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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02:20:43

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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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1. 그림체2. 역사
2.1. 고대2.2. 중세2.3. 근세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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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판 - (03)
전면개정판 - (12)
업그레이드판 - (18)

1. 그림체

그림체가 앞에 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의 차이를 설명하는 파트를 제외하고 전부 옛날 그림체를 그대로 썼다. 앞에 있는 파트를 제외하고 그림체가 바뀐 게 없다.

2. 역사

2.1. 고대

2.2. 중세

2.3. 근세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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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나마 노르망디라도 물려받을 수 있던건 윌리엄 1세가 죽기 직전에 노르망디를 물려주겠다고 유언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즉 저 유언 없었으면 정말 백수 신세.[2] 그리고 노르망디가 딱히 나쁜 땅만은 아니었다. 일단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 자리를 가지긴 했지만 당시 관점에서 잉글랜드보다는 프랑스가 더 가치가 있었다. 윌리엄도 잉글랜드는 정복 후 안정시킨 뒤 프랑스 내에서 영토를 넓힐려고 했다. 애초에 잉글랜드의 왕이라지만 그의 무덤은 프랑스에 있기도 하고.[3] 이런 식으로 결혼하더라도 자기쪽 영지에 대한 권리가 소멸하지 않는건 계속 이어져서 후일 15세기 말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경우에도 페르난도 2세가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이사벨 1세의 나라인 카스티야가 더 대국이었으며 카스티야에 대한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기에 페르난도 2세는 눌려 살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는 너무 단순한 논리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 당시에는 국가같은 것도 결혼에 따라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고 영지 또한 결국 일종의 지참금이었다. 대게 지참금의 권리는 각자 나눠져 있음을 감안하면 결국 남편이 아내 영지에 이래라 저래라 못하고 그 반대도 못하는건 당연하다.[4] 이중 청년왕 헨리의 경우에는 권력문제도 있었다. 헨리 2세는 자신의 아들 헨리를 공동왕으로 앉혔지만 모든 권력을 자기가 독점을 해서 아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그나마 제맘대로 할 수 있던게 마상창시합인데 여기에 드는 돈이 많다보니 문제가 생겼고 여기에 이런저런 불만이 생겨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진압당함-어찌저찌 용서받음-다시 반란이라는 코스를 밟아버린다. 청년왕 헨리는 두 번째 반란 도중에 사망해버리지만 이런 식으로 아들들의 반란에 시달리던 헨리 2세는 유일하게 반란에 가담 안 한 존을 총애하게 되었지만...응 아니야 참고로 그래도 헨리 2세가 죽을 때 혼자는 아니었는데 사생아인 제프리와 윌리엄 마셜이라는 부하가 있었다.[5] 자식들을 너무 찾아보지 않았다. 오죽하면 켄터베리 대주교는 그런 헨리 2세에게 "아무리 비정한 부모라도 폐하보단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식들을 자주 챙겨볼 것을 권했다.[6] 다만 이 과정에서 자행한 악행이 그에게 큰 타격을 주긴 했다.[7] 거기다가 이 인간들은 대를 이어 그 짓을 해서 아쟁쿠르 전투 등 이후의 전투에서도 같은 삽질만 반복했다.[8] 정황상 에드워드 4세로 보인다.[9] 랭커스터, 요크, 플랜테저넷의 마지막 공통 조상은 에드워드 3세.[10] 당시 왕이었던 헨리 6세의 할아버지였던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몰아냈다.[11] 동아시아와는 달리 유럽은 엄청나게 많은 가문들이 각각 오등작 혹은 왕이나 황제 가문을 차지하고 있었고 혈연으로 얽혀있거나 왕조의 방계혈통인지라 그들과 혈연관계가 있고 힘까지 있으면 "내가 XX 왕국의 OO 왕조의 후손인데 그 XX 왕국의 왕 자리 내가 가져야 겠어, 꼬우면 힘으로 해보든가" 라고 나서는게 얼마든지 가능했다(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1; 그 XX 왕국의 왕조가 단절 위기인가?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끼어들 여지는 있는가? 2: 단절 위기라도 자신이 현 왕조와 혈연이 얼마나 가까운가? 1이 충족되지 않으면 아예 주장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고 2가 충족되지 못하면 더 가까운 순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밀리게 된다. 심지어 나름의 명분도 있어야 한다.). 즉 중세 유럽은 속된말로 반역 안 하는 신하가 바보 되는 시대. 단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는 예외, 이쪽은 선거군주제라서 힘이 아니라 선제후들의 선택이 중요했다(그런 이유로 잉글랜드 왕 헨리 7세와 헨리 8세가, 프랑스왕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에 도전 혹은 후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하다못해 잉글랜드도 프랑스에게 프랑스 왕 자리 내놓으라고 전쟁을 일으켰지 않았던가.).[12] 이것도 있고 책에서 나온대로 아들 문제도 있었다.[13] 다행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되어 성공회는 개신교와 달리 교황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고 표현하기는 했다.[14] 다만 해임당한 후 재빠르게 약탈한 보물을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쳐 신임을 얻었다. 그도 그럴게 헨리 8세때 국고 지출이 많았던 바람에 잉글랜드의 재정상태가 영 좋지 못했는데 드레이크가 바친 보물 덕분에 재정이 좀 채워졌다.[15] 뭐, 바로 다음 컷에 남성 귀족이 "떽! 짐더러 그런 저질 음식을 먹으란 말이냐?"라고 말하긴 한다만... 복장을 보면 현대의 양복이며 이원복의 대사도 "요즘 시대엔 보기 어려운 정말 옛날 얘기지...."이다. 오히려 현대의 왕족~귀족이라면 좋아할지도 모르는 일이다.[16] 그럴 수 밖에 없는게 평민들의 감자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나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해석하다보니 감자가 악마의 식물이라느니 그게 아니더라도 가축들이나 먹는 것이라느니 하며 질색했다. 오죽하면 프로이센의 경우 아예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감자를 하루에 한 번 이상 먹고 꼼수까지 부려가며 전파시켰다.[17] 무려 메리 여왕과 마찬가지로 스튜어트 왕실 혈통에 메리 스튜어트와는 할머니가 같아서 메리 스튜어트처럼 잉글랜드+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권이 있었다. 단지 메리 여왕보다 순번상으로 밀렸을 뿐이다.[18] 이후에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가 공동 왕으로 즉위하는게 나와 뭐가 문제냐 싶을 수 있는데 후술하겠지만 윌리엄 3세는 제임스 2세의 조카로서 순번상 메리 2세보다 심하게 꿇리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명예혁명의 주역이었다. 단리 경은 혈통은 좋지만 그것 뿐 순번이 가까운 것도 아니고 여왕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기여한 것도 아닌 주제에 무리한 요구를 했으니 메리 여왕이 그를 멀리할만도 했다.[19] 실제로 메리 여왕은 제임스 왕자를 낳은 지 한달도 되지 않아 갓난아기인 제임스 왕자를 버려두고 뱃놀이를 갈 정도로 아이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다. 여기에는 남편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의 관계가 최악의 파탄관계였던 것이 제대로 한몫했다.[20] 정확히는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21] 실제로는 제임스 1세 시기의 난감했던 재정상태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엘리자베스 1세의 탓이 컸다. 책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가 검소한 군주로 묘사되나 반만 맞는 얘기로 엘리자베스 1세는 분명 많은 부분에서 검소하기는 했지만 보석이나 드레스 등에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보석들로 컬렉션까지 만들었는데 교황이 탐냈을 정도. 이 때문에 책에서 제임스 1세를 두고 보석을 좋아하는 군주라고 말했지만 실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해야 맞는 말이다. 이 오해는 영국에서부터 퍼져 있다.물론 엘리자베스 1세 이전이라고 재정상태가 좋은건 아니었는데 헨리 8세가 이것저것 일 벌인다고 돈을 왕창 썼기 때문이다.[22] 하지만 적어도 제임스 1세는 이로 인한 문제는 일으키지 않았는데 예시로 스코틀랜드에 비교적 자주자주 찾아갔고 자신이 어릴 적 자신을 놓고 싸움을 벌이던 귀족들과도 잘 지냈다. 반면 아들인 찰스 1세는 왕이 된지 9년 뒤에야 스코틀랜드를 방문했고 그것도 모자라 스코틀랜드를 폄하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 국교회를 강요했다가 잉글랜드 내전발발을 맞았고 여기서 패배하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가 스코틀랜드에 의해서 잉글랜드로 팔아넘겨진다(...)스코틀랜드의 복수[23] 사실 명군만 아니지 행적을 보면 스튜어트 왕조의 왕들 중 가장 유능하다. 제임스 1세 이전 스튜어트 왕조의 왕들은 대부분 왕이 즉위함 → 암살당함/전사함/쫓겨남 테크를 탔고 로버트 2세와 3세도 각각 말년에 뒷방 노인네 신세/허수아비였다. 즉 스튜어트 왕가가 스코틀랜드의 왕가가 된 이래 처음으로 끝이 좋은 왕이 제임스 1세였다(...) 그만큼 제임스 1세가 정치적으로 유능했다는 얘기다. 명군다운 치적이 안 보인다고 해도 그건 또 갑자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동군연합 군주가 된지라 사실 그 자리를 멀쩡히 보존하고 물려준 것도 대단하다. 즉 후대에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동군연합을 멀쩡하게 물려준 것 그 자체부터가 제임스 1세의 업적이다. 이 책에서도 나오는 크누트 대왕의 동군연합은 결국 크누트 1대로 끝났지만 제임스 1세의 동군연합은 굴곡이 있긴 해도 결국 이어졌다.[24] 메리가 스코틀랜드에서 갈등을 겪고 쫓겨난 이유 중 하나가 가톨릭 교도여서 스코틀랜드인들과 마찰이 많았기 때문이다.[25] 또한 찰스 2세가 크롬웰 목 날리는걸 보고 자기 목도 날리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의원들을 향해 복수는 이걸로 되었으니 그대들은 짐에게 충성이나 하라고 하자 안도하는 장면이 나온다.[26] 윌리엄 3세가 침공했을 때 제임스 2세가 군대를 보내 콩가루로 만들라고 하자 신하가 "군대가 있어야 콩가루건 미숫사루건 만들죠..."라는 대사가 있고, 후자는 다급해진 제임스 2세가 앤 공주를 달래자 앤이 퉁명스럽게 한 대답이다[27] 즉, 윌리엄과 메리는 내외종 사촌지간.[28] 프랑스 등 살리카 법 채택 국가들은 예외[29] 왜 하필 프랑스어냐고 하겠지만 당시에는 유럽 상류층에서는 프랑스어가 공용어이다시피 했다.[30] 반면 제임스 1세는 본디 스코틀랜드 군주였음에도 잉글랜드 왕이 된 후 잉글랜드로 옮겨 살았고 잉글랜드식 통치도 좀 받아들였다.[37] 대신 고향인 스코틀랜드에 자주 방문하기는 했다.[31] 스코틀랜드가 7년동안 흉년을 맞는 등 경제가 위태위태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다리엔 갭을 식민지화하려다가 쫄딱 망한 사건으로 당시 스코틀랜드는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퍼부었음에도(현재 가치로 776억원이나 되는 돈을 퍼부었다.) 실패했는데 실패의 원인은 애초 다리엔 지역은 스페인 땅이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전염병까지 돌았다. 결국 이주민들이 떼몰살을 당해 실패. 애초 다리엔 지역은 지금도 오지로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성공할 리 없는 계획이었겠지만. 결국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가 진 빛 등을 모두 감당해주는 대가로 잉글랜드와의 통합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32] 물론 이런 성품의 여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바로 포르투갈 왕국마리아 2세가 이러한 성품에 부합하는 여왕이었다.[33] 영국은 네 지방이 통합하여 생겼기 때문.[34] 스코틀랜드기가 빠진 버전이다.[35] 미국편 11권에서 "아니, 미국어라고 해야 할까?"라는 대사가 나왔지만 이건 미국의 국제 영향력이 커서 그런듯하다.[36] 실제로 미국인들도 자국어를 잉글리시라고 하지 아메리칸이라고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