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Battle of Artois 2차 아르투아 전투 | ||
제1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기간 | ||
1915년 5월 9일 ~ 5월 18일 | ||
교전 지역 | ||
프랑스 아르투아 | ||
교전국 |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 독일 제국 | |
동원 병력 | ||
: 20개 사단 | :18개 사단 | |
지휘관 | ||
조제프 조프르 더글라스 헤이그 |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 |
결과 | ||
무승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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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서부전선의 프랑스 아르투아 지역에서 펼쳐진 전투로 제2차 이프르 전투와 동시기에 일어났다.2. 배경
1914년 서부전선에서의 결과로 랭스부터 아미앵에 이르는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었는데 능선이 산재한 고지대로 군사적으로 상당한 요충지였고 이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영불연합국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2차 아르투아 전투가 발발하였다.3. 전투
1914년 이후 전장이 참호전 양상으로 바뀌면서 전투의 양상도 달라졌다. 기존의 전투방식으로는 견고하게 형성된 적군의 참호를 돌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기에 협상국은 돌격에 앞써 대량의 야포를 이용하여 십수만발의 포탄을 독일군 참호에 미리 퍼부은 뒤 망가진 방어선을 복구하고 병력을 수습하기 전에 돌격하여 참호를 점령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군은 포병 전력들을 끌어모으면서 공세 준비를 하였다. 전투의 중요한 부분은 비미 리지로 주공을 맡은 프랑스군은 이 지역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영국군은 이를 위한 조공을 담당하여 오베르 지역에서 전투를 하였다.5월 9일 프랑스군의 1,200문의 야포를 이용한 포격이 시작되면서 2차 아르투아 전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기습적으로 당한 독일군이 정신을 못차리는 와중에 프랑스군이 작전대로 빠르게 돌진하면서 10군이 비미 리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선봉인 제33군단과 후발대의 간격이 지나치게 벌어졌고 후속 지원을 받지 못한 18군은 결국 전열을 정비한 독일군의 반격에 의해 점령했던 비미 리지를 다시 독일군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는 10군 사령관 뒤르발의 능력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돌파속도를 과소평가하여 예비대를 너무 뒤에 배치해 일어난 문제였다. 이후 5주 간 비미 리지를 점령하기 위해 양측은 치열한 공방전을 지속하였고 프랑스는 기어코 10만의 목숨을 갈아넣어 작전 개시 후 10km를 나아갔지만, 비미 리지만큼은 탈환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열심히 피를 뿌리는 사이 이번에는 영국도 공세에 동참하여 지난 3월 점령하지 못한 누브 샤펠 방면으로 다시 진격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모든 물자가 부족하여 공격은 둔화되었다. 그럼에도 누브 샤펠 동쪽 오베르 능선으로 기어코 돌격해 하루 만에 1만 명이 희생되었고 추가로 2만 명의 목숨을 더 갈아넣었지만 1km 전진에 그치면서 공세는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