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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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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기3. 배경4. 특징
4.1. 전국칠웅4.2. 사상십이제후(泗上十二諸侯)4.3. 기타 소국
5. 인물6. 관련 창작물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전국시대(戰國時代, Warring States Period)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후반부로, 전한의 학자인 유향(劉向)이 저술한 역사서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2. 시기

전국시대의 시작 기준은 역사가마다 조금씩 다르다. 사마천은 《사기》 중 <6국 연표>(전국시대의 연표)에서 그 시작점을 기원전 476년 진(秦)나라의 군위에 여공공이 즉위한 시점으로 정했다.

진(秦)나라 여공공의 치세 기간 중인 기원전 453년경에 춘추오패 중 하나인 진(晉)나라에서 유력 호족인 조간자, 위환자, 한강자(韓康子)가 연합하여 가장 강한 호족인 지백을 공격해 죽이고 지씨 일족을 멸망시키는 내전이 벌어졌다. 내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晉)나라에서 여러 유력가문이 진나라를 등지면서 한(韓)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세 개 국가로 나뉘어 독립하였다.

사마천은 통일왕조인 진(秦)나라를 기준으로 하여, 이 사건이 발생할 당시 진(秦)나라의 군주인 여공공의 즉위년도를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정의한 것이다. 북송때의 사마광도 《자치통감》에서 이 사건을 기준으로 잡았다. 사마광은 지백의 멸문보다 조금 뒤인 기원전 403년 진(晉)나라의 3경(卿)이 주나라의 위열왕으로부터 제후로 인정받아 한(韓)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 삼국을 세운 시점을 전국시대의 시작점으로 보았다.

다른 견해로는 제(齊)나라의 국성(國姓)이 강(姜)성 여씨에서 규성 전(田)씨로 교체된 연도를 기준으로 하거나, 오(吳)나라의 멸망을 기준으로 하거나 동주 고왕이 즉위한 때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3. 배경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지배자 가문의 교체나 멸망인데 이는 춘추시대 동주의 천자와 제후의 관계를 알 필요가 있다.

기존에 중국을 실효지배하던 제국인 주나라는 이민족 견융의 침공에 크게 패퇴하고 유왕마저 전사하며 기존 수도인 호경을 버리고 낙읍으로 천도해야 했다. 이 시기를 흔히 '동주'라고 부르며, 수도도, 병사도, 왕도 잃은 시점에서 동주는 이 시점에서 기존의 제국으로서의 권위를 사실상 상실했으나, 제후국간의 견제와 오랜 시간 이어진 주나라의 역사적&종교적 권위, 오랑캐에 대한 위기감 등의 요인 덕분에 찬밥 취급[1]에 가깝긴 해도 형식상으로나마 제후국들이 주나라를 상국으로 대하는 기조는 남아 있었으며[2] 이 시기를 춘추시대라 부른다.

춘추시대까지는 아직 형식상으로나마 주나라의 권위를 존중했으며, 이 때문에 모든 제후의 임명권은 주나라 천자의 고유한 권한이었고, 제후가 다른 제후를 합병 등으로 몰아내는 일은 강력한 제후인 춘추오패도 할 수 없는, 권한 밖의 일로 봤다. 때문에 춘추시대에 벌어진 전쟁으로 나라가 멸망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으며, 약소국의 멸망조차 주나라 황실에 일일히 보고하였다.

하지만 기원전 400년경부터 제후가 천자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주나라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백 년 전부터 이런 제후의 탈선을 통제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고, 춘추시대였다면 다른 나라의 제후가 군사를 일으켜 통제했겠지만 이 시점부터는 그런 움직임도 없었다. 결국 주나라 천자는 자신의 권한을 침범한 사람들을 새로운 제후로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항복 선언을 했다. 결국 권위라는 땜질마저도 부서지면서 주나라 봉건제국은 사실상 붕괴했다.[3]

이때문에 각국은 천자를 지칭하는 말인 왕을 칭하며,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행세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44년 위나라가 스스로 칭왕하고 동주 천자의 권위에 대항하기 위해 옛 하동땅의 하(夏)나라 정통성을 주장하여 하왕을 칭하면서 송, 위(衛), 정, 노 같은 속국들을 이끌고 동주 천자의 회맹에 참석했다. 그리고 같이 삼가분진을 이끌었던 한(韓)나라를 공격했는데 한나라가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손빈이 위나라를 대파하고 태자까지 죽여버렸다. 이후 피냄새를 맡고 몰려온 하이에나들마냥 조나라와 진나라까지 위나라를 협공하기 시작했으며, 그렇게 삼가분진 이후 위나라가 넓혔던 황하 서쪽 땅을 모두 날려버리고 옛 진(晉)-진(秦) 국경까지 되돌아가자 위나라는 외교정책을 전면 수정하여, 기원전 334년에 한나라와 기타 국가들을 데리고 제나라와 서주에서 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위나라 왕이 제나라 국군을 왕으로 인정하는 '서주상왕(徐州相王)'이 일어났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제나라와 진나라의 친선관계가 깊어지니 기원전 323년엔 삼진과 연나라, 중산국을 끼워서 서로 왕을 칭하자는 '오국상왕(五國相王)'을 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각국이 너도나도 칭왕하면서, 안 그래도 낙읍 천도 후부터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제후들이 완전히 독립국이 되어 다른 독립국과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을 벌였다. 당연히 주나라 천자의 권위는 땅바닥을 뚫고 맨틀 바닥까지 떨어졌다. 당장 조공 한번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제후보다도 궁핍하게 생활했고, 통치권은 수도인 낙읍(뤄양) 주변에서만 효력이 미쳤지 다른 제후에게는 권위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전국시대는 사마광의 말처럼 천하는 지혜와 힘으로 서로 자라게 되었고, 드디어 성인의 후예들로 제후가 된 자들은 사직이 무너지는 시대가 되었다.

4. 특징

당신은 병법도 모르고 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구려. 오나라의 간장검은 말과 소를 토막내고 그릇을 자를 수 있으나 기둥에다 부딪히면 세 동강이 나고 바위에다 내려치면 백 조각으로 박살이 나는데, 지금 3만의 군대로 강한 나라의 군대와 맞선다면 칼로 기둥이나 바위를 치는 것과 같소. 옛날에는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 갈라져 있어 아무리 큰 성이라고 해도 둘레 300장에 인구 3,000호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3만의 병력도 충분했소. 하지만 지금은 일곱 강국만이 남아서 수십만 병력을 동원할 수가 있게 되었소. 제나라는 20만 병력으로 초나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5년이나 걸렸고 조나라도 20만 대군으로 중산국을 평정하는데 5년이 걸렸소. 지금 둘레는 1,000장에 인구는 1만 호인 큰 성들도 있는데 이런 성들은 3만의 군대로는 한 모퉁이도 포위할 수 없고 야전을 치르기에도 역부족이오.

전국책, 조사, 전단의 주장을 반박하며[4]

시대적인 상황도 춘추시대와 달랐는데 소규모 귀족 중심의 전차전 방식이었던 전쟁의 양상이 대규모 농민 중심의 보병전으로 바뀌면서 국가 단위의 총력전 양상으로 전쟁의 패러다임이 변화했다. 이런 큰 비용과 희생을 치르면서 단순히 제후 세습이나 하는 자잘한 수확으로는 전쟁의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고, 마침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주나라의 눈치 볼 일도 없어지면서, 결국 어느 한 국가를 멸망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국가의 사활을 건 전쟁이 200년 내내 벌어졌다. 결국 국가들은 국력을 키우기 위해 과거 봉건질서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었던 주변 소국을 합병해 나갔으며, 이런 치열한 전란속에서 연(燕)나라, 조(趙)나라, 제(齊)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 초(楚)나라, 진(秦)나라 7개국만이 실질적으로 살아남았다.[5] 그래서 역사는 이들을 전국칠웅이라 불렀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존 패권국이던 주나라의 약화가 계기가 되었단 점에서 앞선 춘추시대와 합쳐서 춘추전국시대라 부르기도 하며 이 시기 역시 온갖 권모술수와 피 튀기는 전쟁이 난무하는 군웅할거의 시대였으며, 수많은 인재들과 인간 말종들이 등장하여 다양한 인간군상과 시대의 혼란상을 선보이던 그야말로 난세였다.

결국 이 난장판은 상앙의 변법 이래로 전국칠웅 중 가장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자랑했던 진(秦)나라에 의해 종결되었다.

한편 전국시대에 형성된 고대 중원인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중시 가치는 전한 말기까지 뚜렷하게 이어졌다.

4.1. 전국칠웅

4.2. 사상십이제후(泗上十二諸侯)

4.3. 기타 소국

5.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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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창작물

7. 관련 문서



[1] 애초에 견융의 침공 전부터 여러 사건사고와 제후국의 성장에 따라 주나라의 권위는 점진적으로 약해지고 있었고 견융에게 대패한 것이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 시기에 형식상 주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면서도, 약소국이 된 동주를 따르기 싫다는 이유로 제후국중 유력자가 동주 대신 주도권을 잡는 패자(覇者)라는 개념이 생겨난다.[2] 실제로 초나라는 중원과 하등 상관도 없었음에도 자신들의 직위를 주나라가 봉해준 것이라며 정통성을 주장하려 했고, 오나라와 월나라 또한 왕실을 제외하면 주나라와 아예 연관이 없는 수준이었음에도 패자가 되었다.[3]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왕호의 사용인데 춘추시대만 해도 왕호를 사용하는 나라는 단 4개국이었다. 그나마도 당연히 원래부터 쓰던 주나라를 제외하면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가 왕호를 사용했는데 이들 국가는 중원 국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전국시대로 접어들자 적당히 강한 나라들, 예를 들면 전국칠웅은 모두 예외없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송나라처럼 전국칠웅에 들 정도는 아니어도 적당히 세력이 있다면 역시 왕호를 칭했다. 다시 말해 춘추시대까지는 동주 왕실의 권위가 미약하게나마 살아있어 힘 있는 나라도(중원에 속하지 않는 초, 오, 월을 제외하면) 감히 왕호를 칭하지 못하고 패자로 만족했으나, 전국시대에 이르자 그 미약한 권위마저 사라진 것이다.[4] 전국시대의 차원이 달라진 동원능력을 사례를 들어 잘 비유한 일화다.[5] 자세히 따져보면 이 200년 사이에도 여러 약소국들이 등장하고 사라지길 반복하긴 했으나 대부분 저 7국중 어느 나라의 괴뢰국이거나 국가를 자칭하다가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사라진게 부지기수였다.[A] 중원의 천자였던 주나라가 이 시대에는 동서분할되었다.[A] [8] 소국으로 표시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월왕 예까지는 강대국이었고, 월왕 예 말엽에야 쇠락하기 시작했다. 수도를 낭야에서 고소로 옮긴 기원전 378년을 본격적인 쇠락의 시작점으로 본다면 적어도 이때는 전국시대 초기이기라도 했고, 그러고도 수십 년을 버티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