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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4 13:01:59

연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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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구내용3. 연구 결과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4. 전후5. 기타


ノモンハン事件 研究委員会

1. 개요

의외로(?) 할힌골 전투의 패배가 꽤나 충격적이었던지라 대본영은 1940년 1월부터 할힌골 전투의 패배 원인을 분석하는 연구위원회, 즉 "노몬한 사건 연구위원회(ノモンハン事件 研究委員会)"를 조직해 패배 원인을 심층 분석했다. 3개월 간 조사를 진행하면서 전투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가를 새삼 실감했는지, 위원장을 맡았던 코이케 류지(小池龍二, 1898~1993) 대좌는 후일 회고에서 그런 장비로 적에게 맞서라는 명령을 따르는 병사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고 했을 정도.

2. 연구내용


이 연구위원회는 지극히 상식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육탄돌격보다는 화력을 중시하라.

정신력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참모는 독선적인 자만을 버려라.

이 보고서가 나온 시점은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3. 연구 결과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

연구에 대한 제군의 노고가 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뤄진 연습으로 실전이라는 것은 제군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겼다. 그 당시에도 삼국간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이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생각하지 못한 것이 승리를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제군의 성과는 단순히 탁상공론이라 부를 수는 없겠으나 그 의외성이 반영되지 못했다. 제군은 이 책상연습의 결과를 경솔하게 발설치 말라.
- 도조 히데키[1]

애초에 이걸 들었으면 태평양 전쟁이 좀 더 지연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본영의 이 보고서에 대한 반응은 "알겠다."가 전부였다. 사실 처음에는 전훈을 두고 반성은 했지만, 전훈의 결론이 돈[2]을 더 써야한다는, 극복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실천가능한" 정신력 강화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오히려 연구위원회가 조직된 시기에 나치 독일독일 국방군이 유럽 전선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면서 대본영은 독일군의 승전에 매료되어 할힌골 전투의 패배 분석, 전훈 도출에 힘쓰기보다는 독일군의 전술을 따르고자 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3] 연구위원회가 조직, 활동하던 1940년 1월~4월은 전년 9월의 폴란드 침공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독일군이 베저위붕 작전, 프랑스 침공을 준비하던 시기였다.[4] 거기다가 육해군 합동조직인 대본영의 연구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는 고질적인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인해 육군 이외의 부서에도 의미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해군의 입장에서도 할힌골 전투의 패배는 무언가 교훈을 얻어야 할 일본군의 패전이 아닌, 비웃음거리 정도밖에 안되는 육군의 삽질에 불과했다.

결국 일본은 이 보고서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 는 이유로 아주 철저하게 무시 했으며, 연구위원회를 이끌었던 코이케 류지는 보직이 변경되어 한직으로 밀려났다.[5]

4. 전후

이런 태도는 후일 미국에 혼신의 일격을 먹여 전쟁 의지를 잃게 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진행하면 된다는 안이하기 짝이 없는 생각으로 번졌다. 뒷일은 생각조차 안 하고 혼신의 일격을 위해 선전포고 같은 정식 절차도 모조리 무시하며 하와이에 기습 공격을 가해 전쟁을 시작했지만 이 혼을 담은 공격은 미국의 전쟁의지를 끊기는커녕 미국인들이 보복과 반격의 의지로 불타게 만들었다. 결국 예상이 빗나가 전쟁이 장기화됐지만 할힌골에서의 전훈도 깨닫지 못한 채 무턱대고 전선을 넓히다가 사방천지에서 미국에게 작살이 났고 결국 협상은커녕 타협도 못 해보고 그간 이루어낸 모든 것들을 날려먹고서도 최후까지 정신승리를 일삼다가[6] 핵탄두가 자국 대도시에 작렬하자 무조건 항복을 외치며 제국은 최후를 맞이했다.

이렇듯 일본군은 이 전투의 패배에서 얻은 전훈을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다.

아무튼 연구위원회도 1945년에 해체 되었고 GHQ에게 조사 받았으나 오히려 전쟁에 일본군의 상식이 잘 못 되었다는 보고서를 제출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모두 풀려 났다고 전해진다.

5. 기타

이와 비슷하게 굴러갔던 조직은 총력전 연구소가 있다.
[1] 참고로 이건 연구위원회가 아닌 총력전 연구소에 대한 내용이지만 총력전 연구소도 연구위원회 처럼 정상적인 보고서를 냈는데도 육해군 모두에게 무시 당했다는 점이 똑같다.[2] 애초에 당시 일본은 포와 포탄을 생산할 능력과 장비가 너무 턱 없이 부족했고 이 때문에 러일전쟁 당시 화력주의를 내세우다가 포탄이 전부 바닥나서 극심한 포탄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 보니 전차 같은 장비들은 손으로 만드는 비중이 너무 컸다 그리고 러일전쟁에선 무려 일본군의 제정 반년치 나 깎아 먹을 정도의 비용이 나왔으니 이때 쯤 이면 전쟁은 커녕 무력시위도 불가능 했다. 당장 11년식 경기관총96식 경기관총이 어떻게 나왔는지 생각해 보자 이건 안 봐도 비디오 였다. 그리고 아카기 라는 항모를 유지 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너무 들었다는 것도 감안해 볼 필요가 있다.[3] 이는 독일의 전술만 보고 독일의 무기를 못 본 것이었다. 독일의 1호 전차, 2호 전차, 3호 전차 등 당시 독일이 주력으로 굴리던 전차들은 소련의 전차보다 일대일 능력은 떨어졌을지언정 일본 전차보다는 훨씬 나았고 무전기를 장비해 기동전의 핵심인 유기적인 이동 능력을 갖춘, 자신들의 대전략을 이루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되고 최적화된 무기들이었다. 그리고 4호 전차, 5호 전차 판터, 6호 전차 티거, 쾨니히스티거 등 독일군의 최신 전차들과 일본 전차를 비교한다면 가히 삽질이 아닐 수 없다.[4] 출처: 해당 블로그[5]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감시위원이란 직책으로, 아예 일본 밖으로 내쫓은 격이었다.(출처)[6] 전황이 불리해지자 먼저 협상에 나서자는 그나마 상식적인 주장이 나왔는데, 미국 측에 천황제 유지, 전범재판과 처벌은 일본 측이 전적으로 진행, 미군의 일본 주둔 거부 등과 같은 말도 안되는 항복 조건을 내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