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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치인 유승민의 대권주자로서 갖는 장점과 단점이다.2. 장점
2.1. 경제·안보 등 정책 전문성
유승민은 경제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외교, 국방, 복지, 교육, 지역균형발전, 문화예술 등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정책통으로 꼽히며, 여러 공약에 대해 본인이 스스로 입안을 한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1]한나라당 - 새누리당 - 바른정당 - 바른미래당 - 새로운보수당 - 미래통합당 내의 대표적인 정책통이었으며, 이는 유승민과 사이가 좋지 않은 친박 정치인인 최경환도 인정한 바 있다. 친유 정치인인 정병국은 유승민 의원이 헌법 그 자체이며 컨텐츠가 좋다 하기도 했다.
그리고 동 세대의 정치인 중 젠더 이슈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높아 2030 청년 지지층들을 모으기 유리하다. 실제로 본인도 바른미래당 시절부터 이준석, 하태경, 정병국과 같이 젠더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2]
2.1.1. 경제정책 전문성
20대 대선 주자 가운데 유일한 경제학자 출신이다.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국내 최고의 국책연구기관인 KDI에서 근무했던 경제학자답게, 재정, 산업, 복지, 노동 등 전반적인 경제정책에 대한 전문성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전공이었던 재벌 분야에 대해선 다른 주자들보다도 구체적이고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된다.[3]언제부터인가 '경제 대통령'이라는 문구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너도나도 사용하고 있는데, 진짜로 경제 대통령이라고 주장할만한 사람은 유승민 뿐이다. 국민의힘 경선에서 윤희숙이 경제학자 출신이었으나,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면서 비교할만한 사람은 이제 없다.
최근에도 이재명과 논쟁하면서 한국개발연구원 시절부터 쌓아온 경제적 식견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으며, 이재명의 기본소득에 대해서도 윤희숙과 함께 비판했다.
2.1.2. 투철한 안보관
경제학자 출신임에도 안보 및 국방 분야에서도 전문성이 뛰어나며,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호평을 받았다. 지지자들 사이에서 농담 삼아 안보관은 강경 우파 수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북·대중 강경파이다.[4]또한 군인들의 보훈에도 여타 정치인보다도 많이 신경을 쓰고, 매년 천안함 피격 사건이나 서해 수호의 날 등의 기념식에 참석해 유족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천안함 피격 사건 생존자인 전준영 씨 또한 유승민에 대해 고마움을 표한 바 있다.##
2.2. 논리력과 토론 실력
제19대 대통령 선거 TV토론에서 5명의 후보들 중 가장 잘했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토론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 정책 전문성을 바탕으로 자기 고유의 견해를 명확히 드러냈다는 평가가 있다. 전문가들의 평도 유승민이 가장 좋았고, 여론조사에서도 유승민이 가장 잘 했다고 평가받았다. 특히 마지막 대선토론 연설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정연하다는 평을 받았다.# # #2.3. 지역구 내 강한 입지
유승민의 지지율이 대경권에서 상대적으로 낮다고는 하나 그래도 과거 지역구였던 동구 을에서 유승민의 입지는 막강하다. 실제로 새로운보수당 시절 자유한국당 상대로도 접전을 이끌고 간발의 차이로 승리로 이끌 수 있는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유승민에게는 동구 을 내의 안정적인 기반은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텃밭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경험도 있고, 유승민이 불출마를 선언하고도 여러 친박 인사들이 친유 정치인인 강대식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강대식이 압도적으로 경선과 본선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옆 동구 갑 역시 친박, 친황 인사인 이진숙을 꺾고 친이, 친유 인사인 류성걸이 당선되었다.
일각에서는 텃밭에서만 정치한 것을 약점으로 꼽고 있지만, 비례대표직을 사퇴하고 출마한 첫 지역구 선거였던 2005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시 열린우리당 이강철 후보를 TK 치고는 적은 표차로 꺾었고[5], 2016년 20대 총선에서 동구 을의 개발로 진보세가 강한 층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7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어 4선 의원을 지냈다.[6]
국회의원 재임 시절 대구 공군기지, 대구국제공항 문제 해결, 대구신서혁신도시, 이시아폴리스, 대구경북첨단의료복합단지 등 신도시 유치, 대구 도시철도 1호선 하양대구가톨릭대역 연장, 대구외곽순환고속도로 등 인프라 건설에 성공해서 동구 내 입지가 강하다.
2.4.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춘 계파
과거의 친이, 친박이나 지금의 친윤에 비해서는 계파의 크기도 작고, 사실 김영우, 조해진, 이학재 심지어 이혜훈, 하태경까지 다른 후보 쪽으로 이탈하면서 친유의 세력이 21대 총선 전에 비해 약해진 것은 맞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결속성이 강한 계파는 장점이라고 볼 수 있다.유승민 본인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친유라는 계파가 애매하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친유 인사 중 상당수가 소장파, 친이 등 타 계파와 겹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타 계파와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대부분이 한나라당, 새누리당 시절부터 같이 가면서 결속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5. 도덕성
제20대 대통령 선거 당시 도덕성 관련 여론조사에서 유승민 후보는 도덕성 논란이 적은 인물로 나오고 있다. 유승민은 비례대표 초선 시절부터 4선에 성공할 때까지 도덕적으로 논란이 되거나 부정부패에 연루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박근혜 정부로부터 비공식적인 내사와 사찰을 받았지만 어떠한 논란도 없었다.[7]가족의 경우도 부정 입학, 부정 취업 등 비리 문제가 없고, 오히려 아들 유훈동이나 딸 유담 모두 정상적인 방식으로 입학했다. 재산 및 부정부패에서도 가족과 측근들이 연루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모친인 강옥성 씨의 경우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를 해 지역 내 평판이 좋다.
발언 문제에 대해서도 막말을 한 적도 없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도 많은 인물이었다. 홍준표의 경우 막말 논란이나 말바꾸기 논란이 있고, 윤석열의 경우에도 정치적 논란과 망언 논란 등이 있으며 다른 대권주자인 인물들이 하나 둘 나사빠진 사고를 한 두번은 쳤지만 적어도 유승민은 그런 논란이 일절 없다시피 하다.
3. 복합적
3.1. 정책 및 공약의 일관성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달성, 강정마을 구상권 철회, 원전의 점진적 축소 등의 공약을 내세웠으나, 이후 해당 공약을 철회하고 사과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쪽도 있으나 보통 이러한 경우엔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기 마련이다.물론 1만원 공약은 사과하긴 했으나 공약 하나의 번복과 사과만으로 유승민의 모든 정치적 경력과 정책적 방향성들을 일관성 없다고 하기는 힘들다. 오히려 유승민은 대한민국에서 일관된 경제와 안보 정책을 꾸준히 동일한 내용으로 20년 이상 주장해오고 있는 몇 안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유승민은 연구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경제개혁을 정치권에 주문해오고, 또 정치인이 된 이후로는 직간접적으로 실현하려고 노력해왔다. IMF 때 재벌개혁-금융개혁-정부 구조조정을 골자로 하는, 다시 말해 한국 경제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자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으며, 이는 정치인이 된 이후로도 유승민이 일관되게 주장해오고 있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히 주장을 하는 차원을 넘어선 것인데, 왜냐하면 국책기관 연구원 신분으로 당시 정부, 여당, 그리고 대통령의 정책과 각을 세우는 행위이며 실제로 이러한 언행들로 유승민은 노골적인 압박과 심한 처우를 받았다.
이후 유승민은 야당 신분으로서 참여정부를 날카롭고 일관된 기준에 근거하여 감사해왔다. 심지어는 한나라당이 여당이 된 이후에도 똑같은 기준으로 같은 당에서 배출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정계 입문 후 이회창, 박근혜와 같이 활동하면서도 직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특히 박근혜의 경우 이것이 심화되어 한때 친박계였던 유승민이 본인의 정치생명을 걸게 된 행보를 하기에 이른다. 이렇듯이 유승민이 지나온 정치 행보의 궤적만 보아도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보 정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유승민은 국방위원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해 안보전문가로서 늘 일관된 안보정책관을 보여왔다. 심지어는 사드 도입을 위하여 대경권 정치인 신분으로서 대경권에 사드 배치를 찬성하는 등 솔선수범하는 모습도 보였다.
특히 매년 서해수호의 날 행사, 천안함 피격 사건 추모식, 연평도 포격전 추모식, 마린온 추락사고 순직자 추모행사 등 보훈 관련 행사에도 언제나 참석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다.
3.2. 소신 있는 모습
친박과 강성 지지층들에게는 배신자라고 비난받지만 유승민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가리지 않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칭찬하고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박근혜 정부와 틀어진 이유도 본인이 정부의 성공을 위해 쓴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말을 남겼다가 친박의 압박으로 정치적 사망 선고 직전까지 갔었다.
다만 이 점은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하는데 소신이 지나치다 보니 구성원들과 의견 충돌이 일어날 때 이를 제대로 봉합하지 못한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오죽하면 유승민 전 의원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한 5선 중진 정병국 전 의원은 미래통합당 창당 당시 유승민을 향해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배제가 아니라 같이 할 때는 같이 해야 된다"라고 했다.[8] 결국 유승민은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새로운보수당은 자유한국당과 합당하게 된다.
3.3. 중도좌파 성향의 일부 정책
제19대 대통령 선거 공약들 중 비정규직 고용총량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달성[9], 탈원전 정책[10], 공수처 설치[11], 임대료상한제 및 계약갱신청구권제 찬성, 법인세를 비롯한 각종 증세 등 상당수의 공약이 보수층의 반감을 샀으며, 좌파 성향 정책이 비판받았다.또한 개혁보수라고 내세운 공약들 역시 민주당이나 내놓을 수준이라는 점과 사회일자리 100만 개와 같이 민간 부분의 영역까지도 아예 문재인 정부의 공약과 비슷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충분히 의심이 가는 공약도 존재한다.[12]
이는 중도와 좌파까지 포섭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오히려 보수층 입장에서는 이런 공약들을 보고 사실상 "우파 표 자체를 받아가려 하지 말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여론조사 결과에 비해 당심에서 계속 밀리는 원인의 일부로 보인다.
4. 단점
4.1. 배신자·내부총질 프레임과 그로 인한 당심, 우파층에서의 비토
사실상 가장 치명적인 유승민의 단점.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한나라당 경선 때만 해도 박근혜 대표를 지키겠다고 말할 정도[13]로 김무성과 같이 한때 원조 친박으로 유명했지만[14], 19대 국회 말기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역임하면서부터 박근혜와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절정은 본인이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 등 정부 정책을 대놓고 반대하였고, 심지어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공무원연금 개정안을 해결한 대신 야당이 요구했던 국회법 개정안을 의도적으로 통과시켰다. 이에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권으로 응수하며 "배신의 정치"라고 유승민을 직격했다. 결국 국회법 문제로 인해 당정 간 갈등이 심하게 증폭되면서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도 유승민 사퇴 결론이 나게 되었고 원내대표 직에서 사임했다. # #이후에 유승민은 김무성, 정병국 등 비박계 정치인들과 함께 새누리당 내에서 박근혜 탄핵소추안 통과를 주도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새누리당을 집단탈당해 바른정당을 창당하여 19대 대선 후보로 나왔으며, 당내에서 보수 후보 단일화 요구가 있었지만 새누리당 후신인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와의 단일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국민의당과 합당해 바른미래당을 만들었고, 이후 21대 총선 직전 다시 분당해 새로운보수당을 만든 뒤 자유한국당과 합당해 미래통합당을 만들며 보수 분열을 막았다.
이와 같이 '국회법 개정안 통과→탄핵 주도→집단탈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보들로 인해 국민의힘 전신이던 새누리당 시절부터 친박에게 '배신자', '내부총질', '보수 분열의 원흉', '기회주의자', '분탕종자' 등의 비난을 받았으며, 이는 친박이 몰락한 후에도 친홍, 친윤 등의 당내 세력들에게도 비판을 받는다. 오히려 윤석열과 각을 지면서 다른 보수 세력들도 그를 비판할 정도였다. 그리고 소위 전광훈[15] 목사 같은 극우세력으로 불리는 태극기 부대에게 여전히 같은 사유로 비난받는다.
당내 대표적인 자유보수주의, 공화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정치인으로써 과거 친박 핵심일 때도 남원정이나 소장파와 같이 당내 개혁을 도모한 바 있다. 그리고 비박으로 분류된 이후에도 정병국, 하태경, 이준석 등과 같이 당내 중도화와 자유보수주의를 확립하는 데 힘을 썼고, 2030들의 정치 진출에 큰 힘을 보태주었다. 원내대표 시절 노무현 정권의 정책 중 일부를 칭찬했고 이를 계승하겠다고 발언하여 당시 좌파 일부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다만 이는 반대로 역선택의 근거라는 식으로 자주 인용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4.2. 리더십과 존재감의 부재
제19대 대통령 선거 이후부터는 존재감이 서서히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몸담고 있었던 바른정당은 의원들의 잇따른 탈당으로 인해 서서히 무너져가기 시작했다. 이후 안철수가 이끌던 국민의당과 합당하며 바른미래당이 출범했지만, 7회 지선에서 참패했고 안철수, 손학규 등 국민의당 출신들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이로 인해 유승민은 친유계 정치인들을 이끌고 바른미래당을 탈당해 새로운보수당을 만들었다. 물론 바른정당, 바른미래당의 분열을 모두 유승민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지만, 제20대 국회에서 그의 개혁보수 신당은 실패한 셈이다.또한 새로운보수당과 자유한국당이 합당하면서 제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는데, 이는 낙선으로 인한 정치적 타격을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줄 여지가 있었다.[16]
국민의힘 3차 전당대회 국면에서는 방송 출연도 자주하고 자신을 배신자, 내부총질이라고 쉴새없이 저격하는 홍준표와 친윤 정치인들에게 바로 페이스북을 통해 반박하는 등 비윤계의 대표 주자로서 입지를 굳혀가는 듯 했다. 그러나 당대표 선출 룰 개정까지 이뤄지자 2023년 1월 31일에 결국 당대표 불출마 선언을 했다.[17][18]
4.3. 부족한 본인 홍보
대선주자 가운데 유독 정치력과 대중성이 떨어지는 후보라는 평을 받는다. 특히 유승민은 평소 활발한 공개활동을 하지 않고 칩거하거나 잠행을 자주 하다가 선거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대선 후보라면 공개적인 활동을 해서 인지도를 높이거나,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담은 책을 출간하거나, 유튜브, 방송 출연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비전을 알려야 하는데, 다른 주자들에 비해 이러한 공개활동량이 현저히 적고 오로지 페이스북만을 사용하고 있다.
오히려 이 부족한 본인 홍보가 본인의 '배신자'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의 일부이다. 당장 유승민과 가까운 이준석이 대구에 가서 탄핵은 정당했다고 하면서도 당대표가 된 것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물론 현재는 원외 평당원 신분이고 당직을 맡지 않고 있어 원내에 있을 때보다 제약적일 수밖에 없고, 본인도 정책 연구에 힘을 쓰고 있다고 하지만 정책 연구만큼 중요한 것이 자기 홍보인데 그런 면에서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이준석, 오세훈과 같이 2030이나 중도층이 가까이 하고 본인의 지지율을 올릴 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것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평가이며 이 부분을 해결하지 않을 경우 유승민의 지지율이 오르기는 힘들다.
그나마 국민의힘 대선 경선 때부터 유튜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긴급 기자회견이나 여성가족부 폐지 등 주요 공약을 발표하고 이재명, 윤석열을 공격하면서 서서히 홍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요 대권주자에 비해서는 주목도가 떨어졌었다.
그러나 이준석 징계를 기점으로 해서, 윤핵관과 윤리위를 강도높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최근 들어 윤석열 대통령의 순방 중 욕설 논란, 지지율 급락 사태 등이 발생하면서 유승민이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준석 추가 징계와 법원의 이준석 가처분신청 기각 등 여러 가지 사건을 거치면서 친윤 세력이 이준석을 제거하려는 것이 드러나자, 이전과 달리 윤석열, 윤핵관 등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비윤 진영의 중심으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윤석열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20대 지지율 최저치를 찍고, 이준석 징계로 인해 친윤 진영에게 반발하는 이준석 지지층의 대다수가 유승민이 당권주자로 나서면 무조건 지지를 하겠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보이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이준석의 주요 지지층인 20대 유권자들을 흡수해서 세력 불리기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예측도 많다.
결국 이준석 추가징계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이준석이 조사 대상 명단에서 빠지고, 그 수치만큼 유승민의 선호도가 오르며 압도적인 격차로 1위를 하면서, 이준석 지지층을 흡수할 것이라는 전망은 현실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공중파 방송 출연을 다시 복귀해 인터뷰하면서, 공식 출마선언을 하진 않았지만 당권 도전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앞으로의 활동 노선을 매우 활발한 쪽으로 틀 것으로 전망되며, 모든 준비가 끝나면 공식 출마선언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그와 더불어 이후 국민의힘 지지층만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나경원과 거의 비슷한 수치만큼 치고 올라옴으로서, 나경원에 전혀 밀리지 않는 결과로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당대회 룰 개정 이후 지지율이 떨어지자 결국 불출마를 선언하며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19]
전당대회 이후에는 외부 활동은 어쩌다 한번만 하며 여론조사 질문지에도 빠지는 등 인지도는 박살나고 은퇴한 사람처럼 다니다가 100분 토론이 총선 특집으로 기획한 패널 조사 분석 토론의 보수 쪽 패널로 나와 특유의 토론 실력으로 다시 여론조사 2등을 먹는 성과를 이뤄냈다.# 몇몇 지지자들은 유승민이 할 수 있는 컨텐츠가 무수히 많은 만큼 이 기세를 몰아서 자체 컨텐츠로 유튜브를 활성화하여 지지율 떡상의 기회를 노리기를 바라지만 본인이 유튜브에 대해 큰 생각이 없는지 예전처럼 방송 활동하면서 언급한 내용들만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4.4. 상대적으로 느린 이슈 선점
홍준표가 윤석열과 이준석의 갈등 당시 미리 이준석을 지지하고 여명숙 교수와 문성호 당당위 대표를 영입하고 캠프를 꾸릴 동안 늦게서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처럼 홍준표에 비해 이슈 선점이 느리고 임팩트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가 있다. 홍준표가 2030 남성 지지층이 많은 이준석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여명숙, 문성호를 영입하고 나서 뒤늦게 홍준연을 영입한다던가 하는 등 느린 모습을 보여 윤석열의 2030 지지율 중 일부만 흡수했다.[20]4.5. 수도권 및 험지에서의 정치경험 부족
유승민 본인은 항상 중도확장성을 강조하며, 책임감 있는 정치를 하기 위해 특정 세력의 텃밭이 아닌 수도권 공략을 강조하지만 정작 이와 반대로 학창시절을 지낸 보수정당의 텃밭인 대구에서만 4선 의원을 한 데다 본인의 지역구를 두고 험지라고 자칭해 논란이 된 적도 있다.[21]1990년 3당 합당 이후엔 민주당계 정당 후보로 정치적 고향이자 험지인 부산에서만 출마하여 계속 낙선함[22]으로써 바보 이미지까지 얻은 노무현 전 대통령[23][24], 송파구 갑 - 동대문구 을[25]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홍준표[26] 등과 비교해도 수도권과 험지 경험이 부족하다. 앞서 언급한 지역 내 기반이 있는 것은 역으로 보면 안방 챔피언이라는 것으로 수도권 내에서의 경험과 험지 부족은 향후 전국적인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될 수밖에 없다.
박정희 - 육영수 프리미엄을 달고 나온 박근혜가 영남권과 옥천 + 영동과 같은 정치적인 기반에서는 강세를 보이지만 수도권이나 대도시권에서 이명박에 비해 약세를 보였다. 이는 정치색 차이 때문일 수도 있지만 수도권에서의 선거를 경험한 이명박에 비해[27] 수도권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28]
한국 인구의 51~52%를 차지하고 다양한 집단이 있는데다 중도층이 많은 수도권에서 승리해야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수도권에서 경험이 부족하면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물론 텃밭에서 안정적인 지지세를 확보했기 때문에 험지나 경합지 후보를 지원할 수는 있지만, 수도권이나 경합지 후보에 비해 지역 이해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본인도 2022년 당시 8회 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 경기도지사 후보 경선에 도전했고 민심에서는 압도적이었지만, 본인의 약점인 당심에서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김은혜 후보에게 밀렸다. 더군다나 그렇게 해서 본선에 올라간 김은혜도 민주당의 김동연과 초접전 끝에 떨어졌다.[29] 이로 인해 수도권 경험을 쌓지는 못 했다.
22대 총선에서는 공천관리위원장으로부터 수원시 지역 출마[30]를 권유받았으나, 결국에는 공천받지 못했다고 훗날 밝혔다.# 만약에 수원시 정에 공천을 받았다면 부동산 문제로 유권자 성향의 보수화가 진행되던 광교신도시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상대 후보였던 김준혁이 막말 논란에 휩싸였던지라 당선 가능성이 있었으나[31],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4.6. 부족한 결단력
21대 총선 이후 허송세월만 보내며 정치적 공백기를 늘리고 있다는 것도 유승민의 약점이다.유승민은 새누리당 시절 박근혜와 각을 세우고 바른정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기존 보수와 거리를 두면서 차별화에 성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보수대통합 이후 이러한 경력이 오히려 배신자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유승민의 공백기를 늘리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른정당, 바른미래당 시절 내홍을 겪으며 탈당에 대해서 학을 뗐는지 국민의힘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하지만 당내 지지기반이 없는데 국민의힘 당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스스로의 활동범위를 좁히는 자충수로 다가왔고 이는 대권주자 유승민에게도 악영향으로 다가왔다.
특히, 22대 총선 국면에서 유승민의 부족한 결단력이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개혁신당 이준석의 당선이었다. 만약 이때 탈당 후 경기 수원 정처럼 여야 후보 모두 논란에 휩싸인 곳에 출마하여 대안으로서 선택받을 기회를 노리거나 하다못해 비례대표라도 앞순번을 받아서 원내 진입에 성공했다면 공백기를 끊내고 대권주자로서 다시 달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국민의힘에 남았고, 이후 국민의힘에게 험지가 된 수도권 공천조차 받지 못하면서 다른 후보 유세밖에 할 수 없었다.
두번의 당대표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유력한 당대표 후보로 평가되었지만 윤한갈등 정국을 거치며 당 내 지형 변화를 가만히 관망만 하다가 결국 비윤계 유력 주자 포지션마저 한동훈에게 빼앗기면서 전당대회에 두차례 모두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이쯤되면 지는 것이 두려워서 나서지 않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인데, 대권주자들 대다수가 때로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면서[32] 자신의 인지도와 국민적 지지기반을 다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과감한 판단이 필요한 때이다. 이대로 21대 대선 국면에 들어가도 당내 기반도 없는 유승민이 국민적 지지도조차 없다면 국민의힘 당원 누가 대통령 후보로 유승민을 지지할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1] 홍준표도 대선 경선 토론에서 유승민이 정책 준비는 자신보다 훨씬 잘 됐다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유승민의 정책을 참고하겠다고 말했을 정도다.[2] 사실 지난 19대 대선에서도 유승민은 2030 청년들이 문재인 다음으로 많이 뽑았다. 즉 유승민은 당시부터 청년들에게 호감을 샀던 것이다.[3] 그래서 이재명이 국민의힘의 대선 주자들 가운데 유승민을 까다로운 상대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19대 대선에서도 민주당이 유승민을 가장 까다로운 상대들 중 하나라고 평하기도 했다.[4] 2015년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평가에서 중간, 최종 평가 모두 1등 최우수였다.[5] 게다가 이 당시에 유승민은 현역 의원 공천 + 텃밭 프리미엄 + 정권 레임덕으로 인한 여러가지 호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8%p 격차로 신승하였다. 상대가 아무리 경쟁력이 만만치 않는 이강철이었다고 해도 보수최강 텃밭인 TK에서는 꽤 충격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다.[6]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과의 갈등 때문이었는지 결국 새누리당 공천에서 배제되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7] 물론 안종범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에게 청탁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무죄로 판명났다. 애초에 이건 수시 교장추천과 같이 자격요건이 되는 자를 추천하는 것이고, 김어준을 비롯한 극성 좌파들이 뿌린 가짜뉴스다.[8] 여담으로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지난 2022년 8회 지방선거를 앞둔 경기도지사 경선에서 친윤인 김은혜에게 패한 뒤 윤석열 정부에서 반윤 성향을 드러내어 지나친 소신 때문이었는지 결국엔 제대로된 화합이 되지 못한 큰 리스크가 되고 있다.[9] 범보수로 분류되는 홍준표와 안철수는 2022년까지 1만원으로 올리겠다고 한 데 비해, 유승민은 문재인과 심상정처럼 2020년까지 1만원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단 최저임금의 경우 본인이 사과하고 다시 플랜을 구성하기로 했다. 여담으로, 실제로는 2024년까지도 최저시급 1만원은 달성되지 못했다가 2025년에서야 10,030원이 되어 최저임금 1만 원 시대를 열었다.[10] 이 부분은 한 지지자와의 문자에서 정책을 재검토하고 원전과 친환경 에너지가 공존하는 형태로 방향을 틀었다고 답변했다.[11] 유승민이 주장하는 것은 수사청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설치된 공수처와는 디테일이 다르다. #[12] 물론 20대 대선 공약에서는 중도좌파 성향의 공약이 완전히 수정되기는 했다.[13] "평소에 좀 잘하지, 선거 앞두고 박근혜 대표 잘 지키겠다 그럽니다. 여러분, 박근혜 대표 끝까지 지키고 아무리 위기가 오더라도 끝까지 지킬 사람 누굽니까 여러분!"[14] 그 이후로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친이계의 공천 학살로 인해 김무성은 불복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지만 의외로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승민은 공천을 받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친박계 대표주자 중 한명이자 내각의 경제부총리를 지낸 최경환 전 의원도 이 시기 보수텃밭 지역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았다. 그렇다고 의외의 상황까진 아니다.[15] 유승민과 같은 TK의 경북 의성 출신이다.[16]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선 당시 보수통합 당시 친박 측이 요구한 조건이 유승민의 불출마였기에 불가피했다는 평가도 있다. 실제로 유승민의 불출마 선언 이후 유승민을 그렇게 비난했던 친박 정치인인 김진태 등도 "이게 보수 우파가 바라던 모습이다"라며 고평가했다.[17] 기자회견도 없이 SNS에 달랑 글 하나만 올려 불출마를 알리는 모습을 보고 유승민답지 않다며 실망했다는 지지자들도 여럿 보이는 상황이다.#[18] 만약 이준석계에 속한 천하람이 얻은 득표율인 약 15%(정확히 14.98%)가 유승민한테 갔다면 대권주자로서 정치인생은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된다.[19] 경쟁자였던 나경원 또한 친윤의 압박에 못이겨 머지않아 불출마를 선언했다.[20] 윤석열의 논란으로 인해 유승민 역시 지지율을 챙겨갔지만 상대적으로 효과가 적은 편이었어서 윤석열에게 제대로 대적해볼 만한 인물은 홍준표가 독보적이었다.[21] 물론 그의 친구이자 동갑내기로 정병국 전 의원 역시 수도권에서만 계속 출마했을 뿐, 그것도 5선을 지낸 보수텃밭인 여주시·양평군이라 험지에서 정치경험은 없었다. 참고로 이전에는 선거구 명칭이 변경 및 조정 되었으나 특히 자신의 고향인 양평군은 그대로 유지되었다.[22] 이러한 노력으로 동료 문재인과 그 측근 김경수 등 PK지역에서 유수한 정치인을 길러냈고, PK 중 창원(성산구 한정), 김해, 양산, 거제, 서부산 등 민주당이 해볼만한 지역을 여럿 만들었다. 그래서 3당 합당 이후 보수정당의 텃밭이 된 PK를 다시 접전지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23] 동구 - 부산광역시장 - 북구·강서구 을[24] 심지어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 불리는 종로구에 출마하여 결국엔 당선되어 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25] 과거 1988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보수텃밭 지역으로 유명했지만 2012년 19대 총선부터 완전히 민주당 텃밭이 되었다.[26] 2020년 21대 총선에서 공천 불복하여 처음으로 보수정당의 텃밭이자 학창시절을 보낸 대구 수성구 을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로 8회 지선에서 대구광역시장 자리로 오르기까지 하여 민선 최초로 복수 광역자치단체장이란 타이틀을 얻었다.[27] 심지어 민주당의 강세로 불리는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 불리는 종로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28] 유승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동구 을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경권에서 밀리다보니 오히려 더 불리할 수도 있다.[29] 사실 개표 초반부터 완료까지 워낙 접전이었던만큼 불과 0.15%p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게다가 역대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가장 적은 격차라 일명 초박빙으로 불리는 승부였다.[30] 어느 지역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31] 실제로 수원시 정은 김준혁, 이수정의 표차가 2377표(1.73%)로 박빙이었고 공천받은 이수정 후보도 김건희 여사 디올백 옹호 발언, 875원 대파 논란을 옹호하기 위한 대파 격파쇼 등으로 김준혁 못지 않게 비호감을 잔뜩 쌓았던지라 양 후보의 표차보다 무효표(4969표)가 더 많이 나왔다. 즉, 이수정이 아닌 다른 후보를 공천하고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선거전략을 취했다면 국민의힘이 이길 수도 있었다.[32] 당장 비윤계의 유력 주자로 부상한 한동훈 역시 김기현 체제 시절 개헌저지선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하며 몸고생을 해가며 총선을 지휘하여 개헌 저지선을 살려줬다는 점에서 총선에서 참패한 비대위원장임에도 불구하고 지지층들과 당원들이 국민의힘 4차 전당대회에서 63%라는 큰 득표율로 한동훈을 정식 당 대표로 밀어주었고 총선 참패로 위기에 몰린 정치적 입지를 3개월 만에 회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