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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20:54:52

신돈(드라마)/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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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연2. 신돈 주변 인물
2.1. 월선2.2. 덕운2.3. 원현2.4. 초선2.5. 지효
3. 조정 인물4. 왕실 주변 인물5. 원나라 측 인물6. 홍건적
6.1. 관선생6.2. 관선생의 부관
7. 유림 및 신흥 무인 세력8. 그 외
8.1. 이자춘8.2. 조소생8.3. 라마승8.4. 아라비아 상인

1. 주연

1.1. 신돈

드 : 신돈을 보면서 술을 마시고 싶을 때가 많아요. 보다보면 너무 슬프고 애잔하달까요. 신돈의 아픔이랄까? 그 상처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는 거 같아서...

정 : 신돈이 느끼는 막연한 아픔은... 제 젊은 시절 느꼈던 아픔과 똑같아요.

드 (웃음) : 개혁을?

정 : 정치적인 게 아니라...(웃음) 젊은 시절의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가지는 막막함이라고 할까요? 현실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갈 길도 보이지 않고, 그런 데서 오는 답답함이라고 해야 할까? 말을 바꿔서 개혁이라 하는데, 남의 아픔을 그냥 스쳐 보내지 못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제가요, 안 보려는 남의 불행이 자꾸만 보여요. 옛날에 버스 정류장에서 어떤 젊은 부부가, 너무 가난한 부부죠. 애 손을 잡고 나들이를 가는 거에요. 시장에서 산 싸구려 옷인데 풀을 먹여서 최대한 멋은 부렸는데... 그게 막 보이잖아요. 그들이 손 잡고 버스타고 가는데, 나도 버스 타는 주제에 그 모습을 보니까 눈물이 나서 버스에서 막 울었어요.
신돈의 경우도 마찬가지인거 같아요.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남의 고통이나 불행을, 지는 아파하잖아요. 지가 노비의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원래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거에요. 남의 아픔과 남의 불행을 같이 아파하는 모습, 큰 스님도 그런 아픔을 느꼈던 거고, 그래서 신돈이 자꾸 이쁜 거에요. 그걸 보고 아파하는 신돈이.
정하연 인터뷰
배우는 손창민[1]. 법명은 편조. 개태사 여자 노비와 귀족 남자 사이에 태어난 사생아로[2], 자신의 어머니에 의해 "세상에서 가장 천한 것이 니놈이다"라는 세뇌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에 딸린 사노가 노비 중에서도 제일 험하고 천하다"는 내용이 드라마에도 몇번이나 나온다.

모친의 사후에 편조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긴 개태사의 고승인 월선의 손에 '중은 중이되 머리 기른 중'으로 키워진다.[3]

월선의 심부름 겸 개경 구경을 나갔다가 공녀로 끌려갈 뻔 한 양갓집 여자를 구하려다[4] 살인사건에 휘말리고 결국 원나라로 도피하게 된다.

원나라로 도피한 이후 바다에서 배가 난파되어[5] 원현, 지효와도 헤어지고 죽을 고생을 하던 중 친황다오에 표류되어 장터에서 낙타를 보고 그 큰 눈 속에 담긴 뭔가에 깨달음을 얻는 듯한 모습이 보이기도 하며, 강릉대군이라는 자가 고려인을 후대한다는 소리를 듣고 무작정 찾아가게 된다. 처음에는 충정왕 측 사람들이 강릉대군을 죽이려 보낸 암살자라고 의심받지만, 이내 자신의 출생에 대해 솔직히 털어놓고 강릉대군과 엽색 행각(을 위장한 고려인 구출)을 벌이며 신분을 넘어서는 친구가 된다.

이 때 6화 마지막 신에서 나오는 "나는 굶주린 개를 잡아먹는 것이 자비라고 생각한다"는 대사는 그의 급진개혁 성향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대사.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굶주리며 고통스럽게 살 버려진 개한테는 차라리 생을 끝내주는 것이 자비라는 소리다. 이 대사는 개나 신돈 자신과 같은 일개 대상이 아니라 고려라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유지하기 보다는 뒤집어 엎는 것이 낫다는 의미도 된다. 신돈은 극중에서 자주 "뒤집어 엎어야지, 이놈의 세상"이라는 위험천만한 말을 한다. 세상이 잘못됐다면 그 세상을 뒤집어 엎어버려야 한다는 신돈의 극단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대사인 셈이다. 한편으로 신돈이 정신적으로 성장한 후에는 이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데, 사춘기적이고 반항적인 세계관이 좀 더 성숙해지고 진일보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듯.[6]

한편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한 이후 공주와 몇 번 만나기도 하는데 고려의 왕비로서 고려인들에게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고려의 풍속과 역사를 배우라고 조언하며, 이는 공주가 '몽골의 것을 모두 버리고 고려로 가겠다' 라고 다짐하고 고려에 와서도 고려의 풍속을 열심히 배우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7]. 한편 신돈은 이 때 노국대장공주를 연모하기 시작한 것으로 묘사되나, 훗날 초선에게서 누군가를 사모해 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그저 누군가를 연모하는 마음이 스치고 지나간 적은 있다고 대답하며 부정해 버린다[8].

이후 배가 난파되면서 헤어졌던 원현, 지효 등과 재회하여 티베트로 고행을 떠난다. 장자커우에서 출발해 간쑤성 가욕관을 거쳐 우루무치사막에서 아라비아 상인한테 도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칭하이성에서 티베트족의 오체투지와 장례 풍습을 보고 찬파[9]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등 여러 경험을 쌓으며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10][11]

원나라 대도에서 친구가 되었던 강릉대군이 공민왕으로 즉위했다는 사실을 알고 공민왕 곁으로 다가가고자 하는 과정에서, 지효의 속가 누이이자 대상인인 초선과 가까워진다. 공민왕과 재회하면서부터는 왕궁에서 무기력과 고독에 갇힌 공민왕에게 새로운 원동력으로 작용했으나, 야심차게 시작했던 전민변정도감이 이제현, 이인복 이하 관료 전원의 사직으로 무력화되고, 결정적으로 월선이 유언처럼 남긴 구족계로 인해 승려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된다.

보우에게서 정식으로 계를 받고 내려오지만 월선은 이미 좌탈입망한 상태였다.[12] 허물어지는 월선의 시신을 향해 "세상을 바꿀까요, 저를 바꿀까요?"라고 절규한다. 이후 월선의 다비식을 마치고 무문암[13]에서 홀로 참선수행에 정진한다. 그러다 홍건적이 쳐들어와 자신의 식사 문제를 해결해주던 초선이 강간당할 위기에 처하자 참선을 폐하고 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월선의 영혼이 나타나 "초선이 죽고 사는 것은 부처님의 뜻이고, 부처님이 너를 어여삐 여기셔서 마귀들을 보내신 것이다. '네 마음 속 가장 큰 업을 끊으라'는 부처님의 당부"라고 말하며 신돈의 뒤를 막으면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14] 그러나 초선의 안위를 무시해가며 강행한 수행은, 신돈의 도움이 필요했던 노국대장공주의 손에 억지로 중단된다.[15]

참선이 강제 중단된 이후 한동안 개태사의 주지 노릇을 하다가 정계로 복귀하게 된다. 임금의 사부로 영도첨의 자리에까지 오르는데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는 것과 동시에 공민왕과의 사이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것은 노국공주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라는 명분으로 공민왕을 설득하려 하지만, 공민왕은 신돈에게 '개혁의 동반자'나 '정치적 대리인'이 아닌 '감정적 지지자' 겸 '복종하는 신하'의 모습을 요구했다.[16] 공민왕은 신돈이 자신의 기대에 따르지 않자 점차 분노를 느끼게 된다. 공민왕은 신돈을 압박하여 굴복시키려고 하지만 신돈은 끝까지 그에게 굽혀주지 않았고, 결국 공민왕의 명으로 처형당한다.

'안광으로 바위를 쪼갠다' 따위의 요술의 장본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17] 계율을 지키지 않는 것 모두 자신의 출생에 대한 컴플렉스로 인한 사춘기적 행동에 가까운 듯 하다. 절에 딸린 노비 신분으로 귀족의 유혹에 넘어가 신돈을 임신하고 버림받았던 그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너의 반쪽은 귀족이다"라며 자주 윽박질렀다. 이로 인해 자신의 천한 반쪽과 귀한 반쪽 사이에서 컴플렉스와 정체성 혼란을 느끼며 자랐다. 성장한 후 정체를 숨기고 친아버지와 대면하는데, 어린 시절 어머니 손에 이끌려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자기네 모자를 외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하인들을 시켜 몽둥이찜질을 했던 아버지가 자식을 외면한 일에 죄책감을 보이는 것을 본다.[18]

사실 결말부에서 신돈공민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선택지를 고를 수도 있었고, 또 원현이 강하게 반란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한다. 그 이유는 그가 공민왕의 슬픔과 절망을 충분히 이해했고 연민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세상에 대한 증오에 빠진 괴물이었던 자신을 그 어둠으로부터 구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공민왕과 노국공주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돈이 죽은 후, 이인복공민왕에게 "편조가 바꾸려던 것은 '이 세상'이었기 때문에, 전하와 같은 길을 갈 수 없었다"면서, "편조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1.2. 공민왕(강릉대군)

드 : 공민왕이 조카를 죽인 데 대한 원죄의식을 가진 인물로 나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사극에서는 사람 하나야 우습게 죽이고 하는데요. 공민왕은 고뇌하는 나약한 예술가같이 그려지구요.

정 : 그래서 권력자가 못되는 거죠.

드 : 그래서 비극이 되는... 보통 사극들은 어떻게 보면 약육강식의 정글세계로 나왔는데요. 공민왕의 고뇌는 뭐랄까.. 작품의 질을 문학적인 의미랄까요, 한단계 높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정 (웃음) : 그렇게 좋게 봐주시면 좋은 거구요(웃음). 근데 방송사에서는 이놈의 공민왕은 왜 이렇게 왔다갔다 하냐고 한마디 했는데...(웃음)
정하연 인터뷰

배우는 정보석.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 이 드라마는 공민왕의 죽음으로 끝난다.

충숙왕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 원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성장한다. 극중 대사를 보면 김용이 오면서 궁핍한 생활을 겨우 면하고,[19] 조일신[20]이 오면서 고려인으로 자각한 듯하다.[21][22] 왕족은 왕족이나 굴곡이 많아서 그런지 신돈만큼이나 한이 많은 인물.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보우가 찾아왔을 때 이목구비가 빠진 어머니의 초상을 그려놓고 "어머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원나라 시절엔 일탈을 반복하며[23] 허허실실 자신을 숨기고 살았고, 권력을 위해 자기 주변에 모여든 세력에 어느 정도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충숙왕과 형 충혜왕이 죽고 형의 두 아들들이 차례로 왕을 하는 동안 고려로 돌아갈 꿈은 포기하고 살고 있었다. 이 시기 신돈을 만난다 그런데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타국 왕비로 시집보내 사실상 멀리 귀양 보내버리려는 기황후의 계략에 의해 원 황실의 사위가 된다.

그런데 강릉대군이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려고 일부러 일탈행동을 반복하는 모습만 보았던 노국공주는 강릉대군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강릉대군은 혼인 결정에 반발하는 노국공주를 설득하기 위해, 독이 든 술잔과 독이 들지 않은 술잔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당신이 골라주는 대로 마시겠다"고 제안한다. 노국공주가 고른 술잔은 독이 들지 않은 술잔이었고, 노국공주는 "원래 양쪽에 다 독을 안 넣었던 것 아니냐"고 의심하며 남은 잔을 마시려 든다. 그러나 공민왕이 공주를 말리려다가 멀어진 몸싸움 도중 나머지 술잔이 날아가고, 그 술잔에서 쏟아진 술을 핥아마신 고양이가 죽어버리며 독 인증(...). 결국 노국공주와 혼인하는데 성공하고, 덕분에 고려의 왕으로 봉해져 망해가는 고려로 돌아가게 된다.
1. 가자마자 기철을 중심으로 한 친원세력과 기싸움을 하다가 '조일신의 난' 발생: 조일신은 고려의 기상을 다시 세워 자신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고 싶어했고, 그러려면 원과의 일전은 불가피했다. 공민왕은 조일신이 탐욕스러운 인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버리지 못해 끝까지 괴로워했다. 조일신 암살을 명령한 것이 본인이면서도 "조일신을 죽이지 마라, 조일신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수치를 배웠겠느냐"[24]고 울며 절규한다.

2. 조일신을 잡고 난 뒤에 친원세력과의 정면승부: 원의 허수아비였던 공민왕이 왕다운 왕이 되기 위해서 원의 간섭을 끊으려는 전쟁. "노국대장공주의 부친상을 조문하러 오라"는 명분으로 기철을 대전으로 오게 해 기습적으로 죽인 뒤, 응양군 및 용호군·불교·초선이 주도하는 상단 조직·일반 백성들까지 총동원하고서야 친원파들과 그 사병들을 힘겹게 진압할 수 있었다. 친원파들은 사병들에게 공성병기까지 중무장시켜 대궐을 공격했고, 정세운은 화공으로 반격해 간신히 물리쳤다.

3. 친원세력을 잡고 난 뒤에는 원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이 쳐들어와 홍건적의 난 발생, 개경을 버리고 도망: 홍건적은 원의 지방소국에 해당되는 고려를 자신들의 세력에 넣어 원-고려 사이에 자신들이 포위되는 것을 막고자 한다. 이성계의 동북면 군사들·원현이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승병 및 일반 백성들의 의병까지 정세운의 군대에 가담해 치열하게 싸운 끝에 힘겹게 개경을 수복했다. 공민왕노국대장공주에게 "내가 이번에도 백성들의 신세를 진다"면서 뭉클해 했지만….

4.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김용의 난' 발생: 김용은 고려나 왕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공민왕 등은 흥왕사에서, 이인복·김원명 등 소수의 대신들 외에는 모두 도망쳤고, 악조건 속에서도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으려던 문하시중 홍언박은 김용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등 절체절명의 순간에 처한다. 명덕태후·덕녕공주 등 왕실의 여인들까지 공민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상황에서, 노국대장공주는 스스로 무장한 환관들을 이끌면서 김용의 부하들과 맞서 싸우고, 신돈이 파계까지 하면서 달려온 데에 이어 안도치가 스스로를 희생하는 과정을 거쳐 어렵게 난을 진압한다.

개혁을 하려고 애쓰지만 반대 때문에 좌절하고 전란만 계속 일어나다가, 노국대장공주가 죽고서야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신돈을 전폭적으로 기용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의 가혹함, 외세의 횡포[25]와 노국공주의 죽음으로 정신적으로 한계에 봉착한 공민왕은 왕권에 집착하게 된다. 강력한 권력을 지니게 된 자신 주변에 남게 된 유일한 이해자이자 친구인 신돈을 압박하지만, 끝내 신돈이 굴하지 않자 신돈을 죽여버리고 만다. 그리고 공민왕은 궁궐에서 완벽한 외톨이가 되어 버린다.[26]

이후 편조를 죽인 사실에 후회하다가 무기력해져 권문세족들에게 권력을 빼앗기다시피 하여 최영에게 군권을 내주게 되고, 본인은 폐인이 되어 난잡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역사대로 홍륜과 최만생에게 시해당한다. 죽기 얼마 전 "나는 죽은 자들만도 못하다"고 자조하며 자신의 백골 그림을 그렸는데, 홍륜의 칼에 비명도 못지르고 시해당한[27] 공민왕의 시신을 그가 그렸던 백골 그림이 지켜보는 장면은 상당한 명장면.[28]

극중 취급을 보면 그야말로 고려의 아웃사이더이자 비극의 임금. 어려서 연경으로 끌려간 관계로 고려는 그에게 있어 외지나 다름없다. 심지어 공민왕의 친어머니인 명덕태후조차 아들을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한을 풀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믿을 만한 사람은 연경 시절부터 자신을 보살펴 준 조일신, 김용, 정세운, 안도치, 그리고 정신적 이해자이자 같은 고려의 아웃사이더인 아내 노국대장공주와 편조(신돈) 정도. 허나 그 얼마 안 되는 사람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차례로 잃게 된다.

우선 조일신은 권력에 눈이 멀어 폭주하다가 자신의 주군인 공민왕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김용은 그 무능함 때문에 공민왕이 걸핏하면 좇아내야 했다고 말하면서도 연경 시절 함께 고생하며 쌓은 미운 정 때문에 쫓아내지 못하고 곁에 두었건만, 결국 공민왕의 뒤에 비수를 꽂으려다 조일신처럼 공민왕의 손에 죽었다. 정세운은 충직했으나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없어서, 연경 시절 동료인 김용이 공민왕의 필적을 흉내내 만든 거짓 밀명으로 인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이 결과만 놓고 생각하면, 공민왕에게 충성을 다하던 정세운이 공민왕에게 배신당해 살해된 걸로 보인다.[29] 안도치는 어린시절부터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자신을 돌봐준 부모와 같은 존재지만, 김용의 난 당시 공민왕의 대역이 되어 칼에 난자되어 비참히 죽었다. 사랑하던 아내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의 아이를 낳으려다 난산 끝에 사망. 그리고 그나마 마지막으로 남은 편조는 왕권강화에 집착하게 된 공민왕 자신이 죽여버리고 만다.

이러다보니 결과적으로 공민왕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고려의 아웃사이더인 그가 잔혹한 정치권력과 격동의 역사에 휩쓸려 자신 주변의 몇 안 되는 자들이 하나하나 죽는 원인을 제공하거나 아예 스스로 죽이고 끝내 고독하고 잔혹하게 시해당하는 결말은 그야말로 한편의 비극이다.

시해되기 직전 공민왕은 아들 모니노를 데리고 정전으로 나와 편조, 노국공주, 안도치, 정세운, 김용, 조일신의 환영을 보며 신명나게 춤을 추기도 한다.[30] 이들은 모두 공민왕을 연경 시절부터 잘 알고 있던 미운 정 고운 정 다 쌓은 일종의 친구들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자기 때문에 죽거나, 또는 자신이 죽인 자들이다. 심지어 김용은 죽으면서 공민왕을 저주하기도 한 인물. 그런 사람들과 지금까지의 앙금을 모두 잊은 듯 웃으면서 같이 춤을 추는 공민왕을 보면, 공민왕의 외로웠던 삶과 소박했던 꿈을 엿볼 수 있다.[31]

신돈이 공민왕에게 감사하는 대목에서 '드라마 신돈' 에 있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나온다. 연경에서 잠시 공민왕과 같이 지내다가 티벳으로 떠나던 신돈은, 공민왕에게 "대군마님께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다"면서, "천해야 세상이 바로 보이지만, 귀한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느냐"는 말을 했다.[32] 팬들은 공민왕-신돈-노국공주 세 사람을 '삼존불'이라고 부르며 셋이 함께 있어야만 완성되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정보석이 전부터 무릎 꿇고 빌면서라도 꼭 연기하고 싶었던 왕이었다고 한다. 드라마가 시작하기 몇년 전부터 정하연 작가에게 정보석이 공민왕으로 내정되어 있었고 스케줄 또한 그를 위해 방향을 잡아왔다고 한다. #,#
여담으로 공민왕의 테마곡인 '공민왕'은 상당한 명곡이다.

재미있게도 정보석은 이후 같은 MBC 사극인 왕은 사랑한다에서는 공민왕의 증조부인 충렬왕으로 출연하게 된다.

1.3. 노국대장공주

배우는 서지혜, 기황후의 계략에 의해 공민왕과 억지로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뚜렷한 야망도 의지도 없이 그저 술독에 빠져사는 듯한 공민왕을 몇 번이나 봤기에 혐오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보탑실리 주위 사람들의 안위를 두고 협박하는 기황후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했는데, 그 후 공민왕의 처지와 속마음을 알게 되면서 점점 감정이 바뀐다. 그리고 나중에 고려로 간 뒤에 두 사람의 상황이 역전되면서 공민왕도 노국대장공주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원나라 공주답게 승마도 잘 하고 무예에도 뛰어나며 남자 뺨치는 호전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고려에 돌아가자마자, 공민왕을 우습게 알며 은근히 조롱하는 기철에게 칼을 들이대며 혼을 빼놓는다. 자기딴에는 공민왕을 위해 한 행동인데 결과적으로는 공민왕의 처지를 더 깎아내린 셈이 되어, 공민왕의 분노와 오해를 산다. 그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어 남편과는 점점 멀어지고 시어머니 명덕태후에게도 미움을 받은데다가 몽골풍을 일소하는 개혁의 바람까지 불면서, 정치적 입지가 곤란해져 노국공주를 왕비 자리에서 폐위하네 마네하는 논란까지 나오게 된다.

그러나 폐위 논란 과정에서 '저를 버리셔야 한다'며 공민왕을 위해 희생할 것을 자청하며, 남편에게 자신의 진심을 알리게 된다. 이 일로 내내 엇나갔던 공민왕과의 사이가 돈독해진다. 나중에 원나라에 있던 아버지 위왕이 사망하자 딸로서 고려 궁궐 안에 빈소를 마련하고 신하들의 조문을 받는데, 이것을 이용해서 기철을 숙청하는데 성공한다. 기철 숙청을 전후로 하여 공민왕과 부부로서도, 정치적 동지로서도 완전히 굳건한 사이가 된다. 그러나 감정적인 소모가 극심한 상황에서 위왕의 빈소를 지키고 있다 아이를 유산하고, 이로 인해 불임이 된다.

공민왕을 왕으로 만든 것도 타의에 의한 것이지만 그녀였고, 수차례의 반란 등 위기 속에서도 항상 든든하게 공민왕의 곁을 지켜준다. 정치적 위기를 함께 넘기는 동안 고려의 신하들은 물론이고 친어머니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공민왕에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지지자로 자리매김한다. 숱한 정치적 위기에서 항상 공민왕의 편이 되어주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항상 외롭고 예민한 공민왕에게 유일하게 안식처가 되어준 것.

하지만 공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해 안 좋은 몸으로 무리해서 임신출산을 시도하다가 결국 죽게 된다. 공민왕은 즉위한 이래 정치쇄신을 위해 애썼지만, 엉망진창인 고려 내부 사정이나 원나라의 간섭 및 홍건적의 침략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지쳐있었다. 이런 판국에 사랑하는 아내이며 정치적 지지자인 노국대장공주를 잃게되자 정신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그래도 노국공주의 유언에 따라 신돈에게 힘을 실어주며 개혁을 계속하려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죽음이 공민왕과 신돈이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공민왕은 개혁의 뜻이 있고 신돈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의지가 약한 편이라 생전의 노국공주만큼 신돈의 개혁을 끝까지 믿어주지 못했고, 노국공주의 능과 영전 공사를 무리하게 밀어부치는 일을 두고 신돈과 의견이 갈려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팬들은 노국공주를 포함해 주연 셋을 '삼존불'이라고 불렀고, 노국공주가 어긋나는 양쪽의 톱니바퀴를 맞춰줄 수 있는 중재자이기 때문에 노국공주가 있어야만 양쪽의 관계가 완전해진다고 해석했다.

여담으로 서지혜가 노국공주 역으로 캐스팅 되었을 때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주연과 조연 상당수가 탄탄한 연기력 갖춘 이들인데 정작 여주인공이 신인이라 연기력이 많이 쳐진다는 평이었다. 실제로 드라마 초기에는 대사 처리에 미흡함이 많았다. 그러나 중반부쯤에는 한결 나아진 연기력을 보였고, 후반부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신돈(드라마) 위키항목에 서지혜에 대한 평과 잡설이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함께 출연한 다른 배우들이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워낙 연기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라, 드라마의 중심인물인 여주인공 연기력이 조연들보다 못하다는게 비교가 된 것이다. 원래 사극이라는 분야가 현대극에서는 평타 이상 치는 배우들이라도 쉽게 발연기 소리 듣는 어려운 바닥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신인배우로서 그 정도했으면 제몫을 했다고 봐도 된다.

게다가 연기가 어색했던 건 초반부 한정이고, 회차가 거듭될수록 연기력 향상이 눈에 띈다. 서지혜는 이 드라마 출연 당시 20대 초반으로 출산 경험이 없었는데도, 애 낳다 죽는 장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비명을 지르다가 궁녀들에게 "내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장면을 소름 돋을 정도로 연기해냈다.[33]

이후 서지혜는 13년 뒤에 SBS에서 방송한 흉부외과 - 심장을 훔친 의사들에서 당시 남편으로 출연했던 정보석과 숙부와 조카 사이로 재회하게 된다.

2. 신돈 주변 인물

2.1. 월선

온화하면서도 사찰 소유의 땅을 인근 농민들에게 모두 나눠줄 정도로 개혁적인 면모를 보이는 개태사 스님이자 국사. "절간에는 재물이 아니라 백성들의 고통과 신음소리를 채우라"는 진정한 불심포스, "일하느라 바쁜 백성의 고됨은 모르고 부처님 염불만 알아서는 중이 아니다"라는 진정한 승려 마인드.

배우 오현경이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다 이 작품으로 복귀했는데, TV 손자병법 등 그의 작품을 전혀 모르는 젊은 시청자층에게는 "어디서 진짜 스님을 데려오셨나?!"라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육포를 오물오물하고, 아랫사람들과 격의 없이 티격태격 투닥투닥하는 모습이 흡사 조선 말 경허 선사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인물. 그러나 초반부터 개경을 구경하고 돌아온 편조에게 "무엇을 보았느냐?"라는 선문답을 던지는 등 비범한 포스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신돈에게는 부모이면서 스승같은 인물로, 이 드라마에서는 월선을 빼놓고 신돈이라는 인물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을 죽이고 원나라로 도피하는 신돈에게 자신의 발우와 가사를 물려준다. 아직 입적할 때도 되지 않았는데 자신의 의발을 물려주며 "얼어죽고 굶어죽지 말라고 주는 것"이라고 일갈츤츤하는 장면은 꽤나 명장면. 그러나 그 월선도 편조에게 구족계는 내렸지만, 편조는 노비의 자식이라서 승적에 이름을 올릴 수는 없었다. 따라서 편조는 정식 승적이 없는 땡중.[34]

"부처님도 못 바꾼 세상을 사람이 바꿀 수 있느냐"고 신돈에게 일갈하기도 하지만, 신돈이 공민왕에게 죽으러 가기 전 보는 환상 속 월선은 '네가 한 일 때문에 백성들이 하루라도 좋은 꿈을 꿨으니 그것이 어찌 부처님의 꿈보다 못하다고 하겠느냐'라고 말하는, 개혁적 사상은 있으되 인위적이거나 급진적이기보다는 온건한 위치를 가진 '신돈의 정신적 스승' 역할이다. 고승답게 앉아서 입적하는 좌탈입망을 했다.

2.2. 덕운

월선의 제자로 배우 유종근[35]가 분했다. 잔정이 많고 덕이 있지만 둔한 몸에 식탐이 많아[36] 월선에게 종종 꾸지람을 듣곤 한다. 신돈에게 월선이 아버지라면 덕운스님은 형과 같은 존재.

딱 한번 덕운이 신돈과 월선에게 아쉬움을 표했던 적이 있었는데, 원나라로 원현과 지효와 함께 떠나기 전 월선이 발우와 가사를 물려주는 것을 보고 "머리도 깎지 않은 편조에게 가사를 물려준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한 것. 그 이후론 신돈의 일을 이러저러하게 도와주다가, 최종화에서 초선과 함께 살해당한다.

2.3. 원현

노비만큼 대우 못 받는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그 아비가 아들에게 줄 돼지 간을 훔치다 걸려 맞아 죽고, "아비처럼 사느니 죽겠다."라고 물에 뛰어 들었다가 신돈에게 구해진 뒤에 불가에 귀의해 승려로 살았는데, 본인이 원했다기보다 구해준 신돈이 절에 있으니 스님이 된 것. 다만 이쪽은 편조와 다르게 정식 승적이 있는 듯 하다.[37]

신돈을 어디든 따라가며 항상 함께 하고 신돈이 잘 되길 바란다.[38] 문무에 문무라고 쓰고 요술과 잡담에 능한 신돈을 현신한 부처님 쯤으로 생각하는 인물. 적어도 원현은 목숨을 빚졌으니 신돈에 대해서는 헌신적이고 순종적이지만 그 역시 출신과 관해서 세상에 쌓인 게 많기 때문에 권력이 주어지면서부터는 신돈보다 더 과격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39]

신돈이라는 인물을 둘로 쪼개면 한쪽엔 월선, 반대쪽엔 원현이 들어있다고 봐도 된다. 그만큼 아픔과 한이라는 면에서는 신돈 못지않은 불쌍한 캐릭터. 신돈이 권력을 얻은 후에는 신돈이 부패한 자들도 이용하고 유림과도 손을 잡는 폭 넓은 행보를 보이자 못마땅해하고, 계속 강경 노선을 주장하며 신돈과 대립한다.

오만석이란 배우의 진면목을 보여주며 그의 지상파 출연에 디딤돌이 된 캐릭터로, 극초반의 순수한 모습에서 후반의 상류층에 대한 증오로 변모하는 과정을 절실히 보여주었다. 오죽하면 초반부엔 팬들이 다들 원현 보고 생불이라고 했을 정도.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을 털어놓는 신에서 울면서 웃는 연기와 흥왕사 마당 흙바닥에서 보우에게 "왜 부처님은 가난한 백성들을 구하고 귀족들의 머리에 벼락을 내려치지 않는 거냐"며 몸부림치며 발악하는 신은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여담으로 오만석은 이 드라마에서 대학동기 문정희[40]와 함께 출연했는데, 둘은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 더불어 출연 당시 오만석은 무대 연기를 위주로 작업하다가 드라마 연기를 막 시작하던 때. 당시에는 (감정과잉 등) 연기가 어색하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드라마 중반 흑화(...) 이후 그런 이야기는 게시판에서 쏙 사라졌던 바 있다.

작품 외적으로는 기독교적 해석이 가능하기도 한 흥미로운 캐릭터다. 신돈이 죽으면 백성들이 봉기할 것이라 생각하고 신돈을 죽음의 길로 팔아넘기는 모습은, 마치 열심당원이스카리옷 유다를 섞어놓은 것과 같다. 어쩌면 원현은 정하연의 유다에 대한 일종의 재해석이 투영된 캐릭터일 수도 있다[41].

2.4. 초선

배우강문영[42]. 상단을 운영하는 여장부. 부친이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인해 고려를 망해야 하는 나라라고 생각하면서, 주먹패들도 모아놓고 상인들의 회합도 주재하며 준비를 많이 해놓은 안 보이는 실력자. 신돈이 백성들의 여론이나 세력을 모으는 힘의 원천인데, 자연스러운 여론 규합보다는 여론몰이, 선동, 조작에 가까운 연출과 퍼포먼스를 보인다. 월선의 부탁으로 신돈을 구해주면서, 신돈-공민왕 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바꿀 희망을 보며 신돈에게 힘과 지략을 보탠다.

신돈의 정치척 동지이자 후원자이면서, 신돈을 오랫동안 연모해왔다. 신돈이 정식으로 구족계를 받고 출가하는 것이 결정되자 무너지며 "한 번만 안아주고 가세요. 지금 가면 다시는 못 보십니다."라고 애원할 정도.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려는 신돈이 노국대장공주에게는 약한 모습[43]을 보이자 노국공주를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왕자를 낳아야 신돈의 후원자인 공민왕의 입지가 튼튼해진다는 이유로 왕자 생산을 종용하기도 한다.[44] 노국공주 사후 신돈이 공민왕에게 '신돈' 이라는 이름을 받은 뒤에야 서로 맺어졌다. 그리고 노국공주가 죽은 뒤 반야가 공민왕의 아이를 갖는 시점과 거의 같게 초선은 신돈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군사들에게 살해당한다.

초선이 살해당한 뒤 그녀의 아이는 이성계의 부하들이 어딘가로 데려가는데, 경천흥이인임에게 "신돈의 씨를 찾아냈다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묻자, 이인임은 "지금쯤 그 씨를 말리고 있을 것"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성계가 신돈의 아이를 없애라는 최영의 지시를 받았으며 이인임은 역사적으로 최영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함께 논의했거나 전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천흥이인임의 대화 직후, 실성한 원현은 밥풀로 만든 불가사리를 대궐 정문 앞에 놓은 뒤 사라지고, 살해당한 초선 일행의 모습이 등장하며, 군사들이 아기를 데리고 가면서 말을 달린다.

2.5. 지효

배우는 전태성. 초선의 남동생이다. 아버지가 권문세족에 의해 재산을 빼앗기고 자살한 뒤, 초선은 복수의 길을 선택했지만, 지효는 불가에 입문해 속세와의 연을 끊었다. 그래서 복수심에 불타는 누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신돈, 원현과 고행을 함께 하기도 했지만, "부처님을 모시는 방법이 다르다"고 하는 등 신돈과 생각이 다른 것으로 묘사된다. 신돈도 고행을 가기 전 지효에게는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근본적으로 선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불교의 영역을 거리낌 없이 침범하는 신돈의 과격한 개혁을 좋아하지 않아 이따금씩 불만을 품었다. 신돈이 보우에게 "왕사에서 물러나라"고 할 때에는 아예 "왕사님 말씀 한 마디면, 편조를 몰아낼 수 있다"고 권했을 정도.

하지만 신돈이 죽은 뒤에는, 넋이 나간 채 감옥에서 풀려난 원현에게 "법왕사로 함께 가자"고 말하면서 위로했고, 신돈이 죽은 것에 대해 "누이의 복수심이 편조 스님을 부추겼다"고 하는 등 신돈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3. 조정 인물

3.1. 정세운

배우는 김명국[45]

공민왕이 강릉대군이던 시절, 원의 볼모로 있던 그를 보좌한 3인의 공신 중 1명.[46] 다른 공신들인 조일신이나 김용과는 달리 충신 중의 충신으로 묘사된다.

할 일을 다 하는 무장이었고, 권력을 잡은 후에도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는 충신. 하지만 그런 그도 한 가지 흠이 있는데 그것은 김용을 너무 두둔해 준다는 것.[47] 공민왕을 연경 시절부터 모셨다는 정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홍건적의 난이 끝나가는 시점인 41회에서 그렇게 자신이 그렇게 두둔해준 김용의 계략으로 거짓 밀명을 받은 휘하 장군들에게 암살당한다.[48]

암살되기 직전 정세운은 해당 전쟁을 복기하며 착잡한 심정으로 공민왕에게 서신을 보낸다. 공민왕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은 "홍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참여한 백성들을 보면서 부끄러웠고, 편조를 돕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전민변정도감을 다시 세워 억울하게 노비가 된 백성들을 양민으로 풀어주시고, 억울하게 뺏긴 땅을 돌려주시라"는 것이었다. 공민왕은 정세운이 죽은 뒤에야 뒤늦게 정세운의 서신을 보고 대성통곡했지만, 그렇게 충직하던 사람까지 죽고 보니 "공민왕 밑에서 한 권력 잡으면 죄다 죽는다"는 불신의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한다.[49]

3.2. 조일신

배우는 정명환. 공민왕의 볼모시절 3공신 중 한 명. 그러나 볼모 시절에도 강릉대군이 언젠가 왕이 될 거라 믿고 기다리며 버텼던 것으로 묘사된다. 강릉대군이 탕아 행세를 하며 기황후의 호출에도 술에서 깨지 못하자 감히, 왕자의 몸에 찬물바가지를 끼얹는(...) 짓을 감행했을 정도.

성질이 불같은 무신이라 고려로 돌아가자 "노국대장공주를 폐하자" "친원세력을 죽이자" "자리만 차지하던 노신들을 내쫓자" 하며 반원 정국을 만들다가 공민왕의 눈에 거스를 정도가 되자 '조일신의 난'을 일으켜 친원세력을 척살하지만, 정작 기철과 김용 등을 놓치면서 반쪽 성공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강릉대군으로는 안 되겠다 이거야!" 더욱 극단적으로 정국을 몰아붙이다가 결국 공민왕의 밀명을 받은 이인복의 계획하에 죽게 된다.

공민왕은 그의 배신에도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조일신이 처단되는 그 순간에도 "조일신을 죽이지 마라. 내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라고 절규한다. 하지만 그런 공민왕의 발버둥과 별개로 조일신은 최영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만다.

3.3. 김용

배우는 윤철형. 공민왕의 볼모시절 3공신 중 한 명. 간사하고 사익을 위해 남을 모략하는 간신배의 전형이다. 그리고 무장이다. 공민왕에게 총애받는 정세운에게 걸핏하면 열폭하는 등 제대로 열등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며 공민왕 앞에서 이를 대놓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공민왕과 고려로 돌아가자 친원세력과 손을 잡고 권세를 누리려고 획책하다가 '조일신의 난' 중에 왕궁수호라는 본임을 저버리고 도망치고, 난이 평정되자 정세운이 공민왕에게 애원하여 겨우 관직에 오른다.[50] 상당히 무능한데 반대로 욕심도 많고 겁쟁이라 공민왕의 미움을 받아 걸핏하면 "그를 내쳐야 했다"는 후회가 공민왕 입에서 나올 정도. 하지만 정세운의 옹호와 공민왕이 김용과 보낸 연경 시절의 정때문에 공민왕은 그를 끝내 내치지 못한다.

홍건적의 난에서는 중앙군을 진솔하지만 대패했고 이로 인해 정치적 생명에 위기가 찾아온다. 거기다가 자신의 후임인 정세운이 개경 탈환에 성공하자 궁지에 몰려 정세운을 거짓 밀명을 안우, 김득배, 이방실에게 보내어 그를 암살했다.[51] 뒤이어 공민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만 최영, 노국공주의 활약과 안도치의 희생으로 실패하고 최영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3.4. 이인복[52]

배우는 정성모.[53]

본래 귀족이지만 몇 되지 않는 개념인으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왕권과 나라가 바로서야 하고, 그러려면 지배계층인 왕과 귀족의 유대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인물. 신돈에 의해 새롭게 떠오르는 지배계층인 유학자들과 유가가 꿈꾸는 '배워서 더 나아지는 세상' 역시도 '배울 수 있는' 계층들을 위한 세상이라고 비난한다.[54] 유교 사상만을 답습하다 못해 미쳐버린 나라들의 모습을 예견하지만,[55] 신돈은 "그것이 귀족들이 미쳐버린 지금보다 더하겠냐"고 되묻는다. "바꿔봐야 헛수고라고 따지지 말고, 일단 바꿔나 봅시다" 뭐 그런 거다.

이제현 못지 않은 깊은 식견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암살을 계획하거나 사신으로 죽으러 가는 결단력 +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바로 선 마음을 가졌다. 뭐 이런 거 저런 거 다 가능한 퍼펙트 문관이다. 공민왕 즉위 직후 무렵에는 굉장히 시니컬한 말투가 특징이었는데, 점차로 나이를 먹고 정치적 비중이 상승하고 본인도 경륜이 쌓이면서 시니컬한 태도는 많이 줄어든다.

홍건적의 난 당시 도망치기 위해 대궐을 빠져나가는 조정 대신들을 붙잡고 "노비라도 내놓고 가라"고 처절하게 외치는 장면[56], 흥왕사의 변 당시 대궐의 여인들이 공민왕을 둘러싸고 있는 방을 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그곳을 쳐들어가려는 김용의 부하들에게 "불쌍한 대궐의 아녀자들까지 범하려 하느냐"고 호통치는 장면은 이인복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또한 기철을 죽인 후 기황후를 만나러 갔을 때에는 아예 "노모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왔다"고 말하면서 기철의 죄상을 줄줄이 읊는 등 배째라 식으로 대처하자, 기황후도 "죽으려고 작정하고 온 자를 어찌 하겠느냐"면서 죽이지 못했을 정도로 배포와 담력도 남다르다. 결국 이인복은 원나라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불사했고[57], 기황후도 "압록강을 넘지 말고, 원나라의 연호를 계속 사용한다"는 조건을 내걸면서 공민왕이 기철을 죽인 사건과 고려의 쌍성총관부 탈환을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58]

특히 "신이 요즘 꿈에서 신의 죽은 모습을 보옵나이다."로 시작하는 사직 장면의 이인복의 대사는 나이 든 신하가 바치는 최후의 충언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다칠대로 다치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공민왕은 면전에서는 말문이 막혔고 그가 떠난 후에는 "날더러 '중전편조 덕분에 이 자리를 지켰다'고 비꼬는 것이 아니냐"면서 비아냥거렸다. 한때 그를 관료들 중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친위세력으로 여겼던 것과 비교하면 씁쓸한 대목.[59]

하지만 이후 신돈을 죽인 후회를 이인복에게 토해낸 것을 보면 그래도 그를 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헌데 이 마지막 장면은 공민왕이 본 환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서 이인복이 사직하기 전 사망 플래그를 마구 깔아놓는데다가 시기적으로도 사망했을 쯤이기 때문이다. 즉 공민왕은 이인복의 환영을 볼 정도로 그를 신뢰했던 것이다.[60]

원래 이인복도 신돈에 대해서는 "일단 변방에 귀양을 보내자"고 하는 등 신돈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게다가 흥왕사의 변 당시 무문암을 박차고 나와 공민왕을 도우러 온 신돈에게도 "미안하다"[61]면서, "앞으로 자네에게 협조할 것'이라고 하는 등 신돈에게 협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꿔 신돈을 몰아내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신돈이 옥좌 옆 의자에 앉아 "덕흥군을 데리고 오라"는 등 원나라 사신을 갈군 사건이었다.

이인복은 "그 자리가 어디라고 거기에 앉았느냐"고 신돈에게 사자후를 토했고, 신돈은 "노비의 자식이 그 자리에 앉아서 불만들을 품은 것이 아니냐. 그 자리에 성산군이 앉았어도 불만들을 품었겠느냐"고 응수했다. 이후 이인복은 신돈의 정적 포지션을 확고히 한다.

그의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대사로 아래의 것이 있다.
"전하께서 새로운 길을 한걸음 나가시면 개혁이 되옵니다.
새롭게 하자는 것이니 따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옵니다.
허나 전하께서 두걸음을 나가시면, 모든 것이 급한 것이 되옵니다.
처음 가보는 길이니, 사람들이 불안하여 선뜻 따라나서지 못할 것이옵나이다.
하온데 전하께서 세걸음을 나가시면 그것은 천지개벽이 되는 것이옵니다.
전하.. 천천히 가셔야 합니다.[62]
천천히 가셔야 전하의 백성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실 수가 있사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급진파인 신돈에 대비되는 온건파 개혁가이며, 양심적인 동시에 관료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찌 보면 이런 인물들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진정한 충신이자 등장인물 중에도 첫손에 꼽히는 유능한 인물이지만, 결국 그도 신돈의 반대파로 신돈을 죽이는 편에 섰고, 그 후에 고려가 최후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신돈의 개혁 정책이 지나치게 독단적이고 과격하다고 생각했기에 반대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개혁하기에 고려는 이미 너무 망가져 있었다.[63] 결국 신돈의 방안보다도 과격한 개혁으로 문제가 해결되고야 말았다.

3.5. 이인임

배우는 배도환. 이인복의 동생으로 훗날에 방영된 《정도전》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권신으로 그려졌다면 여기에서는 우유부단에 소인배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춘부와 같이 신돈의 파벌로 활동하였지만 노골적으로 신돈의 이상을 지지한 이춘부와는 달리 신돈의 대의에 동조하는 편도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권력 때문에 신돈을 따르는 인물. 도리어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자 겉으로는 찬성하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재물을 숨기느라 난리를 치는 것을 보면 김원명 등과 유사하다.

이후 영전 건설 문제로 공민왕과 신돈의 사이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신돈의 몰락이 시작되자 어느새 이인복 파벌에 편입되고 초선을 비롯한 신돈측 인물들을 살해하는 데 앞장선다.

작중에서 다소 잘못 묘사된 감이 있는데, 실제로 전횡을 일삼기는 했지만 그것은 우왕 시절의 일이다. 공민왕 시기에는 동녕부 토벌, 전민변정도감을 통한 개혁, 요동 정벌 등에 참여했는데, 이 모두 공민왕의 뜻을 받든 것이었다. 즉 작중에서처럼 우유부단한 소인배는 아니었으며, 전횡을 일삼지만 동시에 고려의 안위도 어느 정도 챙기는 정도전의 이인임이 실제와 더 가깝다.

3.6. 이제현

배우는 송재호. 나이 지긋한 문관으로 유학자 이색의 스승. 유학자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제자들과 달리 '백성이 왕이 되는 세상, 백성 위에는 왕 한명이어야 한다' 를 말하는 신돈에게도 공감을 할 정도로 태평성대 그 자체가 목적인 인물.

공민왕이 대도에 있을 때 사신으로 왔다가 그의 일탈을 지켜보며 민망해 했었고, 공민왕 즉위 초 조일신의 난 때는 강안전에 갇힌 공민왕을 만나기 위해 유자이자 대신으로서 담을 넘는 짓까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월선이 불가에서 조용한 개혁을 대표한다면, 이제현은 유가에서 조용한 개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64]

나라와 백성을 위하고 자신이 유학자인지라, 정작 자신의 딸 혜비가 공민왕에게 총애받지 못하고 생과부 신세로 살아도 '도리를 지킨다'고 말하는 '유학으로 바로 선 백성의 나라'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개혁에 대한 필요성은 공감하면서 방향은 다르다고 봤으나 신돈의 설득에 협력하다가, 나중에는 이인복의 설득에 신돈에 반대하는 행동의 하나로 관직을 내놓고 물러나서 후학을 양성한다. 그러다가 조정 중신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전민변정도감이 좌초한 데에 이어, 월선이 죽기 전 보우에게 간절히 부탁한 덕분에 신돈이 보우로부터 다시 구족계를 받고 승적에 이름을 올린 뒤 일시적으로 정계를 떠난 상황에서 제자 이색으로부터 "전하께서 불안감에 실성한 상태로 지내고 있고, 스승님편조를 그리워 한다"는 취지의 소식을 듣는다. 그러자 이제현은 "전하께서 전민변정도감을 세우셨을 때, 내가 편조를 도왔으면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섰을 것"이라고 후회한다.[65]

3.7. 김원명

배우는 김병춘. 공민왕의 외사촌이자, 명덕태후의 정치적 측근이다. 조정 대신들 중 경천흥과 함께 신돈을 가장 격렬하게 싫어하는 사람으로 꼽힌다. 공민왕은 김원명의 집에서 신돈을 다시 만났고, 노국대장공주도 김원명을 통해 신돈을 입궐시켜 다시 만났다. 공민왕에게 "편조에게 작은 벼슬이라도 줘서 곁에 두면 될 것이 아니냐"며 슬쩍 말을 건넨 적도 있지만, 떠보는 말에 불과했다. 신돈에게 "분수를 알아야지, 천한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이 그의 본심이다.[66]

이런 성격 탓인지 공민왕도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흥왕사에서 도망치지 않은 김원명에게 "왜 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김원명이 "전하의 정책에 반대할 뿐, 역신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는,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경천흥까지 꼬드겨 함께 도망치는 등 공민왕이 외사촌임에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잘 드러난다. 신돈과 그의 정책에 대해서는 "이러다 소똥이·말똥이 하는 놈들이 조정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꼴을 볼지도 모른다"면서 격렬히 반발했다. 이후 경천흥과 함께 영도첨의가 된 신돈을 암살하려다가 적발돼 곤장을 맞고 노비 신분으로 전락한 채 귀양을 갔다. 곤장을 맞을 당시 "나는 매가 약하니 살살 쳐 달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압권이다.

아내도 노비가 됐고, 이를 피하기 위해 노비로 변장했지만 본인의 집을 습격한 원현에게 적발돼 "노비 주제에 손이 참 곱다"는 조롱을 당한다. 노비가 된 후, 오물을 퍼나르는 일을 하다가 군졸들에게 매를 맞는 처지가 됐고, 동생 김속명에게 보낼 목적으로 재기를 꿈꾸는 취지의 서신을 작성했지만, 미처 보내지 못한 채 누군가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한다.[67]

3.8. 경천흥

배우는 김명수.[68] 경복흥이 본명인데, 초명인 경천흥으로 등장한다. 김원명 단락에서도 언급했듯 조정 대신들 중에서도 신돈을 싫어하다 못해 원수보듯 여기고 있는 인물이다. 신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장면이 자주 나오며 김원명과 함께 암살 시도를 했을만큼 권력을 가지고 있던 신돈을 증오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처신에는 일절 문제가 없는 청렴한 수구로 단지 신돈의 개혁과 정치적 성향에 반대하는 것뿐이다. 이는 신돈도 인정할 정도. 허나 그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 고려에 대한 개혁적 비전도 일체 없기에 한계가 뚜렷한 인물이다.

3.9. 유인우

배우는 김영인. 태조 왕건에서 이총언 역을 맡고, 제국의 아침에서는 박수문 역을 맡았다.

기철 일파를 숙청한 공민왕한테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정한다. 동북면에서 이성계 부자를 만나 1일 안에 항복하라고 엄포를 내놓고, 조소생나하추에게 붙자 쌍성총관부에 무혈입성한다. 그리고 술을 먹고 취하여 투항한 쌍성총관부의 무인들에게 "너희는 평생 역적으로 살게 될 것이다"라며 비웃고, 이에 한소리 하던 조도치를 죽인다. 이후에 여진족을 토벌한다는 핑계로 출정하려 하지만 이성계 부자에게 역관광 당하며 반강제적으로 개경에 가게 된다. 얼마 후 덕흥군과 최유가 고려를 침공하면서 자신도 같이 출정하지만 이성계에 의해 죽는다.

3.10. 인당

배우는 이종구. 공민왕을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만큼 공민왕이 인당을 죽인 일을 어떻게든 합리화하기 위해 극 초반에 이인복를 시기하는 등 성격부터 개차반인 전횡을 일삼는 인물로 비하시켜놨다.

기철 일파를 숙청한 공민왕의 명령을 받고 요동으로 출정하고, 압록강 부근에서 진을 치다가 유인우가 쌍성총관부에 무혈입성했다는 소리를 듣고 출정을 명령하지만 비협조적 태도를 보이는 강중경을 포박하여 참수한다. 그날 밤에는 최영에게 당장 출정하라며 난리를 치고, 결국 멋대로 파사부와 팔참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공민왕의 귀에 들어가면서 공민왕은 인당을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3.11. 이춘부

배우는 임병기태조 왕건에서는 신덕, 야인시대에서는 박헌영을 연기한 배우. 실제 역사에서는 미남이라고 칭찬받을 정도의 인물이지만, 작중에서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

흥왕사의 변 이후 이인임, 경천흥과 함께 등장하였으며 궁중 안에서 신돈의 지지자로 행동한다. 형이자 신돈의 최대 정적인 이인복의 눈치를 살피면서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이인임과는 달리 노골적으로 신돈의 행동을 지지하며[69] 원현과도 노선을 같이 한다. 이 때문에 경천흥 등에게 종에게 붙어먹은 배신자로 낙인 찍힌다.

이후 공민왕이 신돈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을 때 신돈의 입궐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 하였고, 정전 밖에서 신돈을 죽이면 공민왕에게는 우군이 없어진다며 외치다가 살해당한다. 이후의 전개를 생각하면 정확하게 들어맞은 셈.

4. 왕실 주변 인물

4.1. 안도치 (안환관)

배우는 이정섭.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로 가서 내내 수발을 든 수족 중의 수족이며,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극중에서는 신돈과 공민왕, 노국공주 세 사람을 서로 이어주는 다리 같은 역할을 한다.

어릴 때부터 공민왕을 수발 들며 공민왕이 강릉대군 시절 원에 온 김에 자신을 찾아온 보우에게 '내 어머니는 태후가 되고 싶어서 나를 찾는 것이다' 라고 한탄하면서 '나를 위해 눈물 흘려주는 이는 이제 안도치 뿐이다' 라는 신뢰의 말을 할말큼 공민왕의 신하라기보다는 그냥 몸의 일부. 성향적으로도 아주 순수하고 선한 인물로 연경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한낱 땡중이나 다름없는 편조를 잘 대해주기도 하고 흥왕사에서 공민왕의 대역을 맡게 되자 이를 편조가 걱정하자 자신이 위험하면 대사(편조)가 도술을 서서 지켜주지 않겠냐며 신돈을 농으로 위로해주기도 했다.

나중에 흥왕사의 변에서 가짜 수염을 달고 용포를 입은 채 공민왕인 척 위장하여 공민왕의 목숨을 구하고 죽는다. 죽기 전에도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노국공주를 오히려 위로해 주며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는다.

4.2. 최만생

배우는 이두섭.[70] 환관들 중에서는 2인자격이며 안도치 사후에는 공민왕의 최측근이 되는데 안도치와 달리 간신배라서 가뜩이나 정신이 불안정해지는 공민왕한테 더욱 악영향만 준다. 극 초반부터 공민왕과 그가 견제하려 했던 권신의 사이를 수시로 오가면서 서로의 동정을 전달하며 이득을 챙기려는 모습을 보이며, 극 후반부에는 신돈과 공민왕을 이간질한다. 자객들이 신돈을 살해한 후에는 공민왕 앞에서 눈치 없이 편조(신돈)의 머리를 효수해야 한다느니, 편조의 죽음을 알면 백성들이 난동을 부릴 테니 편조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어야 한다느니 어그로를 끌다가 분노한 공민왕이 마구 칼을 휘두르자 허겁지겁 도망가는 추한 꼴을 보인다. 결국 역사대로 자제위에게 공민왕을 시해할 것을 사주하고 주도한다.

4.3. 반야

배우는 노국대장공주와 동일한 서지혜.[71][72][73]

드라마 상 가장 불쌍한 인물... 뱃속에 있을 때 어머니가 원나라공녀로 끌려가는 걸 말리다가 아버지를 잃고 끝내 신돈과 원현의 도움으로 어머니가 끌려가는 것은 저지되지만, 마음고생한 어머니는 반야를 낳고 죽는다.

이후 절에서 월선의 손에 키워져 신돈을 따랐고,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의 눈에 들어 모니노, 후일의 우왕을 낳는다.[74] 그러나 곧 모니노마저 빼앗기고 후환을 없애려는 공민왕의 명으로 홍륜을 포함한 자제위들이 가마에 태워 궁으로 가는 척 속인 뒤 임진강으로 끌고 와 천으로 입을 막고 움직이지 못하게 밧줄로 결박한 뒤, 두 발을 돌이 매달린 밧줄로 묶어서 강물에 던져 익사시킨다.[75] 61회, 해당 장면1 2 그리고 공민왕이 광기부리던 밤에 재갈과 밧줄이 모두 풀려진(!?) 반야의 시신이 떠올라 강을 따라 바다로 흘려간다.

4.4. 명덕태후

드 : 명덕태후 지문을 보면서 (드라마몹) 편집진들이 많이 웃었어요. 대본을 보면 ‘캬악 웃는다.'로 나와 있는데, 연기자 분께서 기가 막히게 연기하세요. 소름이 쫙 돋잖아요. 캬악 웃는다.. 그런 지문은 처음 봤거든요.(웃음)

정 : 그렇게 써놓으면 자기 웃고 싶은 대로 웃겠죠.(웃음)

드 : 명덕태후 그분이 나오면 머리가 아플 정도에요. 그 웃음소리 하며, 단순한 시어머니의 강짜가 아니잖아요. 몽고에 대한, 몽고 여인에 대한 한이 서려있는 아주 복합적인 캐릭터...

정 : 사실 명덕태후와 공민왕은 정이 없어요. 같이 산 적이 없거든요. 사람들이 왜 저러나 그러는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급증이 있어서 빨리 알고 싶어 하잖아요. 근데 그러면(빨리 알려주면) 드라마가 천해지는 거예요. 완전히 까발려진 드라마에 익숙해 져서... 느껴야 되는 것도 말로 다 설명해버리고, 소리가 안 들리면 드라마를 안 보는 시대가 됐어요.
정하연 인터뷰
신돈 방영 당시 신돈 갤러리에서는 뺑덕태후, 명태(...)라고 불렸다.

배우는 엄유신. 고려 여인으로 충혜왕공민왕의 어머니. 그런데 남편 충숙왕에게는 복국장공주라는 원나라 공주 출신 정비가 있었다. 복국장공주가 죽은 후에는[76] 조국장공주가, 조국장공주가 죽은 후에는 경화공주가 원나라에서 충숙왕에게 시집왔다. 그래서 남편에게 총애를 받았음에도 평생 원나라 공주 출신 왕비들의 그늘에 가린 삶을 살아야 했던 여자.

그러다보니 원나라 여자를 싫어하고, 역시 원나라 공주로서 고려 왕비가 된 두 며느리(덕녕공주노국공주)를 싫어한다. 둘째아들 강릉대군마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도록 결정되었을 때 펄쩍 뛰고, 따로 이제현의 딸을 왕비로 들이려 준비했을 정도. 평생 그늘에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아들이란 그늘에 가린 자기 삶에 광명을 되찾아줄 존재다. 충목왕이 요절하고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 강릉대군이 왕위에 올라 자신의 한을 풀어주나 했더니, 충혜왕의 서자인 충정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결정나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만월대가 떠내려가라고 한을 토하는 장면이 압권.

아들이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잘 따르고 자신을 높여주며 권력과 권위와 지위를 정당화해주는 존재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신돈을 앞세워 개혁을 시도하다가 권문세족들과 갈등을 겪는 공민왕과 대립하게 되었는데, 썩을대로 썩은 고려를 개혁하기보다는 그저 아들이 옥좌나 지키면서 자신의 권위를 세워주기를 바랄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민왕은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의지하지 못했으며, 이 상황에서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그녀를 위한 영전 공사에 매달리게 되었고 마지막 남은 기둥인 신돈마저 죽자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다.

며느리인 노국대장공주에게 호된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도 이 때문으로, 며느리가 자신에게 복종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려 했기 때문. 그러나 노국대장공주에게 이 말은 Welcome to Hell이나 다름없었으며, 그녀가 출산 도중에 죽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들의 대를 이을 손자를 원했던 명덕태후의 압박이었다.

4.5. 덕녕공주

배우는 김여진[77]. 본명은 '보르지긴 이렌첸판(孛兒只斤 亦憐眞班)'이며 충혜왕의 정비, 충목왕의 어머니로 충목왕 재위기에는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병약한 충목왕을 할머니 집인 명덕태후저에 피접보내는 등 과단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아들 충목왕은 어린아이인데도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의 정치적 입지가 아주 곤란해질 것을 잘 아는 영특한 아이로 그려진다.

충목왕이 끝내 사망하자 원나라로 일시귀국했다가 이후 공민왕 3년에 다시 고려로 돌아온다. 극중에서는 고려로 돌아온 것이 공민왕을 감시하려는 기황후의 술수인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공민왕의 동태를 감시하라는 기황후의 명령은 쿨하게 씹었으며, 한편으로는 같은 몽골 여인인 노국대장공주와 자매처럼 정을 나누고 충고를 해주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 왕실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할 때 부드럽게 중재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덕녕공주를 형수로 정중하고 부드럽게 대하던 공민왕노국공주와 신돈이 죽고 실성해서, 노국공주를 생각해서라도 자제위와 후궁들의 문란한 행각을 금하고 정사를 돌보라며 충고하는 덕녕공주에게 "진작에 몽골로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면서 "대비를 보면 원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한 것이 떠올라서, 대비의 기침소리도 듣기 싫다"고 쏘아붙이기도 한다.

"노비의 자식을 만족시키려면 세상을 다 줘도 부족할 것"이라고 반응[78]하는 등 공민왕·노국대장공주신돈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실성한 공민왕신돈을 죽이려 하자 "신돈이 없으면 누가 전하를 지켜주겠느냐"고 반대하거나, 신돈이 죽은 뒤 술에 찌들어 지내는 공민왕에게 "전민변정도감을 하루아침에 없애서야 되겠느냐"는 직언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신돈의 개혁 취지에는 동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실제 덕녕공주의 경우는 평가가 좀 갈리는 인물로서 어린 충목왕 대신 섭정으로서 활동했으나 배전(裴佺)이나 강윤충(康允忠) 같은 권신들을 총애해 그들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배전의 경우는 그의 죄목을 적은 고발서가 나붙을 정도로 평이 나빴는데 고발서 사건 이후 공식적으로만 멀리했지 공주의 거처에 자주 드나들며 정사에 관여했다. 그리고 충목왕이 죽은 이후 기철에게 정동행성 관리를 맡긴 것도 덕녕공주였으며 후임인 충정왕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정사에 간섭했는데 원나라의 공주 출신인지라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79] 드라마 속 모습처럼 그저 다정다감한 인물이었다기보단 권력욕이 강했던 인물.

4.6. 보우

배우는 임혁.[80] 흥륜사의 주지이며 고려의 왕사이다. "중은 불법에 정진하면 된다"고 믿고 백성들을 돕는다. 언제나 편조 앞에 완고했고, 편조의 일탈적 행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나중에 '편조가 꿈꾸던 나라는 부처님의 나라니라'하면서 그의 사상을 지지하긴 하지만, 편조의 방식에는 한 번도 동의한 적이 없었던 인물. 세월이 흐르고 오랜 뒤에는 부처님의 나라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사람의 힘으로 당기는 개혁은 거부했던 인물이다. 다만 편조의 요구에 따라 왕사 자리를 내놓고 길을 떠날 때, 전민변정도감의 운영으로 사찰의 노비가 대거 해방되어 승려들이 불만을 토로하자 '내가 보기에도 노비가 너무 많다'며 불만을 일축하고 법왕사를 나가는 것을 보면 문제 상황은 인식하고 있었다.

가장 근본적인 부분은, 신돈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무엇이든 끌어 쓸 수 있고 자신의 뿌리인 불교를 약화시키려고까지 했지만, 보우는 모든 것을 불교를 기반으로 하려 했고 이 안에서만 행동하려 했다는 것이다. 국가의 흥망은 부처님의 뜻에 비해 티끌같다는 말이나, 필요할 때만 불가를 찾는 조정에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반응 등에서 보이는 부분.

5. 원나라 측 인물

5.1. 기철

파일:신돈 기철.png

배우는 이대연. 기황후의 오빠이자 기황후 덕에 권세를 부리는 친원세력의 핵심. 노국대장공주의 부친상 소식으로 준비된 계략에 걸려 왕비 부친상에 문상을 갔다가 죽게 된다.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다가 안 통하자 공민왕에게 저주를 퍼붓는데, 막상 칼을 맞자 이렇게 죽기는 싫다며 또 살려달라 애원하고, 이것도 안 통하자 다시 공민왕을 저주하는 등 순식간에 감정이 표변하는 이대연의 연기가 압권.

5.2. 기황후

파일:기황후7.jpg

배우는 김혜리. 일개 공녀에서 시작해 마침내 원나라의 황후까지 된 인물. 모국인 고려에 대해 애증을 품고 있다. 처음엔 강릉대군을 보고는 그 마음 속에 숨긴 원나라를 향한 비수를 알아보고는 절대 그에게 고려왕 자리를 주지 않으려 했으나 보탑실리가 아버지 위왕을 살리기 위해 강릉대군과 결혼하는 와중에 그를 고려왕으로 삼아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면서[81]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인지 허락한다.

그리고 강릉대군의 고려왕 즉위가 결정되자, 직접 면대하면서 '자신을 공녀로 팔아버린 부모와 고려가 원망스러웠다"고 하는 한편, 고려가 부강해져야 황태자이자 고려인의 핏줄을 받은 자기 아들이 당당해질 것이라 말하며 고려를 부강하게 만들어 달라 당부했으며, 자신을 만나러 온 기철에게도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 착취했다는 소문에 또 이름이 올라가면 그 때는 기씨 문중과 인연을 끊겠다"고 단호히 말하며 단속하기도 했다. 아래의 대사는 고려왕 즉위가 결정된 강릉대군에게 남긴 말이다.
"나는 고려가 싫었다. 나는 고려가 미웠다. 그런데 어쩌겠느냐 , 내 몸에 고려의 피가 흐르거늘... 돌아가거든 고려를 그 어느 나라보다 강한 나라로 만들거라."

그러나 공민왕이 결코 녹록지 않은 인물임을 알고 있었기에 여러번에 걸쳐 그와 노국대장공주(보탑실리)을 기를 꺾으려 들었으나 실패했고 자신의 친정인 행주 기씨 가문의 부원배들이 제거 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적대적인 입장이 된다.

초반에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대제국의 최고 권력자로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지만, 이후 원나라가 안팎으로 여러 위기를 겪고 개인적으로도 몇가지 통제 수단을 잃으면서 함께 포스도 잃었다. 중반부 고려가 독립을 선언할 때, 몇가지 조건을 걸면서 그 조건을 어길시 고려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는 장면을 보면 이빨과 발톱이 빠진 늙은 호랑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5.3. 박불화

파일:신돈 박불화.png

배우는 남영진. 자정원사(資正院使)[82] 기황후와 동향이라서 환관이 된 후 기황후가 황후가 되는데 공을 세운 인물. 원래 고려에서 주로 활동한 원나라의 환관은 고용보인데 고용보의 캐스팅이 해당 드라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려에서의 활동 또한 모두 박불화가 한 것으로 묘사된다.

조일신의 난 이후 직접 고려로 가 공민왕으로 하여금 기황후의 생모인 '영안왕대부인 이씨'에게 엎드려 절하며 사죄하게 했고 관련자를 무수히 죽였다.[83] 고려에서 발아찰을 열었을 때는 공민왕이 원의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와 영안왕대부인에게 절을 한 뒤 술을 따르게 하는 굴욕을 겪게 하기도 했다.

46화 즈음에 패라첩목아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감숙으로 귀양을 갔으나 반란이 진압되면서 복귀했고 이후 비중이 줄어든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패라첩목아가 반란의 사유로 승상 초스긴(搠思監)과 박불화의 제거를 들었기 때문에 귀양을 보내기도 전에 살해당했다. 즉 드라마에서 생존한 채로 등장한 건 사실 오류라고 할 수 있다.

5.4. 쿤란 태자

파일:신돈 쿤란태자.png

배우는 오건우. 가상의 인물로서 원 순제와 폐후 다나시리[84]의 아들로 등장하며 보탑실리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으나 보탑실리의 아버지 위왕이 쿤란을 황제로 옹립한 뒤 원나라를 둘로 나누려는 역적으로 몰리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무산되고 쿤란 태자는 끌려간다.

다나시리의 경우는 성질이 포악했고 순제의 즉위를 방해했던 권신 엘테무르의 딸이었기 때문에 순제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때문에 순제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있을 리 만무했고 또한 드라마 신돈에서는 직접 등장하지 않으나 기황후보다도 높은 제 1황후 직분을 가지고 있던 이는 바얀 후투그 황후였는데[85] 그녀에게도 '친킴'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불과 2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다. 때문에 쿤란 태자라는 인물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5.5. 원위왕

파일:신돈 위안.png

배우는 안치용. 직책은 위왕(魏王)이며 본명은 '베이르테무르'. 보탑실리의 아버지이기에 공민왕에게는 장인이 된다.

작중에서는 딸인 보탑실리가 원나라의 제 1 계승자인 쿤란 태자와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이를 경계한 기황후는 쿤란을 제거하고 싶어했으나 명분이 없었고 그 사이 위왕은 직접 황제를 찾아가 정신을 차리고 몽골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간언했으나 당시 약과 방중술에 취해 있던 황제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이후 역도들을 모아 원 제국을 분할해 몽골 고원에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직접 황제에게 추궁을 받았다.[86][87]

결국 쿤란 태자는 변방으로 쫓겨났고 위왕은 복위되긴 했으나 실권을 잃고 칩거하며 살았다. 이후 보탑실리와 혼인한 공민왕이 고려 내의 기씨 일가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기황후는 고려왕을 지원하는 보탑실리를 막고자 박불화를 보내 위왕의 편지와 더불어 쿤란 태자 복위를 모의하는데 위왕이 적극 협조한다면서 압력을 가했으나 보탑실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후 순제가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임명하고 자신에게 하듯 충성을 다하라고 하자, 홀로 의연하게 몽골의 태자는 쿤란 뿐이라면서 무릎꿇기를 거부하다가 체포되었고[88] 얼마간은 목숨을 부지했으나 결국 보탑실리에게 마지막 서신을 남긴 후 독을 마시고 죽었다.

보탑실리의 아버지인 탓에 상당히 미화된 인물이다. 실제 베이르테무르는 하남(河南)에서 벌어진 백련교의 난을 진압하러 떠났으나 술에 취해 방비를 하지 않은 탓에 결국 백련교도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한 약간은 무능한 인물이었다.[89]

5.6. 패라첩목아가 보낸 사신

파일:신돈 패라첩목아.png

배우는 왕태언. 패라첩목아(베이르테무르)가 황제에게 양위를 강요하는 기황후의 횡포를 보고 못 참아 반란을 일으켰다고 유탁에 의해 언급되며 반란이 성공한 이후 황제의 명을 빙자해 공민왕의 복위를 전달하러 온 사신.[90][91] 강릉대군을 다시 왕으로 삼고 덕흥군을 폐하며 박불화는 감숙으로 유배를 보내고 고려에는 따로 최유를 압송해 온다.

그러나 공민왕 옆에 앉아있던 편조[92]가 왜 덕흥군을 보내지 않냐고 호통을 치자, 사신은 감히 황제 폐하의 칙서를 논(論)하자는 거냐며 반박했지만 편조가 원이 고려와 화친하고 싶으면 덕흥군을 잡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공민왕이 그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5.7. 완자불화[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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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서광재. 박불화와 같이 고려에 와서 충정왕을 폐위시킨다.

5.8. 원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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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이석구. 몽골 제국의 16대 칸이자 원나라의 11대 황제. 강릉대군을 고려의 31대 왕으로 책봉시킨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군주의 모습으로 등장하나, 점차 기황후의 모략으로 라마승들이 바치는 미약방중술에 취해 암군으로 변해간다.

여담으로 배우의 영향인지 순제의 모습이 흡사 쿠빌라이가 연상될 정도로 풍채는 좋으나 기황후가 제 2황후 자리에 올랐을 때 순제의 나이는 고작 20살에 지나지 않았다. 즉, 드라마에서 캐스팅한 인물이 나이대 고증에 있어서 미스캐스팅이다.[94]

5.9. 최유

5.10. 덕흥군

6. 홍건적

6.1. 관선생

파일:신돈 관선생.png

배우는 금동현.[95] 동계홍건군 장군으로, 송나라의 소명제(한림아)와 유복통의 명을 받고, 사유와 반성, 주원수, 위평장, 파두반 등과 함께 고려를 침공하고 개경을 점령해 왕좌에 서기까지 하지만 전령을 통해 고려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음물에 적신 가죽을 성벽에 내건다. 이후 등장은 없지만, 행적을 봐서는 정세운 등에게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6.2. 관선생의 부관

파일:신돈 홍건적.png

배우는 이상인. 모거경의 1차 침입 이후인 1361년 고려 조정에 홍건군을 협조하라는 칙서를 보내지만 대신들의 분노를 사 최영한테 옥에 갇히고 다시 풀리면서 다시 사령부로 간다. 이때문에 홍건적은 다시 고려에 쳐들어오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7. 유림 및 신흥 무인 세력

7.1. 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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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전인택. 유림의 실질적 수장격으로 정치적인 목적은 '유교사상에 기반한 신분사회 추구' 지만, 신돈의 유교장려에 일단 신돈에 힘을 보탠다. 이인복이 신돈에게 말하는 '배울 수 있는 자들만의 또 다른 계급사회' 를 추구하는 사람.

고려 말 유학자들로 꼽히는 정몽주, 정도전, 김구용 등이 모두 그의 문하[96]. 신돈이 성균관을 재건하는 등 유림에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하자 장차 유학자들을 정치 전면에 세우기 위해 신돈의 개혁에 편승한다. 그러나 신돈이 공민왕과 대립하는 시점에서부터는... 갓 일어서기 시작한 유림이 정치대립에 휩쓸릴 것을 우려하며, 기존의 관료와 계층 시스템을 무너트리는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하는 신돈에게 거리를 둔다.

후일 신돈 사후 모든 개혁정책이 되돌려 지는 것을 보며 유림의 주도 세력들은 "우리가 큰 인물을 잃었다" 라고 후회한다.[97]

7.2.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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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정하연 사단 레귤러 급으로 꼽히는 이진우.

본래 쌍성총관부 천호인 이자춘의 아들로 아버지의 판단을 따라 고려에 투항했지만 중간에 유인우와 갈등을 빚으면서 잠시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유인우의 숙청 이후 마음을 다잡고 고려에 충성을 바치기로 다짐했으며 이자춘의 사후 동북면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홍건적의 난 때도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된 뒤 참전하여 가장 먼저 동대문을 돌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최영과 함께 덕흥군을 물리치고 요동을 정벌했다. 정치적으로는 최영과 함께하나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전쟁에 주로 임하기에 신돈에게 최영이 당할 때도 무사했다.

최종화에서는 왕명에 의해 신돈이 죽는 과정을 지켜보더니 "신돈을 죽이라는 왕명은 없었다"라며 원현이 신돈의 시신을 수습해 궁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한다.[98]

작품의 주된 조명이 공민왕과 신돈에게 향하고 있어서 비중이 아주 크진 않지만, 그 적은 비중이 내에서도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데, 신돈의 분명한 정적도, 그렇다고 조력자도 아닌 애매한 처세를 택한다. 매체에서 그려내는, 개혁성향과 정의감에 불타는 일반적인 이성계 인물상과 다르다면 다른 점. 특히 이 애매한 처세 역시 본인의 이해득실에 따른 것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최영과 함께 군부 권력의 한 축이 되었으며 조정 회의에서 "이성계탐라 정벌에 보내는 것이 어떠냐"는 공론이 나오면서, 최영이 "앞으로 큰 전투는 내가 직접 지휘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군권을 놓지 않으려고 하자, 불쾌해하는 모습이 나온다. 훗날을 암시하는 장면인 듯하다.

훗날 조선을 세우는 이성계지만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순수한 군인으로서의 면모가 더 부각되며 오히려 최영이 더 정치군인 같은 면모를 보였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본인과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이며 유인우와의 대립이나 신돈의 시신을 수습한 원현을 보내주는 모습, 최영의 독선을 불쾌해하는 모습 등을 통해 미래의 행적을 암시하고 있다.[99]

7.3.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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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최상훈.[100]
충신이라는 이미지 대신에 권력을 탐하는 정치군인의 이미지가 형성되어 꽤나 흥미있는 전개를 보였다. "왕이 조일신·정세운·김용을 죽였다"고 믿는 등 공민왕을 불신하는 것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원인으로 암시된다. 특히 신돈이 죽은 후 공민왕과의 독대에서 공민왕을 반 협박하여 군권을 얻어내는 장면은 흥미롭다. 고려 군부의 장수 대부분이 최영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기 때문에, 무신정권이 다시 수립되는 것을 우려한 공민왕과 신돈의 경계를 받기도 했다.

8. 그 외

8.1. 이자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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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전병옥. 이성계의 아버지이자 쌍성총관부 천호장으로 정세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 수복을 노린다는 것을 알아채고 고려 유민으로서의 삶도 자신의 대에서 청산하기 위해 이인복과 접선하여 투항의 의지를 비친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조소생이 움직이지 못하게 했으며 이후 조소생을 끌어내리고 동북면의 실세가 됐고 쌍성총관부의 천호들을 설득하여 고려에 귀순하게 한다.

중간에 유인우와 충돌이 있었지만 그 유인우가 숙청되고 난 뒤에 대중대부 사복경에 임명됨과 동시에 공민왕이 개경 바깥에 마련한 집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동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어 동북면에 돌아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유언으로 "우리 가문이 살 길은 고려에 충성하는 것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물론 미래는 알다시피...

8.2. 조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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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윤순홍. 쌍성총관부 총관이지만 식견이 좁아 정세를 잘 파악하지 못한다.

쌍성총관부 수복 당시 기철 일파의 농간에 놀아나 공민왕을 끌어내리는 반란에 동참하려 하나 천호들의 중립적인 태도와 이자춘 부자의 제지로 실패한다. 이후 쌍성총관부가 수복되기 직전 고려군을 쓸어버리겠다고 밝히자 이자춘과 이성계,조도치한테 참교육 당하고 도망가는데, 나하추한테 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성계가 나하추를 물리친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8.3. 라마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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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채용.[101] 신돈과 원현, 지효가 티벳사원(포탈라궁)을 방문했을때 교육을 해준다.

8.4. 아라비아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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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불명. 티벳사원(포탈라궁)에 가던 신돈 일행이 우루무치사막에서 쓰러지자 낙타를 타고 달려와 물을 주고, 신의 가호를 빈다며 떠난다.

[1] 이 배역에는 유동근 최민식 등이 거론됐다[2] 실제 신돈의 어머니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인 계성현의 옥천사라는 절에 딸린 노비였다.[3] 겉으로는 쾌활해 보이나 항상 세상에 대한 분노와 그것을 뜯어 고치려는 야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월선으로부터 "세상을 미워하지 마라, 편조야" 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4] 극중 이 여자가 반야의 어머니로 설정된다.[5] 이것도 중요한 경험이 된다. 강력한 악천후를 만나서 배가 난파되게 생겨서 겼는데 승려들은 염불만 하고 있던 것. 선원들이 도와달라고 사정사정을 해도 그러고 있었고 신돈이 도우러 가자 "부처를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 니놈이 부처를 구하는 게 아니라 부처께서 너를 구해주실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고, 결국 배는 침몰했다. 입으로만 부처님을 섬긴 결과를 뼈저리게 겪은 것. 티베트에서의 고행과 연결되는 부분이다.[6] 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내면에 아직 불길이 남아 있음을 원현을 통해 암시한다. 원현은 신돈의 수족으로 행세하면서 도넘는 과격행위를 일삼는데, 신돈은 원현을 전혀 제지할 생각을 안한다. 특히 전민변정도감에서 이름없는 지주를 원현이 과격하게 문초할 때 신돈의 반응이 묘한데, 처음에는 말리려 일어나는 듯 하다가 곧바로 다시 앉아 방관한다.[7] 몽골의 것을 모두 버리는 장면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옷과 애용하던 활과 화살통을 불 속에 던져 버리며, 이전까지 거의 친구처럼 지내던 하녀가 자신도 버릴 거냐고 오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을 끝으로 그 하녀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조차 버린 듯.[8] 그러나 45화 마지막 장면에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아이를 낳기 위해 동침하려는 모습을 우연히 보고 씁쓸해하는 장면이 있는 등, 공주를 계속 연모하는 것으로 보인다.[9] 티베트인들이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음식[10] ...는 페이크고(...) 서역의 고승에게서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불법으로 구원될 세상이었다면, 이곳 서역에 왜 굶어죽는 이가 있겠냐??"는 말을 듣고 행동하지 않는 종교로는 이상과 현실을 극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11] 귀국 후에는 현실이 시궁창인데 부처님 도 닦는 소리? 깨달음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불가를 벗어나게 되고, 권력을 잡은 뒤에는 오히려 유교가 왕권강화와 개혁에 어울린다고 판단해 유림을 키우게 된다.[12] 보우도 월선과 편조의 특별한 관계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머지 머리는 월선더러 깎아달라고 하라"면서 머리카락을 잘라주기만 했다.[13] 문을 봉쇄해버린 암자. 요즘도 템플스테이에서 가끔 쓰인다. 물론 하루나 이틀짜리. 밥은 밖에서 봉창을 통해 넣어준다.[14] 그가 참선수행하는 승려라는 점을 양쪽이 잘 이해하고 있어서 따로 화해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일반적인 인간관계라면 친한 이가 강간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수행을 깰지 말지 망설이느라 도워주지 않았다면 바로 절교다. 지효를 비롯한 몇몇 스님이 나타나 겨우 위기에서 벗어난 뒤, 초선의 집사 박 서방은 "이런 게 부처님의 뜻이냐"면서 신돈을 크게 원망한다.[15] 노국공주가 강제로 문을 열고 끌어내다시피 한다. 신돈은 할 수 없이 참선을 중단하는데, 이를 곁에서 본 초선은 그 이후 노국공주를 더욱 질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전에도 신돈이 사모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라이벌 의식 비슷한 것을 느끼는 모습은 보였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선을 넘지는 않았는데, 이 시점 이후로는 공주가 출산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대단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임신할 것을 종용하기까지 한다.[16] 그러나 사실 공민왕의 기대대로 행동한다면 신돈은 간신이 되어 버린다.[17] 신돈은 "내가 요술을 부린 게 아니라, 요술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헛것이 보인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어쨌든 헛것을 보는 상대를 즐긴다.[18] 신돈의 아버지는 신돈이 자기 자식인 줄 모르고 그냥 수행을 위해 떠도는 승려라고만 생각하며 예를 갖추어 대접한 후, "옛날에 자식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 아이를 위해 명복을 빌어주십시오."라고 부탁함.[19] 김용이 권력 잡고 비리도 많은 모습으로 나온다.[20] 극중 조일신은 반원세력의 핵심이기도 하다.[21] 공민왕원나라에 있던 아주 어린 시절에 변발을 했었다고.[22] 정세운이 빠진 것은 정세운은 우직한 인물이라 믿고 의지했다고... 어떤 성향이 없이 호위에 충실했던 듯하다.[23] 편조와 함께 엽색행각에 나선 적까지 있다.[24] 조일신은 대도에 있을 당시 당장 기황후에게 선보러 가야 하는 상황에서 공민왕이 술에 취해 헤롱거리자 찬물바가지를 퍼부은 적이 있다. 이때의 수모를 두고 이야기한 것.[25] 원나라를 내쫓았더니 이번에는 명나라가 횡포를 부리자, 호랑이 없는 산에는 여우가 왕 공민왕은 이래도 시궁창 저래도 시궁창인 현실에 좌절한다.[26] 그나마 남아있던 충신 이인복은 노국공주, 편조, 조일신, 김용, 정세운, 안도치(이 6명은 공민왕의 연경 시절부터 인연이 있는 오래된 사이)만큼 공민왕과 인연이 깊지 않아 둘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관계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나이 때문에 얼마 안가 사퇴한다.(그래도 이인복은 공민왕이 조정 대신들 중 이제현과 함께 가장 신뢰하고 믿던 인물이었다.) 충신의 대명사인 최영의 경우, 본 드라마 속 최영은 충신보다는 정치군인의 면모가 더 강하다.[27] 백골 그림을 그려놓고 그 앞에서 공민왕이 잠든 상태였는데 홍륜과 최만생 등 공민왕을 시해하려는 이들이 들어와 자던 도중에 시해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처음 공민왕을 살해하러 갔던 청년들은 아무래도 상대가 왕이어서 그런지 공민왕을 눈앞에 두고도 찌르지 못해 쩔쩔매는데, 처음부터 시해를 사주했던 환관 최만생이 먼저 찌르자 공민왕이 자던 도중 눈을 흡 뜨고 일어나 그들을 쳐다보다가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누워버린다. 이에 겁에 질리다시피 한 자제위가 연신 그를 찔러댔고, 공민왕은 잠자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비명도 못 지르고 시해된다.[28] 죽는 그날 밤 아들 모니노를 데려와 "나는 실패한 왕이다. 너는 나를 반면교사로 삼아 훌륭한 왕이 되어야 한다."고 이른다. 모니노가 "예"라고 대답하자 공민왕이 엄청 기뻐하는데,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다면...[29] 극 중 인물 대부분, 특히 최영은 공민왕이 김용을 이용해 정세운을 숙청한게 분명하다고 여긴다.[30] 정전 앞 마당이 연등 불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흡사 극락을 연상케 한다. 허나 이 드라마가 진지한 사극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좀 깨는 장면이다. 그래서 한 때 시청자들에게 신돈 나이트(...)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31] 정작 공민왕을 암살하려던 이들의 눈에 비친 공민왕은 아무도 없는 정전 앞 마당에서 혼자 춤을 추고 있었는데 고독한 듯 하면서도 어딘지 미쳐버린 듯한 모습으로 연출된다.[32] 신돈 자신만 반쪽이었던게 아니라, '공민왕 너도 반쪽이었느나 날 만나 완성 됐다' 라는 식의 대사이다. 상호간의 상승효과인 셈.[33] 이 장면 메이킹 필름을 보면, 서지혜가 장시간 진통을 겪으며 처절하게 울부짖는 연기를 하느라 완전히 진이 빠져 '물 좀 마시고 할게요' 라며 땀에 절어 흐트러진 머리와 눈물 콧물 범벅된 얼굴로 생수병을 힘들게 들고 마시는데, 얼마나 애써서 연기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함께 그 장면을 연기하던 공민왕 역의 정보석을 비롯한 덕녕공주 역의 김여진과 초선 역의 강문영 등 쟁쟁한 선배 연기자들이, 후배의 노력에 칭찬과 격려의 뜻으로 박수를 쳐준다.[34] 그래서 같은 개태사 출신의 원현이 그를 '편조 스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법왕사의 보우를 스승으로 모시는 지효는 그를 '편조 거사'라고 부른다.[35] 무인시대에서 생선장수 출신 무장 이영진으로 출연했다. 원현으로 출연하는 오만석은 당시 경대승의 사병조직 '도방'의 장사 중 1명인 양표로 출연했는데, 이영진의 집을 털러 갔다가 이영진에게 죽었다. 그 외의 대표 사극출연작은 명성황후의 장순규, 명동백작정팔이 있다.[36] 개밥그릇에 담긴 고기를 탐내다가 신돈에게 걸려 놀림을 당했던 적이 있다.[37] 지효는 편조에게는 거사라고 불러도, 원현에게는 원현 스님이라고 부른다.[38] 속으로는 신돈이 세상을 바꿀 사람이라고 믿고, 바꾸기를 원하기도 한다.[39] 권력을 잡기 전에도 '그래 가지고 언제 세상을 바꿀 거냐'고 농담한다.[40] 둘 다 한예종 연극원 1기(94학번)인데, 문정희는 이 드라마에서 공민왕후궁이며 이제현의 딸인 혜비 역할을 맡았다.[41]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스승에 해당하는 인물을 판다거나 팔고 나서 후회하는 등의 모습이 창작물 중에서는 팀 라이스가 작사하고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작곡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유다와 거의 겹친다.[42] <신돈> 집필자 정하연 작가가 집필자로 낙점됐으나, KBS 2TV 조광조를 끝낸 지 얼마 안 돼 사극을 쓰는 건 무리가 있다며 고사한 KBS 1TV 용의 눈물 연출자 김재형 PD의 전작인 KBS 1TV <왕도>에서 홍국영(김영철 분)의 여동생으로 출연했다[43] 신돈이 면벽수행을 할 때 초선이 적군에게 강간 또는 살해될 뻔했는데도 맹세 때문에 안 나왔다. 하지만 노국대장공주공민왕을 위해 다짜고짜 신돈이 면벽수행하는 문을 열어젖히자, 노국대장공주의 뜻대로 면벽수행을 포기하고 정계로 복귀했다. 김용이 보낸 자객으로부터 독이 스며든 표창을 맞아 사경을 헤매던 신돈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무의식적으로 '마마'를 언급한 적이 있었고, 신돈을 간호하던 초선은 이 소리를 듣고 신돈이 노국대장공주를 연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훗날, 초선은 신돈에게 "섬광처럼 마음 속을 스쳐간 사람이 중전마마냐"고 물었고, 신돈은 반 농담처럼 "보살님을 말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초선의 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44] 임신을 하면 위험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다만 노국대장공주가 죽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으며, 보우에게 공주의 마지막 모습을 전하며 신돈이 고려를 바로 세울 때까지는 살았어야 한다고 한탄하기도 했다.[45] 태조 왕건에서 청주 출신 반란군 장수 선장과 후백제 수군 장수 상귀, 무인시대에선 채원을 연기한 배우.[46] 공교롭게도 이 3인조를 연기한 배우들이 연개소문에서 모두 수 양제 휘하의 무장으로 등장해 다시 한 자리에 모이며, 담당 배역들이 모두 수 양제에게 굴욕을 제대로 당한다. 그나마 김용은 마지막에 복수하였다.[47] 부정축재의 정도가 너무 지나쳐 위기에 몰린 김용을 구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을 주도하던 신돈을 찾아가 "김용을 한 번만 눈 감아달라"면서 무릎까지 꿇었다.[48] 누구로부터 자신을 죽이라는 사주를 받았냐는 말에 전하의 명이라는 답을 듣자 충격을 받고 무릎을 꿇어앉은 상태에서 그들이 지닌 '밀명'을 손에 쥐고 칼을 맞아가며 죽는데, 당혹감과 억울함이 섞인 표정으로 울부짖으며 눈을 감지 못한 채 최후를 맞는다. 이후 42회 초반부에서 그를 암살한 장수들이 마지못해 눈을 감겨준다.[49] 실제 역사에서도 공민왕이 김용에게 밀명을 내렸다는 의혹이 있는데, 사실 고려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용의 평소 행실이 방자했던 것은 사실이고 왕명을 사칭한 것도 정세운 암살 사건이 처음이 아니라서 꼭 공민왕의 토사구팽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50] 원래 무장인데 겁이 많은 설정인지 친원세력의 척살시에도 궁을 안 지키고 잽싸게 도망쳤다.[51] 정세운이 죽는 그 때 김용은 안도감에 간사한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꼭 그의 양심인 양. 꽤 의미 심장한 장면.[52] 나이 고증이 조금 잘못 된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인복보다 4살이 많은 염제신은 원로배우 김상순이 맡는 바람에 이제현과 동년배가 되었고, 실제 이인복보다 1살 어린 홍언박 역시 박종관이 맡고, 3살 어린 유탁마저 원로배우 이종만이 연기하는 바람에 극 중의 이인복은 실제 나이보다 조금 젊거나 염제신, 홍언박, 유탁 등의 인물의 실제나이가 많게 표현된 셈이다.[53] 주로 악역이나 권신 역을 많이 맡는 배우지만 이 작품에서는 균형잡힌 사고를 하는 식견 있는 정치인 역을 맡았다.[54] 이 당시는 국민교육, 의무교육의 개념이 없었던 만큼, 배움 역시도 기득권의 소유물이었다. 양반과 중인을 제외한 노비들은 글 자체도 몰랐고, 양민들 역시 나라에서 붙는 방을 읽기 위한 천자문과 소학 정도만 배우는 것이 다였다.[55] 현실의 조선은 16세기 이후로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56] 당시 고려는 오랜 재정부족으로 관군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태였고 권문세족들의 사병으로 국방을 하던 상황이었기 때문.[57] 이 때도 이인복을 구슬리기 위해 온 박불화에게 고려의 요구사항을 줄줄이 늘어놓으면서 '덕흥군의 목을 가져갈 때 자정원사(박불화)의 목도 같이 달라.' 고 배짱을 부린다.[58] 이때 기황후가 온건하게 넘어간 것은 고려와 전면전을 벌이기에는 원나라 말기에 여기저기서 벌어진 민란과 지방의 분열, 그리고 홍건적 문제가 컸기 때문이다. 원의 군대는 오합지졸이 됐고, 고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면 홍건적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인복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강경하게 나간 것[59] 실제로 조정 대신 중에서 공민왕이 정말로 믿었던 사람은 정세운, 이제현, 이인복 뿐이었다. 연경에서 자신을 보필하던 조일신조차도 끝까지 믿지 못했고, 김용은 아예 대놓고 믿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낼 정도였다. 대신들이 신돈과 전민변정도감에 반감을 가지고 집단 사직서를 내고 인척인 김원명이 사직서를 낼 때조차도 모조리 받아주겠다며 꿈쩍않던 공민왕이 이제현에 이어서 이인복이 사직서와 함께 하직인사를 하러 오자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것이 그 증거.[60] 다만 이인복은 1374년, 그러니까 공민왕과 같은 해에 죽었는데 그가 공민왕 사후에 죽었는지 그 이전에 죽었는지는 확실치 않다.[61] 신돈이 주도하던 전민변정도감이 좌초했던 이유는 "조정 대신들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그 계책을 낸 당사자가 바로 이인복이었다. 이인복은 이때의 일을 두고 "미안하다"고 한 것이다. 물론, 악의를 가지고 계책을 낸 것은 아니었다. 이인복이 우려했던 것은 "조정 대신들이 원나라와 짜고 공민왕을 폐위한 뒤, 덕흥군을 옹립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정세운이 이 계책을 낸 이인복을 책망하자 예의가 문제가 아니라며 '전하께서 보위를 잃으실지도 모르는데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냐' 며 정세운에게 큰소리를 낸다. 이인복이 충신임을 알 수 있는 부분.[62] 이 발언은 이인복 이전에 이제현 역시 공민왕에게 했다.[63] 이미 권문세족들은 원나라를 등에 업은 채 임금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권문세족들은 몇대에 걸쳐 세습이 이루어지면서 왕은 국방과 같은 기본적인 능력조차 권문세족들의 협조를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공민왕에게는 고개를 뻗대고 불만을 표하면서도 원순제에게는 최유를 잡아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사은숙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원명이 대표적인 사례. 게다가 공민왕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한 왕실 역시 권위 지키기에만 급급할 뿐, 진정으로 고려를 개혁할 생각 따위는 없는 상황이었다. 간신 김원명을 옹호하고, 공민왕이 개혁을 주장할 때마다 대전에 와서 공민왕을 책망하는 명덕태후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장 임금을 지지해줘야 할 임금의 생모부터가 권력과 권위 지키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상황이니, 온건한 개혁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상황이다.[64] 반대로 이색은 유가가 귀족을 대신해 지배세력이 되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믿는 인물.[65] 실제 역사에서는 신돈의 골상이 흉악하여 가까이하지 말라고 공민왕에게 충언을 올렸으며, 이에 빡친 신돈이 이제현을 헐뜯었지만 노년이었기에 별다른 불이익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나중에 신돈이 반역 혐의로 처형된 뒤 공민왕이 앞을 내다본 이제현의 식견에 감탄해했다고 전해진다.[66] 훗날 신돈공민왕의 사부가 된 후 김원명에게 "분수를 아시라고 했네"라고 되돌려준다.[67] 신돈은 이 일을 원현의 소행이라고 의심했지만, 실제로 김원명 암살을 지시한 사람은 공민왕이었다. 조정 대신들에게 "신돈을 거역하면 이 꼴이 된다"는 경고를 하기 위한 암살이었다. 공민왕경천흥도 암살하려 했지만, 경천흥신돈을 싫어하던 귀양지 수령의 도움으로 노비 생활은 면했고, 덕분에 암살도 피했던 상황이었다.[68] 이후 비슷한 시기인 여말 선초를 배경으로 하는 대하사극 정도전에서는 공민왕, 태종 이방원에서는 정종(이방과) 역을 맡는다.[69] 공민왕이 신돈에게 온갖 관직을 하사할 때 반대파는 물론이고 이인임조차 경악하였지만, 이춘부 혼자서 환호할 정도.[70] 공교롭게도 KBS 드라마 개국에서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 역을 맡았다.[71] 아이러니하게도 한 배우가 맡은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 중 처지의 대조가 가장 심한 케이스가 노국대장공주와 반야이다. 공민왕의 아내라는 것만 빼면 출생신분, 처지, 취급까지 모두 차이가 난다.[72] 기록에 따르면 반야가 공민왕에 눈에 든 것도 노국대장공주와 닮아서였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일부러 같은 배우를 캐스팅한 것으로 보인다.[73] 여담으로 서지혜는 1인 2역을 담당하여 많은 관심을 받았다. 또한 서지혜는 물에 대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어서, 수장씬을 3시간여에 걸쳐 간신히 촬영했다고 한다.#[74] 두 인물을 담당한 배우가 서지혜로 동일한 점,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사망한 반면 반야는 무사히 공민왕의 아이를 낳은 걸 다 고려해보면 묘한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정작 공민왕에게 사랑받았던 노국대장공주와 달리, 반야는 공민왕의 아이를 낳았음에도 그 공민왕에 의해 익사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취급 차이 보소[75] 이 때 반야가 '내가 누구인줄 아느냐!!' 라며 자제위들에게 처절하게 발악하는 장면은 여러모로 안타깝고도 비참한 장면이다. 비참한 시대적 배경으로 부모를 다 잃은 것도 서러운데 겨우 왕의 여자가 되어 신세가 피는 줄 알았더니 남편은 아들만 채가고 자기를 익사시키는 방식으로 입막음을 하려 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저 장면과 그 뒤에 이어지는 반야의 수장 씬은 그녀의 인생이 너무나도 기구하다는 걸 잘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 응보인지는 몰라도 그녀를 비참하게 죽게 만든 공민왕 역시 끝내 궁에서 고립된 처지가 되던 끝에 잠자던 도중 암살당하느라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갔다는, 반야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지만...[76] 고려로 돌아온 후 복국장공주가 갑자기 죽었는데, 이게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피흘릴 정도로 두들겨 패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원나라에서 문제삼은 적도 있었다. 그때문에 충숙왕은 재위 내내 고려왕위를 노리는 심양왕 왕고의 모략까지 합쳐서 수시로 원나라에 불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 사실 복국장공주는 고려에 올 때부터 몸이 이미 좋지 않은 상태였으며, 애당초 두 부부의 사이는 좋지 않아서 허구한 날 부부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반대로 명덕태후는 예의바르고 얌전해 충숙왕이 생전에 엄청 총애했다.[77] 연출이었던 김진민의 부인. 그것도 신혼일 때였다.[78] 노국대장공주는 "그렇다면 신돈에게 세상을 다 줘야 한다"고 답변했다.[79] 덕녕공주의 권세는 아들인 충목왕 시기보다 그 이후인 충정왕 시기에 더 강했다.[80] 신돈 드라마로부터 23년 전에 방영했던 kbs 개국에서 공민왕을 연기했었다.[81] 똑똑하게도 보탑실리는 자신이 쿤란태자와 혼담이 오갔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 고려왕의 자리를 요구한 것이다. 즉, 태자와 혼담이 오간 자신을 다른 이에게 시집보내니 격을 높여달라는 것.[82] 원나라 황실에서는 황태후가 관리하는 선정원(宣政院)과 황후가 운영하는 기구인 중정원(中政院)이 존재했다. 기황후는 부다시리 황태후가 실각했을 때 선정원을 자신이 관리했고, 이후 바얀 후투그 황후가 사망했을 때, 황후가 관리하던 중정원을 선정원과 합쳐 자정원으로 이름을 고친 뒤 자신이 소유했고 고용보, 이후 박불화에게 관리를 맡겼다.[83] 공민왕이 반발했지만 박불화는 이렇게 해야 자신이 기황후 앞에서 체면이 선다면서 둘러댔다.[84] 극 중에서는 '타나사리'로 불린다.[85] 물론 드라마에서도 기황후가 처음 등장하며 '원나라 제 2황후' 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즉 제 1황후가 당시에 존재했다는 간접적인 표현인 셈이다.[86] 위왕은 분명 순제에게 한화를 경계하고 쿠발라이나 칭기스 칸이 말한 '몽골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기황후는 재물을 풀어 환심을 산 뒤 위왕의 발언을 원 제국에 대한 분리주의로 몰아붙였다.[87] 시청자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원 제국은 쿠빌라이 시절부터 아리크부카카이두 칸처럼 '몽골의 정신'을 운운하며 반란을 일으킨 이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꽤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졌고 해당 명목을 빌미로 삼아 반역죄를 물어 체포하는 게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88] 설정 상 쿤란 태자는 다나시리의 아들로 나오기 때문에 부계 쪽 혈통으로 보자면 보르지긴 출신이지만 모계 쪽 혈통으로 따지면 킵차크 칸국의 바야우트부 출신이었다.[89] 해당 내용은 신원사 113권 제 10 열전에 기술된 '탑라마팔라(塔剌麻八剌, 다르마발라)' 편에 짧게 기술되어 있다.[90] 실존 인물인 베이르테무르는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의 고발을 들은 황제가 자신의 직위를 박탈하고 사천 지역으로 유배를 보여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대도를 점령하고 기황후를 궁 밖에 유폐했으나 황태자가 북쪽 행성들의 군사를 모으고 코케테무르의 도움을 받아 역습을 가하면서 토벌되었다. 간단히 말해 반황태자파 인물이며 반란군의 수괴였을 뿐이다.[91] 다만 고려사절요를 보면 "고려왕이 공이 있고 죄가 없는데 소인에게 곤욕을 당하였으니, 어찌 먼저 그를 다스리지 않겠는가"라는 말로 황제에게 덕흥군을 폐하라고 넌지시 압력을 가하긴 했다.[92] 공민왕이 편조를 신뢰함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좌석을 마련하고 앉게 했다.[93] 이자춘의 이복 동생 완자불화와는 동명이인이다.[94] 원 순제의 나이에 대한 고증은 한참 뒤에 등장하는 MBC 드라마 기황후가 좀 더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밖에 복장이나 외모 등의 고증은 신돈이 넘사벽이다.[95] 영웅시대에서 일본 건설업계 사이토 겐지 역으로 나왔다.[96]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점인데, 극중에서의 비중은 엑스트라에 가깝기는 해도 정몽주가 나오는데 정도전은 등장이 없다.[97] 실제 역사 상에서는 이 때의 유림을 이끌던 주축 세력들은 물론 신돈이 펼친 개혁 덕택에 녹봉을 먹기 시작한 신진 사대부들조차 신돈을 모두 싫어했다.[98] 이 부분에 대한 해석도 갈릴 수가 있다. 사실상 신돈이 살해당하는 마지막 쯔음 와서는 이성계 역시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어서 수습된 시신이 낳을 어떤 이벤트를 노려본 것일 수도 있고, 작중 내내 군부를 견제하는 신돈과 대립은 하지만, 크게 대항하지 않고 일부 제안에 군말없이 따르는 점에서, 신돈에게 약간은 공감하고 있었으며 그의 최후에 인간적인 자비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수도 있다.[99] 실제 역사적 사실을 뒤로하고서, 작품 내에서만으로도 이성계가 최영과 완전히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가 제법 있는 편이다. 특히 '군의 중심은 최영이다.'라는 이성계의 이야기에 신돈이 '군의 중심은 최영이 아닌 전하(공민왕)이시다.'라고 꾸짖자 무언가를 느낀 듯, 헛웃음을 짓더니 군말없이 동북면으로 향한다.[100] 배우가 사극에서 사망전대로 유명한데다 실존인물 역시 참수를 당했지만, 드라마가 공민왕의 죽음에서 끝나다 보니 죽음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 보기 드문 사례가 되었다.[101] 영화 공작에서 조선족 황병철 역을 맡은 그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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