12월 22일부터 1915년 1월 7일까지 진행된 오스만 제국러시아 제국 간의 전투.

오스만 지휘관 이스마일 엔베르의 무능한 지휘로 수만의 병력이 얼어죽거나 탈영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참패했다. 또한 엔베르가 해당 전투의 참패를 아르메니아인의 탓으로 돌려버리면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2. 배경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동맹국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협상국이었던 러시아 제국과의 캅카스 전선이 생겨나게 되었다. 1914년 11월 러시아는 에르주룸을 목표로 국경을 넘어 공세를 펼쳤으나 오스만군의 성공적인 지연전과 보급선 부족으로 인해 국경 부근만을 점령하는데 그쳐야만 했다. 한편 오스만군의 예상 외의 대선전으로 고무된 이스마일 엔베르와 오스만군 수뇌부는 자국군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고 러시아군의 역량을 낮추어보게 되었다. 이에 엔베르는 객관적으로 전력상 한 수 위였던 러시아군을 상대로 러시아군의 공세지역에 대해 역으로 공세를 준비했다.

3. 오스만 제국의 공세 준비

오스만군은 공세를 통해 국경 안으로 들어와 있던 러시아군을 쫓아내고 항구도시 바투미[3]와 같은 흑해 인근의 도시들을 점령하여 캅카스 지역에서의 러시아군의 진출을 막는 한편 카르스[4] 일대를 점령하여 전선의 방어력을 높이려 했다.

공세의 최종목표는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패배하여 러시아에게 할양했던 캅카스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 카르스로 삼았으며 엔베르는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다면 카르스 지역을 교두보로 삼아 향후 조지아 지역으로 진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오스만군은 제3군의 9군단, 10군단, 11군단을 공세의 주력으로 설정했다. 11군단은 일종의 미끼로 공세 우현에서 러시아군의 발목을 잡고 러시아군이 이를 주공으로 오인하도록 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렇게 11군단이 공세 우현에서 러시아군 주력을 묶어놓고 있는 동안 나머지 9군단과 10군단이 좌현으로 우회한 후 러시아군의 후방을 점령하여 포위 섬멸하는 것이 공세의 작전 내용이었다.

해당 작전에 대해 제3군 내부에서는 러시아군의 발을 묶어놓아야 하는 11군단의 역량에 의문을 표했으며 제3군 사령관이었던 하산 이제트 파샤(Hasan İzzet Paşa)또한 대규모 공세에 대한 준비 부족을 이유로 국경 지역을 침범한 러시아군을 쫓아내는 것에 만족하자고 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당시 오스만군의 군사고문이었던 오토 리만 폰 잔더스(Otto Viktor Karl Liman von Sanders)는 '기껏 있는 도로는 산길과 오솔길에, 그마저 눈으로 덮이는 상황에서 탄약과 지원물자의 보급은 불가능에 가깝다'며 극구 만류하였다.

그러나 엔베르의 적극적인 설득[5]으로 공세작전은 최종 승인을 받았으며 오스만 제국은 공세를 위해 에르주름 지역의 병력들을 차출하는 한편 220문의 대포를 준비하여 최종적으로 9만명의 공세 병력을 준비했다. 그러나 오스만군은 험준한 캅카스 산맥에서의 동계작전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게 한방 먹일 생각에 정신줄을 놓았는지 동계장비와 방한복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으며 기동력과 협동이 중요시되는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군단급 병력간의 통신문제와 캅카스 지역의 험준한 지형과 답이 없는 교통 인프라를 뚫어내고 어떻게 보급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한편 러시아군은 캅카스 전선의 주요 요충지에 병력과 화력을 보강하여 오스만군의 공세 시점에는 이미 12만명의 병력과 256문의 대포를 배치하였다.

4. 오스만 제국의 공세

4.1. 오스만군의 자멸

12월 22일 가장 왼쪽의 10군단이 올투 지역의 러시아군을 공격하면서 공세가 시작되었다. 10군단의 임무는 올투의 러시아군을 섬멸하고 쾨텍(Kötek)을 거쳐 카르스 동남쪽 방향으로 기동하는 것이었다. 10군단 휘하의 31사단은 올투지역의 남쪽을, 30사단과 32사단은 서쪽을 공격했는데 31사단은 서쪽의 30사단과 32사단 병력을 러시아군으로 오인하고 포격을 퍼부었으며 이에 32사단도 응하면서 자기편끼리 2시간 넘게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오스만군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벌이고 있을 때 올투의 러시아군은 유유히 빠져나갔으며 텅 빈 올투를 점령한 오스만군은 마을에 대해 약탈로 보답했다.답이 없다 아군끼리의 격렬한 전투의 결과 오스만군은 2천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때 러시아군을 묶어놓아야 했던 11군은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9군단을 작전대로 바르드즈(Bardız)를 점령하여 러시아군이 남기고 간 군수품들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이미 10군단 병력의 우회기동을 염려하여 11군단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좌측면의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한편 12월 24일 오스만군 지휘부는 러시아군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력하다고 판단하여 10군단과 9군단의 공세방향을 틀어 기존의 방향과 정반대인 사르카므쉬 방향으로 향하게 하였다. 사르카므쉬는 철도가 지나가므로 보급에 중요하며 해당 지역의 방어병력이 소수라는 러시아 포로들의 증언에 따른 판단이었다. 문제는 올투의 러시아군을 놓친 10군단이 이들을 쫓아가는 바람에 작전경로를 이탈해 버렸으며 9군단 역시 며칠에 걸친 전투와 행군으로 지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엔베르는 이런 상황들을 씹고 12월 25일 아침까지 사르카므쉬로 출발하라고 재촉했다. 따라서 9군단 병력들은 어쩔 수 없이 사르카므쉬로 진군을 해야 했는데 이들을 맞이한 것은 폭설로 인해 수십cm 이상 쌓인 설원과 강풍을 동원한 영하의 동장군이었다.[6] 방한복 한 벌 없던 9군단 병력들은 캅카스의 숲 속에서 눈보라와 추위로 얼어죽었다. 당시 9군단 휘하 29사단의 경우 사단병력의 절반을 동상으로 잃었을 정도의 참사였다. 게다가 10군단의 상황은 더 심각하여 러시아 병력들은 뒤쫓던 이들은 오늘날 에르주룸 도와 카르스 도의 경계부근의 산맥에 고립되었고 공세 시작 시점에 4만명에 이르던 이들 중에 12월 26일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3,200명에 불과했다.

4.2. 사르카므쉬 전투

12월 26일 9군단은 사르카므쉬 인근에 도착했으나 다수의 병력이 동사하면서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1만명밖에 되지 않았다. 공세 초기에는 3만명으로 편제되어 있었지만 동사와 탈영으로 인해 러시아군과의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2만명 가까이 되는 병력들을 잃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베르는 사르카므쉬 공격을 명령했는데 엔베르의 닥공 명령에 오스만군의 병력 손실만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결국 보다못한 9군단 지휘부에서 공격 중지를 애원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사르카므쉬는 철도가 지나가므로 러시아군의 퇴로를 막고 섬멸하려면 사르카므쉬를 점령해야 하니 계속 공격하라”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퇴로를 걱정해야 했던 것은 오스만군이었다. 오스만군의 병력들이 사르카므쉬 지역에 고립된 채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안 유데니치는 12월 26일 밤 9군단이 점령했었던 바르드즈를 공격하여 오스만군의 퇴로를 위협했다. 그럼에도 사르카므쉬를 지키던 러시아군 병력이 2천명밖에 되지 않았던지라 12월 27일 오스만군은 사르카므쉬에 진입한다.
그러나 이는 러시아군의 함정이었는데 이미 전날 밤 사르카므쉬에 러시아군 지원군이 증원된 상황이었으며 12월 24일 11군단에 대한 공세를 중단한 러시아군의 병력들이 사르카므쉬로 접근하고 있었다. 12월 28일 러시아군은 사르카므쉬를 포위하였으며 12월 30일 러시아군의 포격이 오스만군의 진지에 직격하면서 사르카므쉬 북쪽의 오스만군이 항복했다. 이때쯤 되면 오스만군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져서 탈영이 빈번해졌고 사르카므쉬에 대한 공격을 처음 시작할 때 1만명이었던 병력은 고작 3천명만 남아 있었다. 12월 31일부터 1월 3일까지 이어진 러시아군의 공격에 9군단이 항복했고 결국 1월 5일 엔베르도 공세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1월 7일 공세가 중지된다.

5. 결과

오스만군의 참패였다. 오스만군은 33,000명이 전사했으며 7,000명의 포로와 10,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참패의 가장 큰 원인은 당연히 보급문제와 상부의 닥공명령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공세를 펼치려던 캅카스 지역과 오늘날 튀르키예 동북부 지역은 교통 인프라가 매우 열악한 곳이었으며[7] 지형 역시 공격자에게 전혀 유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마일 엔베르와 오스만군은 기본적인 보급마저도 해주지 않은 채로 닥공만을 외쳤고 이는 오스만군의 참사로 귀결되었다. 오스만군은 특히 방한복과 동계장비를 전혀 지급해주지 않았는데 이는 사실상 오스만 군사들을 사지로 몰아간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강행군과 이미 공세의 목적은 잃어버린 채 당장 눈앞의 거점에 대한 가망없는 공격을 명령했고 이로 인하여 오스만군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다.
실제로 오스만군 병력손실의 대부분은 동사와 탈영이었다. 게다가 보급이 잘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이전의 러시아군의 공세를 막아낸 것을 예상 외의 대선전으로 여길 만큼 러시아군에 비해 실질적으로 한 수 아래였던 오스만군이 러시아군의 방어진지를 넘어 공세를 성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편 러시아군은 오스만군의 공세 의도와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잘 파악하고 말려죽이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러시아군도 15,000명이 넘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엔베르와 오스만 수뇌부는 자신들이 자초한 패배를 두고 이게 전부 러시아와 내통한 아르메니아인과 소수민족들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르메니아인 처분을 운운하였고 이는 1915년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영향을 주게 된다.

[1] 튀르키예어로 노란(sarı), 갈대(kamış)라는 뜻의 마을 근처에서 발발한 전투이며 튀르키예어로는 사르카므쉬가 올바른 발음이다.[2] 병원에서 사망한 1만 명 포함.[3] 현재 조지아 영토[4]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멸망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할양받았으며 세브르 조약에서 아르메니아에게 할양하도록 하였으나 튀르키예 독립 전쟁의 결과 맺어진 로잔 조약에서 튀르키예 영토로 남게 되었으며 소련도 1920년대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현재까지 튀르키예 영토로 남아있다. 냉전 초반 소련이 카르스, 아르다한 일대를 다시 뱉어내라고 한 적이 있지만 튀르키예가 이에 전쟁까지 불사하며 반발하고 미국이 개입하여 무산되었다.[5] 정확히는 답정너에 훨씬 가까웠다. 잔더스의 우려에 모든 것은 고려되었고, 보급로는 앞으로 발견될 것이라고 말한 시점에서….마치 몇 십년뒤누군가가 생각난다.[6] 이 일대는 해발고도가 높고 산악지대라 튀르키예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추운 지역이다.[7] 사실 1차 세계대전 당시 교통 인프라 문제는 서부전선을 제외하면 전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