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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30 15:02:10

옹정황제의 여인/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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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환 심미장 안릉용 황제 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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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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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주요 등장인물3. 후비들
3.1. 드라마3.2. 원작
4. 심복들
4.1. 황제의 심복들4.2. 견환의 심복들4.3. 태후의 심복들4.4. 황후의 심복들4.5. 화비의 심복들4.6. 안릉용의 심복들4.7. 기타 심복들
5. 황실 사람들
5.1. 서태비5.2. 항친왕 윤기5.3. 돈친왕 윤아5.4. 신패륵, 신군왕 윤희5.5. 1황자, 2황자, 5황자5.6. 6황자 홍염5.7. 온의공주5.8. 영서공주5.9. 정화공주5.10. 원철
6. 원작에서7. 태의들8. 감로사 사람들9. 신하들10. 그 외

1. 개요

2011년에 방영한 BTV중국 드라마옹정황제의 여인〉의 등장인물을 서술한 문서.

드라마로 유명해진 만큼 드라마를 기준으로 설명이 되어있으므로 원작내용은 따로 각주나 문단을 나누어서 설명한다.

2. 주요 등장인물

3. 후비들

3.1. 드라마

후궁은 한군기, 만군기, 몽군기에서 고루 뽑는다. 일단 귀인(貴人)의 숫자를 맞추려는 것으로 보아서는 적어도 쿼터제인 것 같아 보이는데, 이에도 불구하고 작중에서 등장하는 후궁들은 한족[1][2]이 대다수이다. 이건 당연하다. 원작의 후궁들은 모두 한족이니까.[3]

확실히 한족으로 밝혀진 것이 주인공 트리오인 견환, 안릉용, 심미장부터 시작하여 이름을 보면 경빈 풍씨(풍약소), 양빈 조금묵, 화비 연세란, 녕빈 섭란의, 묘음낭자 여앵아에 영귀인 채빈까지 다 한족 이름이다. 물론 제비도 한족 출신이다. 모티브인 제비 이씨가 한족인데다, 황후가 "하긴 견환도 자네처럼 한군기 출신이니…"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기본적으로 황후가 기귀인에게 "너와 나, 그리고 부찰 귀인만 만군기고 나머지는 모두 한군기다."[4]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그냥 대부분 한군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실제로 옹정제의 고위급 후궁들은 희비 뉴호록씨나 황후 오라나랍씨를 제외하면 한족출신이 많았으니.

반면 만군기는 황후가 직접 소수라는 말도 했고 실제로 소수이다. 황후야 정궁이니 제외하고, 확실히 밝혀진 만군기는 부찰씨인 부찰귀인과 과이가씨인 기귀인, 순상재[5], 나중에 만주족으로 귀화하는 뉴호록씨인 희귀비 정도이다.

몽군기는 존재감이 더 없어서 작 중 몽군기로 확인되는 인물은 정빈 한 명 뿐이다. 이마저도 뒷설정으로만 그렇다는 것이고, 작 중에서는 박이제길특 귀인과 정빈이 동일인이라는 언급이 없다. 그 외에도 설정상 강 상재가 정빈의 시녀 출신이긴 하나 몽군기 소속인지는 불명.[6] 실제 몽골청나라 대대로 굉장히 중요한 위치여서, 실제로는 몽군기 출신 황후와 후궁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나 청 초기는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져서 청태종의 황후와 최고위 후궁 4명이 모두 몽골 출신이었고, 순치제의 정궁 황후들 역시 순치제의 총애와는 관계없이 모두 코르친 몽골 출신이었다. 드라마의 배경은 옹정제 재위 시기이니, 어쩌면 몽군기의 위상이 그 전에 비해 떨어진 것일 수도 있다.
후궁의 품계 일람
황귀비 귀비 귀인[7] 상재 답응 관여자
1명 2명 4명 6명 인원수 제한없음
후궁으로 입궁을 할 때 품계는 황제가 마음에 들면 처음부터 높은 품계(귀인)으로 시작할 수 있으나, 그래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버지의 관직이 얼마나 높느냐이다. 입궁 후부터의 품계는 황제의 총애도 총애지만 무엇보다 황제의 후계자 후보가 될 수 있는 황자, 즉 아들을 얼마나 많이 낳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정 안 되면 황녀라도 있어야 나중에 어디 비빌 데가 있다... 품계에 따라 녹봉이나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시녀의 수는 물론, 머리에 붙이는 장신구나 호갑, 소매 넓이 등에서 단계마다 차이가 난다.[8] 호갑투나 연회에서 주로 입는 길복은 귀인부터 사용이 가능한 듯 하다. 안릉용이 안상재 시절 길복을 입지 않았고 강상재도 견환이 회궁했을 때 다른 후궁들이 길복을 입은 것과 달리 길복을 입지 않았다. 또한 상재나 답응, 관여자가 호갑투를 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같은 서열이라도 봉호를 받았으면 더 윗전으로 취급한다.[9]

설사 서열이 밑이라도 궁에 먼저 들어온 선배이면 친밀도와는 상관없이 "언니"라고 불러주는 것이 관례인 듯하다. 물론 말 놓는 것은 품계가 높은 쪽이 먼저 해야 한다.[10] 단계를 건너뛰거나 할 수 없다고 방약 상궁은 말했으나 실제로 2계급 특진의 예로 섭란의와 단비, 송지가 있어서 별 의미가 없다. 게다가 화비도 비 직위에서 귀비를 건너뛰고 황귀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청나라에서 황제가 법도 무시하고 몇 계급 올려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건륭제의 후궁 중에 귀인에서 비가 된 사례도 있다. 강등은 단계없이 가능한 것 같다.[11]

황귀비가 사실상 후궁의 실세라고 한다. 직위는 황후가 더 높지만 황후를 정하는데 정치적인 면이 많이 고려되고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웠고 건국 초기에 복속한 몽골을 우대하여서 귀족 서열이 만군기>몽군기>한군기이기 때문에 출신도 제한된다.[12] 따라서 황제가 마음에드는 사람을 마음대로 황후로 정할 수 있는게 아니다. 하지만 1명만 둘 수 있고 직위도 황후 바로 아래인 황귀비는 오로지 황제의 총애로 결정된다. 화비도 황귀비로 승급할 가능성이 보이자 바로 득의양양해서 황후를 대놓고 무시하는 발언을 해댔다. 견환이 단비를 황귀비로 추천했을 때도 황제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는 견환을 황귀비로 임명해 대외적으로도 그 총애를 널리 알리고 싶어했다.

그 외에도 황제의 은총을 받는다면 실질적인 대우와 발언권이 더 높을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암묵룰이기 때문에 은총을 입었다고 대놓고 설치면 인실좆을 당한다.

후궁을 둘 수 있는 숫자는, 귀인 이하는 제한 없이 둘 수 있어서 태후의 말대로 그냥 "널려 있으나", 빈부터는 정해진 숫자가 있다. 빈이 여섯, 비가 넷이고, 귀비가 둘, 황귀비가 하나이다. 또한 빈 이상의 후궁은 한 궁의 최고 책임자이기도 하다. 전자(모자 같은 것)를 쓸 수 있는 것이나[13] 정식 양육권이 있는 것도 빈 이상부터이며, 마마라는 존칭으로 불릴 수 있는 것도 빈부터이니[14] 이렇게 귀인과 빈 사이에는 넘사벽의 구분이 존재한다.

작중에서 빈을 기점으로 고위 후궁, 혹은 실질적 후궁으로 나뉘는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황제가 처음 견환을 총애하기 시작할 때 태후에게 견환을 소개하려 했으나, 태후는 나중에 빈이 되면 모를까 고작 귀인은 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완상재에서 완귀인으로 승급할 때는 호감이 있다는 이유로 즉석에서 승급시키나, 이후 심미장이 가짜 회임인 줄 모르고 회임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혜빈으로 올리는 걸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정확히는 미장을 귀인에서 빈으로 승급시키고 싶어하나 황후가 아직 출산도 하지 않았는데 빈으로 올리는 건 시기상조이고, 아들이 태어났을 때 기쁨을 더하기 위해 빈으로 올리자고 하자 동의하고 일단 "혜"라는 봉호만을 내린다. 황귀비의 경우는 부황후 급이라고 작중에서 언급된다.

이론상 최하위 등급은 관여자[15]지만 실질적 최하위는 답응으로, 수녀 간택으로 선발되는 후궁들은 아무리 낮아도 최소 답응으로 시작한다. 궁녀들은 법도상 관여자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교송지는 답응으로 시작했고, 실제 관여자 단계를 겪은 사람은 여앵아 뿐이다.

황후의 말이 "심귀인이 회임한 아이는 황자가 분명합니다."라는 공치사가 아닐 수도 있는 게 이미 딸이 있는 조금묵이 귀인, 유산했으나 회임한 적 있었던 흔상재와 부찰귀인이 각각 상재와 귀인이다. 관여자에서 귀인까지의 승급은 어차피 귀인 이하의 계급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황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나 빈이 되려면 황제도 내명부의 파워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균형을 고려하는 듯. 원래 총애했는데 회임까지 했거나, 황자의 어미이니만큼 체면을 세워줘야 한다는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황후공주, 빈 이상의 품계를 지닌 후궁의 1인칭은 본궁(本宮)이다. 견환은 태후가 되었을 때, 의수는 자신이 태후라고 주장할 때 애가(哀家)라는 1인칭을 썼다. 본궁은 한 궁의 궁주이기 때문에 쓰는 표현이고, 한 궁의 궁주가 아닌 낮은 신분의 후궁들은 "본 소주"라고 표현한다.[16] 애가는 남편이 죽어[17] 슬픈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는 표현. 후궁들의 경우 황제황후 앞에서는 황후비빈 구분없이 신첩이고[18], 자기보다 품계가 높은 황후 아래 후궁에게 말할 때는 빈첩이라고 한다. 태후, 황제, 황후 앞에선 황제, 황후, 후궁, 황손 모두 아신(儿臣)이라 칭한다.

후궁은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사실 헬게이트나 다름없는 곳이다. 견환이 첫 입궁하여 완벽과 유주와 더불어 자금성을 보고 "정말 예쁘다, 다들 여기에 오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겠다"며 감탄하지만 이후에 희귀비가 된 그녀는 이 곳을 "어디보다도 답답한 곳", "죽음이 최고의 해탈인 곳"으로 묘사한다. 게다가 비빈의 자살은 큰 죄라 가족들까지 끔살당하기에, 그 죽음마저 자기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없다. 그 와중에 꿋꿋이 자살한 제비와 안릉용에게 리스펙트[19] 내명부의 후궁들은 견환이나 태후가 말했듯이 같아서, 하나가 지면 또 하나가 피는 존재이다. 화비도 "심미장을 몰아냈더니 견환이 오고, 견환을 몰아냈더니 또 안릉용이냐!"라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이를 인증했다. 언제나 죽어나가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후궁이 또 다시 들어와, 결코 부족한 일이 없다. 이들은 궁녀보다 신분이 존귀하지만 그래도 황제 부처의 여러가지 이유에 의해[20] 소모품처럼 소모되는 존재인 듯하다. 실제로 극 전반에 걸쳐 10명이 훌쩍 넘는 후궁들이 리타이어한다. 하상재, 여답응, 여빈, 순상재, 부찰귀인, 화비와 지답응, 조귀인, 제비, 기귀인, 혜비, 리비, 영귀인, 손답응, 녕빈의 순서이다. 그리고 후궁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마지막에 황후 그녀 자신도.

아래 목록은 서열이 워낙 휙휙 바뀌는 옹정황제의 여인 특성상, 등장순서대로 정리하고 등장순서가 겹칠시 최초등장시 서열이 높은 쪽을 먼저 쓴다.

문서 제목은 본명이 아니라 최초 등장시의 품계로 통일한다.(예: 조금묵 x 양빈 x 조귀인 o)
순원황후 하상재 단비 제비 여빈 경빈 조귀인
오라나랍씨 하동춘 불명 이씨 불명 풍씨 조금묵
주유칙 하월청 제월빈 탕정언 불명 풍약소 조금묵
흔상재 부찰귀인 순상재 여답응 지답응 기귀인 녕귀인 영귀인
불명 부찰 의흔 순아 여앵아 교송지 과이가 문원 섭란의 채빈
여영풍 두패균 등[21] 방순의 여앵아 교씨 관문원 섭란의 강심수

작중에서 언급만 나오고 등장하지 않은 5황자 홍주의 생모와 옹정제의 왕부 시절 적복진이던 순원황후에게 오만하게 굴다 2시진 동안 꿇어 앉는 벌을 받았던 측복진에 관한 얘기도 짤막하게 나온다. 그 뒤는 어떻게 됐는진 불명이나 작중 옹정제가 등극 후엔 보이지 않는다. 다만 4황자 홍력의 말로 볼 때, 홍주의 생모인 후궁은 생존해 있는 듯하다. 아들과 함께 궁 밖에 사는지도 모른다.

3.2. 원작

후궁 품계 일람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 정3품 종3품 정4품 종4품 정5품 종5품 정6품 종6품 정7품 종7품 정8품 종8품
귀비
숙비
현비
덕비
부인 2명 비 3명 소의
소원
소용
숙의
숙원
숙용
수의
수원
수용
귀빈 5명[32] 첩여 용화 완의
방의
분의
덕의
순의
[33] 소의
소원
양원
양제
귀인 재인
미인
상재
낭자
선시 채녀 경의
귀인, 빈, 귀빈, 비, 부인은 봉호를 받으나 비 아래의 후궁은 출신에 따라 받지 못하기도 한다. 종종 상재나 낭자도 봉호를 받는 경우가 있다. 정1품의 귀숙현덕 중 귀비만이 원래의 봉호를 유지할 수 있으며 실질적으로 가장 높다. 그러나 나중에 견환이 부황후의 대우를 받는 황귀비에 오르면서 최고 품계는 황귀비가 된다.

부인과 비 본래 각각 3명, 4명까지 둘 수 있으나 후반부의 4권에서 견환이 숙비가 된 뒤 궁주의 수를 줄여 2명, 3명이 되었다.

여담으로 부인이나 현비로 봉해진 여인들은 모두 끝이 안 좋았다. 석화부인으로 봉해졌던 모용세란, 사후 공각현비로 추증된 각비 탕정언, 장민부인에서 현비로 봉해졌던 호온용, 잠시 사숙현비로 추존된 선제의 옥액부인까지 모두 안 좋은 결말을 맞았다. 곧 부인으로 봉해질 예정이었던 안릉용 역시도. 유일한 예외는 정일부인 서연의.

본래라면 처음부터 높은 품계로 봉해질 수 있었으나 순원황후와 관련된 덕비 & 현비 사건 이후에는 신분이 높아도 입궁시 낮은 품계로 봉해지며 빈이 마지노선이다.

후궁이 대략 60여명 이상인데, 이 중 40여명이 죽거나 폐출되거나 냉궁으로 쫓겨나거나 미치거나 해서 리타이어한다.

4. 심복들

남자로는 태감(고자), 시위(고자 x)가 있으며, 여자는 궁녀들이다. 특기는 "죽여주시옵소서!"라고 외치며 셀프 싸대기를 때리는 것이다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들은 "소저"라고 불리며 나름 특별한 대접을 받는 듯하나[46] 일반 양산형 궁녀들은 대부분 소모품으로 취급된다. 걸핏하면 싸닥션을 맞고,[47]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옹정황제의 여인의 시녀들의 특징이 있다면, 절대적으로 충성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배신을 자주 때리거나 해서 지독히도 도움이 안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수석 시녀들은 대체로 자기 주인의 성격을 닮았다.[48] 시녀들이 자주 보이는 모습은 녹봉 등 필요한 물품을 내무부에 수령하려 다녀오거나, 소주의 팔을 잡거나 해서 높은 굽을 신었을 때도 넘어지지 않게 부축해주거나, 여름이면 부채 셔틀 or 인간 선풍기로 봉사하거나 하는 모습이다. 특히 여름에 회합이 있거나 할 때는 인간 선풍기로 화한 궁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또 한 주인을 모시는 쪽수가 좀 많아지면 옷 색깔을 한 색깔로 통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궁녀들의 경우 일반 평민과 비교한다면 정말로 신분이 낮은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전부 기인(旗人)들로, 일반 민인(民人)들과는 달리 국가로부터 여러 혜택을 받는 특권 계층 출신들이다. 특히 태후나 황후처럼 궁중에서도 높은 사람들을 모시는 궁녀들은 팔기 중에서도 상3기에 속한 사람들로만 뽑았다고 한다. 즉 궁녀들도 미장이나 견환, 하다못해 안릉용처럼 팔기라는 특권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지만, 다만 이들은 일반 팔기 귀족 출신의 후궁들과는 달리 내무부 포의(包衣) 3기 소속이 대부분인데다, 황제의 눈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궁녀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궁에서 일하는 사람을 아무나 뽑아 쓸 수는 없는데다가 황제의 후궁이나 황족의 복진을 충원할 필요성도 있었으므로, 청 황실은 정기적으로 수녀 선발을 통해 청나라의 특권계층인 팔기의 여성들 중 일정 인원을 뽑았다. 이들 중 황제의 눈에 들거나, 혹은 그 중에서도 문벌이 좋을 경우[49]에는 후궁이나 황족의 복진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궁녀로 일하다가 결혼할 나이가 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출궁한다.[50] 이렇게 출궁한 궁녀들은 궁중의 품위와 예법을 배웠다는 이유로 평판이 좋은 편이었고, 또 궁중에서 일하면서 상류층 사람들과 연이 닿는 경우가 많아 좋은 혼처를 구하기가 조금 더 쉬워진다는 이점이 있었다. 그래서 가난한 기인들 중에서는 이참에 딸이 돈도 벌어오고, 결혼도 잘하도록 입궁을 바라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단 태감들은 전부 신분이 낮은 일반 한족 출신이다. 고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팔기에 속해 있는 귀족들은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한족을 데려와서 쓰는 것이다.[51] 이외에 우리나라의 무수리처럼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 일꾼들은 전부 한족으로 이들은 궁녀들과 생활하는 곳도 다르고 그곳에서 그들 마음대로 결혼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이들은 내관들과 살림을 차려 궁밖에서 출퇴근하기도 했으며 이들이 몰려 사는 동네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 점은 우리나라의 내시들도 거의 비슷했다. 다만 궁녀들과 태감들이 사통하는 것은 엄금하였는데, 명나라 때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지면서 환관들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었다.[52] 하지만 역시 황제를 모시는 사람들이라 환관의 심기를 함부로 건든 사람들, 특히 인격적으로 모욕한 사람들은 거의 다 뒷끝이 좋지 못하다. 연갱요, 기귀인, 안릉용은 소배성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몰락해서 죽었고[53], 여답응은 소하자에게 보복하였다가 역보복으로 소하자에게 살해, 환관들은 근본없는 놈이라고 광역 어그로를 끌었던 여빈도 미쳐버렸다.

모시는 주인들의 최종 신분이 높은 순서대로 정렬한다.

4.1. 황제의 심복들

4.2. 견환의 심복들

친정에서 데려온 완벽과 유주[57]를 제외하면 모두 이름에 꽃이 들어가 있다.

4.3. 태후의 심복들

4.4. 황후의 심복들

시녀들 이름에 계절이 들어있다.

4.5. 화비의 심복들

화비를 모시는 익곤궁의 사람들. 이래저래 화비의 주변에는 제대로 된 사람은 없지만 충성심만큼은 강한 사람들이 꽤 있는 것을 알 수있다. 화비도 이를 알고 있기에 고문받는 주녕해의 비명을 들으며 "주녕해가 고문에 못이겨 자백하더라도 책망하지 않겠다..."라고 말한 바 있으며, 끝까지 자신을 따르는 송지에게는 "네가 고생이 많구나..."라는 지극히 화비답지 않은 말을 했다.[70]

4.6. 안릉용의 심복들

시녀들의 이름에 새가 들어있다.[75]

4.7. 기타 심복들

5. 황실 사람들

5.1. 서태비

원작에서의 이름은 완언연. 본명은 이광. 윤례의 생모이자 강희제가 생전에 가장 총애했던 후궁. 극중 설정에서 강희제는 그녀를 각별히 사랑하여, 그가 가장 아끼는 행궁인 창춘원에 동화대[90]라는 화려한 궁[91]을 지어주었고, 그녀가 좋아하는 꽃이자 부부의 금슬을 상징하는 자귀꽃을 동화대의 창문마다 새겨넣었다. 또 그녀가 입궁했을 때는 장상사(長相思)라는 금과 장상수(長相守)라는 피리[92]를 하사했는데, 그녀의 회상에 따르면 본인은 금을 타고 강희제는 피리를 불면서 함께 합주를 하곤 했다고 한다. 후일 안릉용이 노래를 부르고 상으로 받은 금루의 역시 본래는 강희제가 서태비에게 선물한 옷으로, 세상에 단 두 벌 뿐인 것을 서태비가 출가하면서 한 벌 가져가고 남은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출연하는 것은 견환 출궁 시점. 선황 사후에는 출가하여 충정이라는 법명으로 감로사(정확히 말하면 감로사 근처 안서관)에서 지내다가, 나무를 해오다 물 한 잔 얻어마시려고 우연히 방문한 견환(당시 막수)과 만나게 된다. 견환이 옹정제의 후궁이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들인 윤례와 사랑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대인배.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서 3일간 식음을 전폐했을 정도로 아들을 사랑했다. 윤례가 생사불명 상태일 때 환궁하려는 견환에게 배신하는 거냐고 화를 내기도 했으나, 황제에게 복수하고 아이와 가문을 지키려하는 견환의 굳은 각오를 보자 결국 막지 못한다. 견환의 뱃속 아이가 윤례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파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결국 아들에게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원작에선 견환이 환궁하기 직전에 태후의 사통을 견환에게 알려준다.

적운이라는 하녀를 데리고 다닌다.

원작에선 파이족 출신 노비였다가 입궁 후 후궁이 되었으나 황후와 태후의 견제로 궁 밖에서 지냈다. 태후가 죽고 황후가 폐위된 후 환궁하였다. 후궁 시절 임비 주성벽과 친했으나 사실은 주성벽이 그녀를 이용한 것 뿐이었다. 태후에게 현청을 빼앗기고 어쩔 수 없이 출가했는데 권력이 없어 아들을 지키지 못한 것에 미련이 있어 견환이 환궁할 때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권력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해준다. 견환이 서태비를 만났을 때의 외모 묘사에 따르면 나이는 들었지만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사후 소서태후로 높여지고 선제와 합장되었다.

5.2. 항친왕 윤기

옹정제의 이복동생이자 강희제의 5남. 어머니는 의비 곽락라씨로, 화비가 사는 익곤궁의 이전 주인이었다. 황후가 화비의 속을 긁기 위해 의비는 아들이 많아 총애를 독차지했다며 언급한 바로 그 인물이다. 이 말을 듣고 화비는 나오면서 "아들이 많으면 뭐해? 자식 농사를 잘못 짓는 바람에 아들내미가 반역을 하고 의비 본인까지 연루되었는데."라며 성질을 부렸다. 당연히 반역했다는 의비의 자식은 윤기의 친형제, 바로 9황자 윤당이다. 그런데 형제 중에서 반역했다면 자기도 무사하지 못해야 정상 아닌가? 극중에서는 돈친왕이 이 의비를 태후로 모시고 8황자 윤사를 황제로 추대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정황상 항친왕 본인은 동생과 달리 특별히 황위 쟁탈전에 끼어들지 않았거나 옹정제를 지지하여 목숨을 부지한 것 같다.[93] 그런데 옹정제는 항친왕에게 8황자 윤사와 14황자 윤제를 구명하려다가 황실 족보에서 제명당한 홍시의 양육을 명령한 걸로 봐서는 두 사람의 관계는 친한 것 같지는 않다.

실제 역사 속에서는 강희제에게 심성이 착하고 순후하다는 평을 들은 인물이고, 극중에서도 패아의 말에 따르면 궁녀들에게 종종 농담도 걸 만큼 쾌활하고 좋은 사람이라고는 하는데 견환과는 그야말로 상극이다. 하지만 마냥 적대적인 건 아니고, 조귀인의 계략으로 견환이 경홍무를 춰야 할 상황[94]에서 얼굴만 예쁘면 되지 굳이 춤재주까지 좋아야 하냐며 퉁치려 했다.

하지만 견환의 환궁 때 신료들과 함께 "폐비의 재입궁은 말도 안 된다. 게다가 견환 때문에 처소를 이렇게 사치스럽게 꾸민다니! 견환은 내명부의 화근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견환의 환궁을 반대했다.[95] 후일 연회에서, 윤례의 종이 공예가 떨어져 윤례와 견환이 위기에 빠졌을 때는 "어? 그 종이 공예는 꼭 희귀비같이 생겼네?"라며 눈치 없이 한 술 더 보탬으로써 분위기를 더 쎄하게 만들기도 했다.[96] 심지어 옹정제 사후에도 "희귀비는 황자의 생모이니 후계 논의에 끼어들 수 없소! 보나마나 6황자 홍염을 황위에 올리자고 할 텐데 어린애가 등극하면 누가 따르겠소? 지금 순치제 때처럼 도르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희제 때처럼 오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오?"며 견환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 때 견환은 "미안하지만 제 말 끝까지 듣고 얘기하시죠? 선황께서는 4황자 홍력을 후계로 정하셨거든요."이라고 응수했는데, 끝까지 "보위에 관한 일인데 희귀비 말만 믿을 수는 없어요!"라며 태클을 건다.[97]

견환의 적들 대부분은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 그리고 항친왕이 태클을 건 바로 그 4황자가 결국 옹정제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래가 심히 걱정되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항친왕은 옹정제보다 먼저 사망했다.

별로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복진과 사이가 꽤 좋아보인다. 항친왕보다 상당히 젊어보이고 붉은 꽃으로 장식한 대랍시를 쓰고 있는데, 13화에서 견환의 말에 따르면 측복진이라고 한다. 적복진이 일찍 사망해서 측복진만 남은 것일지도. 아무튼 이 측복진을 거의 항상 연회에 데리고 다니고, 언뜻언뜻 지나가는 장면들에서 함께 마주보며 환하게 웃고 건배를 하는 등 꽤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돈친왕과 좀 비슷한 면이 있는 지 머리를 쓰는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마격 칸이 옥환을 풀라고 가져오자 펄쩍 뛰면서 저리 치우라고 했다.

5.3. 돈친왕 윤아

豚친왕 원작에선 여남왕 현제. 옹정제의 이복동생이자 강희제의 10남. 어머니가 강희제의 2번째 황후 효소인황후의 친동생인 온희귀비 뉴호록씨로[98], 생모가 만주족 명문가 출신인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온희귀비의 할아버지 액역도(額亦都)는 누르하치의 최측근이자 청나라의 개국공신이었고, 온희귀비의 아버지 알필륭(遏必隆)은 그 액역도와 누르하치의 친딸 화석공주 사이에서 난 아들이자 순치제가 직접 임명한 보정대신이었다. 한족 혈통에, 따지고 보자면 원래는 포의(包衣) 출신에 불과했던 화비도 엄청난 오만함을 자랑하는 걸 생각하면 돈친왕의 부심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면도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머리가 나빠서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이에 반해 극중에서 옹정제의 생모인 태후는 한때 효소인황후의 시녀였던 것으로 나온다. 이런 까닭에 옹정제에게도 상당히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한다. 게다가 역사적으로도 돈친왕은 옹정제가 증오해마지않았던 8황자 윤사, 9황자 윤당, 14황자 윤제과 친하게 지냈고, 아예 8황자 윤사를 황제로 지지하며 옹정제와는 원래부터 정치적으로 완벽히 대립하는 관계였다.

이때문에 윤례에게는 "너네 엄마가 한인이라서 너한테 쓸데없는 거나 가르쳤나 보지?"라는 헛소리를 날리고, 조회에 무장을 하고 들어왔다가 어사가 자신을 탄핵하자 그 어사를 두들겨 패서 기절시키기도 한다. 심지어 연갱요와 붙어서 자기 어머니의 품계를 올려 달라는 등, 온갖 오만방자한 짓을 행하다가 훗날 분노한 황제에 의해 아내와 아들, 딸과 같이 평민으로 강등당한다. 그래도 황족인지라 돈친왕부에서 계속 사는 것 정도는 봐준 듯.[99] 황제가 돈친왕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견환과 안릉용이 냉궁 Mk.2로 여겨지는 봉래주로 가기도 한다.[100]

의외의 면모도 있다. 무골인데다가 멧돼지같은 외모에 비해 의외로 순정남인지라, 아내도 하나만 들이고 첩 하나 없이 그 아내만을 끔찍이 여기는 애처가이다.[101] 돈친왕의 아내(복진)은 견환 생일파티에 유행하는 화장인 '교리장'(황제가 견환 이마에 배꽃을 그려 준 화장)을 하고 온 모습으로 첫선을 보였는데 이 때 몸이 안 좋아 견환의 도움을 받았고,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유산 후 슬퍼하다가 황제에게 냉대받는 견환을 문병와줄 정도로 착한 데다가[102] 남편의 막나가는 행동에 태클을 걸어주는 상식인이다.마누라가 혀차면서 눈 흘기면 입다무는 돈친왕 귀요미 하지만 견환은 정치적 입장 때문에 복진의 통수를 때려버리는데, 복진에게 최고급 차를 대접해놓고는 평소에도 자주 마셨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며 은근슬쩍 황제한테 꼰지른다.[103] 참고로 복진이 차에 대하여 별 반응이 없었던 이유는 궁에 들어가 인질이 될 딸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극중에선 자식으로 1남 1녀가 있는 설정이다.[104] 딸이 첫째고 아들이 둘째. 딸은 경성군주에서 화석공정공주로 렙업했다가 폐서인되었고, 아들 홍훤은 패자의 작위를 받았으나 폐서인되었다가 견환이 황제에게 부탁하여 다시 작위를 받았다. 착한 돈친왕 복진을 위해서였다고.

견환이 희귀비로 환궁했을 때 신분세탁을 거치면서 새로 얻은 성이 바로 돈친왕의 친어머니의 성인 뉴호록씨인데 만약 이 사실을 돈친왕이 알았다면 그야말로 속이 뒤집혔을 것이다. 견환은 만주족이 아니라 한족이기 때문에 그런 영예로운 성씨를 얻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니...

5.4. 신패륵, 신군왕 윤희

원작에서의 이름은 현분(玄汾). 황제윤례의 이복동생. 어머니는 희태빈인데 후궁이 되기 전에는 신분이 낮은 침모였다고 한다.[105] 살기 위해 한량인 척 몸을 사리는 윤례에 비해 있는 모습 그대로는 보이는 솔직하고 순수한 성격이다. 하긴 윤례만큼 선황제의 엄청난 총애를 받은 것도 아니고 형제들과의 나이 차이도 많이 나서[106] 지금의 황제가 형제들과 권력투쟁을 벌일 당시에는 어린 아이라 싸움에 낄 일도 없었을 테니, 윤례와는 달리 황제의 의심이나 견제를 받지 않아서 있는 모습 그대로 사는 게 가능했던 것인지도. 게다가 의외로 근성가이이다. 겨울에도 의지가 약해지지 않기 위해 옷을 얇게 입는다고.

황제나 윤례처럼 예술에 조예가 있는데 그의 경우에는 그림의 주요 타깃. 그림을 인연으로 하여 견환의 동생인 옥요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적복진으로 들인다. 훗날 두 사람 사이에 딸 한 명밖에 태어나지 않아 윤례가 측복진 맹정한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 원철을 양자로 들인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견환이 6황자 홍염을 윤례의 양자(사실은 친자)로 보내는 아주 좋은 구실을 만들어준다.

견환이 쌍둥이를 낳은 직후에 홍염이 황제의 친자가 맞는가에 대한 스캔들이 터지자 옥요가 "우리 언니를 구해야 해요!"하고 울음을 터트리자 옥요가 걱정이 되어 황제에게 견환을 변호해준다. "나중에 홍염이 자라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가지겠어요? 친자 확인을 했다는 것 자체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구요! 홍염에 대한 기대가 크다면 친자 확인은 옳지 않아요!"라고 말이다.

나중에 윤례가 견환을 위해 준가르의 왕 마격을 상대로 군사를 일으켜서 과친왕으로 신분이 상승될 때, 신패륵 또한 신군왕으로 신분이 상승하였다. 옹정제의 장례식 때 항친왕 뒤에서 등장하는데, 4황자를 옹립하려는 견환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며 바람을 잡아주었다.

연기자인 강복진(康福震)은 87년생으로 88년생인 3황자 홍시 역의 우입붕이나 4황자 홍력 역의 왕문걸보다 고작 1살 더 많다실제 역사에서 홍력과 윤희가 동갑이라는 걸 생각하면 묘하게 적절한 고증이다

원작에선 드라마보다 성격이 강한 편으로, 수방 궁녀 출신으로 정5품 빈에 불과한 생모의 출신 때문에 무시당하고 자랐으며, 현청이 돌봐주지 않았다면 비뚤어졌을 거라고 한다. 어느 정도냐면 친자 확인 사건 때 관문원을 디스하고 나서 따귀를 때렸다! 직후 현릉에게 죄를 청했는데, 현릉은 네 탓을 안 한다고 말하며 신경도 쓰지 않는다. 현릉이 죽고 나서 태자 여윤이 새 황제로 즉위하는데 태후가 된 견환이 수렴청정을 거절하면서 정무를 보좌하는 직책을 얻게 되었다.

5.5. 1황자, 2황자, 5황자

1황자는 홍휘, 살아 있었다면 적자이고 장자여서 누구보다 고귀할 아들이 되겠다. 이 부분은 조금 복잡하긴 한데, 만주족은 본래 적서의 구분이 없이 능력 있는 자를 후계자로 삼지만 청나라가 강희제 이후로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가 되면서 장자 승계 원칙을 중시하게 됐기에 적장자 라는 것은 상당한 어드벤티지가 된다.(홍시를 중시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시 왕부의 측복진이었던 오라나랍 의수의 아들인데 총명해 2살 때부터 글자를 배웠다는 언급이 나온다. 하지만 몸이 약해 곧 죽고 말았다.[107] 이 때 의수는 매우 슬퍼했으나, 황제는 적복진인 순원의 임신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원작의 외전에서 자세히 나오는데, 황제는 의수의 아이가 죽을 때 얼굴도 안비치다가 순원황후의 회임을 기뻐하면서 의수에게 "당신의 아이가 죽은 대신 당신 언니가 아이를 가졌으니 그 애는 당신의 아이"라고 말해[108][109] 의수는 언니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고 받아들여 흑화하였다. 또한 원래는 황자를 낳으면 의수를 적복진으로 올려주겠다고 했으나 순원이 적복진으로 오는 바람에 없던 이야기가 돼버리기도 했고. 그가 비오는 날 죽었기 때문에 황후는 비 오는 날만 되면 히스테리성 두통에 시달리게 된다.

2황자는[110] 태어나자마자 죽은, 내지는 사산된 순원의 아들이다. 의수가 교묘하게 약을 먹여서 산모와 태아를 동시에 죽였다고. 온몸이 푸른 점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어의는 "숨이 부족해서 그리 된 것."이라고 진단했지만 몰래 시신을 엿본 단비의 눈에는 수상해보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1황자가 죽은 상태에서 2황자가 살아있었다면 사실상 이 녀석이 적장자가 되니 다른 황자들과 비교해 넘사벽의 입지를 지녔을 것이다.[111] 무엇보다도 황제가 가장 사랑했던 순원의 아이인데다가 순원이 사실상 의수의 지위와 입지까지 뺏어간 상태에서 낳은 아들이었으니.

5황자는[112] 등장하지는 않지만 있다고는 언급된다. 초반 부분에 "왜 5황자는 안 왔냐?"라고 물으니 "감기에 걸려서..."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었다. 후반부에서 황제가 태자를 정하려고 신하들과 이야기할 때, 4황자, 5황자, 6황자 아들 셋 뿐인데[113] 이 둘 중 2명이 다 희귀비의 자식이고 5황자는 방탕하여[114] 차기 황제의 그릇이 아니라고 말한 점으로 보아 출생이 미천해 흑역사 취급받은 4황자보다 더 황제에게 천대받고 있을 수도 있겠다. 궁에서 자란 아들은 3황자 뿐이라고 제비가 말했는데, 당시 6황자는 태어나기 전이었고 4황자는 태생이 미천해 그랬다지만 5황자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일단 병약하다는 언급은 곧잘 나오는 것을 봐서 몸이 상당히 부실한 듯. 생모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극중 시점에서 등장하는 후궁 중에는 없다. 미장과 견환이 냉궁으로 갔을 때 거기에는 6명 정도의 여자가 마당에 있었는데, 마당에 그만큼 있었으면 건물 안에는 얼마나 있었을까? 그녀들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만 4황자가 "5황자는 어머니가 있지만 난 없어요."라는 말을 했으니, 일단 생모가 살아있다는 건 확실한 것 같다.[115]

5.6. 6황자 홍염

원작에서의 이름은 여함(予涵). 윤례와 견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그러나 견환의 계략으로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친자인 6황자가 된다. 친자확인 사건에 휘말렸을 때에도 윤례의 아들이란 사실이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으나, 의심을 거두지 않았던 황제가 직접 친자확인을 해보려고 하예를 시켜 몰래 홍염의 피를 채취하는 바람에 녕빈이 황제를 독살하는 계기가 되었다.

찌질한 3황자나 실수로 생긴 4황자와는 달리,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견환에게서 태어난 건강하고 똘똘한 황자이기 때문에 유달리 황제의 총애를 듬뿍 받았고, 황제가 늘 태자로 세울 뜻을 내비쳤었다. 그러나 견환은 홍염이 장난이 심하다는 구실을 대어 어떻게든 막으려고 한다. 황제가 되면 필연적으로 궁중 암투에 휘말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드라마판 기준으로는 마지막 황후와의 대면에서 "왜 네 아들을 황제로 만들지 않았냐"는 황후의 질문에 대해 "황후 당신 같은 여자를 만나 대가 끊길까 두렵다"고 쏘아붙였다.

그래서 윤례의 사후 양자로 들어가 사실상 친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도 과군왕 일가가 전멸하고 과군왕부라고 할 것이 남아있지 않아서인지 응휘당에 머물고 있었으며, 응휘당을 찾아온 견환에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훌륭했다는 17황숙'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시점에서 이미 패륵의 칭호를 받아 6패륵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열심히 책을 읽는 모습으로 나왔으니 이쪽도 똑똑할 듯. 실제로 4황자가 칭찬하기도 했고...

중국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는 '환주격격(한국명 황제의 딸)'에 나오는 청아 공주[116]가 바로 홍염의 딸인 것이 아닐까 하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견환의 미래 모습인 부처님(태후)이 청아를 유독 아낀 데는 그 이유가 있지 않겠냐는 것. 다만 설정 상 청아는 유친왕의 딸로 나오므로 과공군왕인 홍염의 딸일 수는 없다. 일단 청아는 가상인물이기도 하고.

참고로 황제의 말에 따르면 이마와 턱이 견환을 닮았고, 피부도 견환을 닮아 하얗고 부드럽다고 한다. 다만 자라서 사냥과 말타기를 즐기다 보면 피부가 점차 상할지도

실제 역사에서의 홍염은 옹정제와 후궁 겸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며 2살때 옹정제가 죽고 5살 때 윤례의 양자로 편입되었다. 기록에는 손버릇이 안 좋아 물건을 훔치고 몰래 팔고 태후에게 불손하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형인 건륭제에게 들켜 패륵으로 강등되고 시름시름 앓다가 33세에 요절했다고 한다.

5.7. 온의공주

원작에서의 아명은 양옥(良玉). 황제와 조귀인의 딸. 황손이 적은 탓에[117] 황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화비가 황제의 환심을 살 생각으로 많이 이용한다. 친모랑 떨어져서 화비에게 맡겨졌다가 수면제를 먹여진다든가, 마니옥 죽을 먹고 배앓이를 한다든가...

게다가 화비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어머니 조귀인의 옆에 있다가 화비가 격노하는 것을 보고 울어버려서 손찌검을 당하고, 직후에 자신에게 이런 아이가 있었으면 황제가 이렇게 박대하진 않았을 거라고 펑펑 우는 화비에게 부둥켜안기기도 했다. 지켜보면서 혼비백산한 조귀인의 표정이 백미.

심지어 화비가 죽고 나서도 고난이 끝나지 않아서 견환이 출궁했을 때 미장이 견환을 만나기 위해 온의에게 약을 먹여 아프게 해서 온의의 건강을 위해 급사한 비빈들의 위패를 자신이 감로사로 옮긴다는 핑계로 이용되기까지...[118] 이래저래 고생이 많은 공주. 조귀인이 죽은 뒤엔 단비가 키운다. 특징이라면 낯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한 번도 안 봤을 단비에게 잘 뽀뽀해주고 하는 걸 봐서.

여담이나 돌잔치 상황을 보면, 생일은 초여름으로 추정된다.

5.8. 영서공주

원작에서의 아명은 온환(韫欢). 윤례와 견환 사이에서 태어난 딸. 6황자 홍염과는 쌍둥이 남매이고, 눈매가 특히 견환을 닮았다고 한다. 친자확인 사건에 휘말린 홍염과는 달리 딱히 큰 비중은 없다. ??쌍둥인데??[119]홍염 이름을 황제가 짓고, 영서의 이름은 견환이 지었는데, 시구에서 따서 지었다. 참고로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무제(無題)>이다.

순원황후와 현 황후(의수) 자매의 비밀을 밝혀내는 데, 정확히는 안릉용의 유언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견환, 단비, 경비가 한 자리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한담을 나눌 때, 몇 살 많은 언니들이 쫓고 쫓기며 장난치는 것을 보고 "언니가 언니를 쫓네!"라는 말을 한다.[120]물론 어린 아이가 별뜻없이 한 말이지만, 견환은 그 말을 듣고 안릉용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안릉용이 한 "황후가 황후를 죽였다"는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말 속의 두 황후가 동일인물이 아님을 비로소 깨닫게 되어, 현재의 황후가 순원황후를 죽였음을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된다. 중국어의 어순구조를 잘 모른다면 이 장면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황후 죽이다 황후 이런식의 영어 어순구조와 비슷하다고 보면된다. 견환은 처음에 황후(목적어)를 죽여.. 황후를.. 이런식으로 이해했다면 나중에는 황후(주어)가 황후(목적어)를 죽였다 라는 식으로 제대로 깨닫는다

후에 견환과 산책 중에 꽃 이야기를 하다가 친부인 과친왕을 만난다.

원작에선 자라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게 하필이면 이복동생이자 청하왕(과군왕=윤례)의 아들인 여철. 그러나 어머니 견환은 당연히 두 사람 사이를 반대했고[121], 나중에 여철이 죽자 그 일로 충격을 받아 시집을 가지 않은 채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5.9. 정화공주

온실초와 심미장 사이에서 태어난 딸. 술에 취해 온실초와 하룻밤을 지내는 바람에 생긴 아이로,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미장이 다시 황제를 받아들인 척 하여 황제의 아이라고 속인다. 난산 끝에 태어나지만 미장은 죽고, 견환이 대신 키우게 된다. 원래 태후가 이름을 지어주려 했으나[122] 미장의 유언으로 견환이 이름을 붙여준다.[123]

원작에서의 이름은 여윤. 아들, 즉 황자로 나오며 황제가 죽자 황위를 이어받아 차기 황제가 된다.

5.10. 원철

원작에서의 이름은 여철(予澈). 윤례와 맹정한의 아들.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 때문에 어린 나이에 친모, 친부, 계모 전부를 잃고 혼자 남은 불쌍한 아이다. 부모가 죽은 뒤에 신군왕 부부가 맡아 키우다가 아예 신군왕의 양자로 들어간다.

그런데 공식적으로는 사촌이지만 실제로는 이복형제인 홍염과 외모가 너무 닮아서, 황제가 홍염의 출생을 다시 의심하는 계기가 된다. 홍염과 매우 닮았다는 설정 때문인지 3년 전 홍염과 배우가 같다.

원작에서의 여철은 사촌지간인 영서공주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사실 두 사람은 이복남매 사이이기 때문에 견환이 둘 사이를 반대했다. 여철이 죽고 영서가 시집가지 않았다는 정도만 나오고 자세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124]

초기 설정에는 완벽의 친자식이었지만 설정변경으로 맹정한의 자식이 됐다.

6. 원작에서

7. 태의들

8. 감로사 사람들

9. 신하들

10. 그 외


[1] 정확히 말하면 한족 중에서도 한군 팔기. 청나라가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이후 황제들은 대개 만주족보다 한족 여자를 더 총애했는데, 한족 여자들이 기본적으로 지식이 많고 똑똑하여 황제의 말상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만주족은 굳이 글자를 배우지 않아도 잘 살았기 때문에, 여자들도 굳이 배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2] 드라마판에서는 태후가 "황손을 번창케 하기 위해서 수녀 선발을 해야 한다"고 하도 황제를 갈궈대서, 결국 황제는 한숨을 내쉬면서 "그럼 이번 수녀 선발을 끝으로 다시는 이런 거 하지 마요, 엄마. 그리고 이번 후궁 간택은 만주족과 한족 두 인종 간의 화합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족 여자들을 최우선적으로 뽑을 테니까 이 이상 토달지 마세요."라는 이유로 한족 후궁들이 다수가 된 것.[3] 하지만 한족이라도 그냥 한족은 아니고 팔기군 소속의 한족만이 가능하다. 작중에서 팔기군에 소속된 한족은 한군기, 평범한 한족은 한인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4] 이 발언으로 보아, 만군기임이 밝혀지진 않았으나 만군기 가능성이 있는 것이, 기귀인 이전에 리타이어한 여빈 정도이다.[5] 순상재는 2화의 수녀 명부에서 만군기라고 적혀있기도 하고, "만몽이 먼저 한족은 나중"이라는 법도에 따라 견환보다 먼저 입궁하기도 했으므로 확실히 만주족이다. 보통 봉호가 없는 후궁들은 성씨+직위로 호칭되기 때문에 평소 순아라고 불리는 순상재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보통 이름 뒤에 兒를 붙인다), 교송지 역시 교답응이 아닌 지답응으로 불려졌으므로 순상재 역시 이러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원작 소설에서는 방의순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므로, 순은 성씨가 아니라 이름이다. 다만 민족이 만주족으로 바뀌었으므로 성씨는 원작과 다를 것이다.[6] 편집으로 삭제된 내용에 의하면 견환의 입궁 동기로 초반에 언급되는 박이제길특 귀인이 바로 이 정빈이다. 견환이 감로사로 가기 전까지 총애를 못받다가 견환이 감로사로 간 후 견환처럼 꾸며서 잠시 황제의 총애를 받아 정이라는 봉호를 받고 빈으로 승급했지만 자신의 총애가 오래 가지 못할것이라는 걸 알아서 자신의 시녀를 황제에게 바쳤고 그 시녀가 바로 강상재이다. 이후 안릉용에게 총애를 빼앗겼고 정빈과 강상재가 안릉용을 싫어하는 이유도 그때문이라고 한다.[7] 수녀선발에서 뽑힌 후궁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 실제 청나라 후궁들 중에는 수녀 선발에서 뽑힌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빈이나 비가 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극중에서는 수녀로서 귀인보다 높은 품계를 받은 경우는 없다.[8] 예를 들어 대랍시에 드리우는 술이 1개나 2개냐의 차이.[9] 안릉용과 기귀인이 둘 다 귀인, 빈일 때 기빈이 좀 더 윗자리에 앉았는데 이는 안릉용이 봉호가 없어서 그랬다. 참고로 기빈이 귀인으로 강등당한 뒤로는 당연히 안릉용이 더 윗자리에 앉게 되었다. 황후-안릉용-기빈 3명이 모인 상황에서 볼 수 있다. 또한 봉호를 박탈당한 연세란은 "난 이제 제비, 단비보다도 아래인데 무슨 낯으로 나다니냐"라는 말도 했다.[10] 완빈과 조귀인이 이런 관계였다.[11] 심미장의 가짜 회임 사건이 연세란의 짓이라는 걸 안 황제가 화비 → 연귀인으로 강등시키려다가 빈으로 참았다. 물론 화비가 역병 처방전을 온실초한테 훔쳐와서 말짱 없었던 일이 되지만.[12] 일례로 건륭제의 말년에 가장 총애받았고 가경제를 낳은 위가씨는 순수 한족 출신이 탓인지 황귀비에 올라 계황후 호이파나라씨를 대신해 후궁을 통솔했지만 죽은지 20년이 지난 후에야 황후로 추존되었다.[13] 근데 조귀인은 양빈이 되기 전에 연회에서 쓴 적이 있다. 공주의 생모라 특별히 쓴 듯.[14] 그 외는 그냥 작은 주인이라는 뜻의 "소주"로 불린다. 하지만 엄격히 말해 궁의 주인은 황제 부처와 태후 이렇게 3명밖에 없으므로 마마로 불리울 수 있는 건 황후와 태후 뿐이고, 원래 후궁들은 전부 그냥 소주라고 방약 상궁이 1편에서 견환들에게 가르쳐준다. 빈 이상이라도 마마라고 부르는건 그냥 높여 불러주는 것 뿐이다. 황자나 공주들은 자신들의 서모라서 그런지 빈 아래의 후궁들에게도 마마라는 호칭을 쓴다.[15] 황제의 시침을 들 자격이 있다는 걸 제외하면 일반 궁녀나 다름없는 수준이다.[16] 예를 들어 여답응은 견환 앞에서 본 소주라고 스스로를 지칭했다.[17] 남편인 황제가 죽어야 태후가 된다.[18] 실제로 쓰인 적이 없는 사극전용 단어이다. 실제로는 소첩 혹은 , 첩신 등을 사용했다.[19] 이 둘이 자살을 한 것도 이미 친정 가문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제비의 경우 부친이 뇌물수수로 강희제(선대 황제) 때 이미 유배를 갔으며, 안릉용이 자살할 때도 이미 안비괴는 감옥에서 자살했다.[20] 정치적 이유에서건, 얀데레적 이유에서건.[21] 원래는 병풍 캐릭터로 설정했지만 원작의 잡다한 캐릭터들을 모두 구현하기 뭣해서 부찰귀인 한 명에게 몰아넣었다고 한다.[22] 안릉용을 갈구면서 킥킥거리던 강상재를 보고 안릉용은 "연희궁의 윗전으로서 명령한다!"라고 말한다.[23] 견환과 안릉용, 심미장이 들어온 그 때[24] 돈친왕, 항친왕 등 많으니까[25] 아마 공신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왕부 시녀 출신 여자들은 "답응"으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이 둘은 별 총애도 못 받는데 답응에서 빈까지 올라가는 긴 여정을 그렇게 단시간에 달성할 리가 없다. 공신의 딸이면 단번에 귀인, 상재로 시작하니까 비교적 가능성이 있다.[26] 칭기즈 칸보르지기트를 한문으로 변형하여 사용한 것으로 당연히 칭기즈 칸의 후손이라는 뜻이 된다![27] 2화에서 한 번 언급됐는데, 화비가 새로 들어오는 후궁들의 배정된 처소 명단을 들을 때 종수궁에 지정된다.[28] 총애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이 둘의 후배인 영귀인이 승진할 때 강상재는 정빈과 나란히 승진을 못하는 뒷전이 된다.(…)[29] 다만 이 상황 전에 전추와 황후가 "릉용이 쓸모 없어졌다, 이제 다른 사람을 써야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 것으로 봐서 아마 그게 강상재였던 듯 하다.[30] 중국조선은 후사가 없는 후궁은 궁을 비우고 로 출가해야 했으며, 자식이 있는 후궁은 자식의 거주궁에서 살아야 했다. 경귀비와 흔빈, 단황귀비는 견환의 편이자 측근들이며 경귀비와 단황귀비는 자신들이 직접 낳은 아이는 없지만 롱월공주와 온의공주를 양녀로 들였으므로 자식이 있다고 보면 되겠다. 흔빈은 밝혀진 바가 없다. 사실 이 제도는 엄청 무시무시한 뒷배경이 있는데, 원래는 선황이 죽으면 자식이 없는 선황의 후궁은 전부 순장이다. 다만 시대가 흐르면서 지나치게 잔인하다 하여 절에서 내세의 덕을 쌓는 것으로 배려하게 된 것. 자식이 있는 선황의 후궁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식의 왕부 (자식이 성년이 될 즈음 왕이 되므로)로 가서 태비(태복진이라고도 한다)가 된다. 다만 극 중 윤례의 어머니 서태비의 경우 황태후가 좋게 여기지 않아 눈치껏 자진해서 도닦으러 출가한 케이스.[31] 손답응이 사통했다고 간단하게 보고한 것도 아니고 둘이 꽃밭에서 헐벗고 하늘과 땅도 모르며 뒹굴더라며 내가 갔을 때 둘이 땀투성이가 되어서 꽃밭에 있더라고 자극적인 워딩으로 황제의 성질을 제대로 긁었다.[32] 이 때부터 궁주이며 주자나 마마라고 불릴 수 있게 된다.[33] 드라마의 귀인처럼 갓 입궁한 후궁이 받을 수 있는 마지노선 품계.[34] 본편의 표기. 외전인 야심침에서는 거꾸로 현비 감씨, 덕비 묘씨라고 나온다. 유산한 쪽이 누구인지는 작가 본인도 헛갈리는지 감씨라고 했다가 현비라고 했다가 왔다 갔다 한다.[35] 처음에는 순(順), 공(恭), 진(珍) 자가 올려졌고, 견환이 진(珍)으로 하는 게 어떻냐고 하자 현릉은 연의가 자신에게 황자를 낳아줬지만 내 마음의 보배는 아니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이에 견환이 곧을 정(貞)자를 제안하고 현릉이 이를 받아들인다.[36] 다만 견환이 출궁하기 전 서채녀가 지나가듯이 언급된다. 본격적으로 언급되는 건 출궁 이후고 견환이 직접 대면한 건 환궁 이후다.[37] 추녀는 아니고 중상 정도로 묘사된다.[38] 근석의 스캔들 때 맹자를 인용해 도와주거나, 드라마 최종회에서 황제의 죽음에 슬퍼하느라 몸져누웠다는 언급 등[39] 묘사상으로는 6, 7할 정도[40]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나 현릉이 직접 "여음이 널 얼마나 닮았는지 아느냐?"라고 하고 미장도 많이 닮았다고 하며 견환이 출궁한 후 들어온 후궁들이 견환을 보고 매우 놀랐다.[41] 작약의 다른 이름[42] 화비가 좋아하는 꽃인 작약에서 따온 이름이다.[43] 심지어 우대하기도 했는데, 원래 궁녀 출신은 한 계급 한 계급 진봉할 수밖에 없는 것이 관례이나 적작은 두 단계씩 진봉하곤 했다.[44] 이때, 팔이 짤려 위로 차원으로 첩여에 봉해진다.[45] 친사촌을 제외한 모든 친척 오빠를 이른다.[46] 밑에 서술되듯 궁녀들이라도 팔기 출신으로 엄격하게 신분을 고려하여 뽑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친정에서 몸종을 데리고 입궁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마도 중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완벽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실 왜곡인 듯.[47] 다만 실제로는 아무리 궁녀라도 얼굴은 가급적 때리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하지만 얼굴 외의 부위는 그냥 마구 팼다고 한다.[48] 전추는 황후의 자애로운 가면을, 송지는 화비의 거만함을, 길상은 단비의 돌부처같은 생존력을, 상아는 부찰귀인의 멍청함을, 조귀인의 시녀는 자기 주인의 영악함을, 안릉용의 시녀 보견은 제 주인보다 더한 곡해력을, 기귀인 시녀는 자기 주인의 싸가지를 닮는 등, 채월-심미장처럼 좀 애매한 경우도 있고 취과-제비처럼 전혀 안 닮은 경우도 없는 건 아니다.[49] 특히 가족 중 이미 황족의 복진이나 후궁이 있을 경우, 혹은 부친이 높은 벼슬을 지낼 경우에는 선발의 우선 대상이 되었다.[50] 보보경심에 보면 주인공인 약희가 4황자와 8황자 때문에 다행히 간택은 되지 않았지만 궁녀로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약희는 8황자의 처제이자, 정 2품 총병을 지내고 있는 만주족 귀족의 딸로, 상당히 높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궁녀로 일하고 있다. 또한 근석이 말하길 25살이 넘은 궁녀들은 출궁할 수 있다고.[51] 단 입궁 후 태감이 되면 팔기에 소속되었다.[52] 명나라 때 환관만 최대 10만명에 달했다고 하며, 명나라의 정치 자체가 대신세력과 환관세력의 대립으로 해석되기도 한다(후기로 가면 환관이 왕을 좌지우지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드라마 중에서도 황후가 이 일을 언급하며 "청 왕조에서는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한다.[53] 연갱요와 안릉용은 환관들을 고자라며 모욕했고, 기귀인은 친자확인 사건 때 소배성의 아내인 최근석에게 모진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내야 한다고 제안했었다.[54] 그러나 드라마 기준에는 소배성은 최근석과 혼인했어도 끝까지 황제의 곁을 지킨다. 황제의 장례식에서 주례(?)를 맡는 장면에까지 얼굴을 비춘다.[55] 이때 여앵아에게 원한이 깊었는지, 죽었을 때 목이 반쯤 잘렸다고.[56] 다만 이때는 안릉용이 견환의 사주를 받아 냉궁에 찾아왔다고 알고 있었으니, 견환이 여앵아를 죽이라고 지시한 줄 알고 있었다.[57] 이들은 벽색과 주홍색, 즉 색상이 이름에 들어있다. 이들의 이름은 천룡팔부에서 등장하는 모용복의 시녀인 아주와 아벽에게서 따온 걸로 보인다.[58] 자신은 힘조절을 못하니 스스로 때리라고 적당히 봐주긴 했다.[59] 드라마에서는 "어느 궁, 어느 소주를 섬기더라도 충심을 다할 것입니다"라는 대사로 순화되었다.[60] "책상 위에 있던 유리 화병은 닦고 나왔나?" "네" "ㅋㅋㅋ 아닌데? 유리 화병이 아니라 청옥화병인데?" "아 잊을 수도 있죠. 청옥 화병이 맞습니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내 책상 위에는 화병이 있었던 적이 없다!" "..."[61] 정황상 견환은 외부인보다는 소윤자가 더 믿음직했을 것으로 보인다. 견환이 제안을 하기 바쁘게 황제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소윤자는 성은이 망극하다며 인사를 올려서 기정사실로 만들고, 황제도 굳이 기각하기는 뭣해서 인정해 버린다.[62] 하지만 이는 견환의 힘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황제가 쓰러져 사실상 궁의 거의 모든 부분을 장악한 견환이기에 견환의 심복인 소윤자의 말에 따라 내관들이 궁을 수색해서 하예를 잡는 건 일도 아니었을 듯.[63] 극장판 수록분 기준[64] 심미장의 이름을 암시+순원황후 카드+(견환)날 생각해서 좀 봐주세요의 콤보를 날린 것이다. 이 때 견환은 순원왕후에 대해 잘 몰랐지만 방약이 마침 원산대를 그릴 줄 알았기에 나비효과가 된 것. 원산대가 나이 많은 사람에게 어울리거나 흔한 화장기법은 아닌지, 황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쳐다본다.[65] 엔딩 크레딧에서 손죽식이라고 나오는 걸 보면 죽식은 본명인 것 같다.[66] 태후가 의수를 세운 것을 후회하자 태후께서 타일러도 안 듣는 걸 어쩌겠냐고 발언[67] 애초에 신형사의 고문은 소배성의 말마따나 결백을 입증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만큼 가혹한 거라 그걸 버티며 불지 않는 전추가 대단한 거다. 화비도 자신의 측근인 주녕해가 신형사에 끌려갔을 때도 주녕해가 자신을 불어도 탓하지 않을 것이라며 체념할 정도. 즉 신형사 고문에 굴복하는 건 배신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68] 물론 모든 게 황후가 꾸민 일이었으니 그냥 연기.[69] 물에 백반이 섞이면 생판 남이라도 피가 섞여 혈육 관계로 오해받을 수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친자확인검사는 같은 혈액형끼리 섞일 수도 있기 때문에 사극에서만 통하는 검사법. 다시 말해서 정확한 검사법이 아니다.[70] 물론 이 뒤에 송지는 "어려서부터 소주를 모셨는데 당연히 끝까지 따라가야죠"라고 대답한다.[71] 이 걸음걸이 때문에 한 번은 급히 들어오다가 문턱에 걸려 콰당 넘어졌고 화비는 그걸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물론 그 다음에 그가 전한 소식이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어서 기뻐했지만.[72] 이 설정대로라면 화비가 주녕해를 막대하지 않는 것이 설명되긴 한다.[73] 화비가 송지에게 화를 내며 빗을 집어던지려 했을 때 그 빗이 싫으면 저한테 하사해 달라며 능청을 떨며 말렸고, 그 다음 황제에게 질투심을 보이면 안된다고 설득했다.[74] 조귀인이나 송지는 뭔가 수틀린다 싶으면 화비한테 갈굼, 폭행당하지만 주녕해는 유분의 입막음에 실패했을 때도 별다른 책망을 듣지 않았다.[75] 후에 안릉용이 "꾀꼬리" 리비가 될 거라는 복선이었을지도?[76] 안릉용은 렙 1 답응으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답응은 시녀를 한 사람만 가질 수 있다.[77] 릉용이 결정적으로 황후에게 약점을 잡힌 상황에서 황후가 너와 자매같은 사람에게 들었다는 의뭉스러운 말을 한다. 릉용은 그것이 당연히 견환이라 생각하는데, 견환은 확실히 아니었으므로 남는 사람은 보견 뿐이다.[78] 정백과 비문의 케이스처럼 이 부분도 제대로 번역이 되지 못했는데, 역시 그냥 곱게 죽이는 것도 아니고 곤봉으로 매질해서 죽였다.[79] 견환이 충격을 받아 유산하게 하려고 했으나 조산에 거쳤다. 그런데 보작의 케이스로 봤을 때, 유산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얘도 처형당할 가능성이 높다.[80] 1.황후가 추천한 인물이고 2.아는 게 너무 많아서 죽어야 한다는 황후의 언급이 있다. 게다가 주녕해가 고문을 받고 화비파의 죄행들을 자백할 때 유독 심미장 독살 시도 관련으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딱히 이것만 숨길 이유도 없고, 내무부의 누군가가 한 일인 건 분명하니 황후파인 강충민이 한 일이라고 추측한다면 얼추 아귀가 맞는다.[81] 상한 음식을 제공하고, 숯과 같은 물자도 제대로 주지 않았으며 쇄옥헌 사람들이 병에 걸렸는데도 치료받지 못하게 막았다.[82] 과군왕부의 시녀인 빈/람, 화비의 시녀인 송/영가 같은 돌림자를 쓰는 케이스이며, 황후의 시녀인 전추/회춘(계절), 견환의 시녀인 유주/완벽(물+색상)은 세트구성인 케이스다.[83] 원문 대사: 황제폐하는 소주를 정말 총애하세요 (중략) 어떤 답응은 시침도 못 들었는데 (후략)[84] 사실 틀린 말은 아닌 게, 이 때 제비는 견환을 싫어했어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는데 옆에서 부찰귀인이 충동질한 것이다.[85] 부찰귀인의 태감.[86] 누군가가 견환을 모시는 가마가 지나갈 길에 미끄러운 자갈돌을 놓아서 넘어질뻔 하게 하였다. 동기로 따졌을 때에는 기빈의 짓이겠지만 그 돌의 출처가 하필이면 흔귀인의 화분이었다. 이때문에 흔귀인을 시험해보기도 했으나 견환도 결국은 확신하지 못했다.[87] 하지만 여기에 반론도 있는데, 일부러 모르는척 했다는 것이다. 견환이 인간 돼지 이야기를 할 때 고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직관적으로 얘기했기 때문에 상황파악을 못했다고 보긴 그렇고, 상아가 제비한테 말할 때 같이 있었던 조귀인은 아무 일 없었다며 은연중에 견환의 쉴드를 쳤기 때문. 게다가 귀신소동 때는 없는 부분까지 부풀려 말했는데 이번 사건은 오히려 단순하게 말했다. 후술하듯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기 때문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어서 모르쇠를 놓은 것일 수도 있다.[88] 그런데 그간의 제비의 행적들을 보았을 때, 제대로 사실을 전달받았다 하더라도 과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을지도 미지수이다.[89] 다른 증인이었던 비문과 정백은 순전히 사심으로 한 짓이라 자비를 베풀 필요도 없이 바로 죽였다.[90] 동화=오동나무 꽃, 근석에 따르면 오동나무는 사랑과 정절을 뜻한다고 한다.[91] 태후는 동화대를 싫어했기 때문에, 결국 강희제 사후에는 황량해지고 말았다고 한다.[92] 후일 장상수 피리는 윤례의 소유가 되었고 장상사 금은 견환의 소유가 되었다.[93] 다시 강조하지만 실제 역사에서의 옹정제는 8황자당을 제외하고, 자신을 지지해준 형제들에게 아주 잘해줬다.[94] 못 추면 당연히 문제지만 잘 춰도 감히 순원황후를 모방했다고 트집이 잡힐 상황이었다.[95] 사실 이때는 황후의 선동도 한 몫했다. 황후는 견환의 명망을 떨어뜨리기 위해 영수궁을 지나칠 정도로 사치스럽게 수리하고, 조정의 여론을 조장했다.[96] 다만 악의는 아니었는지 황제가 완벽의 신분을 올리고 과군왕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할 때, 노비 신분인 완벽에게 뉴호록이라는 고귀한 성을 하사했음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되려 완벽과 과군왕을 측복진과 활짝 웃으며 축하해준다.[97] 호적이 파였다지만 선황제의 핏줄인 홍시가 양자라서 황제 자리에 앉히고 싶은 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98] 화비처럼 성격이 오만하고 더러웠는데 화비랑 똑같이 온화하고 정숙하다는 의미인 온희라는 시호로 추존되어 태후가 어이없어하는 장면이 있다.[99] 실제 역사에서의 돈친왕도 작위를 박탈당했으나 그의 외숙모가 옹정제의 친이모라서 더 이상의 처벌은 없었다. 옹정제가 자신의 정적이었던 8황자 윤사, 9황자 윤당을 종인부에 감금시키고 각각 아키나, 서스허(만주어로 개, 돼지란 뜻)로 개명시키고, 14황자 윤제는 강희제의 능참봉으로 강등시킨 것에 비하면 관대한 처분이였다.[100] 견환은 안전을 위해 보내 준 것이고, 안릉용은 황후가 견환을 감시하기 위해 우정의 명목 아래 자원하도록 시켰다.[101] 처첩간의 관계가 완전히 작살나기 직전인 황제와는 대비되는 부분이다.[102] 이 덕분에 적들에게 무방비이던 견환이 마음을 다잡는다.[103] 옹정제의 말에 의하면 황제와 연갱요에게만 진상되는 물건이고 돈친왕에게는 하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즉 연갱요와 돈친왕이 결탁했다는 것.[104] 실제 역사 속 돈친왕인 돈군왕은 슬하 6남 3녀가 있으나 그 중 6명이 죄다 요절했다. 적복진 소생 자식은 홍훤이 유일[105] 아들의 옷을 모두 손수 꿰매줬다고 한다. 옥요와 결혼할 때 황제가 명을 내려 희태비로 품계를 올려준다.[106] 정황상 3황자 홍시보다도 더 어리다. 윤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아직도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는데 그 이전에 황제가 제비를 찾아갔을 때 3황자는 이미 성인이라는 언급이 있기 때문.[107] 풍질(風疾)에 걸렸다고 한다. 열이 펄펄 끓어오르고는 손쓰지 못하는 사이에 죽었다고.[108] 현릉이 얼마나 의수에게 관심이 없고 순원에게만 빠져있었는지, 그리고 현릉 특유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정서에만 신경쓰는 측면도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의수는 아들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뒤늦게 남편 눈에 띈 언니에게 자리를 가로채여진 상황이었기에 언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근데 아들이 죽은 상태에서 남편이 하는 말이 니 애 죽었으니 안 됐다는 빈말섞인 위로조차 아니었고, 니 애 죽었는데 니 언니가 아들 가졌으니 그 애라도 당신 애로 여겨 하는 식의, 위로도 뭣도 아닌 개소리인데다가 까고 보면 '니 언니가 애 가졌으니 축하해줘라'하는 의미도 품은 발언이었다. 즉, 황제는 의수의 아이가 죽던 말던 순원이 애 가졌다는 것에만 푹 빠져서 의수의 아이의 죽음과 그로 인한 의수의 슬픔에는 별 관심도 안 가졌다는 걸 이 언행으로 증명했던 거다. 그러니 이 말을 들은 의수는 언니 때문에 황제의 자기와 황제 사이의 아들(그것도 무려 장자)에 대한 관심마저도 다 빼앗겼다고 볼 수밖에... 게다가 의수의 아들 이전에 1황자는 황제 자신의 아이자 그것도 자신의 첫 아이이며 첫째 아들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딴 거 다 씹고 황제는 순원 애만 좋아~ 순원만 좋아 상태에 푹 빠져있었기에 의수와 자기 아이가 죽은 것에 대해 내 알바 아니라는듯 대충 말하고 넘어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소한 1황자가 자기 아이라는 인식이 강했다면 분명 슬퍼했을거다.[109] 원작에서 의수의 아들은 만 세살이 되도록 이름도 없었고 정식으로 황자 책봉도 못 받았다. 현릉이 얼마나 관심도 없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110] 원래 역사대로의 이름이라면 홍윤이다.[111] 즉 순원의 아들인 이 2황자가 빼박 후계자가 되고, 2황자가 무사히 살아있는 한 그 손윗아래의 황자들은 손만 빨 수밖에 없다는 것. 다만 이 아이도 작중에선 1황자와 함께 일찍 죽었기에 황위 계승싸움에 끼지도 못했기에, 실제로는 궁녀 어머니를 둔 4황자 홍력이 황위에 오르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112] 원래 역사대로의 이름이라면 홍주며 어머니가 한족 출신이다.[113] 당시 3황자는 제명되었다.[114] 실제 역사에서도 홍주는 정말 개망나니였다고 한다. 군기대신인 눌친을 구타하고, 갑자기 자기 장례식을 꾸미는 등, 여러 차례 말썽을 일으켰다. 다만 형인 건륭제가 끝까지 비호해준 탓에 홍주는 건륭 30년까지 무사히 잘 먹고 잘 살다가 사망하였다.[115] 역사엔 생모는 유비 경씨로, 옹친왕부 시절에 격격이였다가 옹정 등극 후에 빈이 되었다. 옹정 사후에도 유독 오래 살아 18세기에 무려 만 95살까지 장수하여 황귀태비로 존숭되어 사후 순각황귀비에 봉해졌다. 아들이 하나 있단 점과 건강이 부실하단 점에서 원작에 정비 서연의와 여패가 원 인물일 수도 있다. 끝까지 등장은 안하지만 후반부에 안릉용이 비에 봉해지자, 황제가 '4명의 비를 모두 채운 경사'라고 언급하는데 이때 작중 등장하는 비는 3명 뿐이라 1명은 불명인데 아마 그 사이에 궁에 들어왔거나 아직 궁 밖에 사는지 모르는 5황자 홍주의 생모인 유빈이 그새 유비가 돼있던 상태를 포함해 말하는 지도 모른다.[116] 황제의 딸 2에서 제비와 자미를 많이 감싸주고 이강과 묘한 분위기가 흘렀던 바로 그 청아 공주.[117] 온의가 아기였을 무렵엔 3황자와 4황자, 그리고 궁궐 밖에서 자라고 있었던 5황자를 제외하면 황제의 자식이 온의밖에 없었다. 다만 온의 외에 흔상재가 낳은 공주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157]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는다.[118] 이 사건 때문에 심미장을 싫어하는 안티들도 있다. 죄없는 어린아이를 고생시키며 이용했다는 점에 있어서 화비와 다를 바가 없는데다, 이 시점에서는 단비가 온의공주의 양모로 되었는데 단비는 주인공 견환에게 도움을 줬던 선역이라 졸지에 견환파에게 통수를 맞은 것이다.[119] 홍염은 황위계승권이 있는 황자이기 때문에 궁중암투가 주 내용인 본작에서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지만, 영서는 공주인데다 이미 언니에 해당되는 두 공주(온의공주, 롱월공주)가 존재하고 있어서 딱히 비중을 둘 만한 이유가 없기도 하다.[120] 중국어 문장이라 한국어 문장으로 옮기기가 난해하다. 풀이해 보면 앞에 언니는 온의공주이고, 뒤에 언니는 롱월공주를 의미한다. 즉 영서공주 입장에서 작은 언니인 롱월공주가 큰 언니인 온의공주를 쫒는다는 의미.[121] 사실 출생의 비밀이 없었어도 둘은 친사촌이라 근친혼이다.[122] 홍염, 영서의 이름을 각각 황제와 견환이 지었다는 걸 안 태후가 당시 임신한 미장의 아이 이름은 자기가 짓겠다고 했다.[123] 고요할 정(靜)에 화목할 화(和). 견환과 미장이 원하던 삶이었다.[124] 원작에서 견환이 "어쨌든 여철 때문에 필사적으로 싸워야 했다"고 언급하는 걸 보면 딸을 근친혼시키지 않으려고 견환이 여철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볼 수도 있다.[125] 피부가 눈처럼 희다는 뜻으로 붙였다.[126] 완결전에 쓴 외전이라서 설정이 다르다. 이 황제는 견환의 아들 여함이다.[127] 지일의 눈이 현청과 닮았다는 암시가 나온다. 언니인 영서도 현청의 아들 원철과 사랑에 빠졌다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자매가 둘 다 아빠 닮은 남자에게 반해서 망한 듯(....). 견환도 현청과 엮여서 온갖 평지풍파 다 겪었으니 그냥 이 집안 남자들이 죄다 이상한 것 같다[128] 위기에 빠진 자신을 볼 때의 표정이 절대 세속에서 초탈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고.[129] 이 때 모후라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살 수 있겠냐고 따져물으며 자기는 그렇게 못 산다고 바람에 견환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다. 비록 천우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130] 지일은 알 리 없었지만 혼인한 남편이 있는 데도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견환의 잘못을 천우가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도 들을 수 있다.[131] 심미장과 온실초의 아들, 후에 견환의 양자가 되어 황제에 오른다. 옥점추를 쓸 때와 완결 시점의 설정이 다른데, 옥점추의 황제는 견환의 아들이다.[132] 작중에서 중상 정도의 외모로 묘사되며 가문과 미모에서 무비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다.[133] 정장제가 근비가 황자를 출산하지 못했음으로 법도에 어긋나긴 하나 모후(견환)께서 적어도 현비로 올리라고 하셨음으로 귀비에 봉하고 싶다고 하자 견환은 귀비 자리를 주길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이에 놀란 정장제가 그럼 숙, 덕, 현 중 하나를 골라 주겠다고 하자 견환은 그 착한 아이를 서운하게 하진 않는다며 황후의 자리가 어떻냐고 제안한다. 이에 정장제는 근비를 대신하여 감사를 표하고 먼저 근비를 귀비에 봉한 후 황후로 진봉시킨다.[134] 정장제는 그 전에 황후를 들이지 않았었다.[135] 후궁 중 무비는 총애를 제외한 다른 모든 면에서 그녀를 견제 가능한 인물이다. 그러나 무비 스스로 총애받지 않아도 높은 자리에서 평온하게 사는 삶을 노리기 때문에 굳이 경쟁할 이유도 없다.[136] 대주의 황후는 모두 명문가의 자제였음으로 출신이 한미한 근비보다 황후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 하지만 태후 견환은 온유황후(주의수)나 화비(모용세란)가 권세를 휘둘러 문제가 많이 일어난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명문가인 무비는 경계하고 근비를 어시스트했다.[137] 화경덕태비 풍약소, 드라마의 경귀태비[138] 근비는 당시 만삭이라 시침을 들 수 없었다.[139] 근귀비를 아끼던 정장제가 바로 죽이자고 하였으나 황후를 책봉하는 길일을 앞에 두었으니 나중에 처리하자는 견환에 의해 금족령만 받는다. 감히 직접 비상을 쓰는 허술한 술법을 썼다며 온유황후(주의수)리비 시절이었다면 이가 빠지도록 웃었을 거라는 경덕태비(경귀비)와 견환의 반응이 압권...[140] 태후인 견환의 처소, 당시 황후 사윤과 설백제희 천우, 태후 견환이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141] 천우는 처음부터 부마 간택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누귀원도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보단 공주랑 결혼하는 게 목적인 속물남으로 봤다.[142] 그녀의 혈통 자체는 황가와 가장 가깝다. 호온용과 황제가 6촌간이다.[143] 수정판에서는 미색으로 바뀌었다.[144] 참고로 원작에서 물에 백반이 들어간 건 견환의 자작극이다.[145] 안릉용의 친정은 당시 한미한 가문이라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자기까지 연루될까 전전긍긍한 모습을 보였다.[146] 견환의 언급에 따르면 내의원 수장이 되었다는 듯.[147] 견환이 윤례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당시 황제에게 견환이 슬픈 이유는 완벽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황제는 완전히 의심이 가라 앉지는 않았으나 위림에게 희귀비를 잘 돌봐주라고 말 한다.[148] 제비집은 자신과 주지 둘만이 먹을 수 있다고 하는데, 제비집은 고급 식재료다. 절에서 수행이나 해야 할 스님이 이런 사치나 부리고 있었다는 것. 정작 견환에게는 여기가 호의호식하는 곳이냐며 구박했다.[149] 심지어 곱게 죽은 것도 아니다. 한국어 자막에서는 "비문, 정백은... 죽여라."로 나오지만, 해당 대사의 원문을 보면 "杖毙", 그러니까 곤장에 맞아 죽었다. 어찌 보면 이 일로 완전히 몰락한 기귀인도 둘과 같은 최후를 맞은 셈.[150] 그래도 정백이 말한 건 부분적으론 사실이다.(본인은 모르겠지만) 다만 견환이 고생하다 동상이 심하게 걸려(롱월 임신 중 연금 때부터 걸려있긴 했다) 겨울마다 재발하는 걸 알고 안부차 물어본 덕분에 황제가 막언의 말을 한 방에 믿었다.[151] 견환이 "관아에 신고 해봤냐"고 묻자 "셀 수 없이 많아서 못 했다"고 한다.[152] 효의인황후는 옹정제의 황자 시절 양어머니로 그를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양육했고 강희제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녀의 동생인 융과다도 옹정제의 황제 즉위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153] 오죽하면 연갱요가 숙청된 후 연갱요와 결탁했다는 죄명까지 조작했을 정도다. 참고로 융과다와 연갱요는 앙숙 관계로 초반에는 융과다가 연갱요의 죄명을 밝히며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황제가 융과다에게 연갱요와 교류하며 잘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고 연갱요의 장자를 융과다의 의붓아들로 만들어 주는 등 둘 사이를 중재하였다. 융과다는 황제의 지시대로 연갱요와 교류하고 연갱요의 의견에 동조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는데 이게 연갱요와 결탁했었다는 증거로 사용되었다.[154] 과이가 악민이 옥중에서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견환도 기귀인이 경망스러우니 그 부친도 마찬가지라고 비웃었다.[155] 여기에서 견환이 놀라서 추태를 보이거나 하면 그걸 구실삼아서 탈락시키려던 참이었다.[156] 이후 견환이 언급하길, 손묘청은 겁을 먹어서 그렇지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