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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8:29:42

반자이 돌격/문제점 및 비판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반자이 돌격
1. 개요2. 병력과 보급 문제3. 병과 간 화력지원 전무4. 명령이 불합리해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5. 부족한 기관단총과 특별한 전략도 없는 근접전6. 자돌폭뢰, 대전차총검술7. 맛이 간 교리와 정신 상태8. 화력덕후 미군영연방군, 국민혁명군네덜란드9. 순수한 백병전 능력 비교10. 정신력?
10.1. 미군, 영연방군10.2. 일본군

1. 개요

반자이 돌격의 각종 문제점들과 비판들을 서술하는 문서.

총검이나 기타 무기를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는 전투는 비단 태평양 전쟁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 대전을 비롯한 타 전투들에서도 적지 않게 쓰인 전술이지만 이 문서에서는 일본군의 이러한 행위에 대한 문제점과 비판에 대해서만 서술[1]되었다.

2. 병력과 보급 문제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소련우라돌격은 1, 2제대가 돌파구를 마련한 후에 약점에 집중적으로 전차사단을 투입해 돌파구를 벌리고 종심까지 위협, 격파까지 목표로 하는 체계적이고 현대적인 작전이었다. 즉, 우라돌격은 최대한 많은 병력이 전투력을 보존한 채 적 진지를 타격할 수 있도록 각종 화력지원을 동원하고 보병 위주의 돌격으로 시작해서 침투한 보병들에 의해 방어선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 점차 기계화 비율을 높여가다가 막바지엔 전차사단의 돌격이 이어지는 형태다. 소련군은 기본적으로 완전한 침묵 속에서 기도비닉을 유지한 채 적진에 최대한 접근하여 적 화력을 뒤집어 쓰며 돌격해야 하는 거리를 어떻게든 줄이고자 애썼다.

게다가 대전 초기 개판인 상황에서도 항공기, 곡사포, 전차, 경야포 등 중에서 1개 이상의 지원을 받거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는 양쪽 모두 보병끼리만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나왔다. 아닌 상황에서는 전차나 지상공격기 등의 지원이 오길 기다렸지, 병사들한테 의미없이 나가 죽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는 보급과 충원이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은 지속적인 병력 지원도 화력 지원도 없으면서 단숨에 전원이 시끄럽게 몰려나가 공격하는 방식이다. 게다가 전장도 달랐다. 육지에서 일 단위로 전장에 일단 밀어넣는 식으로 충원되는 소련군과 달리 일본군은 보급과 병력 충원이 달마다 있을까 말까한 수준으로 지원이 적던 섬 전투라서 제때 병력 충원도 못 했다. 병력 충원은 커녕 일반적인 보급로도 끊겨 보급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이었다.

3. 병과 간 화력지원 전무

전투에서 보병에 대해 포병, 공군을 동원해 화력지원을 하는 것은 1차 세계대전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도 초기의 반자이 돌격에는 그나마 개념이 있어서 돌격시 기관총 엄호가 반드시 따랐다. 전술훈련 간 분대 이동시 기관총 사수 등의 엄호 사격을 통해 분대의 생존력을 높이려고 하는 시도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도 그나마 물자보급이 정상적이었던 처음이나 통하던 이야기였다.

태평양 전쟁 중반까지만 가도 넘사벽으로 나오는 미군의 물량에 일본군은 버거워했다. 질적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 데다 화력지원만 빼놓고 봐도 일본군과 미군은 차이가 확연히 났다. 일본군은 우선 중화기가 매우 부족하였으며 공군의 근접 지원도 전무했다. 전격전이라는 이름을 날리던 독일군은 보병의 돌격을 지원하기 위해 기갑부대를 정면배치하였으며 방어측의 대전차 및 중화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정밀한 포격지원과 공군 연략장교를 활용한 근접 항공 지원을 애용했다. 소련은 탱크 데상트로 대표하는 제병합동 전술과 카츄샤 다연장 로켓 등을 활용한 대규모 화망 구축으로 독일군의 방어선을 공략하였다. 미군영국군은 압도적인 공군 전력을 활용하여 근접 항공 지원뿐만 아니라 대규모 융단 폭격으로 독일군의 보급선부터 방어선까지 골고루 박살낸 이후 병력을 투입하였다. 헌데 일본군은 이 중 어느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방어시설물이 건재한 미군의 잘 준비된 방어진지에 돌격하는 형세가 되어 학살당하기 바빴다.

4. 명령이 불합리해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

무능한 지휘관이 계급장만 앞세워서 상명하복으로 밀어붙일 때 발생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같은 추축국독일 국방군도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대판 싸워서 작전을 수정하거나 취소시키는 경우가 있었으며 설령 그 명령이 관철되더라도 임무형지휘를 통해 현장에서 영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재량권으로 요식행위로 좀 하다 말거나 자의적으로 명령을 거부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몇몇 반나치 인사들은 이것을 적극적으로 악용해 훗날 비난을 면하거나 의인이라고 칭찬받기도 했다. 특히나 전쟁이 말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베를린 사령부도 맛이 가기 시작하여 전선에서 야전 지휘관들이 죽자사자 싸우는 동안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측근들은 거짓 보고와 망상, 자기합리화에 근거한 상상 속의 전쟁이나 하면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명령을 쏟아냈기에 명령을 따를 래야 따를 수가 없었다. 완전히 궤멸된 부대를 동원하여 한참 진격 중인 적을 막으라거나 부상자 뿐인 부대에게 역습을 지시하거나 당장 정신없이 전투 중인 장군더러 전방 지휘소를 후퇴시킨 것이 확인되었으니 군사재판에 출두하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독일과는 달리 일본군은 명령 불복종을 애초부터 하기가 힘든 구조였다. 명령을 회피하려면 누군가 총대를 메야 하는데 일본군은 그런 행위를 하면 사실상 취급이 안 좋다. 기무라 마사토미 같은 일부 개념잡힌 일본군 지휘관들은 나의 부대는 기체 고장이라느니 하는 핑계로 명령불복종을 간접적으로나마 하긴 했다. 단, 이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다. 카미카제도 예외적으로 특공 대신 통상공격을 한 부대도 있었다. 일례로 시가 요시오 휘하의 343 해군항공대가 있다. 사실 가미카제는 전쟁을 사무라이 소설로 배운[2] 대본영의 정치군인들과 어차피 남의 얘기에 불과한 육/해군 장교들이나 환장하고 좋아하고 환영했지 일선 항공대 지휘관들은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들을 자살로 몰아넣느라 죽을 맛이었다.

물리적으로 날아가게 생겼으니 억지로라도 복종할 수밖에 없다. 멍청한 윗대가리들 탓에 억울하게 죽어나간 병사들만 불쌍할 정도다. 물론 이런 일본이라도 근대화 시절에는 정말 매우 진보적인 경향이 있었는데 제국주의를 시작하면서 갑자기 보수적인 집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협상국측으로 참여했지만 적극적인 전쟁 참여보단 빈집털이에 집중한 상태로 승전국으로 종전했고 전간기에는 전쟁에서 매우 많은 피해를 본 국가들은 군사적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지만 일본만은 여전히 제1차 세계 대전 수준에 묶여 있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해군은 그나마 경력이 있기 때문인지 타국보다 진보적이였던 항공모함 중심의 해군 교리를 채택했지만 전쟁에 돌입하면서 보수적인 이유로 전함 중심 교리로 순식간에 주도권이 넘어가 버린다. 타지에서 소식이나 무전을 받지 못한 일본군은 항복 명령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끝까지 전투를 지속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동남아시아에서 항복 소식을 하달받지 못해서 1948년 정도까지 여전히 싸우는 중이던 일본군도 있었다.

결국 이 정신나간 지휘 체계는 반자이 돌격에도 적용되었다. 휘하 장병들의 생존률을 결정하는 데는 지휘관의 역량이 지대하다는 건 잘 알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돌격 개념이 전쟁이 가면 갈수록 점점 엽기적으로 바뀌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 중 하나는 장교나 장군들의 교육 과정이 정신교육을 중시하고 전근대적인 공격 일변도 전투교리를 가르치는 등 전혀 제대로 된 게 아니어서였다. 이러한 상황에 전쟁 초에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친 장교들이 전사하거나 해임되거나 은퇴하고 전쟁 중/후반부터는 저따위 엉터리 교리를 몸에 익힌 깜냥도 안 되는 질떨어지는 장교들이 그 공백을 메우게 되면서 전체적인 장교의 질적 저하로까지 이어졌다. 이런 장교들 휘하에 있던 병사들은 자연히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받게 되었고 이게 이어지다 보니 결국엔 총소리만 났다 하면 지금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다같이 반쯤 멘탈붕괴한 상태에서 반자이 돌격을 하게 된다.

반자이 돌격의 효율은 결국 장교의 질적 문제와 연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전투가 상당히 있다. 전쟁 중/후반에도 살아남은 일본군 장교 일부는 반자이 돌격이 비효율적인 전술이라는 걸 알고 사전에 자제 시키거나 기존 방식을 폐기하고 굉장히 효율적으로 쓰기도 했다. 물론 어떤 방식이든 결국 패배하는 다 건 똑같지만 일본군의 전투력이 평소보다 급상승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전투는 이오지마 전투로, 사령관이 직접 반자이 돌격을 전격 금지시켰을 뿐인데 이전과 달리 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결국 비록 전투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이 전투와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미군은 일본 본토 상륙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게 되었고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게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는데 일본 본토 상륙 계획가능한 모든 화력을 쏟아부은 후 집단군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는 걸 기본 전제로 깔았을 정도다.[3]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러한 엄청나게 빡신 규정이 항상 일관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장교끼리 같은 파벌에 속한 경우에는 도리어 지휘 체계가 엉망인 경우가 많았다. 당장 중일전쟁 당시 위관급이나 영관급밖에 안 되는 장교들이 독단적으로 공세를 시전한 예시가 넘쳐난다. 문제는 중일전쟁 자체도 그 분독단적인 공격으로 벌어진 전쟁이라는 거다. 말도 안 되는 부당한 명령에는 항의할 수도 있지만 정당한 명령이라면 복종해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일본군은 정 반대로 실행했다. 정상적인 군대라면 저렇게 상부의 명령도 없이 독단적으로 공세를 감행한 이상 결과가 어찌 되던 간에 결코 중징계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겠지만 당시 일본의 장교진은 같은 파벌에 속한 사람끼리는 저런 막장짓을 하고도 좋게좋게 다 눈감아 줬다.

5. 부족한 기관단총과 특별한 전략도 없는 근접전

현대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1차대전에서는 전차의 등장 전까진 적의 방어선을 무력화하는 방법은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돌격하거나 몰래 최대한 접근한 뒤 일시에 다같이 참호에 뛰어들어가 적을 밀어내는 것 뿐이었다. 좁아터진 참호속에선 백병전은 필수였고 대검, 야삽, 몽둥이, 총검, 손도끼, 아예 참호전을 목적으로 개발된 트렌치 나이프와 같은 냉병기는 유용한 무기였다. 하지만 이 때에도 이미 참호 침투를 전문적으로 훈련받고 권총, 기관단총, 산탄총등의 화기와 다수의 수류탄과 폭약으로 무장한 정예 스톰 트루펜, 참호 돌격병의 돌격병들은 전쟁 초기엔 고작 권총으로 무장했음에도 큰 전과를 거두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때문에 주야를 가리지 않고 저격수들이 서로를 철저히 감시했고 수시로 조명탄을 터트려댔다. 독일은 효과적으로 침투하거나 방어하기 위해 기관단총인 MP18을 개발하고 참호 돌격병인 스톰트루펜을 큰 규모로 운용해 전투양상에 큰 변화를 일으켰고 미군은 독특하게도 타국에선 사거리가 지나치게 짧아 예산낭비로 여겨 잘 쓰지 않는 산탄총을 남북 전쟁 중 참호전에서 유용하게 썼던 경험으로 각종 산탄총, 특히 윈체스터 M1897을 제식으로 채택하여 참호 돌격병들에게 주로 지급했다. 이는 미국의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개척 역사로 인해 예나 지금이나 민간에 풀린 12게이지 산탄총만 걷어도 문제없이 보급할 수 있지 않을까란 말이 나올정로 민간 총기시장의 규모가 크고 산탄총이 인기가 많아 대규모 인프라가 갖춰져 있고 총과 탄 모두 생산성이 좋아 대량으로 싸게 발주하고 빠르게 지급받기 좋기 때문이다. 우천시 신뢰성 문제로 MP18만큼 유용하진 않았으나 미군의 참호 돌격병들이 독일군 참호를 급습하였을 때 독일 병사들이 느낀 공포심과 짐승 잡는데 쓰는 총이란 인식으로 인해 빌헬름 2세가 분노해 우리 병사들이 당신들 사냥감이냐며 산탄총 좀 쓰지 마라며 외교적 항의까지 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물론 미국은 “하이고 포탄 파편이 산탄보다 훨씬 강한데 저 훈족새끼들이 샷건 가지고 지랄을 한다” 는 식으로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현대전에선 백병전이란 말이 무색하게 화기가 주가 되는 양상이 더더욱 심해진다. 보병화기만 보더라도 훨씬 발전된 경기관총과 기관단총 등의 자동화기들이 잔뜩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옛날 식 대규모 돌격을 하면 눈 깜짝할 사이 모조리 쓸려나간다. 이에 따라 근접전에선 서로 총기와 수류탄으로 싸웠으며 백병전에서도 화기 위주로 싸웠으며 총검은 탄을 다쓰거나 급할 때 쓰는 보조 수단이었다. 미군의 2차대전 당시의 교육 영상 중 하나엔 총검만으론 적을 찔러봤자 쓰러진 적이 쏜 총에 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백병전에서도 총이 최우선이니 백병전 돌입 전 탄창부터 채워두라는걸 강조하는 장면이 있다. 냉병기나 총검을 아예 안쓴 건 아니지만 이건 '최후의 수단'이었을 뿐이다.

무기 및 전술 개발은 함께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개발되어야하고 필요한 수만큼 생산과 보급이 되어야 써먹는데 일본은 모든 방면에서 의욕과 능력이 부족해 발전은 커녕 퇴행했다. 이런 저런 지원이 있어봐야 결국 최후에 깃발을 꽂는 건 보병이다. 그럼에도 중화민국마저 자동화기 확보에 열을 올릴동안 일본은 보급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38식 소총과 사용탄만 다른 5발 볼트액션 소총을 만들어 보급하기 바쁜 황당한 짓이나 했지 자동화기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의 주축이 볼트액션 소총이 아닌 기관단총 이였다면 반자이돌격 문서는 180도 달라졌을 만큼 자동화기 비율은 돌격에 엄청난 요소 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당시 일본은 기관단총의 필요성은 인지해 진작에 개발이 시작되긴 했으나 소수에게만 필요한 쓸모없는 무기로 취급해 어떻게 쓸 지, 얼마나 필요할 지는 감을 전혀 못 잡아 부족한 산업 역량과 보급능력을 지녔고 예산이 부족했음에도 군부가 불필요한 요구를 계속 하여 개발이 지지부진하다가 겨우 채택된게 제대로 보급이 불가능할 게 뻔한 100식 기관단총이었다.

거기다 소련군의 PPS-43, 독일군의 MP40, 영국군의 스텐 기관단총, 미군의 M3 기관단총처럼 대량생산을 위한 개선 방법을 찾아내는데도 한참 관심이 없어 대전 말기가 되어서야 수요가 엄청남을 알았지만 후기형을 생산할 땐 이미 전략폭격을 당하기 시작한 후였다.

사실 소련군의 우라돌격이 비슷한 취급을 받을만큼 제병협동과 무식한 충원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식밖에 없었어도, 고평가를 받는 이유 중 하나가 제병협동 같은게 아닌 돌격부대에 갈수록 자동화기 비율이 굉장히 높아졌고 이런 추세에 맞춰 기관단총 전문부대를 편성했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그런 부대를 편성하고 있을때, 일본은 반자이 돌격에 기관단총 대신 착검하고 냅다 "천황 폐하 만세!"하면서 달려들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미군이 중화기를 못 쓸 만큼 달라붙으면 화력차가 좀 줄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돌격으로 화력의 차이를 줄인다'는 개념은 원래 직, 곡사화기의 장거리 지원화력의 차이가 너무나 커 일반적인 교전으로는 답이 안 나오니 바짝 다가가서 소화기로 맞서겠다는 발상이다. 이렇게 코 앞까지 붙은 뒤엔 반자동 소총이나 기관단총이 필요하며 보급할 수만 있으면 산탄총, 권총도 많을 수록 좋다. 그런데 일본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름 찌르는 거리를 늘려 유용하게 써 보겠다고 긴 칼을 단 긴 볼트액션 소총만 바꿔가며 운용하며 소총과 총검에만 목을 매면서 백병전에도 딱히 도움이 안된 짓을 할 동안 미군은 해병대가 보급순위가 밀려 잠시 수동노리쇠 소총을 사용한 걸 제외하면 이 모두를 갖췄다.

다만 일본군이 민간인만도 못한 지휘와 화력 부족과 보급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서 그렇지 이 부분이 해소된 상태면 연합군은 평소보다 피해가 증가했다. 극소수의 야전 지휘관은 총검 따위보단 각종 지원을 적시 적소에 해주기 위한 치밀한 계산과 준비와 임기응변 능력, 매복과 기습, 저격과 폭파를 중요시하며, 고립되더라도 소위 옥쇄를 하며 적을 돕기보단 '이미 곧 패배하고 죽게될건 뻔하지만 그 때까지 적을 하나라도 더 줄인다'를 모범적으로 실천했다. 이들에게 기관단총이 충분히 있었다면 미군이 더욱 엄청난 피해를 봤겠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조건은 볼트액션 소총과 보급루트의 차단 등 엉망이었다.

기관단총 부족 문제는 태평양 전쟁을 다룬 여러 게임들 마저도 그대로 묘사했다간 난이도 또는 진영 간 밸런스 조절이 안 돼 일본군에게 100식 기관단총을 꽤 많이 들려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와 메달 오브 아너 퍼시픽 어설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사람이든 AI든 이렇게 100식을 든 일본군 다수가 뭉쳐 반자이 돌격을 하면 미군 플레이어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여기서 알수 있듯, 게임에서 효과가 높다는 건, 결국 현실에서도 그 곱절로도 가능하다는 의미라서 반자이돌격이 효과를 보려면 기관단총 비율이 최소 80% 이상은 필요했단 의미(...)

6. 자돌폭뢰, 대전차총검술

반자이 돌격의 개량형으로는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자돌폭뢰를 사용한 대전차 돌격술이 있었다. 이게 뭔가 하면 죽창 끝에다 성형작약탄을 묶어 적 전차에 돌격하는 일본군 최고의 대전차 전술이었다. 치하를 위시한 일본의 전차들이 화력과 장갑이 매우 부실해서 대전차 전투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에 이르자 나온 방법이다. 관통력은 꽤 높았기에 셔먼 같은 중형전차들은 어느 정도 관통이 가능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가가기도 전에 미군 전차의 기관총 세례로 대부분이 전멸했고, 미군 전차의 공격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한들 전차 근처의 보병들의 살인적인 화력 앞에 갈려나갔고, 보병까지 피한다고 해도 불랑품이 많아 시원찮은 결과에 그치거나 불발되는 일도 있었다. 즉, 성공만 한다면 적 전차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성공할 확률은 굉장히 낮았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99식 파갑폭뢰를 품에 안고 길바닥에 누워 전차가 그 위를 지나가면 터뜨려 버리는 자폭전술 '복룡' 이 있다. 미군은 이에 맞서 M4 셔먼에 불도저를 달아 자폭하려는 일본군을 그대로 밀어 버려 생매장해 버렸다. 말기에는 1식 투환관이라고 해서 청산가리 가스를 넣은 유리병을 전차의 관측창을 향해 던지는 말도 안 되는 무기를 제식 병기로 채용했다. 만약 상대가 그냥 장갑판에 관측창이랍시고 가느다란 구멍을 뚫어 놓은 BT 전차라면 통하긴 했겠지만 셔먼은 잠망경 형식의 관측창이라 시야를 가릴 수는 있어도 가스가 새어 들어갈 수 없는 구조다. 자매품으로 1식 화학 수류탄이 있으나 이것도 말만 수류탄이지 그냥 청산가리 넣은 병이다.

심지어 무타구치 렌야의 삽질 임팔 작전에선 대전차 발도술도 나온다. 갑자기 일본군 장교가 칼을 들며 뛰어올라 머리를 내밀던 전차장을 죽이고 전차 안에서도 칼을 휘두르려다 조종수가 권총으로 사살한 것이다. 말기에는 그냥 정면에서 칼을 들고 달려들기까지... 물론 미군 전차병들에겐 곧 궤도에 끼일 고깃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7. 맛이 간 교리와 정신 상태

일본군의 작전 교리 교범인 '보병교전'이라는 병서에서는 '기습적인 육박전이 최고' 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건 상기했듯 대부분의 강대국들이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절대적인 진리인 줄 알았다가 11km 전진에 양측합쳐서 사상자 110만와 같은 참극을 겪고 나서 즉각 내다버린 교리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걸 외로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밀고 나갔으며 이 책을 거쳐서 '포로 따위가 되느니 차라리 죽어라'라는 의식을 널리, 강하게 퍼뜨렸다. 이런 정신나간 교리와 심각하게 작용하는 상명하복 지휘체계, 그리고 전쟁 중반부터 시작된 장교의 질적 저하가 콤보로 터지면서 일본군은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교범은 전투 중 낙오되고 보급품도 떨어지고 항복 밖에는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는 '절대 포기하지 말고 이런 방법으로 현 위치를 파악하고 저런 방법으로 가장 가까운 아군 주둔지를 찾아 이동해라.', '부득이하게 포로가 되었다면 이런 방법으로 아군에게 연락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어떻게든 생환시켜서 '전력을 최대한 보전해서 재집결'할 것을 강조하지 '포로가 되기 전에 수류탄을 품어라.'고 가르치진 않는다.

8. 화력덕후 미군영연방군, 국민혁명군네덜란드

미군과 영연방군, 네덜란드군 등의 ABDA 연합군의 무장 상태가 매우 우수해 돌격을 저지하기 쉬웠으며 밀리더라도 일본군에게 엄청난 부수적 피해를 입히며 퇴각했다. 미군과 영연방군은 주무장으로 톰슨 기관단총, 스텐 기관단총, 오웬 기관단총과 반자동 소총 M1 개런드[4] 숙련된 사수라면 빠르게 속사가 가능하고[5] 장탄수도 많은 데다 오랜 기간 그 가치를 입증해온 세기의 명작 볼트액션 소총인 리-엔필드 소총과 M1 카빈[6], M1918 브라우닝, 브렌 경기관총 이 지급되었으며 수류탄은 1인당 두 개[7]씩 지급받았으며 방어진지엔 모든 인원이 나누어 쓸 수 있도록 상자째로 탄박스와 수류탄 및 박격포탄 등의 탄약을 준비해 놓았다.

지원화기도 충실해 M2 브라우닝 중기관총(50구경)과 M1917 브라우닝, 빅커스 수랭식 기관총(30구경, .303 구경), M1919 브라우닝 경기관총이 배치되었으며 박격포도 수와 탄 보급량이 월등했다. 미군답게 산탄총도 상당히 보급되어 근접전과 백병전에서의 효용성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또다시 증명했다. 장군 알렉산더 패치마저 과달카날 전투를 지휘하며 산탄총 한자루로 무장하고 다녔다. 미군과 영연방군은 평균 체격이 좋아 브렌 경기관총이나 빅커스 기관총, M1919 브라우닝, M2 브라우닝 중기관총 같은 경기관총과 중기관총도 근접전에선 유사시 탈거하여 들고 연발로 쏘는 일이 잦았으며 심지어 수랭식 기관총마저 혼자서 들고 쏜 사례도 있다. 따라서 볼트액션 소총이 대다수에 기관총과 기관단총도 별로 없는 일본군은 백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접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장병 개개인의 보조 무기 차이도 비참했다. 보조 무기의 꽃인 권총을 비교해 보면 미군과 영연방군은 신뢰성이 높고 잘 맞는 M1911A1과 M1911A1보다 장탄수가 적을지언정 신뢰성과 설계성이 우수한 중절식 리볼버인 웨블리 리볼버 등으로 무장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고장과 안전 사고로 독일의 루거 P08 권총[8]보다 못한 괴작인 남부 권총으로 싸워야만 했다. 남부 권총은 잘 관리된 총을 모든 조건을 안전하게 통제하는 사격장에서 쏴도 위험한 흉기라는 평을 받는 물건인데 그런 걸 사격장은 고사하고 무척 가혹한 환경인 남태평양의 열대우림에서 제식 권총으로 써야 했던 것이다. 물론 보급 수량과 보급률의 차이는 따질 필요도 없다.

보조 무기 차이는 제식 무기로 끝이 아니었다. 태평양의 미군들 중에는 개인이 가져왔거나 구매한 총기, 그러니까 민간에 총이 많이 풀려 있는 미국인들답게 자기가 개인구매해 사거나, 가족이나 이웃, 친구들이 잘 싸우고 무사히 돌아오라며 선물로 준 민수용 소화기까지 가진 대원들이 상당수 있었다. 대중매체만 봐도 더 퍼시픽에서 유진 슬레지가 아버지에게서 리볼버를, 밴드 오브 브라더스 1화 후반부 강하 준비 중인 미군 병사들 중 하나가 고향 경찰서장에게서 M1917 콜트 리볼버를 택배로 선물 받는 모습이 나온다. 이러한 개인 총기들은 주로 권총이었지만 개중에는 산탄총을 가져온 병사들도 있었으며 드물지만 대구경 엽총 등을 받은 병사도 있었을 수 있다. 반면 일본군은 해봐야 일본도, 그것도 수백년간 가보로 내려온, 즉 전투에 써먹을 수나 있는지가 의심스러운 품질의 것들[9]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어지간한 화력은 버텨내는 전차,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독일 국방군 상대로는 구식이 되었던 떡장갑의 괴물인 마틸다 전차가 있거나 항공 지원, 전함간 포격전, 지원까지 받아가며 가용 화력을 모두 몰빵해 철저하게 우주방어한 경우는 설명할 것도 없다.

9. 순수한 백병전 능력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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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원들이 해맑은 얼굴로 반자이 어택을 따라하며 노는 장면.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제 돌격이 아니라 할 일이 없어 한가한 군인들이 재미삼아 일본군들을 따라하며 놀리는 장면이다. 일단 들고 있는 칼부터가 일본군의 군도가 아니라 미군의 정글도 마체테다. 미군에서 반자이 돌격을 진지한 연구/분석의 대상은커녕 얼마나 웃음과 조리돌림거리로밖에 여기지 않았는지 잘 알 수 있는 역사적 기록물이다.[10]
저 개새끼들에게 진짜 반자이 돌격이 뭔지 한 번 보여주자! 이지 중대, 돌격!
마이크 스트랭크, 이오지마 전투 D+2[11]

설령 양측 다 탄약, 수류탄 없이 오로지 총검으로만 근접전을 벌여도 체력/체격에서 밀려서 그것대로 문제였다. 복싱이나 태권도, 유도, 레슬링 같은 격투 스포츠에서 괜히 체급을 나눠 경기를 치르는 게 아니다. 물론 맨손 격투가 아닌 날붙이를 들고 싸우는 상황에선 체급이라는 게 무의미하며 실제로 이 때문에 검도에서는 체급을 나누진 않지만 군용 무술은 스포츠가 절대로 아니다. 총검 들고 싸우다가도 언제든 엉겨붙어 주먹이나 발로 싸울 확률도 상당하고 다수대 다수로 싸우니 체력, 근력, 체격에서 나오는 차이가 실로 상당했다. 다른 기술들도 중요하지만 힘싸움에서도 밀리면 안 된다. 상대를 밀쳤을 때 휘청이거나 넘어지기만 해도 그대로 군홧발에 밟히거나 다른 병사의 총검에 찔릴 수 있다. 일본군은 미군과 영연방군에 비해 영양 상태도 부실했고 체구도 미군이나 영연방군보다 훨씬 작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평균 신장은 160cm 전후였던 반면 미군과 영연방군은 173cm였다. 숙련도, 전투 의지도 바닥을 기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뼈와 살이 적나라하게 맞부딪히는 백병전에서는 필패할 수밖에 없었다. 각각 빤쓰/훈도시만 입고 주먹질과 발길질로만 싸운다 치면 오히려 영양상태, 체격, 복싱/레슬링/태권도/유도 등 스포츠 보급, 사기, 전술적 유연성 등 모든 것이 더 뛰어난 미군이 일방적으로 이길 법했다(...).

순수하게 총검술만을 겨루는 백병전을 한다고 해도 힘 뿐만 아니라 기술 면에서도 미군과 영연방군이 갑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긴 총검에 의지한 전방 찌르기에만 올인하는 근대 총검술만을 익힌 상태였다. 그러나 근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이 기술은 빽빽하고 철저한 대오를 지키던 전열보병 시절에 달려오는 적 보병이나 기병대에 맞서서 머스킷 총병들이 착검을 하고 창병처럼 격파하던 시절에 맞추어 개발된 총검술이다. 화기의 발달로 병력 밀집도가 훨씬 낮아져 매우 불규칙하고 다양한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각개전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대 전장에서 근대 총검술은 이미 도태된 지 오래였다. 미군은 1차대전 파병 이후부터 일단 참호전에 적절한 각개전투식 총검술, 군 격투술을 도입하려고 노력했으며 혼란스러운 시대상 때문에 소싯적에 주먹질 좀 해 본 자국인들도 많이 입대했다.

군필자라면 육군훈련소 등 기초 군사교육 때 배운 무난하게 만들어진 현대 총검술인 연무형이 기억날 것이다. 복무 기간 단축 등의 영향으로 총검술도 안 가르치는 추세라서 2020년대 이후에 입대한 군필자들은 총검술이 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상식적으로 상대가 찌르기만 한다면 뽀족한 총검 끝을 어떻게든 제끼거나 피해야 한다는 건 이해될 것이다. 연무형과 같은 현대 총검술의 다양한 공격법과 방어법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도입된 것인데, 그럼에도 시대에 뒤떨어진 전방 찌르기 일변도의 근대 총검술을 고집하는 건 오로지 일본군 뿐이었다. 반면 미군은 현대식 총검술 뿐 아니라 간단한 킥복싱과 유술도 특별히 훈련시켜 다양한 근접전 대응 훈련을 받았으니 훨씬 효율적으로 일본군의 찌르기를 받아 넘기며[12] 다양한 방법으로 때려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구 총검술 연무형만 봐도 전방 찌르기 카운터 기술만 7가지나 된다. '비켜 우로 찔러', '우로 돌아 좌제치고 찔러', '비켜 우로 좌베고 때려', '좌제치고 우베고 찔러', '비켜좌로 좌제치고 돌려쳐', '우제치고 좌베고 길게 찔러', '비켜좌로 찔러'. 일본인들은 솔직히 전국시대에도 이 지경이진 않았다. 도리어 백병전을 위한 유술이 발전하고 창칼을 비켜내고 밀어내며 반격하는 기술이 많았는데 혼란스러운 세계대전 말기인 만큼 다 까먹고 정신력만 강조했다. 어차피 며칠 훈련받고 소모품처럼 투입될 예정인 징집병한테 제대로 된 무술을 장기에 걸쳐 가르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기습적인 발도와 흘리는 카운터 공격이 있던 전국시대보다 검술이 후퇴했다. 조총 화력 지원을 매우 중시했던 오다 노부나가가 무덤에서 뛰쳐나와도 될 지경인 셈이었다.

간혹 양산된 싸구려 군도가 아니라 사무라이 명문가 출신의 장군이나 장교가 일본 전국시대부터 쓰던 말 그대로 진짜 전가의 보도를 들고 와서 싸우다 전사하고 그걸 노획한 미군 병사가 나중에 횡재했다는 것을 알고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고가에 팔아치운 사례도 있다. 게다가 미군들이 진지구축을 한다든지 무기가 별로 없는 틈을 타서 반자이 돌격을 했더니만 몸집으로 더 우월한 미군들이 휘두르는 삽자루에 일본도를 가진 일본군이 맞아죽거나 도륙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삽자루나 맨손으로(!) 칼을 막고 군홧발로 사타구니를 발로 차서 그야말로 고자가 되어 아픔에 몸부림치는 일본군이 떨군 일본도로 역습하여 베어죽이고 칼을 전리품으로 챙겨가는 경우도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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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올리언즈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1942년 과달카날 전투에서 해병대 대위 월터 스토퍼 매킬헤니(Walter Stauffer McIlhenny, 1910 ~ 1985)가 일본군 장교가 휘두른 칼에 철모를 맞았으나 적을 사살하고 노획한 전리품이다. 이 사람은 미합중국 해병대 준장으로 예편하였고 그 유명한 타바스코 소스 제조회사 매킬헤니사 오너 가문의 아들로서 나중에 3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과달카날 전투 당시 보급이 너무나도 모자랐고 밥도 맛이 없었던 경험이 남아서 베트남 전쟁 이후 타바스코 소스를 정식 군납품으로 납품하였다. 사진의 군도는 98식 전도에 약식칼집으로 패용고리와 가죽덮개는 망실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육군 토야마 학교에서 내놓은 군도 조법 교범에서도 '철모는 때리지 말라'고 실려 있다.[13] 일본군의 기초 군사 교육이 얼마나 엉뚱하게 진행되었는지를, 그리고 설령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 해도 실전에서 이를 적용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0. 정신력?

전투에서 정신력이 튼튼한 뒷바탕이 되는 건 사실이다. 부상을 입거나 불리한 상황에 빠져도 투지를 잃지 않고 냉철하게 판단을 하는 쪽이 패닉에 빠져서 아무 것도 못 하는 사람보다는 싸워도 이길 확률이 높고 도망치거나 항복하더라도 멀쩡하게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일본군이 그토록 정신력을 찬미한 것도, 생산력이 연합국, 특히 미국보다 불리하다는 걸 알고 내린 결정이니 나름의 일리는 있다.

문제는 그토록 정신력이 우월하다고 부르짖은 일본군의 멘탈이 미군보다도 딱히 나을 게 없었다는 점이다. 딱히 낫지 못한 수준이 아니라 여러 요인을 종합하면 미군 측의 정신력이 훨씬 든든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군 조직의 문화, 보급체계 및 무기체계, 미군 장병들과 일본군 장병들이 살아온 사회, 양측 장병들이 손에 쥔 무기와 함께하는 전우들 등등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미군의 조직문화와 의사결정 유연성, 정글 근접전에서도 유리한 무기체계, 양호한 영양상태와 튼튼한 몸, 이 모든 걸 떠받치는 보급체계 등이 일본군에 비해 얼마나 괜찮았는지는 상기 문단에서도 반복해서 강조했다.

10.1. 미군, 영연방군

당시 10대 후반~20대의 미군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영연방군 병사들은 지옥 같았던 대공황을 어린 나이에 맞닥뜨린 세대였다. 대공황 당시를 살아간 세대는 남녀노소, 심지어 10살 남짓한 어린아이까지 단순히 먹고살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거친 현대 산업사회의 풍파 아래 돈을 벌어 살아남기 위해서' 길거리나 농장, 어선, 하다못해 소매치기 등 어디서든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자유방임주의가 최전성기를 이루던 당대 미국 사회에서는 그저 길거리에 나앉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영화나 소설 등에서 자주 나오는 구두닦이나 "호외요 호외!"를 외치며 신문을 파는 어린이들은 당시 어두운 사회상의 반영이다. 한 마디로 일본군 선전물에 흔히 나오는 "호의호식하고 살던 군기 풀린 귀축영미놈"이란 건 그냥 일본군의 머릿속 상상이었다. 현실은 어릴 적부터 죽을 고비만 수십 번을 넘기고 하루하루 주먹질과 칼빵을 맞아가며 십수 년을 살아남아 온 역전의 용사들이었던 것. 미국의 이 세대를 한국에 대입하면 1990년대 중후반부터 나라 경제를 극한까지 위기로 몰은 IMF를 겪은 세대들 그 이상의 포지션이다.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소위 강한 자들만 살아남아 악과 깡에 수년 간 다듬어진 주먹질 경력이 기본 소양인 세대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밥을 제대로 못 먹다 보니 비록 다른 세대에 비해 체격적 조건은 다소 부실했을지는 몰라도 당시의 미국과 영연방군 청년들은 미국 역사상 최고라고 해도 좋을 만큼 깡다구와 의지가 넘쳐흘렀으며 어릴 적부터 싸움에 익숙했다. 위의 문단에 서술된 기관총을 두 손으로 들고 갈기거나 삽을 들고 일본도를 든 적을 죽이는 등 거짓말 같은 무쌍난무는 체력 조건뿐 아니라 이런 정신적인 배경이 있어서였다. 심지어 유럽 전선으로 간 일본계 미국인 부대도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로 인해 차별받고 수용소에 갇힌 가족들을 생각하며 진정한 미국인이자 미국 사회의 국민으로 인정받겠다는 의지와 깡이 넘쳐흘렀다. 당시 남녀노소, 출신인종 가릴 것 없이 미국인들의 한 민족이라는 국민적 정체성과 정신적 저력은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전쟁을 치르고 더 나아가 종전 뒤의 황금기를 두 손으로 일궈낸 인적 자원의 배경이기도 하다.[14]

미군과 영연방군은 90% 이상이 자원입대자였다. 물론 대공황 때문에 먹고 살기가 힘든 탓도 있었다. 군대로 가면 그래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니까 가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15] 실제로 미군은 예전부터 가진거 없고 배운거 없는 이민자들이 지원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으며 남북 전쟁처럼 짬밥이 서민식보다 풍족해서 입대하는 일도 많았다. 즉, 어떻게 하든 죽을 운명인데 군대를 안가면 없는 일자리만 찾아 헤매 돌다가 불명예스럽게 굶어죽을 판국이지만 군대를 가면 적어도 죽기 전까진 먹을 거는 충분히 먹을 수 있으면서도 살면 좋고 죽어도 명예롭게 죽을 수 있었으니 어느 쪽이 더 이득일지는 안 봐도 비디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진주만이 초토화된 모습을 보며 나라 전체가 "12월 7일을 기억하라! 진주만을 기억하라!"나 "반드시 저 비겁하고 악랄한 노랭이 원숭이 XX 놈들에게 아시아의 우리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다시금 수복하자!!" 며 뿌리깊은 복수심과 분노에 활활 타오를 때는 완전히 달랐다. 과달카날에서는 이것보다 한술 더 떠서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번역]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대놓고 외친 호전미 넘치는 제독도 있었고 국민들은 대환호했다. 덤으로 이 제독이 진주만의 참상을 진주만의 해군 기지 밖에서 가장 먼저 본 제독이기도 한데 이 때 한 말은 "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였다.

대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17] 연예인은 헐리우드 최고의 아이돌이었음에도 위험천만한 폭격기 조종사로 임관한 제임스 스튜어트클라크 게이블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히틀러는 "게이블이 탄 폭격기를 잡으면 훈장이던 상금이던 뭐든지 주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미군 폭격기 승무원들은 25회를 채우면 제대했지만 그 절반도 못 채우고 전사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메이저 리거들도 당시 전쟁에 참여한 수가 340명에 달했으며(팀당 20명 정도 수준) 그 명단에는 테드 윌리엄스, 스탠 뮤지얼, 조 디마지오, 행크 그린버그, 피 위 리즈 등 당대의 스타 선수들이 수두룩했다. 대표적으로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밥 펠러는 라디오에서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입대 신청을 해서 해군 대공포병으로 무려 8개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참고로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기에 징집 대상자가 아니었는데도 자원입대한 것이다.

상류층 자제까지 예외가 아녔는데 대표적으로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조지 H. W. 부시 두 사람 모두 자원입대했으며 안전한 후방이 아니라 최전선에서 구르면서 죽을 위기도 겪었다. 존 F. 케네디는 심각한 호르몬 질환 때문에 이미 한 번 면제 판정을 받았는데도 아버지의 연줄을 사용하여(!) 최전방으로 자원입대하여 어뢰정 PT-109의 정장으로 참여했고 그의 형인 조셉 케네디는 아프로디테 계획에 자원했다가 순직했다. 아버지 부시는 그가 탄 뇌격기가 격추되었는데 운 좋게 낙하산을 타고 해변가에 떨어져 가까운 미군 잠수함에 구조되었지만 나머지 승무원들은 전부 살해당하고 일부는 잡아먹히는 끔찍한 꼴을 당했다. 이렇게 사회 각계각층의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입대했으며 심지어 신체조건 미달로 불합격 판정을 받은 사람도 어떻게든 일본군을 때려잡기 위해 참전하려고 노력했다.

심한 경우 입대 불가 통지를 받은 청년이 낙담해 자살하는 사례까지 있었을 정도다.[18]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 더 퍼시픽을 비롯한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미국 창작물에서 멸치 같은 몸으로 어떻게든 군에 가려고 기를 쓰는 인물이 등장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정말 이런 일이 흔했다. 이 중 오디 머피는 여리고 작은 키로 입대를 거부당해도 기를 써서 체중을 늘리고 문서를 위조해서 입대해 만화같은 전공들을 세우고 각종 훈장은 물론 명예훈장까지 살아서 받았다. 명예훈장은 죽어야 받을 수 있는 훈장이란 인식이 있을 정도인데 이를 살아서 받을 정도면 어지간한 전공으론 택도 없다. To Hell And Back 이란 영화에서 실제 전공이 너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축소해서 묘사했을 정도다. 캡틴 아메리카국뽕처럼 보여도 실제론 당대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했다.

심지어 집총과 폭력 행위 일체를 거부하는 종교를 가졌으면서도 입대하여 비록 집총금지원칙에 따라 살생은 하지 않았으나 대신 부상당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구조작업을 벌여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데스몬드 도스 같은 사례도 있다.[19]

물론 병역비리를 안 저지른 건 아니었으나 병역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은 당연히 전후 평범한 삶이 힘들었다. 다른 사람은 가고 싶어서 난리인데 사고도 아니고 비리로 안 갈 정도면 왕따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더 퍼시픽에서 자원입대가 아닌 징병으로 참전한 해병대원을 모자라는 사람으로 대우하며 마구 갈구는 장면이 나온다.

군에 입대하지 못한 할 뉴하우저는 거의 평생에 걸쳐 '2차대전 투수'라는 비아냥과 저평가에 시달리기도 했다. 물론 수십만의 청년들이 독일, 일본과의 전쟁터에 갈려나가는 상황에 자기 혼자 빠진 병역기피자라면 욕먹어도 싸지만 뉴하우저는 애초에 다른 메이저리거들과 마찬가지로 입대를 여러 번 신청했으나 단지 다른 선수들과 달리 심장병 병력 때문에 미군이 받아주지 않아서 참전하지 못했을 뿐이므로 해당되지 않는다. 즉, 당시 분위기가 좀 심하게 극단적이었다는 증거다.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타자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투수들과 출신 불문 전망이 밝은 젊은 선수들 모두가 입대했다.

즉 '징병으로라도 참전한 사람'이나 '입대를 신청했으나 미군이 오지 말라고 해서 못 갔던 사람'들에 대한 대우도 이랬다. 그러니 병역을 대놓고 기피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 대우가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본의 말 같지도 않은 오판과 달리 이렇게 극단적인 분위기가 형성될 정도로 미국인들은 겁은 커녕 분노로 차올랐으며 전의가 충만했다. 전쟁이 진행되며 사상자가 누적되고 전쟁의 참상이 어느 정도 알려지면서부터는 입대 경쟁률도 좀 낮아졌다. 이때부터는 최소한 노골적인 병역기피자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비난은 상대적으론 덜했으나 실질적으론 의미가 없었고 무자비했다. 전과자라 징집 대상이 아니고 본인이 군입대를 원치 않았음에도 병력이 부족하다며 징집됐다가 탈영하여 사형을 당한 에디 슬로빅의 예도 있다.

10.2. 일본군

당시 대학생은 고등교육을 받은 중요한 인재였으므로 타 국가에서는 징병을 연기해 주거나 설혹 징병하더라도 높은 교육 수준이 필수가 아닌 소총병으로 배치하기보단 각자의 능력을 살려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을 받도록 해서 장교로 임관시키거나, 후방 기행부대로 보내 행정병으로 배치하거나, 기술을 가르치거나 활용하게 해서 특기병으로 쓰는 것이 당연시 여겨졌고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현대 대한민국 입장에선 의아할 수도 있는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대학 진학률이 높으면서 징병제가 겹쳐 징집병의 평균 학력이 높아져서 6개월 복무한 한국군 일등병은 의대생[20]인 데 반해 몇 년을 구르고 구른 미군 병장은 학력이 고졸인 식의 해괴한 그림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일본군에서는 전쟁 말기에 치닫자 아주 막 나가기로 작정하고 이런 대학생들까지도 주먹구구로 징집하면서 카미카제나 이런 반자이 돌격용 병사로 뽑아 총알받이 노릇을 시켰다. 요즘이야 발길에 치이는 것이 대학생들이라 별 감흥이 없지만 2차 대전기에는 대학생은 지금의 석사 이상의 위상을 지닌 고학력자로서 전후 복구의 최일선에서 활약해야 할 인재들이었다. 이런 사정은 같은 시기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대통령 각하라는 호칭보다 박사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다. 당시 가난했던 조선에서 대학을 졸업하여 박사 학위를 받기란 거의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는데 조선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받은 사람이 바로 이승만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2차 대전 무렵엔 동양에서 대학교 졸업 학위를 가진 사람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다급한 마음에 한 줌도 안 되는 병력을 더 모은답시고 미래를 내다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시 일본과 전쟁을 치른 중화민국도 현직 대학생은 아예 군입대를 못 하게 했고 1944년 대륙타통작전 등으로 전황이 크게 악화된 상황 속에서도 자원자 한정으로 모병했지 무작정 총알받이 노릇을 시키지 않았다.[21]

여기서 나타나는 최대 차이점은 바로 '동기'의 유무였다. 미국인에게는 선전포고도 없이 비겁하게 미국을 공격한 일본에 대한 보복 같은 목숨 바쳐 싸울 만한 동기가 있었다. 반면 일본은 군부, 군부에 동조하는 기업이라면 몰라도 평범한 일본인으로서 자기 인생을 희생해가면서 조국에 몸 바쳐 싸울 이유가 하등 없었다. 중일전쟁이나 태평양 전쟁은 아무리 누가 뭐라고 설득해도 그저 제3자의 일로밖에 안 느껴졌고 길어지는 전쟁 탓에 민간에서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당장 본토나 국민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도 아닌데 굳이 목숨 바쳐 지킬 게 뭐가 있다고?'라는 식이었다.

아무리 전쟁 지도부가 적개심 유발 차원에서 귀축영미 타령을 해대도 적어도 본토가 본격적으로 공격받기 시작하는 대전 말까지는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전에 미국과의 전쟁은 군부에서조차 개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육군은 당시 중일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해군에서 전선 하나 더 늘리면 감당이 안 된다고 반대하던 실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조직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개인의 동기부여인데 그걸 나 몰라라 하며 무시한 것이다. 본토 일본인도 그랬을진대, 국가총동원법으로 징병된 식민지인들이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추축국들은 이념논리를 위한 전쟁도 아닌 전쟁을 위한 이념논리가 앞섰기 때문에 일본은 고작 총에 새긴 국화 문양 똑바로 안 닦았다고 죽도록 패고 독일은 전쟁에는 전혀 의미 없는 유대인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리겠다면서 아군으로 포섭 가능한 사람들도 적으로 만들고 석유와 화학물질을 비롯한 최우선 순위의 물자를 최전선이 아니라 학살 수용소로 돌렸으며 이탈리아는 아예 초반부터 선전포고만 때리고 전쟁에서 이길 의지가 있었는지도 궁금한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미국은 인적 관리도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과달카날 같은 생지옥에서 구를 만큼 구른 병사들은 휴가, 휴식 등의 보상도 확실하게 해 주고, 격전을 치른 장병들을 자국 본토나 호주로 보내 주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전선 후방에 있는 군 휴양 시설에라도 보내서 피로를 풀어주고 체력을 회복시켰다. 2차 세계 대전을 다루는 미디어 매체들에도 미군들은 어떤 중요한 임무나 전투가 끝난 후에는 대위, 소령 같은 중대 및 대대장이 병사들에게 쉬라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반면 일본군은 휴가는커녕 부대 밖으로의 외출 및 외박도 제대로 없었고 기껏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풀게 해 주겠다고 허용한 게 음주, 마약, 일본군 위안부 같은 퇴폐적인 것들이었는데 이들은 도덕성 문제, 정치외교와 군사사회 및 문화적 악영향으로 생길 갖가지 문제를 차치하고 단순히 체력적 효율성만 따져도 오히려 심신을 더 피폐하게 만들어 군의 전력과 사기를 떨어뜨린다. 스트레스는 그 원인을 해결하거나 최소한 원인과 멀어져 휴식을 취해야 풀리는데 그걸 술, 마약, 성관계 같은 더 큰 자극들로 덮으려고만 하면 그 행위가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몸에 부담을 주어 문제만 커진다. 성관계도 예부터 알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생각보다 피로가 커 이슬람의 일화에 따르면 누군가가 "천국에서 많은 여자와 살면 오히려 힘들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니 무함마드는 대답으로 "힘도 업그레이드가 된다!"라고 했다. 그 와중에 고위 장교들도 정상적인 절차도 없이 부대 밖에 있는 온천이나 요릿집 등에서 마음껏 놀자판을 벌일 수 있었다. 무타구치 렌야는 명색이 장성급 장교라는 양반이 작전이 끝날 때마다 허구한 날 부대 밖 유곽에나 놀러다니는 판이었다. 싱가포르 점령 이후에도 정신 안 차리고 탱자탱자 빈둥빈둥 놀기나 하다가 영국군의 박격포탄이 날아와서 피하려다가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현대에서 말하는 똥군기, 즉 사람 말하는 거 하나하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억지를 부리며 따져가며 권위만으로 찍어 눌러 부당한 수단으로 통제하는 것은 미군에서는 정말 필요한 경우지 일본군처럼 군기라는 명목만 들이대며 부끄러울 수준으로 불필요하게 병사들을 과하게 찍어 눌러 사기와 기강, 개개인의 상황판단 및 수행능력을 저해하는 통제를 하면 NCO든 장교든 위아래로 모자란 사람 또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영향력이 적거나 일본군처럼 그 정도가 심하면 처벌이 뒤따른다. 직무 외에는 어디까지나 수평적인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생지옥을 함께 헤쳐나가며 서로 마음 깊이 신뢰하는 전우로서 단결력과 협동 능력이 다져진 미군과 비교할 때 폭력과 억압으로 억지로 상명하복만을 세뇌한 일본군 부대의 실질적인 연대 의식, 사기, 투지 등이 높았을지 의문이다. 군은 법과 절차가 무너지면 끝장남에도 병은 단순히 상급자에게 마음에 안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마구 구타당해도 당연시 여기면서 고위 장교는 어떤 유명한 독립유공자는 허구한날 부대 밖 유곽에나 놀러만 다니고, 놀랍게도 병력을 사병처럼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반역죄를 저질러도 어떤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 이따위 수준의 고위 장교가 차고 넘치니 군이 멀쩡히 돌아갈 리가 만무했다.

결론으로 미군은 '시대가 깡을 길러준 인재들'이 자원입대하여 모이고 이들을 나름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운영했던 반면 일본군은 줄타기 인사와 파벌 싸움이 판치고 명분도 없이 징집한 장정들에게 각종 가혹행위를 가해 억지로 똥군기를 잡았을 뿐임을 대비해 본다면 미군 병사들이 정신적으로 우월했음이 당연지사다.


[1] 이는 상위 문서가 총검 돌격이 아닌 반자이 돌격이기 때문이다.[2] 대표적으로 추신구라, 하가쿠레 등이 있다. 추신구라는 아코 사건이라는 실제 벌어진 사건을 모티브로 한 창작 소설이고 하가쿠레는 소설은 아니고 일종의 철학서나 교양서같은 것인데, 주로 전장에서의 죽음을 찬양하는 내용이지만 정작 저자는 평화로운 에도시대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전쟁에 참가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3] 다만 다른 시각도 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처럼 미군 수뇌부는 일본인들 중에서는 무고한 민간인이란 게 더 이상 없다고 봤기 때문에 핵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애초에 저 양반도쿄에 소이탄 도배를 명령한 본인이며 "대체 왜 최고 사령부는 히로시마나가사키, 고쿠라, 교토에 폭격을 못하게 하냐!?"며 육군부 장관에게 격렬한 항의를 하던 인물이다. 참고로 상기한 네 도시는 맨해튼 프로젝트결과물을 실전에서 실험하기 위해 통상 폭격 대상 도시 목록에서 일부러 빼 둔 곳들로서, 그렇게 정해지고 나서 교토만은 육군부 장관에 의해 핵무기를 이용한 폭격대상에서도 유일하게 빠졌다. 첫번째 방식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을 히로시마에 실험한 후 고쿠라 역시 맨해튼 프로젝트두번째 방식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의 실전 실험 대상 도시였으나 폭격 당일 기상 문제로 인해 나가사키가 두번째 실험대상 도시로 바뀐다.[4] 미 해병대는 개전 초기엔 스프링필드 M1903 소총이 제식이였지만 개런드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스코프를 장착하는 개조를 거치며 저격 소총의 포지션으로 변했다.[5] 이게 어느 정도냐면 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영국군 측 기관총 추정치를 실제보다 훨씬 높게 추측하도록 할 정도였다.[6] 그 시대엔 미군만이 유일하게 반자동소총을 군 전체에 보급하였고 당대와 지금의 상식과는 다르게 이에 따른 병사 개개인의 화력상승은 상당했다.[7] 작전 상황에 따라서는 개인당 3~5개씩 지급받기도 하였다.[8] 게다가 그나마 루거 권총을 굴린 독일군은 루거만 준 게 아니라 발터 P38이나 마우저 C96 등 루거보다 신뢰성과 성능 면에서 우위인 권총들도 보급해줬다는 면에서 일본군보다 훨씬 낫고, 루거도 원래 생산될 당시의 부품들로만 조립된 루거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진흙탕 참호전에서도 나름 버텨냈을 만큼 정비성에서는 몰라도 신뢰성 자체는 괜찮은 총이었다. 다만 고장난 루거들을 분해해 부품을 다시 짜깁기해 만들어진 루거는 특성상 본래 부품이 거의 세공수준의 가공이 필요하다 보니 짜깁기된 부품들끼리 딱딱 맞아떨어지지 못해서 신뢰성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9] 하다못해 자동차 스프링을 대충 두들겨서 어설프게 만든 일본도도 수백 년 전, 장인이 만들던 일본도보다는 품질이 낫다.[10] 심지어 당시 미군에는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분노로 인해 일본을 진심으로 증오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입대한 미국인들이 넘쳐났는데 그런 이들이 자신이랑 싸우고, 자신이 몹시도 증오하는 집단을 웃으면서 따라했다는 것은...북한에서 진지하게 만든 북한의 선전물들을 한국인들이 개그 매체로 간주해 일부러 따로 시간을 내어 읽는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될 듯하다.[11] 다만 이오지마 전투의 일본군들은 지휘관인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장군의 전략대로 반자이 돌격을 하지 않고 섬 전체에 지하 시설을 건설하여 섬을 통째로 요새화시킨 상태였다. 전투 자체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미군도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이런 피해를 고려한 미군은 원자폭탄을 쓰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를 통해 현대전에서 돌격은 본질적으로 위험하며, 돌격 방어자 역할인 일본이 미군에 충분한 피해를 입혔음을 알 수 있다. 미군의 공세보다 허접한 반자이 돌격이 얼마나 비효율적이었는지 추론 가능하다.[12] 연무형에서의 좌제쳐, 우제쳐 등에 해당한다.[13] 당연하다. 칼이든 총알이든 포탄 파편이든 뭐가 머리로 날아오면 막으라고 만든 게 철모니까. 그리고 교범에 있는 내용이 아니라 한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칼을 휘두르면서 총 든 상대, 것도 나보다 건장하고 영양상태도 좋은 적을 상대로 이기려면 강철을 두른 머리를 치는 쪽과 평범한 군복을 입었을 뿐 별다른 방호구는 없는 다른 신체부위를 치는 것 중 어느 쪽이 그나마 승리할 가능성이 높을까?[14] 이 세대는 현재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세대'란 칭송을 들으며 전반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침체기를 겪는 현대의 미국인들이 끊임없이 다시 돌아보고 교훈을 얻어 미래에 대한 발전과 비전의 이데아를 얻으려는 세대다.[15] 50년대 한국에서 봉급이 없다시피해도 군에 가고 싶어하던 사람들이 많던 이유와도 비슷하다.[번역]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죽이고, 쪽발이들을 더 많이 죽이는 겁니다![17] 이후 유명 물리학자가 되는 리처드 파인만도 입대하려고 신검을 봤다가 특유의 사고방식과 사상이 문제가 돼서 떨어졌고 대신 다른 방법으로 복무해 국가에 공헌했다.[18] 한 마을에서만 세 명이나 자살할 정도였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참전용사가 한 증언이다.[19] 핵소 고지라는 영화를 통해 알려져 있다.[20] 병에 대한 대우는 개선되고 있는데 군의관에 대한 대우는 개선되지 않으면서 실제로 이런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21] 애초에 인구가 5억명이라 병력 자원이 차고 넘쳤기 때문에 굳이 대학생까지 끌어다 쓸 필요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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