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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2 22:35:29

태국/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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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국왕3. 입법4. 군부 쿠데타5. 2013년 시위 이후6. 2019년 총선 전후7. 2023년 총선 전후8. 사법9. 출처10. 관련 문서

1. 개요

태국의 정치 정보
부패인식지수 35점 2023년, 세계 108위
언론자유지수 55.24점 2023년, 세계 106위
민주주의지수 6.35점 2023년, 세계 63위

태국은 일단 형식적으로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다. 심지어 1932년 군부 쿠데타의 권한을 축소하고 아시아에서는 거의 선두급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나라다.

그러나 현실은 입헌군주제가 무색할 정도로 태국 국왕의 권위는 여전히 막강하며 형식상의 상·하원 양원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군부 쿠데타가 밥 먹듯 일어나 문민통제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단적으로 1932년부터 마지막 쿠데타가 일어났던 2014년까지 무려 19차례의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심지어 그 쿠데타이 묵인해주는 경우도 있어서 문제다.

게다가 1932년 이후 왕은 쿠데타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왕이 동의하지 않는 쿠데타는 무조건 효력을 잃어 실패로 끝났다. 상식적으로 군주제 국가에서의 쿠데타라면 당연히 왕실을 완전히 몰아낼 목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태국의 쿠데타는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든 케이스이다. 물론 다르게 보면 태국 국왕의 우상화가 북한김씨 왕조만큼이나 잘 이루어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1]

태국은 군부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여 실질적으로 정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국왕이 정부 승인을 거부하면 정권을 잃게 된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비유 대상을 찾아보기 매우 힘든 독특한 정치 체제이다. 2014년 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민간정부가 쫓겨나고 다시 군사독재 정부가 수립되었다. 육군 대원수라는 가 문민통제 따윈 개나 주고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총리가 되어 몇년간 통치했다.

이런 기득권층의 비민주적 횡포나 수탈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태국인들은 무서워서 입을 다물거나 '버스 요금, 수도 요금 따위를 면제해주면 그저 땡큐' 타령을 하며 정치에 관심을 끄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왕실과 정부는 불교계와 결탁하여 종교적으로 불교윤회 사상을 그들의 독재와 부정부패를 정당화하는데 악용하고 있어 현세에서 국민들의 저항의식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한 마디로 왕실, 군부, 불교계, 부자 중 일부 등 상당수가 하나로 유착하여 기득권층이 공고한 나라.

종합하자면 잦은 군부 쿠데타와 그 군부 쿠데타마저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태국 국왕에 대한 맹목적인 우상화 정책까지 더해져, 태국의 정치는 기형적이고 불안한 비민주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형식적 민주주의는 내세우고 있는지라 2020년대 들어 이런 군부나 왕실에 대한 비판 시위가 잦아지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은 왕실과 군부 정권 측으로부터 탄압받는 포지션이다.

이러다보니 태국 정치판은 군부 vs 반군부의 구도가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고, 2000년대 이후부턴 탁신 친나왓으로부터 시작된 친나왓 가문이 반군부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20여년동안 해왔다. 그러나 2023년 총선에서는 태국 국민들이 군부의 환멸에 더해 친나왓 가문에 대해서도 피로도가[2] 쌓였는지 태국인당 대신 피타 림짜른랏이라는 신인 정치인과 그의 당인 행동전진당을 무려 1당으로 크게 약진시켜주었다. 하지만 피타는 군부 측의 반발로 결국 총리에 임명되지 못했다.

2. 국왕

태국 국왕 문서 참조.

3. 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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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군부 쿠데타

쿠데타 이후 수십 년간 태국의 정치는 민주정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독재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국에서의 정권교체는 군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일단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해 정권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주정이 들어설때도 있지만 몇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훼방놓여지기 일쑤였다. 이원복 교수는 2006년에 지은 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서 의외로 태국 관료들과 기업인, 국민들은 군부 정권을 지지했다고 견해를 밝혔는데, 애당초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집권 동기를 내세웠기에 정권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았으며,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받은 것도 이에 한몫했다. 또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이 훌륭해도 일단 무한한 권력을 잡으면 결국엔 부정부패에 오염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때문에 군부 정권은 부패하며 각종 실책들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났고, 1973년 학생항쟁으로 타놈 정권이 쫓겨나면서 3년간 잠깐 민주정이 들어섰지만, 1975년 인도차이나 공산화를 계기로 이듬해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나고,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단체 등에게 학살당하는 참사가 벌어져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으나,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머리를 조아렸고 공산반군의 세도 다시 약화되었다.

전술한 이원복 교수 저서에서는 군부정권이 60년간 유지됐다는 식으로 서술됐지만, 실제로는 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내각의 비리를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독재 국가가 된것이다. 특히 수쩐다 장군이 자신이 했던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는 아율배반적인 행태를 보이자,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죽음까지 무릅쓰고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나중에가면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이에 대해 시민들의 편을 들어서면서 수쩐다도 견디지 못하고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섰고 태국은 엄연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토지개혁 부정사건이나 외환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상황이 영 좋지않게 돌아갔고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 총리가 취임한 이후 정부가 30밧 의료보험 등 하층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자[3] 왕가나 군부 등 보수파들이 크게 반발했고 결국 탁신이 해외순방 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태국 내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2006년 쿠데타 당시 군부의 성명문. 태국 국기가 양쪽으로 놓여있고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 왕비의 어진이 놓여있는것을 보면 왕가의 영향력을 알수 있다.

21세기 들어서도 쿠데타가 일어나 방송사가 자격 박탈되어 하루 아침에 방송이 중단되는 등의 사태가 벌어지는데도, 다수의 태국인들은 분노보단 조용히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태국인들의 정치관심은 총선 투표율을 항상 80%를 가볍게 넘는 수치를 자랑하나 갈등을 피하며 중도만을 추구하는 특유의 문화덕분에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알면서도 방관하곤 한다. 심지어 농담반 진담반 태국 정치에서 쿠데타는 태국의 전통이라고 덮어두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태국 정치는 쿠데타를 비롯해 특수성이 여러면에서 드러나는데, 반쿠데타 세력이 꾸준히 지목하는 태국 정치 부패의 핵심은 추밀원이다. 추밀원은 왕명에 따라 행동하는 특수 기구인데, 문제는 추밀원의 추밀원장이 과거 쿠데타로 유명했던 사람.

5. 2013년 시위 이후

상기한 대로 태국의 정국은 결코 안정적인 편이 못되므로, 2~3년마다 쿠데타 내지는 대규모 시위가 터지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버렸다. 2013년 12월 이후 대규모 시위가 산발적으로 진행 중이고 반군부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지상파 뉴스든 종편 뉴스든 시위 관련해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왜 저런 난리법석이 벌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짤막하게는 커녕 일언반구도 설명이 없다. 특히, 태국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며 탄압하는데다 나쁜 의미로 한국의 조중동에 해당하는 보수 언론인 '네이션'과 '방콕포스트'의 보도만 해외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아서, 제대로 된 실상을 태국 현지 밖에서 알기 어렵다.

시위의 발단은 이렇다.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는데, 거기에 탁신 전 총리의 이름이 올라가있었던 것. 당연히 민주당에서는 크게 반발했고, 방콕의 기득권층/중산층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사면령은 철회되었지만 민주당은 이 기세를 놓치지 않았고 반 탁신 시민들 또한 이에 호응해 반 정부 시위로 번지게 된다. 사실상 사면령부터 무리수였다고 볼 수 있다 -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불우한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와 기득권층의 반발을 한몸에 사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사익추구를 위해 권력을 마구잡이로 남용한 사람이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인물을 뜬금없이 '용서와 포용' 운운하면서 사면하려고 하였으니...게다가 잉락 총리는 탁신의 막내동생으로 해외 망명 중인 탁신이 바지사장으로 세웠다는 평을 들을 정도이니 더더욱 곱게 보일 리가 없다. 분명 자충수였던 셈.

잉락 총리의 두서 없는 BBC 인터뷰도 덤으로 까이고 있다.


물론 탁신 지지세력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 않아서 맞불 시위를 했다.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가 훨씬 많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부패고 뭐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다'라는 것. 실제로 탁신 이전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을 싸고 돌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 이는 큰 문제였다고 한다.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것은 우연이 아니다.

2013년 11월까지는 긴장이 고조되긴 했지만 나름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시위대가 정부 청사 등을 점거하고 총리가 군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등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12월 1일 결국 첫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반 탁신 시위에 참여했던 대학생 1명과 탁신 지지자 2명이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다. 시위가 발생한 지역의 대형 쇼핑몰, 대학 등이 전부 문을 닫았고, 정부는 시민들에게 집에서 나오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2013년 12월 1일, 일촉즉발의 분위기로 상황이 굉장히 혼란스럽게 돌아가고 있으나,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에 이르자 정부와 시위대가 휴전을 선언했다.

2014년 5월 7일,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2011년 타윈 플리안스리 전 국가안보위원회(NSC) 위원장을 경질한 것에 대해 태국 헌재에서 권력남용이라고 결정함에 따라 총리직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전부터 오빠인 탁신의 추방령을 풀려고 하다가 반대 세력들의 어그로를 잔뜩 얻은 지라, 이번 총리직 상실의 정치적 여파가 반(反)탁신파와 친 정부파의 권력투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대규모 시위가 당시 일어나고 있기도 했고...

결국 2014년 5월 20일, 군의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22일, 쿠데타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동안 쿠데타는 아니라고 잡아떼다가 태국 군부의 실질적 최고 실력자인 쁘라윳 짠오차 육군참모총장이 "우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22일에 공식적으로 선언한 정도고, 20일 계엄령 선포로 사실상 군부에 의한 민간정부 전복이 이미 이뤄진 상태였다. 이로써 정국 혼란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4]

당시 국왕은 쿠데타를 승인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으며, 예상대로 국왕은 쿠데타를 승인했다. 쁘라윳 육군참모총장이 임시 총리직을 차지했다. 또한 이 쿠데타의 배후에 국왕과 왕세자 간의 권력다툼 문제도 끼어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후, 대한민국 외교부는 태국 전 지역을 여행자제 단계로 여행제한등급 상향 조정하였다.#

1년이 지난 2015년 8월에도 총선은 없었고 기사에 따르면 2019년 3월까지 총선거가 없었다. 물론 그때까지, 계속, 쭉 쁘라윳 총리가 집권 연장을 해나갈 것이다. 그 와중에 30밧 의료보험 제도를 폐지하고 거액을 들여 잠수함을 구입하겠다고 하면서 어그로를 끌어댔고, 8월 17일 발생한 방콕 폭탄 테러도 쁘라윳 총리에 반대하는 세력의 소행이라는 주장과 쁘라윳 총리가 계엄령을 다시 내리기 위한 자작극이라는 주장으로 태국 정국을 더 혼미하게 만든바 있다. 여기에 더해 쿠데타와 군부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구금하는 등 엉망진창이다.

이번 쿠데타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경제를 망쳤다는 것도 포함되었는데, 정작 이번 쿠데타 정부는 경제를 더더욱 망친 것은 물론이거니와 별다른 대책도 제시하지 못 하고 있다.

2014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나서 헌법초안위원회(CDC)를 구성해 기존 헌법을 대체할 개헌안을 마련한다고 하지만 노골적인 군부의 정치개입 때문에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개헌의 내용은 현재 절반은 투표로 뽑히는 상원 전원을 군부가 임명하며, 상원에게 하원이 만드는 법에 대한 거부권을 주는 것이다. 군부가 만든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2016년 8월 7일에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기사 결국 61%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방법은 오랫동안 미얀마 군부가 써왔던 방법이라는 것. 라마 9세의 상태때문에 한동안 반포가 미루어지다 결국 2017년 4월 5일 라마 10세는 반포를 명한다.#

또, 라마 10세 즉위 이후 왕실모독 논란을 일으킨 인물기사를 게재한 책임을 물어 BBC의 태국어 서비스 BBC 타이를 제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 군부는 국가개혁조정회의(NRSA) 산하 언론 소위원회는 최근 이른바 '언론개혁법안'을 수립해 검토작업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져 언론의 자유 억압에 대해서 항의를 하고 있다.# 오늘도 태국 민주주의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이런 와중에 정치활동을 허용키로 했다.# 2019년 3월에는 총선도 실시하기는 했는데, 선거로 뽑는 하원과는 달리 상기한 개헌을 통해 상원 전원을 군부가 전원 지명할 수 있는데다 총리를 (사실상)하원에서만 뽑는 영국과 일본과는 달리, 양원의 협력으로 총리를 선출하게 되어 있어 사실상 눈가리고 아웅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 결국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현 집권 세력에 의한 장기 독재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관련 기사

6. 2019년 총선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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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020년에 반정부 시위가 늘어나면서 애니메이션, 영화 통해 목소리를 높이는 방법을 찾고 있다.# 고등학생들도 동참하고 있다.#

이에 젊은 층에서 군주제 개혁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2020년 9월 19일에는 2만여 명 가량의[5] 시민들이 모여 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6] 시위가 열렸다. 2월에는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던 야당 '퓨처포워드 당(FFP)'이 태국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면서 지지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7], 6월에는 8년 전 페라리로 교통경찰을 치어 죽이고 해외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재벌 3세가[8] 불기소처분을 받으며 자극된 시민들이 7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뒤 분위기가 달아올랐다고 한다.

2020년 10월에도 대규모 집회가 일어났다.# 반정부 집회가 계속되면서 정부가 방콕 대중교통을 폐쇄했다.# 2020년 10월 17일, 한국에서도 활동하는 2PM 멤버 닉쿤이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 방식을 반대하는 SNS 글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7. 2023년 총선 전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2023년 태국 총선거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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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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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국민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어제 말했고, 저는 당신이 저를 지지했든 지지하지 않았든 모두를 위한 총리가 될 준비가 돼 있습니다.
피타 림짜른랏 행동전진당 대표

2023년 5월 치러진 총선 결과, 군부정권에 등 돌린 대중들에 의해 민주파 야권의 압도적인 승리가 나왔으며, 특히 진보정당인 행동전진당이 기존 야권의 제1당을 차지해온 태국인당조차 제치고 총선 이전 51석 남짓하던 의석을 151석까지 끌어올리며 제1당을 차지해 대반전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평을 받았다. 최대도시인 방콕에서도 31석 중 무려 30석을 싹쓸이했다.

범민주 진영의 득표율이 70%를 상회할 정도라, 이번 선거로 태국인들은 군부가 물러나야 한다는 민심을 확실히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군부-왕당파의 정당이었던 인민국가권력당, 연합태국국가당 등은 태국 민주당을 겨우 합해도 정당 득표율 합 16.5%, 의석수 합 101석으로 사실상 참패했는데, 이미 군부가 지명하는 상원 250석을 장악한 상태에서 124석 이상만 먹으면 되는 승부에서도 패배하며 태국인들의 비토 여론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향후 관건은 총리 선출인데, 상원 꼼수로 군부가 소수정당을 구성할 가능성도 있지만 여전히 연정만 잘하면 범야권 정당에서 총리가 나오는 것도 불가능한건 아니다. 문젠 이 연정을 구성하는 것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니라는건데, 반군부 성향의 행동전진당, 태국인당, 태국 자유당, 타이 상 타이, 프라차찻당의 경우 이미 사실상 연정에 참여하는 것이 확실시 되었기 때문에 약 309석 정도는 이미 확보된 것이지만, 군부 세력의 농간으로 민주화 세력에서 총리를 내려면 376석이 필요한 상황에서 여전히 수치가 모자라 캐스팅보트격인 태국 자랑당 등의 합류가 필요한 상황이다. 허나 태국 자랑당은 5월 17일, 왕실모독죄 관련한 형법 112조를 수정 혹은 폐지하려는 세력과는 연정할 수 없다는, 사실상 피타 림짜른랏을 지지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해 향후 정국을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찌저찌해서 총리가 반군부 세력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진짜 관건은 이제부터라도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문민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다.

8. 사법

태국 형사법원, 태국 대법원, 태국 헌법재판소 문서 참조

9. 출처

10. 관련 문서


[1] 실제로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가 이를 비꼬기도 했다.[2] 부패 이미지나 반군부 포지션에 비해 불명확한 왕실(모독죄) 문제에 대한 애매한 스탠스 등.[3] 사실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이었고 정책도 포퓰리즘적인 면이 없진 않았지만, 분명히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혜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태국 내 탁신 지지파는 대부분이 이러한 하층민들이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시장 같은 인물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들도 딱히 탁신보다 부패면에서 낫다고 할 인물은 아니고(...) 탁신처럼 빈민층에게 딱히 당근을 내어주는 정책을 생각해낼 정도로 그리 영리(?)한 것도 아닌지라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정책을 펼쳤다. 애초에 탁신이 기업인 출신이니 당연지사. 그러나 탁신은 그간의 경제개발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덕택에 북부 지역은 태국이 상당히 산업화 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이나 농가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 것. 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지역에서 이슬람교의 저항을 무시하고 강경하게 진압을 나선다거나 하는 정책을 펼친 것도 있기 때문에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들통나고 탁신이 자신한테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이 겹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반탁신지역으로 돌아섰다.[4]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뒤엎는다고 해도 선거를 치르면 왕당파가 쪽수에서 밀리는 관계로 다시 탁신 진영으로 정권이 넘어가다 보니 왕당파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 과제인데, 해결을 못하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개헌을 통해 사실상 반대편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원천 차단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5] 경찰 당국의 추산. 주최 측 추산은 10만 명 가량이다.[6] 왕실 모독죄 철폐와 경제적 상황을 고려한 왕실 예산 편성, 왕실의 정치적 견해 표현 금지 등 전제군주제와 다름없던 현 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것이 골자다.[7] 당시 신미래당(미래전진당) 대표이자 기업가 타나톤 대표가 신생정당이던 신미래당의 총선 준비를 위해 본인의 돈을 정당에 빌려준 것이 정당법 위반이라 선관위에 꼬투리를 잡혔는데, 지지자들은 사실상 헌재가 반군부 세력에 재갈을 물린 것이라고 반발했다. 어찌됐든 해산되면서 다수의 퓨처포워드당 인사들은 이후 후술된 행동전진당으로 넘어간다.[8]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 오라윳 유위티야. 체포 당시 코카인 성분이 검출되기도 했지만 당국은 봐 주는 자세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