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15px -10px -21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43%" | <tablebordercolor=#fff><tablewidth=100%><tablebgcolor=#fff>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57%"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231f20><tablebgcolor=#231f20>대한민국학술원 회원 |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현재 회원 | |||||||||||||||
| 인문사회과학부 | 자연과학부 | |||||||||||||||
| [분과별 학문 분야] 1분과: 철학, 윤리학, 논리학, 미학, 종교학, 교육학, 심리학 2분과: 어문학 3분과: 사학, 고고학, 민속학, 지리학, 문화인류학 4분과: 법학 5분과: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6분과: 경제학, 경영학 | [분과별 학문 분야] 1분과: 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대기과학 2분과: 생물학, 지질과학, 스포츠과학, 영양학, 가정학 3분과: 건축공학, 금속공학, 기계공학, 섬유공학, 자원공학, 전기공학, 전자공학, 정보공학, 조선공학, 토목공학, 항공공학 4분과: 의학, 치의학, 약학, 수의학 5분과: 농학, 임학, 축산학, 수산학 | |||||||||||||||
| 1분과 | 2분과 | 3분과 | 4분과 | 5분과 | 6분과 | 1분과 | 2분과 | 3분과 | 4분과 | 5분과 | ||||||
| 정진홍 | 조동일 | 차하순 | 고상룡 | 임희섭 | 이현재 | 이상만 | 박중현 | 이상섭 | 홍성각 | |||||||
| 차재호 | 홍재성 | 이기석 | 강신택 | 곽수일 | 노재식 | 김상용 | 이병일 | |||||||||
| 이돈희 | 김학주 | 이기동 | 정동윤 | 안병준 | 정기준 | 박세희 | 이정우 | 노오현 | 김낙두 | 김현욱 | ||||||
| 소광희 | 이정민 | 김영한 | 박병호 | 김경동 | 김기영 | 권숙일 | 맹원재 | 윤덕용 | 김병수 | 황병국 | ||||||
| 윤사순 | 김수용 | 이성규 | 김상용 | 유장희 | 기우항 | 임번장 | 현병구 | 이순형 | 류순호 | |||||||
| 이한구 | 조주관 | 이태진 | 김효전 | 진덕규 | 이학용 | 김용해 | 장호완 | 나정웅 | 김영중 | 장동석 | ||||||
| 박종현 | 장경렬 | 한상복 | 임종률 | 백완기 | 이지순 | 김상구 | 고재승 | 이홍석 | ||||||||
| 정찬섭 | 남기심 | 최병현 | 권오승 | 이정복회장 | 조장옥 | 조성호 | 정진하 | 최향순 | 신희섭 | 김윤수 | ||||||
| 진동섭 | 김인환 | 임돈희 | 최병조 | 김홍우 | 한인구 | 이호인 | 조완규 | 이장무 | 이영순 | 박승우 | ||||||
| 박용운 | 신동운 | 신용하 | 전병헌 | 김도한 | 이기화 | 이병기 | 이승규 | 최양도 | ||||||||
| 김호동 | 김문현 | 임현진 | 박성현 | 안진흥 | 황규영 | 이종호 | 홍성윤 | |||||||||
| 김영식 | 신명순 | 김진의 | 임정빈 | 유정열 | 박성회 | 김수일 | ||||||||||
| 고동환 | 최진호 | 박종욱 | 손장열 | 이명식 | 고희종 | |||||||||||
| 이형목 | 우경식 | 고규영 | 김용균 | |||||||||||||
| 송진원 | 한재용 | |||||||||||||||
| 작고 회원 | ||||||||||||||||
| 인문사회 분과 | 자연 분과 | |||||||||||||||
| 1분과 | 2분과 | 3분과 | 4분과 | 5분과 | 6분과 | 1분과 | 2분과 | 3분과 | 4분과 | 5분과 | ||||||
| 고형곤 | 권중휘 | 이병도 | 최태영 | 신기석 | 고승제 | 안동혁 | 손치무 | 이균상 | 한구동 | 정문기 | ||||||
| 안호상 | 이숭녕 | 김상기 | 유진오 | 이상백 | 최호진 | 김동일 | 강영선 | 원태상 | 윤일선 | 조백현 | ||||||
| 박종홍 | 이희승 | 신석호 | 고병국 | 신도성 | 신태환 | 이태규 | 정태현 | 최경열 | 이제구 | 현신규 | ||||||
| 김두헌 | 최현배 | 이선근 | 이근칠 | 민병태 | 유진순 | 전풍진 | 박동길 | 이종일 | 이종륜 | 우장춘 | ||||||
| 김기석 | 양주동 | 조의설 | 윤세창 | 김성희 | 조기준 | 최규남 | 김호직 | 이채호 | 박영진 | 김호식 | ||||||
| 김활란 | 이양하 | 김재원 | 이종극 | 고황경 | 김순식 | 권영대 | 이민재 | 최방진 | 이재춘 | 송재철 | ||||||
| 김계숙 | 이병기 | 류홍렬 | 김병노 | 김상협 | 김효록 | 최윤식 | 조복성 | 윤일중 | 이진기 | 이근태 | ||||||
| 이종우 | 김윤경 | 이홍직 | 이항녕 | 최문환 | 육지수 | 박철재 | 이병위 | 민한식 | 박호풍 | 박승만 | ||||||
| 이상은 | 손우성 | 홍이섭 | 박원선 | 정인흥 | 김준보 | 박하욱 | 김옥준 | 김기덕 | 김두종 | 심종섭 | ||||||
| 이인기 | 정인승 | 고병익 | 정광현 | 이만갑 | 이상구 | 조광화 | 최례석 | 최호영 | 이세규 | 지영인 | ||||||
| 김동화 | 조윤제 | 한우근 | 유기천 | 윤천주 | 권오익 | 이원철 | 김준민 | 김재근 | 김명선 | 이춘녕 | ||||||
| 김준섭 | 김형규 | 전해종 | 이한기 | 박동서 | 정수영 | 장기원 | 김창환 | 김종석 | 기용숙 | 박병희 | ||||||
| 오천석 | 차상원 | 이기백 | 이희봉 | 이용희 | 임원택 | 성좌경 | 김삼순 | 최형섭 | 한심석 | 윤상원 | ||||||
| 류승국 | 차주환 | 이광린 | 문홍주 | 김대환 | 박기혁 | 박정기 | 홍순우 | 김문상 | 우린근 | 이창구 | ||||||
| 이희철 | 여석기 | 김원용 | 서돈각 | 김운태 | 김옥근 | 박봉열 | 김봉균 | 신영기 | 나세진 | 김성원 | ||||||
| 서명원 | 조성식 | 김철준 | 손주찬 | 홍승직 | 오상락 | 최상업 | 윤석규 | 이량 | 이우주 | 이은웅 | ||||||
| 임한영 | 김동욱 | 이두현 | 남흥우 | 차기벽 | 정병휴 | 조순탁 | 주진순 | 장석윤 | 이문호 | 정후섭 | ||||||
| 최재희 | 정병욱 | 민석홍 | 황산덕 | 구영록 | 김동기 | 김치영 | 이대성 | 윤동석 | 김용관 | 강제원 | ||||||
| 김규영 | 강두식 | 이찬 | 김증한 | 김용구 | 박광순 | 이상수 | 정영호 | 한만춘 | 서병설 | 백운하 | ||||||
| 유형진 | 이기문 | 윤무병 | 김치선 | 조순 | 김정수 | 김훈수 | 강명순 | 이영소 | 김문협 | |||||||
| 백낙준 | 이능우 | 이우성 | 박일경 | 변형윤 | 최규원 | 이영록 | 윤장섭 | 권이혁 | 고재군 | |||||||
| 조요한 | 동완 | 황수영 | 김기두 | 윤기중 | 심정섭 | 김오중 | 오현위 | 이장락 | 최병희 | |||||||
| 김성태 | 장덕순 | 양병우 | 정영석 | 박을룡 | 김준호 | 최계근 | 김기홍 | 박영호 | ||||||||
| 김태길 | 이가원 | 민영규 | 김현태 | 윤세원 | 하두봉 | 이승원 | 박수선 | 전세규 | ||||||||
| 윤명로 | 김현창 | 김용섭 | 김정균 | 김태린 | 박희인 | 김재극 | 장신요 | 조재영 | ||||||||
| 김종철 | 김용직 | 이성무 | 김홍규 | 박태원 | 정창희 | 우형주 | 이기영 | 오봉국 | ||||||||
| 정양은 | 정명환 | 황적인 | 윤갑병 | 박상대 | 이택식 | 김주환 | ||||||||||
| 박영식 | 이경식 | 심헌섭 | 윤능민 | 김수진 | 황종흘 | 김용일 | ||||||||||
| 김충렬 | 김완진 | 김철수 | 이익춘 | 이만영 | 김정룡 | |||||||||||
| 조명한 | 장석진 | 김종원 | 송희성 | 조선휘 | 이호왕 | |||||||||||
| 오병남 | 이형국 | 고윤석 | 이리형 | 문국진 | ||||||||||||
| 정범모 | 김용한 | 장세헌 | 이충웅 | |||||||||||||
| 조대경 | 김남진 | 안세희 | 김상주 | |||||||||||||
| 길희성 | 이은 | 한송엽 | ||||||||||||||
| 이성진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명예회원 | ||||||||||||||
| 시오노 히로시 | 빈센트 푸어 | 노요리 료지 | 피터 그루스 | 위르겐 코카 | ||||||||||||
| 크리스티안 슈타르크 | 로거 비치 | 앨런 히거 | 난 린 | 허준이 | }}}}}}}}} | |||||||||||
| <colbgcolor=#231f20><colcolor=#fff> 동완 董玩 | |
| | |
| 출생 | 1922년 5월 9일 |
| 함경북도 명천군 하오면 명천동 | |
| 사망 | 1997년 8월 17일 (향년 75세) |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 |
| 본관 | 광천 동씨 |
| 학력 | 나남공립중학교 (졸업) 만주국 건국대학 (정치학 / 학사) |
| 경력 | 공군사관학교 교수 한국외국어대학 노어과 주임교수 한국외국어대학 소련 및 동구문제연구소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고려대학교 러시아문화연구소장 |
1. 개요
대한민국의 러시아 문학을 개척한 학자이다. 한국의 모든 노어노문학과 교수들의 비조이기도 하다.2. 생애
2.1. 유소년기
1922년 5월 9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오면 명천동에서 동창현(董昌鉉)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릴 적 부친과 함께 만주에서 생활했고# 하얼빈(하르빈)에서 거주하며 러시아인들과 교류하며# 성장하였다.보통학교를 마치고 1935년 4월 나남공립중학교에 입학해 4학년 2학기 재학 중이었던 1938년 12월 만주건국대학 전기과정 입시에 최종합격, 1939년 3월 나남중학교를 조기졸업(4학년 수료)하였다.
2.2. 만주건국대학
1939년 4월 11일 건국대학 전기과정에 제2기(146명)로 입학한 동완은 건국대학 재학 중 제2외국어로 러시아어를 택하여 깊이 공부했고,[1] 1기 선배인 안광호가 주장을 맡고 있던 角力部에서 활동했다. 전기과정(예과)을 마친 동완은 후기과정(학부)으로 진학하면서 정치학과를 택했다. 동완의 연구 논저 목록을 보면 어문학 계통보다는 정치경제 관련 논문이 많은데, 통상 노어노문학과 학석박 루트를 밟아온 노어노문학과 교수들과 달리 만주건국대학 학부시절 정치학을 전공했던 동완의 학문적 배경이 드러나는 부분이다.건국대학 1~2기는 전시 수학연한 단축으로 설립 당시 계획보다 약 9개월 빨리 졸업하게 되어, 1938년 5월 입학한 1기생의 졸업식은 1943년 6월에 있었다. 그리고 동완이 속한 2기생의 졸업식은 1944년 6월에 거행되었으나, 일본인 학생들은 징병유예가 폐지되어[2] 입영 전에 학교에서 임시졸업증서를 받고 조기졸업을 시킨 후에 내지인은 1943년 12월, 조선인과 대만인은 1944년 1월 각 입대하였기 때문에 정작 1944년 6월 19일 거행된 졸업식에는 만계[3] 학생들 밖에 없었다고 한다. 동완 역시 학도출진으로 1943년 12월 조기졸업하였다.
2.3. 일본 제국 육군
1944년 1월 20일, 만주국 안둥시에 위치한 관동군 독립수비대 예하 독립보병제4대대로 입영했다. 독립보병제4대대는 러허성으로 이동하여 팔로군과 전투하였으며, 이후 다시 만주국 지린성 푸진(富錦, 現 헤이룽장성 자무쓰시 소재 푸진시)에 건설된 부금요새에 배치되어 방어임무를 맡았다. 동완은 그 기간에 초병훈련을 받고 간부후보생(갑종) 시험에 합격하여 3개월 간의 간부후보생 집합교육을 마쳤다.1945년 1월 랴오양시 소재 관동군 간부후보생교육대[4] 입소, 6개월간의 간부후보생 교육을 수료하고 1945년 7월 견습사관으로 임관, 관동군 제4군 제123사단에 배속되어 예하 제204연대 연대포중대에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9일 개시된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소련 공군의 폭격을 받다 종전 후에 소식을 듣고 헤이허시 쑨우현에 위치해있던 제123사단 사령부 주둔지로 합류했다.
사단 본부에서 2주 가량 대기하던 중 8월말 현황 확인차 시찰나온 소련군 장교로부터 '제네바협약에 따라 대우할 것이며, 순차송환될 것이다'고 얘기를 듣고, 조선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9월 1일 기차에 탑승했으나 철도 갈림길에서 기차가 향한 곳은 조선으로 향하는 남쪽이 아니라 시베리아 방면의 북쪽이었다. 일본군 장병의 일상 및 귀국을 보장한 포츠담선언 제9조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홋카이도 북반부 점령이 무산되자 1945년 8월 23일 국가방위위원회(ГКО) 의장 스탈린 명의로 일본군 포로 50만 명을 소련 영내 포로수용소로 이송하여 강제노역 시키라는 극비 명령(제9898호)을 하달했기 때문이었다.
2.4. 소련에서의 포로 생활
동완이 소대원들과 함께 처음 끌려간 곳은 소련 극동의 블라고베셴스크 동북방의 한촌인 보자예프카 인근에 위치한 제20지구(블라고베셴스크지구) 제15포로수용소 수용소였다. 이로부터 50개월 동안 극동지방 여러 곳의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며 강제노역을 강요당했다.장교 계급에다가 건국대학 재학 중 러시아어를 익혀 구사할 수 있었던 동완은 초기에는 지휘관 역할을 유지했으나, 이후 소련 당국이 일본군의 상명하복 구조를 깨뜨리고 반동분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소위 '민주운동'을 조장하면서 장교 출신이었던 그가 반동으로 몰려 고초를 겪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 포로 대다수가 1948년 12월 흥남으로 송환되었음에도 동완은 송환 명단에서 제외되어 1년 더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1948년 여름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소재하고 있던 '호르'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을 당시, 실습차 수용소를 방문한 모스크바동양학대학(現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학부) 학생들에게 일본어, 조선어, 중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런저런 온갖 고생 끝에 1949년말 비로소 송환이 결정되어 육로편으로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2.5. 북조선에서 월남까지
그의 표현에 따르면, "1949년 12월 남들보다 1년 이상이나 늦게 고향에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립던 어머니와 까다로운 심사와 6·25직전의 광풍이었다"고 했다.# 1939년 봄 건국대학에 진학한 이후 근 11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지만, 일본 제국 육군 장교 출신으로 소련에서 포로 생활까지 하다 온, 반동 중의 반동인 동완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하에서 먹고 살 길은 막막했다.그러나 전화위복이라고, 숱한 동료들이 추위와 기아, 질병으로 죽어나갔던 엄혹한 수용소 생활이었지만[5] 포로 생활 5년간 그의 러시아어 실력이 완벽한 수준으로 발전한 덕택에 수용소에서 쇠한 몸을 고향에서 요양 중이던 동완은 1950년 5월 조소해운(朝蘇海運) 청진항사무소에 배치되었다. 북한에서 부동항인 청진항을 소련 해군의 군항으로 임차하여 거점으로 삼으려던 소련은 북한과 합작사로 항공사인 조소항공(朝蘇航空, 이후 조선민항을 거쳐 오늘날 고려항공. 참조)과 함께 해운사인 조소해운을 설립했고, 러시아어에 능통한 동완을 차출하여 활용코자 했다. 동완은 UN군의 북진으로 북한이 멸망을 앞둔 상황이 되어 조소해운이 해소되고 북한군은 연변으로 도주하는 1950년 10월까지 청진에서 일했다.
1951년 4월 조선인민군에 징집된 동완은 기회를 보다 월남이 가능해지자 1951년 9월 대한민국 국군으로 귀순했다. 월남 후에는 미군 군속으로 채용되어 1952년 12월까지 일했다.
2.6. 교수 생활
1953년 4월 당시 진해에 소재하고 있던 공군사관학교의 러시아어 교수(문관)로 임관했다.1954년 4월 설립된 한국외국어대학의 창립 멤버로 노어과 전임강사가 되어 함일근[6] 교수와 함께 노어과의 교수진을 구성했다#. 동완이 1956년 4월 조교수로 승진하면서, 1950년대의 외대 노어과의 교수진은 교수 함일근, 조교수 동완, 전임강사 차영근[7] 및 외국인 교수 Yankovskaya[8] 등 4인 체제의 진용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차영근의 요절, 함일근의 조기 퇴임 후 초기 멤버 중 홀로 남은 동완은 1961년 임용된 제자 김학수[9], 1962년 영입된 이동현[10] 등을 이끌며 1964년 3월 부교수, 1969년 12월 교수로 승진하여 한국의 러시아학에서 태산북두 같은 지위를 점했다. 1972년에는 신설된 '한국외국어대학 부설 소련 및 동구문제연구소'(現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았다. 1973년 여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유니버시아드 대회 한국선수단의 섭외위원으로 위촉되어, 일본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비자를 받고 8월 12일 도쿄발 모스크바행 일본항공편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2주간 체류하면서 감상을 남겼다(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974년 3월 신설된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의 창설 작업에도 조력했으며, 고대 노문과의 초대 학과장을 맡았던 신연자[11] 교수가 1년만에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긴급하게 구원투수로 동완이 등판하여# 1975년 8월 고려대 노문과 학과장으로 전임하였다. 1980년에는 신설된 고려대학교 러시아문화연구소(現 고려대학교 러시아CIS연구소)의 초대 소장에 취임했다.#
2.7. 은퇴 후
1987년 8월 고려대학교 교수에서 정년퇴임한 후에도 강사 신분으로 계속 고려대 노문과에 출강했다. 1987년 9월 창립된 한국노어노문학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고[12] 1989년 3월, 노어노문학 분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에 선출되었다. 참고로 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2분과(어문학)에서 러시아어문학자는 동완의 지도하에 고려대 노문과 1기로 학사, 석사를 마친 조주관(연세대 명예교수)이 2017년 7월 추가되기 전까지 동완이 유일했다. 또한 동완은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기 전인 1974년 9월부터 일본 소련동구학회(現 러시아동구학회) 회원으로 활동해왔다.1990년대에는 소련군 포로수용소에서 강제노역에 종사했던 관동군 소속 조선인 모임인 '시베리아 삭풍회'의 회장을 맡아 1992년 10월 러시아 정부에 강제노동 증명 자료를 요구해 받아내고, 1993년 11월에는 방일하여 후생성에 보상청구서를 제출#하는 등[13] 일본인 피해자 모임인 '전억협'과 협조하며 소련에서의 강제노동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활동에 힘썼다.
1995년에는 교수신문에 러시아의 학위 수여 제도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기고했다.# 주요 내용은 ‘러시아 각 대학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칸지다트 등 각종 학위를 남발하고 있다. 러시아로 간 한국 유학생의 상당수가 이처럼 진실성이 의심되는 학위를 받고 돌아와 정식 박사인 양 행세하고 다닌다’는 것이는데, 러시아 유학파 교수가 임용되기 시작했던 당시에도 러시아 유학파들과의 논쟁이 벌어졌다.
1997년 8월 17일 낮 12시경 지병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사망했다.
3. 상훈
- 1987년 국민훈장 동백장
[1] 건국대학에서 제1외국어는 일본어와 漢語(중국어) 중 택일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내지인/조선인/대만인) 학생은 중국어를, 중국인/만주인/몽골인/러시아인 학생은 일본어를 배웠다. 그리고 제2외국어로 몽골어,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가운데 자신의 모어를 제외하고 선택하도록 되어있어서 조선인의 경우는 대체로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중에서 하나 또는 두 개의 과목을 골라 학습하였다고 한다. (이정희, 「만주 건국대학’의 교육과 조선인 학생」, 『만주연구』 제22집, 225-255쪽, 2016)[2] 일본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1943년 10월 1일 쇼와 18년 칙령 제755호 '재학징집연기임시특례'로 법문계(=문과) 고등교육기관 재학생에 대한 징집유예를 폐지하고 같은 날 쇼와 18년 육군성령 제40호 '쇼와18년 임시징병검사규칙'을 공포하여 내지인 대상학생들을 동년 10~11월에 걸쳐 특별징병검사를 시행하여 12월 입대시켰고, 10월 20일에는 쇼와 18년 육군성령 제48호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하여 조선인/대만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병 지원을 강요하여 1944년 1월 입대시켰다.[3] 중국인/만주인/몽골인/러시아인 등[4] 예비사관학교라고 칭하기도 한다.[5] 제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말년까지도 포로 시절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6] 1913~1914년 출생, 관동주 대련제일중학교를 거쳐#, 일본 외무성 소관 구제전문학교였던 하르빈학원(하얼빈학원)을 졸업했다. 외국어대 창립 당시 학생과장 겸 노어과 주임교수(初代) 보직을 맡았고, 퇴임 후 많은 번역 작품을 내었다.#[7] 1926~1927년 출생, 경상북도 대구 출신으로 경북중학교를 졸업하고, 함일근이 졸업한 하르빈학원의 후신(일본 구제전문학교에서 만주국 국립대학으로 개편) 만주국 '국립대학 하얼빈학원'(참조)에서 수학하다 2차대전 종전 후 조선으로 귀환하여 고향 대구에서 미군 통역관, 대륜고등학교 영어교사 등을 지내고 1957년 한국외대 노어과 전임강사로 임용되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1961년 9월 도미하여 하버드 대학교에서 노문학을 연구하다 1963년 5월 26일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8] 1956년 임용.[9] 1931년 평안남도 평양부 출생, 1954년 한국외국어대학 노어과 1기생으로 입학하여 1958년 졸업, 1964~1966년 인디애나대학교에서 러시아문학 전공으로 석사를 취득하였고, 1975년 동완의 후임으로 외대 소련 및 동구문제연구소장을 맡았으며, 1978년 동완이 전임해간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1989년 사망시까지 재임했다. 1987년 창설된 한국노어노문학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10] 1927년 황해도 신계군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다 1962년 한국외대 노어과에 부임했다. 1970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정음사)로 한국번역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70년부터 한국지압연구회, 한국수기협회 초대회장을 지내고 1974년 홍콩으로 건너가 한국수기치료원 원장, 홍콩 국제기공학회 대표 등을 지냈다.[11] 1956년 경기여고를 수석졸업하고 미국 유학하여 1960년 UC 버클리 노어노문학과 졸업, 1962년 예일대학 노문학석사, 1968년 예일대학 노문학박사. 1967~1969년 뉴욕주립대 조교수를 지내고 1974년 3월 고려대 노문과 학과장으로 초빙되었으나 1년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12] 초대 회장이 외대 노어과 제자인 김학수 외대 교수였다.[13] 1956년 일본-소련 국교 복원시 쌍방 전쟁피해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