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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결성 일화3. 팬덤 문화의 시초4. 청소년들의 대변인5. 대중가요계의 판도를 바꾼 변화들6. 원조 자체 프로듀싱 아이돌7. 멤버 관련8. 다른 그룹과의 관계9. SM엔터테인먼트 관련10. 당시 대중문화계 영향력11. 각종 기록 제조기12. 동반 입대 약속 일화13. 기타
H.O.T.는 "High-five Of Teenagers(하이파이브 오브 틴에이저)"라는 그룹명의 뜻처럼 십대로만 이루어진 그룹이 기획의도였기 때문에 10대가 넘은 멤버는 교체되기로 돼있었다고 한다. 즉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룹에서도 졸업하는 시스템이였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거대한 팬덤과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게 되면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관련 기사
H.O.T. 오디션 비하인드
멤버 모두 이수만에 직접 발탁되어 데뷔한 케이스. 앞서 서술한 봐와 같이 이미 송파구 지역에서 각각 '오금고 하얀 미소', '송파구 노란바지'로 유명했던 강타와 문희준이 일찌감치 SM 연습생으로 발탁되었으며, 길거리 캐스팅된 이재원에 이어 구미 지역에서 춤짱으로 각종 댄스대회 트로피를 휩쓸며 유명세를 타던 장우혁이 그 뒤에 우여곡절 끝에 계약을 하였고,[2]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주 지역 오디션으로 토니 안이 합류하게 됐다. 초기 연습 영상
원빈이 데뷔 전에 SM에 오디션을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수만이 원하던 컨셉과는 이미지가 안 맞아서 탈락했다고 한다.[3] 만약 붙었다면 십중팔구 H.O.T. 멤버가 되었을 거라고. 또한 김종민 역시 이 당시에 오디션을 봤었는데 "백댄서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듣고 탈락인 줄 알고 스스로 그만뒀다고 한다.[4] 하지만 이후 문희준이 밝히기로 그게 합격 통보였다고. 만약 김종민이 그대로 남았다면 김종민 역시 H.O.T. 멤버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이외에 개리[5], 앤디[6], 황대균, 장용진[7], 심지어 타이거JK[8] 등 여러 후보가 있었다.[9]
데뷔 당시 멤버 전원이 고등학생으로 이뤄진[10] 그룹이다보니 데뷔 전에는 주로 방학 때에만 연습을 했으며, 데뷔를 앞두고는 합숙 훈련을 해가며 노래와 춤을 배웠다고 한다.
H.O.T.는 국내 기획형 아이돌 그룹의 원조로,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음악계 판도를 뒤집어놓았다면 H.O.T.는 10대 아이돌 팬덤문화의 시작이었던 셈. 거대 팬덤의 원조인 Club H.O.T.는 처음으로 '팬덤 문화'를 형성하며 당시 H.O.T.의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나 H.O.T.가 출연하는 드림콘서트[11]가 열리는 날에는 장관 명의로 전국 교육청에 당시 학생 신분인 팬들의 조퇴금지령 발령이 내려졌고, 새벽 2시까지 지하철 연장 운행 등의 각종 기록을 만들어냈다. H.O.T. 이전에도 나훈아, 남진, 조용필, 소방차 등의 오빠부대들의 팬덤이 존재하긴 했지만 팬들이 하나의 조직으로 인정받고 팬(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팬클럽 문화의 시작은 Club H.O.T.가 처음이였다.
신드롬적인 인기를 자랑했던 '10대들의 승리'라는 팀명처럼 매 앨범마다 10대들의 고민과 고충을 담은 가사로 10대 청소년들을 대변했고 학교 폭력 사태를 담은 데뷔곡 '전사의 후예'를 시작으로 '늑대와 양', 'We are the Future', '열맞춰!' 등 사회 비판적인 메세지를 담은 강렬한 퍼포먼스를 연이어 발표했다. 특히 4집 앨범 타이틀곡 '아이야! (I Yah!)'는 1999년 일어난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를 모티브로 큰 화제를 모은 곡이다.
화려한 퍼포먼스와 칼군무 또한 H.O.T.가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곡 중 하나인 'We are the Future'는 당시 학교 축제에서 10대 남학생들의 단골 무대로 커버된 곡이며 많은 후배 아이돌 가수들도 수 많은 커버 무대를 재현할 만큼 절도있는 동작과 완벽한 칼군무를 자랑하고 있다.
H.O.T.가 무겁고 강렬한 타이틀곡 '전사의 후예'에 이어 가볍고 발랄한 분위기의 후속곡 '캔디'를 히트시키자 이 같은 현상은 당시 활동하던 보이그룹 사이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며, H.O.T.와 비슷한 활동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음악을 공부하는 건 좋다, 하지만 좋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수라는 건 알아주길 바란다. 너희들이 좋은 곡을 쓰면 그 곡을 우린 무조건 앨범에 수록할 거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썼다고 해서 다른 작곡가 곡보다 나쁜데도 무조건 쓰진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솔직히 이제 시작한지 1, 2년 밖에 안 된 너희들이 어떻게 전문 작곡가들보다 좋은 곡을 쓰겠니. 근데 난 다만 너희들이 연습하고 춤 연습, 노래 연습을 하고 너희가 무대에 서서 멋있게 보일 연습을 할 시간에 곡 쓰는 거에 빠져서 그 연습을 게을리 하고 무대 섰을 때는 멋이 없는데 너희 스스로는 너희들이 작곡한다고 멋있어져 있고 그런 마음만 갖지 않길 바란다. 음악은 너희들이 좋아서 하길 바란다.
3집 앨범부터는 멤버 전원이 작사/작곡/편곡 겸 공동 믹싱/프로듀싱에 참여해 온, 원조 자체 프로듀싱 아이돌이였다.[12] 멤버들이 쓴 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이자 H.O.T.를 대표하는 곡이기도 한 '빛'은 강타 작사/작곡/편곡으로 3집 이전에 쓴 곡이다. 처음엔 너무나도 부족했던 실력 탓에 모두 퇴짜를 맞았는데 이수만이 처음 '빛'을 듣고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이수만의 세세한 디렉팅 끝에 다시 재작업에 들어갔고 그런 과정을 통해 '빛'이 처음 선정이 되었다고. 이를 계기로 이수만이 다른 멤버들의 곡을 다시 듣게 되면서 그렇게 3집에 멤버 전원의 곡이 들어갔다고 한다.
SM엔터테인먼트가 현재의 국내 굴지의 최고 연예기획사로 발돋음한 데는 H.O.T.의 성공이 매우 컸다. 멤버들이 처음 다같이 모여 연습을 시작했던 곳은 송파구석촌동의 한 작은 주택인데 그 곳이 SM 사무실이였다. 당시 자료영상을 보면 매우 열악 of 열악한 환경을 자랑한다(...). 이수만은 H.O.T.의 연이은 앨범 히트로 점점 회사의 규모가 커지게 되면서 사무실을 옮겨다니다 현재 SM의 성장 발판이 된 강남 노른자땅에 위치한 사옥(일명 압구정 셀러브리티센터[16])을 사들였다.[17] 또한 H.O.T.를 시작으로 연이은 성공가도를 발판으로 SM은 2000년 4월 한국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는 최초로 코스닥 시장에 등록하게 된다.
김대중 정부 시대에 활동을 해서인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이 많다. 1997년 대선당시 TV 토론에 나왔을 때 H.O.T.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던 일이 있었는데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바로 "춤 잘 추죠~"라고 답했으며,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H.O.T.를 언급한 일화가 있다. 관련 기사 1998년 7월에는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해외 관광객 유치와 국가이미지 제고를 위해 제작한 국가홍보 CF에 청사초롱을 들고 '코리아 위드 러브'라는 노래에 입을 맞추며 CF를 촬영했다. 현직 대통령이 직접 출연한 광고로 큰 화제를 모았는데 당시 광고를 보면 국내 톱스타 58명이 대거 출연을 하다보니 몇몇은 거의 안 보이는 엑스트라급으로 나오는데도 흔쾌히 출연허락하고 나왔을 정도로 톱스타라면 누구나 출연하고 싶어했던 큰 행사였다. 이후 동년 8월 28일에는 청와대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관련 영상 H.O.T.가 한국가수로서는 처음으로 2000년 2월 1일 중국 북경공인체육관에서 단독콘서트를 개최한다고 발표하고 이수만과 함께 중국으로 향하던 동년 1월 21일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주중국 대한민국 대사관 후원으로 개최된 공연인만큼 김대중 대통령을 대신한 문화관광부장관으로부터 금일봉을 전달받고 따뜻한 격려를 받기도 했다. 관련 영상
▲ 김대중 대통령과 국가홍보 CF 촬영
한류 1세대 대표주자
한류 1세대를 대표하는 그룹인 H.O.T.의 중국 북경공인체육관에서 1만 2천여 명을 동원한 단독 콘서트가 성황리에 끝나고 북경의 한 신문은 중국의 이른바 10대를 가리키는 '소(小)황제'들의 믿지 못할 광적인 무대 반응을 보고 "한류(韓流)풍폭!!!"이란 헤드라인의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당시 중국 청소년들은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지방 도시에서 올라와 그 전날부터 공연장 앞에 대기할 정도로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멤버 강타 말에 의하면 멤버들은 콘서트를 앞두고 중국 본토 사람들보다는 중국에 거주중인 교포들이 공연장을 더 많을 찾을 것으로 예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민들보다도 중국 본토 사람들이 공연장 90%의 관중석을 꽉 채우고 열띤 반응을 보내는 모습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고 한다. 관련 영상 이때부터 중국언론에서도 '한류'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영향으로 SM에는 H.O.T.를 동경하기 시작해 한국을 찾아 연습생이 된 중국인들을 흔히 볼 수 있었으며, H.O.T.를 통해 중국 시장의 잠재력을 확인한 이수만의 극심한 중국 사랑도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90년 중반만해도 10대 청소년들에 인기 있는 아이돌 가수들이 주로 등장하는 잡지들은 3~5개사 이내에 불과했으나 H.O.T. 등장 이후 10여 개나 대폭 늘어났다. 잡지에서 늘 표지나 메인을 차지하였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자랑했는데, H.O.T.가 해체하면서는 폐간이 되는 잡지들이 대거 생겨날 정도였다.
1997년 8월 1일자 텔레리서치와 KBS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부모보다 더 좋아하는 인물" 조사에서 13.3%의 지지율을 얻어 H.O.T.가 선정됐다.(동아일보 발표) 이런 영향으로 동년 11월 24일 MBC <임백천 이경규의 좋은 밤입니다>에서는 딸과 부모가 함께하는 H.O.T. 스페셜이 특집 방송되기도 했다.
1998년에는 방송 3사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 수상으로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그랜드슬램과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첫 번째 콘서트 1998 H.O.T. 1st CONCERT는 올림픽공원 3회 공연의 티켓 3만 6천 장을 20분 만에 매진시키며, 국내공연 사상 최단시간 매진 기록을 세웠고, 1999년 1월말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두 번째 콘서트 1999 H.O.T. THE 2ND CONCERT 또한 총 10회 공연을 단 26분 만에 매진시키며, 공연 횟수를 연장하기에 이르는 등 90년대 각종 공연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 세종문화회관 같은 공연장에서 10회 이상 연속 공연을 여는 것은 사상 처음있는 일이였다.
1998년 12월말에 공개된 '우리들의 맹세' 뮤직비디오는 인기만화가로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천계영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큰 화제를 모았다. 천계영이 H.O.T. 멤버들의 캐릭터 디자인과 줄거리를 담당했고 민경조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공중파 방송에서 처음 공개되자마자 화려한 색감과 멤버들의 우정과 맹세를 담은 스토리로 엄청난 인기를 얻어 이후 팬시상품으로도 출시되기도 했다.
▲ 만화가 천계영이 그린 H.O.T. 멤버들
국내 아이돌 가수 최초 자서전 출간
1999년 2월 8일 아이돌 가수로는 최초로 자서전을 출간했다. 자서전 <H.O.T Forever>는 멤버들의 자라온 이야기와 가수로 데뷔하게 된 계기, 동료연예인, 고교시절 담임선생님 등이 지켜본 멤버들의 성격 관련 글 외에 다양한 사진들이 담겨져 있다.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교보문고 등의 전국주요서점과 한국서점조합연합회의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으며, 2월 18일 출간된지 열흘만에 10만부가 팔려나가며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등극, 국내 역사상 최단기록 판매를 세우기도 했다.[19]
1999년 3월 19일에는 IMF 외환위기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국연예제작자협회의 기획으로 63명의 가수들이 노개런티로 동참한 <지금 하나되어 - 나우 앤 뉴> 녹음에 참여했다.
▲ <하나되어> 뮤직비디오 촬영
국내가수 최초 마이클 잭슨과 한 무대 공연
국내가수 최초로 마이클 잭슨과 한 무대에 섰다.[20]당시 인터뷰 1999년 6월 25일 세계 불우어린이돕기를 위한 자선 공연의 일환으로 한국에 내한한 마이클 잭슨의 공연에 초대된 바 있는데, 이날 공연에선 마이클 잭슨이 아닌 H.O.T.가 엔딩무대를 장식한 것이 당시에 큰 이슈가 되었다. 그 이유로 공연이 열린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 H.O.T. 팬들이 거의 대부분의 좌석을 채우고 있어[21] 마이클 잭슨이 엔딩을 할 경우 H.O.T.를 보러온 팬들이 공연장을 미리 빠져나갈 것을 방지하고자 마이클 잭슨 측에서 H.O.T.에게 먼저 엔딩을 제안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10년 후 향년 50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된 후 2009년 한 연예뉴스 프로그램에서 문희준이 당시 마이클 잭슨과 함께 무대에 올랐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1999년 8월에는 아이돌 가수 최초로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이하 MTV VMA)에서 수상을 했다.[22] 이 시기에 H.O.T.는 4집 뮤직비디오 촬영차 미국 뉴욕에 체류중였는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가해 직접 상을 건네 받았다. H.O.T.가 받은 상은 International Viewers Choice for Korea 부문이였는데, 이 상은 H.O.T.의 아시아 인기가 나날히 치솟으면서 MTV의 아시아권 시청률이 높아진 영향으로 신설된 부문이었다. 원래 없던 부문의 상이 H.O.T. 엄청난 인기 때문에 생긴 셈.
국내가수 최초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단독 콘서트 개최
1999년 9월 18일 국내가수 최초로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 1999 LIVE IN SEOUL를 개최했다.[23] 당시 유료 팬클럽 인원수만 10만 명에 달할만큼 막강한 팬덤을 보유했던 터라 팬들을 전부 수용할 곳이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밖에 없었다. 리더 문희준에 의하면 H.O.T.의 단독 공연이 열리기 전까지는 해외 유명 뮤지션만이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대관이 가능하다는 답변에 각종 자료를 보내 공연 허락을 받기까지는 무려 2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관련 영상 H.O.T.가 국내가수의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단독 공연의 포문을 연 셈이다.
2000년 국내가수 최초로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대규모의 단독 팬미팅을 개최했다. 단독 콘서트로 모자라 팬미팅을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최하는 일은 사상 이례적인 일이였다.
2001년 2월 27일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최된 단독 콘서트 2001 H.O.T. LIVE CONCERT - H.O.T. FOREVER는 7만 관객을 동원하며[24] 현재까지도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최다인원을 동원한 단일 콘서트 기록으로 남아있다. 관련 영상 이날 공연은 심지어 평일인 화요일에 열린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국내공연 사상 최단기간이자 최다판매 기록으로 티켓판매시작 10분 24초만에 매진되었는데 지금같이 인터넷 예매없이 은행에 줄을 서서 구매했던 시절이라 더욱 위엄이 느껴지는 대목.
2018년 10월 13일과 14일 양일간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 <2018 Forever High-five Of Teenagers Concert>를 개최했다. 콘서트 소식이 뜨자마자 미국빌보드 공식 SNS계정에서도 소식을 전할 정도로 해외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링크 6438일의 세월이 흘러 17년 만에 성사된 콘서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팬들은 물론이고 해외에 거주 중인 팬들과, 중화권 팬들까지도 대거 공연장을 찾아 양일 총 2회 10만 명의 흰 물결이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1년 후에도 콘서트를 개최했으나, 향후 재개최 여부는 불투명하다.[25]
2011년 3월 7일 동두천시 제28보병사단[26]에서 전역식을 가진 막내 이재원의 부대 앞에는 문희준, 장우혁, 토니 안, 강타가 직접 참석해 제대를 축하했다. 멤버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은 2004년 SBS '스타의 전당' 핸드프린팅 행사 이후 7년 만의 일이였다. 이날 특별히 뭉치게 된 이유에 대해선 H.O.T. 활동 당시 멤버들이 모두 동반 입대를 해서 같이 제대하자는 약속을 했었다고 한다. 비록 동반 입대의 약속은 못 지켰지만서도 막내가 전역하는 곳에 모든 멤버가 모여 그렇게라도 약속을 지키게 됐다.
2018년 2월 무한도전토토가3 - H.O.T.를 통해 무려 17년 만에 완전체 모습으로 팬들과 무대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이때 유일한 30대인 이재원을 제외한 멤버가 모두 40대가 된 후였다. 그동안 재결합설은 숱하게 제기됐었지만 소문으로만 끝났던 상황인지라 팬들도 반가움과 우려를 동시에 나타내기도 했는데 그런 우려 속에서도 17만 명이라는 역대급 인원의 신청자가 대거 몰리는 등 뜨거운 화제 속에 방송되었다. 방송 직후에는 H.O.T.의 히트곡들, 특히 '빛'과 '행복'은 2월 18일자 오후 차트인(TOP100)을 기록하며 역주행을 기록했다.
2023년 5월 7일 멤버 이재원이 본인의 인스타 그램에 완전체로 모여 식사하고 있는 사진을 올려 근황을 알렸다.
멤버들 중 강타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직접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였거나 운영 중이다.[31] 토니 안은 먹방 채널을 개설하였으나 현재는 운영을 하지 않고 있다. 문희준은 가족 채널을 운영 중이나, 가족 위주라 당사자는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32] 장우혁은 브이로그 방식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며, 이재원의 경우 채널을 운영하였으나 2023년 11월에 올린 영상 이후로 업데이트가 중단되었다가 현재는 폐쇄되었다.
[1] 이후에도 이수만은 로테이션 시스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동방신기와 SUPER JUNIOR에 도입을 시도하였으나 팬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뒤 NCT에 로테이션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나 2023년 이수만이 경영에서 물러나면서 로테이션 시스템 자체가 폐기되었다.[2] 장우혁은 당시 댄스대회에서 SM 관계자에 명함을 받았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게 되고 H.O.T. 최종멤버 구성에 고민을 거듭하던 이수만이 직접 구미로 내려가 장우혁의 어머니를 설득해 계약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관련 영상[3] 그 후 원빈은 당시 신생 방송국이었던 제일방송(현 MBC 드라마넷)의 공채 탤런트로 데뷔하게 된다.[4] 그 후 김종민은 코요태의 멤버로 활동하게 되며 차승민이 탈퇴한 이후 합류하였다.[5] 후에 허니패밀리를 거쳐 리쌍의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6] 토니안이 미국에서 오디션에 참가할 때 앤디도 있었으며, 토니 안과 같이 합격하였으나, 앤디의 경우 당시 부모님의 강한 반대로 끝내 합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 같은 소속사의 아이돌 그룹 신화의 멤버로 데뷔한다.[7] '캔디'와 '행복'의 작곡가다.[8] 타이거JK가 미국에 있을 당시 래퍼로 제안받았다고 직접 밝혔다.[9] 본래 당시 초기에 연습생은 10명이었지만 결국 5명이 나가고 마지막 남은 5명이 데뷔한 게 바로 H.O.T.다.[10] 2014년에 데뷔한 Red Velvet의 아이린이 무려 91년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의 아이돌이 요즘 아이돌에 비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어린 데뷔 나이와 짧은 수명을 가졌었는지 알 수 있다.[11] 원래 드림콘서트 무대는 세로설치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으나, H.O.T. 팬덤을 수용하기 위해 세로가 아닌 가로로 무대를 설치하고 플로어 좌우 트랙에도 스탠딩석을 만들어 수용인원을 두배로 늘릴 정도로 당시 Club H.O.T.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H.O.T. 해체 후에는 무대설치가 다시 세로로 돌아갔으며, 스탠딩석도 대폭 줄여졌다.[12] 지금에서야 작사/작곡/프로듀싱하는 '올라운더 아이돌'이 흔해진 편이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멤버들이 곡을 써도 워낙 어린 나이에선지 소속사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는 후려침을 당할 정도로 업계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써줬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강타가 들려준 당시 일화에 의하면 한 번은 멤버들이 모두 성인이 된 후에 같이 술을 마시러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음악하는 사람 왈 " '빛' 네가 쓴 거라며? 멜로디만 정리한 거지?"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면서 강타가 미디 작업 다 했다고 답했는데도 시퀀서 뭐 쓰나, 드럼 뭐로 찍었냐, 샘플러 뭐 쓰냐라는 둥의 테스트를 했었다고 한다(!).무슨 무례지[13] 이처럼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흔한 혈액형이 A형이고 가장 적은 게 O형인 점과는 상반되는 혈액형 분포도는 다른 아이돌그룹에서도 보이는 현상이다. 유독 아이돌이라는 직업군에서는 B형과 O형이 많은 반면 A형은 적고 AB형은 매우 희귀하다.[14] 당시 토니의 출산예정일은 6월 6일이었으나 어머니가 날짜를 하루 미뤄 다음날인 7일에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고 한다.[15] 정작 강타의 경우 음력으로 생일을 보낸다고 입장을 밝혔으며, 그룹 활동 시에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했던 생일파티도 음력 생일을 기준으로 열렸다.[16] 이수만 개인재산이기 때문에 이수만이 SM의 대주주에서 물러난 현재는 SM과 관련이 없는 건물이다. [17] 1999년 당시 매입가는 20억 원였지만, 2021년 기준으로는 500억 원의 가치를 자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기사[18] 1994년 말에 입사하여 2005년 비등기이사에 올랐고, 2011년에 등기이사에 선임되었다.[19][20] 정확히는 보이그룹 최초로 마이클 잭슨과 한 무대에 섰으며, 이날 공연에는 H.O.T. 외에 같은 소속사인 걸그룹 S.E.S.도 한국가수 대표로 무대에 올랐다.[21] 워낙 유명한 당대 최고의 세계적인 뮤지션들이 대거 출연하는 공연이라 바로 매진을 기록할꺼란 주최사 측의 예상과 달리 표가 다 팔리지 못하고 있다가 H.O.T.를 섭외한 뒤에야 전석 매진이 됐다.[22] 국내가수 최초는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Come Back Home'으로 "MTV 아시아 뷰어즈 초이스"상을 받았었다.[23][24] 원래는 2001년 2월 23일 ~ 2월 27일 올림픽공원체조경기장에서 5일간 콘서트를 열 예정이였으나, 갑작스럽게 내린 폭설로 체조경기장 지붕이 무너지면서 공연이 미뤄진 탓에 5일 인원을 다 밀어넣어(!) 8만명을 기록했다는 설도 있긴하다. 아무튼 5일 공연이 주경기장 1일로 대체되고 당시 H.O.T. 멤버들이 재계약 협상을 앞두고 해체설까지 나돌면서 마지막 콘서트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팬들사이에도 서로 티켓을 먼저 차지하기 위한 티켓전쟁이 엄청 났었다.[25] 콘서트 기획 업체인 솔트와는 2018년에 두번의 콘서트 개최 계약을 하였고 계약에 따라 2018년과 2019년 두번의 콘서트가 열렸다. 2019년 콘서트를 통해 모든 계약이 끝난 상태.[26] 이재원은 본부근무대 군악대에서 복무했다.[27] 당시 유진도 H.O.T. 팬이였는데 H.O.T.를 보기 위해 공항에 갔다가 우연하게도 H.O.T. 매니저로부터 통역 일을 부탁받게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이수만에 직접 캐스팅이 된 케이스. 관련 영상[28] 그룹, 솔로로 두 번째 도전은 사상 최초였다[29] 문희준 (2009년 4월, 2013년 5월, 2016년 12월), 장우혁 (2011년 6월), 토니 안 (2012년 8월, 2016년 12월), 강타 (2013년 9월, 2016년 7월), 이재원 (2013년 3월).[30] 또한 세 멤버 모두 군 제대 직후에 출연하였다.[31] 강타도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에서 운영하는 공식 유튜브 채널은 있다.[32] 그러나 2022년 후반 들어 해당 채널은 업데이트가 활발하지 않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