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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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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1. 세부적 오류들2. 기독교3. 중국의 지배4. 문화 정체성5. 소련군6. 중일전쟁 관련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에 대한 오해7. 그 외

1. 세부적 오류들

2. 기독교

3. 중국의 지배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할 수 있겠다. 우선 고대 로마 제국한 제국부터 동서양 가리지 않고 모든 제국들은 자국 문화를 주변 국가에 퍼트려 강제로 교화시키려 했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라서 고조선이나 고구려, 베트남, 기타 북방 유목민족들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도 가리지 않았다. 한국사 책만 봐도 중국의 반도침공 사례가 수도 없이 나온다.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중국도 그들의 땅에 사는 소수민족들한테 심한 차별을 했으며, 특히 소수민족들이 중국 정부의 차별과 탄압에 분노하여 일어난 반란이 셀 수 없이 많으며, 중국 정부는 이를 항상 잔혹하게 진압했고 오히려 '평화롭게 정벌했다'는 '평정'이라는 말로 왜곡하는 뻔뻔한 짓을 했다. 따라서 중국 역시 서양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라, 위구르족티베트족이 계속 중국 정부에 저항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장 동북공정만 봐도 그렇지만, 수많은 사서에서 자기네는 무조건 '중화'고 주변 민족은 벌레네 야만인이네 하면서[15] 심지어 그마저도 서로 다르게 불러서, (안타깝게도 참고할 사료가 많지 않은) 주변 국가의 학자들이 자국 역사를 연구하기 곤란하게 만들어 놓았다.

다만 중국이 어쨌든 북적, 남만, 서융, 동이 방위별로 자기 외에는 다 오랑캐라 하면서 자기 땅에 안주하며 역사적으로 중원 본토 이외로 뻗어나간 적이 서양국가들과 비교하면 많지는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중국이나 한국일본의 경우를 서양과 비교하여 "서양은 뭐든지 조금만 수틀리면 창칼 들고 쳐들어가 다른 나라 공격/멸망시키고 중국의 경우는 조공 형식의 간접적 지배를 좀 더 선호하는 편이었고, 오랑캐의 천박한 땅이고 중화사상 자기중심주의에 갇혀 외부로 영토를 더 뻗어나갈 생각은 딱히 많이 안 했다"고 한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1권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에도 나오듯이, 중국 입장에서는 정말로 더 나아갈 메리트가 안 보였다.

동쪽? 만주한반도 그리고 일본이 있기는 한데, 만주는 당시엔 그리 매력적인 땅이 아니었고, 한반도는 꼭 난다긴다하는 나라들도 한반도에서 죽을 쑤는 일이 많았으며[16] 일본은 그 만주와 한반도보다도 동쪽이었고 섬나라였다.

서쪽? 현 티베트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 역시도 메리트 적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유일한 메리트는 실크로드의 하서회랑 지역[17]인데, 송나라 이후 청나라 전까지 차지하지 못했다. 그보다 서쪽인 중앙아시아 지역도 말이 더 필요없다.

남쪽? 그나마 베트남 지역을 1000년간 지배하기는 했지만, 그 기간 동안 베트남 지역을 유배지 외의 다른 용도로 잘 써먹지도 못했고,[18] 독립 후에는 명나라 때 20년 정도 지배한 것 외엔 한반도처럼 죽만 쑤었다. 여타 지역들도 그다지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냅두었는데, 베트남에서 매번 죽을 쑨 이유가 안 맞는 기후 탓에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타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비슷하게 느꼈을 것이다. 심지어 베트남조차 북부와 중부 일부만 지배하는 수준,

북쪽? 더 말이 필요없다. 몽골 고원은 겨울에 춥고 농사도 안 된다. 뭐 하러 얻겠는가? 더욱이 유목민족이 들끓는 땅인 만큼 진입도 쉽지 않다. 곽거병이나 영락제를 제외하면 한족 국가 출신으로 몽골 고원 깊숙히 들어간 사례가 없고 그나마도 땅 얻으러 간건 아니었다. 주변 땅이 죄다 이 모양이니, 중국 입장으로서는 대외팽창에 별다른 관심을 안 보였던 것이 당연하다.

그럼 바닷길을 열면 되지 않았냐 싶겠지만, 그럴 의지가 부족했다. 중국 내에서 뭐든지 다 해결되는데 뭐 하러 해외진출을 꾀하는가? 원래 목마른 사람이 우물파는 것을, 하다못해 아편전쟁마저 산업 혁명으로 산업과 경제를 키워나가는 영국청나라를 상대로 대량의 이 유출되어 아편으로 회수하려다 벌어진 것을 감안하면, 19세기 초까지도 중국은 정말 내수만으로도 다 되는 나라였다.

아마 저 책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놓고 얘기한 듯 싶다. 제국주의 서양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좀 덜했다는 얘기라면, 딱히 틀린 것만은 아니다. 물론 침략전쟁을 아예 안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4. 문화 정체성

이것도 역사의 자의적인 해석이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는 중국은 5.4 운동문화대혁명에서도 보듯 "구습을 타파한다"면서 과거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려 했으며[19], 일본의 메이지 유신도 자세히 보면 서양의 그것을 일본식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이 21세기에 잘 나가고 일본이 주춤하는 이유를, 단순히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간단한 명제로 설명할 수 없다. 인구 14억이 넘는 중국의 잠재력이 발휘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 다만, 10억이 넘는 인구의 국가가 크게 분열되지 않은 건, 자신들이 중국인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때는 인도 수준으로 달랐던 언어도 끝내 통합해낸 걸 보면 그 위력을 알 수 있다.

덤으로 앞서 말한 문화대혁명은 저놈의 문화 정체성에도 악영향을 끼쳤는데, '중국만의 것'을 죄다 박살낸 바람에 당연히 정체성도 상당히 아작냈다. 오죽하면 유교의 발상지라는 나라가 한국의 유교를 참고하지 않으면 연구를 못하는 지경이며, 중국도 저렇게 부실해진 문화에 대해서 자각을 못 하는 건 아니라서 뭔가 해결책이 필요하긴 하나, 워낙 많이 박살내서 복원이 쉽지 않고, 새 문화를 키우자니 빡센 검열이 기다리고 있다. 중국이 타국의 문화들을 자국 문화라고 우기는 것도, 이도저도 안 되는 중국이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남의 문화를 자기 문화라고 우기는 것밖에 없어서다.

5. 소련군


그러나 같은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에서 독일 국방군은 소련의 드넓은 영토와 소련군의 인해전술를 상대하기 위해 아르덴 대공세 같은 예외가 아닌 경우 가급적 동부전선에 병력을 더 많이 투입해야 했다. 그 결과 독일군 전사자의 80% 이상이 독소전쟁 전사자였다.

물론 태평양 전쟁에서만 한정하면 미군이 섬 하나 하나를 먹기 위해 고생하던 동안 소련은 패망에 가까워지던 일본을 기습 침공해 적은 손실을 본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본다면 서부 전선에서 소련이 피로 독일군을 막는 동안 연합국은 독일이 점령중이던 프랑스 서부에 상륙해 소련에 비해 적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도 감출 수 없는 진실이니 미국이 소련을 보고 저런 말을 할 처지는 안 된다.

당연히 소련이 렌드리스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고 쿠르스크 전투에서 이탈리아 상륙전으로 인해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기는 하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수천만 명의 인명을 갈아넣어가며 저항하지 않았다면 2차대전이 더 길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애당초 소련이 가장 위험했던 바르바로사 작전 시점에서는 소련 스스로가 독일의 진격을 막아낸 것이었다.[20]

6. 중일전쟁 관련 중국국민당중국공산당에 대한 오해

7.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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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나라는 환제, 영제, 소제 시절을 거치며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면서 헌제를 아예 꼭두각시로 만든 동탁에 이어 조조 시기까지 가면 사실상 간판만 남아있는 수준으로 허약해졌다. 이후 조조의 아들이 헌제를 겁박해 제위를 넘겨받으면서 후한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황건적의 난은 영제 시절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후한의 타격은 물론 위에 언급된 동탁이나 조조, 그 외에도 수많은 군벌들이 힘을 키우는 계기를 만든 난세를 연 사건이다. 이 점에서 후한 멸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중 하나는 맞지만, 그 외에도 연이은 암군들의 실정, 환관 세력과 외척, 그 외 관료들 간의 정치싸움 등 많은 요인들이 합쳐져서 난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황건적의 난으로 멸망했다'고 단순화할 것은 절대 아니다.[2] 20세기 이전에 사용했던 구식총들은 그런 식으로 장전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았다.[3] 다만 이는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아니다. 자기가 못 배운 한이 있어서 남들에게 배우라고 갈구는 것을 수도 있으니까. 실제로도 명나라천계제는 자기가 어린 시절 못 배워서 문맹인 것에 크나큰 한을 느껴, 대신 이후 숭정제가 되는 동생의 교육에 큰 신경을 썼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유학의 영향으로 배운 사람을 잘 대해주는 분위기였기에 남보고 배우라고 요구하는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조선 세조도 체계적인 교육은 받지 않고 그냥 자기가 독학한 수준이고 왕이 되고 나서는 경연도 폐지했지만 문관 무관 가리지 않고 공부를 요구했다. 특히 세조는 문무겸비를 좋아했는지 문관이라고 무에 소홀하면 나약해빠져져 쓸모가 없고 무관이라고 문에 소홀해지면 금수와 다를게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4] 당시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천주교/장로회/루터회 등 여러 기독교 종파들의 교리와 형식을 다양하게 포용해서, 온 국민이 믿기에 무리 없는 교회를 만들고자 했다.[5] 다만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와 가로세로 세계사 시리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작가가 실제 역사 속 인물을 고증이 잘 된 캐릭터로 표현하는 능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편으로 자주 등장하는 히틀러도 마피아 두목처럼 보이는 곰 같은 이미지로만 그려놓으며 가로세로세계사에서는 나름 실존 인물 고증을 잘 해보려다가 되려 작화 붕괴가 벌어져 비판을 받기도 했다.[6] 심지어 인생 말년인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굴욕도 당했다. 그래도 다른 공산화된 나라의 왕족들이 상당수가 해외망명하여 객지에서 사망한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나… 으려나?[7] 물론 시진핑 집권 시대 이전에 비해선 '상대적으론' 낫긴 했다. 반중정서가 세계적인 유행을 타기 시작한 것도 시진핑 집권기이기 때문. 다만 이 책이 나올 때는 후진타오 재임기이긴 하다.[8] 당시 이러한 기관들은 모조리 외성인이 차지한 상태였다.[9] 본성인이다.[10] 비율 말고 절대 인구 수로만 치면[11] 중국에 거주하는 한 서양인이 쓴 칼럼. 중국 기독교인이 많다니 어쩌니 하지만, 현실에서는 오래 살아도 한두 사람 보기 힘들다는 이야기.[12] Chinese Family Panel Studies의 2012년 조사 자료[13] 미등록/신고 인구까지 하면 14~15억도 운운하니[14] 출처: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서양과 나머지 세계 - 니얼 피거슨 저. 21세기북스. 2011.[15] 이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자기도 유목민족에서 출발한 주제에 북위는 같은 유목민족인 유연을 연연(蠕蠕)이라 하였는데, 이게 뭔 뜻이냐면 꿈틀댄다는 의미다. 즉 유연을 '벌레처럼 꿈틀대는 놈'들이라고 멸시한 것이다(…) 북위가 이럴진대, 중국 통일왕조들은 오죽할까.[16] 서한과 당나라는 성공했지만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지는 못했다.[17]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등의 나라를 보면 서쪽으로 길쭉하게 나온 부분이 있는데, 거기가 하서회랑이다.[18] 베트남을 지배한 기간 거의 내내 중국은 베트남은 커녕 장강 이남 지역 전체를 제대로 못써먹었다. 한나라 시절부터 확실히 중원 왕조의 땅이었지만 땅에 비해 인구가 적었고 그나마도 한족보다 이민족이 많았으며 한족에게 약한 풍토병도 많아서 개척이 더뎠다. 그나마 한나라 분열 후 생긴 오나라는 장강 이남에 자리잡았고 수십년 후 서진이 삼국을 통일하지만 얼마 못가 영가의 난이 터지며 사마씨 황실과 많은 한족들이 장강 이남으로 도주하면서 장강 이남 개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육조시대의 마지막 나라인 진나라 멸망 무렵, 장강 이남의 인구는 200만 수준이었다. 반면 북제 멸망 후 북주의 인구는 3000만이 넘었다.[19] 덕분에 중국은 소프트파워가 약하다.[20] 이 점이 중요한데 당시까지 독일군은 정말 빠르게 유럽을 장악했다. 폴란드(1달), 노르웨이(2달) 프랑스(6주) 등 전광석화처럼 주변국을 개박살내는 와중에 독일군은 반년이나 공세를 퍼부었음에도 끝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 못해서 연합국에게 반격의 여지를 남겨주었다.[21] 거의 7년 만에 낸 최신 전면 개정판이라는 홍보가 무색할 정도로, 중일전쟁 시기는커녕 비교적 최근인 시진핑과 관련된 내용조차 수정된 부분이 전무하여 전면 개정이 아니라 정면 (책 표지) 개정으로 보일 정도.[22] 장제스를 호평하면 그를 상대로 해서 승리한 마오쩌둥의 평가도 같이 올라가게 되니 당연한 과정이다. 이는 항우를 띄워주면 그 항우를 물리친 유방이 자연스레 띄워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23] 마오쩌둥 등 공산당 간부들의 주장을 아무런 검증없이 에드가 스노우가 언론보도를 한 결과, 오늘 날까지 많은 대중들에게 정설처럼 각인되어있다.[24] 사실 이전 소련과의 분쟁 등에서 장쉐량과 알력이 있던 원로들 휘하 부대를 소모성 총알받이를 내세우는 등의 행위로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부 군대는 장쉐량을 따라 내려와 이후 시안사건을 일으킨다.[25] 파병한 병력이 3천 500~600명 언저리였는데, 말라리아+전투중 전사자가 600명 이상이다. 참고로 현대전에서 그 정도면 사실상 전멸로 보는 수치다.[26] 대만 침공에 일본이 쓴 전비가 800만 엔 정도였는데, 청나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꼴랑 70만 엔(…), 그마저도 배상금의 명목이 아니라 일본군이 지어둔 건물 매입 명목이었다.[27] 이원복 교수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세계 근현대사를 다룰 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무렵 일본 제국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말기의 청나라 제국을 비롯한 중국 등 침탈을 당한 국가들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성향이 있다. 당시 청은 비록 망해가고 있는 국가이기는 했으나 아시아 지역에서의 패권을 장악한 과거에 비해 빛이 많이 바랬을 뿐이지, 그래도 대제국인만큼 유럽 국가들과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에 그다지 밀리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은 중국을 개무시할 정도로 그렇게 압도적인 강국이 결코 아니었다. 작중에서도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강대국을 쉽게 박살낸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여러 번 보이는데, 당장 러일전쟁만 해도 일본은 간신히 이겼고, 피해가 너무 커서 일본이 압승한 전쟁이 아니었고 오히려 간신히 이긴 전쟁에 가까웠으며 그나마도 영국이 돕지 않았으면 패전이 거의 확실한 전쟁이었다. 단 일본이 1930년대 말부터 아시아에서는 독보적인 강대국에 가까웠던 것은 분명한데, 아무래도 저자가 1946년생으로 일제강점기 직후에 태어난 한국인인만큼 일제가 무시무시하고 어마어마한 강국이라는 인식이 남은 상황의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28] 2018년에 나온 전면개정판도 마찬가지.[29] 역사 속에서 비슷한 사례를 꼽자면 영국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관계로 꼽을 수 있다. 이들도 자치령 시절에는 초기에는 내정자치권만 가진 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완전한 독립이 굉장히 늦어서, 캐나다는 무려 1980년대에 되어서야 영국과의 입법권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심지어 저 3개 나라는 아직도 명목상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원수로 받든다.[30] 이는 중국은 '일국'을 홍콩은 '양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