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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5:41:33

봉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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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의3. 어형4. 서유럽의 봉건제
4.1. 프랑크 왕국 시대4.2. 9세기 후반 프랑크 왕국의 혼란4.3. 10세기
4.3.1. 서프랑크 왕국의 내전4.3.2. 마자르족의 동프랑크 침공4.3.3. 앵글로색슨 국가의 성장
4.4. 11세기
4.4.1. 농업 혁명과 기사 계층의 부상4.4.2. 카페 왕조 프랑스의 시작4.4.3. 노르만 왕조 잉글랜드
4.5. 12세기
4.5.1. 십자군 원정과 프랑스4.5.2. 제국들의 경쟁4.5.3. 이탈리아 봉토법
4.6. 13세기
4.6.1. 중세 후기 서유럽의 번영4.6.2. 프랑스의 중앙집권화
4.7. 14세기
4.7.1. 프랑스의 팽창주의4.7.2. 백년전쟁과 그 이후4.7.3. 신성 로마 제국4.7.4. 이탈리아4.7.5. 나바라 왕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5. 유사 봉건제도6. 동아시아의 봉건제도7. 평가8. 마르크스주의 사관에서의 봉건제9. 봉건제와 현대 지방자치10. 현대의 봉건제11. 창작물에서의 봉건제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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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건제(封建制, feudal system) 또는 봉건주의(feudalism)는 토지를 통해 주군봉신() 간에 형성되는 관계, 또는 그러한 관계에 대한 제도를 가리킨다.

2. 정의

feudalism social system
historiographic construct designating the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conditions in western Europe during the early Middle Ages, the long stretch of time between the 5th and 12th centuries.
중세 전기, 즉 5세기에서 12세기 사이의 오랜 시간 동안 서유럽에 나타난 사회, 경제, 정치적 현상을 가리키는 역사학적 개념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발췌)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봉건제도란 과거 사회에서 각각의 영주가 자신의 주군에게 계약에 따라 일정한 의무를 이행하는 대신 자신의 통치지역에서 왕처럼 절대적인 권한과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받는 형태를 지니며, 나라 전체에 명확하고 통일된 법률이나 행정이 없이 신하과 주군 개개인의 인간관계, 계약에 따라 통치가 시행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봉건제의 학술적 정의는 매우 복잡하다.

중세인들 자신은 '봉건제'라는 개념을 학술적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용어 '퓨덜리즘(feudalism)'은 1800년경이 되어서야 처음 만들어졌다. 이 당시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불합리한 과거의 관습이나 사회현상'을 전부 봉건제라고 불렀으며, 따라서 이 어휘의 함의에서 역사학적, 철학적 논의와 정치학적 견해는 분리되지 않았다.

용어 '봉건계약' 등의 종류가 수십 개는 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중세시대에 '존재했던' 봉건제 때문에 어떠한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일이 있었다"는 식의 설명도 사실 선후관계가 뒤바뀐 것으로, 실제 '봉건제', '봉건주의'는 이러한 현상을 후대에 정리하기 위해 조어한 개념이다. 실제 중세시대에 사용된 용어들은 봉건 계약이나 봉건적 의무가 아닌 "관습", "권리", "자유"에 초점을 맞췄다. 마그나 카르타 체결로 이어진 잉글랜드의 제1차 남작 전쟁과, 이후의 제2차 남작 전쟁에서도 반군들은 봉건적 가신이 아니라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land)를 자칭했으며, 봉건적 권리라기보다는 "고대 관습(ancient customs)"과 "국법(law of the land)"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옹호했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앙시앵 레짐불평등하고 불의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제도를 특징짓기 위해 "봉건적"이라는 형용사를 만들어냈다. 1789년 8월 국민의회가 "봉건 체제"를 폐지했을 때, 그들에게 féodalité는 이성이나 정의로 정당화할 수 없는 영주의 특권의 집합체를 의미했다. 영국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1776)에서 시장의 힘이 아니라 강압과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생산 방식을 묘사하기 위해 "봉건 제도"라는 문구를 만들었다. 스미스에게 봉건 제도는 빈곤, 야만성, 빈부 격차가 심한 경제와 사회로 이어지는 영주에 의한 농민의 경제적 착취였다.

역사학자들이 조선 등 동아시아의 왕조 국가나 카페 왕조 말기의 프랑스처럼 전근대에 상당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수립한 국가들을 '봉건 왕국'이라고 지칭할 때, 여기서 봉건제는 상술한 '퓨덜리즘'을 의미한다. 이는 '근세'나 '근대'와 대비하여 이 당시의 시기를 '미개한 전근대 사회'라 요약한 수사에 가깝다.
"Feudalism" was once accepted by academic and popular historians alike as a defining, if not the defining, feature of medieval society. For military historians, the High Middle Ages, the period from around 1000 to 1300, was once the age of the feudal knight. This is no longer the case. Today scholars who study the Middle Ages avoid the term like the plague. (One can almost imagine the cry "Bring out your dead constructs!") If they use it at all in their writings or classrooms, it is usually to dismiss it. Feudalism has joined the "Dark Ages," "the right of the first night," and Viking horned helmets in the myriad ranks of myths of the Middle Ages. In historiographical terms, this happened fairly recently.
"봉건제"는 한때 중세 사회의 본질적인 특징, 아니면 적어도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학계와 대중 역사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 군사 역사가들에게 1000년에서 1300년까지의 중세 시대는 한때 봉건 기사의 시대였다.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오늘날 중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마치 전염병처럼 그 용어를 피한다. (누군가 "죽은 구조물들을 끌어내라!"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들이 저술이나 강의에서 그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대개 그것을 일축하기 위해서다. 봉건제는 “암흑시대”, “초야권”, 바이킹의 뿔 달린 투구와 함께 중세에 대한 수많은 신화의 반열에 합류했다.
-Richard P. Abels, The Myths of Feudalism and the Feudal Knight

현대의 중세사학자들이 이러한 용어의 사용이나 '봉건 시대'와 같은 분류법을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 역시, 단어의 기원 자체가 중세 유럽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내포하고 있는 데다가 대중에게 중세 사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용어를 만들어낸 근대 프랑스 지식인 엘리트들은 오늘날 기준으로 역사 전문가도 아니었고, 자신들과 적대 관계인 귀족들이 뿌리를 두고 있는 중세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제도들을 세심하게 분류하거나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예컨대 19세기의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는 자신의 저서 『마녀』에서, 중세시대에는 로마의 목욕 문화가 사라져서 나병 환자들이 급증했고, 가톨릭 교회와 봉건 귀족들은 나환자들이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해서 이들을 배척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버림받은 나환자들과 하층민들에게 도움을 준 자비로운 민간 치료사들을 마녀로 몰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미슐레의 저서는 아직도 중세 사회를 다룬 대중교양서들에서 고전으로 인용되고 있으며, 4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여기에는 맞는 말이 하나도 없다. 중세 목욕 문화는 사라진 적이 없었고, 장애인 등 약자들에 대한 자선행위는 교회 공동체와 상류층의 의무였으며 특히 (거지 노파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는 존 왕과 나병 환자의 발을 직접 씻겨준 루이 9세로 대표되는) 중세 전성기인 13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마녀사냥은 명백히 근세에 시작된 현상이다. 이렇듯 혁명기 지식인들이 봉건제로 규정한 '중세 지배층의 부당한 특권, 야만적인 폭력과 착취'란 대부분 실체가 없었다.

중세 시대 영주와 가신의 관계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했으며 유럽 전역에 걸쳐 단일하고 획일적인 "봉건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1차 자료에 따르면 충성 서약은 표준화된 봉건적 의무보다는 구체적이고 협상된 관계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권은 중세 시대 내내 중요했으며, 왕들은 봉건 중개자를 통해서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 계층의 신민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카스트 제도를 연상하게 하는 소위 '봉건 피라미드'는 중세 시대의 개념이 아니었다. 중세 사회는 이 모델이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유동적이었다. 농민들 중 상당수(13세기 잉글랜드의 경우 거의 절반)는 실제로 농노가 아닌 자유 토지 소유자였으며, 많은 경제 거래는 특히 도시화가 진행된 지역과 이탈리아에서 봉건적 봉사 의무가 아닌 화폐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다.

맥락에 따라 다르지만 봉건제는 '중앙집권관료제'와 대비되는 지방분권형 정치 체제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만 현대 사학계에서는 역사가 일원적인 발전 과정을 가진다는 관점을 지양하고 있기 때문에 봉건제가 발전한 것이 중앙집권제라고 하지 않는다.

3. 어형

한자 '봉건(封建)'은 원래 고대 중국의 왕조인 주나라의 제도를 설명하던 단어로, 천자가 제후에게 토지를 하사하는 것을 가리켰다. 천자의 세계관에서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땅은 천자의 것이었으며,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왕실의 혈족이나 인척, 그 밖의 공훈이 있는 자에게 제후를 봉하고, 땅을 내어 제후국을 세우도록 허용했는데 이것이 '봉토(封土)'였으며, 자리를 내 주는 것을 '책봉(冊封)'이라 했다.

이 어휘를 재발굴한 것이 근대 외서를 번역하던 일본인 학자들로, 서구 퓨덜리즘(feudalism)의 번역어로 그들에게 익숙한 봉건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물론 동아시아와 서구의 봉건제는 개념과 역사적 경험이 많이 다르다. 좁은 의미에서 봉건제도, 봉건제, 봉건주의 등이 지칭하는 대상은 중세 서유럽의 퓨덜리즘(feudalism)이다. 서유럽의 퓨덜리즘(feudalism)은 아니지만 유사한 세계의 여러 제도들도 봉건제라 불리곤 한다.

4. 서유럽의 봉건제

4.1. 프랑크 왕국 시대

서양의 봉건제(Feudalism) 이론은 그 기원을 카롤루스 왕조프랑크 왕국에서 고대 게르만족의 종사 제도(COMITATUS, Gefolgschaft, retinue)와 후기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恩貸地, beneficium)의 결합에서 찾는다.

이 가운데 COMITATUS는 라틴어 단어. 백작령도 같은 말로 쓰이는데 이는 COMITATUS는 제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제도하 구성원인 COMES가 군주의 측근 관료로서 곧 백작이 되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고대 말~중세 초 유럽사에서는 이외에도 원수정(로마 초기 제정)이나 영역제후령 혹은 prince(fürst)의 영역 등 다양하게 번역되는 PRINCIPATUS처럼 문맥에 주의해야 하는 단어가 꽤 많다.

고대 게르만족의 관습에서는 자유민들이 주군을 모셔 종사가 되고, 주군이 전투력이 필요하면 종사들을 소집하여 싸우게 하는 대신, 그 대가로 전리품을 분배받는 종사제가 존재했다. 이러한 종사제에서 나타난 전형적인 전사 계층이 허스칼이다. 한편,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는 야만족 출신 군인이 국경을 수비하는 대가로 국가가 일정량의 먹고 살 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부터 카롤루스 대제의 시대 동안에 프랑크 왕들은 두 제도를 적절하게 결합한다. 가신들을 동원해서 주변을 정복하고 정복한 토지를 약취해서 가신들에게 전리품으로 뿌리며, 동시에 해당 토지가 있는 지역의 행정관으로서 임명하여 지방을 자신의 가신화 하고자 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정복한 땅에 하나의 주(州, gau)를 설치하여 자신의 가신을 행정관으로 파견하고, 그 곳의 장원 중 하나를 은대지(beneficium)로 설정하여 은대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행정관이 가지게 해서 행정관의 급여로 삼는 것이다.

이 시대에 가장 많이 약취당한 토지의 원주인은 다름 아닌 가톨릭 교회로, 농노가 딸린 토지들은 대체로 원래 교회의 가산이었다. 이렇게 뿌린 토지, 즉 은대지(beneficium)는 기본적으로 국왕의 소유가 되어 가신들에게 일시적으로 하사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런데 많은 지역에서 이 분배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국왕이 땅을 '나눠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정반대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정도. 개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지역의 유력자인 게르만 부족장이 항복하면, 그 부족장이 다스리던 땅을 국왕이 가지고, 국왕은 부족장의 군사적 충성을 대가로 다시 그 부족장에게 받았던 땅을 그대로 '하사'했다. 즉 충성을 대가로 자치권을 그대로 보장받은 것. 해당 지역에서 좀 힘 있는 조폭들이 카롤루스 대제한테 '당신의 봉신이 될 테니 우리 동네 교회 땅 주인이 나임을 인정해주시오' 하고 '거래를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중세 초 기독교 세계의 변방인 독일 지역에서 두드러졌는데, 후대에 부족 공국이라 일컬어지는 영역제후들이 그러하다.

프랑크의 국왕들도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저런 지방 유력자가 그대로 자신의 본거지 관직으로 임명되었다간 자신들의 지방 지배력이 약화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때문에 실제로 그들의 관구와 관직을 주기적으로 전환하는 순찰사 제도(missi dominici)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혈연과 가문이 매우 중시된 당대 사회의 특성 상 결국 저런 관직은 혈연에 따라 돌려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순찰사 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롤루스 대제 당대에 이미 한 사람이 여러 관구의 행정관직을 맡는 경우가 흔했고 친인척, 심지어 자식에게 관직이 세습되는 일도 너무나 흔했다. 당대 사람들 역시, 원래는 관료의 급여 개념으로써 수여된 은대지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해야한다는 등의 요구를 끊임없이 했기 때문에 은대지와 행정관구직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세습자산화되었다.

한편 '봉건제'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카롤링거 왕조 시기 군대의 중핵이 귀족들과 그들의 종사들로 구성된 소규모 정예 기병대였으며, 자유민의 군사적 의무는 특수한 경우에 불과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실제로 프랑크 군대의 중핵을 이룬 것은 대규모 자유민 징집병이었다. 군 복무는 재산과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자유민에게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개인적인 의무였고, 해당되는 계층은 고위 인사(귀족, 왕실 관리, 주교와 수도원장) 에서 중간층 지주, 심지어 땅이 없는 가난한 자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황제는 장비, 무기, 그리고 임금을 제공하지 않았기에 징집된 자유민들이 각자의 재산 수준에 따라 참전 비용을 자비로 마련해야 했다. 때문에 군대에 징집되는 것은 일종의 세금으로 여겨졌고, 고대 로마에서 세금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푼크티오 푸블리카(functio publica)라고 불렸다.

4.2. 9세기 후반 프랑크 왕국의 혼란

880년대부터 무능하거나 단명하는 통치자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카롤링거 왕조에 위기가 닥쳤다.

881년 황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성인인 '비만왕' 카를 3세가 모든 프랑크 영토를 계승하여 황제가 되었지만, 그는 병약해서 당시 왕권의 가장 중요한 측면인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이에 887년 그의 조카인 아르눌프가 공작들의 지지를 얻어 카를을 폐위하고 동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같은 시기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파리 백작 외드가 대머리왕 샤를의 손자인 어린 왕족 샤를을 제치고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카롤링거 가문의 위신은 여전히 중요했고, 893년 한 귀족 파벌이 샤를을 국왕으로 지지하면서 내전이 벌어진 끝에 결국 외드는 어린 샤를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다.

아키텐에서는 푸아티에 백작이자 아키텐 공작인 라눌프가 888년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지만, 890년에 사망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900년 프로방스의 국왕인 루이 3세가 이탈리아 왕위와 황제 칭호를 요구했지만, 곧 베렝가리오 1세에게 패배하고 쫓겨났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귀족들은 또다시 베렝가리오 1세의 통치에 싫증을 느꼈고, 이후 50년 동안 이탈리아 왕국과 황제 자리는 이탈리아 귀족들의 다툼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옛 프랑크 왕국의 후신국들에서 국왕의 권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지방 세력이 왕실의 재산과 권리를 장악할 수 있게 했다.

원래 각지의 자유민들은 각 나라의 군주를 주군으로 모시는 자유민 전사들이었지만, 국왕이 왕국의 상당 부분에 대한 통치력을 점차 잃어가면서, 차라리 더 가까운 세력가들에게 안전을 의탁하는 길을 선택한다. 지방 귀족들 역시 게르만의 종사제 전통과 사유지 및 은대지제를 중심으로, 하나의 영역제후령 또는 자유토지령을 형성해 영주로 변화하며 지방민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이러한 지방 권력가들은 군주권과 로마보편법을 무시한 비합법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약해진 군주권은 이러한 비합법적 지방 권력의 확산과 성립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유럽 '봉건제'의 형성을 설명하는 이러한 이론과 달리, 이 시대에도 영주나 왕에 대한 군 복무가 토지 소유의 대가라는 생각은 일반적이지 않았으며, 농노와 비슷한 예속 농민들이 이 시기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볼 근거도 없다. 그리고 이 시기의 혼란상을 수직적인 영주 권력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오해의 여지가 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봉건적' 위계질서보다 중요한 것은 수평적인 공동체와 지역 관습이었다. 이는 9세기 후반 랭스의 대주교 힝크마르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조카인 라옹 주교 힝크마르가 자신의 운동 실력을 자랑하고 전장에서 무훈을 꿈꾼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비꼬았다.
"네가 평신도였다면 무엇을 했을지 자랑하는 네 어리석음에 대해 간략하게 답해 줄 수 있다. 너는 네 동포들과 이웃들이 하는 대로 했을 것이다. 즉, 너는 기꺼이 그리고 평화롭게 네 이웃들과 네 옆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살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는 너를 제압할 더 강한 사람들을 마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봉건제'의 발전에 등자과 중무장 기병의 탄생이 얼마간 연관되었다는 주장도 일각에 존재한다. 등자가 발명되어 중무장 기병이 '카우치드 랜스', 즉 겨드랑이 사이에 창을 끼우고 돌격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중장기병의 효용이 급상승했고, 군주를 위시한 영주들이 봉신들에게 중무장 기병을 부양하기 위한 땅을 분배한 것이 봉건제가 진행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등자 대논쟁(Great Stirrup Controversy)'이라 불릴 정도로 꽤 유명한 떡밥. 하지만 이후 중세 군사문화와 전술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되면서 중세 시기 전쟁에도 언제나 다양한 병종간의 협력이 중시되었으며 전장을 지배한 중기병은 후기 중세의 기사도 문학에 의해 과장된 이미지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제는 등자와 중장기병의 도입이 봉건제를 탄생시켰다고 보지 않는다.

4.3. 10세기

4.3.1. 서프랑크 왕국의 내전

서프랑크 귀족들의 지지로 왕위를 되찾은 샤를 3세는 제국이라는 개념에 깊이 집착했고, 로렌 지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옛 제국의 수도인 아헨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911년 그는 바이킹 지도자 롤로에게 루앙 백령을 하사해 다른 바이킹의 공격을 막는 변경백으로 삼았고, 이는 결국 노르망디 공국이 탄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923년 외드 왕의 동생이자 샤를 3세의 정적인 로베르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다. 로베르는 얼마 뒤 수아송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그 직후 샤를 3세 역시 로베르의 지지세력인 베르망두아 백작 에르베르 2세에게 사로잡혀 폐위되었고, 로베르 가문의 또 다른 인물인 부르고뉴의 루돌프(923-936)가 왕위에 올랐다.

그 후 서프랑크의 왕위는 다시 카롤링거 가문에게 돌아갔지만, 루이 4세(936-954), 로타르 1세(954-986), 루이 5세(986-987)는 왕위를 요구하는 로베르 가문에 맞서야 했다.

그러다 결국 987년 루이 5세가 사냥 도중 사고를 당해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카롤링거 가문의 왕위 요구자는 로렌의 샤를이었는데, 그는 오랫동안 동쪽의 신성 로마 제국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국의 귀족들은 로베르 가문의 위그 카페를 국왕으로 지지했고, 이 위그 카페가 로렌 공작 샤를을 물리치고 왕위를 지키면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렇듯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10세기 동안 지속된 내부 분쟁으로 인해 성공적인 해외 원정이 불가능했고, 외드 왕(888-898)의 치세 이후 바이킹은 거의 위협이 되지 않아 왕국의 방어를 명분으로 귀족들이 왕권 아래 결집하도록 강요할 수 없었다. 결국 왕실의 재정이 고갈되자 영주들은 왕의 궁정에 자주 드나들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원이 매우 제한적인 왕실은 그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고, 마침 온난기가 시작되고 농업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면서 영주들은 대신 영지 경영에 집중하게 되었다.

4.3.2. 마자르족의 동프랑크 침공

하지만 동쪽의 신성로마 제국에서는 유목 기마 민족 마자르족의 침공이 매우 현실적인 위협이었고, 결국 955년 오토 1세레히펠트 전투에서 마자르족 군대에 맞서 대승을 거두면서 황권에 대한 모든 도전을 종식시켰다. 흔히 유럽사를 프랑스사 중심으로 이해해서 '중세에는 봉건제로 왕의 실권이 약했고 중세 이후에 절대왕정이 열린다.'라고 도식화하지만, 독일 지역의 분권화는 오히려 중세를 거치면서 서서히 지속적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프랑스와 독일 지역의 왕권 차이는 징집법을 예시로 들어서 확인할 수 있다. 국경의 요새를 수비하는 병사를 예로 들자면, 프랑스의 경우 그 병사들은 봉토를 수여받거나 그밖에 다양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군인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해당 지역의 영역제후가 자기 필요를 위해서 소집한 가신들이었지 왕의 명령으로 소집된 군은 아니었다. 반면, 독일이라면 그 요새 주변에 사는 자작농이 제국 공법에 따라 1년에 40일의 복무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소집된 것이었다. 이 경우도 직접 명령권자 자체는 해당 지역의 변경백이지만, 변경백 직위 자체가 황제가 임명한 작위라는 명분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저 자작농은 명목 상이나마 황제 휘하의 제국군이었다.

4.3.3. 앵글로색슨 국가의 성장

한편 독일인들의 사촌인 잉글랜드 역시 거의 같은 시기에 웨식스 왕조의 국왕들이 데인족을 완전히 물리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영토가 지나치게 넓고 미개간된 숲들로 분단되었던 신성 로마 제국과 달리 잉글랜드의 웨식스 왕조는 왕국 전역에 일관된 행정 체계를 도입할 수 있었고, 프랑크 제국의 분열 이후 유럽에서 유일하게 전국적인 토지세를 부과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모든 토지에는 하이드(hide)라는 세금 단위가 할당되었는데, 5하이드는 경작지 200에이커 이상에 인구 100~150명(20가구) 정도인 일반적인 마을 하나 규모였다. 헌드레드는 100개의 하이드로 구성되었고, 우스터셔의 경우 12개의 헌드레드로 구성되어 총 1200하이드가 되었다. 우스터 부르흐(burh)를 방어하기 위해 하이드당 1명씩 군대를 징집하면 1200명이 모일 것이다. 이는 1세기 전 카롤링거 제국 전성기의 체제와 유사했고 실제로 그 체제를 모델로 했다.

왕에게 바치는 세금인 겔드(geld)는 은화로 지불되었다. 10세기 말경에는 런던이나 캔터베리와 같은 무역 중심지뿐만 아니라 서머셋의 브루턴이나 링컨셔의 혼캐슬과 같은 작은 도시들을 포함해 총 70개의 화폐 주조소가 설립되었다. 국왕은 국내로 유입되는 모든 외화를 수거해 재주조함으로써 자신의 화폐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화폐 주조소에서 15마일 이내에 살았기 때문에 돈을 구할 수 없어서 세금을 낼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급 귀족인 쎄인(thegn)의 최소 자격은 연 지대수입 5파운드(암소 40마리 가치)인 5하이드의 토지였다. 쎄인 아래에는 니흐트(cniht), 라드만(radman) 또는 소크만(sokeman)이라 불리는, 1~2하이드를 가진 소지주 계층이 있었다.

진정한 귀족(procer)이라 불리기 위해서는 40하이드 이상을 소유해야 한다고 여겨졌고, 잉글랜드 전역에 약 100여 가구의 귀족 집안이 있었다. 10세기에는 엘더맨(Ealdormen), 11세기에는 얼(Earl)이라 불린 20명 이하의 대귀족들은 700하이드 이상의 토지를 소유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대귀족들의 토지는 일반적으로 10개 또는 그 이상의 샤이어에 걸쳐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동시기 유럽 대륙의 제후들과 달리 지역적인 권력 기반이 부족했다.

체오를(ceorl) 또는 예부르(gebur)는 30에이커 이상의 소작지를 가진 부유한 소작농이었다. 헌드레드 법정에 참석했다는 점에서 법적으로는 자유인이었지만, 매주 2~3일 영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을 해야 했고 영주의 허락 없이는 이사를 갈 수 없었다. 장원은 중요한 경제적 단위였지만 농촌 사회에서 영주와 관리들의 영향력은 미약했고, 농민들은 헌드레드 법정과 마을 공동체의 지배를 받았다.

4.4. 11세기

4.4.1. 농업 혁명과 기사 계층의 부상

10세기 이후 유럽의 기후가 눈에 띄게 온난해졌다. 때마침 몇 가지 혁신적인 농업 기술이 도입되어 삼포식 윤작 체계가 널리 보급되었고, 개선된 마구는 말과 소를 이용한 쟁기질과 운송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었으며, 개울마다 방앗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유럽 전역이 더욱 안정되고 부유해지면서 이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잘 훈련된 군인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들은 당대 사람들(특히 연대기나 각종 기록을 작성하는 성직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동시에 황무지 개간으로 농지가 확대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토지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급증했고, 그에 따라 기사들은 평화를 파괴하고 사회에 폭력을 퍼뜨리는 변화의 상징으로 교회의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력자를 호위하는 무장 친위대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며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기사는 항상 존재해 왔던 권력자의 사병이자 엘리트 군인일 뿐이고, 기사 숫자의 증가와 유력자들의 사적 전쟁의 증가는 모두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의 결과물일 뿐 당대 성직자들의 주장이나 후대의 '봉건제' 이론처럼 기사들 때문에 사회가 폭력적으로 변하고 전쟁이 급증한 것은 아니었다. 기사들이 두각을 나타낸다고 해서 왕과 영주 사이의 균형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갑옷과 말 등의 군사 장비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많은 기사들이 부유한 지주 또는 상인 집안 출신이었지만, 이 시기 기사는 사회의 지배계급이라기보다는 전문군인 직업에 가까웠다. 11세기와 12세기의 여러 문헌들은 농민 집안 출신 기사들이 존재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오로지 군사적인 직업으로 다른 농민들과 구분되었다. 나이가 들거나, 병에 걸리거나, 장비를 잃는 등의 이유로 이 직업을 수행할 수 없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기사가 아니게 되어 농민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독일에는 예속민 신분의 ministeriales라는 기사 계층이 존재했고, 동시기 프랑스에서도 농노에서 기사가 된 사례들이 있었다.

따라서 13세기까지 기사는 일반적으로 귀족, 자유, 공직 수행, 많은 재산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기사는 사회적 신분이 아니었고 법적 지위도 없었다. 기사가 된다는 것은 특정한 신분이나 계급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단지 전쟁에서 군대의 주력 부대를 형성하는 엘리트 전사들의 집단이었다.

한편 10세기와 11세기 기록에서 "vassal"(봉신)이라는 표현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fidelis"(충성스러운 사람)이나 "miles"(기사)와 같은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이것은 반드시 "봉신"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fidelis"나 "miles"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봉건제'의 특정한 충성 관계에 있는 사람을 지칭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이러한 용어는 영주와 개인적인 유대감을 가지고 영주에게 충성심을 느끼는 동시에 영주가 그들에게 특정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그러나 "fideles"는 단순히 더 넓은 의미에서 충성스러운 신하 또는 부하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고, 단지 영주의 충성스러운 친구일 수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miles"는 누구의 신하도 아닌 용병일 수 있다.

이는 "봉신"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는 것과 같은 관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앙 정부가 취약하고 법 집행이 일관되지 못했던 10세기와 11세기 프랑스에서 귀족들은 군인들의 충성을 보장하기 위해 개인적인 유대와 계약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은대지 제도나 12세기 이탈리아 법률서의 봉토 수령 계약에 적용된 것과 동일한 규칙을 따랐는지는 불분명하다.

4.4.2. 카페 왕조 프랑스의 시작

한편 서유럽의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무역의 자극은 카페 왕조의 국왕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다. 왕령지인 일드프랑스에도 황무지 개간으로 새로운 마을과 도시들이 생겨났고, 도시 주민들은 국왕에게 세금과 군사적 지원을 대가로 자치권을 부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게다가 영주들을 포함한 권력자들에게 토지 소유는 갈수록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토지는 상속 과정에서 끊임없이 분할되었고, 결혼, 증여, 매매를 통해 증감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의 복잡성과 그로 인한 분쟁 때문에 유력자들은 최종 판결권을 가진 왕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한 프랑스의 많은 교회들이 왕실을 가장 믿음직한 동맹이자 보호자로 여기고 국왕의 신성한 권위를 확고히 지지했으며, 왕실은 이러한 지원을 잘 활용할 수 있었다.

초기 카페 왕조의 주요 목표는 부르고뉴였다. 로베르 2세는 1006년경 부르고뉴 대부분을 장악했고, 몇 차례의 반란 진압 끝에 부르고뉴의 귀족들은 왕실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032년 블루아의 외드 2세가 부르고뉴 왕국의 왕위를 주장하며 부르고뉴를 침공했지만 격퇴당했고, 1037년 바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후로도 부르고뉴 공작위는 카페 가문에 의해 계승되었다.

로베르 2세의 아들인 앙리 1세는 멘(Maine) 지방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었던 앙주 백작 조프루아와 어린 노르망디 공작 기욤을 이간질하는 데 집중했다. 앙리 1세는 우선 어린 공작에 맞선 노르망디 반란군을 진압한 뒤 1051년까지 멘 지방에서 전투를 벌였다.

1054년 기욤의 세력을 억제하기로 결심한 앙리 1세는 이전과는 반대로 앙주의 조프루아와 동맹을 맺고 노르망디를 침공했다. 하지만 왕실 군대는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흩어져 약탈을 벌이다가 노르망디군에 의해 각개격파당했다. 1057년 앙리 1세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디브 강을 건너는 도중 소수의 기사들과 다수의 농민병으로 구성된 노르망디군의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도망쳤다.

1060년 앙리 1세는 여덟 살 된 아들 필리프 1세를 남기고 사망했다. 같은 해 앙주의 조프루아도 사망하면서 앙주 세력은 계승 분쟁으로 인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이를 기회로 1066년 노르망디의 기욤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왕이 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세력 균형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중앙집권화된 나라였고, 통치자들에게 풍부한 세금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4.4.3. 노르만 왕조 잉글랜드

잉글랜드는 웨식스 왕조 이래로 상당히 강한 관료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노르망디 공 윌리엄은 자신의 사병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점령하여 기존의 앵글로색슨 귀족들을 대량학살했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며 자신의 노르만 사병들 중 최측근에게 잉글랜드 영주 자리를 나누어줬는지라 군신 유대관계가 비교적 강했다. 또한 이때 이미 서유럽의 관료제와 법제는 현대인들의 편견과 달리 상당히 발전해 있었고, 이렇게 토지를 나눠주는 과정 역시 철저히 문서화 된 관료제적 방식으로 이뤄졌다. 둠즈데이 북이 그런 잉글랜드의 문서화된 관료제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노르만 정복 이후로 잉글랜드의 모든 토지의 법적인 소유자는 왕이었다. 노르만 사병들은 대대적으로 토지를 분봉받아 남작과 영주(Lord)들이 되었다. 그러나 유럽 대륙과 달리 이들은 서로 사적 분쟁으로 토지를 점유하거나 병합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며, 토지를 상속하기 위해선 왕의 허가를 받고 상속세를 납부해야했다. 게다가 그들이 내려 받은 토지 중 4분의 1의 토지는 왕을 위한 것으로 지정되어 토지 소득 중 그만큼은 왕에게 납부해야 했으며, 데인세라는 토지에 대한 직접세도 또 부과되었다.

14세기까지 잉글랜드에 공작은 없었고, 백작이 자신의 영지에서 행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재판 수입 가운데 일부(벌금형이 나오면 그 중 3분의 1은 피해자, 3분의 1은 왕, 3분의 1은 백작)만을 받는 것과 징집된 군인들을 지휘할 권한 뿐이었다. 백작령은 그저 행정구역일 뿐, 소유한 영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백작령에 백작의 소유토지가 없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옥스포드 백작 소유의 부동산은 대부분 에식스에 있었다. 백작들은 자신의 백작령 내부의 남작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을 수도 없었다. 남작들은 전원 왕에게 직접 충성해야했다. 공작은 백작을 봉신으로 두는 영역 군주가 아니라, 백작 중 명예 서열 상 더 높은 이들에게 주는 칭호에 불과했다. 공작과 백작들은 영지를 소유하고 다스리는 존재라기보다는 관할구 내의 토지들의 임대차 네트워크(물론 왕으로부터 토지를 빌린 남작과 영주들)를 관리하는 관료들이었다.

이조차도 백작령에서 재판권, 군사징집권, 징세권은 국왕의 대리인인 셰리프(sheriff)가 행했다. 이 셰리프는 옛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고유 관료제에서 비롯한 지위로, 축약하지 않고 쓸 때는 shire reeve라고 썼으며, 과거에는 이외에도 다른 여러 reeve가 존재하였다. 이들은 징세청부업자처럼 국가에 선금을 지불한 다음에 그 대가로 직위를 사는 형태였으며, 이를 맡는 주 계층은 기사이거나 남작 정도의 영지를 가진 하급 귀족이었다. 이들 상당수는 세습에 성공했으나, 국왕이 임의로 물갈이 하는 것도 쉽게 가능했다. 군사에 대해서 징집권은 있는데 지휘권은 없으니 반항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노르만 정복 이후의 영국사에서 국왕이 영국 내부의 영지 상속으로 골머리를 썩거나, 대영지를 가진 영주가 독립을 시도하는 등 지방분권적으로 나아갈만한 사건 자체가 없다. 영역의 절반 가량이 상속만으로 뜯긴 프랑스랑 대조적이다. 심지어 귀족들에게 세금 걷기가 어려웠던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과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귀족들을 징세의무자로 지정했고, 왕은 그들에게서 세금을 직접 걷는 것도 가능했다. 이 토지세는 탈리지(Tallage)라고 불렸다. 암군의 대명사 존 왕이 당한 귀족들의 반란도 바로 저 남작들의 반란이었고, 탈리지는 마그나 카르타에 의해서 폐지된다.

카르타(헌장)에 대해서도 프랑스나 독일과 비교하면 명확해진다. 프랑스와 독일은 저러한 카르타가 일부 영지, 일부 도시 등에만 적용되는 경우가 흔했으나 영국은 '귀족을 포함한 모든 자유민'에게 적용되는 마그나 카르타가 존재했다. 의회 역시, 게르만족의 풍습으로서 전 서유럽에서 항상 행해졌으나, 지방 단위의 의회가 아닌 국가 단위의 대의회가 꾸준히 열린 것은 영국 뿐이다. 국가 조직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으니까 권력을 두고 싸울 때 국가를 해체하는 것이 아닌 국가 전체를 걸고 싸운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윌리엄 정복왕 이래로 영국은 항상 통일된 국가 관료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5. 12세기

4.5.1. 십자군 원정과 프랑스

4.5.2. 제국들의 경쟁

이 시대는 기독교(가톨릭)의 영향이 강해지며 기존의 게르만의 습속 등과 결합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12세기초부터 카롤링거 왕조 적부터 내려왔던 보호의 위탁 의식이 3단계로 자리잡았다.
  1. 첫 번째로 신하가 되어 따를 것을 맹세하는, 봉신이 양손을 군주의 두 손 사이에 집어넣고(immixtio manuum), 항상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복종과는 차별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선언(volo)을 했다.
  2. 두 번째로 성경 또는 성유물을 놓고 충성을 맹세했다.
  3. 마지막으로 군주의 입술 또는 칼에 입맞춤(osculum)을 했다. 봉신의 지위를 획득하는 의식은 양도한 봉토를 상징하는 한 줌의 흙덩이와 나뭇가지, 또는 홀을 군주가 수여하는 것으로 끝났다.

4.5.3. 이탈리아 봉토법

12세기 이탈리아에서는 도시 공동체가 지방 귀족과 타협하여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기 시작하면서 봉토에 관한 법률이 입법 및 성문화 되었다. 귀족들은 도시 공동체에 충성을 서약하고 시 당국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는 대가로 하위 사법권 등 토지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때부터 도시의 전문 법률가들은 이전까지 모호한 의미로 사용되었던 봉토(fief)라는 단어를 충성을 증명한 대가로 정부로부터 자치권을 보장받은 귀족의 재산과 동일시했고, 그에 따라 봉토를 보유한다는 것은 명예롭고, 정당하고, 합법적이고, 귀족적인 것과 동일시되기 시작했다.

이후 프랑스 왕실이 지방 세력들을 제압하고 관료제를 정비하면서 이러한 봉토의 개념도 프랑스로 흘러들어왔고, 후기 카페 왕조의 왕들은 이를 왕권 강화의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즉 귀족 지위와 봉토의 연결, 봉건법과 봉건적 종속의 개념은 중세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이 아니라 13세기 및 그 이후의 이데올로기였으며, 지방분권화의 결과가 아니라 반대로 중앙집권을 위해 개발된 도구였다.

'봉건제' 이론과 달리 중세 서유럽의 국왕은 이론적으로 '봉신들을 거느린 대영주'나 '봉토를 부여하는 자'가 아니라, 로마법과 기독교적 전통에서 기원한 '영토와 그 백성으로 구성된 자연적인 사회 단위인 국가의 최고 통치자'였다. 예를들어 1300년 이전 프랑스에서 왕을 순전히 봉건적 관계의 관점에서, 즉 '그 또는 그의 선대가 토지를 봉토로 부여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권한을 가진 영주'로 언급하는 글은 찾아볼 수 없다. 중세 왕국에서 왕의 신하들은 귀족들 뿐이었다는 인식이나 이를 봉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후기 중세의 법률서를 잘못 해석한 데서 비롯된 근대적 관습이다.

로마 제국 이래로 유럽의 모든 군주권은 본질적으로 계약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중세 통치자들은 단순히 귀족 신하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하들을 공정하게, 그리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 통치하는 것이 이상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근대 역사가들은 중세 후기의 성문화된 봉토법에서 발견되는 계약적으로 보이는 관계가 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고 잘못 추정했고, 왕과 제후들의 '봉신'이 아닌 대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아무런 권리가 없는 농노로서 착취당하는 것이 중세 시대를 관통하는 본질인 '봉건제'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봉건제라는 개념 자체가 북부 이탈리아의 법률서에서 유래했지만, 중세 프랑스 법학자들과 근대 역사학자들은 프랑스가 이탈리아의 선례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려 했고, 계몽주의자들은 이탈리아를 중세의 '봉건적' 타락에서 한발 벗어난 르네상스와 시민 문화의 땅으로 이상화했다. 이들은 봉건제의 기원을 훨씬 오래전인 프랑크 왕국 시대, 이탈리아가 아닌 알프스 이북에서의 게르만족의 종사 제도와 은대지 제도의 결합에서 찾았다. 그 결과 봉건제의 원조인 이탈리아가 봉건제의 주변부처럼 보이게 되었다.

4.6. 13세기

4.6.1. 중세 후기 서유럽의 번영

4.6.2. 프랑스의 중앙집권화

앙주 제국을 붕괴시킨 필리프 2세와 그 후계자들이 체계적인 정부와 법률을 확립하고 프랑스 왕국의 많은 지역에 걸쳐 보편적인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200여년에 걸친 무정부 사태는 서서히 종식되었다. 이후 프랑스 왕국에는 영지 단위를 넘어선 단위의 국가, 국민, 애국심 등의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개념 자체는 잊혀진 적이 없었고, 국왕의 실권과 관료 체계가 그것들을 활용할 만큼 충분히 강해진 것이다. 그 덕분에 필리프 오귀스트와 그의 후계자들이 프랑스 전역에 대한 왕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새로운 사상'을 강요한 것치고는 거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필리프 2세는 이탈리아 법률가들이 만들어낸 봉토법 개념을 일종의 왕토사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국왕 법정에서 귀족은 곧 봉토 보유자로 정의되었고, 왕국의 모든 영지의 원래 주인은 국왕이라고 선언되었다. 1203년 노르망디를 정복한 이후 프랑스 왕실 칙허장에서 '봉토와 충성 서약'이라는 문구는 거의 표준이 되었으며 1224년 루이 8세는 잉글랜드 왕들이 가진 프랑스 영토들에 대한 정복을 '푸아투 봉토를 포함한 프랑스 왕국의 모든 봉토를 몰수'한다고 표현했다.

백작령이나 공작령이 후계가 단절되어서 왕에게 돌아갔을 때나 세습을 통해서 영지를 획득했을 때, 혹은 돈을 주고 영지를 사들였을 때, 프랑스 왕들은 새로운 백작이나 공작을 임명하는 대신 왕실 직할지로서 계속 다스렸다. 이 과정에서 치안판사(bailli)나 지사(sénéchal) 등 국왕이 임의로 임명하는 '직할지 관료' 조직이 발전했다.

흔히 프랑스의 중앙집권 과정을 프랑스 통일이라고 표현하나, 사실 이러한 점진적인 합병은 통일이라기보다는 얼기설기 긁어모아 이어붙인 형태에 더 가까웠다. 당시 프랑스의 여러 지방들은 국왕의 법정도, 또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봉건 영주도 아닌 공동체에서 합의된 관습법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프랑스 왕들은 저렇게 긁어모아진 영지들의 법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았다. 단지 파리 고등법원의 법관들이 왕국의 모든 분쟁을 최종적으로 해석하고 판결할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통제했을 뿐이다. 이 경향은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 이어진다.

한편 14세기 중반까지 정기적인 조세는 프랑스 왕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카페 왕조의 왕들이 전국적인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한 것은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하기 위한 부조가 최초였던 것으로 보인다. 1166년 루이 7세는 예루살렘을 지원하기 위해 왕국 내 모든 사람에게 5년 동안 수입의 1/20에 해당하는 세금을 부과했고, 1188년 살라딘 십일조에 대한 규칙이 만들어져 십자군에 참여하는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징수된 세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

루이 9세는 십자군 전쟁, 자신의 몸값, 그밖의 다양한 전쟁을 위해 왕령지 전역에서 세금을 징수했으며, 장남의 기사 작위 수여와 장녀의 결혼을 명목으로 최초로 타유세(Taille)를 징수했다. 잉글랜드의 탈리지(Tallage)와 혼동되면서 더 오래된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중세 프랑스의 타유세는 13세기부터 중앙집권화 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되었고, 귀족들만이 아니라 지정된 지역의 모든 주민들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근대 역사가들이 상상한 '봉건적' 부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4.7. 14세기

4.7.1. 프랑스의 팽창주의

중세 최고의 법학 연구 기관이었던 파리 대학에서 양성된 법학자들이 프랑스 왕을 위해 열심히 펜을 놀려준 결과, '왕국의 방어를 위한 명백한 필요(necessitas evidens)'가 있을 때 왕은 왕국 전역의 일반 신민들에게서 부조를 받을 수 있다고 정당화하여 전쟁 보조세(subsidium guerrarum)가 탄생한다. 또한 프랑크 제국 시대 이후로 유명무실화 되었던 전 신민에 대한 군사소집령인 아리에르방(arrière-ban)도 부활하여 전국민에 대한 동원 체제가 시작되었다.

4.7.2. 백년전쟁과 그 이후

1360년부터 화로세가 도입되면서 신민소집령은 전쟁세 징수 수단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병력 소집 수단으로서도 넓은 전선에서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이라는 것이 백년전쟁 초반의 군사작전들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푸아티에 전투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신민소집령은 선포되지 않았다. 샤를 5세는 그 대신 화로세와 상품세를 걷어서 용병대를 고용하거나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을 모병해 상비군에 가까운 군대를 만들었다. 또 이 과정에서 군사에 대한 징집권과 훈련권도 왕의 고유 권한으로 넘어가는 법령이 재정되어 위에서 말한 치안판사(bailli)나 지사(sénéchal) 등이 행하게 된다.

위와 같은 중앙집권이 계속 된 결과, 왕이 다시 여러개의 영지를 묶어 공작령, 백작령으로 재편해 왕실 방계에게 나눠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영지의 징세권과 사법권과 징집권은 왕이 임명한 관리에 의해 행해지게 된다. 왕에 의해 새로 임명된 영주들은 이전과 같은 자유토지를 가진 독립적인 호족이 아닌 그저 대규모의 면세 토지를 보유한 지주에 불과하게 되며, 지방 의회와 왕이 임명한 관료들이 실질적으로 더 큰 권한을 가지게 된다. 때문에 백년전쟁과 부르고뉴 전쟁을 마친 프랑스는 프랑스 내에서 독립이나 분열이나 자치권 확대를 노리며 전쟁을 내는 귀족 세력은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국왕은 각 영지의 지방 의회와 개별적으로 협상을 해야했고, 전쟁 동안 그러한 협상 내지 계약은 계속 갱신되어야 했으며, 세금의 필요성 자체를 전쟁에서 찾은 특성 상 전쟁이 끝나면 그런 협상은 왕에게 좀 더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근세 앙시앙 레짐 동안 프랑스는 행정구역과 사법구역과 군사관구가 서로 전부 다른 이상한 모습이 나타났는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군사권과 행정권과 사법권을 각기 따로따로 점진적으로 왕이 사들이는 형식으로 프랑스가 통일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4.7.3.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지역은 중세 성기 이후로 가장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을 보인 지역이다. 한자 동맹의 결성이나 동방식민운동 모두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비약적인 경제 성장과 인구 성장의 결과로 나타난 일들이었다. 독일 지역은 더 이상 노예 말고는 팔 것이 없는 가난한 동네가 아니었으며, 광산업과 금속산업의 발전에도 힘 입고, 각지의 제후들이 화폐 주조권들을 황제에게 따내면서 화폐 유통도 활성화 되었다. 수 많은 자치 도시들이 발생하여 도시법이 발전하였고 독일의 도시자치법은 동유럽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때 많은 농노들이 한 몫 잡게 되었는데, 예컨대 ministerialis들은 도시 내 관료로서 사회적 특권을 획득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농노가 도시인이 되어 경제적 능력을 쌓았다. 이들은 그렇게 얻은 능력으로써 법제적 지위의 상승도 꾀하였고, 차츰 자유민으로 해방되었다.

15세기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사실상의 세습체제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합스부르크 황제들은 수 많은 제국 개혁을 추진했다. 영구 란츠 평화령, 제국 일반세, 영구 제국회의, 제국 재판소, 제국 통치 자문회 등 실제로 그러한 개혁은 다수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관료 지위가 토지와 일체화되는 경향은 계속 진전되었고, 결과적으로 제국 내부 개별 영지들은 개별 국가화되고, '지방분권적인 중앙집권'으로 발전한다. '지방분권적인 중앙집권'이란, 즉 영지를 가진 각지의 제후별로 내부적으로 중앙집권에는 성공했다는 뜻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신성 로마 제국 전체로서는 중앙집권 이룩에 실패한 채 국가연합과 연방국가 사이 느슨한 정치제로서 남았던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타격은 종교 개혁이었다. 이 현상의 결과로, 30년 전쟁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주권국가로서의 제국은 사실 상 소멸하게 된다. 합스부르크가 열심히 했던 개혁들은 중앙집권국가의 행정체계보다는, 현대 EU의 기구들처럼 국제기구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다. 명목 상의 황제위를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은 직할지인 오스트리아 등지를 다스리는데에 집중하게 된다.

4.7.4. 이탈리아

일단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리소르지멘토 이전까지 딱히 '이탈리아 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오도아케르가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난 뒤 '이탈리아 왕' 칭호를 얻었다가, 돌고 돌아서 이탈리아를 침략한 프랑크인들과 카롤링거 왕조와의 관계 덕에 결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해당 칭호를 가져간다. 물론 온갖 공국들과 백국, 변경백국 등이 난무하지만, 다들 신성 로마 황제, 동로마 황제, 교황, 프랑스 국왕 등 각각 충성하는 주군 자체가 달랐으며, 여기에 따라서 해당 영지의 특징이 갈렸다.

4.7.5. 나바라 왕국을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이베리아 반도는 애초에 중세는 레콩키스타로 점철되어 있어서 피레네 산맥 이북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애초에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마지막 보루로 삼은 서고트 왕국의 잔여 세력들이 그 근원이었고, 그에 따라 프랑크 제국식 행정에 근원을 두는 봉건 제도는 애초에 발전하지도 않았다. 백작(count)과 공작(dux) 자체는 존재했으나, 그것은 로마법이 공통된 근원이어서 이름이 겹쳤을 뿐, 프랑크 왕국의 그것과 성격이 같지는 않았다.

이베리아 북쪽에서 군벌들이 지방을 장악하며 사후에 저러한 관직명을 얻은 것과 달리, 이베리아 국가들은 정복지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기독교 유민들을 정착 시키는 등 행정적 장악을 해야하는 입장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은 서고트 왕국 시절부터 로마식 법제가 잘 유지되었고, 그에 따라 도시 위주의 행정과 의회 개념이 잘 이어졌다. 의회(cortes)에 투표권이 있는 주도급 각 도시들은 일부 교구와 귀족의 라티푼디움을 제외한 주변의 행정을 장악하였다.

때문에 스페인, 포르투갈은 대토지 귀족이 군벌로 성장하여 왕에게 개기는 일보다는, 의회에서 귀족들만이 아닌 도시 부르주아나 성직 귀족들 등 다양한 계층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충돌하고 왕은 그러한 문제들을 조율하는 위치로서 권위를 행사했다. 말하자면 동시대의 북이탈리아랑 비슷한데 왕과 의회가 있어서 내전에 덜 시달리는 상황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열기 위해 대서양으로 나간 것도 포르투갈은 대토지 귀족보다는 상인과 도시 부르주아 계층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

5. 유사 봉건제도

봉건제도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의 기준에 따라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단순히 '행정 비용을 줄이기 위해 세금을 부여하지 않는 토지를 바탕으로 사적으로 자율성이 높은 집단을 만들어두는 제도'를 봉건제로 본다면, 봉건 제도와 유사한 형태는 중국, 로마, 조선 등 고도의 관료제를 발달시킨 나라에서조차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장 조선에는 과전법이 있었고, 명청시대 중국에는 실제로 봉건 왕이 존재했다. 청나라의 봉건왕이 사고를 친 것이 바로 삼번의 난이다.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대다수 국가들은 모두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이 아닌 지방의 유력자가 존재했고, 이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봉건제와 유사한 지방 분권 체제가 존재한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해서 개인의 친분에 따른 유사 봉건제가 유지되기도 했는데, 남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중앙과 지방의 대립은 21세기 현재도 존재하며,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또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1346년동로마 제국의 일부 영토를 점령한 후 세르비아 제국을 칭하고 펴낸 법전에 서유럽 국가들의 봉건제와 비슷한 법을 도입했다.

반대로 로마-게르만 제국인 카롤링거 왕조에서 발달한 '개인과 개인 간의 계약'에 바탕한 사회정치적 상황을 봉건제로 본다면, 프랑스-독일-이탈리아-영국을 제외하면 전세계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특이한 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중세 유럽사의 거장인 마르크 블로크의 경우 후자에 더 무게를 두어서, 카롤링거 제국 + (윌리엄에 의한 영국 정복 이후)영국 외 타 지역에서는 비슷한 제도조차 발생하지 않았다고 본다.

현대 학계에서는 전근대 국가 특유의 지방분권적 제도를 봉건제로 번역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封建(봉건)'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근대 일본의 영향으로 'feudal'을 번역하는 말이 되었는데,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동양의 봉건제도와 유럽의 'feudalism'이 명확한 유사성 없이 오히려 실제를 오도시키는 경향이 크다고 보고 있다. 양자 간의 어의적, 역사학적 유사성에 대해서 동질성보단 차이가 크므로 'feudal'을 '봉건'으로 번역함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지양하는 것이 중론. 실제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리즈(Loewe and shaughnessy [eds.], 1999)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번역할 때 'feudal'이라는 용어를 아예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사학계에서는 feudal 를 번역할만한 마땅한 대체 번역이 없기 때문에 feudal 을 '봉건'으로 번역하는 경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 봉건이란 말이 단순히 '구시대적 사회상'을 부정적으로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 변질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혼란을 만들고 있다.

6. 동아시아의 봉건제도

6.1. 중국

파일:주나라의 봉건제.png
갑골문에서 작위가 보이는 걸로 보아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했었으나,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된 건 기원전 11세기 중국에서 주나라가 사용한 제도다. 봉토를 하사하여 나라를 이루게 한다는 뜻으로 '봉건(封建)' 제도라고 불렀다. 왕은 중앙의 직할지(왕기, 기내, 중국)만 직접통치하고 나머지 땅은 제후에게 나눠주어 다스리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기원전 11세기 당시 봉토라는 것은 실제로는 전혀 주나라의 땅이 아닌, 화하족이 아닌 이민족이 들끓는 낯선 땅이었다. 즉, 땅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저기 가서 식민지를 세워라. 잘 세워지면 대대로 거기 지배권을 줄게' 하는 것. 이렇게 분봉된 제후는 주나라의 가부장적 질서, 즉 종법 질서에 따라 주나라 천자를 모시는 신하가 되었다. 이들은 주나라 왕실과 같은 성씨를 가진 가문원이었으므로, 동성(同姓) 제후라고 불린다.

20세기 이후 학자들은 봉건을 봉방건국(封邦建國 또는 봉토건국封土建國)으로 풀어서 설명하기도 한다. 천하의 주인 천자가 공훈을 세운 자, 지방의 세력가/유력자, 대규모 씨족의 장, 왕족 등에게 토지를 봉(封土)하여 나라를 세우게 한다(建國)는 개념이다. 國은 정치주체로서 실질적인 지배권력을 행사하는 성읍을 뜻하고 邦은 國의 지배력이 미치는 범위의 땅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영지를 봉하고 성읍을 세워 지배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시스템은 중세~근세에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보이는, 이 문서 상단에서 설명한 Feudalism 통치와는 전혀 다르다.

한편 주나라 주변의 다른 도시국가들도 이성(異姓) 제후라고 불리며 가문은 다르지만 주나라의 종법 질서에 편입되어 주나라 중심의, 중국 특유의 천하관에 끼어들게 된다.

흥미롭게도 "봉건"이라는 용어는 근대에 다시 언급되는데, 이때는 고대 중국사의 개념이 아니라 구미권의 의회정치에 대한 동아시아적 이해라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전제군주적 통치는 "군현"으로 일컬어졌다.

중국식 봉건제의 소멸은 상당히 이른시기에 시작되었다. 기원전 700년 경 주나라가 봉건제의 단점들로 분열하고 내분에 휩싸인 춘추전국시대가 벌어지자, 상앙, 오기, 한비자 등 법가사상가들이 봉건제의 모순을 지적하며 중앙집권적인 국가제도의 구축을 주장하였으며 전국시대쯤 이 법가의 중앙집권사상을 수용한다. 그리고 기원전 200년경,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법가사상에 기반해 지방의 군사권을 박탈한 군현제로 개편한 것을 기점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진시황 본인이 죽고나자 과거 봉건제후들의 반발로 인한 내전으로 나자 군현제는 곧바로 붕괴한다. 그러나 이후 중국을 통일한 한고조 유방을 비롯한 한나라는 중앙집권제의 장점을 파악하게된다. 한나라의 봉건제와 중앙집권제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대표적인 논쟁이가 역이기와 장량의 젓가락 논쟁이다. 장량이 유방의 밥상에서 젓가락을 부서드려가며 봉건제의 단점을 지적하자 유방은 역이기를 새상물정 모르는 유생놈이라 까버리고 봉건제도 도입을 즉각 철회해버린다.

그러나 흉노의 공격과 초한전쟁의 후유증 과거 진나라의 실패 사례 등 현실적인 이유등으로 일시적으로는 봉건제와 군현제를 섞은 군국제를 도입하여 제후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한편 한신 장도 등 이성 제후왕들을 유씨 동성제후왕으로 교체한다. 이후 유방 손자대인 한경제때 조조의 개혁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제후왕들의 권리를 박탈하기 시작, 이후 이에 제후왕들이 오초칠국의 난으로 반발하였으나 이를 진압한 뒤 본격적으로 군국제까지 폐지하고 군현제를 도입하여 봉건제를 탈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중국의 너무나도 넓은 영토와 이민족의 공격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하여 중국의 변방지역에서는 독자적인 군사권을 가진 세력들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하여 당나라시대 때까지 절도사 같은 유사 봉건제가 등장하게 된다.

6.2. 한국

중국사의 봉건제는 이미 기원전에 끝났고 한국사 왕조들은 고대부터 중국의 군현제를 참조했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중국식 봉건제는 도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양의 풍조를 따라 20세기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조선 말기까지 싸잡아서 '봉건 시대'라 불렀는데, 위에서 설명했듯 '미개한 전근대 사회'라 요약한 수사에 가깝다. 요즘은 지양되고 있는 표현.

역사 내내 군현제를 지향했음에도 삼국시대에는 귀족들이 자체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걸 암시하는 기록이 무척 많다. 고구려만 해도 멸망할 때 귀족들이 사람 몇만호를 이끌고 투항했다는 식의 기록이 나오는걸 보면 귀족들이 자체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게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히고, 구체적인 행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실상은 알 수 없다.

한편 지방에 존재하는 군벌화된 호족 세력은 고려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신라 시대 말기의 몰락과 분열도 이 호족 세력들에 의한 것이다. 그 이후 통일된 고려도 그러한 호족들의 연합 세력으로 출발한 나라였다. 때문에 각지의 호족들이 여전히 사병을 보유한채 문벌 귀족을 형성하여 중앙 정치도 장악하였다. 음서를 통해 관료직도 상당수 세습되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관료에게 주는 급여였던 전시과 역시 그 시작은 호족들이 가지고 있던 영지를 전시과로 설정한 것이라서 호족을 관료로 임명하며 그들에게 다시 그대로 그 영지를 전시과로 주는 식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귀족들의 영지처럼 세습되었다. 공음전 역시 이런 현상을 부추겼으며 그렇게 고려 시대 내내 지방 호족 군벌이 계속 존재하였다.

조선에서는 창업군주 태조 이성계 시대부터 무력의 중앙집권화를 핵심적인 정책으로 삼았다. 하지만 태조는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해 알 수 있듯 중과부적으로 실패했다. 그러다가 그 후인 태종 이방원 시대에 이르러서 공신 위주의 군권 편성과 사병 혁파로 이런 불안정성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자리잡았다. 기존의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반독립적으로 존재했던 탐라국(제주도)의 탐라 성주가 폐지되고 완전히 군현제가 정착된 것도 이 시기이다.

6.3. 일본

일본의 봉건제는 헤이안 시대 율령제의 붕괴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다. 공지공령제 원칙에 따라 농민이 군사로 징집되어야 하는데, 일본 조정의 행정 경험은 영 미숙했다. 지방관의 수탈이나 노역, 강한 세부담 등으로 인해 농민들이 본적지를 벗어나고 도망하거나 유력자에게 위탁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결국 율령제가 붕괴되어 토지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개간지를 영구히 면세 시켜주는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이 정책은 결국 대귀족과 호족들이 장원을 형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렇게 조정이 통제할 수 있는 농민들이 줄어들어 군사력이 붕괴되자, 지방 곳곳에 해적과 군당이 날뛰게 됐는데, 조정은 이를 통제하기 위해 중하급 귀족 계층을 군정 일치의 지방관인 국사(고쿠시)로서 파견했다. 이 중하급 귀족들은 일족 전체가 직업적인 전사 집단이 되었고, 후대까지 이어지는 무사의 시조가 된다. 또한 지방관으로서 파견된 이들은 지방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장원을 형성하고 지방의 봉건 귀족 세력으로 변하게 된다.

가마쿠라 체제의 초창기 다이묘들도, 무로마치 체제의 슈고 다이묘들도, 에도 체제의 신반 ~ 도자마 다이묘들도 모두 막부라는 구심점하에 자신의 영지를 인정받고 협력하며 세습하는 봉건적 성격을 갖고 있다. 무로마치와 에도 시대 사이 전국 다이묘 정도가 예외적.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존재한 다이묘와 이들이 다스렸던 등의 제도를 모두 합쳐 '봉건 제도'라 불렀다. 이는 당대 일본 유학자들이 자국의 정치·사회 상황이 중국의 봉건 제도와 유사했다고 보고 같은 호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다만 일본의 봉건 제도는 유럽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평가된다. 대신 일본의 봉건제가 유럽처럼 쌍무계약의 형태로 존재했는가를 놓고서 논쟁의 여지가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봉건제 당시 유럽처럼 농노들 또한 존재했었다. 다만 에도 시대의 경우에는 중국의 군국제와 유사한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이유는 쇼군의 직할 영지가 300~400만 석에 달한데다가 여기에 또 쇼군의 직속부하인 하타모토들에게 나눠준 봉지도 그쯤 되었는데 전국시대 기준으로 일본 전토의 석고지만 그 당시에는 1700만 석이었음을 감안하면 전국의 반 가까이 휘두르다시피 했다. 이는 봉건 제후를 세우지만 봉건 제후들은 몽땅 왕족들로만 세우고 또 기존의 봉건제와는 달리 직할지를 상당히 많이 늘렸던 군국제와 유사한 면이 많다.

다만 실제 생산량과 명목상의 석고는 조금 달라서, 홋카이도의 마츠마에 번은 너무 추워 쌀농사 자체가 안 되었지만 에조와의 무역수익을 근거로 1만 석 격 다이묘로 인정되었고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요충지로 인정된 이후로는 3만 석 격으로 격상되었다. 대마도는 자체적인 소출은 1만 석에 미치지 못하고 섬 바깥의 월경지까지 합친 번 단위로 계산하면 1만 석을 맞추는 정도였는데, 조선과의 무역과 외교를 감안해 시대에 따라 수만~10만 석 격으로 인정받았다. 그 외에도 각 번이 자체적으로 개간이나 토지조사를 통해 실제 석고를 불리기도 했으며, 중앙정부에서 이걸 파악을 했다 하더라도 석고 개정은 다이묘 사이의 알력다툼을 유발할 수도 있는 문제라서 실제 석고에 맞춰 바꿔나가기는 쉽지 않았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명목상의 석고와 실질적인 생산량의 차이가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조슈 번은 메이지 유신 즈음에 이르러 공식 석고와 실제 석고가 3배나 달랐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근대에 군현과 더불어 사용되었는데, 이쪽은 정반대로 기존 정치구조를 "봉건"으로 칭하고 "군현"을 추구해야 할 새 정치제로 보았다. 이는 쇼군 하 다이묘로 권력이 분화되었던 점을 봉건에 대입하고, 근대 유럽의 중앙화 국가를 군현에 대입하였던 까닭이다. 이러한 심상은 "폐번치현"을 비롯한 관련 용어에도 반영되었다.

메이지 유신폐번치현을 거쳐서 농노 자체는 폐지되었고 다이묘도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지주들이 채워 농지개혁이 실행되기 전까지 시골 지역의 농민들은 농노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7. 평가

서구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된 중세까기 풍조로 인해서, 수백년 간 봉건제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나쁜 것 정도로 평가되었다.

사실 이 '봉건제에 대한 평가' 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애매하다. 위의 유사 봉건제도 문단이나 동아시아의 봉건제도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여러 문화권의 지방분권적 경향을 죄다 봉건제도라고 퉁쳐 말하는 일도 흔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봉건제로 한정해서 '평가'를 내리려해도, 국가는 커녕 지방마다도 다른 것이 봉건제였다. '제도가 아닌 사회적 상황'이라는 표현은 괜한 것이 아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 중앙집권적 봉건제라는 해괴한 체제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봉건제가 무조건 지방분권적이라는 관점도 틀렸다. 노르만 정복 이후 앵글로색슨식 중앙집권 관료제에 노르만족들이 가져온 프랑스식 봉건제가 섞이게 되면서 탄생하였다.

특히 근대프랑스 혁명 때 혁명 정부는 '봉건주의의 철폐'를 선언했으나, 루이 16세 시절에는 이미 중세에 성행한 봉건주의 계약 따위는 있지도 않았고, 장원은 해체된지 오래였으며 농노들은 이미 다 법적으로 자유민이 된지 오래였다. 작위를 가졌다고 영지를 수여받지도 않는 대신 왕실 구성원의 경우 진짜로 영지를 일부 수여받기도 했다. 그냥 국유지를 하사하는 걸 영지라는 이름으로 준 것이다. 이 때도 이미 땅이란 계약서에 서명해서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었다. 기사는 없었고, 평민들도 총병과 보병으로서 군복무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뭐가 봉건제냐고? 농민들과 평민들을 괴롭히는게 바로 봉건제야."라는 순환논법으로 별 의미도 없이 봉건제 철폐를 선언한 것.

다만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사문화된 봉건적 특권을 내세우며 농민들을 수탈했으며 말이 좋아 자유민이지 실제로 어느 누구의 영향없이 땅을 가진 농민은 극소수였으며 그나마 자영농도 자기 땅인데도 봉건적 관습 때문에 귀족들에게 꼬박꼬박 지대를 납부해야 했다. 그리고 혁명시기에는 농민들 사이에서는 쫓겨난 귀족들이 자신들을 학살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이 외에 높은 빵값, 징세청부업자의 농간 등까지 합쳐 모두 봉건제 탓으로 돌려서 봉건제 자체는 아니지만 봉건제의 잔재때문에 농민들이 고생한건 맞고 혁명정부 입장에서도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말뿐이나마 봉건제를 폐지한다는 선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근대 유럽의 지식인들은 중세 유럽의 모든 것을 나쁘게 평가하려 들었다.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던 혁명의 시대였던 만큼 봉건제를 까내릴 수 밖에 없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현대에 와서는 중세 봉건제가 차라리 더 나은 부분도 있었다는 점이 재조명되기도 한다. 의외로 중세 농노의 삶이 19세기 영국산업혁명기 유럽의 도시 노동 빈민보다 오히려 더 적은 노동시간, 더 많은 휴식, 더 많은 사회적 보호 장치를 누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는 등 중세의 여러 단면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게 되었다.

노동자가 쓸모가 없어지면 자르고 새로 고용하면 됐던 산업혁명 시기와는 달리, 중세의 농노는 외부에서 충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악독하게 혹사 시킬 수도 없었다. 오히려 빈 땅도 있고 행정력도 약해 농노가 도망칠 것을 우려해야 할 수준이다. 거기다가 "행정력이 약하다"라는건 다른 의미도 가진다. 국가의 개입을 걱정할 필요 없이 영주만 치우면 그만이기에 농노들이 폭동을 일으켜 뻘짓하는 영주를 쫒아내버리는 사례도 꽤나 흔했다. 이를테면 독일 지역에는 디트마르셴(Dithmarschen)이나 프리지아의 프리지아 자유국(Fryske frijheid)와 같은 자유농민 공화정이 들어서기도 했다. 원어인 Bauernrepublik는 국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농민들이 어떠한 지배자 없이 스스로 운영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후일 근대 공화정으로 이어지는 자유도시들도 중세 봉건제가 절정에 달한 시대에 생겨나고 발전했다. 도시법, 상법 등도 봉건제 시대가 남긴 유산이다.

당시 유럽의 산업 구조와 생산력, 전반적인 기술력으로는 이 이상의 체제를 만들기 쉽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를 식민지화를 하기 전의 여러 '봉건제의 사회 구조'와 동시대 '중앙 집권적 관료 기구를 갖춘 군주제 국가'를 비교해볼 때, 봉건제는 내부적으로 광범위한 부조리, 잦은 전쟁과 약탈, 폐쇄적인 신분제 등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기에, 과연 봉건제가 그 당시에 최선이었냐라는 의견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 부분도 중앙 집권 국가들도 보였던 모습인 만큼 저걸 도식적인 이분법으로 봉건제만의 문제였다고 할순 없다. 경제학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야기하는 "시장이냐, 국가냐"의 논쟁처럼, 이는 정치의 문제로 바라보는게 바람직하다 보여진다.

마르크 블로크는 주저 《봉건사회》에서 저항권의 주요한 기원이 서양 봉건제도에 있음을 갈파한 바 있다.

8. 마르크스주의 사관에서의 봉건제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서 모든 인간사회는 '원시 사회 - 고대 노예제 사회 - 중세 봉건제 사회 - 근대 자본주의 사회 - 공산주의 사회'의 5단계를 거쳐 발전한다고 설명된다. 마르크스는 이 순서대로 사회의 토대인 경제구조가 발달하고 그에 맞게 상부구조(정치, 문화, 종교 등)가 변화하면서 역사가 발전했다고 보았다. 이 주장은 20세기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국에서 '봉건'이라는 단어를 구시대상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도 마르크스식 사회발전론에서 유래했다. 정작 본래의 마르크스주의는 동양(일본도 포함. #)의 경제사를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라는 별도의 이론으로 설명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따르면, 아시아는 고대 노예제와 비슷한 사회에 해당했다. 이 이론과 다르게 한국사의 보편성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된 주장이 '동아시아에서도 봉건제가 쇠퇴하는 동시에 산업화의 맹아가 나타나고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이었다.

근대의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에도 시대를 봉건제에 해당된다고 자평했으며, 조선과 한민족에 대해서는 봉건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노예제 사회에 머물러 있다는 정체성론을 주장했다. 정체성론의 대표적인 학자인 후쿠다 도쿠조는 1903년 봉건제의 유무로 조선과 일본의 차이가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현대 한국의 한국사학계는 이런 식의 정체성론을 식민사관이라 규정해 배격하고, 한민족 중심의 자본주의 맹아론을 펼쳐 반박했다. 일제강점기백남운 등은 '아시아적 봉건제' 개념을 도입해 통일신라와 고려가 봉건제 사회였고 조선이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조선의 지주-소작농 관계가 농노제를 비롯한 서양의 봉건제와 같다는 시각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동양의 전근대를 봉건적이라 보고 거기에 자국의 사정들을 끼워맞추려는 시도들은 결국 맹목적인 유럽중심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로는 모조리 논파되었으며, 한국에는 봉건제가 없었다는 것과 일본에는 봉건제 비스무리한 무언가(?)는 있었으나 유럽의 봉건제와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합의되었다.

9. 봉건제와 현대 지방자치

현대 유럽권은 동아시아권에 비해서 지방자치와 지방균형발전이 상대적으로 잘 이뤄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중앙집권적 관료제인 동아시아 전통과, 봉건제인 유럽 전통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견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실상은 꼭 그렇지도 않다. 전근대 시절 봉건제는 현대의 지방 자치와 달리 무력을 갖춘 지방 토호의 폭력적인 통치로 인해 오히려 시민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방해하고 억압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혁명 전 자유주의자들은 봉건영주와 대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계몽 전제군주에게 협력해 봉건영주를 타도하고 절대왕정 성립에 큰 역할을 한다. 일본 같은 경우도 오히려 봉건제를 극복한 메이지 유신 이후에야 세력을 떨칠 수 있게 되었는데 근대국가 정비에 중앙집권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전근대 봉건제와 현대 지방자치제를 동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시대적인 변화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한편 현대 지방자치제도라는 단어(municipality)의 어원은 라틴어 Municipium 이다. 이 무니키피움은 자치가 행해지던 도시를 말했다. 또한 중세의 체제를 그냥 봉건제라고 퉁치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고대 로마에서부터 이어진 도시 자치 전통은 가톨릭 주교 선거를 통해 게르만의 체제인 봉건제와 별개로 계속 이어졌다. (자유도시코뮌 항목을 참조.) 중세 유럽은 봉건제와 다른 연원을 두고 있는 질서가 계속 이어진 이중적인 세계였던 것이다. 지방자치의 기본적 형태인 지방법, 지방선거 등이 도시 자치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방자치제도의 뿌리는 봉건제가 아니라 고대 로마에서부터 이어졌다. 다만 봉건제가 지방자치 자체의 유래라고 할 수는 없어도 지방자치가 원활히 작동하도록 하는 요소인 지역 정체성이나 소속감, 지역 문화는 봉건제 전통이 중앙집권적 관료제 전통보다 더 영향을 줄 가능성은 있다.

10. 현대의 봉건제

의외로 최근까지 봉건제를 유지한 국가가 존재한다. 유럽 대륙의 안도라 공국이 1993년까지 봉건제를 유지했다. 1993년에 국민 투표로 헌법을 제정하기 전까지는 봉건제 국가였다. 그 이전이나 이후나 공동국가원수는 프랑스 대통령우르헬교구장인 건 같다. 그리고 영국 왕실의 직할령인 채널 제도사크 섬은 무려 2006년까지 봉건제를 유지했다. 놀랍게도 사크 섬에 거주하는 주민 대부분이 봉건제 철폐에 반대했다.참조

11. 창작물에서의 봉건제

판타지 및 양판소에서 이상할 정도로 열렬히 선망하는 제도이다. 양산형 판타지하면 중세 유럽이고, 그 안에 동양풍(그중에서 주로 일본)을 조금 첨가하는 게 흔한데 둘다 봉건제 사회로써는 가장 잘 알려진 문화권들이니 이 점도 한몫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히 대리만족을 위한 장르인 양판소들의 특성 상, 독자가 이입할 주인공을 위한 시대적 배경이다. 권력이 귀족 계층이라는 문학적 도구를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에, 주인공이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거나 획득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매우 쉽기 때문. 물론 현대 판타지도 돈 액수로 표현이 가능하니까 양판소 속의 봉건제만의 장점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양판소랑 현판은 수요층의 차이가 있는 법이니.

이런 대리만족용 배경도구라는 특성 상, 작품이 전재하는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작 중 봉건사회 상은 꽤 다르다. 한마디로 주인공이 귀족이면 귀족들이 군주를 이겨먹고, 주인공이 군주(왕, 황제)이면 군주가 절대권력을 가진다. 세세한 건 작품마다 다르지만 기본적인 클리셰는 그렇다.

현실 중세 분위기를 살리고 싶어하는 남성향 판타지면 귀족 권력이 강해도 그다지 이상하진 않은데, 바로크~빅토리아 시대의 심상이 강한 로맨스 판타지에서 귀족들 권력이 강하게 나오는 경우는 현실에 대입하면 꽤 이상하게 보인다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바로크 시대 쯤 되면 귀족들의 영지는 이미 다 해체 당한 시대인데. 물론 근세에 귀족들이 어마어마하게 강했던 신성 로마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 같은 경우가 있으니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덕분에 로판 속 제국과 제일 닮은 현실 나라는 러시아 제국이라는 농담도 있다. 물론 창작물에서의 평민들의 생활은 러시아 제국보단 훨씬 낫게 묘사되어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꽤 낮긴 하다. 그리고 이 문서에도 있는 것처럼 중세 분위기의 남성향 판타지 주인공들의 운명도 마냥 좋을 것이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프랑스의 귀족 남자들은 백년 전쟁에서 엄청나게 갈려나갔으니 말이다. 그 이후로도 프랑스의 대귀족들은 약화되었다.

Warhammer(구판)브레토니아는 이 봉건제로 운영되는 국가들이다. 문제는 브레토니아라는 진영 자체가 봉건제, 기사도, 농노제를 까려고 만든 블랙유머로 가득한 진영이라는 것. 이 동네는 농노들한테 "십일조" 대신 "십구조"를 걷는다. 당연히 농노들의 삶의 질은 개판이지만 브레토니아 땅이 씨앗만 뿌려도 저절로 밀이 자라나는 엄청난지력 보유+어쨌든 기사들이 농노에게 확실한 보호를 제공한다는 설정상 그럭저럭 유지되는 중이다. 이 동네는 고전적인 오크와 고블린부터 시작해서 반인반수 괴물들, 쥐 인간, 다크엘프 해적들, 사방에 널린 네크로멘서들, 바이킹, 지천에 널린 악마 신봉자들 등등등 살아남기가 굉장히 빡세다. 어디 동네 깡촌에서 대악마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설정인지라... 브레토니아 외에도 다른 진영인 제국(Warhammer), 드워프(Warhammer), 하이 엘프(Warhammer)도 국가가 봉건제도로 유지되고 있다.

Warhammer 40,000인류제국 역시 부분적으로는 봉건제다. 제국십일조만 충실히 납부한다면 다양한 제국의 귀족들이 행성총독의 지위를 세습해나갈 수 있다. 대표적으로 네크로문다를 통치하는 헬모어 가문. 또 스페이스 마린들이 통치하는 각 챕터 모성들, 아뎁투스 메카니쿠스가 통치하는 포지 월드 등 제국의 행정력이 간접적으로만 미치는 지역들이 많다. 다만 이들이 카오스와 연관되어있거나 세금을 미납하는 등 제국에 반기를 든다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작살나게된다.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는 중세 봉건제를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아주 잘 구현했다.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중세 봉건제를 이해하기에는 좋은 게임이다.

SF 배경으로도 봉건제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엔 초광속 기술의 한계로 인해 중앙집권이 불가능하다는 설정이 붙는 경우가 많다. 잘 알려진 예로는 이 대표적.

배철수의 만화열전 고우영 열국지에선 나레이션 배철수가 봉건제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하긴 했는데..
배철수 : (전략) 여기서 봉건제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저기 저 만화열전 출연자들이 호시탐탐 내 자리를 노리고 있는 것이 바로 봉건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 김경식.
김경식 : 예?
배철수 : 너 조심해. 야 김학도.
김학도 : 예?
배철수 : 너도 조심해.

12.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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