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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16 18:49:00

한국독립당(임시정부)


한국독립당의 계보
파일:한국독립당 당기.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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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한국독립당
1930년
만주 한국독립당
1930년
재건 한국독립당
1935년
중경 한국독립당
1940년
번외: 한국독립당(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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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국독립당 당기.png
한국독립당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50F4B> 영문 명칭 Korea Independence Party (KIP)
한문 명칭 韓國獨立黨[1]
약칭 한독당
창당일 1930년 1월 25일
위원장 송병조
후신 민족혁명당[2]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중경 한국독립당[3]
당보 『한보(韓報)』
『한보특간(韓報特刊)』
『상해한문(上海韓聞)』
『진광(震光)』
파일:한국독립당 당기 자료.jpg
한국독립당 당기
1. 개요2. 상세3. 구성원4. 조직
4.1.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
5. 이념6. 대외 활동
6.1. 외교6.2. 선전공작
7. 둘러보기

1. 개요

193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창당된 항일 독립운동 정당.

2. 상세

유일당 운동에 적극 동참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점차 발을 빼던 시기는 1928년 중반부터였다. 코민테른의 12월 테제[4]가 전해지고 유일당 운동에서 ML파가 이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던 이 무렵부터 1929년 10월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 결성되던 시점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점차 유일당운동에서 한계를 느꼈다. 혁명정당이 결정되면 거기에 입법권까지 넘기겠다면서 헌법을 개정하고 나섰지만, 실제 유일당 운동은 두드러진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분립상태에서 한걸음씩 나아갔다. 상하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참가하던 이동녕, 김구, 오영선, 김갑, 김철 등 국무위원 전원은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 활동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1928년부터 사회주의 세력은 자신의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혁명정당으로 발전을 전망한 반면, 민족주의 세력은 전선의 통일을 이당치국의 원리로 임시정부를 강화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두 세력의 노선 차이도 촉성회를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유일당 운동은 1929년 10월 26일 상하이촉성회의 해체로 새로운 국면을 맡게 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은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했던 것이다.[5]

민족주의 세력은 독자적인 정당체 결성에 나섰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능을 강화시키는 것이어야 했다. 아울러 유일당 운동으로 표출된 요구에 걸맞게 정당의 성격을 지닌 조직체를 결성하는 것이 과제였다. 1930년에 들면서 우파세력은 임시정부의 여당 구실을 맡을 독립운동 정당을 조직하려 계획했고, 그 결정체가 바로 1930년 1월 25일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낸 주역은 국무위원회 주석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핵심세력과 안창호였다. 임시정부 세력은 정부의 기능 강화와 이에 따른 민족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했고,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민족운동의 최고기관을 새로 수립코자 했다. 즉 임시정부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해외 동포사회의 민족사상 발달을 저해하는 경향마저 있으므로 이를 해체하고 시대에 맞는 민족운동의 중심기관을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발흥을 기대하자는 것이 안창호의 논리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어렵게 지켜온 이동녕을 비롯한 핵심 인물들은 "과거 10여 년이란 역사를 가진 정부를 해산할 수 없으며, 설령 새로운 기관을 설립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보다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반론을 내걸어,[6] 안창호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다가 견해차이를 조금씩 좁혀 나갔다. 그 결과가 한국독립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유일여당을 역할을 맡은 정당이다. 우선 이 당이 출범한 장소가 임시정부 판공처라는 사실이다. 프랑스조계 마랑루(馬浪路) 푸칭리(普慶里) 4호이다. 처음엔 한국독립당은 비밀조직으로 출발했다. 1년이 더 지나서야 이 조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31년 4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난징에 정착한 중국국민당정부에 보내는 「재남경중국국민당회의에 대한 선언」을 발표함으로써[7] 그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 성립되었음에도 한국독립당이 은밀하게 움직인 이유는 안창호가 주도한 민족협동전선운동의 여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3. 구성원

한국독립당은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핵심세력과 안창호를 비롯한 흥사단 세력 등 28명의 동의에 의해 결성되었다.
|| 활동명 || 이명 || 생년 || 출신 || 경력 || 임정 경력 ||
강창제 강화조 1898 평북 창성 의열단, 한국노병회, 병인의용대
김갑 김도원 1888 경남 부산 동제사 의원, 제무부장, 법무총장
김구 김구 1876 황해 안악 신민회, 신한청년당, 한국노병회 의원, 내무총장, 재무장, 국무령
김두봉 1889 서울 인성학교장, 의열단 의원
김붕준 1888 평남 용강 흥사단 의원
김산 김영택, 김중청 1886 전남 함평 신한청년당 의원, 교통총장대리, 군무장
김홍서 김지강 1886 평남 평양 신민회, 흥사단, 한국노병회 의원
박찬익 1884 경기 파주 신민회, 동제사, 중국국민당 임시정부 난징주재 대표
박창세 박창순, 박명경 1884 평북 영변 흥사단, 민단의경대, 병인의용대 의원
백기준[8] 1887 평북 의주 의원
선우혁 1882 평북 정주 신민회, 동제사, 신한청년당, 흥사단 교통차장, 의원
송병조 1887 평북 용천 신한청년당, 흥사단 의정원, 의장
안공근 안삼재 1885 황해 해주
안창호 1878 평남 강서 신민회, 흥사단 내무총장, 국무총리 서리
엄항섭 엄대형 1898 경기 시흥 프랑스조계 경찰 군무총장, 의원, 의장, 내무총장
윤기섭 윤중규 1887 경기 장단 한족회, 조선독립단, 한국노병회
이동녕 1869 함남 원산 신민회, 권업회 국무총리, 의장, 대통령 대리
이시영 1868 서울 신민회, 경학사, 한국노병회 법무/재무총장, 법무위원
이유필 1885 평북 의주 신민회, 신한청년당, 흥사단, 한국노병회, 병인의용대 국무위원
이탁 1889 평북 선천 신민회, 흥사단
장덕로 장성산 1886 평북 의주 흥사단 의원
조상섭 최국선 1884 평북 의주 신한청년당, 흥사단, 한국노병회 의원
조소앙 1887 경기 연천 독립의군부, 동제사, 신한청년당 국무위원, 비서장, 외무장
조완구 1880 서울 의원, 내무총장, 재무총장, 내무장
차이석 서립환 1881 평남 평양 흥사단 의원
최석순 최석준 1892 평북 삭주 민단장 의원, 경무국장
한진교 1887 평남 중화 해송, 송계양행, 경영, 약제업, 신한청년당

한국독립당 발기인들의 주된 특징 4가지였다.[9]
신민회의 계몽운동을 이어받은 사람이 많았다.[10]
상하이를 중심으로 조직된 동제사신한청년당을 통해 성장한 청장년층과 3.1운동에 참가한 뒤 국외로 망명한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정에 기여했고 1920년대에 임시정부를 중심한 독립운동의 중심축에 서 있던 인물들이다.
④ 민족협동전선이 붕괴된 뒤, 정당 조직채를 결성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나선 인물들이다.

한국독립당의 당원이 몇 명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제 관헌이 작성한 1932년도 자료에는 약 70명이라고 기록되었지만,[11] 실제로는 이보다 많다. 일본 정보기록에 드러나는 인물만 해도 다음과 같이 73명이고 1차 자료에 빠진 인물도 많기 때문이다.
강병학, 강창제, 김갑, 김구, 김동우, 김두봉, 김붕준, 김사집, 김석, 김양수, 김웅, 김인, 김종화, 김창국, 김철, 김현구, 김홍서, 문일민, 민필호, 박경순, 박용철, 박찬익, 박창세, 박태열, 박효경, 백기준, 선우혁, 손일민, 송병조, 안경근, 안공근, 안원생, 안창호, 양명진, 엄대위, 엄항섭, 연병호, 오의순, 옥성빈, 유일평, 유정우, 윤기섭, 이경산, 이광우, 이광제, 이국식, 이기성, 이동녕, 이동초, 이두산, 이상익, 이상일, 이성용, 이세민, 이수봉, 이시영, 이유필, 이일봉, 이일태, 이치섭, 이판수, 이탁, 임득산, 장덕로, 정태희, 조상섭, 조소앙, 조시원, 조완구, 차이석, 최석순, 채원개, 한진교

4. 조직

조직 골격은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의 것을 절충한 것이었다.[12] 당의 조직체계는 당중앙부의 조직과 하부조직인 구회, 및 지회로 나누어진다.[13]

당의 중앙조직은 이사장을 최고직으로 삼는 이사회가 있었고 최고 의결기구로 당대표대회가 있었다. 결성 직후에는 간사제로 유지되다가 이사제로 변경되었다. 한국독립당이 항저우시로 이동한 뒤에도 어려운 문제는 이사회에서 토의, 결정되었다.[14]

한국독립당의 지역조직은 상하이의 본부와 몇몇 지부로 구성되었다. 그러다가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항저우시로 이동한 뒤에는 그 곳 당의 특구를 설치하고 이를 본부로 삼게 되었다. 상하이에 5개의 구를 두고 난징구와 항저우특구를 합쳐 7개의 구를 설치했다. 또 한국독립당은 베이핑, 난징, 광둥에 각 지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각 지부에는 책임자로 간사 1명씩을 두었다. 베이핑지부는 간사 조성환 외에 박태열, 이국식, 손일민, 이광우 등으로, 난징지부에는 이광제, 간사 외에 이치섭, 이일태, 이동초, 임득산, 박찬익, 이상익, 강병학, 박효경, 김익성, 강창제, 유일평 등으로 각각 구성되었다. 그리고 광둥지부에는 특별히 책임대표로 김붕준을 두고, 간사 이경산 외에 양명진, 이두산, 김창국, 김웅, 채원개, 김종화, 이일봉 등으로 구성되었다.[15] 그리고 구에는 구회가 조직되었고, 지부도 구회와 더불어 독자적인 활동을 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항저우특구회에서 매월 15일과 말일에 구회를 열어 구당원과 교양과 혁명의식을 고취시키고[16] 『진광(震光)』을 발행하고 광둥지부에서 『한성(韓聲)』이란 기관지를 발행한 일이었다.[17]

4.1. 이당치국(以黨治國) 체제

유일당 운동은 민족협동전선운동이며, 근대적인 정당 수립운동이었다. 그러나 국내외 걸쳐 모두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운동이 중단되고, 따라서 좌우세력을 아우르는 대당결성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 운동이 의미가 없진 않다. 그 결과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기 때문이다.

한국독립당은 만주의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그리고 난징한국혁명당과 달리 정부조직체를 옹호,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당치국 체제를 갖춘 「중화민국 중국국민당 정부」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독립당」를 구성하였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한국독립당의 정부가 「임시정부」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1940년 충칭에서 조직된 같은 이름의 한국독립당민족혁명당과 겨루면서 어울리는 여야를 둔 체제와는 달랐다.[18]

한국독립당 요인들이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1927년 8월에 조직된 국무위원은 이동녕(국무회의 주석/법무장), 김구(내무장), 오영선(외무장), 김철(군무장), 김갑(재무장)이었고, 1930년 6월에 오영선의 사직으로 조소앙이 외무장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1월 8일 의정원 회의에서 임기 3년 만료로 인한 국무위원 개선에 따라 선출된 국무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동녕 법무장, 주석/의정원 의장
김구 재무장
조완구 내무장
조소앙 외무장
김철 군무장

국무회의나 의정원(국회)의 직책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독립당원이었다. "국무위원은 그 누구나 한국독립당의 간부였으므로 양자가 동일체 관계에 있다."[19]는 표현이 맞다. 이 당이 정부를 지도해 나가는 「이당치국」성격을 가진 혁명적 정당 형태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한국독립당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관계는 인적구성만 아니라 구체적인 활동을 통해서 드러났다. 한인애국단이봉창, 윤봉길 의거와 산하 전위조직인 상해한인청년당을 지도하여 전개한 항일투쟁 등은 모두 임시정부의 투쟁 활동이 당을 지도해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봉창 의거 직후, 국무회의는 한국독립당의 사업으로 발표하기로 가결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20] 뿐만 아니라 1932년 6월 초에 자싱에서 항저우사건을 해결하고자 두 차례 걸쳐 국무회의가 열렸는데, 거기에서 대책을 세우지 못하자 그 문제를 한국독립당 이사회로 넘기기로 했던 데에서도 양자의 관계가 입증된다.

한 편, 국무위원회 체제를 채택한 이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활동은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임시정부의 최고 권력기관이라고 규정된 임시의정원은 당이 결성될 경우 상위 권력기관이 생기는 셈이었다. 유일당운동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한국독립당이 결성된 뒤에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약화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5. 이념

한국독립당이 창당되면서 당의(黨義), 당강(黨綱)을 작성하기 위한 기초위원은 다음과 같다. 이동녕, 안창호, 이유필, 김두봉, 안공근, 조완구, 조소앙[21] 이들은 우파 진영이 추구하던 정치이념과 독립운동 노선을 담아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당의(黨義)
우리는 오천년 독립자주하야 오든 국가를 이족(異族)일본에게 빼앗기고 지금 정치의 유린과 경제의 파멸과 문화의 말살 아래서 사멸에 직면 하야 민족적으로 자존을 득하기 불능하고 세계적으로 공영을 도키말유(末有)한지라.
이에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원수 일본의 모든 침탈세력을 박멸하야 국토와 주권을 완전광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하여 내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며 외로는 족여족, 국여국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로 향함.
※ "1929년 당시의 당의와 당강은 1940년 한국독립당이 출범하면서 조소앙에 의해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한국독립당 창립경과 속에 한문으로 번역되어 전해진다. 원래는 위에서 처럼 우리말로 되었던 것임이 분명하다. 이를 조소앙이 한국독립당의 당의 해석 등에서 원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에 따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앞의 문단 숫자는 원래 없는 것이지만 역시 후일 조소앙이 분류한 바에 따라 설명의 편의상 붙인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3, p.396.
당강(黨綱)
  1. 대중에 대하여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할 것
  2. 엄밀한 조직 하에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3.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단체와 연락을 취할 것
  4. 보통선거제를 실시하여 국민참정권을 평등하게 하고, 기본 권리를 보장할 것
  5.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하여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6. 생활상의 기본지식과 필요기능을 수득하기 위해 충분한 의무교육을 공비로써 실시하여 국민의 수학권을 평등하게 할 것
  7. 민족자결과 국제평등을 실현할 것
  8. 세계일가의 조성에 노력할 것
출처: 〈도산 안창호의 민족혁명론〉, 2022, 박만규.

당의와 당강은 조소앙이 제시한 삼균주의를 기본골격으로 삼았다. 이 이론을 그려내기 시작한 출발점은 1919년 2월에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였다고 추정된다.[22] 그런데 이것이 정립된 시기는 대체로 1927~28년 무렵으로 보인다.[23] 이 시기 중국관내지역에서 유일당운동이 시작되고, 국내에서도 신간회가 창립되는 무렵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삼균주의가 드러난 것이 바로 한국독립당의 당강이다. 조소앙이 1930년에 쓴 「동삼성한교문제현상급기혁명추세」, 1931년 「대한민국임시정부대외선언」 등에 와서 삼균주의가 완전한 이해체계를 갖추었다. [24]

한국독립당의 이념은 3가지 특성이 있다.

첫번째 특성, 민족주의, 민주주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가 붕괴된 후, 민족주의 세력이 나서서 이 당을 결성했다. 정강 속에서 보통선거제와 국민기본권의 평등조항 등이 있다. 그리고 복국 후에 건립할 국가의 정체성에 대하여 민주공화국과 민주입헌제를 각각 주장했다.

두번째 특성, 대일투쟁방법으로 민중적 항일 투쟁과 무력적 파괴의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한국독립당의 다음과 같은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① 국내 민족에 대하여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혁명역량을 집중한다.
② 엄밀한 조직 하에서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 진행한다.
③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운동단체와 함께 협찬을 도모한다.

이는 민족의 혁명역량 집중과 조직화로 민족적 투쟁과 무력적 파괴를 전개하고 나아가 세계 피압박민족과 협력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보이는 '민중적 반항'이나 '무력적 파괴'만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을 성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10년 동안의 전쟁비용을 마련한다거나 군대를 양성하는데 힘을 쏟은 한국노병회의 노력의 결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열투쟁이라는 방법이 있었다. 한국노병회를 바탕으로 조직된 병인의용대였다. 이 방략으로 이어나간 것이 한인애국단상해한인청년당의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심으로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수행을 할 수는 없었다.[25] 당시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략이 요인암살, 적 기관 파괴와 같은 의열투쟁의 방략이었다.

세번째 특성, 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로 한다는 사회주의적 성격이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몇가지 견해가 있어왔다.
러시아 혁명 이후 파급된 사회주의 물결이나 쑨원삼민주의 영향[26]
② 제도와 정책면에서 서유럽의 사회주의 계보이지만, 기존의 이념과 다른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혁명성, 민족성, 평화지향성을 내포.
③ 강령적 사고에만 머물러 있을 뿐, 구체적인 국정운영의 경륜에 우러난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고 이해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의 집산 과정에서 정치적인 상징성만 가진 사회주의적 보색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27]

임시정부 구성원이 이해한 사회주의적 성향은 1920년대 후반기에 일어난 유일당운동을 통해 익숙하거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세계경제대공황(1929년)을 경험하면서 굳어진 것이었다. 여기에서 눈길을 끌만한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강령에 포함한 일이 이념적인 분화와 갈등이 생긴 후, 이념적인 접근이 처음으로 이루어 졌다. 이것은 민족주의 세력이 사회주의 이념을 상당히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가 그러했다.

6. 대외 활동

6.1. 외교

한국독립당이 비밀 조직으로 출발했으므로 결성 무렵의 활동을 확인하기 어렵다.[28] 자료에 보이는 최초 활동은 1930년 10월 초에 나타났다. 난징에서 제 4차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윈회가 열리고 장쉐량이 난징에 방문한 것이 그 계기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에 관한 문제를 중국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조소앙박찬익을 각각 그 대표로 선정하여 파견하였다. 이들은 난징시에서 장제스장쉐량을 비롯한 중국국민당정부의 주요 인사를 방문하고 한국독립당의 주의, 강령 등을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이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이 제출한 청원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원조건
1. 난징정부는 길돈(吉敦)사건에 대하여 관대한 처리를 취하여 체포된 한인에 대해서는 곧 석방할 것을 바란다.
1. 한인에 대한 퇴거와 배척적 행동의 제지를 바란다.
1. 재중한인의 독립운동원에 대하여는 정치범으로 대우하고 일본관헌에 인도하지 않을 것을 바란다.
1. 아직 중국국적을 가지지 않은 자에 대해서도 그 특수 정황에 비추어 적에 통한자와 범법한 자를 제외하고 대체로 일본국적을 인정하지 않을 것을 바란다.
1. 이미 중국국적에 있는 자에는 중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어 차별대우가 없기를 바란다.
1. 본년 새로 제정된 토지제한법과 입경입적제한조례를 정치하기 바란다.
1. 한인유민에 대한 사무기관을 설치하여 신중히 한인의 교육, 산업, 자치 등을 처리를 행하기 바란다.[29]

여기에 나오는 길돈사건이란 8월 1일 인터내셔널 기념일 및 8월 29일 국치 20주년을 맞이하여 1930년 여름에 전개된 한인중국공산당원의 항일투쟁을 말한다. 1930년 「5.30 폭동」으로 대표되는 중국공산당 소속 한인들의 대규모 투쟁이 이어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국민당 정부에 검거된 한인들을 관대하게 대우하고, 결코 일본인으로 취급하지 말며, 중국에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주된 내용이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이 중국 정부중국국민당에 청원하고 교섭한 것이다.

1931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외교활동이 공식적으로 등장하였다. 임시정부 외무장 조소앙이 작성한 선언이 조완구, 조소앙, 김철, 이동녕, 김구 등 국무위원 정체 이름으로 중국국민당 정부에 전달된 것이다.[30] 이 선언은 난징에서 개최되고 있던 중국국민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방침과 정책을 알리기 위해 4월에 작성되었다. 5월 12일 이를 가지고 난징으로 파견된 인물은 안창호였다.[31]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독립당이 선언에서 두 가지 사항을 요구하였다. 하나는 옛 한국영에 민주독립국가를 확립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균등제도를 실현한다는 정책이었다. 앞의 것은 과거 시기의 공동목표이며, 뒤의 것은 건설시기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밝혔다. 한국인은 20년 걸쳐 「독립국가지확립」이라는 목표 아래 독립을 요구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균등제도를 실현하기 위해 한국독립당은 주력군이 될 것이며, 따라서 한국 민족의 공동요구는 「균등제도지민주적독립국가」임을 밝혔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의 그 근간을 삼고 한국독립당이 민국 전체를 기초로 삼아 균등주의를 고집해 나가는 것이 임시정부의 주의이며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또 이 선언은 일본의 만몽정책을 폭로하고 동북삼성의 한국인 문제를 거론하면서 한국독립당과 중국국민당의 절실한 연락을 요구했다.[32]

6.2. 선전공작

선전공작이 구체적인 활동으로 드러난 것이 기관지 발행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중앙본부와 지방 지부 별로 여러가지 기관지를 발행했다. 당 본부는 『한보(韓報)』, 『한보특간(韓報特刊)』, 『상해한문(上海韓聞)』[33], 『진광(震光)』 등을, 광둥지부에서는 『한성(韓聲)』[34]을 발행하였다. 『한보(韓報)』[35]는 창당 무렵에 발간된 최초의 기관지이고 『한보특간(韓報特刊)』[36]은 그 자매지였다.[37]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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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만주 혁신의회, 지청천이 이끄는 한독당과 이름만 같지 별개의 정당이다.[2] 당을 해체하고 1935년 7월 5일~1935년 9월 25일기간 동안 민족혁명당에서 활동[3] 1940년 재건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의 3당 합당[4] 김인덕은<결정>에서 “조선의 어느 공산주의자 그룹도 국제당 지부로 승인 할 수 없다”는 내용은 분명히 “조공을 해산시킨 지부승인 취소의 내용이었다”라고 평가한다. 그는 이어서 코민테른의<12월테제>는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파벌적 요소의 잔존, 조직구성에서 지식계급·학생중심의 편향, 주의자의 조직활동의 불철저성을 지적한 점에서 올바르지만 당시 조선의 정세에 부합하지 않는 편향을 범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공산주의자 조선인은 중국공산당이나 일본공산당에 흡수되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해야 하는 것인데, 기약이 없어서 이때부터 공산주의와 협력을 이탈하는 독립운동단체들이 있었다.[5] 이 시기 사회주의 세력이 주창한 협동전선의 비상설성 비고정성은 일국일당 원칙을 내세우는 코민테른중국공산당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이었고 국제주의 노선과 궤를 같이하는 통일론이었다. (김영법, 「1920년대 후반기의 민족유일당운동에 대한 재검토」, 『한국근현대사 연구』 1, 129~134쪽[6]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645쪽[7]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672~676쪽[8]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차장과 비밀항일결사인 대동단의 단장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9] 김희곤,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313쪽[10] 때문에 서북인사, 특히 안창호를 중심으로 조직운영이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런데 안창호의 자금을 맡고 있던 옥성빈이 변절자라고 처단된 뒤에는 그의 세수가 꺽였고, 특히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에는 안창호이유필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난 후에는 조소앙항저우시에서 한국독립당(1935년)을 이끌어나가게 된다.[11] 김정명, 『조선독립운동』 2, 원서방, 1967, 464쪽[12] 조소앙, 「한국독립당의 근상(近像)」, 『소앙선생문집』 상, 횃불사, 1979, 106쪽[13] 한시준, 「'상해한국독립당' 연구」, 『용암치문섭교수회갑기념사학논총』, 신서원, 1989, 605쪽[1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4, 1973, 618~619쪽, 항저우로 이동한 직후에는 이사는 이유필, 안공근, 김두봉, 이시영, 최석순, 엄항섭, 송병조, 박찬익, 김구, 김철, 이동녕, 조완구, 조소앙, 김석 등 14명이다.(1932년 6월)[1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 1966, 573쪽[16]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824쪽[1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572쪽[18] 1930년대의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의 여당임은 분명하지만 인적구성으로 볼 때, 임시정부 그 자체의 동일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1940년에 조직된 같은 이름의 당은 이와 성격을 달리했다. 1940년 5월에 한국국민당(1935년), 조선혁명당(1937년), (재건)한국독립당(1935년)이 통합하여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체인 한국독립당(1940년)을 결성했는데, 이때 김원봉민족혁명당민족협동전선을 이루었고, 이어서 신한민주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조직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집결했다. 참고로 1944년 임시정부 요직에 대한 정당별 분포를 보면, 한국독립당(1940년)이 주석을 비롯하여 국무위원 11명 가운데 8명, 부장 12명 가운데 8명 등 절대 다수를 차지했고, 민족혁명당이 국무위원 2명, 부장 2명으로 그 다음이었다. (胡春惠 著(신승하 역) 『중국 안의 한국독립운동』, 240쪽 참조) 이 당시 한국독립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가졌고, 여러 야당을 주변에 둔 임시정부의 진정한 여당의 구실을 했다.[19]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818쪽[2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4, 610쪽[21] 김정주, 조선통치사료10, 697쪽[22]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93, 403쪽[23] 김용신, 「조소앙 삼균주의의 역사적 위치」, 『사총』23, 고려대학교, 1979, 57쪽[24] 이들 자료는 조소앙(삼균학회 편), 『소앙선생문집』상에 수록되어있다.[25] 1920~1930년대 초, 시기는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군이 따로 파벌로 있어서 임시정부의 명령계통하에 있지 않았다.[26] 胡春惠 著(신승하 역) 『중국 안의 한국독립운동』, 223~225쪽[27] 신일철, 「한국독립운동의 사상사적 성격」, 『아세아연구』, 59,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8, 152쪽[28] 이 당은 비밀결사조직으로 출발했다. 조소앙은 그 이유를 '비밀리에 정책을 운용하고 활동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 조소앙 저(삼균학회 편), 「한국독립당지근상」, 『소앙선생문집』, 상, 105쪽) 이글은 1931년 1월 만주사변 전에 한국독립운동자들의 활동상황을 소개한 것으로 당시 내용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29]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676쪽[30]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676쪽[31]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672쪽[32]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673~675쪽[33] 상하이 시기에 발행[34] 『진광(震光)』은 1934년 1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재지인 항저우시의 한국독립당에서 창간하였다. A5판 44면의 국한문 혼용으로 발간되었다.『한성(韓聲)』은 중일전쟁으로 중국군이 밀려 중국국민당 정부를 따라 광저우 체류 시기에 발행[35] 국한문[36] 중국어로 발행[37] 한시준, 「'상해한국독립당' 연구」, 『용암차문섭교수회갑기념사학논총』, 621~6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