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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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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정부3. 입법부
3.1. 하원3.2. 상원
4. 사법부5. 선거6. 정당7. 역사
7.1. 독립 국가 건설7.2. 독재 정권과 민주화7.3. 2000년대 이후
7.3.1. 돌아온 마르코스 가문
8. 반군

1. 개요

파일:필리핀의회.jpg파일:피플파워.jpg
필리핀 의회 정기국회1986년 에드사 혁명
필리핀의 정치 정보
부패인식지수 34점 2023년, 세계 115위
언론자유지수 43.36점 2024년, 세계 134위[1]
민주주의지수 6.66점 2023년, 세계 53위

필리핀의 정치체제는 1935년에 제정되고 1987년에 마지막으로 개정된 필리핀 헌법(Konstitusyon ng Republika ng Pilipinas/Constitution of the Republic of the Philippines)에 기반한다.

필리핀은 대통령 중심제, 양원제를 채택하고, 삼권분립에 기반한 민주주의 정부를 지향한다. 직선제로 선출되는 6년 임기의 필리핀 대통령이 있다. 스페인미국 식민 시절 영향으로 대륙법영미법이 섞인 헌법이 만들어졌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민주주의 혁명을 이뤄냈지만 계속되는 부패 정치인의 득세로 그 지위가 위태롭다.

특이한 점으로는, 사회 전반적으로 정치적 변화를 만드는데 미온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강력히 지지하고 높은 투표율을 기록중이라는 것이다.

2. 행정부

2.1. 대통령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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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은 대통령(Pangulo ng Pilipinas/President of the Philippines)이다. 현임 필리핀 대통령은 17대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이다. 대통령은 말라카냥궁에 거주하며 집무를 수행한다.

대통령은 전 유권자를 대상으로 하는 선거에서 선출된다. 결선투표 없이 가장 득표수가 많은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필리핀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연임이 불가능한 단임제이다. 본래는 4년 중임제였으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독재 이후 헌법이 개정되면서 현재와 같은 6년 단임제가 되었다.

대통령으로 출마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춰야 한다.

대통령의 권한은 다음과 같다.
같은 조건과 방식으로 부통령(Pangalawang Pangulo ng Pilipinas/Vice President of the Philippines)도 뽑힌다. 현임 부통령은 15대째인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직은 공화국 초창기부터 있었으나 마르코스 독재정권기인 1971년에 폐지되었다가[2] 1987년에 부활하였다. 부통령은 대통령이 유고 혹은 궐위될 때 잔여 임기동안 대통령직을 승계하지만, 그 외에 특별한 권한은 없다. 특이하게 부통령은 대통령과는 달리 중임이 가능한데, 중임은 두 번으로 제한된다.

필리핀의 대통령 선거는 미국 대통령 선거처럼 러닝메이트 제도로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처럼 대통령과 부통령을 별도로 뽑기 때문에 대통령의 당과 부통령의 당이 다를 수 있다.

미국 부통령의 경우는 연방상원의장직을 겸임하나 필리핀 부통령은 부통령으로서의 업무가 적기 때문에 내각에서 장관 한 자리를 주어 겸임시키는 경우가 많다.

2.2. 내각

필리핀 정부는 대통령을 정부수반으로 하여 휘하 20개의 부처 및 기타 독립기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의 장관은 대통령이 지명하지만, 이렇게 지명된 장관 후보자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독립기구인 인사검증위원회(Komisyon sa Paghirang/Commission on Appointments)의 검증을 통과해 동의를 얻어야만 임명될 수 있도록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다.

3. 입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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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하원

하원(Kapulungan ng mga Kinatawan ng Pilipinas/House of Representatives of the Philippines)은 316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3년이고 3연임까지 가능해서 총 9년까지만 선출될 수 있다. 25세 이상의 모든 필리핀 시민은 하원의원으로 선출될 수 있다.

하원은 예산 관련 법안을 발의할 수 있고, 또한 1/3의 하원의원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 등 행정부 관직에 대한 탄핵 소추를 제기할 수 있다.

선거방식은 한국과 비슷한 소선거구제-비례대표제 병립 체제로, 헌법에 따라 의석 중 20% 이상을 비례대표로 선출하도록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전국을 253개 선거구로 나누어 각 선거구에서 1명씩 선출하고 나머지 63명은 정당이 명단을 제시하면 각 정당에 대해 투표하고 득표수에 비례해 의석을 나누는 방식으로 선출한다. 봉쇄조항은 전국 단위에서 2% 이상 득표하는 것이다. 1987년 개헌과 함께 생긴 필리핀의 비례대표제는 본래 소수자(여성, 소수민족, 노동자 등등)의 정치적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주요 정당들은 소수자 위주의 정당과 연대를 맺어 비례대표 의석 진출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으나, 2013년 필리핀 대법원에서 일반 정당의 비례대표 출마를 가능하게 함에 따라 현재는 다른 나라의 비례대표제와 유사하게 운영되고 있다.

3.2. 상원

상원(Senado ng Pilipinas/Senate of the Philippines)은 총 24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6년이고 2연임까지 가능해 총 12년까지만 선출될 수 있다. 미국 상원과 유사하게 3년에 한 번씩 선거를 치러서 24명 중 12명을 갈아치운다. 35세 이상의 모든 필리핀 시민은 상원의원으로 선출될 수 있다.

상원은 하원이 발의한 예산 관련 법안을 변경할 수 있다. 또한 2/3의 상원의원의 찬성으로 조약에 관한 비준 동의권 및 선전포고 동의권, 사면 동의권을 가지며, 하원이 소추한 탄핵안에 대한 심리 및 탄핵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선거방식은 전국을 선거구로 하여 복수형 다수대표제(Plurality-at-large voting)를 채택했다. 유권자는 모든 후보 중 1명에서 12명까지 택할 수 있고,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2명이 당선되는 구조다.

4. 사법부

필리핀의 최고 사법 기관은 대법원(Kataas-taasang Hukuman/Supreme Court of the Philippines)이다. 대법원은 최종심을 담당하며, 미국 연방대법원처럼 법률 등에 대한 위헌심사 기능도 가지고 있다. 대법관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총 15명으로 구성된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은 사법인사위원회(angguniang Panghukuman at Pang-abogasya/Judicial and Bar Council)에서 제청한 법관 인사 후보 중에서 대통령이 지명하는 방식으로 임명한다. 대법관의 임기는 따로 없지만 정년이 70세까지로 규정되어 있다.

필리핀은 다른 민주국가와 유사하게 3심제를 채택하고 있어 법원 체계가 지방법원(Trial Court) - 고등법원(Hukuman ng Apelasyon/Court of Appeal) - 대법원(Kataas-taasang Hukuman/Supreme Court)로 되어 있다. 필리핀의 1급심인 지방법원은 Metropolitan Trial Court, Municipal Trial Court, Municipal Trial Court in Cities, Municipal Circuit Trial Court 등의 이름을 쓰지만 관할 행정구역[3]의 차이일 뿐 역할은 대체로 같다. 그 외에도 특수한 지방법원인 Regional Court(Panrehiyong Hukuman sa Paglilitis)가 있어서 일부 사건에 대한 1심을 맡는다.

그 외에도 특별법원으로 다음 법원이 있다.
한편 민다나오섬이슬람이 우위에 있는 지역들은 샤리아가 적용되며, 샤리아 관련 사안을 재판하는 1심 법원인 샤리아 법원(Sharia Distirct Court / Sharia Circuit Court)이 존재한다.

출처

5. 선거

미국처럼 대통령 선거, 하원 선거, 상원 선거, 지방선거[4]가 같은 날에 치러진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는 6년마다 치러지는데 하원과 상원선거, 지방선거은 3년마다 치러지므로 미국의 중간선거처럼 대통령 임기 중간 즈음에 한 번 선거가 치러진다. 이 때 선거 결과 역시 대통령의 국정 수행 동력에 영향을 준다.

선거를 통해 정치 권력이 세습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필리핀에서는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이 농촌에서 중세시대 영주처럼 행세하는 봉건적인 사회구조가 유지되고 있으며, 이들 중에서도 서로 혈연으로 얽혀있는 대략 30여개의 대지주 가문들이 필리핀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지배하는 특권층으로 군림하고 있다. 특히 이 지주들은 국가내에서 말 그대로 귀족 계급으로 군림하는데 소작농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이용하여 민주주의라는 '빛 좋은 개살구' 같은 틀 내에서 합법적인 선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하고, 또 이렇게 얻은 정계 관련 직위를 아들이나 친족에게 세습시킨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필리핀의 대학 교육은 굉장히 진보적인 편이고[5] 정치인들이 이러한 대학 출신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정치계를 주름잡고 있는 부유층 가문 인사들은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태반. 주로 필리핀 명문대 졸업 후 영미권 유학 갔다 온 다음 정계에 진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부패가 만연하고 부정선거가 심심찮게 일어난다.

치안이 열악하여 선거 시즌이 되면 청부살인이 자주 일어난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들은 금수저이고 경호가 빡빡해서 살해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시장이나 바랑가이 캡틴[6]의 경우는 중산층~은수저들도 많이 출마하기 때문에 상대 후보를 노린 총격살인이 매 선거마다 반드시 일어난다.

6. 정당

2020년 기준 필리핀 선관위에 등록된 정당은 100개가 넘는다. 현재 필리핀은 극단적인 다당제로, 의석을 가진 정당만 27개가 넘는다.

마르코스 집권 이전까지는 국민당(나시오날리스타 당)과 자유당양당제였으나, 1972년에 당시 대통령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선포해 자신이 소속된 국민당을 포함한 기존 정당을 모두 해산하면서 양당제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1978년에 정당 결성이 다시 허가되어 국민당과 자유당이 다시 활동을 개시하였으나, 이미 마르코스는 신사회운동당을 창당하고 부정선거로 의회 의석 거의 전부를 차지하면서 두 정당은 정계에서 의미를 상실했다. 그리고 필리핀의 민주화가 재야 정치세력에 의해 주도되면서 민주화 이후에도 헤게모니를 되찾지 못했다. 기존 마르코스의 독재정당인 신사회운동당은 마르코스 실각 이후 빠르게 붕괴되었고, 민주화를 이룬 재야세력은 기존 정당에 편입되기보다는 신당을 창당해 정계에 진출했다. 이로부터 현재의 극단적인 다당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필리핀의 정당들은 정책노선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필요에 따른 정당간 이합집산이 수시로 발생하며, 정당에 대한 소속감이 약한 탓에 소속정당 변경이 빈번하다. 정당도 이념적인 개념보다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주류 가문 연합의 세력 다툼에 가깝다.

출처

7. 역사

역사적으로 미국 정부, 교회, 자국 군대는 필리핀 정치사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7.1. 독립 국가 건설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스페인은 필리핀을 미국에 넘겨주게 되는데, 이때 필리핀 엘리트 계층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며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주축으로 필리핀 제1공화국이 만들어지게 된다. 미국 입장에서는 전쟁에서 이겨 새로운 식민지를 손에 넣으려는 찰나 식민지 스스로가 선수를 치고 독립을 선언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에 반대한 미국과 전쟁을 거쳐 1901년부터 부분적 형태의 자치권을 보장받는다. 미국의 영향으로 민주주의가 정착되었지만 남아있던 계급사회의 엘리트를 그대로 포용하는 방식이었다. 지역 사회의 부유층들은 새로운 국가 시스템에서도 계속해서 권력을 보장받게 된다.

1907년 치러진 필리핀 최초의 선거에서 세르히오 오스메냐가 이끄는 독립성향의 국민당이 승리하게 된다. 국민당은 이후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여당 역할을 한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계급 구조에 반발한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는 등 여러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자 미국 정부는 술루와 같은 변방의 섬과 내륙 산악지역을 포함한 필리핀 전역에서 주권을 재확립할 필요성을 느낀다. 기독교인을 이주시키는 등 민다나오섬 지역을 동화시키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일부 지역은 술탄과 다투[7]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1916년 미국 의회에서 필리핀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 존스법이 제정된다. 이때 주류 정당 국민당이 민족주의를 도구로 미국에 반기를 들며 더 강력한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세르히오 오스메냐와 마누엘 케손은 각각 우니페르소날리스타와 콜렉타비스타로 대변되는 지지층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한다. 1934년 필리핀 자치령이 세워지고, 처음 치러진 대선에서 케손은 대통령으로, 오스메냐는 부통령으로 당선된다. 1937년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고 타갈로그어가 공용어로 지정되는 등 현대 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져나간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 제국의 침략을 피해 필리핀 자치령 정부는 망명길에 오른다. 1944년 미국이 필리핀을 다시 점령하기 전까지 일본의 괴뢰 정권필리핀 제2공화국이 수립된다. 아직 필리핀에 남아있던 지역 엘리트들과 소작농들이 뭉쳐 혁명단체인 후크발라합을 조직하고 반일 독립운동을 이끈다. 후크발라합은 종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미국의 정치적 간섭을 반대하며 필리핀 농민이 주도하는 독립을 주장하게 된다.[8]

소수의 엘리트가 권력을 나눠가지는 현상은 여전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자치령 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된 틈을 타 수많은 지역 엘리트 세력이 등장했다. 마치 중세 봉건사회 귀족과 같은 힘을 갖게 된 지주들이 정치를 주도했고, 가문의 이익이 우선시되었기에 상대적으로 정치 이념은 부각되지 않았다. 경쟁하는 두 거대 양당조차 거의 똑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필리핀 정치의 특징으로 카시크 민주주의라고 불리운다.

7.2. 독재 정권과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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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필리핀 정부의 골칫거리였던 후크발라합의 항복을 받아낸 라몬 막사이사이, 토지 개혁을 추진한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등을 거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제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게 된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등 논란도 있었지만 어느정도 경제를 일으켜세운 공을 인정받아 필리핀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에 등극한다.

그러나 재임 시절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14년 간 독재정치가 펼쳐졌으며, 이 과정에서 학살과 고문이 잇따라 벌어지고 경제도 파탄났다. 훗날 피플 파워라고 명명된 민주화 운동이 이루어졌고, 민주화의 핵심 인물인 니노이 아키노의 아내이자 노이노이 아키노 전 대통령의 어머니인 코라손 아키노가 당선됨으로써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이어서 아키노 정부에서 육군 참모 총장으로 활약한 피델 라모스, 라모스의 러닝메이트였던 조지프 에스트라다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2001년에 부패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처하자 사임했다.

7.3. 2000년대 이후

2000년대 들어서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가 9년 동안 재임하며 끊임없이 독재를 시도하였으나 국민들의 시위로 하야했다. 2010년 6월 30일 대통령에 취임한 베니그노 아키노 3세와 자유당에 의하여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하였다. 개헌을 통해 필리핀의 정•부통령의 임기는 6년이며 재선이 불가능한 단임제가 됐다.

2016년 5월 9일 대선에선 아웃사이더라고 볼 수 있는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당선되어 전세계에 여러 의미로 충공깽을 선사했다. 두테르테는 집권 이후 마약 사범을 소탕한답시고 강경책을 펼쳤는데,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치안 문제와 부패로 골머리 앓던 필리핀의 치안을 개선하는 데 한몫하고 있지만, 부정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재판없이 마약 사범들을 총살 집행함으로써 제대로 된 판결이 안 이루어지고 억울한 사람도 죽어 나간다며 비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독재자 마르코스의 시신을 국립묘지에 몰래 안장시키며 시민단체의 반발을 불러오는 등 독선적 행보와 제정신을 의심하게 하는 막말과 기행으로 비판받고 있다.

7.3.1. 돌아온 마르코스 가문

2022년 5월 9일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가 58.77%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딸 사라 두테르테를 러닝메이트로 하여 각자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는 두테르테 일가와 마르코스 일가의 동맹이 성사되었음을 의미한다. 두 당선인 모두 전직 대통령 아버지를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파일:봉봉마르코스.jpg
독재자 아버지의 무덤에 헌화하는 봉봉 마르코스

가톨릭 신부 로버트 레예스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기도로서 악을 물리치는데 실패했다며 독재자 아버지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아들 마르코스를 비판했다.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고 마르코스 집권기를 필리핀의 황금기(Golden Age)로 포장하는 봉봉 마르코스의 선출로 인해 필리핀 전역에서 우려와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기사 원문

봉봉 마르코스는 대변인 빅 로드리게즈를 통해 발표한 성명문에서 가족의 과거사가 아닌 본인의 행적으로 자신을 평가해달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로이터는 아버지 마르코스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고 전략적인 과거사 왜곡을 자행한지라 비난이 계속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기사 원문

왜곡없는 역사적 진실의 보존과 학문적 자유를 요청하는 학자 1,700여명의 집단 성명이 발표되었다. 필리핀 국내외 학자들 뿐만 아니라 해외 석학들이 다수 힘을 보탰다. 성명서 원문 또한 선거 결과 발표 후 일주일만에 서점에서 마르코스의 독재와 관련된 역사책이 매진되는 현상까지 벌여졌다. 아테네오 대학교역사학 교수 프란시스 질로고는 이를 식료품 사재기에 비유하며 앞으로 불어닥칠 수 있는 검열에 대한 불안감이 낳은 결과라고 분석했다. 계엄령에 관한 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닛케이 아시아에서는 마르코스의 당선이 독재에 맞서는 바이든 정부의 오점이 될 것이라고 적었다. 필리핀 특유의 엘리트 정치와 가짜뉴스 전략이 마르코스가를 권좌에 복귀시켰다는 평이다.[9] 민주화 혁명 이후에도 공정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다는 사회적 인식이 과거를 미화하는 지지층의 선동 전략과 결합해 효과를 보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8. 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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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종교적으로 필리핀 중앙정부와 이질적인 남부의 민다나오섬이 정치적으로 장악 및 통제가 되지 않아서 많은 갈등과 충돌이 현재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또한 필리핀 국가민주전선이라는 공산주의자들도 지금까지 게릴라 투쟁을 하고 있다.

[1] 수치가 높을수록 언론 자유가 없는 국가, 언론자유 최상은 0점, 언론자유 최악은 100점, 2013년 이전 자료는 수치가 넘어가는 것도 존재.[2] 마르코스 독재정권기에는 부통령 대신 수상(Punong Ministro ng Pilipinas/Prime Minister of the Philippines)이 있어서 그가 정부수반이었다. 1978년에 창설되어 1981년까지 마르코스가 수상을 겸하다가 1981년에 당시 단원제 의회(Batasang Pambansa) 의원 중에서 의회가 선출하도록 바뀌었으며, 1987년 개헌에 따라 폐지되었다. 마르코스 독재정권기 필리핀은 명목상 이원집정부제였다.[3] Metropolitan Trial Court는 마닐라 내 지방법원을 뜻하고, Municipal Trial Court in Cities는 마닐라를 제외한 각 대도시의 지방법원을 뜻하며, Municipal Trial Court는 그 외 행정구역의 지방법원을 말한다. 만약 지방법원이 행정구역 2개 이상을 관할하면 Municipal Circuit Trial Court이라는 이름이 붙는다.[4] 한국의 기초자치단체 격인 Barangay 지방의회 선거 제외[5] 제 1대학인 필리핀 대학교 학생들이 심심찮게 대자보를 붙이거나 학내 시위를 주도하기도 한다.[6] 한국의 동장과 비슷하지만 선출직이며 권한은 훨씬 강하다.[7] 전통적으로 필리핀 남부 지역에서 추장을 일컫는 말[8] 공산주의 진영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소련으로부터 무기 지원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라는 게 지금의 정설이다.[9] 필리핀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시민들이 많지 않아서 정상적인 언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런데 페이스북 이용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가짜뉴스가 퍼지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