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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F110E><colcolor=#ffffff> 시리아 아랍 공화국 제4대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 Ḥāfiẓ al-ʾAsad | حافظ الأسد | |
출생 | 1930년 10월 6일 |
시리아-레바논 카르다하 | |
사망 | 2000년 6월 10일 (향년 69세) |
[[시리아 아랍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다마스쿠스 | |
재임기간 | 제4대 대통령 |
1971년 3월 14일 ~ 2000년 6월 10일 | |
종교 | 알라위파 이슬람(시아파)[1] |
정당 | [[바트당| 바트당 ]](시리아) |
신체 | 175㎝ |
자녀 | 장녀 부슈라[2][3] 장남 바셀[4] 차남 바샤르 3남 마지드[5][6] 4남 마헤르 |
서명 |
1. 개요
시리아의 제4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시리아 내에서도 소수민족 취급받는 시아파에서도 극소수만 존재하는 알라위파 집안 출신으로, 과거에는 가난한 농부 출신이었으나 공군사관학교 졸업 이후 군인 장교가 되었으며 1970년 쿠데타 주도 이후 1971년부터 정권을 잡은 이후 2000년 사망할 때까지 30년 동안 시리아 대통령직에 종신집권하였으며 차남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자리를 세습했다.20세기 아랍권을 대표하는 독재자 중 하나로 2024년까지 53년 간 지속된 시리아의 아사드 가문 세습 체제를 시작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초기
1930년 10월 6일 프랑스가 군정통치 하던 시리아-레바논 북부 해안도시 카르다하에서 농부 알리 술라이만 알아사드의 아홉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아사드 가문을 비롯한 알라위파 사람들은 이단이라는 이유로 다수 수니파로부터 차별과 탄압을 받으며 라타키아 같은 지중해 해안가 변방에서 농업에만 종사하는 무지렁이들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그의 고향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하페즈가 유일했을 정도.[7]하지만 시리아가 프랑스에서 독립할 쯤 대다수의 잉여 알라위파들은 어떻게든 돈을 벌기 위해 신생 시리아군에 입대하였고 하페즈도 마찬가지로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바트당에 가입, 바트당이 집권한 1963년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8] 이듬해 국방장관이 되었다. 하지만 제3차 중동전쟁의 참패와 검은 9월 사태 당시 요르단 개입의 실패를 두고 시리아 정부에서 그에게 책임을 지워 숙청하려고 하자 1970년,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가 되었고, 이듬해 최초의 알라위파 시리아 대통령이 되었다.
1970년대 사담 후세인(당시 이라크 부통령), 당시 시리아 부통령이던 압둘 할림 하담,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당시 알제리 외교부 장관)과 찍은 사진. 사진에 찍힌 저 세 사람들 중 왼쪽의 한 사람은 실권 후 교수형으로, 오른쪽의 한 사람은 대통령 장기집권에 반발한 알제리 국민들이 일으킨 반정부 시위로 몰락한다.
집권 기간 동안 하페즈는 제4차 중동전쟁 등 대외적으로 이스라엘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한편 정치적으로도 능력이 있어서 아랍에서 시리아의 위상을 높아갔고 그 때문에 '아랍의 비스마르크'로 불렸다. 대내적으로는 1946년 독립 이후 쿠데타가 끊이지 않던 시리아의 정국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물론 이 '안정'은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학살이 바탕이었다.
2.2. 암살위기 모면과 하마 학살
집권 이후 자신이 알라위파라는 약점을 타파하기 위해 철권통치와 종교적 유화정책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둘 다 썼다. 먼저 핵심 실세인 군부의 주요 직책에는 무조건 알라위파 출신만을 기용하였고 1963년 선포된 국가비상사태법[9]을 적용해 반대파 인사 수천 명을 감옥에 투옥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시리아의 대다수인 수니파 이슬람 교도들의 세속주의를 계속 지원하고, 무슬림 형제단 계열의 극단주의자들이 아닌 온건파 주류 성직자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원도 해주어 시리아의 국민 여론이 무슬림 형제단에게로 가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외교적으로는 아랍민족주의를 주창하여 이스라엘과 중동전쟁을 벌인 것을 계기로 반미 반서방 정책을 폈고 당시 여느 반미국가와 마찬가지로 친 소련 정책을 취했다.1970~1980년대에 하마나 이들리브 등 이슬람 성향이 강한 북부와 시골 지역의 지하조직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이슬람 극단주의 무슬림 형제단이 '알라위파 이교도 독재정권을 타파'하고 수니파 정권을 세우자는 빌미로 각지에서 군인·민간인·공무원을 가리지 않는 테러를 저지르며 국내 상황이 불안해지자, 이들 이슬람 극단주의 정당 가입을 국가범죄로 금지하고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에 말리 대통령을 영접하던 중 무슬림 형제단 단원들의 폭탄테러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때 상황이 매우 아찔했다. 수류탄이 자기 발 밑에 떨어지자 직접 발로 걷어찼고, 다른 수류탄이 근처에 떨어졌는데 경호원이 품고 폭사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국방장관과 경호원 등 관료 여럿이 희생당하자, 일단 수류탄을 품고 대신 죽은 경호원의 유족들에게 극진한 경제적 보상을 하고, 다른 사망자들 장례를 국장으로 열어 명복을 빈 뒤 무슬림 형제단 및 이슬람 극단파로 수감되어 있던 1,200여 명을 즉결 처형해 보복했다.
이후에도 무슬림 형제단과 그 영향을 심하게 받은 시리아 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리고 시리아를 장악해버릴 기세로 무장봉기스러운 테러와 암살을 계속 벌여나갔다.[10] 이게 어느 정도로 심했냐면 단지 친정부 성향이라는 이유 하나로 알레포 대학 학장이나 원로 의료인인 이브라힘 나마 같은 저명인사들을 암살하고, 아사드 대통령의 주변인사들이나 군 사령관들을 연거푸 죽여댈 정도였다. 심지어 수니파 주요 성직자 중 한 명이었던 셰이크 알 샤미는 무슬림 형제단의 집권을 예상하며 좋아하는 수니파 성직자들을 꾸짖었다는 이유로 암살당했다. 결국 분노의 임계점에 다다른 하페즈는 2년 뒤인 1982년 군대를 동원해 무슬림 형제단을 유혈 진압했다. 이때 하마 시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필두로 대규모 봉기가 시작되자[11] 초강경 진압으로 대응했고 이 과정에서 2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를 하마 학살이라고 부른다.
2.3. 세속 독재
하마 학살에서 알 수 있듯,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세속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는 같은 아랍 세속국가이자 바트당 정권인 이라크를 쌩까고 이란을 지원했으며[12] 걸프전 때는 아예 미국과 쿠웨이트 편을 들었고[13] 걸프전이 이라크군의 패퇴와 쿠웨이트군 및 다국적군의 승전으로 종결된 이후에는 미국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과 정상회담까지 가졌다.하지만 하마 학살 이후로 내부적으로 독재 정치는 더욱 심하고 악랄해졌다. 도시 곳곳에 군경을 배치하여 주민들을 감시하는건 기본[14]이고 마치 북한처럼 주민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여 신고하게 하는 상호 감시 체제를 확립했고 수천명을 재판도 없이 정치범으로 몰아 수용소에 가두었다. 거기다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난 이후로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마냥 그를 벤치마킹하여 공공기관이나 각 도시와 마을에 자신의 대형 초상화를 설치하거나 대형 동상을 여러개 세우는 등[15] 옆나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못지 않은 개인 우상화도 조장한다. 심지어 지폐에도 본인 얼굴을 넣었다. 여당은 오직 바트당만 될 수 있었고 요식행위에 불과한 대통령 선거[16]에는 항상 본인이 단독출마하여 99%~100%대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또한 레바논 내전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1990년대 들어 레바논의 종교적 갈등이 어찌어찌 봉합된 이후로도 레바논에 시리아 군대를 주둔시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7]
2.4. 사망과 세습
1999년 요르단 암만에서 열린 후세인 국왕의 장례식에 참여한 모습 |
1990년대 말에 하페즈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하페즈가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회의 중에 피곤해 보였다고 말했으며, 하루에 2시간 이상 일할 수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정부 각료들은 하페즈가 관여하지 않는 일상 업무에 익숙해질 정도였다. 결국 하페즈 알아사드는 2000년 6월 10일, 레바논 총리 셀림 호스와의 전화통화 중 갑자기 쓰러져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페즈의 사인은 심장마비로 확인됐으며, 심한 당뇨병으로 고생해온 그의 건강이 급격하기 악화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자 시리아 국영 TV는 "아랍의 위엄을 지키고 권리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 싸워온 아사드 대통령이 10일 아침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하페즈의 사망과 함께 시리아 의회는 서둘러 40일의 애도기간을 선포함과 동시에 특별회의를 소집했고 그의 아들인 바샤르 알아사드(당시 나이 34세)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 있도록 대통령 연령을 40세 이상으로 제한한 헌법 제83조를 수정했고 결국 바샤르가 차기 대선에 단독 출마하여 시리아의 대통령이 됨으로써 시리아는 공화국을 표방하는 아랍 국가 중 세습을 한 유일한 국가[21]가 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페즈 알아사드의 사망에 대해 보도하는 시리아 국영 TV (2000.06.10)[22]
하페즈의 시신은 그의 고향인 카르다하에 조성된 영묘[23]에 관으로 안치된 상태였으나…[24]
2.5. 부관참시
24년 후인 2024년 12월, 반군의 기습 공세로 주요 도시들이 점령당하자 아사드 정권이 위태로워졌다.결국 반군의 다마스쿠스 함락과 동시에 아사드 정권은 패망해버렸고[25], 하페즈의 영묘도 반군에게 장악당했다. 영묘와 하페즈·아니사·바셀·마지드의 관들은 시민들에게 밟힌 후 소각당했으며[26] #1 #2 그 뒤로는 신정부군들의 소변 세례가 이어졌다.[27] 가족 단위로 고인능욕을 당한 것.
3. 가계
- 하페즈 알아사드 (1930 ~ 2000) / 아니사 마클루프 (1930 ~ 2016)
- 부슈라 알아사드 (1960 ~ )
- 바셀 알아사드 (1962 ~ 1994)
- 바샤르 알아사드 (1965 ~ ) / 아스마 알아사드 (1975 ~ )
- 하페즈 알아사드 2세 (2001 ~ )
- 제인 알아사드 (2003 ~ )
- 카림 알아사드 (2004 ~ )
- 마지드 알아사드 (1966 ~ 2009)
- 마헤르 알아사드 (1967 ~ )
- 자밀 알아사드 (1933 ~ 2004)
- 리파트 알아사드 (1937 ~ )
4. 평가
프랑스에서 독립한 이후로 불안정하던 시리아를 안정화하고, 바트당 체제를 확립해 아랍민족주의 세속정책을 통한 이슬람극단주의 억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아랍민족주의를 오히려 본인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에만 이용하고, 철권독재를 통한 비민주적인 통치를 한 데다가, 세습마저 자행한 건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게다가 결국 시리아 내전이 지금까지 하페즈 알아사드 정권 하에서 억눌리던 문제점이 아들인 바샤르 대에 폭발하여 벌어지고 결국 이 여파로 자기 아들마저 정권을 잃고 자신의 유해마저 반군들에 의해 훼손 당해버린 것을 보면, 사실상의 만악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세습한 것 자체만으로도 약간의 리스크는 짊어질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던 장남 바셀이 교통사고로 죽지 않거나 혹은 동생 리파트가 1980년대때 쿠데타 시도를 일으키지 않고 인내하며 다음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나마 상황이 나았겠지만 현실은 리파트는 형을 겨냥한 쿠데타를 시도하려다가 진압당해 국외로 망명, 바셀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어수룩한 바샤르가 집권하게 된 것도 의도치 않게 평가를 깎아먹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상황에서 권좌 세습 계획을 접지 않으며 3남, 4남, 장녀 대신 차남 바샤르를 선택한 건 어쨌든 하페즈 본인이었다.[28]
5. 기타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과는 매우 친했다고 하며 서로서로 선전용 포스터를 각 나라에 보내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였을 때 북한에서는 문화상 강능수를 보내서 조문했다.- 이라크의 후세인 집안 못지 않게 이쪽 집안도 장신으로 유명한데 아들이자 후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의 키는 190㎝에 육박한다.[29] 그런데 바샤르가 자식들 중에서 유독 키가 큰 편이긴 했다.
- 하페즈 알아사드 시기인 1984년 7월 5일 시리아 국영방송 녹화자료 2:05~4:18에서 코란 독송으로 방송이 시작되며, 7:55부터는 뉴스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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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리아 내에서 소수민족 취급받는 종파이며, 세속적인 이슬람 종파였던지라 이슬람에서도 이단 취급받던 종파였다.[2] 언니가 한 명 있었는데 요절했다.[3] 시리아 내전 당시 국방차관이었던 남편이 반군의 폭탄테러로 암살당했다.[4] 육군 중령이던 1994년 교통사고로 사망.[5] 2009년 지병으로 사망.[6] 하페즈의 자녀들 중 가장 존재감이 없었다(…). 북한의 김씨일가로 치면 김정철 포지션이라 할 수 있을듯.[7] 하페즈의 아버지부터가 나름 학식이 있는 사람이긴 했다. 마을에서 신문을 구독하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니…마을에서는 그래도 정치력이 있어서 처음에는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는데, 도중에 심정의 변화가 생겼는지 1936년에는 레옹 블룸 프랑스 총리에게 프랑스가 시리아를 버리지 말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낼 때 그 편지에 서명했으며, 이를 넘어 프랑스 식민지배에 협력해 공직을 얻기도 했다.[8] 이 시절 바샤르가 태어났다.[9] 하페즈가 아닌 이전 바트당 정부에서 먼저 선포한 법이었다. 이는 2011년까지 무려 48년 간 유지되어 왔다.[10] 이후 내용에 대한 출처는 사미 무바예드 저, <IS의 전쟁>을 참고하였음. 다만 해당 학자는 무슬림 형제단이 쿠르드족에 대해 적대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쿠르드족에 대한 대단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논란이 되며, 저서에도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내용이 많은 편이다. 그의 책이 미국에서 출판됐다 하더라도 엄연히 바트당 독재 국가 어용 학자인 그의 저술의 편향성 논란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가 존중되는 나라로 노골적인 종북 성향의 인사들도 자유롭게 활동 및 의사 표현이 가능한 나라이다.[11] 시작은 무슬림 형제단이 모든 하마 시의 모스크를 장악하여 반란을 선포하면서 전개되었다.[12] 이는 시리아랑 이라크가 애당초 바트당의 분열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며 사이가 최악이었던 점이 큰 원인이다.[13] 실제로 걸프전쟁 발발 이전인 1987년에 쿠웨이트를 방문한 적도 있다.[14] 이건 사실 테러방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기도 했다. 물론 악용된건 옹호할 수 없다.[15] 이 동상들이나 초상화들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고, 아사드 정권이 2024년에 패망하고 난 뒤에 거의 대부분 반군과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서 박살나거나 총알받이가 된다.[16] 1971년, 1978년, 1985년, 1991년, 1999년 치러졌다.[17] 이때문에 레바논에서는 반시리아 감정이 강해졌다. 나중에 바샤르 알아사드 때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레바논에 주둔한 시리아 군대를 미국의 압력으로 철수시키면서 시리아는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18] 사실 해외순방에도 부슈라가 여러번 동행하는 등,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19] 실제로 아버지가 사망한 지 약 9년만에 병사했다.[20] 그런데 하페즈는 마헤르의 그런 성향이 자길 닮았다고 여겨 처음엔 바샤르가 아닌 마헤르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만약 바샤르가 후계자 되길 거부했다면 차기 대통령은 마헤르가 됐을 확률이 높다.[21] 사실 세습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경우는 꽤 많았다. 이집트의 무바라크도 두 아들 중 하나에게 세습을 준비하다 아랍의 봄으로 축출되었고 이라크 사담 후세인도 차남에게 세습을 준비하다 이라크 전쟁으로 당장 본인부터 축출되어 사형된 바람에 하지를 못했던 것이다.[22] 전반부는 아랍어, 후반부는 영어로 아나운스한다.[23] 2005년 촬영된 영묘 내부[24] 그 이전에 사망한 장남 바셀의 시신이 먼저 들어와 있었고 이후 삼남 마지드와 아내 아니사도 안치되었다.[25] 바샤르 알아사드는 자신의 아내인 아스마와 3명의 자녀들과 함께 자신의 뒷배이자 우방이던 러시아로 도피했으며 남은 가족들인 누나 부슈라 알 아사드와 남동생 마헤르 알 아사드는 이라크와 아랍에미리트로 망명했다.[26] '밟는다'는 행위의 의미야 다들 잘 알 터이고(이슬람권은 이게 특히 심해서 신발 밑창을 보여주는 것조차 터부시된다), 이슬람에서 육신을 불에 태운다는 것은 신의 고유권한이라 여기기에 화장도 극히 꺼리고 있다(무아트 알 카사스베를 불태워 죽이자 이슬람권의 반응이 어땠는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시리아 민중들이 아사드 일가의 시신에 가한 행위는 고대 중국에서의 궁형과 비슷한 포지션이라 할 수 있는 시리아 국민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모욕인 셈.[27] 참고로 수도 다마스쿠스 입성 전,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 지도자 아부 무함마드 알줄라니는 하페즈의 영묘를 남녀 공중화장실로 개조하자고 제안했었다. # 거의 예고 수준.[28] 단, 나머지 일가들은 정신적 불안정, 과격한 성격, 여성이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그나마 바샤르가 나은 축에 속하기는 했다. 그리고 매우 억압적인 정치와 부정부패는 정권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설령 장남 바셀이나 동생 리파트가 이어받았다 하더라도 결국엔 이들 정권 대에 온갖 문제들이 터져 시리아에 내전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29] 위의 사진을 보면 대충 하페즈의 키를 짐작할 수 있다. 김일성이 173㎝이니까 하페즈는 대략 175㎝ 정도.[30] 호르헤 이유에카 파나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다룬 내용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