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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23:37:50

고산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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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의미2. 유래
2.1. 목록
3. 확장된 의미4. 확장된 의미로 사용된 고산케의 예제
4.1. 실존인물 관련4.2. 각종 문화 및 서브컬처 관련4.3. 작품 속 설정에서 등장하는 고산케
5. 관련

1. 원래 의미

고산케(, ごさんけ)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 가문인 오와리(尾張)[1] 도쿠가와 가, 기슈(紀州)[2] 도쿠가와 가, 미토(水戸)[3] 도쿠가와 가의 세 가문을 이르는 말로, 쇼군의 후계자를 정할 수 없을 때에 세 가문 중에서 후계자를 낼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또한 이들은 일본의 주요 도시인 교토 근방의 오와리 번(아이치현 일대)[4], 오사카 근방의 기슈 번(와카야마현 일대)[5], 에도(現 도쿄) 근방의 미토 번(이바라키현 일대)을 영지로 삼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도자마 다이묘들의 반란으로부터 막부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도쿠가와 가문 외에도 여러 번들이 가문 단절에 대비하거나 후계자들간의 경쟁을 막고자[6] 지번을 설립해 분가를 세우기도 하였다.

2. 유래

유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 정실의 자식이나 그 후손들 중에 가독을 이을 후계자가 없을 경우에는, 방계(측실)의 집안에서 후계자를 뽑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기본 원칙으로 오와리/기이(기슈) 두 집안에서 후계자를 뽑고, 미토는 이를 보좌하라고 했다. 미토 번이 고산케에 포함된 것은 훗날에 정해졌다.[7][8]

그리고, 이 유언대로 후계자 상속법에 따라 승계가 이루어진 것이 제5대 기이 번주였던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였다.

이후 에도 막부 중반부에 8대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쇼군 가문과 고산케의 혈연 관계가 멀어지는 일을 우려해[9][10][11] 자신의 아들 둘을 분가시켜 다야스(田安) 가와 히토쓰바시(一橋) 가를 만들어 에도에 추가로 보호용 가문들을 만들었고, 다음 쇼군인 이에시게가 자신의 차남 시게요시를 분가시켜 시미즈(清水) 가를 추가함으로써 고산케의 후계자 권한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수도권 보필 목적의 세 가문인 고산쿄(御三卿)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들은 봉토는 받았지만 고산케보다는 적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고산케처럼 영주 노릇을 하지 않고 에도에서 봉록생활을 하며 쇼군가문의 수족 역할을 했다. 이후 쇼군의 대가 끊겼을 때 11대 쇼군 이에나리,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히토쓰바시 가문에서 배출되었다.[12] 참고로 고산쿄의 가문명은 각 가문의 저택이 에도성 북쪽 키타노마루 측 성문들인 타야스문, 시미즈문, 히토츠바시문 일대 부지에 지어졌기 때문에 각 가문 저택에서 가까운 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고산쿄의 경우 막대한 영지를 가진 지방 영주 고산케에 비해 권한도 적고 제약도 많아 쇼군 후계자가 되지 않는다면 빛 좋은 개살구 처지였다. 고산케처럼 더 좋은 자리가 나면 고산쿄직을 버리고 그쪽으로 런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쇼군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려 들다 보니 막부 후기의 권력 분쟁을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고 평가된다. 고산쿄 가주들이 하도 자주 요절하고 바뀌어서, 요시노부의 시대쯤 되면 원래 목적대로 요시무네의 피를 이어받은 것은 다야스 가문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죄다 단절되어 미토 가문 출신의 양자들로 채워진 데다 그 미토 번 세력에게 정치투쟁에서 밀려 쇼군이 되지도 못하게 된다. 그래도 막부 멸망 이후에는 다야스 가문의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쇼군직에서 물러난 요시노부의 뒤를 이어 도쿠가와 종가 가주가 된다.[13]

3명의 쇼군의 아이들을 분가시켜 만든 이들 고산케와 고산쿄는 신판다이묘[14]의 주 세력이었으며, 여기에 이에야스의 원래 가문이었던 마쓰다이라(松平) 가를 포함하면 3대 신판다이묘 세력이 된다.

고산케와 고산쿄 가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모두 화족이 된다. 고산케는 후작, 고산쿄는 백작. 다만 미토 도쿠가와 가문이 대일본사 편찬의 공로로 공작으로 승작되며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고산케 중 가격이 가장 낮았던 미토가 오와리와 기슈보다 격이 높아졌다.[15]

2.1. 목록

3. 확장된 의미

쇼군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며 모든 다이묘 중 가장 강력한 권한을 지녔기에, '고산케'는 점차 강한 것, 그리고 '3가지 세력으로 나뉜 견체체제'를 의미하는 관용어로도 통한다.

현대 일본어에서는 고산케의 의미를 대략 다음과 같이 본다.

4. 확장된 의미로 사용된 고산케의 예제

이 외에도 수많은 고산케들이 있으나 나무위키에 독립문서가 존재하는 것들 위주로 일부만 기록한다.

4.1. 실존인물 관련

4.2. 각종 문화 및 서브컬처 관련


그 외에 세계 3대 XXX 하는 건 다 이거다.

4.3. 작품 속 설정에서 등장하는 고산케

5. 관련



[1] 현재의 아이치현 서부[2] 현재의 와카야마현[3] 현재의 이바라키현 미토시[4] 과거 오다 노부나가의 본거지였다. 다만 교토랑 아주 가깝지는 않은 편이다. 직선거리상으론 기슈 번이 오사카 뿐 아니라 교토와도 더 가깝다.[5]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였던 셋츠 국 오사카에 인접한 지역으로 전국시대 당시에는 철포로 유명했던 용병집단 사이카슈의 근거지가 있던 지역이었다.[6] 다이묘가 후계를 정하지 않고 죽거나 측실과의 사이에서 나온 서자가 장자인 경우와 같은 상황에서 후계자들과 그를 따르는 파벌 간에 경쟁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7] 막부 초기에는 고산케란 쇼군가, 오와리, 키슈의 3가문을 지칭하거나 또는 오와리, 키슈에 3대 쇼군 이에미츠의 동복형제인 타다나가를 시조로 하는 스루가 도쿠가와를 포함한 3대 다이나곤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곤츄나곤위였던 미토가는 이들 가문보다 격하로 취급받았으며 문헌에 따라서는 이에미츠의 자식 대에서 분기된 고산케 바로 아래 서열의 양대 덴큐가인 코후, 다테바야시 도쿠가와 가보다도 아래로 기록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스루가가 1대 만에 개역당해 폐문되는 것을 계기로 미토가 도쿠가와 성을 쓰는 것을 허락받게 되고 이후 다테바야시의 가주였던 츠나요시와 코후의 가주였던 이에노부가 각각 쇼군가 직계혈통의 단절로 인해 쇼군위를 승계하면서 양대 덴큐가도 소멸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미토가는 서열 3위를 확정짓게 되었으며 이 시점부터 오와리-키슈-미토로 이어지는 고산케 체제가 확립되었다.[8] 미토가는 다른 두 고산케와 달리 참근교대를 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번주가 에도에 상주하며 쇼군가를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부쇼군가로 불리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미토 번의 실제 소출은 약 28만 석 수준이었으나 고산케로서의 격 때문에 공식 기록상으로는 35만 석으로 책정되었는데 이로 인해 실소득보다 많은 세금 부담은 물론 상시근무로 인한 비용부담도 다른 번보다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후 고질적인 재정부담에 시달렸다.[9] 기슈 출신인 요시무네는 쇼군 자리를 두고 6대 오와리 번주 츠구토모와 경쟁했고 쇼군 집권 이후에는 츠구토모의 동생인 7대 번주 무네하루가 요시무네의 검약정책과 완전히 반대되는 지출을 통한 경제활성 정책을 강행했기 때문에 집권기간 중 정치적으로 오와리 가문과 크게 대립했다. 이러한 대립 끝에 결국 무네하루를 번주직에서 해임하고 강제로 은거시키는 강수를 두었는데 이러한 쇼군가와 오와리가의 관계 악화가 요시무네가 고산케를 대신해 고산쿄를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슷한 사유로 10대 쇼군 이에하루는 오와리 번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자신의 딸을 오와리 번 9대 번주 무네치카의 아들과 혼인시키기로 합의까지 보았으나 딸이 일찍 병사해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10] 여담이지만 실제로 막말 전후 오와리 번은 막부 측보다 오히려 존왕세력(유신 측)에 가까운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애초에 오와리 가문은 초대 번주인 요시나오가 조정과 덴노를 존중할 것을 가문의 훈령으로 정한 탓에 대대로 근왕 성향이 강한 가문이었고 요시나오 직계가 단절된 이후 쇼군가에서 요시무네의 혈통인 고산쿄 출신의 친막부성향 후계자를 오와리가 가주로 밀어부치는 행태를 반복한 탓에 가신단 사이에서 쇼군가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 13대 오와리 번주인 요시츠구의 후계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또다시 양자를 친막부적이고 혈연이 가까운 고산쿄 다야스 가문에서 들여오자는 세력과 오와리가의 지번이자 지리적으로 가까운 분가인 타카스 번에서 들여오자는 세력의 대립 끝에 결국 후자가 승리하여 새로 취임한 번주 요시카츠가 막부와는 거리를 두고 존왕적인 스탠스를 취한 것이 그 이유이다. 참고로 당시의 타카스 번주 가문도 거슬러 올라가면 미토 가문 출신의 양자가 가문을 이어받은 가문이며 신센구미의 스폰서로 유명한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도 타카스 번 출신으로 요시카츠의 이복동생이다.[11] 미토 번 같이 국학에 경도된 이들은 존왕적 스탠스를 취해 결과적으로 막부에 부담만 안겨주었으며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을 비롯한 여러 사건들을 일으키는 등 도쿠가와 정권의 암초로 존재했다. 미토 번주 나리아키나 그 아들인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도쿠가와 본가와는 아주 먼 친척이었음을 생각하면 타당한 우려였던 셈이다. 더구나 미토는 손이 귀했던 쇼군가나 오와리에 비해 자손이 많은 편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대가 끊어진 다른 친번으로 양자입적해 후계를 잇는 경우가 많아 막말쯤에 와서는 미토계 친번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져서 고산쿄조차도 요시무네 혈통이 끊어지고 대신 미토 출신의 양자가 가문을 잇는 상황이 될 정도였다.[12] 13대 쇼군 이에사다의 대가 끊겼을 때는 고산케의 기슈 가문 가주 이에모치가 고산쿄의 히토쓰바시 가주 요시노부를 제치고 14대 쇼군이 되었다. 이는 이에모치가 이에사다의 사촌으로, 미토 가문에서 입양된 요시노부에 비해 훨씬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이다.[13] 그러나 이에사토의 직계도 1963년에 단절된 탓에 17대 당주의 외손자 츠네나리가 양자입적해 18대 당주에 올랐는데 이 사람은 미토계인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증손이므로 결국 종가는 다시 미토계가 잇게 된 셈이다.[14] 막부와 쇼군 가문을 보필하고 유사시에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다이묘.[15] 참고로 도쿠가와 종가와 쇼군직을 지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분가인 요시노부가 역시 공작이다. 과거의 쇼군이었던 만큼 도쿠가와 가문은 화족 서임에서도 다른 다이묘들과는 별격으로 분류되었다.[16] 오와리 번 시조 요시나오와 미토 번 시조 요리후사는 나이차가 2살이지만 그 후손들은 세대가 7대 차이가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오와리는 3대 번주 사후 가독을 이은 자식 둘과 손자가 줄줄이 요절해 자식들 중 유일하게 장수한 무네하루가 7대 번주에 올랐다. 세대상으로는 고작 한 세대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가주가 4번이나 바뀔 정도로 지독한 요절 징크스에 시달렸던 것과 막말 당시 오와리 번주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채 10년이 못 되는 등 사정으로 저렇게 차이가 난다.[17] 일본 가요사에 있어서 엄청난 족적을 남긴 인물들로 일본의 현대적인 엔카의 장르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크게 이바지 했으며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활동하면서 일본 엔카 계의 발전에 지대하고 수많은 공헌을 이룩한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의 이름은 모두 예명이고 각각 키타자와 미치야, 와타베 미노루, 카지야마 이사무 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다.[18] 세 사람 다 일본의 특촬물 드라마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토에이의 프로듀서로써 간혹 이 사람들 말고도 나가이시 타카오, 호리 나가후미, 아메미야 케이타의 3명이 들어가기도 한다.[19] 특촬 팬들에게 있어서 세명의 성우들은 각각 울트라맨, 가면라이더, 슈퍼전대 시리즈의 나레이터로 유명하며 이 사람들 말고도 메탈 히어로의 마사무네 잇세이가 들어가기도 한다. 또한 고전 변신히어로 특촬까지 범위를 확대하면 타나카 노부오, 무라코시 이치로 등의 인물이 들어간다.[20] 1980년대를 풍미했던 여성 4대 가희인 아사카 유이, 미나미노 요코, 나카야마 미호, 쿠도 시즈카의 네명이 사천왕이었다면 이쪽은 거의 80년대 잘나갔던 여성 솔로 삼대장 급으로 보면된다. 그리고 간혹 가다가 팬들 사이에서는 야마구치 모모에와 오카다 유키코를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애초에 이 둘은 활동시기가 다르다.[21] 일본 J팝계의 3대 가희 (우타히메)라고도 부르며 각각 1995년 (아무로), 1998년 (우타다, 하마사키)에 가요계에 데뷔했다. 현재 아무로 나미에가 가요계에서 은퇴한 상태이고 하마사키 아유미 마저 미디어 출연이 굉장히 뜸한 상황인 관계로 팬들 사이에서는 이 두명의 자리에 나카시마 미카코다 쿠미가 대신 들어가기도 한다.[22] 현재까지도 일본을 대표하는 최정상의 여가수들이자 넘사벽인 TOP급의 가창력을 보유한 거물급 여성 싱어송라이터들로 한국으로 따지자면은 이영현 (빅마마), 박정현, 화요비의 포지션에 해당하는 가수들이다. 간혹 가다가 이 자리에 쿠라키 마이가 대신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여성 R&B 4대 여왕이 된다.[23] 공교롭게도 이 세 사람은 약 1년 간격으로 데뷔했다. (MISIA가 1998년, 코야나기 유키는 1999년, AI는 2000년.)[24] 팬들 사이에서는 이들 말고도 니시노 나나세, 타카야마 카즈미, 이쿠타 에리카가 들어가기도 한다. 이 세 사람도 고산케 이상의 인기멤버들이기도 하다.[25] 각각 코나미, 타이토, 아이렘의 작품이다. 그러나 2020년 이후 현재로서는 관점을 달리 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의견도 소수 생겨났다.[26] 각각 세이부 개발, 사이쿄, 캡콤의 작품이다. 특히 194X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 1942는 1984년 작품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를 넘어서 1990년대 중반까지 즐기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을정도로 넘사벽의 인기를 자랑했다.[27] 동프고산케, 보컬고산케, 니코마스고산케 등 각 유명 카테고리 안에서 자체적으로 분류하는 것까지 합치면 너무 많아지므로 제외. 태그화되거나 테마화된 것은 상위항목 참고.[28] 여담으로 니코니코 대백과에선 자학적으로 일반인에게 인기가 낮을 것을 전제조건으로 적었다(...).[29] 다만 레이와 이후 아이마스가 급격히 위기론에 빠졌고, 동방은 특유의 분위기와 본편 게임의 진입장벽 등으로 팬덤 자체가 많이 분화되었으며, 보컬로이드는 사실상 오타쿠와 인디음악의 경계선까지 나아가면서 상황이 많이 변했다. 때문에 별도로 고산케를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없을 뿐, Re 버전 이후로는 블루 아카이브우마무스메+α가 저물어가는 니코동을 하드캐리중이라고 보면 된다. 남은 한자리는 대체로 사람 성향에 따라 바뀌는데, 여전히 가장 크며 니코동에서 전폭적으로 푸쉬중인 보컬로이드라는 의견, 성질상 공공연하게 말하기 힘들 뿐 한여름 밤의 음몽이라는 의견 등 다양하다. 단 동아3국 대표 오타쿠 게임중 중국 대표인 원신의 경우 니코동의 혐중성향 등으로 별로 세력이 없다.[30] 단, 아이돌 마스터 2 발표 이후 이 쪽의 지지세력이 급격하게 감소해, 아이돌 마스터 애니메이션 발표 이전까지는 동방~보컬 양강 체제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애니메이션이 나오자마자 관짝을 걷어차버리고 당당히 권좌에 복귀[31] 한때 오와콘 위기였으나 극복 중. 자세한 건 VOCALOID/위기론 항목 참조.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보컬로이드를 빼고 러브라이브, 칸코레 등의 니코니코 동화나 니코니코 정화에서 인기를 얻은 작품을 대신 넣는 경우도 있었다.[32] 뒷세계의 고산케, 음지의 고산케, another 고산케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쪽은 니코니코 3대 종교의 후속에 가깝다.[33] 의외로 90년대에는 토요타 수프라가 아닌 RX-7이 그 자리에 있었다. 1970년대부터 발발한 GT-R과 로터리의 라이벌리 구도 때문.[34] 다만 체급 및 출력상으로는 렉서스 LC로 보는 이도 있다.[35] 니코니코 동화 이외의 일본 서브컬처 사이트에서 고산케라고 하면 대부분 이 쪽을 의미한다. 어찌나 유명해졌던지 구글 번역에서 御三家를 한글로 번역하면 스타팅 포켓몬이 된다.[36] 제국 원수 솔베나레스와 그의 숙부 요룬자프, 딸 야토리시노 이그셈이 등장했다.[37] 제국 육군 대장 테르싱하와 그의 아들들 살리하스라그&스슈라프&토르웨이 레미온이 등장했다.[38] 제국 해군 대장 엘리네핀과 그의 조카딸 포르미뉴에 유르구스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