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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4 12:45:20

마쓰자카 다이스케/선수 경력



1. 개요2. 프로 입단 전3. 일본프로야구 1기 시절4.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4.1. 2006년~2012년: 보스턴 레드삭스4.2. 2013년: 마이너리그4.3. 2013년~2014년: 뉴욕 메츠
5. 일본프로야구 2기6. 은퇴7. 연도별 성적8. 국가대표 경력

1. 개요

일본의 전 야구 선수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프로 입단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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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하마 고교 시절 고시엔에서 투구하는 모습.

요코하마 고교 시절에는 엄청난 초고교급 유망주로 최고 152km/h의 강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을 구사하는 순수 실력과 더불어 고시엔에서 역대급 활약을 하며 헤이세이의 괴물(平成の怪物)이라는 칭호와 함께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1]

특히 1998년 고시엔 야구대회 준준결승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야구 명문인 오사카부PL학원고등학교를 상대로 연장 17회까지 무려 250구를 던지며 완투승을 기록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2] 거기다 바로 다음날인 메이토쿠기쥬쿠 고교와의 준결승전에서 구원등판[3], 역전승의 발판이 되어 팀을 결승으로 이끌고 이후 이어지는 결승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59년 만에 결승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이게 불과 사흘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4] 그 결과 고시엔 춘계·하계 대회에서 연패를 달성해 팀의 우승에 공헌했고 우리나라의 전국체전에 해당하는 국민체전에서도 팀을 정상으로 이끌며 한 해 3연패를 달성했다. 1997년 추계 현 대회 예선부터 다음해 제53회 국민 체육 대회 결승까지 공식 경기에서 44연승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고교 시절의 이런 엄청난 활약을 바탕으로 그해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즈,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닛폰햄 파이터즈가 영입경합을 벌인 끝에 교섭권을 따낸 세이부 라이온즈의 지명을 받고 1순위로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여기에 한 가지 비화가 있는데, 마쓰자카 본인은 요코하마에서 고등학교를 나와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지명한 세이부가 마쓰자카가 염두에 두고 있던 팀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이부 구단은 모기업의 세이부그룹 계열사에 요코하마 고등학교 학생들을 취업시키겠다는 조건을 마쓰자카에게 걸었고, 이를 들은 마쓰자카는 결국 수락했다.

3. 일본프로야구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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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687><colcolor=#191919> 헤이세이의 괴물 (平成の怪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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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세이부 입단식에서. 왼쪽은 당시 세이부 감독 히가시오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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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말랐던 데뷔 초기 시절.
1999년 4월 7일, 도쿄 돔에서의 닛폰햄 파이터즈 원정 경기에서 선발로 출장한 데뷔 무대에서 1회말 투구하는 모습.
평균 구속은 150.1km/h, 최고 구속은 155km/h가 찍혔다. 참고로 이 영상의 제목은 마쓰자카 다이스케, 충격의 프로 데뷔전이다.[5]

자신이 특급 유망주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프로 데뷔 첫해인 1999년도에 180이닝 16승 5패 평균자책점 2.60이라는 신인으로서는 믿기 힘든 스탯을 찍으며 데뷔 첫해에 다승왕,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석권하고[6] 고졸 투수로는 33년 만에 신인왕을 차지해 일본 야구계 최고의 투수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치로와의 첫 대결에서 3연타석 삼진을 뽑아냈고, "자신이 확신으로 바뀌었다"는 멘트를 남겼다.

그리고 팔꿈치 부상을 당했던 2002년[7]을 제외하곤 가공할만한 완투율을 자랑하면서 매 시즌 10승 이상을 기록하는 특급 에이스로 군림했다. 특히 3년차인 2001년엔 33경기에 등판해 240.1이닝 15승 15패 방어율 3.60을 기록하면서 사와무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사와무라상은 수상 과정에 논란이 있었는데, 12승 9패 196.2이닝 187탈삼진 방어율 2.46[8]의 노구치 시게키나 9승 13패 192이닝 171탈삼진 방어율 2.67의 이가와 게이를 제치고 마쓰자카가 사와무라상을 수상한 것. 이유는 두 가지인데, 일단 노구치나 이가와는 사와무라상 수상 기준을 채우지 못했고[9] 마쓰자카는 당시 양대리그를 통틀어 유일한 15승 투수였던데다가 240.1이닝에 214탈삼진으로 저 둘에 비해 이닝과 탈삼진을 훨씬 더 많았기 때문.

하지만 당시 최고의 투수는 당연 노구치 시게키[10][11]였고 마쓰자카도 당해 승률 50%로 사와무라 상 수상 자격 기준인 승률 60% 이상을 기록하지 못한 데다가 평자책도 3점 중후반대로 수상 자격 기준인 2.50 이하의 평자책을 만족하지 못했지만 전년도인 2000년도에도 수상자가 없었고 원칙대로 수상자를 고르면 2년 연속으로 수상자 후보가 없자 선정위원회에서 비록 마쓰자카가 자격 미달이긴 하나 격려 차원에서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히는 해프닝도 있었다[12]. 이런 일이 발생하자 '사와무라 상 수상이 정말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것이 맞는가?'하는 의문과 함께 수상 조건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사례로 2001년이 언급된다.

아무튼 마쓰자카는 이때까지만 해도 1999년 87볼넷, 2000년 95볼넷 2001년 117볼넷으로 제구력이 썩 좋은 투수는 아니었는데 2002년에 투구폼을 간결하게 바꾸고 딜리버리를 수정한 이후 2003년부터는 볼넷 허용률도 눈에 띄게 줄이면서 완전체 투수로 성장하며 2006년까지 최전성기를 달렸다. 하지만 정작 사와무라 상을 추가하지 못하면서[13] 미완에 가까웠던 2001년에만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마쓰자카의 커리어에서 특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2004년 일본시리즈에 출전해 팀을 일본제일로 이끌었다. 무서운 건 6차전에 선발등판하여 승리를 거두고 7차전 7대2로 앞선 8회말에 구원등판하여 홀드를 기록했다는 점이다.[14] 참고로 헹가래 투수는 9회말에 등판한 도요다 기요시이다.

2006년 사이토 카즈미와 투수 부문에서 치열하게 경쟁했고 마쓰자카는 17승 200탈삼진 방어율 2.13 등 무시무시한 스탯을 찍었지만, 사이토는 18승 205탈삼진 방어율 1.75 승률 0.783 투수 부문 4관왕을 차지했다. 그 해 사와무라상은 사이토가 수상했다. 대신 수비를 인정 받으며 골든글러브는 마쓰자카가 가져갔다. 이 둘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1차전에서 맞대결했는데 마쓰자카가 완투승을 거뒀지만 팀은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했다.

2006년까지 NPB 통산 8년 동안 평균자책점 2.95, WHIP 1.14, 204시합(190선발) 108승 60패 72완투 18완봉 완투율 38% 1402.2이닝 1355삼진이라는 엄청난 스탯을 찍고 역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라는 찬사와 함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하게 된다.[15]
이 글들은 당시 마쓰자카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현지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을 확인했지만 마쓰자카를 능가할만한 투수는 보이지 않았다. 마쓰자카는 지구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기량을 갖췄다. 최고구속 156km/h의 강속구에 수준급의 다양한 변화구를 정교하게 던진다.
  • 매덕스는 마쓰자카만큼 빠른 공을 던지지 못했다. 오히려 변화구의 예리함은 마쓰자카가 더 나아 보인다. 한마디로 마쓰자카는 95마일(153km/h)을 던지는 매덕스다. 당장 내년부터 로이 오스왈트(2006년 15승 8패 평균자책점 2.98 기록)와 비슷한 수준의 피칭을 선보일 것이다.
    - 바비 발렌타인
  • 메이저리그 어느 누구도 마쓰자카와 비교될 수 없다. 요한 산타나도 그보다 아래이다.
    - ESPN 현지 해설가
  • 홈런을 쳤지만 운이 따라준 것이다. 마쓰자카의 공은 누구도 칠 수 없다.
    - 데이비드 데헤수스

4.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4.1. 2006년~2012년: 보스턴 레드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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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3일 보스턴 레드삭스 입단식에서.

2006 시즌 종료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텍사스 레인저스, 뉴욕 메츠, 뉴욕 양키스 등 여러 메이저리그 팀들이 입찰경쟁을 벌인 끝에 보스턴 레드삭스5111만 1111달러를 지불하고 독점 교섭권을 따냈고 6년간 총액 5200만 달러라는 엄청난 특급대우를 받으며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포스팅비까지 합치면 무려 1억 달러 넘게 투자했으며 6년간 1억 달러면 S급선수를 FA로 영입할수 있는 금액이다. 사이 영 상을 2회 수상한 "제2의 외계인" 요한 산타나의 계약규모가 6년간 1억 3750만 달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훗날 보스턴팬들의 분노를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에이전트가 그 분인 마쓰자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구단주인 존 헨리는 협상기간 동안 테오 엡스타인 단장과 테리 프랑코나 감독 등 사절단과 함께 마쓰자카와 저녁 식사를 주선했는가 하면 자신의 개인 전용 제트기로 래리 루치노 사장과 테오 엡스타인을 보라스 코퍼레이션 사무실이 있는 LA까지 파견해서 보라스와 협상하게 하기도 했다. 결국 지리한 마라톤 협상을 벌인 끝에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극적으로 계약을 타결했다고 한다.

이런 기대감에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그를 유망주 순위 1위에 올렸다. 비슷한 수준의 (역대) 톱급 유망주들의 성적은 메이저 리그 유망주 순위를 참조.

보스턴 입단 첫해인 2007 시즌, 데뷔전에서 잭 그레인키와의 선발 대결에서 승리한 것을 시작으로 32경기 15승 12패 ERA 4.40 ERA+ 108 204.2이닝 201K 80볼넷 bWAR 4.1을 기록하면서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 연착륙했으며, 팀의 2007년 월드 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포스트시즌 성적은 총 4경기 선발 등판해 2승을 거두었으나 퀄리티스타트는 한 차례도 기록하지 못하였고 ALDS, ALCS의 평균자책점도 5점대로 좋지 않았다. 월드시리즈에서는 5.1이닝 2실점 승리 투수로 전보다는 선전했지만, 결과적으로 포스트시즌에서는 그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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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고있는 오카지마 히데키와 마쓰자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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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시즌 등판일지

이듬해인 2008년에는 29경기 18승 3패 ERA 2.90 ERA+ 160 167⅔이닝 154K 94볼넷 bwar 5.4를 기록했다. 부상으로 한 달가량 출장하지 못하긴 하였으나 평균 소화이닝이 5.78이닝, 6이닝을 넘긴 경기는 11경기에 불과하며, 퀄리티스타트 성공률이 48%로 채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또한 볼넷은 리그 최하위의 기록이고, BB/9 또한 5.05로 최하위권. 다만, 피안타율이 .211로 AL 1위를 기록하며 선전했다.

당시에는 인플레이 타구는 투수가 컨트롤할 수 없다는 DIPS 이론이 세이버매트릭스계의 지지를 받던 때라 운빨이라고 평가절하 당하기도 했지만,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투수의 투구 스타일도 BABIP에 영향을 끼친다는 해석이 중론이 된 이후로는 08마쓰자카의 경우 BABIP을 낮추는 스타일의 피칭을 한 것이라고 평가가 바뀌었다. 실제로 08년엔 극단적으로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스타일의 투구를 했는데, 보더라인에 걸치는 투구는 스트라이크 존 안쪽에 비해 명백하게 BABIP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계속해서 존 안에 걸치도록 던지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런 식으로 던지면 볼넷을 내줄 위험성이 커지고 투구수가 많아져 이닝소화력이 약해진다는 단점 때문에 타자가 강하거나 실점 위기일 때가 아니라 투구 전체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마쓰자카는 단점을 신경쓰지 않고 바깥쪽만을 집요하게 공략하는 투구를 했고 그 결과물이 저 극단적으로 낮은 피안타율과 많은 볼넷, 규정이닝을 간신히 채운 이닝소화력이었다.

물론 운 또한 따라주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이 해 마쓰자카는 유독 분식을 안 당했고[16] 6이닝도 힘들게 꾸역꾸역 채우고 내려갔음에도 좋은 보스턴 타선에 힘입어 18승을 기록할 수 있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3경기 등판해 딱 1경기만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해 승리를 챙겼을 뿐 나머지 2경기 모두 5이닝만에 강판당하였고 평균자책점도 4점대에 이르는 등 작년과 똑같이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이 해 뛰어난 활약으로 사이영 상 투표에서 4위를 기록한다. 여기까지가 마쓰자카의 전성기.


이듬해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의 2연패를 이끄는 선봉장이 되어 MVP를 수상했으나 정규 시즌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59⅓이닝 던지는 데 그쳤으며, 2010시즌에도 9승 6패 ERA 4.69 153⅔이닝 74볼넷 133탈삼진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마쓰자카 본인은 2009년의 부진에 대해 일본과 메이저리그의 트레이닝 시스템 차이라고 밝혔다. 마쓰자카는 선발 등판을 앞두고 롱토스와 불펜 피칭을 같은 날에 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것을 두고 어깨가 소모되고 부상 우려가 있다며 레드삭스 구단이 금지시켰고, 일본식 훈련을 고집하려는 마쓰자카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런 식으로 계속 훈련하면 나는 일본 시절처럼 던질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만 이 인터뷰 기사 내용이 미국에도 알려져서 이슈가 되자 마쓰자카는 "자신은 공개적으로 팀 훈련 방식을 비판한 적이 없고, 인터뷰 기사 내용대로 말한 적도 없다"며 영문으로 사과 성명을 냈다.#

2011년 성적은 8경기 3승 3패 ERA 5.30 37⅓이닝 23볼넷 26탈삼진.

2012년에는 복귀 후 첫 등판부터 5이닝 4실점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최종 성적은 11경기 45⅔이닝 동안 1승 7패 ERA 8.28.

2012년 시즌으로 보스턴과의 6년 계약이 끝났다. 메이저리그 정복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6년 동안 117경기 50승 37패, ERA 4.52, 1완투, 조정 ERA 101, WAR 10.5, WHIP 1.418로 그냥 평범한 메이저리그 성적을 냈다. 참고로 동급이라던 요한 산타나로이 오스왈트는 같은 기간 142경기 61승 47패 평균자책점 3.21, 조정 ERA 128, WAR 16.6(산타나), 168경기 65승 49패 평균자책점 3.56, 조정ERA 117, WAR 19(오스왈트)이다.

첫 2년은 상당한 성적을 냈지만 09년의 부상 이후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고, 먹튀가 되고 말았다.

4.2. 2013년: 마이너리그

마쓰자카 자신은 보스턴에 남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확률은 제로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보스턴도 "어떤 결정도 안했고 어떤 대화도 안했지만 언제 대화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해 마쓰자카를 잡을 의지가 약함을 입증했다. 일본에서는 마쓰자카 쟁탈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고향팀인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스캇 보라스와 접촉을 시작했고, 치바 롯데 마린즈이토 쓰토무 감독이 직접 나서서 마쓰자카가 일본에 오면 좋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여기다 친정팀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도 마쓰자카를 뺏기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나 마쓰자카 본인은 메이저리그 잔류에 무게를 두고 있었고 결국 2013년 2월 11일, 메이저리그 구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시범경기에서는 호투를 펼쳤지만 5선발 경쟁에선 실패했고 일단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이너리그에서 투구를 하다가 4월 29일 옆구리 통증으로 강판. 그 뒤 DL로 내려갔는데 왼쪽 옆구리 좌상으로 복귀에는 3주나 걸린다고 한다.#

부상에서 복귀한 뒤 6월 11일에 트리플A에서 2⅔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6월 16일 선발 등판을 했으나 3⅔이닝 4안타 4실점으로 강판당했다. 결국 8월 20일 메이저리그 승격에 실패한 채 방출되었다. 마쓰자카의 트위터에 의하면 자신이 스스로 방출 요청을 하여 방출된 것이라고 한다. 성적은 5승 8패 평균자책점 3.92

4.3. 2013년~2014년: 뉴욕 메츠

그리고 FA 신분을 얻게 되었다. LA 다저스와 LA 에인절스 등의 서부 지구 팀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며 세이부 라이온즈의 경우에는 마쓰자카의 영입을 시즌이 끝난 이후 고려하겠다고 하면서 만약 마쓰자카가 일본 복귀를 희망할 경우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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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메츠 시절.

8월 22일, 뉴욕 메츠와 메이저리그 계약에 성공했다. 기존 우완 선발투수인 제레미 헤프너와 헨리 메히아의 시즌아웃으로 땜빵 선발로서 계약한 것. 계약하고 바로 다음 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홈경기 선발로 등판했다. 하지만 등판하자마자 1회 1실점, 2회 4실점(...)하고 6회 시작 전 교체되었다. 5이닝 5실점(5자책) 1볼넷 4삼진 6피안타 2피홈런.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 선발로 등판했을 때의 성적은 4⅓ 이닝 4실점 5삼진 4볼넷(…). 애틀란타와의 경기에서는 3이닝 6실점을 하며 강판되었다. 이 3경기동안 성적은 3경기 12⅓이닝 동안 ERA 10.95 무승 3패 피안타율 0.365 WHIP 2.11이라는 최악이라는 말밖에 안나오는 막장피칭을 보였다. 차라리 왕첸밍은 3경기는 잘던졌다

그래도 9월 8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는 콜업 안 해준 원한이 서린 투구를 하며 5⅔이닝 1실점 6삼진 3볼넷으로 그럭저럭 희망이 보이는 피칭을 했다.

9월 14일 마이애미 말린스를 상대로 드디어 오랜만에 메이저리그 선발승을 거뒀다. 7이닝 동안 탈삼진 3개에 2피안타 1볼넷, 1실점 호투를 통해 스스로 메이저리그 잔류 희망의 불씨를 남기는데 성공. 9월 20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에서도 6이닝 동안 탈삼진 6개에 4피안타 3볼넷 4실점 2자책점으로 다소 부진했으나 팀 타선이 터지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9월 25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는 선발로 나와 7⅔이닝 무실점에 4피안타, 탈삼진 6개를 잡아내며 활약, 본인의 시즌 3승과 함께 팀의 1:0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콜업된 후 초기에는 퇴물급 피칭을 선보였으나, 이후 실전 감각이 돌아와서인지 급격히 경기 내용이 좋아졌다. 2014년 계약은 꿈도 못 꿀 것 같던 8월 달 분위기와 달리 2014년 1년 남짓한 짧은 계약으로 메츠에 잔류할 가능성, 내지는 4~5 선발을 찾는 팀들이 긁어볼만한 복권으로 등극하는데에 성공했다.

2014시즌을 앞두고 스프링캠프 초청선수 자격으로 메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4월 16일(미국시각) 메이저리그로 콜업되었다. 19일 경기에서는 1이닝 2피안타 1볼넷 1실점으로 부진했으나 바로 다음날인 20일 경기에서는 연장전 3이닝동안 1볼넷 5K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거기다 이 경기를 통해 미국, 일본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했다. 그리고 4월 24일(미국 시각) 팀이 4:1로 이기고 있는 9회에 올라 1이닝 퍼펙트를 기록하며 첫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불펜으로 전환한 뒤에는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중.

한편 메츠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경기가 우천때문에 취소되어 5월 25일 더블헤더로 진행되게 되었는데, 여기서 한 경기에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간만에 선발로 출전한 5월 25일 경기에서는 6이닝 3피안타 1볼넷 6탈삼진 2실점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답내친으로 1점을 얻은 것은 덤. 이 경기 이후에는 선발로도 출장하고 있다. 여전히 볼넷이 많지만 과거에 비하면 확실히 좋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평균자책점도 3점대를 유지하고 있다.

2014 시즌 최종 성적은 34경기 83⅓이닝 3승 3패 1세이브 3홀드 78탈삼진 평균자책점 3.89로 마무리하였다.

이후 일본 복귀를 결정하며 이 시즌이 메이저리그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메이저리그 통산 8시즌 158경기 132선발 790.1이닝 56승 43패 1세이브 ERA 4.45 Bwar 9.4 Fwar 8.4.

5. 일본프로야구 2기

5.1.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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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시즌 종료 후 일본프로야구 복귀설이 돌더니 결국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3년 12억엔 계약을 맺고 돌아왔다. 구단관계자를 비롯해 팬들까지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했고 앞으로 잘할 가능성이 희박한 투수한테 12억엔은 너무 과한거 아니냐?'는 반응이 있었는데, 썩어도 준치라고 헤이세이의 괴물 마쓰자카가 최소 10승은 해줄 거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이 와중에도 장훈은 “마쓰자카는 현재 딴 사람이다. 팔꿈치가 너무 내려와 있다. 8:2의 비율로 활약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적인 발언을 남겼는데, 메이저리그에서 돌아온 선수들한테 혹평을 하기로 유명한 장훈의 발언이라 당시에는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시즌을 앞둔 2015년 3월 초에 팀 연습에 혼자만 참가 안 해서 어깨를 부상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직후에 치러진 시범경기에서도 3이닝 3사구 2실점의 영 좋지못한 피칭을 보여주며 팬들을 실망시켰다. 이후 개막부터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어깨부상으로 인한 2군 스타트가 확정됐다. 그래도 팬들은 후반기부터는 던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2015년 4월, 언론의 취재로 마쓰자카의 부상은 마음의 병으로 몸은 아픈 곳이 없다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특단의 조치로 무기한 '노 쓰로 조정'[17]에 들어갔지만 성과를 보지 못했고, 5월에 실시한 원투(멀리 던지기)테스트에서는 '투수의 최소 합격선'인 50m도 힘겨워하는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며 일본 야구계를 경악하게 했다. 결국 7월 마쓰자카는 내년을 향한 조정에 돌입했다고 공식 발표하고 8월에 어깨수술을 받았다[18]. 어깨수술하며 실제로 아팠던 걸로 확인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1군에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 하고 시즌 아웃되어 팬들의 조롱을 받는 등 헤이세이의 괴물의 일본 복귀 첫해는 최악의 시즌이 되어버렸다.

이 당시의 사진

반면 소속팀인 소프트뱅크는 마쓰자카 없이도 퍼시픽리그를 초고속으로 우승하고 2015년 일본시리즈마저 연패한 탓에 마쓰자카의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2015년 시즌 동안 투수들이 너무 많아서 1군 선발 투수 자리만 해도 6명(스탠드리지, 밴덴헐크, 나카타, 셋쓰, 데라하라, 다케다)이 변칙적으로 로테이션을 돌고 있으며[19] 이 틈에 못 끼어서 2군에 있는 투수들만으로도 1군의 로테이션을 꾸릴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때문에 타구단 팬들로부터 1군에서 안 쓰려면 임대라도 해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팀에서는 마쓰자카 본인의 요청에 따라 수술 후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재활을 하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 거의 방목을 했다. 이러한 소프트뱅크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가 많은데, 이는 사전에 부상을 알고 있으면서도 라이벌 팀에서 부활해서 장애물이 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20] 고액으로 계약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미 소프트뱅크의 관계자가 "구단주도 기대는 안 했다. '타 구단에서 활약할 바에 우리가 붙잡자'라고 생각해서 계약했다"라고 했다[21].# 일본 최강의 재력을 가진 구단이니 가능한 행동.

구단에서는 수술 후 복귀까지 6개월이 걸린다고 발표했지만, 선수로서 가장 치명적인 어깨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마운드에 오를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이었다. 일단 1년간 구단의 방목 덕분에 마음 편하게 재활을 할 수 있었던 게 도움이 됐는지 몸 상태는 나아졌다고 한다. 2016년 3월 3일 두산 베어스와의 연습경기에 등판해서 2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최고 구속은 141km/h 정도로 예전의 모습을 회복한 것은 아니지만 2016시즌에 등판하는 모습은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역시 어깨 문제로 휴업하다가 8월 25일에 2군에서 첫 등판을 했으며 2군 경기에서도 1⅔이닝 동안 2피홈런 9실점이라는 재앙같은 피칭을 하는 등 영 좋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1군 콜업은 올해도 물 건너가나 싶었지만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콜업되었다. 구도 기미야스 감독은 전날 마쓰자카와 면담을 가졌으며 2군과 1군은 다르다. 한 번이라도 1군에서 던지는 게 좋다고 하면서 불펜 투수 등판 예고를 했다. 공만 좋다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도 포함도 생각해본다고.
그렇게 2016년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 라쿠텐 전에서 0대2으로 뒤진 8회말에 등판하며 드디어 일본 복귀 후 첫 1군 마운드에 올랐다.[22] 하지만 결과는 1이닝 3피안타 4사사구 5실점 2자책점으로 최고 구속은 시속 144km에 제구력도 좋지 않는 등 혹사 여파가 세게 온 듯하며 결국 클라이맥스 시리즈에도 합류 불발됐다.

2년동안 말아먹은게 못내 아쉬웠는지 2016년 시즌 끝나고 본인의 의사로 윈터리그에 참가했다. 많은 우려[23]가 있었으나 총 4경기에 선발 등판, 20이닝 13피안타 11탈삼진 11볼넷 6실점 평균 자책점 2.70를 기록하며 꽤 좋은 성적으로 인생 첫 윈터리그를 마무리했다[24]. 이후 스프링캠프에서 의욕적으로 공을 던지며 재기를 노리는 모습이 포착되었는데, 한 시간동안 공을 수백개나 뿌리는 무시무시한 연습량으로 인해 그 분이 있는 한화로 오라는 드립이 흥하고 있다. 일본에 재미있는 투수가 있다

그리고 시범경기 개막전에 등판하고 히로시마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7이닝 노히트를 기록하는 쾌투를 보였으나 2군에서 개막을 맞이했다. 이후 2군 있다가 4월 12일 와다 츠요시가 팔꿈치 통증으로 2군을 가면서 15일 오릭스 전에 등판 예고를 됐다. 하지만 마쓰자카 본인도 어깨 부상으로 등판 취소, 이후 재활에 몰두하며 결국 17시즌에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소프트뱅크에서 재계약을 원한다고 한다. 향간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마쓰자카에게 준 돈은 상품 판매로 다 충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수 본인이 FA를 선언하면서 소프트뱅크와 결별하게 되었다[25]. 이정도 먹튀에도 구단주는 마쓰자카에게 준 3년간 12억엔을 그 정도는 (상승의 강팀을 만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오차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데다, 팬들도 마쓰자카의 계약 규모 때문에 선수단 운영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라서 다른 팀 팬들의 어그로에도 개의치 않는다.

소프트뱅크 퇴단 이후에는 뛸 팀을 찾아다녔고 요코하마에서 관심이 있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오퍼가 들어오지 않자 최저 연봉(2000만엔)만 받겠다고 선언을 했다. 현재 실력만 보자면 그 돈도 아깝지만 마쓰자카가 가진 상품성을 감안하면 데려올 가치는 충분하다는 게 현재 인식이다. 우선 한신과 주니치가 거론됐지만 한신은 리빌딩을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대만 진출까지 모색하고 있으며 퉁이 라이온즈측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되었지만 마쓰자카 본인이 "거짓뉴스가 나를 망친다."고 강력히 반발, 부인하기에 대만 진출은 단순 찌라시로 머물었다.

그러던 와중에 닛칸 스포츠를 시작으로 일본의 스포츠 신문들이 일제히 주니치 드래곤즈의 마쓰자카 영입 가능성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에 시라이 분고 주니치 구단주가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며 혹평을 했고 이러한 기사를 접한 한국의 기자들은 마쓰자카가 주니치에게도 버림받은 것처럼 보도를 했다. 그러나 구단 사정을 잘 아는 현지의 주니치 팬들 사이에서는 "구단주가 의뭉스럽게 딴청부린게 하루이틀이냐, 어차피 얘기 다 해놓고 연막 피우는 게 뻔하다"라면서 마쓰자카의 영입을 거의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팬들의 추측대로 주니치에서 입단 테스트 기회를 제공했다. 전적으로 현장의 의견을 고려하여 영입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감독과 사장은 긍정적인 뉘앙스의 인터뷰를 남겨 2018시즌 마쓰자카의 소속팀이 점차 정해지는 분위기다.[26]

5.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2018년 1월 23일, 언론을 통해 비공개 입단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니치 공식 입단을 확정지었다. 주니치의 모리 시게카즈 감독에 의하면, 스프링캠프 명단에도 넣을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연봉은 4억엔에서 무려 96%가 삭감된 1500만엔에 계약하였다. 이 수치는 육성선수를 제외하면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삭감률이라고 한다. 등번호는 테스트 직전 만약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99번을 달 것이라고 예고했었다.[27]

2018년 3월 4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 반테린 돔 나고야에서 열린 라쿠텐 이글스와 시범경기에 선발 등판해 피홈런 포함 2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시범경기에서도 그다지 눈에 띄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되었다. 4월 5일 요미우리전에서 선발로 나섰다. NPB 경기에서 선발로 나선 것은 12년만. 선발로 나선 경기에서 5이닝 96구를 던지면서 8피안타 3사사구 3실점(2자책)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결과가 크게 나쁘지 않았고 소뱅 시절 계속 언급한 팔이나 어깨부위의 위화감 얘기도 안 하며 다음 등판을 기대하게 했다.

4월 19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7이닝 동안 123구를 던지며 4피안타 2탈삼진 2볼넷 1몸에 맞는 공 2실점(1자책)을 기록하며 퀄리티스타트 플러스를 챙겼지만 1-2로 패배하며 패전 투수가 됐다.

4월 30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전에 선발등판하여 6이닝 1실점 3피안타 8피사사구 6탈삼진을 기록했고 팀이 3:1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5월 20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투수로서는 6이닝 3피안타 7탈삼진 1실점을 기록했고 타자로서는 3타수 2안타를 기록하는 등 투타 양면에서 활약했고 팀이 6:1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6월 8일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교류전에 선발등판하여 5이닝 1실점을 기록했고 팀이 5:4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전반기 기록은 7선발등판 3승4패 방어율 2.41 37.1이닝 35탈삼진 22볼넷 WHIP 1.29. 잔부상이 많아 등판수가 적은 것을 빼면 빼어난 비율 스탯을 보여주며 쏠쏠하게 활약 중. 많이 못 나와서 그렇지 실력 자체는 돌아왔다고 봐도 무방할 듯. 원 소속팀 소프트뱅크 선발 로테이션이 붕괴된지라 아까운 자원으로 재평가되는 지경.

그리고 마운드에서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덕분인지 올스타전 세리그 선발투수 팬투표 1위로 선발되었다.

8월 1일 한신 타이거스전에 선발등판하여 5이닝 2실점 6탈삼진 5피안타 6피사사구를 기록했고 팀이 8:5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8월 16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전에 선발등판하여 6이닝 3실점 6탈삼진 5피안타 3피사사구를 기록했고 팀이 11:5로 승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9월 2일 거인전에서는 2이닝 61투구 9피안타(2피홈런) 1탈삼진 7실점으로 거하게 불을 질렀고 9월 13일 한신전에서는 5이닝 95투구 5피안타 4탈삼진 1실점(1자책)으로 선발승을 거두었다. 시즌 6승(4패) 기록.

시즌 성적은 11경기 55.1이닝 등판 6승 4패 51탈삼진 방어율 3.74로 많이 나오지는 못했지만 괜찮은 비율스탯을 기록했다. 거의 이닝당 1탈삼진을 기록할 정도로 올라온 구위가 볼만하다.

시즌 후에는 테레비아사히에서 중계한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게스트 해설을 맡았다. 2018년 11월 12일 NPB에서 선정한 올해의 컴백상 수상자가 됐다. 그리고 주니치도 마쓰자카 영입 효과를 톡톡히 봤는지 연봉도 1500만엔에서 8000만엔으로 상승하였다.

그런데 2019년 2월 9일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팬에게 싸인을 해주다가 극성팬이 팔을 잡아당겼는데 이때 팔에 위화감을 호소했고, 검진 결과 어깨 염증이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 탓에 장기간 이탈이 불가피 해졌다.

5월 16일 팀의 연습일에 골프를 치러 가서 구단 자체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이 구단 대표를 통해 발표되었다. 팬들의 반응은 비난 일색.#

7월 16일 한신전에서 시즌 첫 등판했다. 5이닝 2실점을 기록했는데 1, 3, 5회 대량실점 위기가 있었으나 위기관리능력을 보이며 탈출했다. 2:2로 팽팽한 가운데 교체되어 승리는 기록하지 못했다.#

7월 27일에는 DeNA와의 경기서 0.1이닝 8실점이라는 최악투를 보이며 다시 1군에서 말소됐다.

이후 2군에서 컨디션 조절과 경기 출전으로 1군 복귀를 노렸으나 정규 시즌이 끝나면서 그대로 2019년을 마무리. 시즌 후 거취 문제를 둘러싸고 연봉을 최저까지 내리면서 주니치에 계속 남을지를 협의 중이었으나 주니치 입단 테스트를 도와준 모리 시게카즈 디렉터, 토모리 유이 해외 스카우트가 사임을 하면서 마쓰자카 본인도 방출을 요청했다. 일단 현역 생활은 계속 할 생각이라는 방침. #

그리고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일본시리즈 해설을 맡았는데 나름 소프트뱅크 출신이라고 교진 출신인 다카하시와 함께 부른 듯. 작년 일본시리즈 게스트 해설에서 평가가 나쁘지 않아 올해도 해설을 맡게 되었다. 은퇴 후 진로는 해설 쪽으로 점쳐지는 듯.

5.3.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주니치 퇴단 이후 친정인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마쓰자카 획득에 나섰다. 2020년은 세이부에서 뛰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한 분위기. 그리고 2019년 12월 3일 NHK 등 일본 언론에서 오피셜이 뜨면서 돌고 돌아 결국 세이부에 돌아오며 친정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시즌 시작 전 연습경기에서 두산 베어스정수빈에게 3루타를 맞고 오재일에게 투런홈런을 맞았다.

이후에 닛폰햄 전 연습경기에 등판하여 4이닝 4실점을 기록했다. 직구가 힘이 없어서 변화구 위주 피칭을 하다보니 투구수가 많아지는게 여전히 문제. 그 와중에 커터가 135km/h가 나오는데 직구가 140km/h가 안나오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가 또다시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추(목) 부위에 내시경 수술을 받았다고 하며 재활에만 2~3개월이 소모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세이부 팬들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결국 2020 시즌 한 경기도 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구단은 재계약 예정이라고. 구단 역사에 남을 에이스이자 왕년의 전국구 스타라 다시 세이부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는 날엔 좌석은 매진될 것이고 상품도 불티나게 팔릴 것이다. 또한 '친정팀에서 재기 후 영광의 은퇴'라는 스토리를 만들고 싶을 것이다.

2020년 12월 21일 1천만엔 깎인 연봉 2,000만엔에 다음 시즌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렇게 2021년을 맞이했지만 시즌 절반쯤 지난 시점에서 2군에서도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하고 있다가 올해를 끝으로 은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인은 2020년에 받은 목 내시경 수술. 수술을 받은 후 손저림이 생겼는데 2021년까지 손저림이 낫지 않아 공을 던질 수 없는 몸상태가 되었다고.

6. 은퇴

결국 2021년 7월 7일, 은퇴를 선언했다. 2021년 10월 19일 닛폰햄과의 경기에서 현재 공석인 등번호 18번을 달고 마운드에 올라 현역 시절을 마감하는 피칭을 선보일 예정이다. 같은 날 은퇴 기자회견도 계획되어 있다.

19일 당일 예정대로 마운드에 올라와 1타자만을 상대했다. 콘도 켄스케에게 5구 승부 끝에 볼넷을 주고 현역 마지막 등판을 마무리했는데 5개의 공 모두 포심이었음에도 120km/h를 넘기지 못했고[28] 제구도 뜻대로 잘 되지 않았는데, 오른팔의 손저림이 심한 모양이다.은퇴 경기 투구 영상

2021년 12월 4일,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으로 최종 은퇴식을 치렀다. 은퇴식 도중 스즈키 이치로가 깜짝 등장해 꽃다발을 전달했다.영상

이렇게 일본 야구에 충격을 안긴 헤이세이의 괴물은 젊은 시절 누적된 혹사의 여파로 MLB 시절부터 점차 하락세를 겪더니, 일본 복귀 후 끝없는 부상에 시달리다 아쉬움 속에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7.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99 세이부 25 180 16 5 0 0 2.60 124 95 151 1.17
2000 27 167⅔ 14 7 0 1 3.97 132 99 144 1.35
2001 33 240⅓ 15 15 0 0 3.60 184 118 214 1.25
2002 14 73⅓ 6 2 0 0 3.68 60 22 78 1.02
2003 29 194 16 7 0 0 2.83 166 72 215 1.17
2004 23 146 10 6 0 0 2.90 127 48 127 1.16
2005 28 215 14 13 0 0 2.30 172 59 226 1.03
2006 25 186⅓ 17 5 0 0 2.13 138 37 200 0.92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7 BOS 32 204⅔ 15 12 0 0 4.40 191 81 201 1.32
2008 29 167⅔ 18 3 0 0 2.90 128 101 154 1.32
2009 12 59⅓ 4 6 0 0 5.76 81 32 54 1.87
2010 25 153⅔ 9 6 0 0 4.69 137 82 133 1.37
2011 8 37⅓ 3 3 0 0 5.30 32 24 26 1.47
2012 11 45⅔ 1 7 0 0 8.28 58 23 41 1.71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3 NYM 7 38⅔ 3 3 0 0 4.42 32 16 33 1.24
2014 34 83⅓ 3 3 1 3 3.89 62 56 78 1.34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5 소프트뱅크 1군 기록 없음
2016 1 1 0 0 0 0 18.00 3 4 2 5.00
2017 1군 기록 없음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8 주니치 11 55⅓ 6 4 0 0 3.74 50 37 51 1.48
2019 2 5⅓ 0 1 0 0 16.88 12 5 2 2.63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20 세이부 1군 기록 없음
2021 1 0 0 0 0 0 0.00 0 1 0

8.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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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연속 WBC 대회 MVP를 차지한, 역시 영광의 시절을 보낸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시절.

마쓰자카의 국가대표 경력은 매우 화려하며 그 실적과 성적도 매우 훌륭하다. MLB에 건너가기 전인 2006년까지 일본의 프로 1군이 선발된 모든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였으며[29], MLB에 건너가서도 2009 WBC에 출전하여 팀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국가대표 단골이었다.

특히, 쿠바[30]와 대만전[31]에 극강의 모습을 보였으며 두 나라의 경기에 선발로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팀이 이겼다.[32]

마쓰자카는 프로 선수로 나선 국제대회에서 통산 13경기 9승 2패 86.2이닝 61피안타 93탈삼진 22볼넷 2사구 21실점(17자책) ERA 1.77 [33]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였고 2006 WBC, 2009 WBC 우승 및 MVP 그리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 등 실적도 화려한 편이다. 단순히 클래식 스텟만 훌륭한게 아니라 세부 스텟을 봐도 WHIP는 0.96, BB/9가 2.08, k/9가 9.66, 볼삼비는 무려 4.23이다. 마쓰자카는 국제대회에서도 공을 거침없이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넣었으며[34] 그렇기에 볼넷을 내주는 경우가 적었던 것이며 전성기 시절 구위도 좋았기에 타자들과의 정면 승부에서 결과도 좋았다. 다만 정면 승부를 하다 보니 홈런을 종종 맞기도 했으며 특히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정면 승부 결과가 안좋을 때 홈런을 비롯해서 이승엽의 2루타 등 장타와 함께 결정적인 실점을 내주기도 했었다.

그의 국대 커리어에서 다른 선수와 비교하여 재밌는 점은, 13경기 모두 선발로 등판했다는 것이다. 많은 국제대회를 나와 선발로만 활약한 케이스는 흔치 않다.[35] 마쓰자카와 마찬가지로 국가대표 단골이던 우에하라 고지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부터는 구원 투수로 나왔고, 리그내에서는 좌완 최고 선발 투수인 스기우치 도시야 조차도 거의 모든 경기에서 불펜 투수로 보직을 전향해야했을 정도로 일본 투수들 라인업에서 좋은 투수들이 즐비했다. 이와쿠마 히사시2009 WBC에서 구원으로 등판한 적이 한 번 있고, 다르빗슈 유2009 WBC에서 대회 후반부에서는 불펜 투수로 나왔다. 2000년대 국대 단골이던 와다 츠요시2006 WBC에서 멕시코전에 구원 등판한 적이 있다. 심지어 대투수 구로다 히로키마저도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사정상 불펜으로 돌릴 정도의 일본 팀이었는데, 이런데도 마쓰자카는 모든 경기를 선발로 나왔다는 점에서 그가 선발 투수 에이스로서 얼마나 중용받았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

여담으로, 한국 대표팀과의 통산 기록은 3경기 1승 1패 21이닝 10실점(7자책) ERA 3.00으로 그가 국제대회 통산 실점한 21실점 중 절반 가량인 무려 10실점을 한국 대표팀에게 내줬다. 마쓰자카가 국제 대회에서 허용한 홈런 수는 4개[36]인데 그 중 절반인 2개도 한국에게 내준 것이다.

홈런 맞은 경기는 마쓰자카의 국제대회 13경기 중 1회에 실점한 4경기이기도 한데 재밌는 점은 한국전 외의 2경기에서는 솔로 홈런으로 각 1점씩밖에 허용하지 않았으나,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한민국과의 예선 경기에서 이승엽의 투런 홈런을 포함 4실점, 2009 WBC 승자조 경기에서 김태균의 투런 홈런으로 2실점했다. 마쓰자카 상대로 초반에 공략하기 어려워했던 여타 다른 나라 타자들과는 달리, 우리나라 타자들은 마쓰자카에게 초반부터 맹타를 휘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마쓰자카의 국가대표 커리어 2패 중 1패도 한국이 안겨준 패배였다. [37]

이렇듯, 한국에게는 상대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고 임팩트 큰 장면[38]들을 내주며 한국 팬들에게 우에하라 고지오타니 쇼헤이급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실제 한국과의 통산 성적을 제외하고 다른 국가와의 경기에서 통산 성적은 10경기 8승 1패 75.2이닝 11실점(10자책)ERA 1.19의 엄청난 성적이 된다. 즉, 다른 국가에는 재앙과도 같던 투수였다.

일각에서는 다르빗슈 유[39]와 마쓰자카가 힘으로 밀어 붙이다[40]가 한국 타자들 상대로 다소 약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국 타자들이 파워 피처의 유형의 투수들에게 강하고 일본산 피네스 피처 유형의 좋은 로케이션과 커맨드 및 뛰어난 변화구로 타자들을 상대하는 투수들에게 전통적으로 약했다는 의견이다. 하지만, 이는 선택적 기억의 오류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와다 츠요시[41][42]이와쿠마 히사시[43], 와타나베 슌스케[44][45]처럼 제구가 좋거나 변화구 무브먼트가 훌륭한 이른바 기교파 투수들에게 한국 타자들이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우에하라 고지[46][47]오타니 쇼헤이[48] 등 파워피처 유형의 투수들에게도 한국 타자들이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를 고려할 때, 마쓰자카가 파워 피처스럽게 피칭하여 한국에게 안통했다기보다는 한국 타자들과 상성이 안 좋았던 것으로 이해하는게 일견 타당해 보인다.[49][50]

그래도 일본 내에서는 전반적으로 통틀어 볼 때, 대표로 나갈 때마다 성적도 훌륭하고 국가대표 단골이였기에 그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일본 내에서도 매우 좋게 평가된다. 마쓰자카보다 개인으로는 높게 평가받는 다르빗슈 유도 국대 성적과 실적에서는 마쓰자카에게 몇수는 접고 들어갈 정도로 괴물 투수라는 별명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다.

8.1. 1999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마쓰자카는 아마추어 시절에 고3이던 1998년 9월에 일본 고시엔 구장에서 펼쳐졌던 아시아 청소년 야구선수권대회 등에 출전하였을 정도로 국가대표 단골이었다. 그런 마쓰자카가 프로선수로서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처음 참가한 대회는 1999년에 한국에서 열린 제 20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이다. 이 대회는 2000 시드니 올림픽 예선을 겸한 대회로 2등까지 시드니 올림픽 진출권이 주어졌기에 한일 양국가는 1등에게만 올림픽 직행권이 주어지던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달리 대회 마지막 날 예정된 한일전에 총력을 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전의 중국과 대만전을 모두 잡아 2연승을 하면 올림픽 본선 진출이 확정되기 때문. 그래서 이 둘 다음으로 전력이 강한 대만전에 양 국가 모두 총력을 쏟았고 에이스 마쓰자카[51]는 한국전이 아닌 대만전[52]에 등판하게 된다.

마쓰자카는 일본 원정팬 3000명을 동원시켰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던 중이었으며, 그 인기에 부응하며 프로 자격으로 출전한 국제대회 첫 경기부터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쓰자카는 대만과의 경기가 끝난 후,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돼 기쁘다. 한국전에도 감독이 등판을 지시하면 던지겠다"[58]라고 인터뷰에서 밝혔으나 투수 보호 차원에서 한국전 등판은 없었다. 당시 국내에서 일본과 한국 양국의 전국구 스타였던 마쓰자카와 이승엽의 대결을 기대한 한국팬들에게는 아쉬운 소식이었다.

마쓰자카는 이 경기를 시작으로 국제대회에서 마쓰자카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8.2. 2000 시드니 올림픽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회 전까지 25경기 12승 7패[59] 148과 3분의 2이닝 동안 129탈삼진 ERA 4.36을 기록하며 전년도[60]에 비해 2년차에는 그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마쓰자카는 8월 한여름부터 퍼지는 모습을 보이며 부진했다. 특히 대회 직전인 8월 16일 긴테츠 버팔로스와의 경기부터 5경기 동안 승을 챙기지 못했으며 이 5경기 동안 25이닝동안 28실점 24자책점을 기록했다. 게다가, 올림픽을 2주 앞둔 9월 3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긴테츠 버팔로스와의 경기에서 1루 커버를 들어가다 타자 주자와 얽혀 아킬레스 건 부상을 입었고 올림픽 직전 마지막 경기인 9월 10일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도 6과 3분의 2이닝 동안 6실점(5자책)을 기록하며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이렇듯, 여름에 퍼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닝 소화력도 떨어지고 탈삼진 능력도 전년보다 못하자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프로와 아마추어를 골고루 선발[61]해 참가한 2000 시드니 올림픽에 마쓰자카는 에이스라는 중책을 맡으며 중요한 경기에만 선발 등판한다.

이 대회에서 마쓰자카의 기록은 3경기 27이닝 21피안타 25탈삼진 8볼넷 10실점(7자책)이었다. 딱히 부진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국전만 따져보면, 2경기 17이닝 8실점(5자책)로 기대만 못한 피칭을 보여줬다. 물론 대회 시작 전 리그에서 부진한 모습[82]을 보였던 마쓰자카였기에 국제전에서 오히려 좋은 피칭을 보여줬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구대성과의 선발 싸움에서 지며 완투패 했기에 한국 내에서 마쓰자카를 기대만 못해 실망했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일본 내에서도 마쓰자카가 한국에 두 차례나 두들겨맞은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20살의 프로 초년병이기는 했지만 최고 인기를 누려온 괴물 투수가 상대 라이벌 국가의 최고 타자들에게 여러 번 통타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인 때, 기성 프로 선수들을 압도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가 소포모어 징크스으로 슬럼프를 겪다 대회에서도 신인 때의 모습이 안 나왔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심지어, 마쓰자카는 부진한 와중 올림픽을 출전하기 전인 9월 13일 당시 교제 중이던 니폰 TV 아나운서 시바타 토모요[83]의 자택 아파트 앞에서 주차 위반 혐의를 받는다. 단순 주차 위반이라면 범칙금 정도만 내고 끝났겠지만, 당해 마쓰자카는 8월에 이미 속도 위반으로 인해 면허가 취소 되어 있던 상황. 즉, 무면허 운전을 한 것. 심지어 주차 위반을 은폐하려든 것 아니냐는 의문까지 생겨 논란이 더 심화되었다. 당시 세이부 구단의 구로이와 아키라 홍보 과장이 그 대신 법정에 출두해 마쓰자카가 시바타 집에 갈 때 무면허 상태로 차를 몰고 갔다고 시인했다. 결국, 도쿄 지검에 서류 송검되어 약식 기소에 의해 벌금 19만 5000엔의 유죄 판결을 받는다. 이로 인해, 당시 구단 사장인 오노 켄지 및 홍보 과장 구로이와는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도 벌어진다. 심지어 마쓰자카는 당시 사이타마현 교통 안전 캠페인 홍보대사기도 했다. 이 건이 알려진건 올림픽이 끝난지 한달 후인 2000년 10월 17일이었고, 9월 13일은 시드니 올림픽 출전 직전으로 리그에서 부진하던 중이였기에 무면허 운전을 할 정도로 밀회에 빠져 올림픽에서까지 제 기량이 안 나온 것이냐고 일부 언론에서 비판을 받았다. 특히 스포츠 호치의 한 기자는 정신이 다른데 팔려있으니 올림픽 전 리그에서도 부진했던 것이고 결국 올림픽에서마저 제 기량이 안 나오고 상태가 별로일 수 밖에 없었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래도 대부분은 한국전에서 통타 당한 것에 충격 받았다는 평 정도만 할 뿐, 심각한 부진은 아니었기에 20살의 프로 초년병을 위로하고 감싸는 기사들이 주를 이뤘다.

8.3.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마쓰자카는 2003년 29경기 16승 7패 194이닝 동안 215 탈삼진 ERA 2.83으로 탈삼진왕과 방어율왕을 차지하는 등 신인 시절 만큼 좋은 성적을 기록하였고 본인의 본격적인 전성기의 시작을 알렸다.[84] 이 활약을 바탕으로 2003년 말에 열린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당당히 선발 되었다. 이 대회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예선을 겸한 대회였으며 우리에게는 삿포로 참사로 더 유명한 대회이다.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마쓰자카에게 팀의 2번째 경기인 대만전 선발을 맡겼다. 아무래도, 직전 대회인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전에 부진하였고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대만을 상대로 엄청난 피칭을 보여주었기에 마지막 날의 한국전이 아닌 팀의 두 번째 경기인 대만전에 선발 등판 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날 기록은 7이닝 3피안타 1볼넷 무실점 12탈삼진으로 대만전을 잡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예선이었던 1999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마찬가지로 대만전을 꺾는 것이 올림픽 진출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라고 볼 수 있으며[86] 일본은 대만전에서 마쓰자카의 활약 등으로 3연승하며 무난하게 예선 1위로 아테네 올림픽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87].

8.4.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시즌 중에 열린 아테네 올림픽 직전까지 마쓰자카는 18경기 8승 6패 126과 3분의 2이닝 동안 98탈삼진 ERA 3.20을 기록했다. 게다가 9완투 4완봉으로 리그 최고의 이닝이터다운 면모까지 보여주며 아테네 올림픽에도 승선했다. 그리고 올림픽에서 쿠바와의 경기, 호주와의 동메달 결정전에 출전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회에서 쿠바를 꺾을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이던 당시 일본 팀이었지만 호주에게 의외의 일격을 맞았다. 심지어 이 대회는 미국과 한국 모두 출전을 안한 올림픽이었기에 쿠바를 빼면 일본은 금메달 1순위나 마찬가지였다. 쿠바까지도 조별 예선에서 꺾는 모습을 보였으니 금메달을 기대할 법도 했다. 하지만 전력이 일본에 비해 약체인 호주에게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98] 다만, 호주의 경우 예선 풀리그 경기에서도 일본을 9:4로 꺾는 파란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준결승전과 동메달 결정전까지 모두 합하면 일본은 7승 2패를 기록했는데, 이 2패를 모두 호주에게 당한 셈. 이렇게 좋은 투수가 연달아 나와 총력을 다하면 아무리 강팀이라도 고전할 수 밖에 없다는 '단기전의 어려움'에 경기 내용도 상대가 잘해서 진 한 점차의 승부였기에 일본 선수들이 못해서 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팀은 어쨌든 동메달 결정전에서 캐나다를 11:2로 꺾고 동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예상과 달리 은메달도 확보하지 못했으니.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일본 입장에서는 사실상 실패한 올림픽[99]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미국도 없는 상황에서 동메달이었기 때문[100]


팀과 별개로 마쓰자카 개인에게는 시드니 노메달의 수모를 다는 아니지만 일정정도 되갚게 된 셈. 이 대회에서 마쓰자카의 최종 기록은 2경기 1승 1패 16이닝 12피안타 20탈삼진 4볼넷 4실점(3자책) ERA 1.69이었다. 팀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1패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두 경기 모두 훌륭한 피칭을 선보였다. 특히, 쿠바에게 대회 유일한 패배를 안기는데 앞장섰고 호주전에서도 1실점 외에는 좋은 피칭을 보여줬다.


8.5. 2006 W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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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자카는 전년도(2005년) 최전성기의 성적을 기록[101]하며 2006 WBC 일본 야구 국가 대표팀에도 승선한다.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왕정치감독은 마쓰자카를 중요한 경기의 선발로 내보낸다. 그리고 마쓰자카는 그에 부응하며 등판 때마다 좋은 피칭을 보여주어 초대 WBC 대회 MVP까지 차지하였다.

이어, 첫 경기 미국전 패배와 2라운드 마지막 경기인 한일전에도 패해 1승 2패로 일찍 귀국할 뻔 하였으나... 이게 웬걸 미국이 뜬금없이 멕시코에 패하는 덕에 어부지리로 일본은 준결승전에 진출하였다. 준결승전에서는 우에하라 고지의 7이닝 무사사구 무실점 완벽투 덕에 6:0으로 한국을 꺾고 결승전에 올랐다. 곧 이어 마쓰자카는 상대편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을 꺾고 올라온 쿠바를 상대로 선발로 나서게 된다.

마쓰자카는 이 대회에서 3경기 3승 0패 13이닝 8피안타 10탈삼진 3볼넷 2사구 2실점 ERA 1.38의 기록으로 마무리한다. 유일한 이 대회의 3승 투수였으며 훌륭한 성적과 함께 초대 WBC MVP를 차지한다. ALL-WBC Team에 이름을 올린 것은 덤. 이때, 일본 대표팀의 대회 기간을 통틀어 팀 평균자책점이 2.54였는데, 마쓰자카의 평균 자책점은 1.38로 그를 훨씬 하회하는 수치를 기록했다. 준결승전 스플리터 낚시와 직구 쾌투로 악몽을 선사한 것으로도 유명한, 우에하라 고지는 마쓰자카와 초대 대회 WBC 선발진을 이뤄 마운드를 단단하게 막아주기도 했으며 이 때 우에하라의 이 대회 평균 자책점은 ERA 1.59 였다. 기록으로보나, 중요한 경기에서 피칭 내용[106]으로 보나 마쓰자카와 우에하라가 선발진을 이뤄 여러모로 투수진에서는 이 둘이 캐리했던 대회.

8.6. 2009 W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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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전년도인 2008년에 보스턴에서 18승 3패 ERA 2점대로 훌륭한 피칭을 보여준 마쓰자카는 2009 WBC 일본 대표팀 감독 하라 타츠노리에 의해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대회 전부터, 일찍이 하라 감독은 이와쿠마 히사시, 다르빗슈 유와 더불어 마쓰자카를 선발 3인방으로 낙점했다고 공표했다. 대회 첫 경기였던 중국전다르빗슈 유가 선발로 나섰고, 승자조 경기였던 한국전에 마쓰자카는 선발로 나서게 된다.

팀은 한국과의 한국과의 2라운드 승자조경기에서 한국에 4:1로 패배하며 엘리미네이션 게임으로 밀려난다. 이 엘리미네이션 게임 상대는 쿠바. 일본의 4강 진출과 대회 탈락의 당락이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였기에 쿠바 킬러였던 마쓰자카의 재등판도 기대 했으나 불과 3일전에 6이닝 던졌던 선발 투수를 이틀 휴식만 준 채 재등판 시키는건 무리라고 판단했던 하라 감독. 하라 감독은 이와쿠마 히사시를 선발로 내보냈고 이와쿠마와 그를 이어 등판한 스기우치 도시야[110]는 이와쿠마와 더불어 쿠바 타선을 무실점으로 봉쇄하여 팀은 5:0 2경기 연속 영봉승으로 일본은 4강 진출을 확정짓는다. 이어, 2라운드 순위 결정전도 휴식을 취한 마쓰자카는 준결승전인 미국전에 선발 등판하게 된다. 아무래도 전년도 MLB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던 마쓰자카를 하라 감독이 믿고 중용한듯 하다.

이 대회에서 마쓰자카는 3경기 3승 0패 14.2이닝 14피안타 13탈삼진 5볼넷 4실점 ERA 2.45를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으로 팀의 우승에 공헌한다. 1회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유일한 3승을 기록한 투수가 되면서 2009 제 2회 WBC MVP로 선정되며 2연속 대회 MVP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연히 ALL-WBC Team에도 선발 되었으며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마쓰자카는 국가대표에서 은퇴한다.


[1] 이후, 레이와의 괴물이라는 칭호는 사사키 로키가 갖게 되는데, 사사키 역시 초고교급 유망주로 주목받은 바 있다.[2] 여담으로 이 명승부에서 마쓰자카와 맞대결해 패한 PL학원의 투수 카미시게 사토시는 팔꿈치 부상으로 프로 진출을 포기한 후 2003년 닛폰 테레비에 입사해 현재 아나운서로 활동하는 중이다. 미일프로야구 교류전 중계에서 카미시게가 캐스터에 객원해설이 마쓰자카 다이스케였다. 카미스게 캐스터가 코시엔에서는 서로 라이벌이었지만, 오늘은 서로 잘해봅시다 라는 멘트를 했다.[3] 이날 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좌익수로 선발 출전해서 풀 이닝을 소화하고 있었다.[4] 참고로 고시엔 대회는 전부 낮 경기로 치러진다. 1년 중 가장 더운 8월 초중순에 뙤약볕 밑에서 경기를 한다는 얘기다. 특히 8강전은 하루에 4경기를 다 치러버리기 때문에 아침 8시부터 경기를 시작하는데, 요코하마 고교와 PL학원의 경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더운 3번째 경기인 낮 1시 경기였다.[5] 1번타자 이데 타츠야 - 2번타자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3번타자 카타오카 아츠시와 대전하며, 결과는 마쓰자카가 이데와 카타오카는 삼진, 오가사와라는 투수 땅볼로 삼자범퇴시켰다. 이날 경기는 5 - 2로 세이부가 이김과 동시에 마쓰자카가 8이닝 9탈삼진 2실점으로 데뷔 무대에서 첫 승리투수가 되었고, 닛폰햄의 이날 득점은 오가사와라가 8회에 마쓰자카의 생애 첫 피홈런인 2점 홈런을 날린 것이 유일했다. 출처[6] 사와무라상은 옆 동네에서 같은 해에 데뷔한 대졸 신인 우에하라 고지가 차지했다. 우에하라는 이 해 20승+센트럴리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7] 2001년 혹사의 여파가 컸다. 안 그래도 고교때부터 상식을 초월하는 혹사에, 프로 1년차부터 풀타임 선발을 뛰었고, 당시에는 제구력이 많이 부족해 볼넷도 많아 투구수도 많았다. 여기에 2001년에 240.1이닝을 투구한 것[8] 센트럴리그 방어율왕[9] 노구치 시게키는 승수와 승률, 이가와 게이는 승수, 승률, 이닝, 완투[10] 여담으로, 이 당시 노구치 시게키가 기록한 WAR는 1980년 시즌부터 2019년까지 규정 이닝을 채운 선발 투수를 양대리그 통틀어 3위에 해당된다.(Delta 및 NPB stats 사이트 기준으로 delta 기준 9.2. npb stats 기준으로는 7.8 기록.) 1위와 2위는 2011년 시즌의 다르빗슈 유다나카 마사히로이다(delta 기준 각각 11.5, 9.8. npb stats 기준으로는 각각 9.6과 8.1의 WAR기록.). 마쓰자카의 단일시즌 WAR 커리어 하이는 2005년이다(delta 기준 8.9. npb stats 기준으로는 7.3 기록.). 참고로 2000년부터 2004년까지의 NPB는 역사적인 타고투저 해의 연속이었고 반면 2011년은 기록적인 투고타저의 해로 이처럼 서로 간의 리그 환경이 극과 극이라 2011년 시즌의 다르빗슈 유다나카 마사히로의 기록과 2001년의 노구치 시게키의 기록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11] 다만 일본의 세이버 스텟을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유명 사이트인 ranzan을 기준으로는 노구치의 기록이 전체 3위가 아니다.[12] 원래 사와무라상은 그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긴 하다[13] 그 당시 사이토 가즈미, 스기우치 도시야 혹은 이가와 케이같은 선수들에게 밀리며 수상을 하지 못했다.[14] 9년 뒤에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는데 2013년 일본시리즈에서 라쿠텐의 다나카 마사히로가 6차전에서 160개를 투구 후 7차전 마지막 이닝에 행가래 투수로 등판한 것[15] 가끔 비교가 된 우에하라 고지의 성적은 같은 기간 평균자책점 3.02, WHIP 1.03, 195시합(193선발) 102승 54패, 56완투 9완봉, 1391⅓이닝, 1236삼진이다.[16] 남긴 주자가 잔루가 되는 비율을 구하는 LOB% 80.6%로 전체 3위였다.[17] 볼을 아예 던지지 않는 조정. 즉 캐치볼이나 투구연습을 하지않고, 달리기스트레칭 등의 기초적인 훈련만 하며 경과를 지켜보는 조정법.[18] 류현진이 받았던 수술과 비슷한 수술이다.[19] 특히 외국인인 스탠드리지와 밴덴헐크를 10일 간격으로 번갈아서 등록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스탠드릿지는 10승 + 3점대 ERA의 준수한 성적에도 자리가 없어서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했다.[20] 실제로 미국 진출 전까지 마쓰자카는 소프트뱅크의 천적이었다.[21] 일본 리그는 외국인 보유가 무제한이기에 외국인 선수에 한해서는 이런 경우가 종종 보였다[22] 2006년 10월 7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이후 10년만에 일본프로야구 1군 무대에 복귀했다. 당시 상대는 공교롭게도 현 소속팀 소프트뱅크.[23] 현 마쓰자카 실력에 트리플에이 선수들도 오는 윈터리그에서 잘할 수 있겠느냐. 오히려 부진하고 자존심 잃고 오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많았다.[24] 특히 마지막 경기에는 7이닝 1실점, 투구수 88개로 호투했다[25] 이 소식이 보도된 날짜는 소프트뱅크의 일본시리즈 우승 바로 다음날이었다.[26] 주니치행이 떠오른 이유 중의 하나로 팬들은 현 주니치의 수뇌진이 세이부 시절 마쓰자카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모리 시게카즈 현 감독은 마쓰자카의 신인 시절 세이부의 코치였고 데니 도모리 해외 스카우트 담당은 마쓰자카의 선배로 세이부의 필승조의 일원이었다.[27]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28] 초구 시속 118km/h의 높은 볼을 시작으로, 2구째 시속 118km/h 공은 스트라이크를 던졌고, 3구째 시속 117km/h의 공과 4구째 116km/h짜리 공은 모두 볼이 됐다. 5구째가 마쓰자카의 마지막 공이었으며 시속 116km/h로 날아간 공은 몸쪽 스트라이크존을 한참 벗어났다.[29] 보스턴에 합류한 2007년부터 2년간은 국가대표로 출전하지 않았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일본의 프로 1군 정예가 발탁되어 참가한 국제대회는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2008 베이징 올림픽 단 두개였다. 먼저 2008 베이징 올림픽의 경우 메이저리그 선수들 차출이 거부된 대회이다.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는 시즌 종료 이후 열려 메이저리거들이 참가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박찬호는 당시 메이저리거였지만 시즌 종료 이후 이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대만전에서 호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쓰자카는 당시 일본의 빅리거였던 이치로, 마쓰이 등과 함께 이 대회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 진출만 아니었다면 마쓰자카의 국제대회에서 태도나 그의 성격상 모든 대회에 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30] 2004 아테네 올림픽 승리투수,(8.1이닝 3실점(8회까지는 무실점)) 2006 WBC 결승전 승리투수(4이닝 1실점) 2009 WBC 2라운드 첫 경기승리투수.(6이닝 무실점) 통산 3전 3승 0패[31] 시드니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한 1999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승리투수(9이닝 1실점) 아테네올림픽 아시아예선을 겸한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승리투수(7이닝 무실점) 2006 WBC 아시아 라운드 승리투수(4이닝 1실점) 통산 3전 3승 0패[32] 두 나라 경기를 모두 통틀어 통산 6전 6승 0패.[33] 2009 WBC 직전 호주 대표팀과의 평가전 기록 1.2이닝 2실점을 포함하면 88.1이닝 23실점(19자책) ERA 1.94 기록.[34] 물론 100% 모든 경기에서 그런것은 아니고 2004 아테네 호주전이나 2006 WBC 대만전은 기교파 투수 위주의 피칭을 종종 보여주기도 했었다.[35] 국제대회 특성상 단기간에 좋은 성적을 끌어내기 위해 상황에 따라서 투수를 보직 상관없이 내보낸다. 하지만 국제대회에서도 선발은 중요 역할을 맡으며 마쓰자카의 경우 강팀 상대나 결승전 같이 중요 경기에 선발로 출전했다. 최고 투수만 모인다는 국가대표팀에서 중책을 맡은 것이다.[36] 2006 WBC 결승전에서 쿠바 에두아르도 파렛의 솔로 홈런, 2009 WBC 준결승전 미국의 브라이언 로버츠의 솔로 홈런과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한민국과의 예선 경기에서 이승엽의 투런 홈런, 2009 WBC 승자조 경기에서 김태균의 투런 홈런.[37] 나머지 1패는 2004 아테네 4강전에서 호주에게 1:0 스코어로 패한 것이다. 마쓰자카는 선발 투수로서 7.2이닝 13탈삼진 1실점으로 분투했으나, 팀 타자들이 호주 투수들에게 틀어막히는 바람에 호투하고도 패전의 멍에를 써야했다.[38] 이승엽과 김태균의 홈런이나, 시드니 동메달 결정전에서 이승엽의 결정적 2타점 적시 2루타 등.[39] 한국전 통산 8이닝 4실점(3자책점) ERA 3.38 기록[40] 실제, 이진영은 스톡킹에 나와 다르빗슈 유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유형이라 오히려 할만했고, 제구가 좋고 변화구가 다양한 이와쿠마 히사시가 오히려 더 까다로웠다고 말했다. 한국은 스피드에는 어느 정도 적응하지만 변화구가 좋고 제구가 좋은 선수들에게 애먹는다는 말도 덧붙였다.[41] 한국전 통산 12이닝 2실점 ERA 1.5 기록[42] 실제, 와다 츠요시는 "나의 생명선은 스트레이트다"라고 말할 정도로 리그 내에서는 거침없이 직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정면 승부하는 파워 피처스러운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특유의 제구력과 변화구로 한국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하거나 땅볼을 많이 유도하는 피네스 피처스러운 면모가 주를 이뤘다.[43] 한국전 통산 13이닝 3실점 ERA 2.08 기록[44] 한국전 통산 12.2이닝 1실점 ERA 0.71 기록[45] 와타나베의 경우 제구가 좋은 투수는 아니었으나, 워낙에 변칙적인 투구를 많이하던 투수라 한국 타자들이 공략을 잘 하지 못했다.[46] 구속은 느리지만, 공격적인 투구 패턴으로 직구를 거침없이 스트라이크에 꽂아 놓아 유리한 카운트를 잡아놓는 파워피처 유형에 가깝다. 실제로 2006 WBC 준결승전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한복판 직구로 이승엽을 두 차례나 삼진으로 잡는 등 파워피처스러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었다.[47] 한국전 통산 2경기 1승 1세이브 8이닝 3피안타 9탈삼진 무사사구 무실점 ERA 0.00[48] 한국전 통산 2경기 1승 13이닝 21탈삼진 무실점 ERA 0.00[49] 마쓰자카와 비슷한 케이스가 후지카와 큐지. 후지카와의 경우 엄청난 직구의 구위로 타자들을 찍어누르는 피칭 스타일을 지녔으며 국제대회 통산 13경기 11.2이닝 2실점(1자책) ERA 0.77으로 훌륭한 성적을 보여주었지만 한국전에서는 임팩트 큰 실점을 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2006 WBC에서 이종범에게 내준 2타점 적시 2루타 분식회계 라던가, 2008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에서 이진영에 내준 동점타[50] 다만 우에하라의 경우 파워피처긴 하지만 무브먼트를 앞세운 파워피처이고 오타니의 경우 애초에 한국 수준의 타자가 칠 수 없는 구속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또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51] 대회 전까지 23경기 14승 5패 166이닝 139탈삼진 ERA 2.60로 데뷔 첫 해임에도 뛰어난 활약 중이었다.[52] 당시 대만타선은 4번타자를 맡은 천진펑이 가장 핵심선수였다. 또한 (훗날 대만 야구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하는) 훙이중도 포함되어 있었다.[53] 이 선수는 훗날 부산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해 2002년에 다시 방한했고 한국과의 결승전 경기 선발 투수로 나왔다. 당시 결승전 경기에서는 4회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마운드에서 조기 강판됐다. 이외에도, 2001년 야구 월드컵 한국과의 경기에서도 등판했던 적도 있고 여러모로 한국과 인연이 있다.[54] 마운드에 있던 투수 차이충난도 타구가 뜨자마자 3루를 가리키며 마운드에서 내려와 덕아웃으로 향했다.[55] 당시 고교생 신분이었다.[56] 마쓰자카의 요코하마 고교 직속선배이기도 하다.[57] 당시 마쓰자카의 피칭 내용을 기록한 기사[58] 당시 인터뷰가 실린 기사.[59] 마쓰자카는 한여름부터 퍼지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 전 봄과 초여름에 그나마 승수를 많이 쌓아 승률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60] 25경기 16승 5패 180이닝 동안 151 탈삼진 ERA 2.60 기록. 심지어 데뷔해였다.[61]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요미우리를 포함한 대다수 센트럴 리그 팀들이 선수차출을 거부했다. 주니치 드래곤스의 백업포수 스즈키 정도만이 센트럴 리그 소속 선수 중에서는 유일하게 올림픽기간 내내 주전으로 출전한 케이스.[62] 이후, 메이저에 진출하여 커리어동안 4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특히 2004년은 그의 최전성기였다.[63] 2001년에 템파베이에서 메이저 데뷔전을 치렀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2005년을 마지막으로 MLB에서 자취를 감췄다.[64] 훗날,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통산 타율 0.247 홈런 122개를 때려냈다. 하지만 2008년 허리 부상이후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고 2010년을 마지막으로 메이저에서 자취를 감췄다. 한 시즌에 32개의 홈런을 쳐낸 적도 있을 정도로 일발장타 능력이 있던 선수.[65] 당일 경기 스기우치 도시야로 부터 끝내기 홈런을 쳐낸 선수. 메이저 경력은 1998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뛴 6게임이 그의 커리어에서 전부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다.[66] 메이저 통산 88경기에 출전했고 27 개의 홈런 0.225의 타율을 기록한 선수. 시드니 올림픽 이후에는 2002년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 용병 신분으로 NPB 무대를 밟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2003년 메이저에 다시 복귀하지만 2004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다.[67] 금메달 리스트 존 코튼과의 Q&A[68] 2002년과 2003년 다저스에서 선수생활 한다.[69] MLB 통산 1087게임 출장 0.271의 타율 홈런 66개 장타율 4할 5리로 장타 능력은 별로였지만, 선구안이 좋아 볼넷을 잘 얻어내던 선수. 여기에 뛰어난 수비력을 보유하여 2001 AL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86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 시즌 당시 백업 1루수로 밤비노의 저주를 끝낸 마지막 아웃 카운트 풋아웃을 기록한 선수기도 하다. 이 해에 보스턴은 팀 전체가 Sportsman of the year에 선정되어 본인도 선정되었다. 여러모로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한 미국 타자 가운데서는 가장 뛰어난 커리어를 보유한 선수. 투수까지 포함하면 로이 오스왈트벤 시츠가 있다.[70] 이외에도, 한국과는 결승 홈런을 두 번이나 친 것으로 인연이 있는 선수. 예선전에서는 진필중을 상대로 결승 만루 홈런을 쳐내 팀의 4:0 승리에 일조하였고, 준결승에서 다시 만난 한국을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쳐냈다. 참고로 이 때 끝내기를 내준 투수는 박석진. 즉,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을 두 번이나 울린 선수기도 하다.[71] 시드니 직전까지 메이저 저니맨으로 팀을 옮겨다녔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당시는 마이너 팀 소속이었다.[72] 커리어 대부분을 마이너에서 전전하다 2012년 1월에 은퇴했다. MLB 통산 0.242의 타율에 40홈런을 기록했다.[73] 준족을 자랑하는 선수였으며, 훗날 용병 신분으로 2004년 한신 타이거즈에 입단했으나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다.[74] 당시 마쓰자카는 타구를 잡자마자 3루를 쳐다보며 3루 주자 마이크 킨케이드를 묶었지만 마쓰자카가 뒤돌아 2루로 던지자마자 킨케이드는 빠른 발로 홈에 쇄도하여 득점했고 마쓰자카는 실점 이후 한참을 2루 쪽을 바라보며 씁쓸해했다.[75] 커리어 대부분을 마이너에서 보냈으며 MLB 통산 타율 0.163의 처참한 타격을 보여준 선수. 대신 준족을 자랑해, 메이저리그 경기에서는 대부분 대주자로 경기에 기용되었다.[76] 번트에는 고의낙구가 적용되지 않는다. 자세한 고의낙구의 개념은 본 항목 참조.[77] 선동열도 마쓰자카에게는 "많이 뽑아봐야 2점"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78] 참고로, 앞선 미국과의 경기에서 138개의 공을 던졌으므로 두 경기에서 무려 299개의 공을 던진 셈.[79] 그 사이 박종호는 2루 도루를 성공시켰다.[80]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마쓰자카는 "풀카운트에서 어떤 공을 던질까 혼란스러웠다. 포수의 사인대로 직구를 던졌는데 이게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며 자신의 의도대로 던진 공이 아니었음을 밝혔다.[81] 1982년 LA 올림픽에서 야구가 처음으로 채택 된 이후, 일본은 처음으로 노메달 굴욕을 맛봤다. 그것도 처음으로 프로 차출이 허용된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일어났고 그것이 라이벌인 한국에 패한 결과였으니 충격이 클 만도 했다.[82] 마쓰자카는 올림픽 직전 5경기에서 25이닝 28실점(24자책)라는 처참한 기록을 보여주었다.[83] 참고로 2004년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84] 이 해를 기점으로 마쓰자카는 2006년까지 4시즌 동안 NPB에서 최전성기를 보낸다.[85] 추후에 2006년 초대 WBC 한일전 도쿄돔 경기에서 이승엽에게 8회의 결정적 홈런을 맞게되는 투수.[86] 예선 2위까지만 올림픽 출전 티켓이 부여되었다.[87] 다만 한국이 대만에게 패배해서 그때과 달리 한국전 승리도 중요했다. 그리고 한국은 3위에 머무며 올림픽 진출이 좌절되었고 대만이 본선 진출했다.[88] 여담으로 당일 경기 포수였던 조지마 겐지는 몸에 맞은 후 괜찮다며 계속 던지겠다던 마쓰자카에게 "만약 너가 상태가 안 좋다면, 내가 바로 벤치에 교체 신호를 보낼거야"라고 말했다고 경기후에 밝혔다. 마쓰자카는 구리엘 타구에 직격당한 이후 다음 타자 오스마니 우르티아에게 141km/h의 직구를 던지며 10km/h나 구속이 떨어지자 조지마는 상태가 안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우르티아에게 안타를 맞아 1사 1,2루 상황이 되자 조지마는 벤치에 교체 신호를 보낼까 말까 고민했지만 마쓰자카가 곧장 괜찮다고 조지마에게 사인을 보냈고 마쓰자카가 바로 다음타자부터 150km/h의 직구를 던지자 안심했다고. 이후, 마쓰자카는 두 타자를 범타처리하며 실점 없이 4회를 마쳤다.[89] NPB 리그에서는 2004년 아테네 출전 전까지 9완투 4완봉을 기록할 정도로 철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마쓰자카였다. 실제 올림픽 직전 세경기 동안 7월 19일 니혼햄전 144구, 7월 26일 다이에 호크스전 136구, 8월 2일 오릭스전 152구 총 432구를 던졌다.[90] 당시 대표팀 감독 대행이던 나카하타 키요시는 2020년 마쓰자카를 만나 당시 상황을 회고하였다. 이 회고에 따르면 마쓰자카가 나카하타의 교체 요구를 거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나카하타)가 마운드에서 (트레이너 대신) 그만 던지라 말했더니 공을 버리고서 "왜 바꿔요!"하는 거 같은 거야. 내 입장은 안중에 없었지?"라며 웃으면서 물었다. 이를 듣고 마쓰자카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어렸어요."라고 나카하타에게 웃으며 사과했다. 여담으로, 나카하타는 훗날 TBS 방송에서 해설자로서 마쓰자카의 은퇴 특집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그의 열정과 투수로서의 책임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라고 다시금 언급하기도 했다. 부상 위험에도 불구하고 속투하려던 마쓰자카에게 꽤나 감명받은 모양.[91] 당시 게임 영상[92] 우리나라에는 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선수로 잘 알려진 호주 야구 선수. 올림픽 직전까지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트리플 A팀인 포틀랜드 비버스 소속 불펜투수였다.[93] 1루수 브렌단 킹맨은 올림픽 출전 이전에 플로리다 말린스와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뛴 적이 있다.[94] 당일 경기, 6.2이닝 5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 기록.[95]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적인 불펜인 JFK에서 J를 맡았던 선수.[96] 당일 경기에서는, 2.1이닝 3탈삼진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퍼펙트로 일본 타선을 잠재웠다.[97] 이 활약을 바탕으로 두 선수는 이후, NPB 무대를 밟게 된다.[98] 호주는 예선라운드에서 대만에게도 지는 등(대만의 왕첸밍 - 차오진후이 계투에 막혀 0대3으로 패배했다), 4승 3패로 간신히 준결승에 진출한 상태였다. 만약 대만이 예선라운드 이탈리아전에서 9회 대역전패당하지 않았으면, 호주는 예선탈락할 수도 있었다(대신 승자승원칙에 의해 대만이 준결승으로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99] 이러한 실패의 원인을 팀 당 2명씩 출전되었고 투수들 중 성적이 리그에서 별로인 투수들도 있어 최정예가 아니라는 점과 원래 감독인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아테네 올림픽 본선을 앞두고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현장을 떠난 지 10년 넘었던 수석 및 타격 코치인 나카하타 키요시가 갑작스럽게 현장을 지휘했다는 점을 주된 원인으로 추측했다.[100] 시간이 흘러 2021년 5전 전승 금메달로 그 수모를 만회했다.[101] 2005년 한 해 215이닝 동안 226 탈삼진 ERA 2.30 기록. 사와무라 상스기우치 도시야에게 내줬지만 이 해 탈삼진왕을 차지한다.[102] WBC는 올스타전처럼 5회를 다 소화하지 않아도 승리투수 요건을 갖출 수 있다. WBC는 선발 투수의 투구수 제한이 있기 때문.[103] 여담으로, 마쓰자카는 본인이 국제대회에서 출전한 모든 대만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야말로 대만전 승리의 보증수표인 셈.[104] 1회 이승엽의 결승 투런 홈런이 터졌다.[105] 프레드릭 세페다, 오스마니 우르티아, 야리엘 페스타노 삼진 처리.[106] 마쓰자카와 우에하라 고지는 각각 결승전준결승전에서 승리투수가 되었다.[107] 여담으로, 일본 킬러라 불리던 김광현이 속절없이 무너진 이 경기 이후로 이 대회가 끝날 때까지 김광현은 단 한 차례도 선발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한국도 프로간의 대결에서 일본에게 콜드 패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심지어 2022년 현재까지도 이 경기가 유일하다. 그렇기에, 한국 야구 팬들과 대표팀 관계자들이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것.[108] WBC는 올스타전처럼 5이닝을 다 채우지 않아도 승리투수 요건을 갖출 수 있다.[109] 2022년 현재까지도 한일 양국 간 프로 1군이 선발된 대결에서 유일한 콜드 게임이다. 2023 WBC에서 또 나올뻔 했으나 13:4로 가까스로 콜드게임은 나오지 않았다.[110] 당일 경기에서 구원으로 올라와 3이닝 퍼펙트 완벽투를 선보였다.[111] 사실 이 타구는 중견수였던 후쿠도메 고스케와 유격수 나카지마 히로유키의 콜 플레이가 원활했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다. 애매한 위치에 떨어지기는 했으나, 체공시간이 길었던 타구였고 두 수비수가 우물 쭈물하며 타구 처리를 서로 미루는 사이 공이 떨어져버렸기 때문.[112] 원래 이 별명의 원조는 사이토 가즈미이다. 하지만, 이 투수는 일찍이 사이버 투수화 되는 바람에.. 잘 던지는 투수에게 유행처럼 이 말이 번졌다. 마쓰자카도 본래 커리어 초반 혹은 고교 시절에는 '헤이세이의 괴물'이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언급되었으나, 지지않는 에이스 혹은 마쓰작가(...)라는 별명도 붙여졌다.[113] 7.2이닝 4피안타 6탈삼진 2볼넷 2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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