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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약을 받는 죄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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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賜藥죄를 지은 사람에게 죽음을 명하기 위해 임금이 직접 하사하는 독약.
조선 시대에 흔하게 사용된 약의 일종이지만 사람을 치유하는 일반적인 약과는 달리 이 약은 사람을 죽이는 약이다.
흔히들 이 약을 먹으면 죽으니까 죽을 사(死) 자를 쓰는 단어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줄 사(賜)를 쓴다. 임금이 '주는' 약이라는 뜻이다. 다만 황제가 신하들에게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혹은 건강관리를 도와준다고 약을 하사해주는 것도 사약이라고 표현되기 때문에 앞뒤 문맥을 파악하지 않으면 혼동할 수 있다.
사극에서는 죄인이 사약을 마시면 피를 토하며 죽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사약도 일종의 약이다. 몸에 흡수되어야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인데 약이 인체에 흡수되는 시간이 있어서 바로 죽는 일은 없었으며 신경을 자극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 피를 토하며 죽는 경우는 없었다.
다른 문명권에서 흔히 암살 같은 뒤가 구린 방식으로 사람을 죽일 때나 사용한 독약을 중앙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집행하는 사형에 이용한 드문 사례라고 하지만, 사실 다른 문명권에서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왕 혹은 권력자가 자살을 명령하고 그래서 명령받은 사람이 독으로 자살하는 경우 자체는 동서를 막론하고 어느 문명권의 역사에나 꽤 있는 일이었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도 독약이 든 잔을 마시는 형벌을 받아 결국 세상을 떴다. 중국에서도 '사사'라는 형벌이 똑같이 존재했다. 보통은 임금이 칼이나 밧줄을 보내주면 죄인이 알아서 죽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경우에 따라 독약을 내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며 남당 최후의 황제인 이욱이 대표적으로 독살로 생을 마감했고 송나라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악비가 사약을 받아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우리나라나 중국의 경우 후술하듯 사약이 공식적인 형벌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2. 사용하는 상황
조선의 법전 중 형법은 따로 제정하지 않고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에 준하여 시행하였는데 여기서는 오형 중 가장 무거운 형벌인 사형의 등급을 목을 졸라 죽이는 교형(교수형) < 목을 잘라 죽이는 참형(참수형) 순으로 구별해 두었다. 원래 능지처참이나 거열형과 마찬가지로 사약은 법전에는 명시되지 않은 특수한 유형의 사형 방식이다.참수나 교수형으로 죽이면 싸고 빠르게 끝날 것을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약을 달여 죽인 이유는 참수나 교수형은 공개된 장소에서 구경꾼들이 보는 앞에서 죽는 것인 데다 그것도 과거의 공개처형은 먼저 죄인의 양 귀에 화살을 꽂은 후 죄인의 웃통을 까거나 아예 다 벗긴 후에 조리돌림시키거나 형장에 며칠씩 묶어서 세워둔 뒤에 집행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심지어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장형을 집행한 후에 시행하기도 했기 때문에 모욕과 죄인이 느낄 수치심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벌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에게도 치욕적인 반면 사약을 마시는 건 조정의 입회인들만 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창피했다. 물론 조선시대의 국민 놀이인 승경도라는 보드게임의 영향으로 민간에서 사약을 받는 것 자체를 명예롭다기보다는 으앙 죽음 같은 식으로 희화화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무튼 공개적으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사약으로 죽는 것은 시신이 온전하게 보존되는 형벌이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해석], 즉 머리카락도 부모가 준 것이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강하던 유교 국가에서 목이 베이거나 사지가 찢기는 식으로 처형당하면 인간답게 죽지 못한 것이자 불효자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냥 참형은 그나마 목 잘리고 끝나지 거열형이나 능지형을 받는다면 사형 집행 후에 시체가 토막나 전국 팔도에 나눠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거리에 전시(효수 등)되는 꼴을 당하는데[3] 사약을 받은 이들의 자손은 그 시신을 정당하게 수습하여 매장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조선시대 양반 사회에서 제사의 비중을 생각해 본다면 이만큼 사형수의 여건을 보장해 주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약을 통한 죽음은 사형이 확정되어 국왕의 재가도 받았으나 정상참작의 여지가 조금 있거나 다소 억울한 면이 있는 죄인에게 내려졌다. 나름대로 최선의 기지를 발휘하여 고을을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불의의 사고를 막지 못해 큰 인명 피해를 야기한 벼슬아치라든지, 본인은 역모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으나 가족을 볼모로 한 협박 등으로 마지못해 가담한 경우 혹은 말 그대로 바지사장이었던 경우 등 정상참작의 소지가 있는 케이스에 해당한다. 대명률에 따라 16세 이상 남자는 역모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면 교형 대신 사약으로 처형하기도 하였다.
당연히 역모 주동자 및 적극 가담자는 사약은 고사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시의 사상적 요소를 빼고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3번쯤 쳐야 겨우 목이 떨어지는 참수형[4]은 굳이 거열이나 능지형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그냥 참형이 아닌 능지형을 받는다면 사형당한 뒤에도 시체를 훼손하여 전시하는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꼭 사약을 먹고 죽어야 했던 것은 아니고 본인이 싫거나 독을 먹어도 죽지 않는 경우엔 죽는 방법을 본인이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사약과 함께 목을 맬 수 있는 광목이나 비단을 같이 가지고 갔으며 만약 "내가 소지하고 있던 칼이나 독이 있으니 그것으로 자결하겠다."라고 요청한다면 그 또한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이 형벌의 정식 명칭이 사사(賜死), 즉 죽음을 명령한다는 뜻이다. 사실 이쯤 되면 사형이라기보다는 자결 명령에 가깝다. 이런 케이스의 대표주자가 연산군 시대에 처형된 전 영의정 윤필상과 폐비 윤씨를 사사한 이세좌로, 윤필상은 연산군이 자신을 죽일 것을 예감하고 미리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연산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스스로 술에 비상을 타서 마셨다. 그런데 독이 변질되어 효과가 없어진건지 뭔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죽는 바람에 결국 목을 매 숨졌고 이세좌는 민가에 들어가서 목을 맸다.
이 때문에 사약은 받는 사람도 거의 저항을 하지 않으며 사약을 내려준 왕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고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판결에 다소 억울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점까지 고려를 해서 왕이 그나마 곱게 죽으라고 사약으로 사형집행을 하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약까지 내려진 판에 결백을 주장해 봤자 이미 죽는 것은 확정이고 나중에 죽고 나서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재조사할 가망이나 있었다. 실제로 이극균은 갑자사화 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죽었다가 분노한 연산군에게 부관참시당하고 일가친척도 8촌까지 연좌당해서 변방으로 처박혔다.
다만 사약을 거부했다는 민담이 전해지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단종의 죽음이다. 단종의 사인은 정사인 세조실록에는 세조가 의도치 않았던 개인의 자살로 "노산군이 목을 매어 졸(卒)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으나 기타 야사나 민담에는 사약이나 사약을 거부한 타살로 기록되어 있다. 단종이 정통이라고 보면 부당하게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정당한 왕위 계승자였던 단종이 사약을 얌전히 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 단종이 부당하게 내려온 사약을 거부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5]
비록 죄를 지어 처형은 하지만 옛날 사람들 기준으로 명예를 지켜준다는 의미가 있다는 점은 옆나라 일본의 할복과 비슷하다. 당대의 사형 방법 중 신체훼손이 가장 적었다는 것[6]도 공통점이다.
3. 제조
사약의 제조는 내의원에서 담당했다. 하지만 제조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성분을 확실하게 밝혀주는 문헌 기록이 없는 터라 현재까지도 정확한 제조법은 알려진 게 없다고 한다. 즉, 전해지는 현존 한의약서 중에서 사약을 다루는 서적은 없다. 한의학 서적은 널리 유통되는 것이 많고 금서로 지정될 이유도 없어서 오래된 서적도 어지간한 책은 다 전해지고 있다고 무방하다.게다가 사약이란 것이 한순간에만 존재한 게 아니라 계속해서 전해지다보니 지역별로 사약에 들어간다는 성분에 대해 주장들이 다르며 기본적으로 주장되는 주성분은 독이 있는 나무에서 추출한 독 정도이다. 다만 예로부터 사약을 먹으면 온 몸에 열이 나서 죽는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열을 내는 성질을 가진 부자(附子) 계열의 약재(초오, 초두)를 넣었을 거라 추측하는 일이 많다. 부자는 투구꽃에서 추출하는 약이며 지금도 한의학에서 매우 흔하게 쓰이는 약이다. 아마도 가장 많이 쓰이는 약재 50가지를 꼽는다면 부자는 꼭 들어갈 것이다. 예외적으로 성종이 폐비 윤씨를 사사할 때 이세좌가 비소 화합물인 비상(砒霜)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수은을 넣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 또 맹독 버섯 중 하나인 화경버섯[7]을 달여서 재료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그 외에는 천남성이라는 풀[8], 짐독, 생금[9], 초오(草烏), 협죽도 등을 넣었다고 추정한다.
물론 위에서 말한 대로 정확한 제조 방법은 기밀로 유지되어 전해지지 않으니 추측들일 뿐이다. 야사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보면 실제 조제법은 한가지로 국한되지 않고 만드는 사람의 재량에 따라서 여러가지 방법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담이지만 하이포션처럼 독이 없는 그냥 약들을 마구잡이로 섞어도 독과 비슷한 작용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야사에서는 웅담이나 녹용 같은 고급 한약재를 이용해서 사약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간혹 사약에 독 성분은 없고 일반적인 한약을 데워서 준 것이며, 약재의 화학적 성분의 흡수 속도가 빨라 부작용으로 사망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데워서 먹는 보약은 다 사약이라는 이야기가 되며, 7~80년대 수험생들의 부모들이 총명탕을 달여서 자식들을 숙청했다는 말이 된다.
사실 한약재만으로 사람 잡는 독극물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상(비소)이나 수은은 확실히 즉효성 독약이고, 법제[10]하지 않은 부자, 초오, 천오두, 천남성 등등 또한 즉효에 가까울 것으로 예상되며 다량 혹은 법제되지 않은 행인, 마황, 반하, 파두 등도 위험한 약재로 꼽힌다. 알아둘점은, 애초에 '치유약'이란 훌륭한 물건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다만 질환에 따라 특정한 종류의 독극물을 정해진 분량만큼 섭취하는 것이 전부이다. 인류가 약이랍시고 쓰는 수많은 성분들 중에서 진짜로 아플때 이거 먹고 회복하라는 용도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성분은 단 하나도 없다. 원래 이 '약' 성분들은 해당 성분을 내포한 식물들이 해충이나 원치 않는 포식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생성해낸 독극물들[11]인데, 이게 우연히 인류에게 악영향이 없거나 약하면서도 특정 병이나 질환을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어서 약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한 가장 유명한 명언이 약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파라켈수스가 남긴 "모든 것은 독이며 독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량만이 독이 없는 것을 정한다."이다. 즉, 굳이 독성 성분이 든 약재를 써서 만든것도 있겠지만, 소량만 먹으면 약인데 과하게 먹으면 독이 되는 약재를 써서 만들었을수도 있다.[12]
하지만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원지에 유배된 죄인 앞까지 운반하는 과정에 재료가 변질되는 경우가 있을수 있고, 개체 특이성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에 따라 각각의 약재에 대한 반응이 다르기 때문에 남이 끓이던 거 맛만 조금 봤다가 응급실로 실려오는 사람도 있고 곰국 솥으로 한 솥 거하게 끓여 먹고도 멀쩡한 사람도 있다.[13] 이게 또 먹고 죽은 사람은 "나 이거 먹고 죽었으니 절대 먹지 마시오."라고 말도 못 하는데, 멀쩡한 사람은 "그거 먹어도 괜찮던데?"하고 소문을 내다 보니 산 사람이 죽는 사람을 계속 만드는 것이다.
사약의 주재료는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지만, 전해지는 얘기에는 굉장히 맛이 쓰다는 모양. 어우야담에는 권신 김안로가 사약을 마신 후 죽지 않고 한동안 살아있었는데 입이 써 생밤을 찾다가 기다리다 지친 나졸들에 의해 목이 졸려 죽었다고 써있다.
4. 효능, 효과
말 그대로 죽여주는 효능의 약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으나, 사약의 정확한 성분이 밝혀지지 않고 추측만 가능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효능으로 죽여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제조법이 제각기 달랐다고는 하지만 위의 사례에서와 같이 많은 양을 복용하고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사례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보면 바로 즉사하게 만드는 극약 계열보다는 서서히 죽게 만드는 형태의 약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때문에 신체를 참하는 극형만큼은 아니더라도 사약을 마신 죄인은 고열과 작열감, 구토와 어지러움 등 상당히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다가 죽었을 것이다.조선왕조실록에는 사약을 거듭 먹고도 죽지 않아 다른 방법으로 숨을 거두게 했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조광조도 사약을 몇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죽지 않았고, 송시열[14] 또한 사약을 다섯 사발이나 들이킨 다음에야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는 위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사약의 주재료로 알려진 부자, 비상 등은 한방에서 병을 고치는 약재로도 쓰였기 때문이다.[15] 야사에 따르면 조선의 임형수라는 인물은 무려 사약 16사발이나 마시고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개인의 신체조건에 따라 사약이 체질에 맞는 사람도 있어서, 그런 사람들에겐 암만 먹여봐야 그냥 보약일 뿐이었다.
대개는 바깥에서 먹은 다음 사약의 효과를 빠르게 하기 위해 군불을 지핀 방에서 앉아 있으면 약 기운이 서서히 돌다가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죄인이 사약을 마시게 한 다음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에 못을 박았으며 불을 지필 때도 단순히 바닥이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불을 때웠다. 약효를 더 좋게 해서 빠르게 보내려는 뜻이지만, 죄수는 고통스럽게 뒹굴면서 숨졌다고 한다.[16] 그 기간도 한두 시간이 아니라 한나절 동안이라고 한다. 만약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죽는다면 그 때는 교수형으로 대체한다. 다만 조선 내내 고위층을 대상으로 시행된 사형방식이니만큼 시간이 갈수록 제조기술도 발달해, 후기로 갈수록 약효가 확실해졌다고 한다. 왕명에 의한, 그것도 최대한 격식을 차린 집행방식인데 허구한 날 실패하면 문제가 안 될 리 없다.또한 사극에서 흔히 보이는 것처럼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는 것은 어디까지나 연출이다. 대표적인 예로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을 때, 이후 연산군이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면서 피를 토했다는 적삼을 움켜쥐고 갑자사화를 일으켰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이 피 묻은 적삼은 야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사약을 받으면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둔다는 것은 전혀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다. 체내에서 출혈이 발생하려면 혈관벽을 파괴하는 강력한 출혈성 독이 필요한데, 이런 독은 자연계에서는 뱀들이나 합성할 수 있지 한약재 같은 생약들을 달이는 것만으로는 쉽게 만들 수 없다.[17][18] 임금 입장에서도 굳이 피바다를 만들고 싶다면 그냥 참형을 명령하면 그만이지 굳이 모양새 좋게 죽이려고 만드는 사약으로 어떻게 해볼 필요가 없다. 또한 각혈은 사사형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신체 온건보전과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이기 때문에, 그만큼 한이 맺혔다, 고통스럽다는 것을 연출하는 장면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 옳다. 사극에서 지겹도록 사용하는 연출이다보니 실제 역사를 제대로 파고들지 않으면 대부분이 사약=피 토하며 사망이라고 생각한다.
5. 집행
먹기 전에 예법에 따라 임금을 향해 무조건 4번 절을 해야 한다. 그것도 약을 내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개요란에서 설명했다시피 형식상으로는 임금이 하사한 물건을 받았기 때문이고, 의미상으로도 죄인에게 예의를 갖추어 죽음을 하사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문제는 죄인에게 사약을 몇 사발이나 먹이고, 온돌방에 불을 때워도 죄인이 죽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라고해도 복어독 같은 맹독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런 맹독도 아무때나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수급 문제가 있기도 하고, 꼭 맹독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죽을 정도의 독만 있으면 아무거나 써도 무방했기 때문에 굳이 맹독만을 고집할 이유도 없었다. 또한 독이 있는 약재와 버섯이라고 해도 계절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그것까지 감안해서 약을 잘 만들어서 들고 가도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 독이 제대로 안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거기다 더운 여름날 먼 길을 행차해 사약을 가져가도 도중에 변질되어 약효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렇게 사약을 먹고도 죽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당시엔 사약을 넉넉히 챙겨가는 일이 많았다. 당연하겠지만 유배지 같은 곳은 교통이 불편한데[19] 가지고 온 사약이 다 떨어지면 경우에 따라서 사약을 다시 만들어 올 때까지 죄인을 살려주어야 하며, 안 그래도 가기 힘든 유배지를 왕복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준비해 둔 모든 사약을 먹은 후에도 안 죽는다고 살려주는 것 같은 일은 없다. 그럴 때는 차선책으로 스스로 목을 매고 죽으라고 끈을 같이 가져오기도 했고, 금부도사의 명령에 나졸이 갖고 있는 활의 시위를 풀어서 목을 매서 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야사가 좋은 예. 하지만 보통 이렇게 죽이는 것은 급박한 경우가 아니면 지체가 낮은 사람에 한하기 때문에, 지체 높은 사형수의 경우는 다음 사약이 당도할 때까지 목숨이 연장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이 경우에는 본인이 알아서 목을 매달아 죽어준다.[20] 폐비 윤씨 사사에 관여 했다는 이유로 죽은 이세좌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어떤식으로 되든간에 죽게 되는 운명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방식이 관대하다고 해도 어쨌거나 죽는 건 죽는 것이기에 죄인이 순순히 사약을 마시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21] 이러면 보통 사극에서 나오는 것처럼 문짝을 뜯어다가 죄인 위에 씌워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억지로 입을 벌려서 강제로 먹인다. 금부도사 휘하에 힘쓰는 군졸들이 많이 붙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6. 일화
사약 몇 사발 정도로 죽지 않은 경우가 꽤 많다. 때문에 상기했듯 약을 절대 일인분만 가져가지 않는다. 한 잔을 마시고도 멀쩡한 경우가 워낙 많아 여분을 챙긴 것. 하지만 그보다는 그냥 활줄을 풀어 목을 졸라 죽이곤 했다. 어쨌든 시신은 온전하니까. 다만 송시열처럼 한 정파의 영수쯤 되는 거물 정치인들은 감히 활줄로 목을 조르지 못해 애를 먹였다.- 단종은 사사 대신 교살 당한 것으로 기록된 첫 번째 인물이다. 다만 세조 당시에는 단종을 사사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숙종실록에서야 비로소 "사약을 가져간 금부도사 왕방연이 말을 못 잇고 있자 영월 관아의 공생이 활줄을 풀어 목졸라 죽였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 위에도 나온 일화지만 연산군 시절의 영의정 윤필상은 비상을 타먹고도 죽지 않아서 목을 맸다. 중종 대의 권신이었던 이항 역시 사약을 먹고도 죽지 않아서 교살했다.
- 중종~명종 때의 문신 임형수는 강단 있는 선비로서 윤원형의 집요한 미움을 사 을사사화 때 파직&귀양을 간 이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약을 가져온 의금부 서리에게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라며 사약을 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유분록》에 의하면 큰 사발에 술을 가득 탄 사약을 16사발을 먹고도 죽지 않아 2사발을 더 마셨고, 그래도 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항처럼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이두호의 만화 《임꺽정》에서 이 장면을 잘 묘사하는데, 호걸이었던 임형수는 사약을 가져온 금부도사에게 '술은 원래 권커니 잣커니 해야 하는데 보통 술이 아니라 나 혼자 마셔서 미안하다'라고 드립을 치고(...) 목을 조를 때조차 목침(나무베개)을 가지고 익살을 부리는 기개를 보여준다. 내용인즉 혀를 길게 빼며 흉하게 죽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며 살고 있던 귀양처 집의 벽에 구멍을 뚫고 밧줄을 집어 넣으면 자신이 들어가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 테니 그 줄을 당겨 목졸라 죽여 달라는 것. 금부도사도 그 부탁을 들어 주어 "당기시오"라는 임형수의 말을 신호로 병사 2~3명이 죽어라 밧줄을 당겼는데, 한참 후에 들어가 보니 밧줄에 걸린 건 임형수의 목이 아니라 목침이었다. 그는 벙찐 표정의 금부도사 일행을 보며 '처음이라 잘 될지 몰라서 시험 한번 해봤다' 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물론 그 다음엔 장난 안 치고 조용히 최후를 맞았다. 맹꽁이 서당에도 이 에피소드가 언급되어 있다.
- 숙종 때의 송시열 또한 사약 한 사발로 죽지 않아 입에 상처를 내고 연거푸 더 마시고 나서야 겨우 운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평소 송시열은 오줌으로 건강을 유지했는데, 그게 부작용을 일으켜 몸에 독소가 쌓이자 정적이었던 남인의 영수 허목에게 아들을 보내 처방을 부탁했는데 허목은 "약은 무슨 비상이나 한숟갈 먹으라지."하고는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분개한 아들이 돌아와 허목이 한 얘기를 전하니 송시열이 비상을 가져오라고 하자. 딱 봐도 정적이 독극물을 처방해줬다는 점 때문에 주위에서 모두 말렸는데도 송시열은 "허목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비상을 먹었고 어째선지 병이 나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비상이 잘 받는 체질이었던 모양.[22] 이 이야기처럼 사약에도 내성(?)이 있는지 송시열이 사약 두 사발을 먹고도 끄떡않자 서인의 거두이자 당대 정국의 중심이었던 송시열의 주변을 문인들이 둘러싸고 있었던지라 차마 목을 매서 죽일 수는 없었던 금부도사가[23] "대감! 제발 죽어주십시오!!"라고 애원했다. 결국 입에 상처를 내고 사약 세 사발을 연속으로 마시고 나서야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 《맹꽁이 서당》에 나오는 일화에서는 경종 때 신임사화(신임옥사)로 사약을 받고 죽은 조태채(1660~1722)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조태채의 하인 홍동석은 본래 형조의 서리[24]였다. 어느 날 죄인 누구를 유배 보낸다는 조서를 쓰라고 해 확인해보니 자신의 상전인 조태채가 아닌가. 하인된 몸으로 상전을 배신할 수 없어 붓을 집어던지고 절대 못 쓴다 강력 거부하자 열받은 소론 대신 둘에게 두들겨 맞고 반병신돼 서리직에서 내쫓겼다. 동석은 처자식까지 두고 진도까지 가는 조태채를 충실히 모셨으며 그 뒤 조태채에게 결국 사약이 내려지고, 아들인 조관빈은 부랴부랴 부친과 만나고자 출발했지만 금부도사가 먼저 도착한 뒤였다. 동석은 마지막으로 부자 상봉할 시간을 달라고 간청했음에도 금부도사가 거절하자 결국 사약을 뒤엎어버렸다. 왕이 내린 사약을 뒤엎은 것은 대역죄에 해당하여 당연히 금부도사 일행은 동석을 실컷 두들겨팼지만, 금부도사와 수행원들도 어명을 제대로 완수 못한 죄로 처벌을 면치못해 할 수 없이 이들은 조태채의 조언에 따라 진도로 가는 바닷길이 험해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사약을 물에 빠뜨렸다고 거짓으로 보고해,[25] 새 사약이 오는 며칠 사이 부자가 상봉할 수 있었다. 조태채는 아들에게 홍동석을 형제처럼 대하라는 유언을 남긴 다음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고, 조관빈은 유언대로 하인을 면천시켜주고 형제처럼 대하며 자주 왕래하고 챙겨주었으며, 조태채의 제사 때도 꼭 참석시켰다고 한다. 항아리 하나 분량을 다 쏟았을지는 좀 의문이긴 하지만, 그걸 떠나서 이런 일화가 전해지는 것은 조태채가 노론 4대신에 포함될 정도의 거물이라서 그렇다. 그게 아니었다면 당연히 활줄 크리였을 것이고 그 머슴은 오히려 조태채 집안 사람들에게 네가 섣부르게 나섰다가 사약 먹고 죽을 것을 목 졸려 죽었다면서 맞아 죽었거나, 왕명에 대한 직접적인 반항이기 때문에 목이 달아났을 수도 있다. 그런데 결국 일화가 전해진 걸 보면 누가 불었다는 소리인데, 과연 누가 어떻게 했을지 알길이 없다.[26]
7. 사극에서의 사약
사극 드라마에서 촬영 소품으로 등장하는 사약은 몸에 좋으라고 홍삼즙 같은 걸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탕약의 경우 얼룩이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김빠진 콜라를 많이 사용했다. 커피가 한국인의 식생활과 밀접해진 뒤에는 아메리카노도 사용한다.- 고려 창왕은 어린 나이에 참수형을 받았는데, 사극에선 사약을 마시는 걸로 순화하는 경우가 많다.
-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을 때, 깽판을 부리면서 끝까지 저항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2000년대까지의 장희빈을 소재로 한 사극들이 인현왕후전이나 연려실기술 같이 장희빈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 야사들을 참고하면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그렇게 연출한 것이지, 정작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는 장희빈이 표독스럽게 저항했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사실이라면 사관이 기록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인지 2010년대 장희빈 관련 드라마에서는 정사서의 내용을 일정부분 반영하여 조용히 마시는 장면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 1995년 SBS 사극 <장희빈>에서는,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 뜨고 숙종을 노려보았고 경악한 숙종이 "한 사발 더 부어라!" 라고 명령하여 자그마치 세 그릇을 입에 붓고 나서야 최후를 맞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야사를 반영한 것으로, 사실 야사 자체가 서인계 사관에게 남인계의 장희빈을 공격하느라 퍼뜨린 풍문일 가능성이 크다.
- 김혜수가 장희빈으로 출연한 KBS 사극 <장희빈>에서는 장희빈이 사약을 먹으려 하지 않자 문짝으로 몸을 누르고 들이 부어 먹이는 장면이 있었다. 짤방으로 좀 알려진 사진 이 때 조연 배우들이 꽤나 고생했다고 한다. 김혜수가 마구 몸부림을 치며 사약을 거부하는 연기를 실감나게 하는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로 몸을 단련했는지라 힘이 상당히 좋아서 조연들이 힘겹게 진심으로 붙잡고 먹이는 장면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김혜수 이전의 장희빈 시리즈에서도 저런 식으로 사약을 먹이는 장면이 나오며 야사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긴 하나 정사에는 없다.
- 2010년에 방영한 <동이>의 장희빈(이소연)은 위와 반대로 자발적으로 사약을 요청하고, 사약이 도착하기 직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품위 있게 원샷한다.
- 2014년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장희빈(김태희)도 자진하여 사약을 요청했으며, 희빈 장씨가 사약을 마시기 전까지 숙종이 고민하다 달려가고, 끝내 진짜 마실 줄 몰랐다면서 희빈 장씨를 부여잡고 오열하는 장면이 나온다.
- <여인천하>에서도 사약을 마시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경빈 박씨에게 항아리째로 입에 사약을 들이붓는 장면이 나왔다. 사실 조선시대의 후궁은 죄인이라도 왕의 여인이기 때문에 다른 남정네가 후궁의 몸을 만질 수 없었으며, 사대부 아녀자급 이상의 여자를 사사할 땐 사약을 방 안에까지 전달해서 방 안에서 절하고 마셨으므로 사실과 다르다. 제작 비화에 의하면 경빈 박씨의 최후를 실감나게 연출하기 위해 일부러 각색했다고 한다. 이때 사약으로 사용된 소품은 상술했듯이 김빠진 콜라였는데, 하도 많이 들이붓다 보니 경빈을 연기한 도지원의 코와 입에 콜라가 마구 들어가는 바람에 깜짝 놀라 엉엉 운 것이 비하인드 장면에 나왔다.
- 의외로 사사 장면의 역사 반영도가 우수한 쪽은 JTBC <꽃들의 전쟁> 45회 민회빈 강씨의 사사 장면이다. 강빈이 방 안에서 사약을 받고, 사약 한 사발을 다 마셨음에도 피만 토할 뿐 숨이 끊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워한다. 강빈의 외당숙인 송준길[27]이 사약을 더 가져오라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다 금부도사의 멱살을 잡을 정도.[28] 결국 정황상 수 시간이 지나서야 숨이 끊어진 것 같은 묘사[29]가 등장한다.
8. 사약을 받은 인물
※ 받았지만 마시지 않고 산 사람은 ★ 표시.8.1. 실존 인물
여기에 적힌 인물 중 희빈 장씨를 제외하고 사약을 거부하며 패악을 부리다 강제로 사약을 먹고 죽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경빈 박씨조차도 여인천하에서 끝까지 사약을 거부하다 강제로 사약을 먹는 장면이 밈화되어서 그렇지, 경빈이 사약을 거부했다는 기록은 야사로라도 전하지 않는다. 실제로도 악녀인 게 확실한 귀인 조씨나 숙의 문씨조차도 사약을 거부했다는 기록은 없다. 장희빈도 사약을 거부했다는 기록은 야사이긴 하지만, 사약을 끝까지 거부하다 강제로 먹었다는 기록이 야사로라도 존재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목종 왕송
- 김제남
- 민무구, 민무질
- 안평대군
- 금성대군
- 폐비 윤씨
- 경빈 박씨
- 동평군
- 복성군
- 박상★[30]
- 조광조
- 심정
- 김안로
- 악비
- 임형수
- 윤원로
- 김경징
- 민회빈 강씨
- 귀인 조씨
- 윤휴
- 송시열
- 희빈 장씨[31][32]
- 조태채
- 은언군
- 소크라테스
- 숙의 문씨
8.2. 가상 인물
- 렛츠고 시간탐험대 - 장동민★, 김주호, 조세호: 장동민은 역모죄로 사약을 받게 되었으나[33],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어 사면되었다. 하지만, 김주호는 군량미 횡량죄라서 사면되지 못했다. 조세호는 당시 죄인이 아니라 그 죄인들을 호송하는 나졸이었는데, 장동민이 먹지 않고 남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이유는 혼자 편하게 있었다고 오해받았기 때문이다.[34].
- 감수성(개그콘서트) - 오랑캐★: 조선 왕을 암살하려고 잠입했다가 발각되어서 사약을 받게 되었는데, 문제는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을 보낸 청나라 황제에게 충성심을 고하는 와중에, 이를 듣고 있던 이장군이 말이 너무 길다며 걷어차는 바람에 사약을 엎어서 마시는데 실패했다. 결국 오랑캐가 삐져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왕이 그를 달래느라고 진땀을 뺐다.
9. 관련 문서
[1] MBC 드라마 구암 허준의 장면.[해석] 신체와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3] 각 도의 감사나 관찰사들에게 전달되어 "이 새끼처럼 했다간 너도 이 꼴 난다? 조심해라"라는 경고를 주기 위함이다. 구한말에도 다르지 않아서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체는 갈가리 찢겨져 썩어 없어졌고 김홍륙은 교형 당한 뒤 백성들이 사지를 분해해버렸다. 물론 후자는 갑오개혁으로 사체 손괴가 불법이 됐기 때문에 분노가 극에 달했던 고종이 일부러 방치한 것에 가깝지만.[4] 망나니의 칼솜씨와 칼의 성능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3번이었다고 한다. 목을 자르는 건 미디어에 묘사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형수의 친족이 목을 단칼에 떨어지게 해달라면서 사형집행인인 망나니에게 돈을 쥐어주거나 사형수 본인이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질 정도. 예를 들어 1839년 기해박해 때에 신앙을 지키며 순교한 박희순(루치아)는 자신과 같이 순교할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단칼에 목을 베시오"라고 사형을 감독하는 관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참수형이 21세기에도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사형집행인은 단칼에 목이 잘리도록 수없이 훈련을 받는다고 하며(실패된 사례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사형수가 치사량을 조금 밑도는 양의 마약성 진통제를 요구해서 받아들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가 발명된 것도 기계적인 원리에 따라 일정한 힘으로 목을 한 방에 자를 수 있게 해서 사형수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인도적인 취지였다.[5] 사실 세조도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죽이는 것은 주저하고 있었는데 태종도 동복형제는 죽이지 않았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방간은 난을 일으켰음에도 유배지 전주에서 편히 천수를 누렸다. 그런데 여기에 불을 붙인 게 양녕대군이다. 양녕은 당시 이씨 종친의 가장 큰어른인데도 스스로 나서서 적통인 단종을 죽이라고 세 번이나 간했다. 이 때문에 현대의 창작물 중에서는 양녕이 세종에게 해묵은 앙심을 품고 있었다(그래서 세종의 적통인 단종을 해치도록 간언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6] 에도 막부 시대의 사형 방법은 할복 외에 책형, 화형, 참수형이 있었다. 화형과 책형은 말할 것도 없고 참수형도 목만 베고 끝나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선고되는 시자이는 남은 몸통을 타메시기리에 쓰고 버렸으며 중죄인에게 집행되는 고쿠몬은 추가로 벤 머리를 효수해 조리돌림했으며 절차가 다 끝나도 똑같이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고 암매장하거나 혹은 그냥 형장에 버려졌다. 그나마 가장 가볍게 처벌하는 것이 가족들에게 시신은 돌려주는 게슈닌인데 그마저도 공개참수인 건 매한가지였다.[7] 느타리와 비슷하게 생긴 야광버섯이다.[8] 뿌리가 돼지감자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한 입만 씹어도 혀에 즉각 마비감이 온다. 당연히 생으로 먹으면 매우 위험하다.[9] 수은에 생금을 섞으면 위장에 구멍이 나는 등의 효과도 있다.[10] 法製. 약의 성질을 그 쓰는 경우에 따라 알맞게 바꾸기 위하여 정해진 방법대로 가공 처리 하는 일.[11] 대표적인것이 바로 캡사이신이다. 본디 이것은 고추가 조류가 아닌 다른 동물들이나 곤충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독성 성분인데, 이게 마침 인류에게는 나쁜 효과가 거의 없다보니 향신료로 즐겨 쓰이게 된 것이다.[12] 병원에서 약을 처방해줄 때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정량만 섭취할것을 당부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과하게 섭취하면 그 때 부터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되기 때문. 또한, 감기에 걸렸을때 감기약을 먹어도 바로 뿅 하고 감기가 낫는게 아니라 며칠씩 먹어야 차도가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감기약이 실제로 감기를 치료해주는 물건이 아니라 독성 성분으로서 인체의 면역력을 자극해서 감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면역력이 증대되기를 유도하거나 감기 증상이 일어난 부위의 감각을 억제해주는 독성 성분으로 그저 섭취자가 느끼는 고통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는게 고작이기 때문이고, (이와 관련된 명언이 '감기약 안먹으면 감기가 일주일 가고 감기약 먹으면 감기가 7일 간다'이다) 감기약을 먹으면 졸린것도 감기약의 독성 성분이 불러오는 부작용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질병에 무작정 약 안먹고 버티는 것도 능사는 아니며, 다만 의사가 제안하는 처방보다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정량대로 잘 섭취하는게 가장 좋다.[13] 이외에도 사약 제조 시에 쓰였던 재료들의 종류와 양과 각 재료가 들어가는 비중이 완전히 일정하지 않아서 사약의 효능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14] 야사에 의하면 사약을 마시기 직전 송시열의 유언은 "약을 더 달여오게"였다고 한다.[15] 부자는 지금도 쓰지만 비상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다만 한의학은 아니지만 백혈병 치료제의 재료로 가공되어 쓰이긴 한다.[16] 이쯤이면 사약 먹고 방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사약보다는 열사병으로 죽었을수도 있다. 열사병은 체내의 열을 배출하지 못하는 증세다. 열사병은 체온이 올라가야 나타나는 특성상 보통 고온다습한 여름에 체온이 40도 이상 오를 때부터 증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겨울에도 과난방으로 인해 열사병이 희소하게 발생하는 사례가 있다. 조선시대 온돌만 해도 작정하고 불을 때면 60~70℃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으므로, 실내에서 과난방에 의한 열사병으로 사람이 사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17] 그리고 뱀독은 혈관에 투입되어야만 독으로 작옹하지 입 속에 상처가 있거나 위궤양이 있지 않는 이상 마시면 그냥 단백질에 불과해 위에서 소화가 되어 독성이 사라진다.[18] 사약의 재료로 추정되는 재료들 중 초오 같은 것들이 내장점막에 출혈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사극에서 나오는것마냥 단숨에 대량으로 피를 토하게 하는건 아니다.[19] 보통 유배지는 이름 그대로 도심에서 멀고, 오고가는 것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격오지에 있다. 제일 가까운 강화도만 해도 당시에는 배 타고 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20] 양반들 가운데서는 어차피 죽는 거지만 그래도 신분 낮은 나졸들의 손에 억지로 죽느니 자기 의지로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21] 죄인이 일단 사약을 마신다 쳐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토해내려고 할 수도 있다.[22] 조금 다른 버전으로 허목이 약을 처방해준 걸 아들이 가져오다가 수상해서 열어보니 독극물인 비상이 있길래 그걸 멋대로 덜어냈고, 그랬더니 송시열의 상태가 나빠져서 결국 사과하고 다시 제대로 된 처방을 받아왔더니 그제야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다.[23] 그건 둘째 치더라도 원래 사회적 명망이 있던 인물들은 함부로 교살할 수가 없었다. 원래 남인들은 송시열을 국문해 때려죽이려다가 경로 우대 차원에서 사약으로 바꾸었는데도 당시 노론을 비롯한 소론에서도 반발이 엄청 심했다.(결국 남인에 온건했던 소론 수장 박세체의 제자들은 이 일을 계기로 노론으로 전향했고, 역시 소론 영수 남구만이 원칙론을 내세우며 남인에게 온건책을 내자 젊은 소론 문인들이 반발해 소론을 탈퇴한다.) 게다가 송시열은 사약받는 당시에 수제자 권상하를 포함한 수많은 제자와 문인, 추종자들이 둘러서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부도사가 철판 깔고 교살했다 치더라도, 정국이 바뀌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눈에 불을 켜고 복수할 텐데 주 타겟이 누가 될지는 뻔하다.[24] 하급 공무원으로 글재주가 있는 천민들이 권세가의 도움으로 더러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25] 사실 맹꽁이 서당에서도 언급하지만 거짓 보고 역시 기군망상죄(임금을 속인 죄)로 역모죄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약을 엎은 일이나 사약 엎은 걸 숨기고 거짓말한 일이나 둘 다 목이 날아가는 일이라면 적어도 후자 쪽은 들키지만 않으면 살 가능성이 있으니 후자를 택한걸로 보인다.[26]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조태채와 함께 노론 4대신이었던 이이명의 사례가 있기에 전해지지 않았나 한다. 이이명의 집안은 이이명의 손자까지 연루되어 일가가 몰살당할 판이었는데, 이 상황에서 이이명의 아내가 손자라도 살리기 위해서 손자와 나이와 용모가 비슷한 노비에게 부탁해 이이명의 손자인 것처럼 위장해서 죽게 하고 손자는 몰래 빼돌렸다. 나중에 영조가 즉위해 노론 정권이 수립되자 손자는 돌아와서 가문을 이었고 영조는 이 소식을 듣자, 손자 대신 죽은 노비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어찌 보면 조태채보다 훨씬 더 중죄를 진 집안도(사약을 엎는 것을 넘어서, 아예 벌 받을 죄인을 빼돌린 죄) 문제시되지 않고, 도리어 상을 받았으니 조태채의 이야기도 노론 집권 이후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27] 강빈의 친정은 풍비박산났다.[28] 다만 이것은 극 중에서 얌전의 술수로 일부러 숨이 단번에 끊어지지 않게 조제된 것으로 묘사된다.[29] 날이 저물어 방 안이 어둑한데 오가는 대화의 분위기는 방금 전에 숨이 끊어진 것 같은 대화다.[30] 사사 판결은 받았지만 사약을 받지 못하고 엇갈려 산 케이스. 연산군의 폭거에 항거하여 사약을 받을 뻔 했지만 한양으로 올라가던 도중 고양이 한 마리 덕에 사약을 가지고 가던 금부도사와 엇갈려 목숨을 구했다. 이후 중종반정 덕에 사사를 면하게 되었다.[31] 야사이긴 하지만 사약을 거부해 강제로 먹였다고 전해지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현대인들이 “사약”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다.[32] 사극에선 사약을 받은 인물로 유명하다.[33] 처음에 제작진들이 '능양위왕'이라는 글자를 필사하라고 시켰는데, 이는 "능양군이 왕위에 오른다"는 뜻으로, 설정상 광해군의 치세일 때 이걸 쓰고 있었기 때문에, 빼도박도 못하고 역적으로 몰려서 끌려가버렸다. 제작진들이 왜 장동민을 역적으로 설정했냐면, 사전 미팅 당시에 멤버들에게 광해군에 대해 아는대로 얘기해보랬더니, 장동민 혼자 폭군이라고 얘기해서 그랬다고 한다.[34] 참고로 당시 사약으로 쓰인게 고삼차라서, 이를 먹은 김주호와 조세호가 질색을 했다.[35] 홍련의 언급에 의하면 홍련의 왕권 찬탈의 영향으로 귀양을 가고도 계속 소란을 피우면서 탈출하려고 하자 사약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양씨 가문 측이 몰래 대역을 세워 놓아 대신 사약을 마시게 하고 자양을 몰래 탈출시켰다. 그러나 이 또한 처음부터 자양을 이용하기 위해 살린 것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양은 양씨 가문에 의해 독살로 토사구팽 당한다.[36] 실존한 인물인 인목왕후가 아닌 가상 인물로, 마지막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37] 매회 사약을 받고 죽지만, 또 매회 부활한다.[38] 안색이 빨갛게 변할 때 즉시 마시는 걸 멈춰야 하고 붉은빛 안색이 지속될 경우 가관인 표정으로 내뿜게 된다. 뒤에 있던 부비왕과 신하들은 오열한다.[39] 후궁 소생 1황자로 황태자가 되었지만 황후의 음모에 누명을 쓰고 황제의 명에 따라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