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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7:05:21

이낙연/대권주자로서의 장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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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장점
2.1. 다양한 입법·행정 경험2.2. 부드러운 화술과 언변
3. 단점
3.1. 얇으면서도 극성인 지지층3.2. 지역 지지 기반 약화
3.2.1. 무리한 의원직 사퇴3.2.2. 호남 민심의 외면3.2.3.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
3.3. 민주당 지지자들의 비토정서
3.3.1. 당대표 시절의 실책3.3.2. 이명박, 박근혜 사면 발언3.3.3. 경선 불복 논란
3.4. 독선적인 행동과 이로 인한 끊임없는 갈등3.5. 고령의 나이3.6. 사법리스크3.7. 상대적으로 순탄했던 삶3.8. 22대 총선 참패
4. 복합적
4.1. 대선주자가 없는 친문 세력4.2. 보수 진영의 상대적으로 낮은 반감

1. 개요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대권주자로서의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서술한 문서.

1.1. 21대 총선까지

이낙연은 국무총리 퇴임 후에도 이전의 국무총리 출신 대권주자들과 달리 큰 존재감을 보였다.[1] 전남지사 시절의 좋은 평판과 품격있는 언행, 호남의 열혈한 지지로 대권주자로 하마평에 올랐고 실제로 21대 총선 승리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민주당의 대권주자로 부상하게 된다.

일례로 2020년 4월 뉴스1이 엠브레인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30%를 돌파하며 1위 자리를 더욱 확실히 하기도 하였다.# 이 지지세는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이한동, 고건, 정운찬등의 많은 국무총리 출신 정치인들이 대권주자로 입에 올랐으나 얼마 안가 나가떨어진 것을 보면 대단한 기록이라 볼 수 있다.

이후 제21대 국회가 개원했고 2020년 8월 더불어민주당 제4차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비록 7개월짜리라도 당대표[2]를 거칠지 아니면 책임감이 부족한 이미지가 씌어지거나 다른 거물급 인사와의 마찰이 생길 것[3]을 피해 대권으로 직행할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데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준비위원회에서 당대표와 최고위원의 임기를 분리하는[4] 당헌·당규 개정안이 확정되면서 당 대표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결과는 더불어민주당 전국대의원 투표(45%)와 권리당원 투표(40%), 국민 여론조사(10%), 당원 여론조사(5%) 합산을 통해 당 대표를 선출하며 2020년 8월 29일, 이낙연 후보는 60.77%의 득표로 신임 당대표에 선출되면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지는듯 했다.

1.2. 20대 대선에서

그러나 당대표 취임이후의 행보는 당장 단기적인 요소에만 집착한 나머지 장기적인 요소를 외면하였고, 이는 이낙연의 대권가도에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정부의 핵심 개혁 대상인 검찰 개혁과 언론 개혁에 굉장히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것을 넘어 오히려 적극적으로 저지하면서 지지층 내에서 불만이 천천히 싸이며 지지율이 야금야금 깎이는 상황이였다. 거기다 서울 종료의원으로서 의정 활동에 대한 평가가 썩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중도 혹은 보수 쪽으로 지지세력 확장 하겠다며 이명박, 박근혜 사면발언이라는 카드를 던졌지만 정작 보수층에게서는 반응이 미지근했고, 되려 중도층과 기존 지지층을 등돌리게 한 악수로 돌아왔다.

또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광역 단체장인 박원순, 오거돈의 성추행으로 인해 치러진 2021년 재보궐선거서울특별시장, 부산광역시장 수성에 눈이 멀어 당헌을 개정하는 꼼수를 쓰면서까지 후보를 내려해 많은 당시 야당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낙연 지도부로서는 여당으로서 수도 서울과 제 2 도시인 부산의 행정을 포기할 수 없었고 당헌 개정 또한 전당원 온라인투표로 동의를 얻었으므로 명분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서울과 부산에서 모두 참패하면서 결과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다. 여기서 또 지적할 부분은 당원 온라인 투표 참여율이 극도로 낮았다는 것이다. 말인 즉, 이낙연 후보의 극성 지지층만으로 만들어진 후보들이라는 뜻이다

이낙연 지지율 하락의 결정적 원인은 2021년 1월 한 언론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발언한 박근혜 사면론을 시발점으로 본다. 당시 청와대와의 교감설이 있는데 본인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은 상황. 그러나 지지율이 며칠만에 10여 퍼센트 하락해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이러한 실책의 연속으로 인해 이재명에게 밀려 대선후보가 되는데 실패하였고, 경선 결과 볼복을 넘어 부정선거까지 주장하면서 화룡점정을 찍고 말았다. 이러한 행보로 인해 민주당 내 핵심 코어 지지층들 절대 다수가 등을 돌리게 된 점은 큰 숙제로 남은 상황이다.

1.3. 22대 총선에서

2024년 총선 시즌에 들어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고, 제3지대를 모색하던 이준석 세력과 힘을 합쳐 중도세력 개혁신당을 창당하며 민주당계 진영과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낙연이 개혁신당 창당을 통해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쏠리지만, 정치적인 재기는 몰라도 대권의 꿈은 사실상 좌절되었다고 보는 여론이 많다. 그의 본진인 범민주진영에서는 완전히 보수계인 이준석과 손을 잡으면서 배신자로 낙인찍혔고, 보수진영에서도 그에 대해 호의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는 데다가 제3지대로 뭉친 개혁신당 에서도 그의 입지와 발언권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결국 이준석과의 주도권 갈등으로 인해 합당이 무산되어 개혁신당과의 연합은 없던 일이 되었다.

결국 이런저런 이미지 소모가 너무 심했던 나머지 이낙연 본인의 홈그라운드인 광주에서 고작 경력으로 따지면 자신보다 짧은 강성친명 민형배 의원에게 지는 것도 모자라 13%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으며 몰락에 쐐기를 박았다. 5선에 국무총리까지 지낸 정치인이 이 정도 득표율을 기록한 것은 굉장히 치명적이다.

결정적으로 자신의 뒷받침 해주던 친문 진영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놓고 밀어주는 조국이라는 강력한 대체재가 있고, 호남에서의 표심도 이재명과 조국이 더 확실하게 잡고 있다. 호남에서 폭망한 새로운미래와는 달리 이재명이 이끄는 더불어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도 못한 호남 전지역구 의석 싹슬이에 성공했으며, 조국혁신당도 호남에서 비례대표 득표율 1위를 달성했다. 고령의 나이를 생각하면 향후 정치적 재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5]

이후 유일한 당선인 김종민 의원도 탈당하면서 원외정당이 되어버렸다.

2. 장점

2.1. 다양한 입법·행정 경험

5선 의원을 역임하며 입법 경험을, 전남지사국무총리직을 역임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일례로 제6회 지선에서 당선된 광역단체장 평가에서 광주광역시장 윤장현부산광역시장 서병수는 꽤 높은 지지율로 당선됐음에도 임기 중 평가는 꼴찌를 다투었다. 반면 이낙연은 꽤나 높은 도정 평가를 유지했었다. 이낙연이 전남지사로 재임 할 때 # 이낙연의 도정 평가 긍정률은 60%를 넘나들었으며, 김관용 경북지사와 함께 최상위권에 랭크됐었고, 여야에서 모두 50%를 넘는 지지율을 유지했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가 된 뒤로는 안정감 있는 국정 운영 능력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야당 의원들을 향한 달변을 보여주며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의 호감을 쌓았다. 그리고 21대 총선 국면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상임선대위원장을 맡아 본인의 선거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음은 물론이고[6] 당의 대승을 거두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는 평가가 있다.# #

2.2. 부드러운 화술과 언변

▲ 국무총리 시절 화제가 됐던 영상들
국무총리 시절 국회에서의 대정부질문이 큰 화제가 됐었다. 원래 대정부질문은 야당 의원들의 놀이터라 불릴 만큼 여당에게 불리한 자리로 국무총리가 욕받이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재직 시절, 이낙연은 기자 경력에서 나오는 짬으로 화려한 언변과 품격있는 언행을 보여주었다. 20대 대선 이전에 올라온 이낙연 관련 유튜브 영상들은 주로 이러한 유형의 영상들이 화제가 된 것들이었다.

3. 단점

3.1. 얇으면서도 극성인 지지층

박근혜문재인, 이재명과 같이 콘크리트라 불릴 만한 두터운 지지층이 없다는 점이 약점으로 꼽힌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없다고 당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면 확실한 디버프가 된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이, 문재인은 노무현의 동지이자 정치적 계승자라는 점이 지지층들의 결집을 높이고 대통령 당선의 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현재 이낙연의 코어 지지층은 주로 강성 친문이다. 문제는 친문이 이낙연을 지지하는 것은 문재인에 대한 지지로부터서 나오며, 친문이 친노를 계승한 뒤 단순히 노무현에 대한 향수가 아닌 문재인에 대한 지지로서 독자적 세력을 공고히 구축한 것과는 달리 이낙연을 향한 정치적 결집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낙연 본인이 가진 매력이나 정치적 서사가 다소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점으로 거론된 낮은 비호감도와 같은 선상에서 거론되는 점이다.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한 대한민국 역사에서 대선 후보까지 갔다가 성장이 멈춘 정치인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일반적인 내각책임제의 총리가 갖춰야할 당 내 의원들의 지지+타 당 의원들의 협조같은 정치권 내부에서의 파워는 대통령 직선제를 선택한 한국인의 민심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한국에서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해선 호불호가 아주 극단적일지언정 대중의 지지가 표심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이른바 여의도식 정치같이 의회나 당내 권력투쟁보다는 대중을 향한 소구력과 대중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정치적 선명성이 더욱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낙연은 여의도식 정치인이지 대중적인 정치인이라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이낙연은 총리 지명 전에는 친문으로 분류되지도 않았던 만큼[7] 단순히 정치적 연고와 인맥에 따른 구시대적 계파 분류에서는 친문 직계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명백한 비문 정치인들까지도 친문을 자처할 정도로 계파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던 만큼 사실상 친문 직계로서 수혜를 받지는 못했다.

게다가 참여정부 시절 민주당 원내대표로 재직하면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강경하게 비판하는 논평을 내었던 점이나 노무현 탄핵 투표에는 반대표를 내었지만 당시 원내대표로서 "노무현 정권의 민주당 죽이기 규탄대회"까지 열어가면서 활동했던 점 등은 친명 세력에 의해 공격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당대표 이후의 행보를 보면 보수 야당과의 협치를 논하는 등의 태도가 민주당 지지층 내에 개혁과 선명성을 중시하는 세력 및 진보 야권에게는 지나치게 신중하다는 인상을 주었고, 이는 당내 지지층이 중요한 경선에선 약점으로 와닿을 수밖에 없다.

더더욱 문제인 것은 소위 뮨파로 불리는 이낙연의 극단적 지지층이 이낙연 본인과 마찬가지로 민심과 괴리되어 외연확장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평소 이낙연의 '깨끗함'[8]에 집착하여 대통령 경선 상대였던 이재명에 대한 과도한 네거티브를 반복했다. 문제는 상대 당도 아닌 같은 민주당의 후보에게 이런식으로 비난을 하니 평범한 민주당 지지층에게는 그저 내부총질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9] 이렇게 이낙연의 지지층은 이낙연 본인만의 매력을 어필하기보다는 상대 정치인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만 하여 오히려 일반적인 유권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고, 그 결과 이낙연 패배에 크게 일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부 극성 지지자들의 행태는 이낙연이 22대 총선에서 대패한 이후로도 고쳐지지 않고 오히려 심해졌는데, X(구 트위터)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낙연 지지자들은 서구 갑(광주)지역에 옥중출마했던 송영길보다도 낮은 득표율을 올린 것[10]과 같은 광산 을 지역구에서 경쟁했던 민형배에게 5배 이상의 격차로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유권자 탓을 하고, 그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예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낙연을 푸대접 했다는 이유로 생판 모르는 남 취급하며, 공식적으로 인연을 끊어버리는 지경까지 가 버렸다. 이낙연 본인이 팬덤 정치와 진영청치를 청산하겠답시고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고 신당을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도 극성지지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것이다. 오히려 극렬 지지층의 폭력성은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11].

3.2. 지역 지지 기반 약화

3.2.1. 무리한 의원직 사퇴

20대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대권을 위해 주위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원직 사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종로구가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중요한 곳인데다가 국회의원의 경우 사퇴하지 않고도 대선 출마가 가능했기 때문에 무리수라는 반응이 당 내에서 쏟아졌다.

게다가 사임 이후 첫 경선 유세를 전 지역구였던 종로구가 아닌 본인의 지역 기반이었던 전남에서 했는데, 이는 총선에서 자신을 지지한 종로구 유권자들을 외면한 결과라는 비판을 받았다.

결국 민주당은 보궐 선거에서의 패배를 의식하여 대선과 병행된 2022년 3월 재보궐선거에서 종로구에 후보 공천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국민의힘 최재형 후보가 손쉽게 지역구를 가져가게 되었다. 해당 선거에서 정의당배복주 후보는 선거비가 전액 보전되는 15% 득표율을 넘겼으며, "종로 지역구가 중앙정계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여겨지는 데에 염증을 느끼는 주민들이 많다"는 의견을 남겼다.# 반 국민의힘 성향 주민들이 상당수 그에게 투표한 것이다. 심지어 종로구 내에서 민주당 후보 지지 성향이 가장 강한 창신2동이 최재형 후보의 손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결국 이러한 이낙연의 행보는 자충수가 되어 호남 기반도 잃고, 종로 기반도 잃는 최악수가 되었고, 덤으로 원내에 진입한 이재명에 대항하여 뭉칠 구심점마저 잃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대권에 도전하려면 지역 기반과 원내 구심점 모두 필요한 만큼 이 부분 역시 상당한 핸디캡이 될 것으로 보인다.

3.2.2. 호남 민심의 외면

일단 이낙연 본인은 호남 출신이며 전남에서 오랫동안 국회의원을 지냈고 전남지사까지 지냈던 만큼 호남지역 정계 및 주민들으로부터의 어느정도 지지를 기본적으로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12] 그러나 실제로는 기대와 달리 호남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2023년 12월 들어 이낙연이 신당 창당 추진을 시사했는데, 2023년 12월 KBS광주가 광주와 전남 지역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12월 정례 여론조사에서 5% 남짓한 지지율을 기록해 42%를 기록한 이재명에 크게 밀리는 수치를 보였다. # 2024년 1월29일~2월2일 KBS전주와 전북일보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북 지역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이낙연 신당 지지 의향을 묻는 설문에서 79%는 '의향 없음(별로 그렇지 않다 23%·전혀 그렇지 않다 56%)'으로 답했다. '의향 있음'은 16%(매우 그렇다 6%·대체로 그렇다 11%)로 나타났다. #

특히 호남 민심은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사태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견제를 위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을 밀어줬으나 이후 제20대 국회 내내 당 내에서 서로 싸우고 분당하는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여줘 차기 총선에서 국민의당의 후신인 민생당을 완전히 내쫓으며 당 내부 분쟁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 내분의 중심이 된 인물이 단지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지지를 받기는 요원하다.

또한 2023년 12월 20일 YTN이 발표한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힘 골수 지지층에서 긍정 여론이 높고, 민주당 골수 지지층에서는 부정적인 여론이 높은 결과가 나왔다.[13] 국민들이 좌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신당 창당 건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시사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광주·전남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지방의원 전원은 이낙연이 추진하는 신당 창당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

이낙연은 제22대 총선에서 광주 광산을에 도전했지만, 선거비 전액 보전을 받는 15%선 득표에도 실패하면서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62.25%라는 큰 차이로 패배했다. 이에 따라 이낙연의 향후 정치적 미래도 암담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

일각에서는 정 호남 대통령을 원한다면 송영길이라는 괜찮은 대안이 있다는 의견까지 내놓고 있다. 일단 송영길은 친명계이다 보니 일반적인 민주당 지지층 입장에서는 이낙연에 비하면 거부감이 없거나 약한 편이고[14], 상대적으로 순탄한 삶을 산 이낙연과는 달리 송영길의 경우 괴한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최소한의 서사라도 있으며, 무엇보다 송영길은 63년생이다 보니 52년생인 이낙연에 비하면 아직 시간적 여유가 많다.

3.2.3.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

상술하다시피, 전라도 출신이기 때문에 김대중에 이어 새로운 호남 출신 대통령이 배출되길 고대하는 전라도 민심의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에서는 오랫동안 호남의 지지를 받는 영남 출신 후보를 내세워야 이길 수 있다는 영남후보론이 공식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호남에서 단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압도적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전라도 출신 대통령 후보라는 점은 정치공학상 크게 득이 되지 못한다는 반론이 있다.

즉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라도 출신이라서 호남에서 그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그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과 희생에 '그런 인물이라면 타 지역 출신이였어도 호남에서는 압도적 지지를 보냈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김대중이 처음 대선 후보에 나왔을때만해도 오히려 영남권에서 지지도가 매우 높았고, 호남에서는 그에 대한 비토 정서가 컸다[15]. 그것을 오랜 기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공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정치적 이념은 신념의 문제이고,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는 목숨도 걸 수 있으므로 이는 곧 혈연, 학연, 지연을 초월한다. 영호남 투표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것도 지역 감정을 기반으로 자기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밀어 준다기 보다는 정치적 신념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단순 지역문제보다는 사상적 계승자를 뽑는다는 느낌이 강하다.

참 아이러니한게 호남에서 다선을 한 민주당 정치인들의 경우 속된 말로 썩을대로 썩은 고인물인 경우가 많은 반면 영남 출신의 진보 정치인들은 보수적인 지역에서 진보적 정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보다 더 신념있고 노선이 선명한 경우가 많다.

또한 실제로 경선에서도 광주 및 전남에서 근소하게 우위를 차지하기는 했으나 다른 지역에서의 열세를 뒤집기에는 부족했으며, 전북에서는 다른 지역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이런 출신지 요소는 이낙연의 경쟁력으로 작용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3. 민주당 지지자들의 비토정서

이낙연이 대권 도전을 하는 데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 중 하나도 바로 민주당의 신주류가 된 친명계의 비토정서다. 이재명이 당대표로 선출될 당시 77.7%의 득표를 얻을 정도로 더불어민주당 당원의 대다수가 친명성향이라는 것이다. 당내 코어지지층 결집이 중요한 대선 경선에 상당 약점이 될 수밖에 없다. 일반 유권자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현 시점의 민주당 당원들 사이에서 이낙연에 대한 비토정서는 상상 이상으로 어마어마하다.

2020년까지만 해도 이낙연은 민주당의 유력 대권 주자로 여겨지며,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마침 국민의힘 쪽에서 마땅한 대권주자가 나오지 못해 사실상 차기 대통령 당선 확정으로 보는 여론도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최장수 국무총리였고, 이 시기의 활동으로 크게 인지도를 높였기에 문재인 대통령의 굳건한 정치적 2인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1년 새해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론을 들고 나오면서 지지자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같은 해 치뤄진 재보궐선거에서 서울과 부산을 모두 국민의힘에게 압도적으로 내주며 대권주자로서 사실상 낙오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는 큰 주목을 받던 이재명이재명계가 조금씩 부상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일인데, 이재명이 최종 후보로 선출된 뒤 이낙연은 경선 불복과 부정선거를 주장했다. 선거 기간 내 네거티브는 어느 진영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니 특별한 게 아니라 치더라도, 최소한 제도권 안에 있는 정치인이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경선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은 민주당 지지자들로 하여금 엄청난 충격을 불러왔다. 사실상 이낙연이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건 바로 이 부정선거를 주장했던 모습이 가장 크다. 지지자들로 하여금 민주적 정당 시스템의 기본적인 원칙조차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심각한 자질 부족을 그대로 들어냈기 때문이다.

얼마 뒤 겨우겨우 캠프를 수습하고 경선에 승복했지만, 2007년 대선 당시 박근혜의 태도와 달리 모호하게 입장발표를 하여 뒷끝을 남겼다. 이 후 이재명이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시작한 뒤 이재명 캠프와 100% 일체가 안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16] 이낙연 캠프에서 일했던 일부 인사들과 지지자들이 뮨파를 주장하며 윤석열 지지로 옮겨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사실상 원팀 구축에 실패한 셈. 끝내 윤석열이 이재명을 누르고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자 선거 때 참고 있었던 이재명계 지지자들의 비토정서가 폭발하였다.

우선 당장 친명 성향의 지지자들부터 당내 원외인사들까지가 정운현이민구[17], 이상이, 백광현[18] 등 소위 뮨파, 똥파리로 지칭되는 최측근 인물들의 해당행위[19]뿐만 아니라 경선 당시 대장동 문제와 관련된 과도하리만큼 지나친 네거티브와 친낙계 의원들의 내부총질 등으로 인해 내부총질러에 배신자 등의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음은 물론 이재명의 대선 낙선과 사법리스크를 초래하고 대선 이후로 이재명이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게 만든 최대 원흉이자 장본인으로 여기고 있는 마당이다.[20] 하술하겠지만, 유독 대한민국 검찰청이 범좌파-민주당계 정치인들이나, 보수정당 내 소장파 정치인들에게 원리원칙을 무시한 가혹한 별건수사를 일삼아서, 검찰의 수사 자체가 정치적인 목적이 매우 강하다는 지적이 끊이지않는다[21][22]. 이런 상황에서 진상이야 어쨌든 사법리스크에 시달리는 같은 당, 같은 진영 소속 인물을 보호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공격했다는 것은, 검찰들에게 아군을 먹잇감으로 던져준 꼴이니 당연히 당원들의 분노를 살 수 밖에 없다[23]. 이런 상황이니, 역으로 본인이 이런 지경에 놓일 경우, 같은 민주당계 인사들이나 당원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런데다가 이후 2023년 2월 말에 이재명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아슬아슬하게 부결되자마자 민주당 청원게시판에 이낙연을 당에서 영구제명을 시켜버리자는 청원이 올라오고, 그 청원에 무려 7만 명이 넘는 당원들이 서명을 했었을 정도로 대선 이후로 이낙연과 민주당 내 비명계와 반명계, 더 나아가 친낙에 대한 친명 원외인사들과 친명 지지자들의 증오심과 적개심도 전반적으로 당 내외에 어마어마하게 막강한 수준으로 고착화가 되어 있다. 심지어는 친명 지지자들은 더 나아가 이번 22대 총선에서 비명계와 반명계, 그리고 친낙계 인사들을 공천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해 버리겠다는 의지마저 결연해져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향후 이재명 대표가 공천권을 행사할 22대 총선에서 비명친낙 성향의 의원들과 원외인사들이 공천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불이익을 볼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인데, 만약 비명친낙 의원들과 원외인사들이 정말로 대거 공천학살을 당하거나, 아니면 일부 몇몇 비명친낙 인사들이 공천을 받는데 성공하더라도 정작 본선에서 낙선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러지 않아도 이미 대선 이후로 축소되어 있는 이낙연 자신의 정치적 기반과 자신의 당내 입지 등이 더욱 약해질 여지도 있을 것으로 보이며, 결국 이는 친명계 인사와 외부 영입인사를 위주로 대거 공천을 하면서 사실이 되었다. 심지어 이낙연이 신당 창당을 공식화하자 정작 친낙 인사들과 심지어 문재인마저도 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친낙계의 핵심 인사인 이개호 등은 아예 이낙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고 선언하는 등, 격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때문에 본인의 지지자를 결집시켜서 친명계에 대항하기는 커녕, 되려 친낙계 전반에 내분이 일어나고 있으며, 신당 창당론때문에 다른 비명계 인사들 사이에서도 이낙연에 대한 비토 정서가 퍼지고 있다.[24] 22대 총선이 끝난 후에는 조국김경수 등을 중심으로 비명계 친문 세력이 부활하였고 이를 계기로 친문계의 재결집을 시도한다는 관측이 있지만, 이들 당사자들은 명백하게 자신들은 친명계와 대립할 생각이 없으며 여러가지로 곤경에 처한 이재명 대표를 도울 것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그런 것조차 하지않은 친낙계와 차별화를 했다[25].

2024년 1월 결국 이낙연이 민주당을 탈당하자 MBC 패널 여론조사 결과 이낙연에 대한 민주당 지지자들의 호감도가 20%에서 한 자리수로 추락하고 비호감도는 90%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낙연에 대한 반감과 비토정서를 민주당의 신주류인 친명뿐만 아니라 범민주당계 진영 전체가 공유하게 된 것이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60%가 넘는 민주당 지지층들의 지지를 받고, 진보/보수 진영의 대권주자 중 압도적으로 1위를 달렸던 정치적 입지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급전직하한 것이다.

3.3.1. 당대표 시절의 실책

애초에 이낙연이 대선 출마를 위해 당규까지 바꿔가면서 6개월짜리 당대표를 하는것도 과욕이라는 비판이 많았다.

이낙연이 전당대회에 출마할 당시에는 아직 박원순, 오거돈 성범죄 사태는 터지지도 않은 상태인지라, 선거도 지휘도 하지 않을거면서 당규까지 바꿔 가면서 고작 6개월만 하고 그만둘 당대표를 왜 하냐는 말이 많았는데,[26] 결국 이낙연에게는 이 당대표 시절이 향후 자신의 정치행보에서 악영향을 지대하게 끼치고 만다.

이낙연 대표가 상임선대위원장으로서 지휘한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은 자당 소속 전임 서울, 부산시장추문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자당 소속 지자체장들의 실책으로 발생한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는 당헌[27]을 따르지 않고, 전당대회를 열어 당원 투표에 따라 후보를 내기로 결정하는 무리수를 두었다.[28]

결국 두 도시에서 모두 압도적인 표차로 대참패하여 시장직을 국민의힘에게 넘기게 되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웠다고는 하나, 당시 당대표 이낙연은 LH사태 대응에 갈팡질팡 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문재인 정부 임기 동안 계속 이겨왔던 선거에서 민주당이 첫 패배를 맛보게 했고, 무엇보다도 수도인 서울의 시정을 다시 보수정당에 넘어가게 한 책임으로 이낙연의 대세론은 붕괴되며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 출마하자, 민주당 내에서는 이낙연에 대해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등 날로 험악해졌다. 이러한 행위는 문재인이 만든 당헌을 지키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고[30], '죽어도 문재인을 지키겠다'라는 발언을 하는 등 문재인 계승 포지션을 내세우는 명분에 타격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 박주민, 전재수가 이재명 캠프로 넘어갔고, 훗날 이재명 당대표 시기에는 친낙으로 여겨졌던 박광온 원내대표가 이재명과 특별히 각을 세우지 않는 행보를 보이는 등의 타격을 입어[31] 계파 자체가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박지원을 필두로 한 민주당 내 보수계열조차도 이낙연과 활동을 같이 하지 않으며, 친낙의 입지는 상당히 위축됐다.

이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높은 지지율을 모두 깎아먹어버렸고, 자신을 지지하던 지지자들은 떠나 버렸다. 당장 20대 대선 경선에서 전남만 진땀승으로 이기고,[32] 광주는 석패하고 전북은 아예 참패하는 등, 자신의 지지 기반인 호남 조차 이재명에게 밀리는 등으로 자신의 지지도를 거의 잃어버렸다.

여기에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패배를 두고 비판을 했으나[33], 내로남불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미국에 출국하자, 죽어도 문재인을 지키겠다더니, 문재인이 있는 곳이 아닌, 미국으로 도주했다며, 아예 오지말라는 민주당원들의 엄청난 비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후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재명이 당대표에 77.7%의 득표율로 압도적으로 당선되었고, 최고위원 선거에서 본인 계열이였던 송갑석이 낙선[34]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4.7 재보궐선거 참패 책임론은 상당한 약점으로 와닿을 수 밖에 없다. 더 갈 것도 없이, 이낙연은 자기가 당대표로서 치러본 선거가 단 하나도 없다.[35]

이 때문인지 신당창당을 공식화한 지금도 윤영찬처럼 이낙연을 따라하지 않고 잔류의사를 밝히거나[36] 아예 최측근 중의 최측근인 이개호는 이낙연을 손절 해버리기까지 했으며, 핵심 측근 중 하나였던 박광온, 홍익표는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원내대표로 당선되며 친이낙연 색채를 탈피하고 친명계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등, 친낙계가 추가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며, 본인의 입지를 완전히 말아먹어버렸다.[37]

이후로는 대선후보로도 잘 언급되지 않는 미미한 수준. 어느 정도냐면, 단지 윤석열 정부 내에서 그나마 브레인에 속하는 총선 전의 원희룡과 비슷하고, 홍준표는 고사하고 심지어 이준석에게 조차도 밀리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3.3.2. 이명박, 박근혜 사면 발언

이낙연 대표가 2021년 신년사에서 했던 이명박, 박근혜 사면 발언은 민주당 지지층에게 큰 반발을 샀고 이후 지지율이 급락하여, 결국 문재인 정부 내각에 있었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 보다도 지지율이 밀리게 되었다. 이는 이낙연 대세론의 붕괴에 크게 일조했다. 심지어 윤석열은 이 당시 정치행보를 보이지도 않았던 검찰총장 신분이였다.

아마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보복은 커녕, 화합의 메시지를 이끌어낸 것처럼 이를 따라하여 보수층에게 환심을 사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김대중은 대통령 당선 이후에 한 것이고, 이명박, 박근혜는 전연령층이 크게 반대하는 사안이라서 최악의 악수로 돌아왔다.

3.3.3. 경선 불복 논란

20대 경선시기 친낙 vs 친명 계파 간의 경선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양측 지지 세력간의 비방과 마찰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경선 후보였던 정세균김두관이 사퇴하며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무효표 규정 논란이 발생했다. 이낙연 후보 측은 해당 해석이 경선 조항의 상위법인 공직선거법이나 결선제도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중앙당의 유권 해석 검토를 요청했다. 이를 이재명 지지측에서는 경선 불복이라 비난하였으며, 언론들도 사실상 경선 불복이라고 보도했다.# 게다가 경선 결과 불복을 넘어 경선 규정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결국 경선 결과에 승복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일련의 언행으로 인해 이낙연의 핵심기반인 호남마저도 서서히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후술할 친명계 지지자들에게 경선불복으로 인한 배신자, 프락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점은 당내 코어지지층 결집이 중요한 대선 경선에서 상당한 핸디캡이 될 수 밖에 없다.

3.4. 독선적인 행동과 이로 인한 끊임없는 갈등

사실상 이낙연의 가장 큰 문제점. 이낙연은 이재명과 멀어진 이후,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했다. 이후 새로운미래를 창당해 개혁신당을 창당한 이준석과 연합했다.[38] 하지만 이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준비를 이준석에게 전권을 부여한다는 이유로 인해 얼마 못 가 와해되었으며# 이렇게 이낙연은 아군을 만날 때마다 믿고 맡기지 못하며 계속 동맹을 결렬하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덤으로, 이낙연이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나간답시고 그 황금같은 지역구인 종로구를 버림으로 인해[39], 종로구 주민들과도 척을 지게 되어 결국 보궐선거에서는 국민의힘최재형을 당선시켰다.[40]

이렇게 이낙연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 척을 지고 있다. 그리고 이낙연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광주광역시 광산구 을 지역구에 자신이 창당한 새로운미래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그 동안 이낙연이 아군과 너무 많은 갈등을 일으킨 것을 광산구민들이 잘 알고 있어서 표를 전혀 주지 않았다. 단순한 석패가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에서 출마해서 당선한 민형배에게 76%라는 엄청난 몰빵을 해준 것으로, 대권 도전 가능성은 커녕 차갑게 얼어버린 지역 민심만 확인할 수 있었다.[41] 더욱이 호남 지역은 이미 더불어민주당을 견제하기 위해 제3당을 밀어줬던 적이 있었으나, 끊이지 않는 계파 싸움으로 인해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며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생당에 차가운 민심을 보여줬던 바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때부터 민생당의 몰락까지 봤음에도 조직 내부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나와 제3당 소속으로 자신과 연고가 미약한 지역에서 강력한 경쟁자와 맞서는, 광산구 을 출마는 어디 하나 변호하기 어려운 이낙연의 연속된 실책이었다.

참고로 이낙연이 본인 성격을 못이겨서 동맹을 결렬한 이준석노원구 출마라는 고집을 버리고 현실에 맞게 화성시 을에 출마해서 당당히 당선해, 뒤늦게라도 초선의원이 되었는데 이낙연은 뒤늦게라도 이준석의 의견에 따랐더라면 그닥 안 좋은 지역구라 하더라도 운좋으면 국회의원에 당선은 되거나 험지에서 졌잘싸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42] 이낙연은 자꾸 눈 앞에 보이는 욕심만 쫓아가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한 때 대권주자로까지 거론되었던 사람의 현실 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어느 당의 누구이든 간에 이렇게까지 다른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성격 역시 이낙연의 가장 큰 결함인데 이게 나머지를 다 합친 것보다 월등히 크다. 순탄했던 삶은 박근혜부친상을 당한 것 이외에는 엄청나게 순탄한 인생을 살았던 사례가 있고, 고령의 나이 역시 이승만김대중 등 실제로 고령의 나이에 당선된 대통령이 있어 그렇게까지 큰 단점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꾸 동맹과 척을 지는 행동은 사람 머릿수 싸움인 선거에서 한없이 불리해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3.5. 고령의 나이

2027년 3월로 예정된 제21대 대통령 선거 시점에서 만 74세로 상당히 고령이다. 취임 당시의 나이를 기준으로 이명박(만 66세)보다 무려 8세나 많다. 김대중이 같은 나이에 당선되긴 했지만 김대중은 이미 1970년대40대 기수론부터 시작해 수십년간 막대한 정치 경력을 쌓았고 확고한 기반[43]이 있었는데 이낙연은 김대중에 비하면 기반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김대중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거의 당선될 뻔하다가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이로 낙선했으며, 이것도 부정선거로 낙선했다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평균수명이 높아진 현재는 엄청나게 고령도 아니기에 득표율에 큰 영향을 줄 가능성은 적지만 만약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마할 경우 제22대 대통령 선거와 같은 차기 도전은 더 힘겨워질 가능성이 있다.[44] 이것이 '이번에 당선에 실패하면 다음은 없다.'는 지지자들의 다급함을 결집하여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기한 바와 같이 이낙연 지지자들의 막장스러운 행패로 인해 지지층의 외연 확장이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2027년 제21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 79세가 되는 2032년에 퇴임하게 된다.

미국의 경우 비슷한 시기에 조 바이든이 이보다 3살 더 고령인 78세 2개월의 나이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바이든 역시도 고령의 나이가 주된 약점으로 꼽혔다.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사법리스크와 비호감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 바이든 쪽에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바이든이 선거에서 고전하고 있는 이유가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재선 시 86세인 2029년에 퇴임하기 때문. 그리고 트럼프의 암살미수 사건도 있었지만, TV토론회 등에서 고령 리스크를 끝내 해소시키지 못해서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에게 대통령 후보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3.6. 사법리스크

이낙연은 도덕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본인도 사법리스크에서 결코 자유롭지가 않다. 물론 수사 및 재판중인 이재명과 1심과 2심 모두 유죄판결을 받은 조국과는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놀라우리만치 검찰에게 타겟팅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45], 크고 작은 논란들과 무혐의 처리된 사건들도 석연치 않다는 지적들이 있어왔다.

전라남도지사 시절 경선에서 이기기 위해 동원한 당원들의 당비를 측근이 대납해준 논란부터, 종로구 국회의원 시절 옵티머스 측에서 이낙연의 종로구 사무실 복합기 임대료를 대납해주고, 옵티머스 사태 연관의혹과 관련하여 검찰수사를 받던 측근이 사망하기까지. 비록 무혐의를 받기는 했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매우 많아 결코 본인도 사법리스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박지원 전 국정원장도 “이낙연 전 대표도 검찰이 돌변하여 옵티머스 사태 관련 압수수색 등 수사만 하면 어떻게 하려느냐? 이낙연 전 대표 측근의 극단적 선택은 설명이 다 끝났느냐?”고 되물으면서 이낙연의 사법리스크에 대한 우려를 표명 하기도 했다. #

3.7. 상대적으로 순탄했던 삶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독재정권에 맞선 인간 승리형 인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재임한 대통령들이 살아왔던 삶들을 보면 대체로 역경을 이겨내고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이낙연은 가난 외에는 유권자의 마음에 와닿을 만큼 삶 속에서 남들에게 인상을 남길 만한 부분이나 정치인으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고난이나 역경 같은 것은 찾기 어렵다.

특히 민주당계 출신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유독 어려운 삶을 살았다. 김대중은 말할 필요도 없는 민주 투사로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정권 시절 내내 김대중 납치 사건,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그의 아들도 고문당해 후유증을 앓는 고강도 정치적 탄압으로 여러 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다. 노무현은 고졸로 사법고시를 합격해 부림사건 이후 인권변호사로 신군부에 맞섰다. 정치 입문 이후에도 3당 합당을 야합이라며 거부하고 민주당계 정당 간판으로 부산광역시에서 선거에 나갔다가 연전연패의 고배를 마셔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46] 이들에 비해 비교적 평탄했던 문재인 마저도 오랜 시간 인권변호사로 일했고, 일생의 동반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겪었다.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에도 분당 사태를 포함한 온갖 내부 분열 등의 역경으로 고생했고, 이를 잘 수습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게 대통령 당선에도 크게 작용했다.

이낙연과 직접 경쟁한 이재명은 소년공 시절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장애를 얻고 자살마저 시도하는 등 험난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후에도 주경야독을 하며 독학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중앙대 법대에 들어가 이후 시민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이낙연은 광주제일고등학교 - 서울대학교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 시절 언론사 내부의 최고의 보직으로 평가받던 도쿄 특파원을 하다가 민주당계의 텃밭인 호남에서 매우 손쉽게 국회의원과 전라남도지사가 되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이재명에 비해서 대단히 순탄한 인생과 정치 생활을 보냈다. 이로 인해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 이재명으로 대표되는 언더독 이미지와 대비되어 '인간 이낙연'의 매력 어필에 한계를 가져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하지 못했다.

종합적으로 이낙연은 좋게 보면 무난하고 안정적으로 살아왔지만, 나쁘게 보면 큰 도전 없이 현상 유지에만 몰두하는 보수적인 기성 정치인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헬렌 켈러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꼭 정치가 아니어도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 승리의 스토리에 열광한다. 이는 대통령제가 탄생한 미국에서도 똑같은데, 미국 사회에서도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 역경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받고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양김으로 꼽히며 질산 테러와 가택 연금, 단식투쟁 등 수많은 고초를 겪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거목이었다. 이명박 역시 가난한 흙수저에서 출발해 대학 재학 시절 학생운동, 이후 성공한 대기업의 중역을 거쳐 서울시장과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다른 대통령들과 달리 유복하게 자란 박근혜윤석열 마저 나름의 고난 서사가 있다.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이 된 박근혜는 젊은 나이에 아버지어머니가 암살당했다는 서사가 존재한다.[47] 윤석열은 검찰총장, 검사장 시절 살아있는 권력수사하다 좌천되거나 권력에 의한 탄압을 받았었다는 최소한의 서사가 있다.

비록 낙선했지만 보수정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이회창홍준표는 고난은 없지만 군사독재 시절 법조계에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껏 행동한 인물들로, 현재 민주당계 정당에 속한 운동권 인사들에게도 존경을 받았었다. 윤석열 역시 이회창이나 홍준표와 유사하게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조국 사태와 같은 정부와 엮인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맡아 수사하며 줏대있는 강직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쌓아 대통령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물론 이낙연도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을 딛고 일어서긴 했다. 그러나 이낙연의 인생사에서 위기나 고난은 다른 대권주자들에 비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며, 특히 민주화나 노동운동과 관련된 행적이 전무하다는 것이 악영향을 미친다. 서울대 70학번 동기 김문수의 경력과 같이 나열하면 둘의 젊은 시절 행보가 뒤바뀐 게 아닌지 생각될 정도. 꼭 김문수까지 가지 않더라도, 고등학교-대학교 후배인 심재철의 정계 입문 전 행적과 비교해도 확연히 부족하다.

이렇듯 정치 입문 전까지 민주화나 노동운동과 거리가 먼 삶을 산 것은 현재 이낙연의 대권 도전에 상당한 마이너스가 되었다.

3.8. 22대 총선 참패

이낙연은 이런저런 이미지 소모가 너무 심했던 나머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신의 홈 그라운드라고 자부한 광주광역시 광산구 을에 출마했으나 고작 13.84%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완전히 몰락했으며[48][49] 선거비용 전액 보전에도 실패했다.(반액 보전) 이로 인해 이낙연 본인이 5선 국회의원은 물론 전라남도지사에 당선된 건 단순히 민주당 프리미엄 덕분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똑같이 광주광역시 내 지역구에 출마했지만 구속수감 중인 상태라 선거 운동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던 송영길보다도 더 처참한 득표를 얻었고[50], 과거 새로운미래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민주국민당, 창조한국당, 바른미래당, 국민의당(2020년), 민생당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호남을 기반으로 했던 5선 정치인이 광주 정도의 탄탄한 텃밭에서 이런 득표율을 기록한 것은 굉장히 치명적이다.[51] 또한 이낙연은 이재명에게 반발하여 신당 창당을 시사하자 문재인이 김대중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우회적으로 비판했음에도 무시하고 신당을 창당했지만 이렇게 처참한 성적표를 받음에 따라 더 이상 민주당계 정당 복귀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났다는 분석이 대다수다.[52]

더불어민주당 탈당 이후 보수 세력에게도 주목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53] 굉장히 초라한 결과를 맞았다. 정작 이낙연 본인이 그토록 싫어했던 이재명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지역구 161석,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14석 등 도합 175석의 압승을 거두면서 흔들렸던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되찾은 것과는 대조된다. 위에서도 언급된 극성 지지층의 행태로 이미지까지 더 나빠진 것은 덤. 냉정하게 말하면 자신의 홈 그라운드인 호남에서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상 전국 어디에서 출마를 해도 당선될 가능성이 너무 낮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강성 지지층은 광주도 험지였다고 하면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결국 현실적인 여건과 민심에 대한 조사도 없이 강행한 지역구 출마로 인하여 그의 입지는 오히려 곤두박질 치게 되었고 그의 신당인 새로운미래는 교섭단체를 만드는 데 있어서 주도권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원내 의원 단 한 명의 불안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마저도 얼마 안가 탈당하면서 원외정당으로 추락했다.

게다가 이낙연이 새로운미래 소속이라는 것을 모르는 유권자도 있었다고 한다. 중앙당 차원에서 홍보마저 제대로 안한 셈이다.

4. 복합적

4.1. 대선주자가 없는 친문 세력

현재 친문 세력에서 이낙연 외에 별다른 대권주자가 없다. 이낙연이 친문 직계는 아니지만,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라는 상징성이 있어 범친문, 친문 방계 정도로는 여겨지고 있다. 기존에 범 친문 진영의 유력한 후보로 여겨졌던 안희정은 성추문 때문에, 박원순은 성범죄로 인한 자살 때문에, 그리고 조국은 가족 논란도 모자라, 조국 본인의 논란 때문에 대선 후보로 나서기 어려워진 상태이다. 또 김경수는 드루킹 사건에 연루되어 지사직을 박탈당함과 동시에 교도소에 수감되다가 겨우 사면되었다[54]. 이재명, 김동연, 박용진, 추미애 등 다른 더불어민주당 내 대권주자는 친문 성향이라고 보기에는 거리가 있다. 이광재도 있지만 이광재 역시 선거법 위반 리스크가 있는데다가 세력이 굉장히 약한 편이라 경쟁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친문 계파가 문재인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라는 이유만으로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한계는 있다. 이재명계는 2021년 이전에는 불과 9명에 불과했지만, 범친문 세력을 흡수하면서 당내 최대 계파가 되었다. # 문재인 전 대통령 본인은 야권 통합을 강조하면서 이낙연의 신당 창당 움직임에 사실상 부정적인 뜻을 피력했다. # 2024년 1월 11일 이낙연이 탈당했지만, 이낙연과 동반 탈당 의사를 밝힌 친문 현역 의원은 없었다. [55] 게다가 상술한 이유로 대선 가도에서 영영 멀어지는 듯했던 조국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선전을 통해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친문의 대표주자라는 타이틀을 가져가는 바람에, 이낙연의 친문계 거성 이미지가 시들해져버렸다. 조국이 속한 조국혁신당 역시 대놓고 친명을 자처하지 않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친명계가 주류를 이루는 더불어민주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가뜩이나 총선에서 대패한 이낙연에게는 더 이상 친문계 우호 세력을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다.[56]

사실 22대 총선 이후에는 언론 업계에서 편의상 친문으로 분류할 뿐. 이낙연과 이낙연계 정치인들은 더이상 친문으로 분류 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렸다.

4.2. 보수 진영의 상대적으로 낮은 반감

비록 문재인 정부의 초대 총리로서 막중한 책임을 졌지만 보수층에서도 '이낙연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평을 듣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민주당 강성 지지층에서는 '엄중낙연'이라며 우유부단하고 보수에게 유화적이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보수층은 이낙연을 민주당 주류보다 상식적이고, 덜 급진적인 정치인이라 생각한다. 안티페미니즘 성향의 2030 보수 커뮤니티에서도 이낙연 정도면 민주당에서 가장 나은 정치인이라고 평가하는 글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이들은 추미애나 이재명을 이낙연보다 더 비판하는 경향이 크다.# [57]

이낙연의 비호감도 자체가 낮은 건 아닌데, 한국갤럽 2022년 9월 3주차 정치인 호감 여부 여론조사에서 이낙연의 비호감도가 57%로 나타나 비호감도 순위가 조사 대상 8명 중 3위를 기록했다. # 결국 이낙연을 보수 진영에서 극렬하게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다. 국민 통합 차원에서는 유리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달리보면 보수진영의 이낙연에 대한 호감은 역선택으로 볼 여지도 다분하다. 일례로 과거 이낙연 정계복귀에 대한 여론조사의 세부지표를 들여다보면 지지정당별 결과의 경우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선 27.3% : 68.2%로 이낙연 전 대표의 정계 복귀 반대 여론이 2배 이상 더 높았고 거의 70%에 육박했다. 반면에 국민의힘 지지자들 사이에선 44.1% : 49%로 나와 찬성 여론이 오히려 민주당 지지들보다 더 높았고 모든 계층을 통틀어 가장 높았다. 이런 여론조사 결과는 이낙연 전 대표 입장에서 결코 좋은 신호라 할 수 없다.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에게는 버림 받고 보수 정당 지지층들이 반기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지지층들이 유독 이낙연 전 대표의 정계 복귀 찬성 정도가 높다는 건 그만큼 국민의힘 지지자들 사이에서서 이낙연이 만만해 보이는 인물이라는 증거로 해석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낙연이 잠시 동안 당권을 잡았을 때 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긴 적은 거의 없다.


[1] 국무총리 출신이 대권주자로 거론된 경우는 김종필, 고건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게다가 김종필은 1987년 대선 이후에는 줄곧 캐스팅보트 역할만 했고 고건은 국무총리 퇴임 이후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만 됐을 뿐 실제 출마까지 한 적은 없다.[2] 더불어민주당 당헌·당규의 따른 당권·대권 분리 조항으로 당 대표가 대선에 출마하려면 대선 1년 전인 2021년 3월 직을 사퇴해야 한다.[3] 전당대회 맞대결 경쟁자인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당대표 당선 시 대선출마를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4] 원래의 당헌·당규에 따르면 당 대표 사퇴 시 최고위원들도 동반 사퇴해야 한다.[5] 사실 새로운미래가 호남에서 폭망한 이유는 호남의 터줏대감 중 한 명인 박지원이 이낙연을 비판하면서 해당 지역조직 관리를 철저히 한 탓도 크다.[6] 이낙연은 21대 총선에서 종로구에 나와 대권 후보 1, 2위를 다투던 황교안 후보를 20% 가까운 득표율 차(이낙연 득표율 58.38%, 황교안 득표율 39.97%)로 압승을 거뒀다. 다만 이당시 실질적인 선거 계획은 이해찬이 했다.[7] 원래 이낙연은 손학규계로, 18대 대선 민주당 경선 국면에서는 손학규를 지지하였다.[8] 사실 이낙연도 완전히 깨끗한 사람은 아니다. 선거법 위반 등으로 이미 전과 2범이고, 그러한만큼 다른 정치인들을 함부로 욕하는 것은 적만 만들 수 있기에 바람직하지 않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네거티브만 일삼는다.[9] 이낙연이 탈당 후 신당을 창당하자, 그 전까지 이낙연과 함께 이재명을 비판하던 비명계 민주당원들 상당수가 이를 비난하며 등을 돌린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10] 이때 송영길은 약 17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선거비를 전액 보전받았으나 이낙연은 겨우 13퍼센트대의 득표율을 기록하고 반액보전밖에 받지 못하였다.[11] 가령, 소위 '개딸'소리 듣는 이재명의 극성 지지층조차도, 이재명 본인이 자중하라고 하면 그 목소리에는 진정되는 양상을 보여왔던 바 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대선 후보 경선에서 그가 문재인에게 밀려서 낙선하자, 흥분한 지지자들을 이재명이 직접 설득하자 바로 분노를 거두고 일제히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면서 결과에 승복하였던 것이 그 예다. 이낙연의 극성 지지층은 똑같이 제20대 대통령 선거의 후보 경선에서 지자, 끝까지 이에 불복하면서 집요하게 이재명의 대선 가도에 훼방을 놓는 해당행위를 벌여왔다. 공식 명칭이 '문파'인데 명목 상 지지 정치인인 문재인 전 대통령하고도 척을 진다.[12] 특히 군사정권기를 지나서 현 체제인 6공 이후 호남 출신 대통령은 김대중이 유일하며, 민주당 내 대권주자들 중 이재명, 추미애 등 절반 정도가 영남 출신이기에 호남 출신 대선후보에 대한 열망이 있을 수 있다.[13] 조사의뢰 : YTN, 조사실시 : 엠브레인퍼블릭, 조사일시 : 2023년 12월 17~18일[14] 이를 증명하듯 송영길은 옥중출마를 한 탓에 선거운동에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낙연보다 높은 17%의 득표율을 보여 선거비 전액 보전에 성공했다.[15] 당시에는 되려 박정희호남에서 지지도가 높았고, 영남 지역에서 반정부여론이 강했다. 박정희가 자기 고향이라면서 구미시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키운 것이나, 집권 말기에 부산마산에서 부마민주항쟁이라는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이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은 정치 지형이 만들어진 것은 80년대 말에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이 만천하에 공개된 이후의 일이다.[16] 이낙연이 아예 선거운동을 내팽겨쳤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낙연은 일단 경선 승복 이후에는 캠프 상임고문과 총괄선대위원장을 맡아 투표 당일까지 당에서 요구한 선거운동 일정은 열심히 다 소화했다. 다만 자신의 강성 지지자들이 선거를 앞둔 당을 분열시키려는 행위를 강력하게 제지하지 않았고, 본인 또한 이재명과의 원팀기조에 모호한 태도를 보여 뒷끝 남는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을 받았다.[17] 2024년에 깨어있는시민연대당의 해산으로 인한 정계 은퇴[18] 2023년에 징계로 인한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영구 제명[19] 심지어는 이들의 행태들을 그저 방관방치하기만 했다.[20] 아이러니하게도 이재명이 과거의 친문 세력과 갈등을 일으킨 이유도 경선 과정에서 문재인에 대한 지나치게 공격적인 발언으로 인한 갈등, 내부총질의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재명은 그 과정에서도 '자신이 먼저 당선되어 국가 개혁을 하고 나면 그 후에 대통령이 되어 국가를 안정시켜달라'라고 말하는 등 근본적으로는 협력 관계임을 꾸준히 어필했고, 무엇보다 후보 결정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지지유세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지금의 뮨파와 유사한 행보를 보이던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본심이 어떻든간에) 자중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행보의 차이가 지금의 이재명과 이낙연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21]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검찰청/비판 및 논란 문서의 '검찰과 성향이 맞는 정권에의 과잉 충성과 권력 추종 성향' 및 '사법부 압박' 항목 참조.[22] 2024년 현재 실시간으로 검찰 측의 별건수사로 인해 피해를 입고있는 이재명조국은 물론이고, 전직 대통령들인 노무현문재인도 같은 피해를 입은 바 있다. 심지어 보수정당 소속인 홍준표마저도 성완종 게이트와 관련하여 똑같이 표적수사를 당한 까닭에, 그 자신이 검사 출신임에도 검찰 출신 인사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실정이다.[23] 아래의 '사법리스크' 항목에도 언급되는 이야기지만, 이 때문에 박지원이낙연에게 "옵티머스 사태에 대한 이야기는 다 끝났느냐? 검찰이 갑자기 돌변해서 이 건에 대해 수사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낙연 본인도 명백히 사법리스크가 있다.[24] 오죽했으면 설령 이재명이 몰락한다 해도, 이낙연에게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까지 있을 정도이다. 사실 이낙연계 자체가 21대 총선때 급조된 계파인 데다가, 역사도 굉장히 짧은 편이라 박광온과 같이 계파색이 옅거나, 홍익표나 김영배처럼 적어도 이재명과 무조건적으로 척을 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여러 무리수를 던져 가며 당권을 잡는데 실패한 순간 부터 민주당내 기반이 빈약했던 이낙연계가 공중분해 되는 건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던 것이다.[25] 2024년 11월에 독일베를린에서 개최된 차세대 반도체 정책 포럼에 참가한 김동연 경기도지사에게 기자들이 11월 15일에 이재명 대표에게 내려진 판결 이야기를 하면서, 김 지사가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과 관련하여 차기 대선의 플랜B에 대해 질문을 했는데, 김동연 도지사가 "지금은 그런 걸 논할 때가 아니다. 공정과 상식에 어긋난 판결이었다."면서 대안이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비명계 유력 인사들조차 이낙연계와는 다르게 친명계와 우호적인 관계였으면 했지, 결코 적대하지 않으려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이는 공교롭게도 제19대 대통령 선거 전후에 친명계가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최대 계파였던 친문계에게 보였던 입장과 거의 같다.[26] 이당시 전당대회에서 경쟁자로 나온 김부겸은 만약 자신이 당대표가 된다면 대선에 불출마 하겠다고 공약했다.[27] 이 당헌은 문재인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에 당시 새누리당이 재보궐선거에 고성군수를 공천하는 걸 비판하며 제정한 것이다.[28]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민주당에게 엄청난 손실이고 감내하기 어렵겠지만, 공당이 문서로 규정까지 하고 국민과 약속했으면 약속을 지켜 무공천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라며 우려를 표명했으나, 친문 유권자(ex. 문빠) 등 내부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고 "저는 서울, 부산시장 무공천을 '주장'한 바가 없습니다."라고 에둘러 입장을 철회해야 했다. 결국 이재명 지사의 우려는 선거결과로 현실이 되었고, 이는 향후 민주당 3연패의 서막이었다.[29] 여담으로 이 선거 이후 민주당은 20대 대선, 8회 지선에서 연이어 패하게 된다.[30] 문빠들한테 '반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이재명 지사가 오히려 당헌을 더 잘 이해하고 지켰다는 평가가 많다. 이는 당대표 시절에도 이어지면서, 2024년 전당대회에서 여론조사 비율을 30%까지 올리고, 대의원의 비중을 대폭 내리고, 권리당원 비율을 그만큼 올리기까지 했다. 참고로 반영 비율이 높지만, 인원이 적은 대의원은 그 전에도 지들만의 리그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까였었기에 누가 되든 당규를 수정하는 일이 생길 수가 있었다. 단지 천원만 내도 되는 권리당원(보수당의 책임당원)의 비중을 늘리는 것은 당이 어느 한 사람만의 정당이 아니라 당원들이 직접 참여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31] 그 박광온마저도 이재명 체포동의안 가결의 책임을 지고 원내대표에서 쫓겨나다시피 물러났다.[32] 사실 내용을 보면 이겼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호남에서 추미애 후보를 꽤나 밀어줘서 표가 분산된 결과일 뿐. 이재명 추미애 합산은 이낙연을 넘어선다.[33] 애당초 이길 수 없는 허니문 선거에 가까웠고 그나마도 민주당에서 평가가 좋았던 후보들이 낙선 후 국회의원으로 부활하는 등으로[34] 전지역에서 진 것도 모자라, 전남/광주에서는 정청래한테 지는 등, 입지를 제대로 잃어버렸다.[35] 그 김기현 조차도 강서구청장 재보궐 선거를 지휘했던 적이 있다.[36] 정확히 말하면 윤영찬은 이원욱, 김종민, 조응천원칙과 상식과 함께 탈당하려 했으나 자기 선거구 경쟁자인 현근택이 성비위 혐의로 날라가려고 하자 황급하게 탈당을 철회하고 당으로 회군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37] 이후로 민주당 내에서 수박이라는 말을 듣는 인물들도 종종 있긴 하지만 그들도 딱히 이낙연을 지지하지는 않고 있다.[38] 이 과정에서도 이낙연은 전직 대통령인 문재인과도 갈등이 생기고 말았다.[39] 대통령 선거 후보 등록하기 전까지는 사퇴해야 하는 지방자치단체장과는 달리, 국회의원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 자동 사퇴 처리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이재명은 대통령 최종 후보로 선출된 뒤에도 국정감사까지 모두 임하고 나서 도지사 직을 내려놓았다.[40] 그래서 더불어민주당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낙연이 말아먹은 종로구를 탈환하기 위해 노무현 前 대통령의 사위인 곽상언을 투입하는 초강수를 둬 최재형과 맞붙게 했고, 곽상언이 종로구를 되찾아오는데 성공했다. 사실 종로구 주민들은 이낙연에게 배신을 당한 게 화가 난 것일 뿐이지 더불어민주당을 미워한 게 아니었다.[41] 사실 광산 을이라는 지역구 선택부터 잘못됐다는 평가가 많다. 비록 이낙연이 호남 출신 거물이긴 하나 이전까지 광주, 특히 광산구와는 접점이 전혀 없었다. 이와 달리 상대 후보인 민형배는 2010년부터 8년간 광산구청장을 맡아 수완지구 주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낙연이라는 거물이 뛰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76%의 압승을 거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42] 똑같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이후 개혁신당 정당 정치인이 된 조응천이원욱은 비록 낙선했지만 당의 중심인 이준석의 당선으로 정치생명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계속 남아있는 걸 생각해보면 이낙연은 한 없이 초라하다.[43] 김대중의 기반은 호남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서울특별시와 충청권에도 어느 정도 있었다. 괜히 DJP 연합이 결성된 것이 아니다.[44] 경선에서 밀릴 것 같다기보다는 그 때쯤이면 고령으로 정치 은퇴를 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에 가깝다. 윤석열의 임기가 탄핵, 사망, 사임 등으로 앞당겨지지 않는 이상 2027년 3월의 제21대 대통령 선거에는 이낙연이 만 74세가 되는데, 70대 중반의 5선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장을 역임하고 은퇴를 앞두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정계 원로이기 때문이다.[45] 사건의 진상과 관련없이, 대한민국 검찰청이 유독 친민주당계 정치인들이나 보수정당 내 비주류 정치인들에 대한 사항에 대해,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가혹하게 수사를 일삼는다는 지적이 많은데, 이들 대부분이 뚜렷하게 반기득권 성향을 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해 검찰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표적수사를 한다는 논란에서 전혀 자유롭지않다. 공교롭게도 이재명조국은 모두 범좌파-민주당계 진영에서 유력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이며, 이낙연은 이들의 입지가 커졌을 때 반대급부로 입지가 약해졌다.[46] 노무현은 총 7번의 선거 출마했으나, 당선은 겨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1998년 보선·제16대 대통령 선거 뿐이다. 특히 3당 합당 때 그가 김영삼과 갈라선 이후 부산에서는 전패를 기록했다.[47] 실제로 18대 대선 당시 이런 서사에 공감해 박근혜가 안타깝고 불쌍해서 지지한 고령층도 다수 있었다.[48] 더군다나 국회의원 5선, 전라남도지사 초선 등 본인이 출마한 모든 선거에서 당선됐던 이낙연이었는데 이번에는 정계 입문 후 처음으로 낙선이라는 결과를 받았다. 심지어 원희룡처럼 야권의 유력대권주자인 이재명을 상대하기 위해 자진해서 험지에 출마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지역기반이라 볼 수 있는 호남권에서 그것도 대권주자로 거론되지도 않는 민형배에게 처참한 득표율로 낙선했으니 더더욱 타격이 크다고 봐야 한다.[49] 현역 의원 시절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올인하기 위해 의원직 사퇴를 감행했는데 이것조차 현역 지역구인 서울특별시 종로구가 아닌 뜬금없이 광주광역시에서 진행했었다. 광주광역시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결과는 13.84%라는 처참한 결과 뿐이었다.[50] 송영길은 17% 정도를 받아 선거비 전액을 돌려받았다.[51] 반면 당시 보수의 대권 잠룡 중 하나였던 홍준표21대 총선에서 황교안의 공천 파동으로 인해 컷오프당하자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연고도 없던(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긴 했으나 정치 활동은 서울과 경남에서 했지 대구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구 수성구 을에 출마, 당시 보수정당 후보였던 이인선을 꺾고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부활하는데 성공하였다.[52] 나이가 많아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실질적으로 마지막이었으며, 실제로 이낙연 본인이 마지막이라 발언하였지만 이후 본인의 발언을 번복하고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다가 대참패를 겪었다. 영향력으로나 나이로 인한 시간적으로나 사실상 정치 생명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53] 실제 보수 일각에서 이낙연이 광주에서 낙선하더라도 30~40% 정도만 받으면 영, 호남을 결합해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다는 계산을 했던 경우가 있었다. 개혁신당과의 합당 역시 이를 염두에둔 행보가 아니었냐는 얘기도 나오기도 했다. 다만 이 당시에는 보수 내부에서 한동훈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대권주자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감안해야 한다. 거기에 국민의힘 나경원, 안철수 같은 대권주자들이 22대 총선에서 살아돌아오고 한동훈도 총선에서 패배했음에도 여전히 여권 지지층에서 크게 지지하면서 면서 보수 진영에서 이낙연을 부를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졌다.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차라리 인천광역시 계양구 을에서 이재명을 끌어 안고 동귀어진 해야했다며 실컷 조롱을 하고 있다. 다만, 계양구 을의 결과를 생각해보면 이재명보다는 원희룡 쪽의 표를 더 많이 갉아먹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54] 그나마 조국김경수친명계와 딱히 척을 지는 사이도 아니다. 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친문계 거의 대부분이 이런 상황이다.[55] 전날 탈당한 김종민 의원은 범친문으로 분류될 수도 있지만 원칙과 상식의 일원으로 탈당하는거지, 이낙연을 위한 탈당은 아니라면서, 이낙연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56] 게다가 상술했듯이 이낙연 지지자들이 문재인 전 대통령과 손절함으로서 친문으로서의 정체성도 잃어버리게 되었다.[57] 다만 2030보수들은 페미니즘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낙연은 이재명, 추미애보다도 오히려 더 페미니즘에 우호적이다. 추미애는 페미니즘에 반대한다고 밝혔으며, 이재명은 20대 남녀 양쪽 모두의 목소리를 참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낙연은 "남자는 아이 안 낳아서 철이 없다",'남성이 군복무에 따른 피해의식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등 남성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가 물의를 빛은 전적이 있다. 즉,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2030 젊은 보수층들은 이낙연의 행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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