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대중음악/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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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 1995년 김건모 <잘못된 만남> |
1997년 쿨 <해변의 여인> | 1995년 룰라 <날개 잃은 천사> |
1998년 H.O.T. <빛> | 1998년 젝스키스 <커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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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대 대한민국 가요계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1990년대는 80년대까지의 트로트와 포크의 열풍이 끝났고,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초로 한 댄스 음악의 부흥이 일어난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노이즈, R.ef, 솔리드, 터보등 댄스 그룹들의 등장 이후 댄스 음악이 주류로 떠올랐고, 1990년대 후반 데뷔한 H.O.T., 젝스키스, 신화, god 등 1세대 아이돌들이 그 인기를 이어갔다. 또한 1997년 S.E.S.와 핑클, 베이비복스의 데뷔로 여성 댄스 그룹의 등장도 이어졌다. 이러한 댄스그룹들의 인기와 함께 김건모, 신승훈, 조성모, 임창정, 유승준, 이정현, 김현정, 엄정화 등 솔로 가수들과 쿨, 룰라, 자자, 투투 등 혼성 그룹들의 인기도 굉장했다. 이 시기부터 2000년대까지는 댄스 음악으로 대표되는 아이돌 가수들과 솔로 가수들, 혼성 그룹, 밴드 등 여러 가수들이 가요계를 양분했던 시대였다.
이외에도 K-POP에서 블랙 뮤직(특히 힙합, 뉴 잭 스윙, 레게) 이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뉴 잭 스윙은 (일본보다는) 미국 대중음악 영향을 받은 쪽으로 분류되는 K-POP 서브스타일 노래들 중 매우 잘 나갔던 장르였다.
반면 1980년대 인기를 끌었던 트로트와 포크는 90년대 중반부터 급속도로 인기가 사그라들면서, 한동안 주류 자리에서 밀려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태진아와 송대관의 히트로 명맥을 이어갔고, 2004년 장윤정의 <어머나>가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다시 가요계에서 생명력을 얻은 장르가 되었다.
2. 연도별 상황
2.1. 1990년
1990년은 1980년대 가요계의 연장선과 같았다. 이 해 대상을 차지하며 큰 인기를 얻었던 대표적인 가수는 현철과 변진섭. 현철은 <싫다 싫어> 로 KBS 가요대상을, 변진섭은 <희망사항>으로 MBC 최고인기가수상을 거머쥐었다. 특히 변진섭은 <희망사항>, <로라>, <너에게로 또 다시> 등 한 앨범에서 여러 곡을 히트시키면서 단숨에 인기가수로 떠올랐으며 작곡가였던 노영심 역시 작곡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솔로 가수의 경우 변진섭을 포함해 <사랑일뿐야>의 김민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의 신해철, <마지막 콘서트>의 이승철[1], <텅 빈 마음>의 이승환, <잊지 말아요>의 최성수 등이 인기를 얻었고 여자 가수의 경우 <인디언 인형처럼>의 나미, <보고싶은 얼굴>의 민해경, <나만의 것>의 김완선의 3파전에 <보라빛 향기>의 강수지가 새롭게 부상하였다. 트로트 부문에서는 <싫다 싫어>의 현철, <잠깐만>의 주현미 양대산맥에 89년 <옥경이>로 자리를 잡은 태진아가 <거울도 안보는 여자>로 다시 한번 히트를 기록했고, 미국에서 돌아온 송대관이 <정 때문에>로 재기에 성공했다. 또한 영화 <비 오는 날 수채화>의 동명 OST가 큰 히트를 하면서 영화 음악치고는 높은 대중성을 얻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월 4일에 가수 장덕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같은 해 11월 1일에는 김현식이 간경화 악화로 요절하면서 추모 열기가 강하게 불기도 했다.
2.2. 1991년
1991년은 그 유명한 신승훈이 데뷔한 해이다. 신승훈은 데뷔 앨범인 1집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단숨에 밀리언셀러를 차지하면서 90년대를 대표하는 톱가수의 시작을 널리 알렸다. 또한 작곡가로만 활동하던 윤상이 <이별의 그늘>을 통해 가수로 데뷔하며 메이저 무대에 등장했다. 전체적으로 지난 해에 활동했던 변진섭, 신해철 등이 인기를 얻었고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역시 인기를 끌었다. 심신의 <오직 하나뿐인 그대>, 태진아의 <미안 미안해> 등도 가요톱10에서 여러번 1위를 차지했다.사실 이 해의 가요계의 가수왕은 바로 김현식. 김현식의 사후 발매된 6집 <내 사랑 내 곁에>가 추모 열기에 맞물려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1991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2] 또한 김정수의 <당신> 역시 내 사랑 내 곁에만큼 인기를 끌었고 그 해 KBS 가요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여가수로는 노사연의 <만남>이 대 히트를 치면서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수상을 수상했다. 여가수로는 혜은이 이후 14년만에 차지한 대상이었다. 노사연 외에도 김완선, 강수지, 양수경, 조갑경 등이 인기를 끌었고, 특히 <나만의 것>,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무도회>가 수록된 김완선 5집은 솔로 여자 가수 앨범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2.3. 1992년
1992년은 그냥 서태지와 아이들 하나로 모든 걸 요약할 수 있다. 한국어로 랩이 되지 않는다는 당시 가요계의 편견을 완전히 깨부수며 파란많은 데뷔를 했으며, 타이틀 곡 <난 알아요>가 가요 프로그램에서 12주 연속 1위를 했고 각종 시상식에서 신인상과 본상, MBC와 서울가요대상에서는 대상까지 휩쓸면서 가요계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대한민국 댄스 음악의 역사를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초로 잡고 그 이전은 잘 언급하지 않은 현재를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대한민국 댄스 음악과 그 부흥의 시초로 평가된다.또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인기만큼이나 가요 시상식을 휩쓸었던 이는 바로 신승훈이다. 2집 <보이지 않는 사랑>의 메가히트로, KBS 가요대상과 골든디스크 대상을 모두 싹쓸이하며 인기몰이를 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처음 가요계에 나온 김건모 역시 1집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가 대히트하면서, 본격적인 신승훈과 김건모의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 현진영이 힙합 댄스곡 <흐린 기억 속의 그대>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재미교포 출신인 이현우가 하우스 댄스 음악 <꿈>으로, 혼성그룹 철이와 미애가 강렬한 디스코 댄스 음악 <너는 왜>로 등장, 히트를 기록했다.
또한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무한궤도의 음악적 후계 그룹인 넥스트와 015B가 큰 인기를 끌었고, 특히 015B는 당시 가요계에서 생소했던 객원보컬 시스템을 도입하여 특색을 줬다. 넥스트 이전까지 곱상한 아이돌 이미지였던 신해철이 본격적인 뮤지션으로서의 이미지를 얻으며 소위 '마왕' 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이 바로 넥스트 시절. 또한 김종서, 신성우, 임재범 등 록밴드 출신들이 솔로로 홀로서기를 하며 인기를 얻던 시기였다.
여자 가수 중에서는 김완선이 잠시 한국 가요계를 떠나 중화권에서의 활동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강수지와 같은 청순형 가수로 하수빈이 데뷔하였다.
2.4. 1993년
듀스가 데뷔곡 <나를 돌아봐>를 들고 나왔고 댄스음악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또한 지난 해 데뷔했던 서태지와 아이들과 김건모가 본격적으로 가요계를 양분하기 시작하며 댄스음악의 전성기를 열었다. 특히 이 시기부터 1995년까지는 그냥 김건모와 서태지와 아이들, 신승훈이 가요계를 꽉 잡고 있었다고 과언이 아니며, 이 두 그룹이 모든 가요시상식의 대상을 나눠먹으며 인기를 끌었다.먼저 시작을 연 1번 타자는 서태지와 아이들. 2집 <하여가>로 지난 해의 인기를 그대로 이어나가며 SBS 가요대전과 서울가요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신승훈이 <널 사랑하니까>로 골든디스크 대상을 휩쓸었다. 한동준, 김민종, 김원준 등이 인기를 끌었고 엄정화가 <눈동자>로 첫 솔로 데뷔를 했던 시절이었다.
넥스트, 015B, 김광석 역시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며 인기였고 80년대 후반 인기밴드였던 부활이 새 보컬 김재기를 영입하고, 3집 <사랑할수록>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이름 그대로 '부활'하는데 성공했다.[3]
반면 90년대 들어 조금씩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트로트는 이 해가 마지막 불꽃이었다. 김수희의 <애모>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를 꺾고 골든컵을 차지했고 그 해 KBS 가요대상도 차지하며 트로트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이후 2004년 장윤정이 <어머나>로 1위를 차지하기 전까지 11년동안 트로트는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지 못했고, 대상 역시 2000년 태진아가 수상하기 전까지 7년동안 무관이었으며 이는 가요계의 세대 교체를 상징하는 모습 중 하나다.
2.5. 1994년
1994년 그야말로 김건모의 한 해였다. 직전 해 10월 발매한 <핑계>가 메가히트를 기록하며, 가요 프로 18주 연속 1위라는 대기록과 함께 그 해 지상파 3사의 가요대상과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까지 모두 싹쓸이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지상파 3사 트리플크라운은 이 후에도 H.O.T., god, 김종국 등 여러 가수들이 해냈지만 이 기록만큼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또한 1994년 가요계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바로 혼성그룹들의 대거 등장으로 룰라, 쿨, 마로니에, 투투 등이 데뷔했다. 1994년 최고의 혼성그룹은 마로니에와 투투로, 각각 <칵테일 사랑>과 <일과 이분의 일>로 대히트를 기록했다.
김건모 이외에도 김현철의 <달의 몰락>, 조관우의 <늪>,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김민교의 <마지막 승부> 등 여러 솔로 남자 가수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또한 <핑계>의 메가히트로 가요계의 전반적으로 레게 열풍이 불었는데, 바비킴이 처음 데뷔했던 닥터 레게의 1집이 큰 인기를 얻었다.
트로트 음악은 본격적인 사양길을 타기 시작했으나,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어느 정도 히트를 기록하면서 명맥을 이어갔다.
2.6. 1995년
김건모가 3집 <잘못된 만남>으로 280만장이라는 엄청난 음반판매량을 기록, 한국 기네스까지 받았다. 골든디스크 대상도 당연히 수상.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연말 4집 <Come Back Home>으로 인기몰이를 하며 그 해 MBC 가요제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또한 지난 해 데뷔한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가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SBS 가요대전과 서울가요대상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4]또한 솔로 여가수로는 이소라가 데뷔 앨범 <난 행복해>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데뷔했으며, 박미경 역시 <이브의 경고>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남자 가수로는 박진영, 서지원이 데뷔했으며 3인조 힙합댄스 그룹 DJ DOC 역시 <머피의 법칙>으로 큰 히트를 기록하며 가요계에 등장했다. 또한 R&B 열풍을 이끈 솔리드와 포크록 밴드 녹색지대 역시 각각 <이 밤의 끝을 잡고>와 <사랑을 할꺼야>로 인기를 끌었다.
한편 듀스는 95년 7월 고별콘서트를 끝으로 해체하고 두 멤버는 미국으로 떠났다. 이 중 멤버 김성재가 솔로 1집 <말하자면>을 발표하고 한국으로 귀국해 11월 19일 컴백무대를 가졌으나, 다음 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이 터지기도 했다.[5]
2.7. 1996년
자세한 내용은 1996년 가요계 문서 참고하십시오.연초부터 가요계 스타들의 죽음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새해 첫날 서지원이 향년 19세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5일 뒤에는 '가객' 김광석 역시 서지원의 뒤를 따르면서 서 가요계는 충격에 빠졌다. 또한 몇주 뒤에는 잠적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연초부터 가요계는 빅 뉴스들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뒤로 하고, 1996년 상반기는 여러 인기 가수들이 한꺼번에 컴백하면서 소위 '별들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1996년 별들의 전쟁 문서 참조.
또한 연말에는 1세대 아이돌의 시초인 H.O.T.가 데뷔하면서, 1세대 아이돌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이들의 1집 후속곡 <캔디>가 인기를 끌면서, 대한민국 가요계 역시 해외의 뉴 키즈 온 더 블록 같은 댄스 아이돌 그룹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2.8. 1997년
자세한 내용은 1997년 가요계 문서 참고하십시오.90년대 후반기로 접어든 97년부터는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단연 H.O.T.가 있었다. 또한 1997년 4월 DSP미디어가 제작한 젝스키스가 데뷔하면서 단숨에 H.O.T.의 라이벌로 떠올랐다. H.O.T.는 2집 <늑대와 양>으로 MBC 가요제전 대상과 SBS 가요대전, 골든디스크 대상, 서울가요대상 대상을 싹쓸이하며 가요계 정상의 위치에 올랐다.
한편 SM엔터테인먼트에서는 97년 11월, 3인조 걸그룹 S.E.S.를 런칭하고 히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 가요계에서 댄스 음악을 하는 걸그룹의 시초로 자리잡았다. S.E.S. 보다 5개월 전이었던 1997년 DR뮤직에서 베이비복스를 런칭했으나 이 때는 크게 반응이 없었다.
또한 솔로 남자 가수로는 임창정의 인기와 유승준의 등장이 화제였다. 임창정은 솔로 3집 <그때 또 다시>가 기록한 공전의 히트로, 1997 KBS 가요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H.O.T.가 모든 시상식을 싹쓸이하던 중 받은 유일한 대상이었던지라, 임창정 본인의 회고로는 본인이 앵콜곡을 하는 동안 H.O.T. 팬들이 다 퇴장해버려 조용한 앵콜무대를 가졌다고 종종 예능에서 이야기하곤 한다. 또한 유승준이 데뷔곡 <가위>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춤과 노래가 모두 가능한 올라운드형 솔로 가수로 인기를 얻게 된다.
김경호가 2집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로 히트를 기록하면서 록 음악의 부흥을 이어가기도 했다. 부활 역시 4집에서의 침체를 딛고 보컬 박완규를 영입, 5집 <Lonely Night>으로 중박 정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김종서와 임재범이 각각 <아름다운 구속>과 <비상>, <그대는 어디에>로 인기를 끌었다. 한편 신해철이 이끌던 넥스트는 4집 앨범을 마지막으로 해체를 발표했으며 신해철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버린다.
솔로 여가수로는 단연 양파가 원탑이었다. 데뷔곡 <애송이의 사랑>으로 단숨에 가요계 정상에 올랐으며, 이 외에도 이소라와 리아 등이 인기였다. 박지윤과 진주도 이 해에 데뷔했다.
룰라가 96년 표절파문으로 주춤한 틈을 타 혼성그룹 원탑의 자리를 차지한 이는 바로 쿨. 쿨이 발표한 <해변의 여인>은 지금도 여름을 대표하는 노래로 회자되고 있으며, 이 후 쿨은 5~6년 이상 쭉 전성기를 이어갔다. 또한 영턱스클럽, R.ef, DJ DOC, 언타이틀 등이 댄스음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마이키를 영입한 터보 역시 3집 <회상 (December)>과 <Goodbye Yesterday>가 무려 H.O.T.를 누르고 가요톱10 정상에 올랐고,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 양현석이 제작한 힙합그룹 지누션이 엄정화와 함께 부른 <말해줘>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1995년 데뷔한 삐삐밴드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다양한 혼성밴드가 데뷔하기 시작한다. 특히 96년 데뷔한 주주클럽은 <열여섯 스물>, <나는 나>로 1위 후보까지 올랐고, 자우림 역시 데뷔곡 <Hey Hey Hey>가 좋은 반응을 얻으며 가요프로 최고 3위까지 올랐다. 연말에 데뷔한 더더 역시 <Delight>, <내게 다시>가 스테디셀러급 인기를 거뒀다.
또한 록밴드로 드물게 큰 인기를 얻었던 넥스트가 해체하게 된다.
2.9. 1998년
가요계의 지각 변동이 일어난 시기로, IMF 여파로 인해 지상파 3사의 음악 프로그램들이 제목을 바꾸어서 개편했으며 MBC는 1998년 이후 2000년 5월 20일까지 순위제를 중단했다.1세대 아이돌의 전성기였던 1998년에는 보이그룹은 H.O.T.와 젝스키스의 양강구도가 완전히 정착되었고 걸그룹의 경우 S.E.S.와 98년 4월 데뷔한 핑클의 양강구도가 형성됐다. 베이비복스 역시 2집 타이틀 곡 <야야야>로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또한 국내 최장수 아이돌 그룹으로 알려진 신화가 데뷔한 해도 바로 1998년이다. H.O.T.의 다음 타자로 런칭했고, 타이틀 곡 <해결사>의 반응이 심심했으나 후속곡 <으쌰!으쌰!>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팬층을 확보하게 된다.
H.O.T.와 젝스키스의 양강 구도가 이어졌으며, 가요 시상식에서의 승자는 H.O.T.였다. 3집 <빛>, <열맞춰!>로 SBS 가요대전 대상과 KBS 가요대상 대상, MBC 가요제전 대상을 수상하며 시상식을 싹쓸이했으며 서울가요대상에서는 젝스키스의 <커플>과 공동수상했다. 또한 YG에서는 힙합 컨셉의 보이그룹 원타임을 데뷔시켰고, 소방차 김태형이 제작한 그룹 NRG 역시 인기를 끌었다.
남은 골든디스크 대상의 주인공은 누구냐 하면, 바로 김종환. 직전 해 발표했던 <사랑을 위하여>가 중장년층 사이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면서 높은 음반판매량을 기록, 골든디스크 대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H.O.T.와 젝스키스의 팬들은 자기 가수가 대상을 탈 것이라 기대하며 시상식장과 집에서 가슴 조려하며 지켜보고 있었으나, 김종환의 이름이 호명되자 단체로 벙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6]
남자 솔로 가수로는 조성모가 <To Heaven>의 드라마형 뮤직비디오를 내세우며 데뷔했고 유승준, 김정민, 김경호, 김장훈 등이 인기였다. 특히 김장훈은 4집 <나와 같다면>[7]으로 7년만에 무명생활을 탈출하고 메이저로 올라왔다. 여자 솔로 가수 탑은 단연 김현정이었는데, 김현정이 직전 해 발매한 1집 <그녀와의 이별>이 상상치 못한 역주행을 기록하면서, 재발매까지 되며 대히트했다. 또한 소찬휘와 리아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2.10. 1999년
직전 해인 98년과 크게 변한 것은 없다. 보이그룹은 여전히 H.O.T.와 젝스키스의 양강구도에 걸그룹은 S.E.S.와 핑클의 양강구도였다. 특히 핑클은 2집 <영원한 사랑>으로 SBS 가요대전 대상과 서울가요대전 대상을 수상하면서, 걸그룹 최초 지상파 가요시상식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베이비복스의 경우 99년 새 멤버로 윤은혜를 영입하고 컨셉을 파워 여전사로 바꿔 컴백했고, 3집 타이틀 곡 <Killer>로 인기를 끌면서 이들의 자리를 위협했다.또한 국민그룹으로 불리는 god가 1월 초 데뷔했다. 1집 타이틀 곡 <어머님께>로 인기를 끌었지만, 이 당시만 해도 H.O.T.와 젝스키스에게 밀리는 신세였다. god 멤버들 말로는, 이 해에 유일하게 god만 신인상을 타지 못해 해체 위기였다고 한다. 신화는 2집 타이틀 곡 <T.O.P>로 가요 프로그램 첫 1위를 차지하면서 인기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남자 솔로 가수로는 단연 조성모가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인기를 이어갔다. 2집 <슬픈 영혼식>의 초대박으로 서울가요대상 대상과 MBC 10대 가수 가요제 대상, KBS 가요대상 대상, 골든디스크 대상까지 싹쓸이했다. 또한 이 해부터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의 전신인 Mnet Musicvideo Festival이 신설되었는데, 1회 대상의 주인공은 H.O.T.이다.
솔로 여가수는 김현정과 함께 백지영의 파격적인 등장으로 이어졌으며 연말에는 이정현이 테크노 컨셉으로 제작한 1집 <와>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혼성 그룹으로는 쿨이 최정상의 자리를 지켰고 1997년에 잠정 해체했던 룰라가 2년 만에 컴백했다. 또한 코요태가 이 해 처음 데뷔해, 1집 타이틀 곡 <순정>과 후속곡 <만남>으로 큰 인기를 끌며 인기그룹 대열에 합류한다.
힙합씬에서 올라온 이 해의 뜨거운 감자는 바로 조PD로,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음반을 공개하며 얼굴도 까지 않은 체 화끈한 욕설 가사와 도발적인 비트로 순식간에 마니아 팬층을 형성하게 된다.[8]
3. 기타
1990년대 가요계는 아직 음원시장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음반시장이 주류였으며 가수들의 인기 척도 역시 음반판매량을 기준으로 평가됐다. 90년대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대표적인 가수는 김현식, 변진섭,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 신승훈, 쿨, 룰라, 조관우, 터보, H.O.T., 조성모, 김종환 등이 있다.[9] 음반을 듣는 매체는 CD와 카세트테이프였으며, 이 시기에는 MP3 플레이어보다는 워크맨으로 음악을 들었다.[1] 1990년 말에 대마초 사건이 터지면서 해당 년도 시상식에서는 제외.[2] 당시 김현식의 외동 아들인 김완제 씨가 김현식의 모친과 함께 대리수상하였다.[3] 다만 앨범 녹음 진행 중 김재기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남은 녹음과 방송 활동은 그의 친동생인 김재희가 대신했다.[4] 혼성그룹 대상은 1995년 룰라의 수상과 2002년 쿨이 7집 <진실>로 수상한 2차례 밖에 없다.[5] 이현도가 라디오 스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듀스의 해체는 작전상 해체이며, 프로듀서가 더 맞았던 자신이 김성재를 솔로로 내세우고 자신은 프로듀서로서 김성재의 앨범 작업을 하는 형태로 활동하려고 했었다. 하나 김성재가 컴백 무대 다음 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이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결국 이듬해 이현도가 직접 자신의 솔로 1집 타이틀곡인 <사자후>로 활동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6] 응답하라 1997에도 이 장면이 나온 적이 있다.[7] 박상태의 원곡을 리메이크.[8] 조PD가 계약한 회사에서 2년 뒤 싸이도 데뷔했다.[9] 볼드체로 작성된 가수 7팀은 4개 이상의 음반이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