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의 문제점 | |||
네덜란드 | 프랑스 | 독일 | 영국 |
스위스 | 이탈리아 | 일본 | 한국 |
미국 | 중국 | 에스파냐 | |
발칸반도 / 동남아시아 / 중동 /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1 | |||
오스만 제국, 튀르키예 | 러시아 | 인도와 인도아대륙 | |
공정성 | 구성 | ||
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
1. 세부적 오류들
- 청나라 건륭제가 신임한 '희대의 간신' 화신은 가경제의 종용으로 음독 자살했다.
- 실제는 가경제가 능지형을 내리려 하였으나, 화신의 며느리인 가경제의 이복누이동생인 고륜화효공주가 간곡히 청하여서 형량을 낮추었다. 화신은 하얀 비단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 서태후는 문맹에 가까웠다.
- 태후가 되고 나서 서태후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래도 한 나라의 황후가 그 정도까지 수준이 낮은 것은 용납되기 어려우며 서태후 정도 되는 여걸이 더더욱 그렇게까지 무식했을 리 없다. 문제는 오탈자가 심하고 악필이라서 독해가 가능한 정도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며 문장력이 훌륭한 편은 아니었다.
- 함풍제는 원래 자신이 죽은 후 8명의 대신으로 구성된 섭정위원회에 국정을 맡길 계획이었지만, 서태후의 설득으로 동치제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서태후와 동태후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 함풍제는 서태후와 동태후를 섭정으로 지명하지 않았고, 섭정위원회도 없었다. 함풍제의 유언은 "8명의 대신을 보정대신으로 삼아 동치제를 보정하고, 서태후와 동태후에겐 2개의 옥새의 관리를 맡긴다"는 것이었다. 학계에선 "태후들과 보정대신들이 상호 견제하며 한 쪽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는 것이 함풍제의 의도였다"고 보는데, 문제는 서태후도, 보정대신들도 권력을 나눠가질 생각이 없었다는 것. 서태후와 동태후는 함풍제의 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정대신이 못 된 것에 불만을 품은 공친왕과 손잡고 보정대신들을 제거하는데, 이것이 신유정변이다.
- 장낙행이 수령이었다고 나왔는데 단지 염군이 일어난 후 수령으로 추대되었을 뿐으로 그의 실제 직업은 소금 밀매업자였다.
- 염군과 관련해서 장락행이 서염군을 이끈 것으로 나와 있는데, 실제로는 장락행은 이미 이 때 죽고 없었고 대신 그 조카인 장종우가 서염군을 이끌었다. 물론 여기서도 장종우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뉘앙스상 장락행이 서염군을 이끌다 죽고 장종우가 이어받았다고 해석되게 만들었다.
- 세포이 항쟁이 영국이 인도인 용병들에게 나누어준 총기 관리용 동물 기름이 폭동의 원인이 되었다.
- 총기 관리용 동물 기름이 아니라 장전할 때 쓰는 화약 탄포 문제 때문이었다. 자세한 것은 세포이 항쟁 문서 참고.다른 것은 몰라도 중학생들도 아는 것을 잘못 알고 있다는 건...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국 정부에서 이를 총신에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되니 세포이들은 분명히 좋아하겠지 생각으로 따로 새로운 머스킷을 지급하고 장전하는 방법을 설명하려다가 화근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화약 탄포가 종이로 만들었는데, 이 때 물에 젖지 말라고 코팅시키는 기름을 바르고 있는 종이 탄피 상태로 장전하려면 탄포 한쪽을 치아로 찢으면서 총구에 탄피에 있던 화약을 넣어야 했다는 점이다.[2] 입을 써야하니 당연히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 광서제의 사망일은 1908년 11월 18일이다.
- 실제 사망일은 1908년 11월 14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서태후도 죽는다. 그런데 정작 만화에서는 서태후가 광서제가 죽고 난 뒤 선통제를 세우고 죽었다고 여러 번 설명하고 있다.
- 중화민국 총통 차오쿤은 일명 기독교 장군으로 불렸다.
- 실제로 기독교 장군이라 불린 것은 펑위샹이었으며, 차오쿤은 독실한 유교도였다. 펑위샹은 민국 시기 서북쪽을 기반으로 거병한 군벌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로 유명하다. 광서/광동 군벌들과 함께 장제스 안티로 유명했던 편이었으며, 본인은 문맹이었던 주제에, 자기들 부하들보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갈구기로 유명했던 사람이다.[3]
- 청교도적 위선에 가득 찬 영국인 운운
- 공정성 문제는 둘째치고 영국 국교는 영국편에서도 설명했듯 청교도 개신교가 아니라 영국국교회라고 하는 성공회이다. 물론 영국에도 청교도들이 공존하긴 했지만, 영국 국교회로서 받는 왕실의 비호를 차치하고, 신도 수만을 따져도 성공회가 훨씬 우위에 있으며 사실상 국교였다. 청교도가 우위에 있었으면, 왕실을 압박해서 잉글랜드 안에서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든가, 국교회(성공회)를 압박해서 청교도와 비슷한 수준으로 교리나 형식을 수정시키지,[4] 목숨을 걸고 메이플라워호를 타서 미국의 건국이라는 엄청난 대역사의 서막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가가 여러 저서에서 종교분쟁과 미국 건국사 등을 논했음에도 청교도 중심 개신교회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동일한 교파로 취급한 것은 오류이다.
- 영국이 차, 비단, 도자기 등의 수입으로 수출에 비해 수입이 많아 청 제국을 통한 은화의 유출이 심각해지자 면직물을 판매해 균형을 맞추려고 한 시도를 보여줄 때 중국이 자신들은 실크비단의 원조격이니 필요 없다고 하는데 애초에 비단과 면직물은 종류가 다르며 비단이 있다고 해서 면직물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대중화된 면직물과는 달리 비단이라는 것 자체가 주로 상류층이나 애용하던 것이지 보편돠된 직물이 아닌만큼 비단이 면직물을 대체할 수 있으니 필요 없다는 것은 틀린 정보이다. 당시 영국이 청에 면직물 판매를 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비단이라는 더 좋은 대체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기후의 영향이 더 컸다. 명나라 시대 이후로 섬과 해안 지대의 세력이 커져 반란의 위험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우려해 해양 무역이 위축되던 그 시대상은 청나라 때까지 이어졌고 당시 청에서 개항하고 있던 항구는 남부의 몇 군데 밖에 없었는데 그 지역들은 기후가 덥거나 온화해서 면직물의 수요 자체가 낮아서 무역의 통로가 되기가 어려웠고 따라서 영국의 면직물이 진출하는 것 역시 어려웠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이루어지는데 당시 기후와 경제의 특성상 청의 개항 지역에서는 면직물이 어필되기가 어려웠고 그 때문에 결국 영국이 아편전쟁까지 일으키게 된 것이지 청에서 더 좋은 대체제가 있어서 면직물 교역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다.
-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는 대머리인데 머리가 있다.
- 분명 <먼나라 이웃나라 한국편>의 장제스는 대머리로 그렸으면서, 여기선 장제스가 머리숱이 많이 나온다. 아예 다른 인물처럼 표현해놓은 심각한 오류이다.[5] 한국편 이후로 퇴화된 작화의 일환으로 보자.
- 푸이의 만주국 황제직위 퇴위 후의 삶을 설명할 때 이런 맨트가 나온다. '중화인민공화국에 포로로 잡혀…' 라고 하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소련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오히려 푸대접을 해주었다.[6] 그리고 소련은 1945년 8월 만주 작전을 수행할 때 푸이의 만주국을 멸망시킨다. 그리고 소련군은 푸이를 포로로 잡았다.
- 주변국들이 중국의 관대한 경제 외교적 처분에 '역시 대국은 다르군요 쎼쎼' 하는 장면이 나오거나, "홍콩인들이 중국 자본의 도움을 받아 경제가 더욱 발전하여 기뻐하고 있다"는 편파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언급들이 많이 나온다. 가령 주변 소국들이 대국 드립을 칠 때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이 막 시작되어 주변 소국들에게 다량의 차관을 지원해줬을 때 쯔음의 반응이며, 중국의 자본이 들어와 홍콩 경제가 번창할때 역시 영국으로부터 반환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의 발언이다. 둘다 현실과 많은 괴리가 있다. 물론 일대일로 같은 일들은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편>이 나오고 시간이 좀 지나서였지만, 이미 중국은 그 전부터 많은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었다. 중국이 그렇게 관대함과 자비로움 등으로 이미지가 좋다면 주변 국가들 대부분이 적국이나 마찬가지이고 전 세계적으로 여러 나라들에 견제와 미움을 받고 있을 리도 없고 위구르나 티베트 등이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도 없을 것이다.[7]
- "장제스가 2.28 사건을 본 뒤 부정부패로 가득 찬 현실을 직시하고 강력한 부정부패 척결 정책을 실시하여 대만의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고 언급했다.
- 장제스가 대만의 경제성장을 이끈 건 맞지만, 2.28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는 식의 서술은 문제가 있다. 당시 중국국민당의 총재는 장제스이며, 대만에 증원군을 파견한 것도 장제스이다. 그런 위치에 있는 자가 해당 사건의 내막을 모를 리는 없으며 알고도 묵인 또는 은폐했을 것이다. 또한 2.28 사건과 부정부패는 연관짓기가 상당히 어려운데, 2.28 사건의 발단은 노점을 단속하던 전매국 직원과 경찰이[8] 노점상[9]을 폭행한 것이 발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정부패보다는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이 더 컸던 것. 이 때문에 현재도 장제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 한국전쟁 휴전회담에서 중국 대표, 북한 대표에 상대로 미국 대표와 한국 대표가 참석했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남한측 대표는 휴전협상 자리에 없었다. 물론 한국 측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당시 남한 정부는 휴전협상에 반대하여 참여하지 않았고, 오로지 미국과 중국, 북한만의 협상이었기에 작중에 표현된 것처럼 한국 대표가 정식으로 미국 대표와 함께 북한 대표, 중국 대표와 마주하여 협상을 진행했다는 표현은 심각한 오류가 있다. 만일 작중에 나타난 것처럼 표현하고 싶었다면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여 참여하지 않았다"고 따로 사실을 표현했어야 하는데, 마치 남북한이 중국, 미국과 함께 4자 회담으로 협정을 맺은 것처럼 잘못 묘사된 면이 많다.
2. 기독교
가톨릭에서도 상제라는 표현을 썼으며, 성령은 성부와는 다른 것이다.
- 지금도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거대한 가마솥에 물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인구 대비 기독교 인구를 살펴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표현이 과장된 측면이 있고, 최근의 중국 기독교 세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견해도 있다. 기독교 국가가 아닌 중국도 현대로 오며 문화개방과 경제성장을 따라 서구 사상과 종교가 더 유입되고, 국가 내부적으로도 기독교인 숫자가 성장하면서, 지금은 공식(삼자)교회와 지하교회 교인 수를 합쳐 기독교 국가가 아닌 국가치고는 상당히 많은 2~3천만 이상, 2010년 퓨 리서치 추정과 같은 자료에 따르면 6~7천만 명 정도의 거대한 신자가 있다. 1억 명이라는 이야기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실제보다 심하게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미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능가하며 필리핀을 제외하고 가장 기독교 인구[10]가 많은 국가이며, 중국공산당 정부 당국의 종교 규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세계 순위권을 다투는 기독교 인구대국으로 급성장한다는 예측이 여기저기서 나올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한국편에서도 여러번 씩이나 설명한다.
다만 비율적 측면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중국 기독교인이 7천만이라 대단하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치면 인도 기독교인도 3천만에 육박한다. 그러나 인도는 항상 기독교의 세력이 매우 적은 (전 인구의 2.3%) 곳으로 분류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중국 기독교인은 백분율로 치자면 여전히 전체의 2% 내지 잘해야 4~5%에 머물며, 특히 한국이나 홍콩, 싱가포르 등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은 거의 전무함을 보면, '거대한 가마솥에 물 한 방울'이라는 것도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가뜩이나 중국은 종교의 자유가 제한된 사회주의 국가라 종교인, 특히 '서구 열강 침략의 산물'인 기독교인들은 모래알 같은 형상으로 서로 흩어져 잘 드러나지도 못한다![11] 게다가 그나마 있는 신도의 비율도 저학력, 저소득, 고령층에 다소 집중되고 청장년층 신도의 비율은 전체 인구 1% 남짓의 괴멸적 비율로 일본과 유사하다.[12] 2014년 무렵부터 심해지고 있는 당국의 압박도 중국 교회에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이전과 같이 성장할 것이라는 전제는 신뢰하기 어렵다.
현재까지는 전체 인구 13억[13] 중에 놓고 본다면 전체 인구 대비 기독교 인구 비율(%)로 따지면 국민의 8~90%는 기독교가 아니므로, 아마 책에서는 그 점을 얘기하고자 문구를 저렇게 표현한 듯 싶다.[14]
3. 중국의 지배
- 중국의 지배는 서양과 달리 무력이 아닌 문화에 의한 교화라는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중국도 그들의 땅에 사는 소수민족들한테 심한 차별을 했으며, 특히 소수민족들이 중국 정부의 차별과 탄압에 분노하여 일어난 반란이 셀 수 없이 많으며, 중국 정부는 이를 항상 잔혹하게 진압했고 오히려 '평화롭게 정벌했다'는 '평정'이라는 말로 왜곡하는 뻔뻔한 짓을 했다. 따라서 중국 역시 서양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 위구르족과 티베트족이 계속 중국 정부에 저항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동북공정만 봐도 그렇지만, 수많은 사서에서 자기네는 무조건 '중화'고 주변 민족은 벌레네 야만인이네 하면서[15] 심지어 그마저도 서로 다르게 불러서, (안타깝게도 참고할 사료가 많지 않은) 주변 국가의 학자들이 자국 역사를 연구하기 곤란하게 만들어 놓았다.
다만 중국이 어쨌든 북적, 남만, 서융, 동이 방위별로 자기 외에는 다 오랑캐라 하면서 자기 땅에 안주하며 역사적으로 중원 본토 이외로 뻗어나간 적이 서양국가들과 비교하면 많지는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중국이나 한국ㆍ일본의 경우를 서양과 비교하여 "서양은 뭐든지 조금만 수틀리면 창칼 들고 쳐들어가 다른 나라 공격/멸망시키고 중국의 경우는 조공 형식의 간접적 지배를 좀 더 선호하는 편이었고, 오랑캐의 천박한 땅이고 중화사상 자기중심주의에 갇혀 외부로 영토를 더 뻗어나갈 생각은 딱히 많이 안 했다"고 한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1권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에도 나오듯이, 중국 입장에서는 정말로 더 나아갈 메리트가 안 보였다.
동쪽?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이 있기는 한데, 만주는 당시엔 그리 매력적인 땅이 아니었고, 한반도는 꼭 난다긴다하는 나라들도 한반도에서 죽을 쑤는 일이 많았으며[16] 일본은 그 만주와 한반도보다도 동쪽이었고 섬나라여서 들어가기도 힘들었다.
서쪽? 현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 역시도 메리트 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유일한 메리트는 실크로드의 하서회랑 지역[17]인데, 송나라 이후 청나라 전까지 차지하지 못했다. 그보다 서쪽인 중앙아시아 지역도 말이 더 필요없다.
남쪽? 그나마 베트남 지역을 1000년간 지배하기는 했지만, 그 기간 동안 베트남 지역을 유배지 외의 다른 용도로 잘 써먹지도 못했고,[18] 독립 후에는 명나라 때 20년 정도 지배한 것 외엔 한반도처럼 죽만 쑤었다. 여타 지역들도 그다지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냅두었는데, 베트남에서 매번 죽을 쑨 이유가 안 맞는 기후 탓에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타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심지어 베트남조차 북부와 중부 일부만 지배하는 수준,
북쪽? 더 말이 필요없다. 몽골 고원은 겨울에 춥고 농사도 안 된다. 뭐 하러 얻겠는가? 더욱이 유목민족이 들끓는 땅인 만큼 진입도 쉽지 않다. 곽거병이나 영락제를 제외하면 한족 국가 출신으로 몽골 고원 깊숙히 들어간 사례가 없고 그나마도 땅 얻으러 간건 아니었다. 주변 땅이 죄다 이 모양이니, 중국 입장으로서는 대외팽창에 별다른 관심을 안 보였던 것이 당연하다.
그럼 바닷길을 열면 되지 않았냐 싶겠지만, 그럴 의지가 부족했다. 중국 내에서 뭐든지 다 해결되는데 뭐 하러 해외진출을 꾀하는가? 원래 목마른 사람이 우물파는 것을, 하다못해 아편전쟁마저 산업 혁명으로 산업과 경제를 키워나가는 영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대량의 은이 유출되어 아편으로 회수하려다 벌어진 것을 감안하면, 19세기 초까지도 중국은 정말 내수만으로도 다 되는 나라였다.
아마 저 책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놓고 얘기한 듯 싶다. 제국주의 서양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좀 덜했다는 얘기라면, 딱히 틀린 것만은 아니다. 물론 침략전쟁을 아예 안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4. 문화 정체성
이것도 역사의 자의적인 해석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는 중국은 5.4 운동과 문화대혁명에서도 보듯 "구습을 타파한다"면서 과거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려 했으며[19], 일본의 메이지 유신도 자세히 보면 서양의 그것을 일본식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게다가 중국이 21세기에 잘 나가고 일본이 주춤하는 이유를, 단순히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간단한 명제로 설명할 수 없다. 인구 14억이 넘는 중국의 잠재력이 발휘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 다만, 10억이 넘는 인구의 국가가 크게 분열되지 않은 건,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때는 인도 수준으로 달랐던 언어도 끝내 통합해낸 걸 보면 그 위력을 알 수 있다.
덤으로 앞서 말한 문화대혁명은 저놈의 문화 정체성에도 악영향을 끼쳤는데, '중국만의 것'을 죄다 박살낸 바람에 당연히 정체성도 상당히 아작냈다. 오죽하면 유교의 발상지라는 나라가 한국의 유교를 참고하지 않으면 연구를 못하는 지경이며, 중국도 저렇게 부실해진 문화에 대해서 자각을 못 하는 건 아니라서 뭔가 해결책이 필요하긴 하나, 워낙 많이 박살내서 복원이 쉽지 않고, 새 문화를 키우자니 빡센 검열이 기다리고 있다. 중국이 타국의 문화들을 자국 문화라고 우기는 것도, 이도저도 안 되는 중국이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남의 문화를 자기 문화라고 우기는 것밖에 없어서다.
5. 소련군
- 소련군이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동아시아 일대에서 승리자가 되어 우쭐하고 있고, 미군이 그걸 보고 "실제로 싸운 건 얼마 되지도 않았다"면서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같은 제2차 세계 대전인 독소전쟁에서 독일 국방군은 소련의 드넓은 영토와 소련군의 인해전술를 상대하기 위해 아르덴 대공세 같은 예외가 아닌 경우 가급적 동부전선에 병력을 더 많이 투입해야 했다. 그 결과 독일군 전사자의 80% 이상이 독소전쟁 전사자였다.
물론 태평양 전쟁에서만 한정하면 미군이 섬 하나 하나를 먹기 위해 고생하던 동안 소련은 패망에 가까워지던 일본을 기습 침공해 적은 손실을 본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본다면 서부 전선에서 소련이 피로 독일군을 막는 동안 연합국은 독일이 점령중이던 프랑스 서부에 상륙해 소련에 비해 적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도 감출 수 없는 진실이니 미국이 소련을 보고 저런 말을 할 처지는 안 된다.
당연히 소련이 렌드리스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고 쿠르스크 전투에서 이탈리아 상륙전으로 인해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기는 하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수천만 명의 인명을 갈아넣어가며 저항하지 않았다면 2차대전이 더 길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애당초 소련이 가장 위험했던 바르바로사 작전 시점에서는 소련 스스로가 독일의 진격을 막아낸 것이었다.[20]
6. 중일전쟁 관련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에 대한 오해
- 1927년 4월에 제1차 국공합작이 끝났다고 써있는데 실제로는 7월까지 진행되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곧바로 국공결렬이 일어난 걸로 착각한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하이 쿠데타로 국공합작을 유지하는 우한 국민정부와 국공합작을 파기한 난징 국민정부로 갈라졌을 뿐이었다. 다만 7월에 종료 선언이 있었다는 각주도 있다.
- '중일전쟁 때 국민당은 후방에서 방관했지만 공산당은 앞장서서 싸웠다.'는 사실 그 반대이다. 하지만 이 부분만은 이원복 교수를 탓하기 힘든 게, 한국 역사학계부터가 국방대학교 기세찬 교수 이전엔 도긴개긴으로 2000년대 이전 중국공산당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한 선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역사 연구가 생업인 학자들이 그 지경이었는데, 아동용 교양만화가에게 대신 책임을 묻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렇다고 중일전쟁에 대해 한국에서 2000년대 이전까지는 계속 거꾸로 알았다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1989년에 출판된 김준엽 고려대학교 총장의 <장정> 또는 그의 다른 저서들을 보면 "국부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집단군급 이상을 동원한 전투만 22회이고, 공산군은 거의 없었고 해방구 확보에만 몰두한다"며 상세하고 정확한 기술해 놓았다. 김준엽 총장은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국부군 유격대에 잠시 있었을 때 공산당 유격대의 공격을 직접 받으며, 당시 상황을 몸소 겪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즉, 정확한 국내 자료는 있었던 것이다. 이원복이 중공 쪽의 엉터리 자료만 본 것일 뿐.
- 하지만 이원복의 만화책은 역사학계의 그 누구보다 대중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논문은 둘째치더라도 2010년대 시중에 각종 국민당 및 장제스의 재평가를 다룬 국내외 서적들이 봇물 터지듯 출판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2018 개정판에서도 별다른 수정을 안 했다는 점[21]에 대해선 면책하긴 어렵다. 아무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중일전쟁에서 가장 앞장서서 싸운 건 중국국민당이고 중국공산당은 옌안에 틀어박혀 세력만 키웠지만, 중일전쟁 이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이후 국민당의 업적은 대륙에서 과소평가됐다. 나무위키의 전신인 리그베다 위키에서도 몇 년 전까진 딱 이런 식으로 서술되었다 대대적으로 갈아엎어졌다.
- 그렇지만 2000년대 이후 대륙에서도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장제스는 중국의 근대화와 항일전쟁을 이끌었던 영웅으로 치켜세워졌고[22], 2010년대 이후 중국에서 나온 중일전쟁 관련 영화에선 중국군은 공산군이 아닌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고 국민당 마크를 철모에 붙인 국민혁명군으로 그려진다. 대표적으로 난징! 난징!과 진링의 13소녀, 그리고 첩혈고성과 800. 이 영화들에서 처절하게 저항하고 싸우는 중국군은 전부 다 국민당군 복장과 제식을 하고 있다. 역사교육에서도 국정제→검정제로 바뀌면서, 역사교과서에 "중일전쟁의 역할에는 국민당 정권이 컸다"는 것은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 오히려 중일전쟁 동안 뒤에서 이득만 노리던 건 공산당으로, 마오쩌둥이 공산당의 힘을 세력 확장에 7할, 2할에 국민당과의 투쟁, 그리고 나머지 1할만 항일에 사용해야 한다고 교시했다(중일전쟁/오해와 편견 참조). 리그베다 위키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 및 중국공산당 측 주장과 동일한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아직도 중일전쟁이나 관동군 항목 등 관련 항목 등을 뒤져보다 보면 <먼나라 이웃나라> 식 기술을 찾아볼 수 있다. 어쨌든 책에서 나오는 만주에서 장쉐량의 역할과 시안 사건, 신4군의 환남사변 등 중일전쟁에 대한 대부분의 내용은 인과관계가 완전히 잘못됐다.
- 보수 우익인 작가의 성향과 반대로 중일전쟁 내내 심각한 공산당 찬양과 장제스/국민혁명군 까성량으로 채웠는데, 중국공산당 측 자료만 뒤져보고 책을 집필한 것 같다. <먼나라 이웃나라> 전체에서 지엽적인 부분은 수많은 비판 사항이 지적되는데, 중일전쟁 파트처럼 큰 규모를 완전히 오해한 것은 매우 드물다. "장제스, 마오쩌둥 모두 이 전쟁이 장기전이 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모두 '장기전이 중국에게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다"고 하면서, "그 결과는 달랐다"고 기술했다. 국민당의 경우 '일본과 싸우느라 기진맥진…' 이라는 대사를 하고 공산당은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으로 공산군 세력 불리는 기회!' 라는 대사를 한다. 그런데 국민당은 일본군에 안 맞서고 도망치고 공산당은 열심히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면, 왜 국민당은 기진맥진했는지에 대한 내용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선 없다. 다만 서술 순서를 보면 기진맥진해졌기 때문에 소극적이 되었다는 논리인 듯하다.
- "만주사변 당시 일본군이 만주를 공격하자, 장제스의 지시로 싸우지 않고 도망갔다"는 중국공산당측의 주장을 충실하게 그려 놓았다.[23] 물론 당시 국민정부의 대일정책이 일본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는 부저항주의에 기반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당시 만주를 다스리고 있던 것은 장제스가 아니라 장쉐량이다. 둘은 직위상으론 장제스가 위였지만 당시 중국의 상황상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는 관계가 아니었으며, 50만 명이라는 엄청난 대병력을 보유하고도 싸우지 않고 도망간 것은 장쉐량 본인의 판단이었다. 즉, 만주는 장쉐량의 땅인데 자기가 싸우고 싶으면 싸우는 거고, 빤스런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지, 수천km 떨어져 난징에 사는 장제스의 뜻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일본과 독단적으로 협상하지 말라"고 하였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지시를 따르는 관계가 아니다. 만화와는 반대로 장쉐량은 "관동군의 도발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동북군은 무력으로 대항하지 말고 모든 무기를 병기고에 보관한 채 스스로 물러날 것이며 일본군에게 최대한 협조하라."라는 지시를 내리며 무저항을 지시하였고, 이에 환멸을 느낀 장쉐량의 수십만 대군은 일본에 항복하여 이후 친일로 변절하였다.[24]
- 중일전쟁 말기 공산군과 국민당군이 각자 일본군에게 자신들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자 일본군은 둘 다 거부하고 최후까지 저항했다는 부분도 있는데, 대부분의 부대는 당시 세력이 더 컸던 국민당군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공산군과는 교전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옌시산과 같은 군벌은 일본군을 포섭해 향후 국공내전에서 공산군과의 전투에 써먹기도 했다. 일본군 장교였던
친일국군 창군원로들의 책을 보면, 전쟁이 끝나자마자 부대는 항복하였으며 조선과 일본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나온다. 만주에서는 관동군은 일본인 조선인 안가리고 시베리아로 끌려 갔지만, 소련군이 보기에 군대 취급도 못 받은 만주군의 조선인들은 그냥 걸어서 조선으로 돌아가 북한군과 한국군 창군의 주력이 된다. 이는 모든 창군 원로들의 자사전에 동일하게 나오는 내용이며, 결사항전 같은 것은 없었다.
7. 그 외
- 폴 포트가 1988년에 죽었다고 나온다.
실제로는 1998년에 사망했다. 숫자 하나, 그것도 10의 자리 숫자인 것을 보면 단순히 오타일 가능성도 있다. - 일본 제국의 대만 침공 당시 청나라는 대응도 못하고 일본에게 밀렸으며, 일본은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이익은커녕 손해만 잔뜩 봤다. 당시 일본의 국력은 해군력을 제외하면 청나라에 한참 밀렸으며, 그 해군력도 조만간 따라잡힐 예정이었다. 그뿐 아니라 대만으로 향한 일본군 병력 대다수가 무더위와 말라리아로 인해 죽어나갔고[25] 청나라에서 이홍장의 지시로 온 대응 병력 때문에 결국 청나라랑 협상해 전비의 10분의 1도 못 건지고[26] 도망치듯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27] - 1981년에 죽은 쑹칭링이 1983년에 죽었다고 나온다.
- 해리 S. 트루먼이 원자폭탄 사용 관련 방송을 11월 30일에 했는데 20일이라고 나온다.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제국의 국기가 나치 독일의 하켄크로이츠로 나온다(…). 사실 작가가 너무 나치와 히틀러에게 매여있는 성향이 강한데 결국 이런 실수까지 한 것으로 보인다.
- 주룽지가 주원장으로부터 19대가 아니라 14대 후손이라고 나온다.
- 제4차 초공작전이 끝나고 제5차 초공작전이 시작된 것을 1933년이 아니라 1932년이라고 나온다.
- 일국양제를 좋은 제도라 치켜세웠는데[28], 의도는 좋았을지 모르나 2021년 현재에는 잘 굴러가지 않는다. 원래 일국양제 원리는 외교나 국방은 중국 정부가 맡고 나머지는 홍콩인들이 알아서 하는 게 정상이고 원리인데[29] 중국이 약속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홍콩의 행정수반을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고 삼권분립을 무시하면서 민주파를 탄압하다 보니, 이에 대한 홍콩인들의 반감이 커서 반중시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30] 오죽하면 대만의 친중 정당인 국민당도, 하나의 중국은 찬성하지만 일국양제는 반대한다. 특히 대만 내에서 "중국이 원하는 일국양제로 통일하자"라고 주장하면 대만인들에게 삿대질당하고 심지어 매타작당할 수 있다.
- 마오쩌둥이 주석에서 물러난 게 1959년 4월이 아니라 11월로 나온다.
- 242페이지에서 마카오가 홍콩 달러를 쓴다고 나온다.
-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게 1978년 12월이 아니라 10월로 나온다.
- 장칭이 마오쩌둥에게 4번째가 아니라 3번째 배우자라고 나온다.
- 화이하이 전역을 요서에 그렸는데 실제로는 산둥성과 장쑤성 사이다.
- 국민정부 공군이 해군보다 더 미약한 것처럼 묘사했는데 실제로는 해군에 비해 나았고, 그걸 떠나서 일본군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었다.
- 대약진운동 당시 영국이 경제 2위라고 나오는데 실제론 소련이 2위였다.
- 중일전쟁에서 일본 공군이 언급되는데 육군 항공대라고 해야 한다.
- 톈진 조약에서 10개가 아니라 11개 항구를 더 개방했다고 나온다.
- 드레퓌스 사건은 청프전쟁이 끝난 뒤에 일어났다.
- 청두시가 함락된 것은 10월이 아니라 국부천대 이후 12월이다.
- 4대 IT기업이 구글과 애플과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로 나오는데 기준을 어떻게 잡는지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인텔은 안 들어간다.
[1] 한나라는 환제, 영제, 소제 시절을 거치며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헌제를 아예 꼭두각시로 만든 동탁에 이어 조조 시기까지 가면 사실상 간판만 남아있는 수준으로 허약해졌다. 이후 조조의 아들이 헌제를 겁박해 제위를 넘겨받으면서 후한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황건적의 난은 영제 시절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후한의 타격은 물론 위에 언급된 동탁이나 조조, 그 외에도 수많은 군벌들이 힘을 키우는 계기를 만든 난세를 연 사건이다. 이 점에서 후한 멸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중 하나는 맞지만, 그 외에도 연이은 암군들의 실정, 환관 세력과 외척, 그 외 관료들 간의 정치싸움 등 많은 요인들이 합쳐져서 난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황건적의 난으로 멸망했다'고 단순화할 것은 절대 아니다.[2] 20세기 이전에 사용했던 구식총들은 그런 식으로 장전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았다.[3] 다만 이는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아니다. 자기가 못 배운 한이 있어서 남들에게 배우라고 갈구는 것을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도 명나라의 천계제는 자기가 어린 시절 못 배워서 문맹인 것에 크나큰 한을 느껴, 대신 이후 숭정제가 되는 동생의 교육에 큰 신경을 썼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유학의 영향으로 배운 사람을 잘 대해주는 분위기였기에 남보고 배우라고 요구하는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조선 세조도 체계적인 교육은 받지 않고 그냥 자기가 독학한 수준이고 왕이 되고 나서는 경연도 폐지했지만 문관 무관 가리지 않고 공부를 요구했다. 특히 세조는 문무겸비를 좋아했는지 문관이라고 무에 소홀하면 나약해빠져져 쓸모가 없고 무관이라고 문에 소홀해지면 금수와 다를게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4] 당시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천주교/장로회/루터회 등 여러 기독교 종파들의 교리와 형식을 다양하게 포용해서, 온 국민이 믿기에 무리 없는 교회를 만들고자 했다.[5] 다만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와 가로세로 세계사 시리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작가가 실제 역사 속 인물을 고증이 잘 된 캐릭터로 표현하는 능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편으로 자주 등장하는 히틀러도 마피아 두목처럼 보이는 곰 같은 이미지로만 그려놓으며 가로세로세계사에서는 나름 실존 인물 고증을 잘 해보려다가 되려 작화 붕괴가 벌어져 비판을 받기도 했다.[6] 심지어 인생 말년인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굴욕도 당했다. 그래도 다른 공산화된 나라의 왕족들이 상당수가 해외망명하여 객지에서 사망한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나… 으려나?[7] 물론 시진핑 집권 시대 이전에 비해선 '상대적으론' 낫긴 했다. 반중정서가 세계적인 유행을 타기 시작한 것도 시진핑 집권기이기 때문. 다만 이 책이 나올 때는 후진타오 재임기이긴 하다.[8] 당시 이러한 기관들은 모조리 외성인이 차지한 상태였다.[9] 본성인이다.[10] 비율 말고 절대 인구 수로만 치면[11] 중국에 거주하는 한 서양인이 쓴 칼럼. 중국 기독교인이 많다니 어쩌니 하지만, 현실에서는 오래 살아도 한두 사람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12] Chinese Family Panel Studies의 2012년 조사 자료[13] 미등록/신고 인구까지 하면 14~15억도 운운하니[14] 출처: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서양과 나머지 세계 - 니얼 피거슨 저. 21세기북스. 2011.[15] 이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자기도 유목민족에서 출발한 주제에 북위는 같은 유목민족인 유연을 연연(蠕蠕)이라 하였는데, 이게 뭔 뜻이냐면 꿈틀댄다는 의미다. 즉 유연을 '벌레처럼 꿈틀대는 놈'들이라고 멸시한 것이다(…) 북위가 이럴진대, 중국 통일왕조들은 오죽할까.[16] 서한과 당나라는 성공했지만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지는 못했다.[17]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등의 나라를 보면 서쪽으로 길쭉하게 나온 부분이 있는데, 거기가 하서회랑이다.[18] 베트남을 지배한 기간 거의 내내 중국은 베트남은 커녕 장강 이남 지역 전체를 제대로 못써먹었다. 한나라 시절부터 확실히 중원 왕조의 땅이었지만 땅에 비해 인구가 적었고 그나마도 한족보다 이민족이 많았으며 한족에게 약한 풍토병도 많아서 개척이 더뎠다. 그나마 한나라 분열 후 생긴 오나라는 장강 이남에 자리잡았고 수십년 후 서진이 삼국을 통일하지만 얼마 못가 영가의 난이 터지며 사마씨 황실과 많은 한족들이 장강 이남으로 도주하면서 장강 이남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육조시대의 마지막 나라인 진나라 멸망 무렵, 장강 이남의 인구는 200만 수준이었다. 반면 북제 멸망 후 북주의 인구는 3000만이 넘었다.[19] 덕분에 중국은 소프트파워가 약하다.[20] 이 점이 중요한데 당시까지 독일군은 정말 빠르게 유럽을 장악했다. 폴란드(1달), 노르웨이(2달) 프랑스(6주) 등 전광석화처럼 주변국을 개박살내는 와중에 독일군은 반년이나 공세를 퍼부었음에도 끝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해서 연합국에게 반격의 여지를 남겨주었다.[21] 거의 7년 만에 낸 최신 전면 개정판이라는 홍보가 무색할 정도로, 중일전쟁 시기는커녕 비교적 최근인 시진핑과 관련된 내용조차 수정된 부분이 전무하여 전면 개정이 아니라 정면 (책 표지) 개정으로 보일 정도.[22] 장제스를 호평하면 그를 상대로 해서 승리한 마오쩌둥의 평가도 같이 올라가게 되니 당연한 과정이다. 이는 항우를 띄워주면 그 항우를 물리친 유방이 자연스레 띄워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23] 마오쩌둥 등 공산당 간부들의 주장을 아무런 검증없이 에드가 스노우가 언론보도를 한 결과, 오늘 날까지 많은 대중들에게 정설처럼 각인되어있다.[24] 사실 이전 소련과의 분쟁 등에서 장쉐량과 알력이 있던 원로들 휘하 부대를 소모성 총알받이를 내세우는 등의 행위로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부 군대는 장쉐량을 따라 내려와 이후 시안사건을 일으킨다.[25] 파병한 병력이 3천 500~600명 언저리였는데, 말라리아+전투중 전사자가 600명 이상이다. 참고로 현대전에서 그 정도면 사실상 전멸로 보는 수치다.[26] 대만 침공에 일본이 쓴 전비가 800만 엔 정도였는데,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꼴랑 70만 엔(…), 그마저도 배상금의 명목이 아니라 일본군이 지어둔 건물 매입 명목이었다.[27] 이원복 교수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세계 근현대사를 다룰 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무렵 일본 제국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말기의 청나라 제국을 비롯한 중국 등 침탈을 당한 국가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성향이 있다. 당시 청은 비록 망해가고 있는 국가이기는 했으나 아시아 지역에서의 패권을 장악한 과거에 비해 빛이 많이 바랬을 뿐이지, 그래도 대제국인만큼 유럽 국가들과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에 그다지 밀리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은 중국을 개무시할 정도로 그렇게 압도적인 강국이 결코 아니었다. 작중에서도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강대국을 쉽게 박살낸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여러 번 보이는데, 당장 러일전쟁만 해도 일본은 간신히 이겼고, 피해가 너무 커서 일본이 압승한 전쟁이 아니었고 오히려 간신히 이긴 전쟁에 가까웠으며 그나마도 영국이 돕지 않았으면 패전이 거의 확실한 전쟁이었다. 단 일본이 1930년대 말부터 아시아에서는 독보적인 강대국에 가까웠던 것은 분명한데, 아무래도 저자가 1946년생으로 일제강점기 직후에 태어난 한국인인만큼 일제가 무시무시하고 어마어마한 강국이라는 인식이 남은 상황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28] 2018년에 나온 전면개정판도 마찬가지.[29] 역사 속에서 비슷한 사례를 꼽자면 영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관계로 꼽을 수 있다. 이들도 자치령 시절에는 초기에는 내정자치권만 가진 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완전한 독립이 굉장히 늦어서, 캐나다는 무려 1980년대에 되어서야 영국과의 입법권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심지어 저 3개 나라는 아직도 명목상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원수로 받든다.[30] 이는 중국은 '일국'을 홍콩은 '양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