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사
1.1. 왜 유골이 늦게 발견되었나?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군인과 경찰, 그 밖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총 동원되어 연간 30만명이 와룡산을 수색했는데 장장 11년 6개월이 지나고서야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와룡산은 높이 300m 정도의 야산에 불과하고 산이 가파른 것도 아니라 완만한 산인 데다 정상까지 올라가보면 그리 높지도 않고 동네 주민들이 산책 코스로 올라가는 수준밖에 안 된다.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다른 장소에서 피살된 아이들이 나중에 잠잠해지자 와룡산에 암매장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법의학자들이나 범죄심리학자들의 분석은 "아이들이 살해되고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매장되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와룡산은 야산이지만 아이들이 놀러갔다고 알려진 서남쪽의 '불미골'이 아니라 당시 존재하던 저수지에서 반대쪽 능선을 지난 '새방골'에서 발견되었고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와룡산에서도 골이 가장 깊고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의 분석에 따르면 1990년대 초를 기준으로 한국의 야산들 대부분이 녹화사업 전이라 민둥산에 가까웠고 와룡산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인근은 군 사격 훈련장이 있기 때문에 성인들도 발길이 뜸하였고 그만큼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비가 내리면 실개천 같은 게 형성되는 지점이기도 했다고 한다. 11년이 지나서야 유골이 발견된 이유에 대해선 사건 당일 저녁에 비가 내린 탓에 아이들의 흔적이 모두 빗물에 씻겨 내려간 탓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발견 당시 쉽게 눈에 띈 것은 그 해 여름 폭우로 살짝 덮인 흙 등이 씻겨 내려갔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살고 있던 지점에서 산 반대편까지 간 것에 대해 아이들의 부모들은 "왜 아이들이 그곳까지 갔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탄피 등을 주우러 갔거나, 범인이 일부러 아이들에게 "탄피 등이 많은 곳을 알려주겠다"고 유인했거나 아니면 정말 다짜고짜 아이들을 외진 곳까지 끌고 갔을 것 등등의 분석이 나왔다.
당시 사건을 조사하던 김재산 국민일보 기자에 따르면 경찰은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던 불미골을 중심으로 수색했는데 정작 유골이 발견된 것은 새방골이었다. 아이들이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오판한 것이 수많은 인력과 돈을 낭비하게 만든 것은 물론, 아이들까지 늦게 발견하게 하는 데 일조한 셈이다.
아무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와룡산에 대한 수색은 의외로 그리 철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여론에서도 살인이 아니라 실종, 납치, 유괴 등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당시는 살인 사건이라고 해 봐야 원한 혹은 치정과 연관된 사건이 대다수였던 데다 아이들을 범죄에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유괴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상술한 바대로 부모들의 성화를 못 견뎌 가출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앞서의 증언들처럼 와룡산에서 어린이들이 살해당한 후 암매장당할 가능성은 제기되지 않았고 암매장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1.2. 5명의 아이들을 살해한 수법
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범인이 1명이었다면 2~3명의 아이는 손으로 붙잡는다고 해도 다른 2~3명은 달아나거나 반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범행 당시의 정황을 추측하기 어렵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실험을 통해서 '어른 1명이 5명의 아이를 붙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추측했다.게다가 이 5명은 깡통이나 작대기 등을 들고 산과 들을 매일같이 뛰어다녀서 운동 신경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다. 살해된 아이들 중에는 달리기 육상대회에 나갈 정도로 달리기가 빠른 아이도 있었으며 태권도를 익힌 아이들도 있었다. 또 초등학생들이라곤 하지만 저학년이 아니라 최소 3~6학년생들이고 와룡산을 안방마냥 드나들던 운동신경을 지닌 남학생들인지라 어린이라고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을 어른 한 명이 모두 다 통제하기는 쉽지 않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 3대 영구 미제 사건 특집에서는 범죄심리학자 박지선 교수의 말을 통해 '아무리 상대가 어린아이라고 해도 5명이나 되면 범죄자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위축되는 면이 생긴다'는 분석과 범인이 1명이었다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에 오르거나 일시적으로 한두 명이 떨어져서 놀던 차에 아이들 중 일부를 먼저 발견하였고 순차적으로 살해하였을 가능성도 제시하였다고 한다. 일단 도룡뇽 알을 채집하겠다며 나갔다고 했으니 장소에 도착해 각각에 한 구역을 맡기고 그곳을 찾아보라고 했을 것이고 자연히 자신들에게 맡겨진 구역을 탐색하다가 이들 중 한 명이 우연찮게 범인에게 발견되어 희생된 후 희생자의 행방이 궁금해 찾던 다른 아이가 발견되어 같은 방식으로 희생됐을 가능성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이들 중 가장 힘이 세고 나이가 많은 맏형인 우철원 군은 두개골에 찍힌 상흔만 무려 25군데나 발견됐는데 이는 다른 소년들보다 범인에게 더 맹렬히 저항하다가 본보기로 크게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럼에도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두개골에 찍힌 'ㄷ'자 모양의 상흔들이 흐트러짐 없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이며 이는 소년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생긴 외상흔이라고 한다.
가장 막내인 김종식 군의 왼팔이 골절된 것은 범인이 소년들을 뒤에서 붙잡고 오른손으로 흉기를 내려쳤다는 가정 하에 왼팔을 먼저 들어서 막은 것으로 보아 범인은 오른손잡이이며 소년들의 좌측 두개골에 나타난 상흔들만 봐도 우측에서 위아래로 강하게 내려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규 군의 옷소매와 단추는 찢어져 있었으며 강한 물리적 압력에 의한 것으로 매듭 역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기 위해 묶은 것으로 보인다.[1]
다른 소년들과는 달리 박찬인 군과 조호연 군에게는 특별한 외상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소년들이 차례로 희생된 후 가장 마지막에 남아서 교살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다만 이 같은 의문은 인간이 '공포심에 얼어붙는 동물'이라는 점을 간과했는데, 실제로 성인이라도 눈 앞에서 잔혹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하면 그대로 얼어붙어 저항하거나 도망칠 생각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 사건사고를 통해 관찰된다. 당장 최근만 해도 시민을 지켜야 하는 경찰이 테이저건과 실탄으로 무장하고도 흉기난동을 목도하고 겁에 질려 경찰로서 해야하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채 도주한 사건이 있었으니, 고작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 공황상태에 빠져 달아날 생각도 못했음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1.3. 매장 수법
《그것이 알고싶다》를 비롯한 시사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그 외에도 해당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수많은 이들이 의외로 눈여겨보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어찌저찌 아이들을 살해했다고 쳐도 도대체 어느 세월에 어떻게 매장했냐는 것이다. 이후 이루어진 대대적인 수색작업에 탄로나지 않을 정도로 깊게,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닌 다섯 명이나 매장할 만큼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채종민을 비롯한 법의학자들은 여러 정황 증거로 보아 아이들이 희생된 직후에 매장된 것으로 추측했다.결국 이 부분은 이 사건이 후술할 프로파일러들의 의견처럼 '계획성과 우발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는 부분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일단 아무나 살해하고 매장할 목적으로 삽을 비롯한 도구를 들고 산에 갔으며 그 희생양은 5명의 아이들이었다는 것. 아이들을 살해하고 나서 바로 매장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려면 아무래도 미리 삽을 들고 산에 오르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1.4. 함승훈이 들은 비명소리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분에서 이 사건을 심층적으로 다룬 바 있는데 당시 성서국민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함승훈의 인터뷰가 눈길을 끌었다. 함승훈도 사건 당일 개구리 소년들과 비슷한 시간대에 와룡산에 갔는데 "골짜기 쪽에서 다급하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이후 유골이 발견된 2002년에 대학생이 된 함승훈은 다시 이 방송의 인터뷰에 응했는데 "당시 비명소리가 들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절대 잊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와룡산에서 5명의 아이들이 피살된 게 분명하지만 당시 경찰은 이 주장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함승훈의 인터뷰를 계속 되뇌며 아들 걱정만 했다고 한다.당시는 사이코패스란 말도 대중적으로 통용되지 않던 때고 아예 그런 개념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인식되지 못했다. 이유 없이 5명의 어린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가출 혹은 불량배 집단에게 앵벌이 같은 노동력 갈취 목적으로 납치당했다고 추정하는 게 상식적이었다. 이 사건이 전국적인 화제로 떠오르는 바람에 제보의 허울을 쓴 온갖 장난이나 오인 신고 등이 빗발친 탓에 엉뚱한 방향으로 경찰력이 분산되기도 했으나 그 장난전화들도 유괴범인 척 하거나 실종자 본인인 척 하는 게 대부분이었지 아이들을 죽였다는 것은 입에 담지 않았을 정도다.
또 당시 사건 이후 몇 개월, 심지어 몇 년이 지나도록 실종 혹은 납치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이 개구리 소년들의 귀가를 기다렸다는 점은 당시에는 한 번에 다수의 어린이들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인다는 개념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방증한다. 1명이나 2명의 어린이라면 부모나 가족 관련 원한을 동기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실종이나 납치가 흔했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은 탓에 더더욱 그랬을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
그런데 위의 함승훈의 인터뷰는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와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함승훈은 11시 반 정도에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했으나 12시쯤 우철원과 같은 반 친구인 김경열과 이태석이 서로 만났다는 증언이 있고 2시쯤 동네 주민인 김이수가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으며 12시 이후의 목격 증언이 있기 때문. 그러나 당시 함승훈은 시각을 정확히 확인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점심 먹기 전이라는 이유로 11시 반일 거라고 말한 것이니 시각을 착각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비록 상반되는 증언이라도 누군가는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교차검증을 해야 했지만 그 시기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
이 비명이 피해자들의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산에서 본드를 흡입하고 비명을 지른 것이라는 가설도 나왔다. 본드 흡입시 증상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2]
1.5. PD수첩
2. 추측
워낙 의문점이 많은 사건이라 수많은 추측과 가설, 음모론들이 나왔다.2.1. 야산 불량배 범인설
와룡산이 당시 우범지대였다는 설도 있다. 이하 전문.난 대구시 서구에 위치한 서도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중학교는 당시 50사단(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과 그리 멀지 않은 죽전중학교를 졸업했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닐 때와는 약간의 세월 차는 있다. — 난 30대 초반으로써 1984년 중학교에 입학했다.[3] — 하지만, 나도 중학교 때까지 와룡산 사격장으로 탄피와 더불어 유탄을 주우러 다닌 경험이 있다. 군부대 관계자들은 부인하겠지만, 당시 근처(서구 평리동 일대까지)의 초, 중학생들 중 탄피와 유탄을 주우러 다녀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다 알 것이다. 예비군 사격훈련장까지도 들어갈 수가 있었다. 거기서 탄피를 주워 오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에 장담한다. 당시 꽤 먼 거리에 총 쏘는 곳이 있고, 총알이 박히는 쪽에는 모래주머니와 더불어 흙으로 벽이 둘러쳐져 있었다. (참고로 나는 생계곤란으로 방위병 훈련소집 면제되었다. 태어나서 아직까지 실제 총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그야말로 당시의 기억대로이다.) 모아서 팔기도 하고, 목걸이나 기타 장식품을 만들기도 했으며, 자랑삼아 필통에 넣어 다니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에는 이곡동(당시 50사단 근처)에 친구네 집이 있어서 자주 놀러가서 산새들과 토끼 등을 잡겠다고 와룡산에 많이 올랐었다. 지금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 민가에서 많이 떨어지지 않았던 곳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민가의 불빛이 보였고, 오솔길도 아래쪽으로 나 있던 곳으로 기억한다. 나도 그 근처까지, 아니, 더 위쪽으로도 자주 놀러 가봤고, 해가 지면 내려오곤 했었다. 내 기억과 경험으로 비춰봤을 때 소년들이 당시 날이 추워서 저체온증에 시달릴 정도로 추웠다면, 민가의 불빛을 보고 내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근처에 살지 않는 나도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와룡산에 갔을 때, 해가 지면 민가의 불빛을 보고 내려오곤 했었는데, 하물며 인근에 살면서 와룡산에 자주 오르락거렸던 소년들이 내려오지 못하고 사고를 당했다는 건 상식적으로도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난 그 소년들이 다른 곳에서 피살되어서 옮겨졌다기보다는, 그곳에서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물론 내 경험에 비추어봐서 추론해 본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도 어릴 때 와룡산에 자주 오르곤 했다. 그러나 늘 재미나는 산행(놀이)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정말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와룡산은 그리 높지 않은 야산 형태이면서 깊숙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 숲이 형성되기 때문에, 불량한 이들이 꽤 많이 있었다. 어릴 적 당시에 술에 취한 고등학생이나, 20대 초반 정도의 형들이 싸우는 것도 자주 목격을 했었고, 심지어는 은밀한 행각도 많이 보아왔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끔씩은 그들의 노리갯감이 되곤 했었다. 술에 취한 채 담배를 물고 나타나서는 우리가 주워 놓은 탄피와 탄두를 모조리 뺏고, 때리기도 했으며, 엎드려 뻗쳐 등 심한 기합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에는 복싱을 시킨다며 우리 일행을 싸움을 붙이기도 했고, 나무에 묶어놓고 괴롭힌 적도 있었다. 난 그런 이들에 의한 살인이라 본다. 물론 처음에는 죽일 의도가 없었겠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죽이게 되었고, 서둘러 암매장을 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아니면 묶어놓고, 또는 무릎을 꿇린 채 하체 부분을 흙으로 덮어놓고(실제로 어릴 때 이렇게 당해서 거의 초주검이 된 적이 있었다), 괴롭히다가 가해자들이 그냥 내려가 버리는 바람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절대 자연사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5명이 전부 다쳐서 움직일 수 없었다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바로 아래 희미하게 민가의 불빛이 보일 것이고, 또한 근처에서 거주하던 아이들로서는 그렇게 모여서 자연사할(저체온증으로) 이유가 없다고 본다. 와룡산 일대는 소위 우범지대였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당시 와룡산에서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기억이 생생하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허벅지에는 그때 와룡산에서 그들이 장난 삼아 괴롭히며 도루코칼(하얀색, 연필 깎는 칼)로 찌른 흉터가(채 1cm도 안 되는 길이지만) 남아 있다. 아마도 어릴 때 와룡산을 드나들어봤던 이들이라면, 현재의 경찰 발표나 수사 상황에 대해 어이없어하고 답답해하며 한숨 짓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디 조금 수고가 되더라도 정확한 사인 규명과 더불어 수사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2년에 올라온 한 네티즌의 글 출처
2002년에 올라온 한 네티즌의 글 출처
지금은 동네에 인접한 야산들 상당수가 공원화되어 새벽 및 초저녁에도 운동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다니고 있고 조명등 및 CCTV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범죄가 덜하고 범죄가 일어나도 쉽게 잡을 수 있는 반면 야산들이 방치되고 CCTV가 거의 설치되지 않았던 1991년 당시에는 비단 와룡산뿐만 아니라 어느 동네건 인근 야산은 우범 지역이었다. 때문에 당시 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근처 야산에는 밤은 물론 낮에도 가지 말라"는 주의를 받곤 했다. 1980~1990년대에 소위 노는 아이들이 주로 술을 마시는 곳이 동네 야산이었다. 당시는 술 심부름 등 미성년자에게 술을 파는 것이 전혀 까다롭지 않았고 애초에 단속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술집은 완전한 성인들만의 공간이어서 요즘 말하는 '뚫리는 곳', '민짜술집'처럼 미성년자들이 술집에서 대놓고 술을 먹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당시는 전국이 호황기여서[4] 지금처럼 장사가 안 돼서 아이들에게까지 술을 팔아야 하는 곳도 없었다. 사람들의 의식도 애한테 술을 판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5] 이처럼 술은 구하기 쉽지만 마실 곳은 없는 상황에 가장 좋은 곳은 바로 동네 야산이었던 것이다.
다만 1999년에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가 일어났을 때 지역 공무원과 경찰과 유착되어 일대의 중고등학교 앞에서 버젓이 전단을 돌리면서 홍보하고 아예 대놓고 교복을 입고 드나드는 청소년들의 쉼터로서 참사 당시 희생자들의 대부분이 중고등학생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아[6] 반론의 여지는 있다. 수도권의 시내 번화가 한복판에서도 그랬을 정도인데 원래 지방이나 시골로 갈수록 점점 지역 공무원과 경찰이 유착되는 특성상 더 심했을 수도 있다. 당시엔 단속이 없어서 아이들이 술 사는게 어렵지 않았다는 대목에서도 모순이 발생한다. 일단 경찰도 단속하지 않고 평범한 가게 주인들도 아이들에게 술 파는데 전혀 거리낌 없는 정도의 인식을 가졌는데 유독 술집 주인만 절대 아이들에게 술을 팔지 않는다? 또 저 인천의 호프집도 화재로 인해 논란이 되면서 알려진 거지 이전까지 교복 입고 청소년들이 술집에 드나드는 것을 번화가의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도, 또 그 호프집의 다른 손님들도 옆 테이블에서 교복 입은 청소년들이 술을 마음껏 마시고 있어도 아무도 관심 없었던 게 당시의 인식이었다. 만약 술집 주인이 아이들에게 술을 안 팔았다면 돈도 별로 안 되는 애들이 테이블 차지하고 죽치고 있을까봐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학생들이 흡연이나 음주, 본드 흡입 등 비행을 마음놓고 하려면 사람이 없는 곳이어야 하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곳은 어디나 비행청소년들의 '만남의 장소'처럼 변질되었고 학교와 가까운 인근 야산은 최적의 비행 장소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서 또 반론의 여지가 생긴다. 불량 청소년들이 본드를 흡입했고 그곳을 아이들이 지나갔다면 어떻게 됐겠느냐고 묘사하지만 사람을 한 번도 죽여본 적 없는 미성년자들이 전문가들이 프로페셔널한 살인마의 소행으로 착각할 정도로 본드 흡입만으로 괴물로 변한다면 과연 그곳만 그랬겠냐는 것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 5명이 대낮에 지나쳐도 살해할 정도라면 여성이나 노약자 또는 성인 남성 1명 정도쯤이야 얼마든지 '살인기계'로 변한 이들의 살해 대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야산에서 본드 흡입하는 불량 청소년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본드 흡입했다고 뽀빠이가 시금치 먹은 것마냥 괴물로 변해 '묻지마 살인'을 한 사례는 흔하진 않다.
언론에 보도된 불량 청소년들의 '본드 살인' 사례를 보면 시비가 붙거나 혹은 패싸움 도중 우발적으로 죽인 것이고 암매장 같은 것도 없었다. 그나마 가장 유사한 사건을 꼽자면 오락실에서 만난 초등학생 1명을 불량 청소년들이 끌고 나와 돈을 뺏고 각목으로 때려 죽인 뒤 암매장한 사건이 한 건 있었다. 하지만 모래로 덮고 달아난 수준이라 금방 발견되었고 그냥 각목으로 묻지마 폭행이었다. 환각살인이든 강도살인이든 불규칙한 상흔이 특징인데 전문가들이 차분하고 냉정하게 죽인 사이코패스라고 분석할 정도로 규칙적인 패턴의 수십군데 상흔과는 살인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매장 방식도 그냥 모래로 대충 안 보이게 덮고 달아난 수준인지라 사이코패스 범죄로 착각할 만큼의 정교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딱 환각살인 하면 떠오르는 수준의 범주를 벗어나진 않았기에 전문가들이 사이코패스의 범죄와 혼동할 만큼의 환각살인 사례는 전무한 실정이다. 더군다나 한두명을 우발적으로 죽일 순 있어도 마치 전시에 군인이 포로나 마을 주민을 집단학살하고 매장하듯 5명 가까운 피해자들을 한꺼번에 살해하고 매장시킨 예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전례없는 사건'은 툭하면 발생하니 '100% 그럴리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론적으로는 환각상태에서라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고 게다가 불량 청소년들이라면 아이들이 이들과 마주쳐서 변을 당한 것이 아니냐는 추론도 가능하므로 하나의 설로서는 조사해 볼 만한 가치가 있기는 하다. (불량 청소년들이 일으킨 사건은 아니지만) 사바이 단란주점 살인사건처럼 범인 3명이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경찰-법의학자들도 경악할 수준으로) 다수 상대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7]
'땅에 반쯤 묻히거나 서로 싸움 붙인 걸로 일어날 사건이 아닌데?'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위 글의 요지는 글쓴이의 구체적인 경험담이 아니라 불량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됐듯이 성인 1명이 어린애 5명은 힘들다는 관점에서 다수에 의해 행해진 범죄일 가능성에 초점을 둔 추측이라고 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의외로 당연한 것이, 성인이 아무리 발이 빠르다고 한들 야산에서 산길에 익숙한 초등학생 5명을 혼자서 추격해 모두 잡아 죽이는 건 매우 어렵다. 아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면 최소한 한 명 이상은 살아서 산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산은 태백산맥에 위치한 험준한 산이 아니라 높이 300미터 가량의 산이라고 하기도 뭣한 언덕 수준이고 아이들이 평소에 자주 놀던 익숙한 곳이다. 오히려 건장한 사람 여럿이 포위해 공포에 질리게 해서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게 했다는 편이 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살해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은 백주대낮이어서 저 정도 규모의 범죄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진행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르고 전술한 '5명의 아이들을 매장한 수법'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불량배들이 한 사람당 한 개씩 삽을 준비한 채로 산에 매일매일 올라간 게 아닌 이상 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구덩이를 파더라도 저녁까지 못 팔 가능성이 높다. 또 어지간한 불량배는커녕 폭행을 비롯한 각종 범죄를 밥먹듯이 저지르는 조직폭력배조차도 살인은 쉽게 하지 못하는 판국에 일개 학생 일진들이 진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이 아닌 이상 생판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닌 5명을 증거 인멸 때문에 전부 잡아죽일 수 있겠냐는 반론도 있다. 반면 아이들이 해당 시각에 와룡산에 오를 것을 어떻게 예측하고 해당 장소에서 매복했다가 범행을 저지를지 역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연쇄살인범에 의한 계획범죄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제정신이 아니라 범행할 수 있다는 식의 단순 추측이라면 취객들의 엽기범죄가 훨씬 흔하고 시골인 만큼 낮술이 흔하고 막걸리 등 낮부터 취해있는 아재들도 많으니 모두 유력선상에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취객 봤다!"는 목격담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들 한 번씩 취해 봤으니 취한 것이 꼭 살인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범행 수법이 취객들의 우발적인 범행과는 특징이 많이 다르기에 주목받지 못했던 면도 있었다. 아이들의 옷에 혈흔조차 묻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살해했는데 두개골 상흔이 규칙적인 패턴으로 수십군데 패여 있는 등 취객들의 정신줄 놓은 우발적인 살인과는 거리가 있고 살해 후 암매장까지 프로페셔널한 살인 방식인지라 전문가들이 살인 경험이 많은 냉철한 사이코패스의 범행으로 추정한 것이다. 취객의 범행이 아닌 것 같다면 더 취해 있던 불량학생들의 범행도 아닐 수 있다.
다만 본드를 분다는 걸 일반적인 사람들이 접해 보지 못했으니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까지 더해져 막 본드 불면 괴물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유튜브에서 본드 불고 괴성 질렀던 친구들처럼 막 자기들끼리 환각 상태에서 장풍 쏘고 헤롱대다 잠에 빠져드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본드와 이 살인과 연관짓기는 힘든 면이 있다.
2.2. 북한 남파 간첩 범인설
실종 당시부터 과거 남한 고등학생이 납북된 사례를 들어 제기된 설이고 유해 발굴 이후에도 줄곧 북한 남파 간첩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일각, 특히 일부 밀덕을 중심으로 고개를 들고있다.
시대를 감안하면 북한이 연루되어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심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수 있었다. 실제로 1970년대 말에 고등학생들이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납북되어 수십년이 지난 후에 북한에서 가정까지 꾸린 경우가 확인된 적도 있고 사건 발생 불과 5년 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6년 후 발생한 화성 해안초소 K-2 소총 사취 사건의 범인도 남파 간첩설이 매우 유력하다. 또 간첩의 소행임이 확실하고 범인들의 월북을 막지 못한 이한영 암살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1990년대의 일이었다. 이런 류의 사건사고가 잊을 만하면 발생했기에 이 사건의 범인을 남파 간첩으로 지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범인의 배후를 북한으로 추정할 만한 근거가 없지는 않다. 와룡산 근처에 안기부가 있었고 사건이 난 곳은 군부대 바로 근처라 군대의 동태를 살피러 온 남파간첩을 보낼 만한 당위성도 충분했고, 어쩌다 피해자들에게 정체가 노출되어 모두 죽여 처리했다는 것이 가설의 핵심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혼자서 튼튼한 국민학생 다섯을 제압한 무력이나 살인에 망설임이 없고 매듭처리가 능숙한 것도 설명되고 근처에 바로 깊이 묻지 않고 대략 묻은 것도 월북할 것이니 들켜도 상관이 없다. 더군다나 동네가 좁아서 서로 다 아는 사람인 것도 감안했을 것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아저씨가 본인들이 놀던 산에서 수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며 아이들이 간첩이라고는 의심하지 않고 그냥 이상한 아저씨라고 생각했을지라도 간첩 입장에서는 그래 봤자 월북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죽여서 일말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 낫다.
밀덕 일각에서 간첩설을 미는 또다른 이유는 살해 도구가 당시 대한민국에 공식적으로 수입된 적 없는 소련제 트렌치 나이프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2011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범행 도구를 추정할 때도 대한민국에 유통되는 도구를 중심으로 지목했기에 당연히 정식 유통된 적이 없는 소련제 트렌치 나이프는 용의선상에 오르지도 않았고 일명 '똥망치'로 불리는 용접도구가 유력 도구로 떠오르자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도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실제로 당시 선거일이 휴일임을 이용해 당일 출근하지 않은 공장 노동자가 범인일 것이라는 설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다소 다른 각도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몇몇 밀덕들의 주장이 바로 이것이다. 미제 사건에 대하여 고찰하는 인터넷 방송인 김원 역시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국내에 수입된 적 없는 소련제 트렌치 나이프라는 점을 수시로 강조하면서 남파 간첩 살인설을 주장했다.
유골이 발견된 곳 인근(200m)에서 움막이 발견됐는데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움막의 형태가 아닌 지하 토굴 형태의 움막으로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2~3년간 박모씨가 묵었던 곳이라고 한다. 유골 발견 직후 사건과 관련성이 의심되었으나 이후 조사 결과 움막에 깔린 장판이 1999년에 생산된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물품이 유골 발견 2~3년 전 것들임이 밝혀지면서 사건과의 직접적 연관성은 적을 것으로 판단되었다고 한다.
당시 남파간첩설에 경찰이나 대중이 관심이 없었던 데는 와룡산에서 전원 살해당해 암매장당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에 실종에 비중을 두었던 면이 크다. 실제 제보 전화 중에 유괴범을 자칭하는 전화는 물론, 실종아동 본인들을 사칭하는 전화가 무수히 걸려왔기에 그런 쪽으로 경찰과 여론의 방향이 쏠렸다. 경찰과 가족들에게 매일같이 정체불명의 아이들에게 전화가 와서 "엄마! 나야!!"라고 울부짖는 통에 간첩설은 뜬금이 없었기에 적어도 당시에는 껴들 여지가 없었다. 지금도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의 남학생 5명이 갑자기 사라졌다면 일시에 살해당했다고는 선뜻 생각하기 쉽지 않고 대개 가출이나 유괴에 비중을 둘 것이다. 하물며 당시에도 일단 경찰이고 가족들이고 아이들이 살아 있다고는 추측했기에 언론과 경찰에서는 아이들을 목격하면 제보해 달라는 홍보를 엄청 했다. 하지만 만약 당시 사건 초기에 전모가 밝혀졌다면 남파간첩설도 쉬이 배제할 순 없었을 것이다.
유괴라면 당시 기승을 부리던 앵벌이 조직이 좀 더 유력했기에 그쪽으로 수사가 진행되었고 개구리 소년들이 앵벌이하는 걸 봤다는 목격담도 적지 않았다. 간첩설은 굳이 간첩들이 별다른 이용가치도 없는 시골 아이들을, 그것도 눈에 띄지 말아야 하는 간첩이 무려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들을 5명이나 데리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기에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대신 앵벌이 조직이 연루되었다는 등의 설이 많이 돌았다. 하지만 먼 훗날 유괴가 아닌 당일 살인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젠 앵벌이 조직의 소행보다는 차라리 간첩설이 더욱 그럴듯해진 것이다.
일단 외딴 시골의 와룡산에 드나들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동네 주민으로 제한적인데 당최 용의자가 전혀 특정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살해수법이 우발적 살인이라기보다는 마치 들켜서는 안 될 사람들이 들킨 것마냥 아이들 전원 살해에 전문적인 매듭과 암매장 수법 등 워낙 전문적인지라 전문 살인병기로 훈련받은 간첩이 아니냐는 추측이 마냥 허황된 추측이라곤 할 수 없다.
전혀 근거가 없지 않은 것이, 이 사건 5년 후 표종욱 일병 실종사건이 일어났다. 표 일병은 숙영을 위해 싸리나무를 모으던 도중 하필이면 무장공비들과 마주치는 바람에 잔인하게 살해된 뒤 암매장되어 탈영으로 처리되었다. 헌병대 군탈체포조는 표 일병의 집에 가서 "아들 숨겨놓은 거 알고 있으니 빨리 내놓으라"며 행패까지 부렸다고 한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은 이 공비가 북한으로 무사히 도망치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수첩에서 표종욱 일병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고 공비의 유류품에서 표 일병의 시계가 확인된 후였다. 간첩이 현역 군인조차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죽이고 감쪽같이 암매장할 수 있다면 초등학생 다섯 명도 살해하고 암매장할 가능성은 있다. 범행 도구로 군인들이 쓰는 총기나 단검이 아닌 일상에서 보기 어렵지 않은 둔기와 목줄을 사용한 것도 무장공비의 소행으로 지목될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사건 발생 장소가 동네 우범지역이었다곤 하지만 목격담처럼 그냥 아이들을 좀 괴롭히는 수준에 불과했다. 만약 정말 본드에 취한 불량청소년들이 초등학생 5명을 한꺼번에 살해할 수준의 우범지역이었다면 이전에도 비슷한 실종, 살해 사건이 일어났어야 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없었다. 즉, 불량 청소년들의 비행이 선을 넘지는 않았으며 브라질 갱단처럼 실종, 살인이 밥먹듯 일어나는 곳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만약 동네 노는 형, 누나들이 죽였다면 우발적으로 때리거나 장난치며 놀다가 의도치 않게, 또는 동네 노는 누나들일 경우 아이들을 상대로 강제추행이나 강간 혹은 강간 시도 등 성적인 행동을 하다가 이 과정에서 한 아이가 죽게 되자 당황하여 모든 아이들을 죽인 뒤 마치 제3의 범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꾸몄을 개연성도 있으나 부검상 전문적인 도구로 살인하고 매듭과 암매장 등을 동원하는 등 일개 철없는 중고딩 양아치들이 했다고 보긴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불량 청소년의 소행보다는 살인 경험이 많은 사이코패스의 소행으로 꼽았다. 범행 현장 분석 결과 깔끔하고 심지어 옷에 피조차 묻어 있지 않을 정도였다. 불량 청소년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당시 불량 청소년들이 싸움질을 일삼고 아이들 돈을 뺏고 괴롭히긴 했어도 대놓고 살인을 하진 않았다는 것쯤은 아니까 아이 몇 대 때렸는데 우발적으로 아이가 죽자 당황하여 은폐하기 위해 다 죽인 것 아니냐는 식으로 추론한다. 헌데 본드에 취한 학생이 제정신이 아닌지라 아이가 죽을 정도로 마구 때렸다면 출혈이 생길 법도 한데 옷에 혈흔이 없었다. 보통 취객들의 우발적인 폭행이나 살인 현장을 보면 피투성이인 것을 떠올려 보자. 헌데 이 사건의 범행 현장은 깔끔했기에 전문가들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며 이전에도 유사한 범죄가 많았을 것이라고 추론했고 우발적인 범행과는 선을 그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이코패스설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와룡산 지리를 잘 아는 사이코패스라면 동네 주민으로 추정되나 용의자로 특정된 마을 주민이 없었다. 물론 범죄자들의 이웃이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는 식의 인터뷰를 하는 것은 드물지 않으니 혹시 모를 일이다. 강호순도 마을 주민들에겐 착한 이웃이었다. 그런 '이중인격자'들은 사이코패스를 포함하여 정상적인 지능의 소유자로서 항상 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에 의심을 안 받기 위해 용의주도한 특징을 보인다. 헌데 서로 한 다리 건너 아는 좁은 마을에서 무려 아이 5명을 한꺼번에 죽이고 암매장하면 마을 주민들 전원이 용의선상에 올라 강도 높게 수사받고 본인도 추적당할 위험이 높음에도 상관없이 저질렀을 정도면 용의주도한 사이코패스라고 하기엔 이상한 면이 있고 차라리 충동 조절을 못 하는 피에 굶주린 정신병자의 소행에 가깝다. 하지만 정신병자들은 굳이 또 용의주도하게 암매장하지도 않으며 다른 마을 주민들에게도 이런 짓을 할 가능성이 높으나 사건 전후로 딱히 그런 일은 없었기에 정신병자라고 하기에도 이상한 부분이 있다. 반면 간첩설은 아이들을 살해할 동기와 암매장할 동기를 그럴듯하게 설명해 준다.
다만 이 가설 역시 한계는 명확하다.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사회 분위기상 간첩몰이가 암암리에 남아 있었고 납북설도 당시부터 존재했음에도 이랬다는 것은 당시 수사기관이나 정부 수반도 남파간첩설에는 무게를 두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1990년대 초반은 간첩 문제가 사회의 주요 이슈 중 하나였을 만큼 선명한 문제 중 하나였고 설령 암매장을 몰랐더라도 납북 가능성까지 아예 배제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철원군의 유골에서 발견된 수많은 자상 역시 문제가 된다. 보여선 안 될 것을 숨기기 위해 간첩이 아이들을 살해했다면 치명적인 일격으로 빠르게 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그럴 능력도 있을 것인데 왜 굳이 아이의 머리를 흉기로 수없이 내리쳤어야 했냐는 것이다. 마침 간첩이 그런 쾌락살인마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가정하기에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특수간첩으로 육성되는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고 보기 어렵다. #
모든 범죄에는 절대적인 법칙이란 게 없고 날이 갈수록 진화하거나 융합되기도 하며 '전례 없는 사건'도 흔하게 일어나니 사이코패스의 소행이 아니라는 확언은 불가능하다. 과학수사는 통계를 바탕으로 하기에 전례가 많은 쪽으로 수사방향을 정하지만 100% 확률이란 없고 언제나 예외는 있으므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둘 필요가 있다. 물론 대한민국 영토인 이상 간첩이 어디든 다닐 확률은 존재하고 특히 와룡산은 인근에 안기부도 있었고 군부대도 존재할 정도로 전략적 가치가 있었던 곳이니만큼 간첩이 전혀 관심 없을 만한 곳도 아니기에 와룡산에서 간첩 활동이 절대 없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와룡산에 간첩이 출몰하여 발견된 전례가 없고 딱히 간첩이 죽였다는 증거가 없다면 이론적으로 가능하지 않겠냐는 설일 뿐이다.
해당 영상을 제작한 김원 역시 여타 미제 사건을 다루는 방송인들과는 다르게 과학적 방법론을 중시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관련 전공을 한 적 없는 일반인이다. 김원은 교사 범인설도 무비판적으로 다뤘다가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망신을 당한 적이 있는 만큼 최소한의 비판적 시각을 견지할 필요는 있다.
2.3.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 범인설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800회 특집을 맞아 대한민국 3대 미제 사건의 2번째 편으로 《개구리 소년 편》을 방송했다. 즉, 이 방송은 801회 때 방영된 것이다. 《그것이 알고싶다》는 이미 1993년과 2002년에 이 사건을 다룬 바가 있었다.당시 방송은 아이들의 유골에 드러난 타살 흔적을 바탕으로 살해 도구를 분석하는 데 주력했다. 여러 공구들을 토대로 실험해 본 결과 가장 유력한 살해 도구로 추정되는 것은 용접 후 생기는 찌꺼기를 끊거나 때려서 제거하는 데 쓰이는 용접 망치로, 흔히 깡깡 망치라고 불리는 것이다.[8]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도구지만 공사 현장이나 공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공구라고 한다. 전기 용접 후에 용접 부위 위에 산화된 철산화물 같은 슬래그 덩어리가 생기는데 현장에서는 이 망치로 때려서 떼어낸다. 용접망치의 뾰족한 부분으로 때리면 정사각형이 자국이 생기지만 실제 상처는 직사각형이다. 하지만 상처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직사각형임은 가격의 각도가 90도 각도가 아닌 현상의 원인일 수 있으며 이는 범인과 아이들의 키 차이를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다. 용접망치는 규격보다는 기능에 주력하는 공구이다 보니 직접 만드는 일도 많고, 실제로 현장에는 공장제 용접망치 뿐만 아니라 작업자들이 만든 수제 용접망치도 흔하다.
이 소년들이 살해된 시점에 대해 법의학자 채종민은 "초등학생 때는 이미 영구치가 자란 성인들과는 달리 6개월 단위로 치아 발육이 달라지는데, 이 점을 토대로 미루어볼 때, 개구리 소년은 1991년 3월 26일에 실종된 후 아무리 길게 잡아봤자 6개월 이내에 살해되었을 것"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두개골 하나는 돌에 눌려 납작하게 변형되어 있었는데 당시 부검에 참여했던 채종민 법의학자는 "뼈도 70~80%는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이 있어야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아직 뼈가 건조되기 전에 돌에 눌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아이들이 살해된 직후에 매장되었을 것이란 걸 말해준다.
미국의 법의곤충학자 데이비드 포크너도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서 나온 구더기 껍데기를 통해 "소년들이 살해된 직후에 곧바로 매장되었다"고 말했다.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는 성체 파리가 이미 날아간 흔적이 있는데 이는 2가지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시신이 매우 얕게 매장되어 있어서 성체 파리가 날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고 2번째는 파리 한 세대가 발생한 후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전자라면 시신이 살해된 직후에 곧바로 매장되었다는 걸 말하고 후자라면 시신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매장되었다는 걸 말해 준다.
그런데 알에서 구더기가 깨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8~14시간이라고 하며 파리 한 세대가 발생했다면 번데기가 많이 보여야 하는데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선 번데기의 수가 적었다. 이는 곧 파리 1마리에서 구더기들이 만들어졌고 시신이 매우 얕게 매장되어서 성체 파리가 다 날아가버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시신에 곤충이 접근하는 것을 막을 것이 없다면 24시간 내에 곤충이 시신에다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근데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서 구더기가 부화한 흔적이 있고 구더기가 부화하는 데는 알을 낳고 8~14시간 이내라고 하니 이는 곧 구더기가 부화하기 전에 매장되었다는 뜻이다.
채종민 박사의 소견과 데이비드 포크너 박사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결국 소년들은 살해당하고 짧게는 8시간 이내에 길게는 14시간 이내에 매장되었다는 걸 말해 준다. 그래야 뼈의 물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돌에 두개골이 눌려 두개골이 납작하게 변형이 일어날 수 있고 두개골에 깠던 파리의 알이 부화해 구더기가 생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장은 성체 파리가 날아가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얕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두 학자들의 주장으로 미루어 볼 때 실종된 1991년 3월 26일 바로 그날에 살해당했고 같은 날 바로 매장되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한 경찰대학 박지선 심리학과 교수는 "이 사건은 계획성과 우발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계획성을 나타내 주는 증거는 일반적으로는 잘 쓰지 않는 흉기를 사용했다는 점이고 우발성을 나타내주는 증거는 타깃을 소년들로 정한 것이란 점이다.
사실 아무리 범인이 성인이고 상대는 어린이들이라도 1명이서 5명을 상대로 살인을 저지를 때는 성인 범죄자라도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면을 보인다고 한다. 굳이 남학생이 아니라 초등학교 고학년 여학생 5명이라도 대낮에 밖에서 살해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상식적으로 1명이 한꺼번에 5명을 붙잡아두기에는 어렵다는 점을 볼 때 범인이 한꺼번에 5명의 어린이를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순차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아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약간 떨어져 있었을 때 먼저 1~2명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 공포심을 안겨주었고 겁에 질려 있는 아이들을 무차별로 구타해 제압한 다음 죽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조호연 군의 두개골과 박찬인 군의 두개골에서 구타를 당했다는 소견이 나왔고 김종식 군의 왼팔 뼈가 골절된 것으로 보아, 왼팔을 들어 범인의 공격을 방어하려다가 발생한 흔적(방어흔)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또 김영규 군의 상의가 심하게 찢어진 것으로 보아 범인에게 우악스럽게 잡혀 찢어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아이들이 흩어져 있어 한 명씩 순서대로 죽여 버린 거라면 한 명의 아이도 도망치지 못한 채 5명의 일행 모두 한꺼번에 암매장된 사실도 이상할 수 있다. 특히 김종식 군만 해도 공격을 왼팔로 막다 왼팔이 골절될 정도였는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통증으로 인해 큰 비명을 질렀을 테니 야산에 쩌렁쩌렁하게 메아리쳤을 텐데 단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기는 쉽지 않다. 또 범인 입장에서도 몇몇의 아이들이 더 있다는 것이 파악된다면 일부는 도망쳐서 부모님에게 실종 구역을 말할 위험이 있기에 빨리 현장을 벗어나야지 태연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들의 시체들을 한곳으로 다 모아 와 한곳에 암매장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5명의 아이들을 위협해서 어딘가로 끌고가 더 이상의 일행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살해 후 암매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범인의 수는 많은 이들이 다수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1명이라고 분석했다. 복수의 범인이라면 피해자 중 1~2명은 순종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그런 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1명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명의 범인이 와룡산에 올라온 아이들을 보고 처음엔 5명이나 되는 줄 모르고 먼저 앞에 있던 1~2명의 아이를 죽였는데 알고 봤더니 일행이 몇 명 더 있었고 입막음을 위해 나머지 아이들도 뒤쫓아가 모조리 살해했다는 분석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범죄심리학자 에릭 힉키는 "처음엔 두개골에 찍힌 상처가 여러 가지 형태라는 점을 미루어 범인이 복수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다시 한번 두개골의 형태를 살펴본 결과 범인은 역시 1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범인을 1명으로 결론내린 이유는 유골에 나타난 잔혹성 때문이었다. 극도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범죄자 2명 이상이 짝을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물론 찰스 잉 & 레너드 레이크의 경우처럼 잔혹한 살인마 2명이 의기투합해 짝패가 된 경우도 있었고 맨슨 패밀리처럼 순종적인 조력자가 있는 경우는 좀 더 있다. 때문에 혹 5명의 소년을 제압하는 데 조력자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직접적으로 흉기를 휘두른 인물은 2명이 아니라 1명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면 증거가 꽤 많이 남았을 것이고 시체를 매장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에릭 힉키 박사는 "범인은 생각보다 시체가 늦게 발견되어서 놀랐을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또 "아이들의 옷처리나 묶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살해 경험이 이 사건 이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미리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매장을 얕게 했던 것도,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함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힉키 교수는 이 사건은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사건이며, (적어도 직접 실행한)범인의 수는 1명이고, (만약 체포되지 않았다면) 다시 살인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매우 위험한 인물로, 아마 (설령 체포되었더라도 이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미제사건이기 때문에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단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들은 다른 사건으로도 잡히지 않았다지만 이미 전과자이거나 간혹 다른 사건으로 붙잡혀 이미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경우도 역시 많다. 일례로 안양 환전소 여직원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일련의 연쇄살인의 주범인 최세용의 사례도 있으며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서 "나의 경험에 비추어, 이 사건의 범인은 아마 죽었거나, 오래전에 다른 사건으로 이미 교도소에 수감되어 복역 중일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고 범인이 2019년 9월 18일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실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힉키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범인은 이 사건 때문에 검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지선 교수 역시 "범인과 개구리 소년 5명은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돈을 노린 범죄라고 하기엔 진짜 범인은 단 한 번도 돈을 요구한 바 없었고[9] 원한에 의한 소행이라기엔 한 자리에서 5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모조리 죽인 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이 새방골에서도 가장 골이 깊고 수풀이 우거진 곳이라는 점과 가시덤불이 많고 인근에 군부대 사격장이 있어서 사람들의 출입이 뜸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마을에 살던 소년들이 탄피를 모으러 자주 오르락거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현지 사정과 지리에 매우 밝은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년들을 살해한 이유는 단지 살인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현재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가설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 방송에서 개구리 소년 사건의 범인과 흉기에 대해 내린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실행범의 수는 1명이거나 그나마 직접 살해가 아닌 협력만 해 준 사람 1, 2명 포함일 가능성이 높으며 와룡산 일대의 지리와 사정에 매우 밝은 사람이었고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꺼번에 5명의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5명의 아이들을 살해했고 그때 사용한 흉기는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용접 망치일 가능성이 높으며 결정적으로 살인에 능숙한 사람이라 다른 살인 사건으로 체포되었거나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1991년 당시에는 묻지마 살인이나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없었거나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기에 수사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추었고 그래서 해결할 방법이 없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한국에서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대중적으로 인식되고 (그것에 대한)연구 활성화가 재대로 되기 시작한 계기는 2000년대 중후반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의 등장부터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초로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단순히 살인을 즐기려고 무고한 어린이 5명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못 할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을 납치해서 앵벌이를 시키는 등의 사건이 많았다. 물론 전문적인 납치범이 아니라 불량배 등이 아이들을 집에서 먼 곳에 데려가거나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억류하는 수준의 유괴, 가출한 아이들이나 가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주된 피해자였다. 때문에 개구리 소년 찾기 캠페인이 벌어질 때도 "각종 역, 터미널, 지하철 승강장 등에서 앵벌이하는 아이들을 유심히 봐달라"고 하던 수준이었다.[10]
다만 이 가설 역시 다른 쾌락살인마의 사례와 비교해도 매우 이질적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사이코패스란 전문적인 용어가 나오기 이전 혹은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 이미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처럼 쾌락이 목적인 살인도 많았기에 단순히 '살인을 즐길 수 있다는' 개념을 몰라서 수사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춘 것은 아니었다. 이춘재, 유영철, 강호순 등의 쾌락살인마들은 본능에 충실한 자들이다 보니 성적인 욕구도 반영되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이 특징인지라 그런 사이코패스들의 사례를 살펴봐도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사건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게다가 당시엔 일단 시체가 발견된 상태도 아니었으니 쾌락살인마가 아이들을 몽땅 다 죽이고 암매장했을 것이라는 발상은 뜬금없었고 당시 기승을 부리던 앵벌이 조직의 유괴나 가출이 그럴듯해 보였으니 그쪽으로 수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한국에서 2023년까지의 제대로 밝혀진 쾌락살인 사례를 살펴봐도 아직까지는 초등학교 고학년 남성을 대상으로 쾌락을 위해 한꺼번에 몰살시키고 암매장하는 방식은 비슷한 사건조차 찾아볼 수 없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유영철, 강호순 등도 여성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키고 암매장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들은 먹이감을 물색하며 사냥하듯 한 명 한 명 유인해 계획적으로 살인하는 방식이었고 그게 '쾌락살인'의 방식에도 부합한다. 자신의 공간에서 편안하게 즐기면서 살인할 수 있으니까. 사방으로 도망칠 구멍이 열려있는 뒷산에서 대낮에 빠른 시골 남학생 5명을 여유롭게 살인하기에는 쉽지 않기에 쾌락살인으로 적합한 장소도, 대상도 아니다. 실제 이 아이들의 살해 방식도 마구잡이 살인이었지, 딱히 음미하면서 살해한 듯한 여유는 없어 보였다. 사이코패스가 어린이 여러 명을 한꺼번에 죽인 살인이라고 하면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던 정성현이 있으나 역시 자기 집으로 유인해서 살인하는 방식이었고 초등학교 저학년 여학생이 대상이었고 그것도 2명뿐이었으며 이조차도 살인이 목적,즉 쾌락살인이 아니라 원래 접근한 목적은 성폭행이었고 저지른 이후 입막음을 위해 살해한 거였기 때문에 역시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 5명에 뒷산이라는 장소였던 이 사건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국내외 막론하고 다른 어린이 연쇄살인사건 역시 한 번에 한명 따로 죽이는 게 대부분이었지 5명 이상을 한꺼번에 죽이는 사건은 매우 드물다.
쾌락살인마들을 보면 그냥 아무렇게나 막 죽이는 것은 아니고 나름의 패턴이 발견된다. 이들은 순수하게 살인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쾌락'이 목적인지라 자신이 쾌락을 느끼는 살인방식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이춘재는 변태적인 살인 방식을 보였고 유영철은 살인용 망치를 특수제작해서 그것을 애용했으며 강호순은 목을 졸라 죽이면서 쾌감을 느끼는 스타일인지라 이런 살인 패턴을 보고 연쇄살인인지 아닌지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일부러 추적을 피하기 위해 블러핑으로 다르게 죽이기도 하지만 이 아이들의 살해 방식은 일반적인 쾌락살인과도 거리가 있다.
곧 제일 나이가 많고 리더격인 우철원 군은 두개골에 상흔만 25군데 발견된 반면 박찬인 군과 조호연 군은 특별한 외상흔적이 없이 교살로 추정되는 등 살인방식이 중구난방이었던지라 딱히 살인을 하며 쾌감을 느꼈다는 증거는 없다. 약한 친구들에겐 손쉽게 목을 졸라 죽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범인 입장에서 가장 힘이 센 우철원군은 머리를 집중적으로 타격했고 좀 약한 친구들은 그냥 목을 졸라 죽이는 등 아이들에게 맞춰 가장 효율적인 살인을 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가설들처럼 이 가설 역시 한계는 존재한다. 다만 더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확실히 아니라는 정황이 보이는 다른 가설들에 비하면 그나마 가능성이 높아서 가장 유력한 가설로 취급받는 것이다.
2.4. 기타
워낙 공전절후의 영향력을 지닌 사건인 데다 남아 있는 물증 또한 극히 드문 상태다 보니 전술한 가설 외에 이런저런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따라서 후술할 가설들은 당시 정황을 바탕으로 유추한 추측임을 염두에 두자.- 일부 소년들의 옷은 일반인이 거의 하지 못하는 정교한 매듭 방식으로 묶여 있었다. 이 때문에 범인, 공범이 있을 경우 최소한 일부는 평소 포장 작업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이며 임시 공휴일에 회사를 쉬면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 모 커뮤니티 사이트에 "와룡산에 사는 도사견 견주가 진범이 아닐까" 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해당 글의 후속 내용이 전혀 올라오지 않고 시기상으로도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많아 금세 잊히기도 했다. 관련 게시물 "사건 당시 와룡산은 녹지개발이 되지 않았으나 유골이 발견된 이후에 녹지개발사업이 진행됐고 그때는 개사육장은 없었기에 다시한번 재조사를 했다."는 투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글에서 이상호 기자에게 제보했다고 했지만 이상호 기자는 그정도로 자세한 제보였다면 현장취재를 갔어야 했는데 그런 제보는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당신이 혹 하는 사이 2' 5화.
- 실종 당일 유골 발견지로부터 1km 가량 떨어진 '선원지'라는 못에서 신원미상의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낚시꾼 6~7명이 목격되었다. 당시 제보는 실종된 지 7개월이 지난 후 이루어졌으며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몽타주 작성 등의 조사가 뒤늦게 이루어졌지만 끝내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다. 2002년 당시 참조 기사
2.5. 부정된 추측 및 음모론
2.5.1. 조난 후 저체온증으로 인한 변사설
유골 발견 직후부터 경찰이 역설(力說)한 주장이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 사건을 추적해 온 김재산 국민일보 기자와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김영규 전 대구경찰청 강력과장은 타살이 아니라 조난 후 저체온증으로 인한 변사일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가능한 한 조난설에 가능성을 두자면 산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간 상황에서 갑자기 큰 비바람을 만났다면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여지도 없지는 않다. 더군다나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계곡 방면으로, 근처의 풀숲에 숨어서 비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도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러나 타살의 정황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93년 3월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한 한 경찰도 "와룡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야산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곳에서 조난당할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주장을 번복해서 아이들의 조난을 주장하던 것에 대해 와룡산 기슭에 컨테이너를 두고 살던 할머니는 "(길을) 잃어버리긴, 갓난쟁이도 아니고 국민학교 5학년, 6학년씩이나 된 애들이 뭘 그래(길을 잃어)? 그건(동네 뒷산에서 조난당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일축했으며 김영규 군의 아버지 김현도 또한 "바로 뒤에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고, 밤이 되면 그때나 지금이나 주변 마을 불빛이 환합니다. 이런데 무슨 조난을 당해요?"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이 2002년에 유골에 대한 미스테리를 방영할 때 실종된 소년들과 같은 연령대의 남자 아이들들을 모아 어두워진 후에 와룡산에서 마을로 내려가도록 실험했는데 아이들은 무서워하는 기색은커녕 긴장하는 기색조차 없이 마을로 대단히 쉽게 돌아왔다. 물론 아이들이 실종된 1991년 당시 인근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반면 이 방송을 찍은 2002년에는 주택가 및 아파트가 유골 발견 지점 인근까지 확대됐다는 걸 감안해야 하겠지만 개구리 소년들과는 달리 이들은 대구에 거주하지 않으며 대구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아이들로 지리에 어두운 아이들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거기다 1991년에도 유골 발견 지점 인근 500m 근방에 수십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 있었고 좀 더 바깥으로는 당시로서는 구마고속도로로 불렸던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지선이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바로 앞에 있는 불빛을 보고도 마을로 못 내려왔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 농촌이었던 이 동네의 아이들은 동네 뒷산 정도는 놀이터나 다름없을 정도로 산으로 자주 놀러 다녔다.
게다가 한 아이의 옷소매가 뒤로 묶인 상태였고 이 매듭의 형태나 강도가 잘 풀리지 않도록 잘 묶인 형태로, 보통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아닌 전문가들이 쓰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것을 타살의 근거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다수의 법의학자들은 아이의 두개골이 돌에 눌려 변형되어 있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아이들이 사망한 직후 매장되었음을 주장했다.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면 산사태라도 나지 않는 이상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매장될 리가 없으며 이 역시 남이 살해하고 바로 땅에 묻었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아이들이 추위에 떨다가 옷으로 덮으려고 했다는 증거, 매듭의 모양은 저체온증에 이성을 잃으면 설명되지 않는 이런저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려 유족들의 화만 더 돋구었다. 이에 유족들과 '전국 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전미찾모)'이 2005년에 국가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2006년 11월 9일에 기각당했고(선고 2005가합69514, 서울중앙지방법원, 법률신문) 이에 유족 등이 항소했으나 2007년 10월 25일에 서울고등법원 측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후속 기사) 이후 대법원도 심리불속행 판결을 내렸다.
또 유성호 법의학자의 말에 따르면 저체온사는 지형지물이나 위치만 보고 내릴 수 있는 진단이 아니며 돌로 상흔을 낼 수 있는 돌은 중력이 강한 돌이여야 하며 골절선이 여러 개 나타나야 하는데 유골에는 강력한 둔기로 인해 움푹 들어간 상흔만 있기에 이것은 명확히 생전 손상이고 이러한 생전 손상을 저체온사라고 가정한다면 저체온증 진단기준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가설은 법의학자들이나 유족들, 심지어 호사가들에게조차 당시부터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사실상 거짓말이나 다름없이 치부되어왔으나 2022년 3월에 김재산 기자의 책이 돌연 출간되자 재차 조명되었으며 김재산 기자는 그간의 주장을 다시 정리-종합하여 저체온사에 확신을 가지고 사건을 과학적으로 재수사할 것을 요구했다.
또 2022년 5월 1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탐정 손수호' 코너에서 《개구리 소년, 왜 아이들은 산에 갔을까》를 다뤘다. 한 기자가 추적기를 담은 책을 냈는데 대구경찰청 김영규 전 총경이 책에 인터뷰한 내용도 담겨 있다. 살해 동기와 살해 도구가 없었는데 탄두 136개가 우유곽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용돈을 위해 탄두를 주웠던 것으로 보이며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앞서 서술하였듯 가능성이 거의 없는 설로 치부되고 있으며 법의학자들의 소견을 따르면 타살의 정황이 너무나 명백하다. 하지만 당시 이 주장을 한 사람들 모두 자신들의 주장을 굽힐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2.5.2. 군 사격장 오발설
한때 인터넷에서 많이 돌아다녔던 설.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에서 400m 떨어진 곳에는 50사단 사격장이 있었으며 2002년 대구시의 한 구두닦이방에서 30대로 보이는 한 손님이 "군 복무 중 갑자기 튀어나온 소년 5명을 오발하여 1명이 즉사, 1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5명 전부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죽이고 은폐했다."는 말을 들은 구두닦이방 주인이 이를 제보한 바 있다.[11] 해당 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당시 사격장 근처에 묻혀있었다는 점과 시신이 매듭 묶기 전문가에 의해 매듭 묶기가 되어 있었다는 점, 상식적으로 범인 1명이 아이 5명을 동시에 제압하기 힘들다는 점을 들어 이 설에 비중을 뒀다. 실종 소년들의 부모들도 군부대 관련 사고에 가능성을 뒀다. MC스나이퍼의 곡 중에도 이 부분을 언급하는 가사가 있기 때문에 한때 대단히 유명해졌으며 아직도 이 설을 기정사실로 믿는 이들이 많다.하지만 이는 그간 제시된 수많은 가설 중에서도 현실성이 가장 떨어지며 특히 군대의 행정업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논파할 수 있는 허술한 가설이다.(#) 일단 50사단에서는 "소년들이 실종된 당일은 임시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사격 일정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당시 주임원사가 진술한 바 있다. 폐쇄적인 군 특성상 병사들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서 사건을 묻어 버릴 가능성은 있지만 아무리 군대가 말 많은 조직이라지만 어느 정도는 여느 관료집단이나 다름없고 특히 사격장 같은 민감한 시설은 굉장히 엄격한 절차대로 운영된다. 사격 일정이 생기면 화기 담당 부서가 사격을 위한 환경 정비를 하고 사격일정이 없는 날도 총기 관리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며 사격 일정은 상부에 필히 보고해야 하는데 휴일이라는 전제를 쌩까고 무대뽀로 사격을 강행한다는 것은 있기 힘든 일이다. 병사들은 둘째치고 간부들은 애초에 주말 당직이나 크루근무가 아니면 공휴일에는 출근하지 않는다.
군에서 행정업무를 조금이라도 해 보면 사격훈련이라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작업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총 한 번 쏘기 위해 공문이 마구 날아다니고 수없이 많은 물품들을 반출하게 되며 사격 이후에는 탄피를 세고 잔여 실탄 실셈/봉인, 총기관리 등 간부가 개입하여 마무리지어야 할 일들이 많다. 특히 탄약 불출 허가는 군단장이 내린다. 즉, 군단장까지 가는 그 보고 라인에 있는 모든 간부들이 사격훈련 일정의 존재를 알 수밖에 없다. 수많은 전역자들의 경험대로 사격은 아무리 하루짜리 훈련이라도 저런 복잡한 절차와 관리인원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공휴일에 사격일정을 잡는 일이 없다. 총 한 번 쏘는 데 관여하는 관계자들과 병사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과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큰 사회적 이슈가 된 다수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살인 사건에 죄다 오랫동안 함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리고 총 소리라는 것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사격 전 필히 인근 주민이나 기타 부서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방송을 하므로 함승훈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소리가 묻혔으면 묻혔지 총소리를 못 들을 수가 없다. 장난감 BB탄 총을 퓩퓩 쏘는 소리나 영화 등의 창작물에서 총을 쏠 때 나오는 퉁퉁 정도의 소리와는 달리 실제 소총의 실탄 격발음은 엄청나게 크고 화약 냄새도 굉장히 진하다. 실제로 들어 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탕탕 소리가 절대 아니다. 괜히 군에서 사격 전 귀마개를 필히 착용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귀마개를 껴도 총성을 가까이서 들으면 게임이나 드라마에서나 들을 법한 삐- 하는 이명이 들린다. 사격이 있는 날이면 저 멀리 있는 사격장으로부터 훈련소 내 일과 공간까지도 큰 총소리가 울린다.[12] 군대에서 소음기를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음기를 장착하더라도 소리가 그다지 작아지지 않는다. 영화처럼 푸슉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절대로 아니고 평소 소리에서 약간 작아지는 정도에 불과하다. 만약 사격이 실시되었으면 이 큰 소리에 동네 주민/주변인물 등이 절대 모를 리가 없었음에도 그 누구도 이런 소리를 들었다거나 하는 언급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위의 두 상황을 차치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애들이 사격장에 난입했을 가능성이 없다. 군 부대는 원칙적으로 아무나 들여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민간인은 면회, 방송 촬영 등의 적법한 사유가 아니면 멋대로 영내에 들어올 수 없다.[13] 상식적으로 아이들이 부대 진입을 시도했다면 바로 군인 아저씨들에게 저지당했을 것이며 정문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영내 장교나 부사관의 자녀를 사칭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당연히 윗선에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며, 그렇게 들어왔다고 가정해도 사격장까지 가는데 제지가 없었을 수가 없다. 사격장은 총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훈련시 조교들이 항시 대기를 하기 때문에 설령 사격훈련을 받는 군인이라도 자기 순번이 아니면 함부로 사격장에 들어갈 수 없다.
결국 오발론을 사실이라고 보고 이를 대입해 보면 어찌저찌 영내에 들어온 다섯 아이들이 화지대까지 뛰쳐들어가 조교의 통제를 따돌리고 한창 시끄럽게 총을 쏘고 있었을 사격장까지 난입해 사망했다는 매우 해괴한 그림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쯤 되면 외려 군 부대가 이를 은폐할 게 아니라 해당 부대 헌병중대 내리갈굼과 함께 사건을 공론화해도 이상할 게 없을 지경이다.
그나마 현실성이 있는 시나리오는 사격장 근처에 접근했다가 재수없게 피탄되는 것이다. 당시 아이들이 와룡산에 탄피를 주우러 다녔다는 증언들은 매우 많이 나왔고 특히 아래 단락의 증언처럼 예비군 사격장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탄피는 탄자와 달리 사격장에서 사로 근처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탄피를 주울 수 있다는 건 사로 근처까지 접근이 가능했다는 의미가 된다. 꼭 사로 내부가 아니더라도 근처를 지나가다가 재수없게 유탄에 맞을 수 있으며 아무리 사격 전 경고방송을 하고 적기를 올려도 소통 부재로 훈련장 근처를 지나가다가 총에 맞는 사고는 지금도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2000년대 이후 전방의 소위 메이커 사단 복무자들의 경험과는 달리 많은 부대들이 사격장을 부대 주둔지 내부가 아닌 부대 외부 시설로 두고 있으며 이런 시설들은 녹슨 철조망 정도로 둘러쳐지고 상주하는 경계병력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후방 향토 부대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 심하고 제50보병사단은 향토방위사단이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는 더욱 관리가 부실했다.
하지만 진짜 오발사고가 났더라도 군이 이걸 쥐도새도 모르게 묻어 버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발설 지지자들은 사태를 묻기 위해 군이 나머지도 모두 살해한 뒤 매장했고 공범이 된 모두가 당시 군 부대의 권위에 위압되어 이 사건에 대해 함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아무리 욕을 퍼먹는 쌍팔년도 군대라도 이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군사 작전 지역에서 오인 사격으로 인한 사망 사고는 해당 부대가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 작전구역에 돌아다니는 신원미상자가 민간인인지, 민간인인 척 하는 남파공작원인지 초병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14] 물론 책임자들은 쉬쉬하고 싶겠지만 민간인이 연루되었으면 군사정권 시절이라도 못 숨기며 그나마 할 수 있는 조치가 언론통제로 전국으로 소식이 퍼지는 것을 억제하면서 뒤에서는 유가족을 반협박으로 회유하는 정도일 것이다.
거기에 정말로 5명을 다 죽였다고 치더라도 군이 은폐 계획을 세웠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처리할 수 없다. 절대로 발견되지 않을 장소인 영내의 험지 구역 등 민간인은 출입조차 불가하면서도 군 관계자조차도 잘 가지 않는 곳으로 옮겨 군대의 특기인 삽질로 깊숙하게 파묻었을 가능성이 높다. 혹시 발견되더라도 의복 등으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도록 유류품을 영내에서 소각해 버리는 것 또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묻혀있는 곳은 사건 현장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았고 깊게 묻히지도 않았으며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류품은 그대로 같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흔을 두고 총격으로 인한 관통상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이, 총알의 위력은 생각보다 매우 강력하다. 사격훈련이니 권총이 아닌 소총으로 군용탄인 5.56×45mm NATO을 쐈을 것인데 맨몸으로 이걸 맞으면 총알이 관통하면서 그 충격으로 신체를 아주 헤집어 놓기 때문에 내부가 너덜너덜해진다. 성인도 이럴진대 그 대상이 아무리 씩씩한 어린이라도 뼈가 아주 박살난다. 따라서 사격장 오발 사망설은 결국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기에 신뢰성이 낮다.
2.5.3. 피해자 부친 범인설
1996년 1월에는 "실종된 김종식의 아버지인 김철규가 아이들을 모두 토막살해한 후 그 집에 암매장했다"는 한국과학기술원 소속의 자칭 범죄 심리학자인[15] 김가원의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집안 곳곳을 파내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경찰은 그때까지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가원의 주장에 따라 김 씨의 집 바닥을 파헤쳤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김 씨의 집에서는 아이들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가 막힌 일에 당사자인 김철규 씨가 ''사람을 두 번 죽여도 분수가 있지..." 하고 분노하자 김가원은 "증거가 안 나왔는데 더 할 말이 없죠..."라며 기자들의 추궁을 피하면서 자리를 떴다.이후 그는 카이스트에서 해고되었고 심리학회에서도 제명되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모 웹사이트에 카페를 개설해서 여론을 모으는 한편 2002년에 유골이 발견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여전히 자기 주장이 맞다고 고집하며 2005년 11월 15일에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라는 저서를 쓰기도 했으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피해자들의 싸늘한 유골 앞에선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2011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오판했던 것은 인정하고 사과했으나 그 외 다른 가설들은 신빙성이 있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해당 기사, KBS 보도자료, MBC 보도자료)
인터넷에 떠돌던 진범설 중 이 김 씨 범인설과 2008년쯤에 어느 재미교포가 주장한 김 씨 아내 범인설을 조합한 음모론도 있었으나 현재는 이 가설 자체가 완전히 부정된 터라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
2.5.4. 교사 범인설
2021년에는 교사가 범인일 거라는 심증이 강하다는 한 유튜브 댓글이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그 근거로 학교 교사라면 그곳 지리에 밝을 것이고 1990년대의 교사들의 강했던 교권을 생각해 보면 흉기나 협박 없이 말로도 5명 정도면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보다 앞선 시점에 교사가 자신의 제자들과 결탁해 또 다른 제자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으며 이 사건의 범인 역시 당시의 강력한 교권을 이용해 해당 사건은 물론, 이전에 저지른 수많은 여학생들을 강간한 사건 역시 묻어 버린 바 있었다. 교사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른 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임을 지목했다. 또 이 가설에 의하면 당시 관점으로 '어떻게 선생이 자기 제자를 죽이냐'는 고정관념도 교사를 용의자로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게 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실제로 2011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아이들을 심하게 폭행하다 해고된 한 교사가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했다. 2010년대 후반 들어 미투 운동이 활발해지자 그 여파로 각종 커뮤니티에서 체벌이 횡행했을 당시 학생이었던 이들의 경험담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지방 학교에서는 일개 소도시도 아닌 광역시에서도 체벌과 단체기합은 2000년대는 물론이요, 심지어 학생인권조례가 발표된 이후인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당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2010년대 초중반(2014년 무렵)까지만 해도 체벌이 잔존했다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당시의 학교에선 엄한 분위기와 체벌이 일상적이라 아이들한테 욕설과 구타는 기본이고 선을 넘은 체벌과 얼차려를 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아이들을 너무 폭행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는 것은 높으신 분들이 봐도 못 봐 줄 정도로 심각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교사 용의자에 대해서는 해당 방송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만 하고 넘어간 것으로 보아 수사 기관이나 방송 관계자들도 이 인물에 대해선 크게 주안점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21년 9월 9일자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 시즌 2에서 피해자 친척들과 당시 사건을 수사한 관계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런 교사의 존재는 들어 본 적도 없고 수사망에도 올라온 바가 없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지나친 체벌로 교사가 해임된 사례는 먼 훗날 2010년의 오장풍 사건이 최초인데#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19년이나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언급한 문제의 교사 관련한 내용은 오보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직접 사건을 수사한 이들과 피해자의 유족들이 폭력교사의 존재를 부정함으로 '교사 범인설' 또한 오래가지 않아 부정되었다.
2.5.5. 납북설
당시 아이들을 찾기 위해 약 30만명의 사람들과 많은 시간이 동원되어 대대적인 수색을 펼쳤지만 실종된 아이들의 흔적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북한 간첩에게 강제로 납북을 당하여 북한에 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었다.#, # 그러나 실종 이후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26일 대구 와룡산 중턱에서 실종된 아이들 전원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분명하게 부정되었다.2.5.6. 국가기관 개입설
사건 발생 후 국가안전기획부 직원들이 유가족들에게 접근해 발굴 현장에도 따라다니는 등 집중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소년의 유가족들은 이 사건 뒤에는 분명 정부기관이 관련되어 있다며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영상은 사건 발생 당시 방위였던 유튜버가 와룡산을 수색하면서 수색하고자 했지만 수색을 거부당했던 곳이 하나 있었고 와룡산 중에서 유일하게 그곳만 수색하지 못했는데 이 사건은 그곳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해당했고 거기에 매장했고 몇 년 후에 사건이 잠잠해질 때쯤 거기와 멀지 않은 다른 곳에 다시 매장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국가안전기획부 직원들이 유가족을 감시한 것은 여론과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국군기무사령부가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여론과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사찰한 것처럼 말이다. 이 사건 뒤에 국가기관이 배후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음모론적인 비약이다. 세월호가 잠수함에 의해 침몰됐다는 세월X와 다를 바가 없다.
2.5.7. 범행 도구는 버니어 캘리퍼스?
원글 전문[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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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니어 캘리퍼스는 중등교육 과정 기술·가정 과목에서 한 번쯤 얼굴을 비추기 때문에[20] 대중들이 이름은 몰라도 생긴 건 대강 알고 있는 공구이긴 하지만 일개 학생들이 버니어 캘리퍼스 같은 전문 공구[21]를 들고 다닐 만한 학교라면 실업계 고등학교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1년 개교한 대구성서공업고등학교라는 추측이 있는데 이 학교는 1991년에 개교해 1994년 1회 졸업식을 열었다. 이후 전자공업에 특화된 학교로 변경하고자 이름을 대구전자공업고등학교로 변경했다. 글쓴이는 '1학년 신입생들'과 '형들'과 '중고딩들'과 '중학생도 섞여있었을지도 모르지'라는 표현을 썼고 글 어디에서도 2학년, 3학년 선배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동네의 아는 형들이거나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면 몇 년 꿇은 학생들도 함께 1학년으로 들어가 다녔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과거에는 공고나 공장에서 버니어 캘리퍼스로 머리를 찍는 악습이 존재했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는 뼈에 자국이 생길 정도의 강도로 때리지는 않고 살짝 찌르는 정도이지만 쇳덩이로 만든 연장이기 때문에 살짝만 휘둘러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프고 쉽게 두피에서 피가 난다. 이런 이유로 "노기스(버니어 캘리퍼스의 일본식 표현)로 대가리 찍는다"라는 표현은 일부 공고에서 흔히 사용되는 공포스러운 표현이었다.
인근 지역 거주자가 타 커뮤니티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학교 갈 때 이 학교 학생들은 본드 빨러 산에 간다는 표현도 있을 정도로 당시 매우 질이 낮은 학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교명은 '성서공고'였으며 인근의 성서중학교도 당시로는 굉장히 질이 낮은 학교였다. 당시 성서중학교는 현재의 장성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해 있었으며[22] 인접한 성서초 - 성서중 - 성서공고 테크트리를 타면서 이어지는 선후배 폭력의 대물림과 지역세력화도 흔했다. 당시에는 학교 수 자체가 적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물론 다른 학교, 아니면 아예 대구의 타 지역에서 넘어온 불량배들일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이 글이 올라온 네이트판#,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여러 커뮤니티에서는 오히려 글쓴이 본인이 사건의 관련자[23] 혹은 근처에서 직접 목격한 미신고자가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먼저 문체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일 만큼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고[24] 서술자의 시점이 계속 바뀐다는 점, 구체적인 상황을 제시했다는 점[25], 당시 사건이 발생한 동네 근처의 학교에 대해 떠돌던 기담까지 말했다는 점[26], 글쓴이의 과거 행적[27], ‘너희들은 경험이 없어서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반복한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직접 현장에서 경험한 듯한 문체로 쓰여져 있어서 글 자체도 기괴하고 소름돋는다는 평이 많다.[28] 다만 글쓴이는 이후 올린 글에서 관련자설을 부정했으며 6월 7일 신고를 당해서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밝혔다. 이후 6월 15일 글쓴이는 디시인사이드 개구리소년사건 갤러리에 자신의 관련자설을 강하게 부정하는 글을 다시 올렸으나 삭제했다.
버니어 캘리퍼스는 새 부리처럼 눈금자를 위아래로 움직여 길이나 너비를 측정하는 정밀공구이기 때문에 두개골을 파손시키기에는 너무 약한 물건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만 실제 유골에서 발견된 타격 흔적들이 버니어 캘리퍼스 부리 모양 눈금자로 타격했을 때 찍히는 각진 8자 모양의 흔적과 상당히 유사하고 제품에 따라서는 연약한 어린아이 두개골에 찍어서 상처낼 수 있는 충분한 재질도 있기 때문에 마냥 부정하긴 어렵다. 그리고 금속제 버니어 캘리퍼스의 눈금자는 다른 금속에 (원래 이러면 안 되지만 치수표시용으로) 한 줄 긁어서 표시용으로 쓰이기도 할 정도로 단단하다. 애초에 사람 손으로 직접 들고 온갖 금속 물질을 측정하느라 마찰이 잦은 물건인지라 강도가 낮지 않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90년대의 버니어 캘리퍼스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무거운 재질이었으므로 경량화된 최신형을 생각하면 안 된다. [29]
버니어 캘리퍼스의 가격이나 무게에 대한 논란-의문도 있는데
가격 문제 관련해서 가격이 고가이든 저가이든, 또는 그것이 국산품이든 외제품이든, 우선 (범인들이 정말 고등학생이라고 가정시) 그들이 반드시 흙수저라는 보장은 없다는 점을 기본전제로 해야 한다.[30][31] 그리고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공고에 입학하기 위해선 버니어 캘리퍼스 같은 공구를 구입해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직업적인 이유로 필요한 물건의 경우는 한 번 장만해 놓고 오래 간직하며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공대생이 공학용 계산기를 산다던지, 상업고등학교 재학생들이 타자 수업을 받고 타자 급수를 따려면 타자기가 필수품이었는데 이 타자기도 상당히 고가품이었다.[32] 살인 도구에는 귀천(?)이 없다. 즉, 명품 도구니까 살인에 쓰이지 않고 흔한 도구니까 살인에 쓰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일례로 총기[33] 같은 꽤나 비싼 물건들이 살인의 도구로 사용된 사례는 예전부터 많다.[34]
무게 문제 관련해서 일단 공업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정도의 버니어 캘리퍼스는 그렇게 무거운 측정기기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버니어 캘리퍼스는 길이를 측정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변형을 최소화 하기 위해 금속을 두껍게 사용해서 비슷한 크기의 다른 도구에 비해 상당히 묵직한 편이며 작은 물건의 길이도 잴 수 있도록 끝이 날카롭기 때문에 뼈에 상처를 주기에는 충분하다. 사진으로 보면 알루미늄과 같은 색을 하고 있어서 알루미늄으로 된 자처럼 가벼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사용해 보면 쇳덩이를 드는 느낌이다. 그리고 파괴력이 좋은 300mm 이상의 버니어 캘리퍼스를 소지했을 가능성 또한 열어 둬야 한다. 이 경우는 휴대해서 오랜시간을 이동하기에는 불편하다는 반론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범인들이 출발지점부터 산까지의 모든 거리를 쉬지 않고 걸어다녔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즉, 중간지점이나 산 근처에 범인들의 아지트가 있는 상황도 상정해 볼 수 있고 택시나 오토바이 등을 타고 일정 거리를 이동하고 난 후 짧은 거리만 산으로 걸어 올라가면서 무게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35]
개구리 소년들이 다녔던 성서초등학교와 대구전자공고까지의 거리는 1.8km인데 도보로 29분 정도에 불과하다. 당시 시골에서 이 정도 거리는 그냥 같은 동네라고 보면 된다. 통학한다고 1시간씩 걸어서 다니던 시대였는데 도보 29분은 얼마든지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거리다. 성서초등학교 어린 아이들이 도룡뇽알을 찾겠다고 와룡산까지 갔다.
지도에서 빨간색 동그라미 부분이 바로 성서초등학교다. 지금 지도로는 성서초등학교에서 와룡산까지 매우 멀어 보이지만 1991년에는 성서초등학교와 와룡산 사이가 개발이 덜 되어서 와룡산이 더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즉 성서초등학교 학생들도 충분히 와룡산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와룡산이 가까이 있었고[36] 이는 공고와도 지금보다 더 가까이 있었다는 이야기다.[37][38]
하나 덧붙이자면 그 버니어 캘리퍼스가 외제품-고가품이라고 가정할 시에 그것이 반드시 범인 본인의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즉, 원래는 범인의 가족(부모님 or 형제자매) 소유물인 것을 모종의 이유로 사건 당일 범인이 소지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다. 당시 부모님이 건설업에 종사하실 경우 집에 공구들이 있는 경우는 흔했다. 특히 버니어 캘리퍼스는 일반인에겐 생소하지만 관련 직업인에게는 필수 공구다.[39]
만약 그렇다면 범인은 기본적으로 버니어 캘리퍼스 습득이 용이할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버니어 캘리퍼스에 익숙하면서 사용에도 능숙할 수 있다. 심지어 범행 그 순간에도... 단, 환각 상태에서도 그 능숙함이 제대로 발휘될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대구는 시골이 아니고 1991년 기준으로도 엄연히 대도시였으며[40][41] 공업이 발달한 공업 도시였다.[42] 심지어 사건 현장에서 얼마 안 떨어진 성서는 1991년에도 이미 산업단지가 있는 지역이었다.[43][44] 또 대구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구미에도 대규모 공장-공단이 밀집해 있다. 당연히 서울보다는 못한 인프라이지만[45] 불량 청소년 집안의 재력+성서산업단지 등 주변 인프라가 맞아떨어진다면 버니어 캘리퍼스가 정말 외제품-고가품이라고 하더라도 구입이 어려운 상황은 아니다.
미제로 분류됐던 중요한 증언의 단서도 되는데 당시 산에서 다급하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함승훈군의 증언이 있었지만 비명소리를 들은 시점이 피해자들이 산으로 올라가기 전이라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본드의 대표적인 특징은 흡입 시 '꺄아아아아악~!' 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해당 뉴스에서 24초부터 본드를 흡입하는 남학생들의 비명소리를 들어 볼 수 있다.[46] 즉 개구리 소년이 산을 타기 전에 이미 본드를 흡입 중이었던 인물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과거 본드를 흡입한 청소년들이 환각 상태에서 이성을 잃고 살인한 뉴스1, 뉴스2, 뉴스3가 있다. 청소년이 본드에 취한 상태에서 흉기를 휘둘러 중상을 입힌 뉴스도 있다. 이 중 첫번째 사례는 시신을 매장하지는 않고 벙커에 숨겼으며 두번째 사례는 실신한 초등학생을 생매장했다.
6월 3일 SBS 비디오머그에서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는 일단 버니어 캘리퍼스가 흉기로 쓰인 것이 맞는지 실험해 볼 의향은 있는 듯하다.
6월 7일 KBS NEWS에서 범죄 심리학자 이수정 교수는 굳이 고등학생이 아니더라도 범인이 다수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고 버니어 캘리퍼스가 흉기라는 주장도 설득력 있어보이며 본드로 인한 범행 가능성도 당시 청소년 범죄의 온상이었으므로 일리가 있다고 하였다. 버니어 캘리퍼스로 실제로 아이들의 두개골에 남은 흔적들이 재현하는 것은 지금의 과학수사 기법으로 충분히 실험해 볼 수 있고 이춘재도 공소시효 종료 됐지만 DNA로 범인을 밝히니까 억울한 윤씨는 무죄를 입증할 수 있지 않았냐면서 재수사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글쓴이가 사건 관련자라는 일부 네티즌의 주장에 대해서는 지금 O냐 X냐를 답할 수 없고 조사를 해 봐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방송을 볼 글쓴이에게 할 말이 있냐는 MC의 요청에 이미 기사를 접했을 유가족들에게 글쓴이가 가설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만으로도 유족들이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으니 협조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47] 기사
6월 9일 JTBC News에 이수정의 인터뷰가 올라왔다.
6월 9일 프로파일러 염건령은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지만 글쓴이가 수사기관에 신원을 밝히고 협조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가설만을 논하는 것은 혼란만 가중시킬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경기대 범죄 심리학과 교수 공정식은 “글쓴이가 직간접적으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거나 경험을 해서 이런 시나리오를 구성했을 것”이라며 “마치 실험하듯 관심을 끌고 주목을 받으려는 심리가 작용했을 수 있다. 글쓴이에 대한 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기사
경찰청에 장기미제사건 전담반이 있지만 6월 8일 기사에 따르면 재조사에 들어갈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다만 확인 차원에서 글쓴이와 직접 접촉하는 방안을 모색 중으로 전해졌다. 6월 9일 대구경찰청 관계자는 “당시 버니어 캘리퍼스가 범행 도구라는 제보가 있어 수사했지만 두개골 상흔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동네 불량배에 대해서도 5개월간 900여명을 수사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그래도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 기존에 알려진 정보들을 이용해서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글쓴이와 접촉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잘 되지 않는 상황이다. 먼저 경찰에 연락을 주면 좋겠다”고 했다. 기사
2.5.7.1. 반론
해당 주장을 부정하는 배상훈 프로파일러의 견해 |
유력한 범행 도구인 용접망치에 대해서 비판했을 때 용접 망치를 이용하여 찍어본 다음 두 도구의 타격 너비 차이를 비교했다는 실질적인 증빙은 물론, 최소한 용접망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언급이라도 해야 하는데 캘리퍼스와 용접망치의 외상 너비 분포에 관한 실질적인 물증이 있는 차이점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자고로 저 상흔만 놓고 보자면 캘리퍼스와 유사하게 생긴 집게나 가위류도 범행 도구 선상에 포함될 수 있다. 즉, 캘리퍼스인지 확실하게 특정하려면 실험을 하면서 실험군인 캘리퍼스와 함께 유사 대조군인 니퍼, 펜치, 집게, 가위 등으로도 타격해서 비교해야 하는데 그런 것조차 없다. 단순히 모양만 비교해 본다면 비슷한 물건들이 나올 수도 있으며 직접 제작한 용접 망치라면 캘리와 비슷하게 제작마저 가능하다. 그 물건들을 동일한 강도로 동일한 상흔을 남길 수 있다면 오히려 본드 흡입 문제가 생긴다. 반대로 살인 이후 본드를 흡입했다면 수색을 위해 산에 오르는 사람들 누구에게든 발견이 가능했다. 당시 수색이 새벽까지 있었던 데다 매장까지 한 상태라면 본드 흡입할 시간도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일한 상처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동일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흉기가 필요하다. 버니어 캘리퍼스의 어미자와 아들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49] 강하게 휘두르면 형태가 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 에펨코리아의 한 유저는 '당시 기술로 만들어진 국산 버니어 캘리퍼스로는 사람 두개골에 상처를 낼 수 없다'는 반박 주장을 하기도 했다. 미츠토요라는 유명 일본 메이커의 제품이면 가능하지만 고등학생이 그런 고가의 버니어를 들고 다녔을 확률은 낮다고 한다. 반면 용접망치는 길이가 30cm도 안 되는 작은 크기로 제작가능한데 굴러다니는 한 뼘가량의 쇠파이프 하나와 두 뼘도 안되는 철근으로도 만들수 있을 정도로 흔한 재료로 작고 가볍고 튼튼한 데다 흉기로서 사용이 쉽고 눈에 띄지 않게 만들고 버린다고 한들 신경쓰지도 않는다. 철근만으로도 제작이 가능한것도 장점이다. 망치는 돈 주고 사지만 용접망치는 버리는 재료로 만드는 게 더 쉽고 빠르다.[50]
그리고 해당 글쓴이는 전체 상처 중 X자 형태의 상처들만 이야기하면서 버니어 캘리퍼스와의 연관성을 주장했는데 아이들의 유골에는 X자 형태 상처들뿐 아니라 ㅁ자, 길게 늘여진 ㅁ자 등의 다양한 형태의 상처들이 있었다. 특히 우철원군의 직접적인 사인으로 추정되는 상처는 X자형 상처들이 아니라 깊이 파인 ㅁ자, 넓은 형태로 뚫린 상처로 하나의 도구로 이런 다양한 형태의 상처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용접망치가 흉기로 유력하게 추정된 것이다. #
더군다나 당시는 인터넷 쇼핑이 없던 시절이어서 단순히 돈만 있다고 일제 버니어 캘리퍼스를 쉽게 손에 넣을 수도 없었고[51] 시골에서는 접근하기 더욱 어려운 물건이었다. 당시 해당 지역은 명목상 대구라고는 해도 현재의 달성군, 대구 편입이 시행된 군위군보다 오히려 훨씬 더 낙후된 곳이었다. 공과대학 수준의 학생들이 들고 다닐 법한 전문적인 도구인데 산에서 본드나 흡입하고 아이들을 괴롭히는 불량 청소년들이 가지고 다닐 만한 물건은 더더욱 아니긴 했다. 당시 중고등학생들은 학교에서 필요한 도구를 근처 문방구에서 샀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런 문방구용 버니어 캘리퍼스는 국산품 중에서도 훨씬 더 조악하고 약한 물건이었다. 불량 청소년이 장인들이나 쓸법한 일제 전문가용 도구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흔하지 않지만 기껏 그런 명품 도구로 한다는 짓이 아이들을 때려죽이는 일이란 것은 더 설득력이 떨어진다. 공고에서는 망치처럼 값싸고 사람을 때려 죽이기 좋은 흔한 도구들도 많이 다루는데 굳이 버니어 캘리퍼스란 흔치 않은 도구를 살인에 이용할 가능성도 떨어진다.
오히려 제작하는 데 불과 몇 분이면 뚝딱 가능할 정도의 물건인 용접망치를 학교에서 제작하고 가져갔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그리고 굳이 용접망치가 아니라 해도 합판 등을 뚫는데 사용했던 DIT송곳도 있다. 손에 쥘 수 있는 길이의 쇠파이프와 짧은 길이의 철근이면 제작가능할 정도로 단순하고 길어봐야 한 뼘 정도에 불과하다. 심지어 아예 간단히 제작하려면 철근만으로도 용접하지 않고 끝부분만 갈고 손잡이가 될 부분은 휘어서 제작할 수 있다. 약간의 힘만 가해도 3T, 4T 정도의 합판을 뚫을 수 있을 정도의 물건이 더 효율적이고 찍는 것이 목적이라면 DIT 송곳이 제격이라 설득력도 충분하다.[52] 아래에 서술한 것처럼 다목적 가위라는 추측도 있다.
대구전자공고(사건 당시 이름은 성서공업고등학교)에서 와룡산까지의 거리도 멀 뿐더러 당시에는 현재처럼 길이 잘 닦인 것도 아니어서 비포장도로가 많았다. 또 군부대도 중간에 있었으므로 학교에서 산까지 가려면 군부대를 한참 우회해야 했기 때문에 단순히 직선 거리로만 볼 것도 아니고 실질적인 거리는 훨씬 더 멀다. 현재 29분 거리라고 해서 당시에도 같은 거리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휴일이니까 꼭 학교에서 출발할 필요는 없다고는 하지만 연락 수단이 변변찮았던 1991년에는 모이기에 학교만큼 약속 장소로 무난한 곳은 별로 없다. 위 가설 대로라면 범인들이 해당 공구에 본드까지 들고 산까지 몇 km를 걸어 갔다는 말이 된다.[53] 그런데 휴대하기 좋은 150mm, 200mm짜리 버니어 캘리퍼스는 파괴력이 부족하다. 두개골에 25번이나 되는 상처를 낼 정도라면 300mm 이상이 적합한데 그러면 무게 때문에 휴대하기 불편하다는 문제가 생긴다[54].
중간의 아지트에 오토바이를 주차한다면 그 아지트에서 본드를 하면 그만이지 뭐 하러 귀찮게 산에 올라갈 필요조차도 없다. 초등학생들이야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나 모험심 등으로 그 먼 거리를 왔다갔다 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고등학생들이 더 쉬운 장소들 대신 번거롭게 산을 오고갈 동기는 그리 크지 않다.
(네이트판 주장을 전제로 한다면) 범인들이 산에 오를 때는 환각 상태가 아니었지만 내려올 때는 환각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매장 과정을 포함해 하산 과정에서의 이동 경로라던지 체력적 부담이 어땠을지는 또 다른 의문을 야기한다.
당시 와룡산이 우범지대였다곤 하지만 타 지역의 흔한 불량배들과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는 점도 지적된다. 갱단들이 판을 치는 멕시코의 우범지대처럼 실종과 살인이 밥먹듯 일어나는 지역이었냐면 그 정도 수준은 아니고 본드 불던 '노는 형'들은 서울이든 지방이든 어딜 가든 볼 수 있는 흔한 광경이었다. 유튜브에서 검색해 보니 본드 불고 소리 지르는 영상을 봤다며 혹시 그 괴성이 본드 불던 불량학생들이었냐며 대단한 비밀을 안 것처럼 놀랍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그 영상에 나온 본드 불던 친구들도 다 예비 살인마란 말인가? 본드 체험담을 보면, 막 장풍을 쏘니 장풍이 나가고, 공중부양하고, 외계인도 만나고 그야말로 '환각' 상태에서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며 노는 수준이었기에 지금껏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본드를 불어 살인 확률이 높아지면 이미 서울이든 지방이든 본드 불던 '노는 형'들의 비슷한 사건과 사고가 좀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다.
범죄 연구는 철저히 사례를 바탕으로 통계를 내 범죄의 특성과 범인들의 습성, 패턴을 유형화한다. 사이코패스도 실제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의 범행의 특징을 분석하여 이론화한 것이고 이 사건도 전문가들의 분석 결과 사이코패스 범죄자들과 비슷한 특성을 보이기에 사이코패스설이 대두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본드로 그런 엽기적인 범죄가 일어났다고 하려면 본드 불던 '동네 노는 형'들의 유사범죄 사례가 좀 있었어야 하나 딱히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냥 환각 상태면 제 정신이 아니니 그런 짓 할 수 있는거 아니냐는 추론이었는 물론 이론상 그럴 수도 있는건 맞긴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므로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확률을 추정해야 하는데 별로 유사 사례가 없다.
거기다가 버니어 캘리퍼스가 당시 학교의 수업 내용상 필수라도 1학년 1학기 첫 달 3월부터 들고 다녔을 거라는 명확한 근거도 없으니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시 해당 학교의 커리큘럼을 알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2학기부터 필요했을지, 1학기라도 5월부터 필요했을지는 이제 와선 알 수 없으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즉, 주장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 시기에 절대 휴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짓는 게 아니라 주장대로 1991년 3월에 반드시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근거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애초에 주장이 근거가 부족한 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정말로 해당 공구를 가지고 다녔을 거라는 기본 전제부터 옳다는 보장도 없으면서 무리한 주장을 시작했으니 입학하자마자 당장 3월부터 필요했다는 입증 책임도 있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버니어 캘리퍼스는 공고생 중에서도 특히 기계과, 금속과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며 토목과, 건축과 등에서는 배관과 관련하여 가끔씩 사용될 뿐인데 당시 성서공업고등학교에는 기계과, 금속과는 물론, 토목과, 건축과도 개설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1990년에 개교할 땐 전자과, 전자계산기과, 화학공업과가 있었고 모두 버니어 캘러퍼스와는 상관없는 분야다.#[55] 현재도 버니어 캘리퍼스와 무관한 전공만 있는 건 마찬가지다.
이미 과거에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버니어 캘리퍼스를 실험했을 가능성도 있다. # 첨부된 그것이 알고싶다 방영분 이미지에 열거된 도구들 중 버니어 캘리퍼스로 보이는 물건이 있기 때문. 물론 링크의 본문처럼 그알에서 방송 화면의 모든 공구를 하나하나 일일이 전부 실험했다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반대로 이때까지 흉기로 전혀 고려도 해 보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셈이다.
실제로 경찰이 2002년 9월 당시 '흉기가 버니어 캘리퍼스이다'는 제보를 받고 조사했으나 조사 결과 수사팀은 ‘유골의 손상 흔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또 약 5개월 동안 형사들이 직접 대면하고 탐문하면서 불량학생 900명 정도의 행적을 조사했는데 별다른 범행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즉 이미 경찰에서 다 조사했던 상황이다. 여기에 '그 당시 경찰이 수사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는 반박이 존재하는데 그런 식이면 제2의 한강 추종자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
결정적으로 후술하지만 이게 학생들이 한 일인 것치고는 너무나도 능숙했다는 게 문제가 된다.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이 밝히길, 이 사건은 살인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 저지른 것이며 이후 또 다른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도 남을 미치광이일 거라고 추측했고 본드 먹은 학생들이 그런 능숙성을 발휘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한다. 본드 흡입 상태라면 제 몸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제정신도 아닌데 이렇게 약물에 취한 사람의 살해라고 하기엔 우철원 군의 두개골에 정교하게 수십번이나 타격했다는 것은 쉽지 않다. 상흔은 규칙적인 패턴이었다. 취객들의 우발적인 살인을 떠올려 봐도 그냥 우연히 밀쳤는데 상대가 잘못 넘어지거나 아니면 흥분하여 마구잡이로 공격하다가 어쩌다 공격이 치명적으로 들어가거나 하는 수준이지 몸도 제대로 못가누는 취객들이 피해자에게 정교하게 특정 부위에 수십번을 칼로 찌른다든지 하는 사례는 흔하지도 않다.
그리고 유명 범죄심리학자 힉키 교수는 증거가 별로 남지 않은 점과 시체를 매장했다는 점을 들어 정신이상자의 소행일 것이라는 추측을 부정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본드 먹은 학생들의 소행이라면 정교한 매듭을 지어 아이들을 묶거나 시체를 매장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반박도 가능하다.
더욱이 2022년 8월 27일 방영된 당신이 혹하는 사이 4에서 전문가들이 최대한 비슷한 조건의 두개골에 버니어 캘리퍼스, 다목적 가위, 용접용 망치 세 도구를 선정해 내려쳐 범행 도구를 추정한 바로는 버니어 캘리퍼스는 상처의 크기가 실제 피해 아동의 두개골에 난 상처(2mm~4mm)에 비해 너무 크게 나서(~10mm) 가능성이 낮다는 결론이 나왔으며 오히려 버니어 캘리퍼스 설을 유포한 이가 가능성을 부인한[56] 다목적 가위가 내려찍는 식으로 머리를 타격했을 때 2mm 정도의 실제 두개골에 난 상처와 비슷한 모양의 일자/사방으로 갈라지는 상처가 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추측되었다.[57] #
자신이 11년 동안 주장했다는 바도 믿기 어렵다. 초동 수사를 소홀히 해서 증거가 적다고는 하지만 모든 주장이 추측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주장들보다 설득력 있는 가설로 봐 줄 이유도 전무하다. 자신도 이 정도는 추론할 수 있는데 이제까지 다른 방향으로 추측 또는 수사해 온 사람들은 멍청이 아니냐는 식으로 오만한 자기과시적 뉘앙스가 많은 반감을 샀고 실험 노트 같은 실질적인 물증도 없는 주제에 단순 추측 위주인 글쓴이의 주장은 태생적으로 반론이나 의문점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많이 비판받은 것은 반론에 대해 '근거'를 대라고 하는 것인데 본인도 정확한 근거를 대지 않았으면서(대표적으로 용접망치와 버니어 캘리퍼스의 상흔 비교) 남에게는 근거를 요구하는 한편 첫번째 글에서 범행 도구를 '알고 있다'며 확신조로 서술해 놓고 슬슬 반론이 올라오자 은근슬쩍 말을 바꾸는 표리부동한 모습도 보여 6번째 글에서 대부분의 민심이 등을 돌리고 이따금 갤러리를 찾아오는 소수 추종자만 남게 되었다.
해당 글쓴이조차도 네이트판 작성글 내역을 확인해 본 결과 분란을 야기하는 글들을 여러 차례 작성하고 삭제한 것으로 확인되어 소수 추종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이미 그저 어그로꾼 관종으로 치부하면서 쉰 떡밥이 된 지 오래다. 진지하게 해당 주장에 의문점을 제시하는 덧글들은 무시하면서 단순 비방글만 캡쳐해서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내가 진지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며 반론은 피하고[58] 확고한 물증도 없고 사건 발생 이후 설립된 고등학교들을 지목하며 헛다리 짚거나 본인도 전문가가 아닌 주제에 개구리 소년 범인 추정 글에서도 수사기관과 법의학자들, 언론인들을 바보 취급하는가 하면 댓글을 통해 이 사건과 관련 없는 여러 연쇄살인 사건의 전문가들에게 썰 푸는 게 얼마나 개소린지 까발린다는 이야기를 하거나[59] 이전에도 아기 낳아 주지 말자느니 하는 글을 작성했다. 심지어 개구리 소년 관련 글을 올린 날은 지방선거일이었다. 닉네임 역시 꼬툭튀에서 따 왔음이 거진 확실한데[60] 이런 활동명을 다른 곳도 아니고[61] 굳이 여초 커뮤니티인 네이트 판에서 사용했다는 점도 단순 관종설에 무게를 실어준다.
[1] 당시 법 의학팀은 영규군의 옷을 묶은 이 특이한 매듭 방식에도 주목했는데 일자매듭법이라고 하여 포장 전문직 종사자나 특수부대원 출신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매듭법이라고 한다. 또 전문 낚시꾼들도 종종 이 매듭을 만들어서 쓴다.[2] 해당 뉴스에서 24초부터 본드를 흡입하는 남학생들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치 여자의 비명소리 같지만 사실은 남학생들이다. 극소수지만, 일각에서는 본드 흡입 시 흡입자가 무기력해진다는 점과 피해자들이 육상대회에 나가거나 태권도에 다닐 정도로 운동실력이 뛰어난 아이들이라는 점을 반례로 들어, 반대로 가해자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본드를 먹이고 일을 벌인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다. 물론 유골에서 그 흔적이 전혀 나오지 않아 기각되었다.[3] 이를 미뤄 봐서 작성자는 1971년생인 듯하다. 당시 31세로 추정되며, 현재는 53세로 추정된다.[4] 다만 당시는 3저 호황의 끝물 시기라 1989년 상반기를 정점으로 경기가 하강 곡선을 그리던 때였고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 등 후발 주자들이 본격적으로 추격해 오면서 무역수지도 적자로 반전되기 시작했다.[5] 물론 이때에도 마실 놈은 얼마든지 마셨다. 오히려 당시에는 신분증 제시를 거의 요구하지 않아서 미성년자의 유흥업소 출입이 지금보다 쉬우면 쉬웠지, 어렵지 않았다. 설사 의심하면 대학생이라고 적절히 둘러대면 됐고. 때문에 중, 고등학교 학생 지도 교사들은 수시로 지역 내 업소들을 뒤지고 다녀야 했다. 청소년들이 가게에서 사 온 술로 야산에서 술자리를 여는 경우는 대개 업소가 문을 닫는 낮 시간대이거나 업소에 출입할 돈이 없거나 둘 중 하나였고 당시 청소년 범죄의 동기 상당수는 업소에서 놀 유흥비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청소년 보호법이 시행되기 이전이라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술,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건 아주 당연한 예삿일이었고(그 어른들도 어린 시절에는 주전자 들고 막걸리 양조장에 가서 막걸리 받아 오는 심부름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술, 담배 심부름 시키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때문에 가게 주인이 술, 담배 사러 온 청소년들을 의심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6] 미모의 엘리트 출신으로서 장미빛 미래가 보장되었던 이지선씨가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고 인생이 바뀌게 되었고 화상 환자로서 극복하는 과정을 TV와 책에서 다루면서 유명해졌는데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얼마 전쯤에 자신의 미래를 예언하는 듯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의 화상환자 편을 보고 슬퍼서 울었다고 했던 적이 있다. 당시 그알에 나온 화상 환자가 바로 인천 호프집 화재의 피해자였던 고2 여고생이었다. 늘씬한 키에 미모로 모델을 꿈꿨다고 했으나 심한 화상을 입어 얼굴도 망가지고 팔도 잘리는 등 고통을 겪었다. 일부에선 왜 고등학생이 술집에 갔냐고 비난했으나 그알에서도 그곳은 불량 청소년들이 드나드는 우범지대가 아니고 그냥 학생들이 시험 보거나 생일에 가던 일상적인 청소년들의 모임 장소 같았던 곳으로 묘사했다. 그 여고생도 친구 생일에 참석했다가 그렇게 됐던 것이다.[7] 심지어 범인 3명은 현재까지 검거되지도 않았다.[8] 해군 갑판병 출신 예비역들에겐 익숙할 그 깡깡이 망치 맞다.[9] 사건 초반부터 범인이 돈을 노리고 소년들을 납치했거나 죽였을 거라는 주장은 그리 힘을 얻지 못했다. 피해소년들의 거주지는 부촌이 아니었고,행색도 지극히 평범한 서민이었기 때문이다.[10] 그래서 5명의 소년들을 찾을 때, 경찰들이 전국 각지의 앵벌이하는 아이들을 있는대로 조사하고 다니기도 했다.[11]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201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대구 서문시장에선 술에 취해서 같은 음모론을 떠드는 행려병자가 한 사람 있었다.[12] 심지어 영화 회사원에서도 보면 작중 후반에 주인공이 회사 건물내에서 동료들을 상대로 총격전을 벌이자 근처 건물에서 총소리에 대한 신고를 넣었고 신고를 접수한 경찰들이 총기로 무장한 채 총소리가 난 건물 앞으로 출동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다.[13] 간부를 사칭해 영내에 침입한 사건이 있기는 했으나 이건 애당초 해당 범인이 해당 부대 관계자인 척 연기한 것이고 일자 면식도 없다고 판단된 이를 들여보낸 것이 아니다.[14] 때문에 실수로 민간인을 죽여도 군사 작전 지역에선 작전 성공으로 간주한다. 2002년 영화 해안선에서 해병대 해안경계부대의 경고를 무시하고 해안선에 몰래 들어갔다가 오인 사격으로 사살당한 동네 불량배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동네 양아치를 사살한 해병은 오히려 포상 휴가를 나갔다.[15] 과학기술원(카이스트)의 직원으로 있었던 건 사실이나 범죄심리학자는 자칭이다.[16] 원문을 그대로 복사했으므로 띄어쓰기와 문법 오류가 약간 있다. 원문은 '나는 개구리소년 사건의 흉기를 알고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포함하여 총 7개의 글 시리즈가 있었으나 폭력·잔혹·혐오·저속한 표현·욕설 비방 등의 사유로 일부 네티즌에게 신고를 당해서 7개의 글 모두 네이트판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글쓴이가 밝혔다.[17] 다만 글쓴이는 흉기 중 하나가 버니어 캘리퍼스라고 주장했지, 버니어 캘리퍼스가 유일한 흉기라고 하지 않았다.[18] 현재 존재하는 와룡산 인근 타 학교들은 사건 발생 후 산을 깎은 자리에 개교한 학교들이다.
아래의 와룡산 남부 개발 전후 항공 사진 비교 움짤 (1992년 → 1996년) 을 보면 깎이기 전 기존 와룡산은 훨씬 넓었음을 알 수 있으며 1996년으로 넘어가면서 깎인 와룡산 지역에 몇몇 현 인근 학교들의 부지도 보인다.
[19] 이러면 함승훈 군이 들은 비명소리도 설명된다. 본드 흡입의 증상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20] 다만 사진만 나오고 써 보지는 않으며 교사가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21] 정밀 계측을 위해 사용하는 측정 도구이기 때문에 한국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사용할 일이 없고 공과대학이나 항공정비를 가르치는 직업전문학교에 진학해야 만져 본다. 해외에서는 물리 실험때 사용법 정도는 교육하기도 하지만 그닥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건 별로 다르지 않다.[22] 1999년 현 위치로 이전했다.[23] 여기서는 범인 중 한 명부터 글쓴이 본인이 제시한 발만 동둥구르며 형들이 그짓하는 동안 말리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던 똘마니들 중 한 명이라는 추측도 있다.[24] 글을 보면 알겠지만 자신의 추측에 자신감이 있음을 넘어 아예 극도의 오만함까지 나타나 있다.[25] 그냥 겁박시켜서 버니어로 때렸다고 할 수 있음에도 '헤드락을 걸고 버니어로 때렸다'고 한 것 외에도 ‘목을 발로 밟았다’, ‘발만 동둥구르며 형들이 그짓하는 동안 말리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던 똘마니들’ 등을 말했다. 무엇보다도 사건 묘사 부분에서 어느 순간부터 주체적인 실행자들을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에서 ‘형들’이라고 바꿔서 지칭했다.[26] ‘당시에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학교로 걸어갈 때 그 학교 학생들만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유머까지 있었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서론에서 ‘대구지역에는 도롱뇽이 많았는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한 바 있기에 동네 기담까지 아는 사람이 왜 이 사실은 모른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27] 네티즌들은 글쓴이의 말투와 글쓴이가 과거에 작성했던 보수 성향의 글들을 토대로 사건이 발생한 대구 출신의 4~50대 남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으며(범인이 당시 고등학생이라고 가정했을 시 현재 나이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다) 20년도 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이 사건에 가담 혹은 목격한 것 때문에 충격을 받아 정신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또 글쓴이가 이 글을 올린 날이 사건 발생일과 같은 지방선거 날이라는 점도 매번 지선일마다 글쓴이가 죄책감에 시달리기에 이러한 힌트를 주는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28] 또 하나 놀라운 점은 상기된 글을 보면 글 자체는 꽤나 길이가 있는 장문임에도 불구하고 막히는 곳 없이 가독성 좋게 작성했다는 점이다. 해당 글의 원문에도 글이 술술 읽힌다는 네티즌들의 평가가 달려 있다. 가독성이 좋은 장문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며 타고난 재능이나 그에 필적할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작성자에 대해 추측해 보자면 학력은 낮을 수 있지만 지적 능력이 어느 정도 살아 있으며 평소에도 일이나 취미로나 글을 많이 읽고 써 본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29] 현재도 외국 공항에서는 기내 반입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30] 사회적으로도 재벌 2세-3세들이 외국 유학 중 마약 복용 등으로 문제가 된 사례는 종종 있어 왔다.[31] 21세기에도 소위 말하는 일진들은 자기과시를 위해 무리해서 구찌, 톰 브라운 등의 준명품 혹은 명품을 구매하는 경우도 많은 만큼 만약 그 시절 공고에서 버니어 캘리퍼스의 가격대로 급 나누기를 했거나 가오를 잡았다면 버니어 캘리퍼스의 가격에 대한 논란은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32] 당시의 타자기 가격은 대략 지금의 노트북 컴퓨터 가격과 비숫하다고 생각하면 된다.[33] 사제 총기가 아닌 정식으로 판매하는 총기[34]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만 범죄를 저지르고 마약을 복용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과 같은 논리다. 그리고 부잣집 자녀라고 해서 학력이 좋고 가난한 집 자녀라고 해서 학력이 나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또 다른 고정관념이다.[35] 그리고 3명 이상이 불량배 무리를 형성할 시에는 그 중 리더 역할을 맡는 인물이 생기고 자연스레 허드렛일을 도맡는 꼬붕 역할의 인물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이때 이 꼬붕 인물이 무거운 짐의 운반을 담당하는 상황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아니면 무리내 인물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무거운 짐의 운반을 맡는 상황도 상정 가능하다. 단, 버니어 캘리퍼스를 들고 걸어서 운반하는 거리는 산 입구부터 사건현장까지만 등으로 정해서 운반자의 부담을 크게 하지는 않는 한도에서.[36] 해당 아이들의 거주지는 성서초등학교보다 더 와룡산에 가까운 위치였다. 당시 논밭뿐이었던 성서 일대에 주택가가 조성된 곳은 한정적이었다. 지도를 통해 성서지구를 내려다보면 논밭이 있었던 곳은 지금 다 아파트촌이 되었고 마을이 위치했던 곳은 아파트 단지가 아닌 주택가로 남았으며 가로세로 정비되지 않고 복잡히 꼬인 골목길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인근을 돌아다녀 보면 아직도 4~50년이 넘은 시골집들이 한두 채씩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와룡시장 인근, 쇼핑월드 인근, 대구성서경찰서 북측의 목련공원 인근이 해당되며 이들이 살던 동네가 바로 월요시장이 들어선 목련공원 일대였다고 한다.[37] 사진상에서 보이는 상리공원 위치가 당시에는 수천못이란 이름의 저수지였으며 그 옆으로는 와룡산에서 뻗어나온것으로 보이는 야산이 있었고 위엔 예비군 훈련 사격장 이 위치해 있었다. 허나 당시에도 구마고속도로로 인해 와룡산과는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다.[38] 참고로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현장은 성산고등학교 서편 기슭이다.[39] 당시 컴퓨터가 훨씬 더 고가였지만 부모님의 직업에 따라 몇몇 집에 있는 경우도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40] 단, 사건 현장 및 인근 동네는 대구에서도 외곽 지역이고 1991년 당시는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 사건이 발생한 동네는 종종 시골과 같은 분위기로 묘사되기도 한다.[41] 범인들의 (단순 아지트가 아닌) 실제 거주지가 사건지역 동네 근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즉, 범인의 집안 배경이나 재력에 대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다.[42] 일제강점기부터 6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는 남한 지역에서 대표적인 공업 도시였다. 물론 경제개발과 산업화 이후 울산, 창원 등 동남권과 수도권의 신흥 공업지역이 성장하면서 위상이 내려가긴 했지만 지금도 섬유, 경공업, 경금속 제품 등 내수 위주의 일상용품 상당수가 대구에서 생산된다.[43] 사실 대구처럼 산업화 이전부터 공업이 발달한 도시에서는 공업단지가 오히려 드물고 공장들이 주거지, 상가와 뒤섞여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서유럽이나 북미, 일본 등 선진국의 오래된 공업 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광경이며 공장이 주거, 상업지역과 분리된 일정 구역에 집중된 공업단지는 소련, 한국 같이 산업화에 뒤늦게 뛰어든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한국의 공업단지는 바로 소련의 공업단지인 콤비나트 시스템을 모방한 것이다.[44] 21세기에는 대구시내 기준 성서 외 타 구역에도 공장-공단이 많이 생겨서 성서산업단지만의 희소성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45]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물론 당시에도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지긴 했어도 2020년대에 비하면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는 상대적으로 덜했다. 지방에서도 한국 최대의 무역항을 끼고 있던 부산이나 공업 기반이 탄탄했던 대구 정도면 서울 촌놈들이 함부로 시골로 내려볼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46] 마치 여자의 비명소리 같지만 사실은 남학생들이다.[47] 추가로 글쓴이가 글을 삭제한 것을 보면 단순히 유명세나 지식 어필을 위한 것 같지는 않다면서 글을 쓴 의도를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글쓴이는 욕설 사유로 신고를 당해서 관리자가 삭제한 것이라고 밝혔다.[48] 외상의 너비만 존재하고 외상 깊이의 기복이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다.[49] 나사를 조여서 고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이 죽을 정도의 충격을 수십번 가했는데 과연 멀쩡할지는 의문. 일단 손에 잡고 있다면 형태 자체는 유지할 수 있겠지만 측정 도구로서는 확실히 못 쓰게 된다.[50] 더 치밀하게 생각해서 상흔에 남는 자국과 누군가가 가지고 있던 용접망치의 머리 모양이 비슷해서 의심받을 상황이었다면 살짝 갈아내는 정도로 판이하게 다른 모양이 되어 버린다. 보통은 원형 등의 모양을 내기 귀찮고 섬세할 필요가 없다 보니 대충 갈아서 각진 형태가 된다.[51] 당시 한국산 버니어 캘리퍼스는 현재의 중국산 수준으로 조악한 품질이었다. 지금이야 국산품도 쓸만한 게 많지만 저때는 1991년이다.[52] 소위 꽃배달차량으로 불리는 차량의 호로를 씌우는 작업에 사용하기 위해 직접 제작하기도 했는데 꽃배달트럭은 뼈대위에 오징어 합판을 덧대고 그 위에 방수천, 보온덮개, 방수 캔버스천을 씌우는 식으로 작업을 한다. 여기서 합판과 뼈대를 고정하기 위한 타이용 구멍을 내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다. 조금만 익숙해지면 동일한 강도로 정해진 위치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 꽃차호로 제작사에서 일하면서 사용했던 경험을 말해 보자면 망치보다 정확하고 두께 3T 합판 두장을 겹쳐도 한 번에 뚫을 수 있다.[53] 오토바이를 몰았을 가능성이 있다고는 해도 산으로 갈 때야 문제 없지만 올 때는 본드 흡입한 후일 텐데 오토바이를 몰고 돌아오는 건 무리다. 물론 음주운전하는 사람들이 널린 마당에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만. 인근에 있는 흉가나 폐가 등을 찾는게 더 수월할 수 있다. 당시는 서울에서도 흉가, 폐가가 있었고 불량배들의 아지트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 거리를 무리해서 갈 필요성이 떨어진다.[54] 버니어 캘리퍼스는 어미자와 아들자 외에도 고정 나사 등 이런저런 것들이 붙어 있는지라 그 크기에 비해 무거운 편이다.[55] 학교연혁에서 1990년대를 클릭하고 스크롤을 내리면 된다. 전자과, 화학공업과가 버니어 캘리퍼스와 상관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공업고등학교 수준의 전자 및 화공과는 상관 없을지 모르겠으나 대학교의 전자 및 화공과는 대학물리학 과목을 수강하게 되는데 이때 버니어 캘리퍼스를 실습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두 과가 전혀 상관없는 분야라고 하기보단 공업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버니어 캘리퍼스를 접할 일이 없는 분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56] 해당 가설 지지자들을 일명 '전지충'으로 지칭하며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폭언을 퍼부으면서 일말의 반론을 모조리 차단했다.[57] 또 용접용 망치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추론한 바와 달리 아예 두개골이 완전히 내려앉는 수준이라서 범행 도구라 보기에는 어려웠다는 결론이 나왔다.[58] 글쓴이가 네이트 판, 나아가 인터넷 익명 사이트의 특성을 몰라서 저런 비방적인 덧글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본인은 11년 전부터 유튜브를 포함한 여러 사이트에서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고 했다.[59] 4번째 글에 "혹시나 진짜 혹시나 유영철, 정남규 관련 형사분이나 프로파일러분들 이 글을 보신다면 제가 입 다물기를 간절히 기도하세요. 당신들이 대중들에게 얼마나 쓸데없는 공포심을 심어줬는지 얼마나 유영철이나 정남규를 대단한 놈으로 포장했는지 그래서 당신들이 엄청 대단한 일을 한것처럼 지금까지도 방송나와서 썰푸는 게 얼마나 개소린지 다 까발려 버릴테니까." 라는 댓글을 남겼다. 유영철과 정남규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고 집에 침입해서 살인을 저지를 정도였으며 공포심을 심어준건 경찰이나 언론이 아니라 범행 그 자체였다.[60] 본인이 개설한 갤러리에서 스스로를 꼬툭팡으로 언급한다.[61] 사실상 개인 메모장이나 다름없는 디시 갤러리 활동은 네이트 판에서 일단 유명세를 얻은 뒤 시작했다.
아래의 와룡산 남부 개발 전후 항공 사진 비교 움짤 (1992년 → 1996년) 을 보면 깎이기 전 기존 와룡산은 훨씬 넓었음을 알 수 있으며 1996년으로 넘어가면서 깎인 와룡산 지역에 몇몇 현 인근 학교들의 부지도 보인다.
[19] 이러면 함승훈 군이 들은 비명소리도 설명된다. 본드 흡입의 증상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20] 다만 사진만 나오고 써 보지는 않으며 교사가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21] 정밀 계측을 위해 사용하는 측정 도구이기 때문에 한국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사용할 일이 없고 공과대학이나 항공정비를 가르치는 직업전문학교에 진학해야 만져 본다. 해외에서는 물리 실험때 사용법 정도는 교육하기도 하지만 그닥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건 별로 다르지 않다.[22] 1999년 현 위치로 이전했다.[23] 여기서는 범인 중 한 명부터 글쓴이 본인이 제시한 발만 동둥구르며 형들이 그짓하는 동안 말리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던 똘마니들 중 한 명이라는 추측도 있다.[24] 글을 보면 알겠지만 자신의 추측에 자신감이 있음을 넘어 아예 극도의 오만함까지 나타나 있다.[25] 그냥 겁박시켜서 버니어로 때렸다고 할 수 있음에도 '헤드락을 걸고 버니어로 때렸다'고 한 것 외에도 ‘목을 발로 밟았다’, ‘발만 동둥구르며 형들이 그짓하는 동안 말리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던 똘마니들’ 등을 말했다. 무엇보다도 사건 묘사 부분에서 어느 순간부터 주체적인 실행자들을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에서 ‘형들’이라고 바꿔서 지칭했다.[26] ‘당시에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학교로 걸어갈 때 그 학교 학생들만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유머까지 있었어’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서론에서 ‘대구지역에는 도롱뇽이 많았는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한 바 있기에 동네 기담까지 아는 사람이 왜 이 사실은 모른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27] 네티즌들은 글쓴이의 말투와 글쓴이가 과거에 작성했던 보수 성향의 글들을 토대로 사건이 발생한 대구 출신의 4~50대 남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으며(범인이 당시 고등학생이라고 가정했을 시 현재 나이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이다) 20년도 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이 사건에 가담 혹은 목격한 것 때문에 충격을 받아 정신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또 글쓴이가 이 글을 올린 날이 사건 발생일과 같은 지방선거 날이라는 점도 매번 지선일마다 글쓴이가 죄책감에 시달리기에 이러한 힌트를 주는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28] 또 하나 놀라운 점은 상기된 글을 보면 글 자체는 꽤나 길이가 있는 장문임에도 불구하고 막히는 곳 없이 가독성 좋게 작성했다는 점이다. 해당 글의 원문에도 글이 술술 읽힌다는 네티즌들의 평가가 달려 있다. 가독성이 좋은 장문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며 타고난 재능이나 그에 필적할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다. 작성자에 대해 추측해 보자면 학력은 낮을 수 있지만 지적 능력이 어느 정도 살아 있으며 평소에도 일이나 취미로나 글을 많이 읽고 써 본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29] 현재도 외국 공항에서는 기내 반입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30] 사회적으로도 재벌 2세-3세들이 외국 유학 중 마약 복용 등으로 문제가 된 사례는 종종 있어 왔다.[31] 21세기에도 소위 말하는 일진들은 자기과시를 위해 무리해서 구찌, 톰 브라운 등의 준명품 혹은 명품을 구매하는 경우도 많은 만큼 만약 그 시절 공고에서 버니어 캘리퍼스의 가격대로 급 나누기를 했거나 가오를 잡았다면 버니어 캘리퍼스의 가격에 대한 논란은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32] 당시의 타자기 가격은 대략 지금의 노트북 컴퓨터 가격과 비숫하다고 생각하면 된다.[33] 사제 총기가 아닌 정식으로 판매하는 총기[34] 이 세상에 가난한 사람만 범죄를 저지르고 마약을 복용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과 같은 논리다. 그리고 부잣집 자녀라고 해서 학력이 좋고 가난한 집 자녀라고 해서 학력이 나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또 다른 고정관념이다.[35] 그리고 3명 이상이 불량배 무리를 형성할 시에는 그 중 리더 역할을 맡는 인물이 생기고 자연스레 허드렛일을 도맡는 꼬붕 역할의 인물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이때 이 꼬붕 인물이 무거운 짐의 운반을 담당하는 상황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아니면 무리내 인물들끼리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무거운 짐의 운반을 맡는 상황도 상정 가능하다. 단, 버니어 캘리퍼스를 들고 걸어서 운반하는 거리는 산 입구부터 사건현장까지만 등으로 정해서 운반자의 부담을 크게 하지는 않는 한도에서.[36] 해당 아이들의 거주지는 성서초등학교보다 더 와룡산에 가까운 위치였다. 당시 논밭뿐이었던 성서 일대에 주택가가 조성된 곳은 한정적이었다. 지도를 통해 성서지구를 내려다보면 논밭이 있었던 곳은 지금 다 아파트촌이 되었고 마을이 위치했던 곳은 아파트 단지가 아닌 주택가로 남았으며 가로세로 정비되지 않고 복잡히 꼬인 골목길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인근을 돌아다녀 보면 아직도 4~50년이 넘은 시골집들이 한두 채씩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와룡시장 인근, 쇼핑월드 인근, 대구성서경찰서 북측의 목련공원 인근이 해당되며 이들이 살던 동네가 바로 월요시장이 들어선 목련공원 일대였다고 한다.[37] 사진상에서 보이는 상리공원 위치가 당시에는 수천못이란 이름의 저수지였으며 그 옆으로는 와룡산에서 뻗어나온것으로 보이는 야산이 있었고 위엔 예비군 훈련 사격장 이 위치해 있었다. 허나 당시에도 구마고속도로로 인해 와룡산과는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다.[38] 참고로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현장은 성산고등학교 서편 기슭이다.[39] 당시 컴퓨터가 훨씬 더 고가였지만 부모님의 직업에 따라 몇몇 집에 있는 경우도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40] 단, 사건 현장 및 인근 동네는 대구에서도 외곽 지역이고 1991년 당시는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 사건이 발생한 동네는 종종 시골과 같은 분위기로 묘사되기도 한다.[41] 범인들의 (단순 아지트가 아닌) 실제 거주지가 사건지역 동네 근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즉, 범인의 집안 배경이나 재력에 대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다.[42] 일제강점기부터 6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는 남한 지역에서 대표적인 공업 도시였다. 물론 경제개발과 산업화 이후 울산, 창원 등 동남권과 수도권의 신흥 공업지역이 성장하면서 위상이 내려가긴 했지만 지금도 섬유, 경공업, 경금속 제품 등 내수 위주의 일상용품 상당수가 대구에서 생산된다.[43] 사실 대구처럼 산업화 이전부터 공업이 발달한 도시에서는 공업단지가 오히려 드물고 공장들이 주거지, 상가와 뒤섞여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서유럽이나 북미, 일본 등 선진국의 오래된 공업 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광경이며 공장이 주거, 상업지역과 분리된 일정 구역에 집중된 공업단지는 소련, 한국 같이 산업화에 뒤늦게 뛰어든 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한국의 공업단지는 바로 소련의 공업단지인 콤비나트 시스템을 모방한 것이다.[44] 21세기에는 대구시내 기준 성서 외 타 구역에도 공장-공단이 많이 생겨서 성서산업단지만의 희소성은 많이 사라진 상태다.[45]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물론 당시에도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지긴 했어도 2020년대에 비하면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는 상대적으로 덜했다. 지방에서도 한국 최대의 무역항을 끼고 있던 부산이나 공업 기반이 탄탄했던 대구 정도면 서울 촌놈들이 함부로 시골로 내려볼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46] 마치 여자의 비명소리 같지만 사실은 남학생들이다.[47] 추가로 글쓴이가 글을 삭제한 것을 보면 단순히 유명세나 지식 어필을 위한 것 같지는 않다면서 글을 쓴 의도를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글쓴이는 욕설 사유로 신고를 당해서 관리자가 삭제한 것이라고 밝혔다.[48] 외상의 너비만 존재하고 외상 깊이의 기복이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다.[49] 나사를 조여서 고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이 죽을 정도의 충격을 수십번 가했는데 과연 멀쩡할지는 의문. 일단 손에 잡고 있다면 형태 자체는 유지할 수 있겠지만 측정 도구로서는 확실히 못 쓰게 된다.[50] 더 치밀하게 생각해서 상흔에 남는 자국과 누군가가 가지고 있던 용접망치의 머리 모양이 비슷해서 의심받을 상황이었다면 살짝 갈아내는 정도로 판이하게 다른 모양이 되어 버린다. 보통은 원형 등의 모양을 내기 귀찮고 섬세할 필요가 없다 보니 대충 갈아서 각진 형태가 된다.[51] 당시 한국산 버니어 캘리퍼스는 현재의 중국산 수준으로 조악한 품질이었다. 지금이야 국산품도 쓸만한 게 많지만 저때는 1991년이다.[52] 소위 꽃배달차량으로 불리는 차량의 호로를 씌우는 작업에 사용하기 위해 직접 제작하기도 했는데 꽃배달트럭은 뼈대위에 오징어 합판을 덧대고 그 위에 방수천, 보온덮개, 방수 캔버스천을 씌우는 식으로 작업을 한다. 여기서 합판과 뼈대를 고정하기 위한 타이용 구멍을 내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다. 조금만 익숙해지면 동일한 강도로 정해진 위치에 구멍을 뚫을 수 있다. 꽃차호로 제작사에서 일하면서 사용했던 경험을 말해 보자면 망치보다 정확하고 두께 3T 합판 두장을 겹쳐도 한 번에 뚫을 수 있다.[53] 오토바이를 몰았을 가능성이 있다고는 해도 산으로 갈 때야 문제 없지만 올 때는 본드 흡입한 후일 텐데 오토바이를 몰고 돌아오는 건 무리다. 물론 음주운전하는 사람들이 널린 마당에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만. 인근에 있는 흉가나 폐가 등을 찾는게 더 수월할 수 있다. 당시는 서울에서도 흉가, 폐가가 있었고 불량배들의 아지트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 거리를 무리해서 갈 필요성이 떨어진다.[54] 버니어 캘리퍼스는 어미자와 아들자 외에도 고정 나사 등 이런저런 것들이 붙어 있는지라 그 크기에 비해 무거운 편이다.[55] 학교연혁에서 1990년대를 클릭하고 스크롤을 내리면 된다. 전자과, 화학공업과가 버니어 캘리퍼스와 상관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공업고등학교 수준의 전자 및 화공과는 상관 없을지 모르겠으나 대학교의 전자 및 화공과는 대학물리학 과목을 수강하게 되는데 이때 버니어 캘리퍼스를 실습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두 과가 전혀 상관없는 분야라고 하기보단 공업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버니어 캘리퍼스를 접할 일이 없는 분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56] 해당 가설 지지자들을 일명 '전지충'으로 지칭하며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폭언을 퍼부으면서 일말의 반론을 모조리 차단했다.[57] 또 용접용 망치는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추론한 바와 달리 아예 두개골이 완전히 내려앉는 수준이라서 범행 도구라 보기에는 어려웠다는 결론이 나왔다.[58] 글쓴이가 네이트 판, 나아가 인터넷 익명 사이트의 특성을 몰라서 저런 비방적인 덧글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본인은 11년 전부터 유튜브를 포함한 여러 사이트에서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고 했다.[59] 4번째 글에 "혹시나 진짜 혹시나 유영철, 정남규 관련 형사분이나 프로파일러분들 이 글을 보신다면 제가 입 다물기를 간절히 기도하세요. 당신들이 대중들에게 얼마나 쓸데없는 공포심을 심어줬는지 얼마나 유영철이나 정남규를 대단한 놈으로 포장했는지 그래서 당신들이 엄청 대단한 일을 한것처럼 지금까지도 방송나와서 썰푸는 게 얼마나 개소린지 다 까발려 버릴테니까." 라는 댓글을 남겼다. 유영철과 정남규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고 집에 침입해서 살인을 저지를 정도였으며 공포심을 심어준건 경찰이나 언론이 아니라 범행 그 자체였다.[60] 본인이 개설한 갤러리에서 스스로를 꼬툭팡으로 언급한다.[61] 사실상 개인 메모장이나 다름없는 디시 갤러리 활동은 네이트 판에서 일단 유명세를 얻은 뒤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