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06:00:06

살리카법

종법제에서 넘어옴
파일:Document_Protect.svg   편집 보호된 문서입니다.
문서의
ACL 탭
을 확인하세요.


1. 개요2. 살리족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3. 사례4. 비교: 동아시아의 종법제(宗法制)5. 폐지

1. 개요

살리카법(Lex Salica, Salic Law)은 메로베우스 왕조 시대 프랑크 왕국의 법전이다. 살리(Salic)라는 표현은 당시 프랑크족 중에서 주도적 부족이었던 '살리족'에서[1] 나왔다. 클로비스 1세 말년에 만들어진 법전으로 게르만족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이어서 게르만적 관념이 많이 들어가 있다. 라틴어프랑스어의 중간 단계 언어로 쓰였으며, 프랑크족의 원래 언어인 고대 네덜란드어로도 적혀있어서 네덜란드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법전 자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면서 '여성의 왕위 계승'이나 '여계 왕손'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를 통틀어 가리키는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즉, 여성의 왕위 즉위 금지법을 뜻하기도 한다.

2. 살리족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

살리카법의 어원이 프랑크 부족의 일원이었던 "살리족"이라는 견해는 19세기까지 정설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20세기 초부터 살리카법의 어원, 더 나아가 살리족의 실존 여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전통적 견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가 조시무스(Zosimus)가 저술한 『새역사(Nova historia)』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조시무스는 해당 저서에서 "Lex Salica(살리카법)"에서의 "Sal-"은 서부 지역 프랑크족인 살리족을 가리키며, 살리카법이 살리족의 부족법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프랑크족엔 살리족과 리푸아리아족이 있었는데, 이후 살리족이 리푸아리아족을 흡수하면서 살리족의 법이 프랑크의 법이 된 것이라고 저술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 견해에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은 독일의 역사학자 지몬 슈타인(Simon Stein)으로, 그는 1926년, "살리카"라는 단어는 특정 부족과 관계가 없으며, 라틴어로 "영주가 직접 다스리는 영지"를 뜻하는 "Terra Salica"에서 유래한, "영주지배관계"의 의미를 내포한 형용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독일의 중세 역사가 마티아스 슈프링어(Matthias Springer)는 1997년 논문 『Gab es ein Volk der Salier?(살리족은 과연 존재했는가?)』를 발표하며 살리족의 실존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살리카"는 "공통의, 공유의"라는 의미를 지닌 고대 게르만어 "Saljon"와 연관이 있을 수 있으며, 이 단어가 메로베우스 왕조 시기에 "영주지배관계"로 의미가 변화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살리족과 리푸아리아족이 등장하는 사료는 조시무스의 저서뿐이며 살리카족을 부족법으로 갖추고 있던 살리족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살리카법이 프랑크 부족의 일원이었던 살리족의 부족법이라는 전통적 견해는 살리카법이 부족법이 아닌 프랑크족의 법의 일부를 지칭한다는 근현대 역사가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고, 이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즉 살리족이 없었다고 현재로서 단정할 수는 없다는 뜻이고, 실제로 영어 위키백과와 프랑스어 위키백과 모두 살리 프랑크족의 존재를 일단은 인정한다.

3. 사례

살리카 법의 민법 규정 가운데 '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있다. 그리고 프랑크족 전통에 따르면 작위토지에 붙어 다니는 것이었다. 이 얘기대로라면 '딸은 작위를 상속받을 수 없다'. 이는 토지의 주인이 그 토지에서 얻은 수입을 바탕으로 자신의 무장을 갖추고 병력을 부양하며 전시에 그 병력을 지휘해 전투에 참여해야 했기에, 그러니까 군역을 치러야 했기에 군역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여성의 토지 및 작위 계승을 막은 것인데, 프랑크 왕국 메로비우스 왕조 시대에 이미 모계를 통한 계승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조항은 만들어진 지 100년도 안 지나서 사문화된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딸이 토지를 상속받고, 병역사위나 외손자에게 맡길 수 있는데다, 살리카법에서도 외손의 권리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외손의 나이가 어리면, 딸이 그 어머니된 자격으로 후견인이 되어 토지를 관리할 수도 있었다. 토지와 작위의 주인된 입장에서도 조카형제, 또는 더 먼 친척보다는 딸에게 땅을 주고 싶었을 테니까.

즉, 살리카 법을 굳이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왕에게 왕자는 없고 왕녀만 있어서 왕이 사위를 골라 왕녀와 결혼시킬 경우, 딸이 여왕으로 즉위하고 사위가 국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위가 아내의 계승권을 통해 왕으로 즉위하고 딸은 왕비가 되는 것이다. 다만 엄밀하게 둘을 구별하기는 어려운데, 이런 경우에는 보통 부부의 공동 통치에 가까운 형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구별하기 편하자고 여왕과 왕비를 구별해 쓴 거지 어차피 유럽의 언어로는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2] 왕 이외의 하위 작위들 역시 마찬가지로, 공작부인이나 백작부인과 여공작, 또는 여백작 모두 표기는 똑같다. 물론 굳이 구분을 한다면 배우자를 의미하는 Consort를 붙인다.

그러다 1316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왕 루이 10세가 사망하고 그의 유복자 장 1세마저 5일 만에 죽자 문제가 시작되었다.[3] 루이 10세의 동생이자 장 1세의 삼촌이었던 섭정 필리프는 즉시 국왕 필리프 5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루이 10세의 딸 이 살아있었기에 그의 정통성은 떨어졌다.

이에 1317년 랭스에서 그는 서둘러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 도유식을 행한 후 귀족, 고위 성직자, 파리 대학박사, 법학자들과 회의를 진행했다. 그들은 파리 대학교를 뒤져 먼지투성이 법전 속에서 이 조항을 발굴했고 이 조항을 확대 해석하여 모계를 통한 왕위 계승권을 폐지했다. 즉, 그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잔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잔은 즉위하지 못했고 그 뒤로도 부계를 통한 계승이 내내 이어졌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여왕이 즉위하지 못했다. 대신 잔은 샤를 4세 사망 후 살리카 법이 미치지 않는 나바라 왕국의 여왕 호아나 2세가 되었다.[4]

이 조항으로 훗날 발루아의 필리프가 부계 혈통을 통해 즉위하여 발루아 왕조를 열게 되었으며, 부르봉 왕조에서는 루이 16세프랑스 대혁명 와중 사망한 이후 루이 18세, 샤를 10세가 유일하게 남은 루이 16세의 자식이었던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 대신 즉위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필리프 5세의 이 해석은 확대 해석이다. 살리카 법에서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지만, 외손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만약 외손도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었다면 외손자의 자격으로 토지와 작위를 상속받은 전력이 있는 카페 왕조나 발루아 왕조의 정통성도 상당히 취약해진다. 카페 왕조와 발루아 왕조의 왕위는 부계 혈통으로 확보한 것이지만, 모든 토지와 작위를 부계 상속으로 얻진 않았다.

발루아 왕조는 발루아 영지와 작위부터 원래 외조부의 소유였다. 무엇보다 프랑스의 왕조들은 왕자들을 유력 영주들의 상속녀와 결혼시켜 영토를 넓혀왔다. 게다가 필리프 5세는 딸만 4명을 낳고 유일한 아들은 1살에 죽어버려서 본인이 확대해석한 살리카 법 때문에 자녀들이 왕위 계승에 실패했다. 만약 정석적으로 올라왔다면 장성한 딸이 여왕이 될 수도 있었으니 완전히 자업자득. 법을 억지로 바꿔가면서까지 왕위를 빼앗았으나 딸을 넷이나 낳은 후에야 어렵게 얻은 아들마저 아기일때 죽어버렸으니 결국 본인 업보를 본인이 돌려받은 꼴이 되었다.

어쨌건 필리프 5세의 이 해석은 시간이 흐르며 다른 나라에도 퍼졌고, 그 결과 온갖 전쟁이 벌어졌다. 당장 필리프 5세 본인부터가 아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딸들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자 동생이 샤를 4세로 즉위했고, 샤를 4세도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카페 왕조 직계가 끝나고 방계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샤를 4세의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 루이 10세의 딸 잔이 있었지만 이 조항으로 왕위 계승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필리프 4세의 조카(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필리프 6세, 필리프 4세의 외손자(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의 아들) 잉글랜드 왕국의 왕 에드워드 3세, 필리프 4세의 또 다른 조카(필리프 4세의 동생 루이 데브뢰의 아들) 나바라의 왕 펠리페 3세[5]가 왕위를 주장했다. 결국 필리프 6세가 발루아 왕조를 개창하고, 에드워드 3세는 이를 인정했지만 나중에 필리프가 스코틀랜드의 해방을 요구하고 가스코뉴를 침공하면서 백년전쟁이 일어나자 필리프에게 보내는 경고 겸 도발로 진정한 프랑스 왕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사벨이 필리프 4세의 딸이었으니 모계 계승을 주장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확대해석한 살리카법 때문에 발발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포함한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통적으로 살리카법을 따르던 가문인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기존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남성인 카를 6세는 아들을 낳는 데에 실패했기에 결국 모계를 통해 토지와 작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살리카법 때문에 발발했다면 다른 국가들은 모계를 통한 토지와 작위 계승 그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지만, 실제로는 작센 선제후국이나 바이에른 선제후국 등 다른 국가들도 모계를 통한 계승 자체에는 동의했다.

실제로 쟁점이 된 부분은 계승 서열이었는데, 카를 6세는 본인의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토지와 작위를 물려주고 싶어했으나 문제는 카를 6세에게 요제프 1세라는 형이 있었다는 점이다. 요제프 1세는 아들 없이 딸만 두어서 살리카법에 따라 남동생인 카를 6세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카를 6세는 남성이었으므로 살리카법 내에서 요제프 1세의 딸들보다 계승 서열이 높았는데, 문제는 카를 6세의 딸들까지 요제프 1세의 딸들보다 계승 서열이 높은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요제프 1세의 딸들은 장남의 딸이고 카를 6세의 딸들은 차남의 딸이었으므로 요제프 1세의 딸들이 지닌 계승권이 카를 6세의 딸들이 지닌 계승권보다 우위에 있었는데, 카를 6세는 이를 1713년 국사조칙을 통해 뒤바꿨다. 원래대로라면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와 결혼한 요제프 1세의 장녀 마리아 요제파나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와 결혼한 요제프 1세의 차녀 마리아 아말리아에게 토지와 작위가 상속되었을 것이므로 다른 국가들은 당연히 이에 반발했다. 즉 살리카법에서 준 살리카법으로의 전환과 별개로[6] 여성 후계자들의 계승 서열을 임의로 바꾼 점이 불씨가 되어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살리카 법은 프랑크 왕국의 법률이므로 유럽 국가라도 그 기원이 다른 나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당장 백년 전쟁잉글랜드 왕국은 살리카 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백년 전쟁 이후로도 잉글랜드는 모계 계승[7]을 통해 왕위계승을 이어왔고, 왕녀들의 계승도 인정했다. 실제로 대중들에게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와 빅토리아 여왕을 포함해 여왕들 대부분이 바로 잉글랜드,영국 왕들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 살리카법을 적용하지 않았지만 살리카법을 쓰던 왕가와 같은 계통의 왕조가 들어서거나, 왕위 계승 원칙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살리카법을 차용하는 등의 이유로 살리카 법이 적용되기 시작한 나라들도 있다.

스페인의 경우 프랑크 왕국에서 기원한 국가가 아니기에 본래는 살리카 법이 없었다가 보르본 왕조가 왕위를 차지하면서 살리카 법이 도입되었다.[8] 이후 살리카 법을 두고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지는데, 이를 '카를리스타 내전'이라 한다. 페르난도 7세가 아들을 얻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딸에게 왕위를 물려줄 계획으로 살리카 법을 폐지하였고, 이에 따라 페르난도 7세의 사후 그 장녀가 이사벨 2세로 즉위하자 살리카 법에 따른 계승권자였던 삼촌 카를로스가 왕을 자칭한 것인데, 카를리스타 내전은 여러 번 있었고 전부 다 카를리스타들이 졌지만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유지했고, 훗날 스페인 내전에서 우파들의 주요 세력으로 참전했다.

러시아 제국도 처음에는 살리카 법이 적용되지 않았지만[9] 로마노프 왕조의 여제 시대가 끝나고 표트르 3세의 아들 파벨 1세가 즉위한 이후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 표트르 3세는 러시아의 황제이지만 살리카 법을 따르는 문화권인 독일계였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실상 아버지를 살해하여 황제가 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했던 파벨 1세는 아버지의 고국에 있던 살리카 법을 끌고와 1797년에 문서화시키면서 공식화했다.

한편, 영국하노버 왕조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하노버 왕국과의 동군연합이 끝났다. 영국은 아들 우선 상속법[10]을 채택하고 있었으나 하노버는 살리카 법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 이후 빅토리아의 숙부가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로 즉위했고 하노버 가문의 당주 자리 역시 그의 후손들이 이어가게 되었다.

살리카 법은 국가의 안정성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다. 일단 국토의 보존에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국내에 봉토가 주어지는 왕자들은 상속이 진행됨에 따라 영지가 해외로 유출되는 경우가 적은 데 비해 외국 왕가로 시집가는 공주들의 경우, 상속된 영토가 해외로 유출되는 문제가 생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봉신이자 부인인 아키텐 공작령의 상속녀 엘레오노르가 남편과 이혼하고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결혼하는 바람에 프랑스 왕보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땅을 더 많이 가지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유럽의 왕녀들은 대부분 귀천상혼을 고려하여 해외의 왕족들과 결혼하기 때문에 모계를 통한 상속을 택하면 외국인 남편이 왕이 되거나[11] 외국인 손자가 즉위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이 독일 하노버 가문으로 시집간 공주의 딸이 낳은 아들[12]이 영국 왕위를 계승했을 때 국왕이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 바가 있다. 이렇듯 외국인권력을 쥐는 것을 막고 왕조를 보존하기 위해 영국 메리 2세, 스페인 이사벨 2세처럼 국내의 왕족, 즉 같은 가문의 친척들과 여왕을 결혼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유럽 역사에서는 가끔 엄청나게 먼 촌수에서 계승자가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거의 대부분 살리카 법 때문이다. 프랑스 왕국에서도 나바르앙리 4세가 부계로는 21촌이 됨에도 왕국을 이어받아 부르봉 왕조의 기원이 되었고, 바이에른 선제후국에서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먼 부계 친척인 카를 테오도어가 영지를 이어받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5세'에서 이 프랑스의 살리카 법의 적용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In terram Salicam mulieres ne succedant:'
살리카 영지 상속 법전에 따르면
'No woman shall succeed in Salique land:'
여인은 살리카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
Which Salique land the French unjustly gloze to be the realm of France, and Pharamond, the founder of this law and female bar.
프랑스인들은 이 살리카 영지를 프랑스 왕국으로 자칭하고, 파라몬드, 이 법을 만든 자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Yet their own authors faithfully affirm that the land Salique is in Germany, between the floods of Sala and of Elbe;
허나, 법전의 저자들도 살리카 영지는 독일에 있고, 그 땅은 살라와 엘베강 사이에 있다라고 서술한다.
Where Charles the Great, having subdued the Saxons, there left behind and settled certain French;
카롤루스 대제가 작센족을 정벌하고, 프랑스인들을 정착시킬 때
Who, holding in disdain the German women for some dishonest manners of their life, establish'd then this law;
독일 여인들의 불결한 생활을 혐오하였으므로, 이 법을 적용했다.
To wit, no female Should be inheritrix in Salique land:
서문으로, 여성은 살리카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
Which Salique, as I said, 'twixt Elbe and Sala, is at this day in Germany call'd Meisen.
그 영지라 하면, 전에 말했듯이, 엘베강과 잘레강 사이에 있다. 현재는 독일의 마이센 지방이라 불린다.
Then doth it well appear that Salique law was not devised for the realm of France:
그러하면, 이 살리카 법은 프랑스 왕국 안의 적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Nor did the French possess the Salique land until four hundred one and twenty years after defunction of King Pharamond, idly supposed the founder of this law;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이 법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파라몬드 왕의 죽음으로부터 421년 후에나 이 살리카 영지를 점령했다.
Who died within the year of our redemption four hundred twenty-six;
그 왕은 426년 죽음을 맞았다.
And Charles the Great subdued the Saxons, and did seat the French beyond the river Sala, in the year eight hundred five.
그리고 카롤루스 대제가 작센족을 지배하고 프랑스인들을 살라강 너머로 이주시킨 것은 805년이었다.
Besides, their writers say, King Pepin, which deposed Childeric, did, as heir general, being descended of Blithild, which was daughter to King Clothair, make claim and title to the crown of France.
게다가 그쪽 서술자들에 의하면 피핀 왕이 힐드리히를 폐위시키고 프랑스 왕위를 주장할 때, 그는 클로타르 왕의 딸, 비틸드의 후손임을 주장했다.
Hugh Capet also, who usurped the crown of Charles the duke of Lorraine, sole heir male of the true line and stock of Charles the Great, to find his title with some shows of truth, 'through, in pure truth, it was corrupt and naught, convey'd himself as heir to the Lady Lingare, daughter to Charlemain, who was the son to Lewis the emperor, and Lewis the son of Charles the Great.
위그 카페가 카롤루스 대제의 진정한 남계 후손, 로렌의 공작 샤를의 왕위를 찬탈할 때, 그는 무의미하고 부정하지만, 진실을 말했다, 그는 자신이 바로 샤를메인의 딸 린가레의 후손, 즉 황제 루트비히의 외손, 카롤루스 대제의 증손자란 것이다.
Also King Lewis the Tenth, who was sole heir to the usurper Capet, could not keep quiet in his conscience, wearing the crown of France, till satisfied that fair Queen Isabel, his grandmother, was lineal of the Lady Ermengare, daughter to Charles the foresaid duke of Lorraine:
또한 그 찬탈자 카페의 후손, 루이 10세는, 그의 할머니 이사벨[13]이 로렌의 샤를의 딸 에르만가의 후손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 편하게 있지 못했다.
By the which marriage the line of Charles the Great was re-united to the crown of France.
바로 이 결혼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핏줄이 프랑스 왕위와 다시 합쳐졌다.
So that, as clear as is the summer's sun.
그러므로, 아침 태양처럼 분명한
King Pepin's title and Hugh Capet's claim, King Lewis his satisfaction, all appear to hold in right and title of the female:
피핀 왕의 작위와 위그 카페의 명분, 루이 왕의 후손임을, 모두 정당하게 여인의 작위를 인정한다.

4. 비교: 동아시아의 종법제(宗法制)

동아시아에서는 일명 '종법제'라는 원칙이 있다. 역대 중화제국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일본·베트남 등지에서 볼 수 있다. 부자 상속의 원칙이 같고, 고대의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여성의 왕위 계승 자체를 인정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유럽의 살리카 법과 매우 유사하다.[14]

그러나 유럽의 살리카 법은 종법제와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1. 남계혈족 한정
    종법제에서는 가문이 아니라 남계혈족을 더 중시한다는 점이 있다. 살리카 법으로는 사위나 외손자가 계승을 할 수도 있었지만, 종법제에서는 부계 혈통이 일치해야만 계승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아들이 없으면 딸이 아니라 동생이나 조카가 지위를 물려받게 된다.[15] 살리카 법에서는 딸의 남편이나 아들이 간접적으로 상속을 받을 수 있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아예 상속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16]
  1. 인식과 순위
    계승에 대한 인식도 좀 달랐는데, 살리카 법에서의 상속이 '권리'로 취급되었다면, 종법제에서의 계승은 '의무'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살리카 법에서는 물려받는 당사자가 '상속 권리'를 포기할 수 있었지만,[17] 종법제에서는 원칙적으로 거부권이 없어서 순서를 무시하고 물려줄 수도 받아야 하는데 안 받을 수도 없었다. 후손으로서 조상의 보위를 잇는 것은 당연하다는 관념으로서, 엄밀히 말하면 군주의 보위는 본인이 아니라 창업군주의 소유로 취급했다. 한나라 애제총신동현에게 농담삼아 선양한다고 했을 때 대신인 왕굉이 "천하는 태조 황제의 것이지, 폐하의 소유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종묘를 계승한 몸으로서 자손에게 이를 물려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마십시오!"라는 직언을 남긴 사례나,[출처1] 동진간문제재상 왕탄지에게 후사를 맡기면서 어린 아들의 행실이 좋지 않을 시 찬탈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리자 왕탄지 본인이 기겁해 "나라는 선제원제의 나라이거늘 어찌 폐하께서 오로지 하려 하십니까?"라는 발언을 하며 조서를 찢으며 거부한 사례를[출처2] 통해[20][21] 이러한 관념을 알 수 있다.[22][23]
    또한, 순위에 관해서도 차이가 있었다. 두 법제 모두 적장자를 우선시하는 것은 동일하였다. 대체로 먼저 장자에게, 장자가 죽고 없으면 그 장자에게, 장자에게 자손이 없으면 차자가, …, 아들이 없으면 동생(이나 그 아들에게), …, 형제도 없으면 4촌에게 넘어가는 식이었으나, 종법제에서는 숙부나 종조부가 이어받는 역상속은 철저하게 막혀있었다. 더 나아가 형제나 4촌 형제가 이어받는 것까지 막은 사례도 좀 있었다. 왜냐면 제사 문제 때문에 계승받는 윗사람이 계승하는 아랫사람에게 절을 하는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서 계승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1. 결혼관계의 영향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 군주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무조건 일부일처를 해야만 했으므로 본처를 제외하면 다른 여자들은 전부 정부(情婦)로 취급되었으며, 살리카 법에서는 본처의 자식인 친생자만이 계승권을 오롯이 인정받고 사생아는 계승권이 부인되거나 제한적으로 승인되었다.[24][25]
    반면 종법제에서는 적자들의 뒷순서일 뿐 서자와 얼자, 심지어 사생아에게도 엄연히 계승 자격이 있었다. 물론 본처와 은 공식적으로 지위가 다르니만큼, 이런 경우 대부분 본처의 양자(봉사손)로 승적(承嫡)하는 형태였다.
  1. 대종과 소종의 구분
    마지막으로 종법제에서는 적장자로서 계속 대를 잇는 대종과 달리 다른 아들들은 한 급 낮은 소종이 되었으며, 그 결과 대를 거듭할수록 방계의 격이 떨어지게 되었다.[26] 그러나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부모의 신분은 자식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장자상속제가 정착한 경우에조차 신분만은 그대로 물려주었다. 후대로 가면서 봉건제도 해체되고 영지도 재산도 없는 귀족들이 많아졌으나 이들도 여전히 법적 신분은 귀족이라서 알량한 특권이나마 계속 누렸고,[27][28] 왕족의 경우 따로 작위와 영지를 받고 분가하는 게 아닌 한 여전히 왕족이었으며, 분가 후에도 방계로서 왕위계승권 자체는 보유하였다. 유럽 내에서 가장 비슷한 방식을 보인 것은 잉글랜드였는데, 이쪽도 왕족은 계속 왕족이었고, 귀족들은 작위보유자 및 계승자만 원래 신분을 유지하였지만, 차자 이하는 아버지 신분이 공작이든 백작이든 남작이든 간에 전부 동일하게 젠트리가 되었다는 점이 종법제와는 다르다.

5. 폐지

유럽에서는 20세기 들어 양성평등 사상의 확산과 함께 살리카 법은 점점 폐지된다. 현재 재위 중인 유럽 왕가들 가운데는 리히텐슈타인 공가만이 살리카 법을 꿋꿋이 유지 중이다.[29]

20세기 후반 들어 왕실의 살리카 법을 폐지한 나라는 다음과 같다. 준살리카 법이었던 왕실은 # 표시한다.
재위 중인 현대의 군주 가문들은 양성평등이라는 대의를 거스르기도 어렵고 의회국민들의 눈치도 봐야 하며, 왕좌라는 '확실한 인증장치'가 있기 때문에 절대적 맏이 상속제를 통한 모계 승계가 이루어져도 정체성 유지에 지장이 없다. 예전처럼 왕족끼리 결혼하느라 왕권이 현대 국가의 국경을 넘어다닐 일도 없는데다 살리카법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처럼 군주가 직접 병력을 데리고 참전할 것도 아니니. 오히려 영지나 작위를 잃은 옛 왕가나 옛날 귀족 집안이 악착같이 살리카법을 지키는 경우가 많은데, 살리카법 같은 전통 수호를 통하지 않으면 집안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런 집안들이 가문 계승법을 뜯어고쳐서 절대적 맏이 상속제나 아들 우선 장자상속제로 바꾸고 있다면, 아마 손이 귀해져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30]

그러나 유럽 외로 확대시켜 보면 일본 황실만은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리카법을 유지하고 있다.

[1] 후에 잘리어가로 이어진다.[2] 왕과 국서의 경우 왕은 King, 국서는 Prince로 위계를 구별하는 경우도 많기는 하지만 이런 경우들은 여왕의 즉위를 인정하는 국가에서 그 여왕의 부군(남편)이 너무 높은 권위를 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격이 낮은 호칭을 쓰게 하는 것이다. 즉 영어의 예로 설명하면 여왕과 왕비가 모두 Queen(Queen consort)인 것처럼 왕과 국서도 본래는 King(King consort)인 것이 언어적 이치에는 맞는데, King이라는 호칭이 가진 상징성과 권위가 너무 막대하다보니 의도적으로 이를 쓰지 않고 한 단계 낮은 Prince consort 호칭을 쓰게 하는 것.[3] 위그 카페로부터 루이 10세까지 11대는 부자계승이 이뤄졌다.[4] 사실 잔은 루이 10세의 첫 번째 부인인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부르고뉴가 간통죄로 살해당했기에 평생을 루이 10세의 딸이 아니라 마르그리트의 내연남 필리프 드 오네이의 사생아라는 의혹을 받은 것도 왕위 계승에서 밀리는 데에 한 몫을 했다.[5] 앞서 말한 루이 10세의 딸이자 나바라의 여왕 잔(호아나 2세)과 결혼했다.[6]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 다시 살리카법으로 바꾸었다.[7] 당장 튜더 왕조의 개창자 헨리 7세도 모친 마거릿 보퍼트(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증손녀)를 통해 잉글랜드 왕가의 피를 이었으며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통해 정통성을 확고히 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를 이은 잉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시조 제임스 1세는 증조할머니 마거릿 튜더(헨리 7세의 장녀), 하노버 왕조의 시조 조지 1세는 외할머니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제임스 1세의 장녀)를 통해 계승권을 인정받았다.[8]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누나 마리아 테레사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후사를 맡겼는데, 그가 하필이면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손자였다. 당시 프랑스와 신나게 전쟁을 벌이고 있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원수 빌럼 3세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왕 윌리엄 3세로 즉위)는 당연히 "이게 무슨 소리야!"하며 반대했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레오폴트 1세도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제치고 프랑스가 스페인을 물려받는 것에 반발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되,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등 부유한 이탈리아 영토는 오스트리아에 내어주고 이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프랑스의 왕위는 주장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었다.[9] 러시아의 경우 파벨 1세 때 살리카 법이 도입되기 이전까지는 서유럽과 달리 성문화된 황위 계승 규칙이 없었고 전임 황제가 후계자를 지명하는 지명제의 형태로 황위가 계승되었기에, 원래 이 부분에서는 개판 그 자체라서 볼테르가 점령제가 아니냐고 비웃을 정도였다. 실제로도 예카테리나 2세처럼 혈통과 관계없이 그냥 황후라는 이유로 황제가 된 사람도 있다.[10] 딸의 왕위 계승을 가능하게 하되 아들의 계승을 우선시하는 조항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헨리 1세 시기 윌리엄 1세의 부계 혈통이 아예 단절되어서 살리카 법을 적용하자니 윌리엄 1세의 직계가 아니니 모계 계승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플랜태저넷 왕조 때에 순수 살리카 법으로 전환하지 않은 이유는 혹시 모를 후계자 대비를 위해서도 있지만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게 없었다면 장미 전쟁요크 왕조가 왕위 싸움을 하게 될 명분이 없었고, 요크 왕조 이후의 튜더 왕조, 더 나아가 이후의 왕조도 성립이 되지 않으니 현재의 영국 왕조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가 없다. 현재는 폐지된 상태로, 절대적 맏이 상속제를 채택하고 있다.[11] 본래대로라면 왕녀가 여왕이 되고 남편은 그 배우자로서 국서가 되어야겠지만, 여성은 왕위에 적합하지 못하다고 여겨져 남편이 실질적 왕이 된 경우가 많다.[12] 조지 1세의 외할머니가 영국 제임스 1세의 장녀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이다.[13] 필리프 2세의 아내 이사벨 드 에노[14] 그리고 이 때문에 앙리 4세처럼 엄청나게 먼 부계 혈족이 왕위를 잇는 일이 간혹 나타난다는 점도 비슷하다. 비교할 만한 예시로 한국은 조선 고종, 중국은 송효종송이종의 사례가 있다.[15] 특히 국시격인 훈요 10조에서부터 형제 상속의 가능성을 대놓고 열어둔 고려는 이 사례가 아주 많았다.[16] 여군주에 대한 인식은 이쪽도 만만찮게 빡빡해서 중국당나라측천무후, 한국은 신라선덕여왕·진덕여왕·진성여왕 3명, 일본에서는 8명의 여성 천황이 있었다. 그러나 법적으로 여군주의 존재가 허용되었던 신라나 일본에서도 왕족의 근친혼 풍습 덕분에 아버지가 왕족이기는 했다. 중국의 측천무후는 선황의 황후일 뿐 황족이었던 것도 아니고 자신의 능력으로 제위를 '찬탈'한 것이라 좀 다른 사례.[17]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 콘스탄틴이 승계를 거부하고 손아랫동생 니콜라이에게 계승권을 넘긴 예가 있다.[출처1] 반고 저, 「영행전」, 『한서』 8.[출처2] 유의경 저, 「아량(雅量)」, 『세설신어(世說新語)』.[20] 아마도 유비와 제갈량의 예를 보고 한 짓으로 추측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비의 촉한은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기에 이런 말이 가능했던 것이고 사마씨의 나라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왕탄지가 역적으로 몰려 사방팔방에서 공격을 받아 죽었을 가능성이 거의 100%였다.[21] 한마디로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유비 자신의 권위로 황족이 아닌 제갈량을 황제 자리에 올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원래 촉한 자체가 한의 부흥을 명분으로 걸었으므로 유비 자신의 권위 + 한 부흥의 명분이라면 가장 이에 걸맞은 인재인 제갈량을 제위에 오르게 할 수도 있다는 말.[22] 극히 예외적으로 후주의 건국자인 곽위는 자기 아들들이 다 죽어서라지만 친조카를 놔두고 처조카인 시영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물론 이 때는 혼란스러운 5대 10국의 시대였고 시영이 워낙 인망이 높고 능력도 출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곽위는 처음부터 시영을 보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을 정도로 시영을 굳게 신뢰했다. 또한 이때는 중국사에서 특이하게 친자 이외에도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인재들을 양자로 거두어 친위세력을 만드는 관습이 존재했으므로 이런차원에서 입양된 측면도 있다. 즉 5대 10국 시대 자체가 입양에 관대했던 시대적 영향도 받은 것.[23] 같은 집안 내에서의 양위나 아예 왕조가 바뀌는 선양도 종종 일어나고는 했으나, 그리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며 그에 대한 인식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24] 처첩제가 아니므로, 서양에서는 서얼의 개념 자체가 없었다. 즉, 적자-서얼자가 아니라 친생자-사생아(혼외자)로 구분했다.[25] 윌리엄 1세의 결혼에 관한 일화로 보나 1세기 후 긴느-아르드르 백작가문의 사례로 볼 때, 생각보다 사생아는 공연한 존재이자 흠결이되 치명적이지는 않은 태생이었고, 분할상속제 하에서 심심찮게 권리 주장을 하기도 했던 듯하다. 다만, 윌리엄 1세의 사례처럼 사생아라도 상속자가 될 수는 있었으나 그렇게 성공적인 사례는 드문 편에 속했고, 윌리엄 1세도 나이가 충분히 차기 전까지 아버지의 신임, 충성스러운 봉신들과 주변 동맹자들의 도움, 그리고 자기 능력으로써 친족 경쟁자들을 물리쳐야 했다. 윌리엄 1세의 아들인 헨리 1세만 해도, 장남이 사고로 요절했는데 아들 자체는 많았으나 모두 사생아인 탓에 적녀 마틸다를 후계자로 지명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생아들은 헨리 1세나 프랑스 왕국 군주들, 그밖에 여러 영주들의 사례에서 보듯, 아버지들이 미리 영지를 수여하고 봉신으로 삼든가 교회의 주교 혹은 주임신부로 보내는 식으로 따로 재산을 챙겨주거나 성년이 되기 전까지 숙식과 교육을 책임져주고 독립하여 살 길을 찾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분가하는 사생아들은 자연히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다.[26] 왕족의 방계조차 먼 세대에는 서민까지 떨어질 수 있었다.[27] 물론 귀족신분이 밥 먹여주고 호강시켜주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한밑천 잡고자 떠도는 경우가 많았고, 그나마 가진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장자들도 농업 경영이든 상업 투자든 용병업이든 열심히 굴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곤궁한 귀족자재들의 삶을 잘 묘사한 문학작품으로 삼총사가 있는데, 사실 작중 주인공들 중 삼인방은 그나마 동류 집단 중에서는 장차 상속받거나 임명될 지위와 재산이 있어서 나중에 형편이 피는 축에 속한다. 여기서는 정말 가난한 귀족이었으나 결국에는 능력껏 출세하는 달타냥이 가장 적절한 예시이다.[28] 더 엄밀히 말하면, 삼총사 중 정말로 뭔가 지위나 재산이 있는 건 아토스 뿐이고, 포르토스와 아라미스 역시 가진 게 없는 건 달타냥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포르토스는 전부터 사귀던 돈 많은 과부와 결혼했고, 아라미스는 원래 신앙심이 높기도 해서 성직자가 되었으나, 달타냥은 그런 샛길도 없어서 총사대의 부총사 자리에 오른 것이다. 상술하듯, 이 모두 상속 가망성이 없는 귀족들의 전형적인 출세 방법이다.[29] 이 곳은 부계로만 따져도 왕위 계승 순위를 가진 사람이 50여 명이 넘기에 그닥 절실하지도 않고 국가의 거의 모든 시스템이 공작의 개인 재산으로 돌아가고 있기에 입헌군주제라 하더라도 공작의 의견이 너무 강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집안의 경우 신분이 약간 낮은 관계로 귀천상혼의 영향도 덜 받는 집안이라 당분간 살리카 법을 폐지할 정도로 절실하지 않다. 오히려 작은 국가라서 잘못 폐지했다간 국가에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고.[30] 또는 계승권을 가진 먼 친척이 있기는 한데, 계승권 분쟁이 있어서 가문 수장 자리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계승법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양시칠리아 왕가 카스트로 계통이나, 사보이아 가문 직계, 안할트 공가 아스카니아 가문이 이런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