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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8-03-25 12:42:47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전개 과정


1. 전조 현상2. 사고 당일 일지
2.1. 붕괴 당일 오전2.2. 대책 회의 그리고 영업 강행2.3. 붕괴2.4. 붕괴 직후
3. 언론 보도4. 구조 작업
4.1. 최후의 생존자 3인
5. 재판과 손해배상
5.1. 국가배상 부정

1. 전조 현상

사실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붕괴 전부터 건물 전반에 위험 신호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설계 후 초기 단계에서도 건물 내부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고 미세한 균열이 보이는 등 붕괴의 징후를 여러차례 보여왔었다. 붕괴 2년 전인 1993년에는 삼풍백화점 옆 레포츠 센터 2층에 있었던 금융동[1]을 1층으로 옮기고 내부 공사를 한 후 삼풍문고라는 대형 서점을 들여놓았고 1994년 1월 5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그러나 대형 서점의 특성 상 무게 괴물인 책장에다 또 엄청나게 많은 권 수의 책들이 들어차는 바람에 건물이 버틸 수 있는 한계점을 초과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레포츠센터와 중앙홀 지역에서도 균열이 1995년 사고 때까지 1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늘었다. 결국, 삼풍백화점 총관리부는 서점을 입점한지 1년 2개월 만인 1995년 3월 2일에 삼풍문고를 전격 철수시켰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균열이 점점 늘어났으며 중앙홀과 B동의 건물에 균열과 뼈대 구부러짐 현상이 일어나자 백화점 건물 전체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으며 붕괴일인 6월 29일경에 최고정점에 이르렀다.

또 붕괴 2개월 전인 1995년 4월에는 5층 북관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발생했다. 5월부터 이 균열에서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층 바닥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풍백화점 관계자들을 비롯해 상당수가 이러한 붕괴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변변한 자가진단조차 없었다. 5월에 들어 균열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자 관리자는 5층을 폐쇄하고 토목 공학자들을 불러 기본적인 검사를 한 결과 "건물의 붕괴 위험이 있다" 는 당연한 결론이 나왔고. 상식적으로 이쯤 되면 건물 전체를 폐쇄하고 접근 금지령을 내려야 정상인데, 이준 일당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붕괴 당일, 붕괴의 가능성을 눈치챈 경영진들은 백화점에서 달아났다. 이런 말도 안되는 작태는 19년 후인 2014년 세월호 사태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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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1995년 6월 28일, 즉 사고 하루 전에 촬영된 것으로, 펀칭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백화점 옥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펀칭은 무량판 구조의 건물에서 바닥과 지판이 기둥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하중을 넘어서면서 바닥이 처지고 기둥이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현상으로, 건물 기둥과 지판의 결속 구조가 무량판 구조물 안전성의 핵심임을 감안하자면, 당시 삼풍백화점 건물은 구조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황이었고 이는 다시 말해서 건물 붕괴 일보 직전, 아니 사실상 이 때부터가 본격적인 붕괴의 시작이라는 분석으로 귀결된다. 위의 실험에서 나무젓가락이 알루미늄 포일을 이미 뚫었음을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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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의 균열과 바닥이 침하된 5층 식당가의 모습. 이 사진 역시 사고 하루 전에 촬영되었다.

사고 전날부터 이미 지붕에 철근이 올라왔고 5층 음식점 일부 부분이 내려앉는 것이 목격되었으며, 사고 당일 아침 5층 식당가의 춘원 전주 비빔밥 전문점에 있는 기둥과 상판 사이에 10cm 되는 균열이 발견되는 등 건물은 이미 거의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으며, 이는 사실상 건물 붕괴가 눈 앞에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결국 붕괴 당일 식당가는 폐쇄되었다. 균열로 인해 떨어진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식사에서 나오고 천장에는 금이 많이 갔기 때문. 또한 귀중품 판매 매장의 물품들을 1층 등 저층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5층에 식당가와 같이 있던 상품권 매장도 1층 로비로 이동했다.

2. 사고 당일 일지

2.1. 붕괴 당일 오전

사고 전날부터 이미 지붕에 철근이 올라오는 펀칭 현상이 목격되면서 사실상 이 때부터 붕괴는 시작되었다. 이한상 삼풍백화점 대표이사를 비롯한 경영진들이 이에 대한 '대책'이라도 짜려고 했던 때는 사고 당일인 6월 29일이었다. 그들은 이날 5층에 있었던 일을 보고 비상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 날 오전 9시, 5층 식당가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점 주인 김서정 씨한테서 긴급한 전화가 걸려왔는데 그 내용은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집에 바닥이 돌출부분이 2m가 생겼고 천장이 조금 내려왔다. 빨리 와서 보라."는 내용이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5층 기둥에 무려 20cm나 되는 균열이 발견되었고 천장이 뒤틀려 내려앉아 있었다. 이는 곧 이미 거의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았으며, 이는 사실상 건물 붕괴가 눈 앞에 다가왔다는 의미였다.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점 바로 옆에 있는 우동 전문점인 '현지'에서는 천장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으며 냉면 전문점 '미전'의 천장도 가라앉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출근한 A동(북관) 4층 상품의류부 직원(당시 31세)도 건물 4-5층에서 들려오는 '뚝뚝, 드르륵' 소리와 함께 약 3분간 무거운 진동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이한상 사장은 오전 11시쯤 이영길 시설이사 및 건축과 이완수 차장과 함께 5층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1시간쯤 뒤 우동집과 냉면집의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하게 되었다. 또 균열로 인해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음식에 떨어져서 식사를 하러 왔던 손님들의 항의가 끊이질 않았다. 결국 5층의 식당가 영업이 전면 중지되고 출입이 통제되었다.

또 붕괴 5시간 전에 5층에서 큰 파음이 몇 차례 들려왔다. 파음은 옥상의 에어컨 진동 때문에 난 것으로, 이 진동 때문에 삼풍백화점의 균열들은 더욱 심각하게 벌어져갔다. 파음을 들은 몇몇 고객들이 이에 대해 신고하자 백화점 시설과장인 이영길 이사는 이 파음이 옥상의 에어컨 실외기의 진동으로 인한 붕괴 조짐을 오래되지 않아 눈치채었는지, 사고 당일 오후부터 에어컨 가동을 전면 중단하는 조치를 취하고 백화점 측에서는 에어컨을 껐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옥상의 균열은 이미 10cm나 벌어진 상태였다.

사고 당일이었던 6월 29일은 서울에 폭염이 기승을 부렸던 때였는데[2] 에어컨을 갑자기 꺼버렸으니 당연히 백화점 안은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의 열기로 인해 순식간에 찜통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당일 쇼핑을 온 쇼핑객들은 백화점에 들어서면서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이 덕분에 사고 발생 직전에 너무 더워서 쇼핑을 그만두고 백화점을 빠져나간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개그맨 이상해와 국악인 김영임 부부다.

한편, 삼풍백화점 측은 낮 12시 무렵 건물 설계 감리 회사인 우원건축에 연락하는 한편, 옥상의 에어컨 가동과 5층 입주업소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지시켰다. 또한 귀중품 판매 매장의 물품들을 1층 등 저층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5층에 식당가와 같이 있던 상품권 매장도 1층 로비로 이동했다.

2.2. 대책 회의 그리고 영업 강행

오후 3시, 그러니까 붕괴 약 3시간 전에 우원건축에서 임형재 소장과 이학수 구조기술자가 삼풍백화점에 도착했다. 4시에는 임원회의실(당시 삼풍백화점 남관 3층)에서 이준 회장 주재로 2차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임형재 소장은 칠판에 건물 구조도를 그려가며 "점검 결과 건물의 안전에 중대한 이상이 발견되었다. 그러니 속히 영업을 중단하고 빨리 긴급보수를 해야 한다."고 경영진에게 권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경영진들의 뻘짓거리가 작렬하였다. 매장을 폐쇄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것이다. 즉, 당장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큰 그림을 못 보는 멍청한 짓거리가 벌어진 셈이다.

거기다 이 회의에서 이학수 구조기술자는 "신공법으로 보수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진행되던 침하는 현재 멈췄다."고 하여 '빨리 긴급보수를 해야 하며 고객들을 대피시키라'고 조언했던 임형재 소장과는 다른 소리를 해버리는 실책을 범했다. 결국 이준 회장은 "큰 위험은 없으니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 공사를 하자."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회장이 영업 강행을 결정했으니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그래도 이영길 이사가 나머지 이사들과 함께 최종 결정권자인 이준 회장에게 상황을 알리고 즉각 고객들을 대피시킬 것을 건의했으나, 오히려 이준 회장이 경제적 피해를 생각하여 대피 조치에 노발대발하며 반대했고 이에 나머지 경영진들도 따랐다.

회의 이후 1시간이 넘게 구체적인 보수 계획에 대한 논의가 되는 한편, 임 소장은 설계 도면을 찾으러 서초동에 있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후 삼풍 측은 중앙홀 2층의 행사전을 모두 스포츠센터 1층으로 옮기고 2층은 통행을 금지했다. 결국 그렇게 사고의 피해를 최소할 골든 타임을 놓쳐버렸고 영업은 강행되었다.

2.3. 붕괴

이 무리한 영업 강행의 대가는 참혹했다. 붕괴 약 1시간 전인 오후 5시 경, 4층의 천장까지도 가라앉기 시작하자 직원들은 고객들이 4층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 그런데 백화점은 붕괴 50여 분 전에도 고객들로 시끌벅적했고 관리자들은 일부 상품들을 저층으로 옮기는 것 외에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계속 영업을 강행했다. 그리고 붕괴 17분 전인 오후 5시 40분, 이영철 시설부장에게서 임원실 회의장으로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내용은 "현재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보고였다. 이 전화가 오자마자 이준 일당들은 회의를 중단하고 백화점에서 다급히 도주했다. 물론 이 때에도 고객들에게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고 지 몸뚱아리만 빠져 나갔다. 그것도 지하 1층에 이준의 큰며느리까지 내버려 둔 채로. (큰 며느리는 나중에 구출되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삼풍 측은 중앙홀 1층의 통행과 영업을 중지하고 2층도 영업을 중지했으나, 이윤을 위해 백화점 1,2층은 영업을 강행했다. 당시 삼풍 측은 침하를 막기 위해 백화점 4각 구간에 뼈대를 세워서 가까스로 침하현상은 막았으나 1층이 침하현상이 멎자 5층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결국 1, 5층과 지하 1층에 막대한 균열이 생겼다. 경영진이 도주하는 동안에도 백화점 매장 안에서는 1,000여 명이 넘는 고객들이 여전히 쇼핑에 열중하고 있었고 종업원들도 영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고 발생 불과 7분 전인 오후 5시 50분에 경영진들에 의해서가 아닌, 삼풍백화점 직원들의 고함이 5층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긴급히 대피하라"는 소리였고, 건물이 우르릉 하면서 우는 소리도 들렸다. 몇몇 고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대피를 한 경우도 존재했으나, 지하에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듣지 못했다. 직원들이 비상 벨을 울리고 고객들을 뒤늦게 대피시키기 시작했으나, 무슨 수로 이 넓고 복잡한 백화점에서 1,000여 명도 넘는 사람들이 고작 7분 안에 무사히 탈출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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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 삼풍백화점은 땅을 향해 내려앉기 시작했다.

위 사진은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인근에 있던 어느 시민이 우연히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속의 콘크리트 먼지 구름의 형상이 붕괴 전 건물의 모습을 띠고 있어서 붕괴 직후 촬영된 사진임을 알 수 있다.[3]

건물의 남쪽 A동의 옥상이 무너져 그 곳에 있던 에어컨 실외기가 5층으로 떨어졌으며 이 거대한 충격으로 인해 나머지 아랫층들의 상판들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결국 20초 만에 지하 4층까지 붕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백화점 안에 있던 고객을 비롯한 종업원 1500여 명 대부분이 A동의 붕괴와 함께 그대로 매몰되어 사망하거나 다쳤으며 그 중 일부만 건물이 내려앉는 도중에 겨우 빠져 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4] 그리고 지하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과 지나가던 차량 수백대가 무너진 콘크리트에 깔려버렸다.
또한 생존자는 거의 지상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살아남았으며, 그 때 당시에 지하 1층 식품관에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서 지하 1층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사망했다고 보면 된다. 지하 2층과 3층은 주차장이라 사람이 있을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사망자는 거의 지하 1층의 사람들이고 지상 1층과 2층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또한 사진 속에서 보듯이 A동이 붕괴된 다음에도 B동은 멀쩡했으나 B동 역시 붕괴의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폐쇄 조치된 후 1998년 10월에 철거 공사에 들어가 1999년 1월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붕괴 사고 사흘 후 실시된 현장조사 결과 B동도 마찬가지로 설계 강도보다 모자란 강도로 지어진 것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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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들은 실제 사진이 아닌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CG로 재현한 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2.4. 붕괴 직후



붕괴 사고 직후 공중파 3뉴스 속보. 당시엔 저렇게 큰 건물이 부실공사로 인해 그대로 무너졌다는건 생각도 못했고 이 참사와 가장 비슷한 유형이었던 1993년에 발생한 청주 우암 상가 아파트 붕괴사고도 부실공사가 근본 원인이긴 하지만 LP가스 폭발이 건물 붕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삼풍 참사로부터 불과 2개월 전에는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도 발생했기에 참사 직후 초기에만 해도 테러 혹은 가스 폭발로 인한 충격으로 건물이 붕괴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대세였다.

그러나 이는 곧 MBC김은혜 기자[5]의 활약으로[6] 부실공사로 인한 붕괴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곧 대한민국 전체가 분노했다. 사실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처럼 한국의 부실공사로 인한 폐단이 하루이틀의 문제도 아니었지만 삼풍백화점은 그 정점을 보여준 사고였다.



▲ 백화점 붕괴 직후 소방관 및 기자들이 출동하여 촬영한 영상. 붕괴 폭풍에 휘말린 주차 차량이 뒤집혔으며 가운데 유리창이 모두 터져나갔다.

오죽했으면 뉴스에서 직접적으로 지옥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반면 사고에 직접적으로 휘말리지 않은 지나가던 시민들은 그냥 삼풍이 무너졌다는 투로 무덤덤히 말하고 의료진과 구조진 그리고 취재진들이 출동하기 전만 해도 그냥 태연히 근처 마켓에서 쇼핑을 했다고 하는 목격담도 있다고 한다. 피해 규모를 잘 몰랐고, 이 때까지만 해도 사망자가 수백명이 나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사건이 얼마 전에 일어났기에, 붕괴 직후에는 북한의 폭탄테러라고 생각한 주민들도 많았으며, 저 큰 건물이 저절로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실제 주민 경험담을 들어보면 사고 당시 현장에서 약 400m 떨어진 아파트 주민들은 땅이 울리는 느낌에 지진이 난 것으로 착각하고 경비실에 연락을 했다고 한다. 백화점이 무너졌다고 하니 그저 '백화점 공사 현장에서 골재들이 무너졌나 보다'라며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사고 직후 강남소방서, 서초경찰서 등 관내 관공서의 전화는 시민들의 신고 전화가 폭주하면서 불통이 됐다. 관공서 관계자는 물론 기자들조차 이 소식을 못 믿고 건물에 금 정도 갔겠지 했으나 잠시 후 현장에 도착한 뒤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최병렬 서울특별시장과 이틀 전 지방선거로 당선된 조순 서울특별시장 당선인도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오죽하면 최병렬 시장[7]은 한동안 너무 기가 막힌 듯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정말이지 황당한 상황이다. 작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다리가 무너지더니 이제는 대형 백화점까지 주저앉았으니 말이다.

그외에도 YTN의 취재로 당시 백화점 내부 또는 그 주변의 CCTV 사진으로 보이는[8] 미소를 지으며 어둠 속 사고 현장에서 옷들을 훔쳐 유유히 달아나는 어느 여성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되었고 지금도 이 사진은 인터넷에서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상당히 오래된 보도 사진이지만 대형 참사가 난 뒤 잔해를 뒤지며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점에서 소름끼친다는 반응이 많으며 짤방으로 가끔 쓰인다. 현재도 이 사진의 범인인 여성이 이후 세간의 질타를 받고 자살 또는 잠적했다는 카더라도 있었다.[9] 하지만 선명하긴 해도 애초에 옆모습만 찍은거라 이 사람이 누군지도 불확실한데다 이 사건의 진위나 여인의 행방은 지금도 알 수 없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 이외에도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 백화점 물건을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 제법 많아서 이를 개탄하는 기사나 사설도 쏟아졌다.

붕괴 후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은 공황 상태에 빠진 상태였고 이런 참사에 대하여 사전에 마련된 대응 수칙도 없었기에 초기 대응 단계에서 사고 현장의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의 붕괴 현장을 찍은 CCTV나 취재 동영상들을 관찰하다 보면 일부 몰지각한 이들이 이런 분위기를 틈타 붕괴 현장에서 무너지지 않은 B동의 슈퍼마켓 계산대를 털거나 A동의 무너진 잔해 더미 속을 파내며 희생자들의 소지품들을 뒤지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추태를 보여 당대의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3. 언론 보도

이 사고를 먼저 보도한 곳은 YTN이었다. YTN은 저녁 6시 뉴스를 시작한지 3분만에 앵커의 멘트로 사고소식을 전한데 이어 4분쯤 사고현장 인근 삼호가든아파트 주민의 제보전화를 연결, 사고소식을 상세히 전했다.

이 사고를 최초로 보도한 이상순 YTN 기자가 사고 20년 뒤 YTN 뉴스 인에 출연해 이를 회고했는데 당시 초년병 기자였던[10] 그는 백화점 바로 앞인 서울가정법원[11]이 출입처였다. 그날도 가정법원실에 모여 기자들과 같이 판결문을 보고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저녁 6시 즈음 바깥이 웅성거려 복도 쪽 창을 보니 백화점 건물 한 쪽이 없어져 있었다. 그 길로 바로 회사에 "삼풍백화점 반이 날아갔습니다"라고 전화를 건 뒤 사고현장으로 달려갔다. 뉴스 진행자인 호준석 앵커도 이야기를 전했는데, 당시 조순 민선 1기 서울시장 당선자의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교통공사) 방문을 따라갔다가 회사의 연락을 받고 사고현장으로 차를 몰고 갔는데, 하필 무너지지 않은 B동 쪽으로 들어왔다가 "어? 멀쩡한데요?"라고 회사에 전화했다가 온갖 욕을 다 들었다. 물론 그 욕을 들어가며 코너를 돈 직후 한쪽이 없어진 걸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인터뷰에 같이 참석한 경광숙 당시 도봉소방서 구조대장[12]은 같은 날 휴일이어서 책자 발간을 위해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가 사고소식을 듣고 나오던 중, 마침 사이렌을 울리며 출발하는 동아일보 취재차량을 얻어타고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광화문 일민미술관(당시 동아일보 사옥)에서 사고현장까지 거리는 보통 20~30분이 걸리나, 이들이 찍은 시간은 불과 7분.

YTN의 사고보도에 이어 정규방송인 SBS가 오후 6시 4분 만화영화 <명탐정 셜록하운드> 방송도중 자막으로 사고소식을 전했으며, KBS1은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를 방송하던 6시 5분에, MBC는 <개구쟁이 테즈>를 방송하던 6시 10분에 사고발생을 보도한 뒤 KBS, SBS, MBC 3사 모두 사고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사고현장 화면을 가장 먼저 내보낸 곳은 KBS였다. KBS는 사고발생 소식을 접한 뒤 뉴스중계차를 파견했으나 중계장비 설치에 걸리는 시간 때문에 현장화면을 녹화한 다음 오토바이로 테이프를 수송해 6시 30분쯤 현장화면을 방영했다. 이어 MBC, YTN, SBS의 현장화면 보도가 각각 10~20초 간격으로 잇따랐다. 각 방송사는 4~8대의 중계차를 사고현장및 병원에 대거 동원, 6시 40분쯤부터 구조현장을 생중계했다. 위 개요란에 나와있는 뉴스특보 방송영상은 사고 직후인 7시 전후에 방송된 것으로 추정된다.

방송3사는 사고 직후부터 이튿날인 30일 저녁까지 만 하루 동안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사고현장을 중계했다. 이 당시에 여기저기서 벌어졌던 대형사고 보도치고는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두 달 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당시 축소보도 시비에 시달린 점을 의식한 방송사들이 오명을 벗기위한 자구책으로 풀이되었다. 대구참사 당시 공보처[13]의 불허와 뉴스 비중 미달을 이유로 연장방송을 하지 않았던 MBC의 경우 공보처에 신고를 생략하고 연장방송을 자체 결정해 대조를 보였다. 또한, 주말예능들도 이 주간에는 줄줄이 결방되었다. 특히 MBC와 SBS는 각각 토요일(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vs.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 광주)과 일요일(삼성 라이온즈 vs. LG 트윈스, 잠실)에 예정되어 있던 프로야구 중계까지 취소하기도 했다.

사고당일 밤 뉴스속보 시청률은 동시간대 평균시청률 41.0%를 훨씬 뛰어넘는 58.8%의 시청률을 보였다. 방송시작 30분만인 오후 6시 45분 44.3%(평균 시청률 28.7%)로 치솟은 이 날 시청률은 밤10시 70.7%(평균시청률 49.3%)로 절정을 기록했다. 또 평소 시청률이 0.8%에 불과한 새벽 1시 15분에도[14] 21.1%의 시청률을 보여 적지않은 국민들이 밤새 사고방송을 지켜봤음을 증명했다.

한편 이 사고를 세상에 처음 알린 YTN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광고방송을 일절 중단하고 사고방송만 내보냈다. 이 당시 실종자 현황을 당시 서울시 대책본부의 공식발표와는 달리 YTN 독자적으로 집계했고, 기자가 취재하러 잔해더미에 들어갔다 생존자를 사고 7시간 만에 구출해내는 등 여러 성과를 거두어냈다.[15] 또 최후의 3인 중 두번째인 유지환 양의 생존속보를 먼저 보도하는 등 개국한 지 석 달 만에 뉴스채널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성공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대기하고 있던 서울교대 체육관에 YTN을 틀기 위해 긴급하게 케이블TV망을 뚫기도 했으니 말다했다. 이런 개가에 신난 당시 YTN의 주인이었던 연합뉴스는 매일매일 홍보성 기사를 작성하며 그 치적을 남겼다. 20년뒤 당시 YTN 취재진의 회고

이번 사고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장비는 로봇카메라였다. 직경 50mm, 길이 2백m짜리 케이블 끝에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발견할 수 있는 CCTV를 설치한 이 카메라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29일 밤에만 백화점 지하 1층에 깔려 있거나 갇힌 생존자 10여 명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구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TAP 전자산업이 제작 운용했던 이 장비가 구조현장을 생생히 보여주자 현장에 접근하지 못한 각 방송사들은 이 화면을 그대로 받아 생방송으로 내보내기 위해 선점경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당연히 이 또한 문제가 되었다.

이번 방송에서는 현장을 한눈에 보여주는 항공촬영도 한몫했다. KBS는 지난 3월 새로 구입한 항공촬영용 신형 헬기로 가장 안정된 화면을 방송할 수 있었다. 기종은 벨230으로 동체 전면에 특수카메라 웨스캄을 탑재했다. MBC 역시 자체 헬기로 항공촬영을 했으며 SBS와 YTN은 경찰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현장의 모습을 전했다.

이 당시 재난방송은 "랜턴, 절단기, 곡괭이, 들것 등이 필요하다"는 안내방송, 추가붕괴에 따른 인근 아파트주민 대피령, 헌혈지원 등을 속보로 방송한 것이 실례며 자원봉사자, 주민들의 복구지원·구호활동을 수시 방영해 시민정신을 북돋아 성수대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등 그동안의 재난방송들보다 한 단계 진일보했다는 평과 함께 발빠르고 성실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문제도 만만찮았는데, "갇혀있던 생환자가 밖으로 나오면 눈이 부셔 실명케 돼 담요로 감싸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화면에는 생환자 얼굴에 눈부신 조명을 비춘다거나, 구조작업을 벌이는 비좁은 공간에서는 산소가 부족하기 마련인데 거기까지 취재진들이 들어왔다거나, 구조대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마이크를 들이대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 위에서 얘기한 지나친 항공취재 경쟁에 따른 헬기의 소음으로 후속 붕괴가 우려되기도 했으며 구조대원들의 목소리나 생존자들의 구조 외침이 소음에 묻혀 구조활동에 장애가 되기도 했다. "소방헬기로 저건 물을 뿌려야 된다", "저 사람은 산다, 못산다" 등의 예단도 있었고, 심지어 구조대원들 보고 "생방송중이니까 비켜주세요"라고 말하는 기자도 있었다. 하지만 초기에 생환자들이 어느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필요정보는 충분치 않았다.

포털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검색어를 이용해 오래된 기사 순으로 검색하면 그 당시 연합통신(現 연합뉴스)에서 출고된 기사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고현장의 시간별 상황이나 피해자 구조·치료 현황, 자원봉사 현황, 사고 원인에 관한 기사뿐만 아니라 기자들이 출입하던 정부 부처의 분위기를 다룬 스케치 기사, 사고 직후 PC통신에 올라온 글들도 기사화했다. 기사가 올라온 시각을 보면서 읽다 보면 당시의 긴박하고 참혹했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4. 구조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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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생존자 중 한명을 구조하는 모습[16]

이런 대형사고에 반드시 필요한 구조 작업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사고에는 초기 구조가 중요한데,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붕괴 사태가 일어날 줄 미처 몰랐으며 체계적인 대규모 구조 작업의 개념 역시 부족하여 구조 작업 자체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또한 후속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많은 허점까지 드러났다. 당시에는 이런 대형 긴급 사고에 대비한 매뉴얼도 전혀 없었다. 물론 그 이전에 대형긴급사고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나 그만큼 대응 체계가 후진적이었다. 사고 이후 소방서경찰과 인근 군부대 그리고 특전사를 비롯하여 지역주민과 민간 자원봉사자, 해병전우회, 심지어는 주한 미군까지 수많은 기관과 인원들이 사고 현장에 몰렸고, 이 와중에 소방본부와 경찰과 서울시 그리고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이 서로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체계적인 지휘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청와대가 개입해서 소방본부가 현장지휘를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으나, 여러 기관들과 유족들 그리고 민간자원봉사자들 사이에 각종 불협화음이 속출했다. 아래에 서술된 각종 앞뒤 막힌 뜨뜻미지근한 상황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구조대 인원 통제나 운영 등이 거의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고 구조 장비 관련 절단기 등의 기본 장비가 미리 확보되지 않아 구조 작업이 지연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일을 계기로 국가적 재난에 대비해 1995년 중앙 119 구조대가 창설되었다.

게다가 사고 당일 매몰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소방차를 이용해 진압 시도를 했는데 붕괴 사고로 수도가 끊기는 바람에 주변 옥외 소화전이 작동을 하지 않아 진화작업이 지체되기도 했다. 사실 이 불은 자동차 엔진오일과 휘발유에서 난 불로 판명되어 구조대의 잘못된 대응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진 속의 구조 현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건물이 붕괴되면 어디에서 어떤 원인으로 화재 났는지 확실히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며 눈 앞에서 불이 나고 있는데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무작정 구조대를 비난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도 당시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셈이므로. 당시 실제로 붕괴된 A동의 북쪽 엘레베이터 타워가 서서히 붕괴된 A동 파편 위로 기울고 있다는 진단이 이뤄졌고, 그로 인해 초기에 활발했던 구조손길도 안전 장치를 위한 H빔 설치로 인해 잠시 지연되었다. 매몰 52시간 만에 24명의 환경미화원들이 구출되었다.

참고로 화재로 인한 열기와 진압을 위한 소방수로 인한 생존자들의 희비도 엇갈렸다. 지하 1층에서 70여시간 만에 구조되었다가 이송 도중 사망한 이은영은 몸에 2~4도 화상을 입고 왼쪽눈이 파열되어 청색증에 시달린 채 발견되었고, 그 다음에 발견된 생존자인 최명석의 근처에 있던 다른 생존자들 중 한 사람은 구조대원들이 뿌린 물 때문에 익사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었으며, 유지환과 박승현은 화재로 인한 열기로 초기에는 상당히 견디기 힘들었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소방수 덕분에 수분을 섭취하며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언과 더불어 사고 당시 줄기차게 나왔던 1967년 9월에 발생했던 충남 청양의 갱도 붕괴사고의 16일 만의 생존자였던 광부 양창신의 인터뷰가 계속 방송이 되었는데 그 인터뷰 내용은 그가 무너진 갱도안에서 물만 마시며 16일을 버텄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소방수에 의해서 11일차에 발견된 최명석이나 13일차에 발견된 유지환 씨 그리고 17일차에 발견된 박승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방수(水)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당시 지하주차장까지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지하에 붕괴된 콘크리트 더미 어딘가에 있는 차량의 화재로 발생하는 연기를 소화하기 위한 목적과 매몰자들의 생존을 위한 식수, 그리고 당시 여름의 더위로 인해 혹시나 있을 생존자의 탈진을 막기 위한 온도 조절용으로 사용되었다. 단순히 철거시 발생한 먼지를 줄이기 목적에 의한 소방수 살수는 당시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지하 3층 구조물까지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철거작업만을 위한 사람이나 장비가 투입되지 않았으며, 모든 작업은 구조 작업 위주로 돌아갔었고 철거작업은 그에 의한 부수적 결과일 뿐이었다. 당시 이러한 논쟁중의 하나가 포크레인의 투입이었다. 굴삭기가 혹시나 있을 생존자를 부상 혹은 사망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굴삭기가 작동할 때 굴삭기의 삽 부근에서 구조대원들이 생존자 및 희생자의 확인도 병행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최명석의 발견도 굴삭기를 이용한 해체작업 중 발견된 케이스다.[17]

당시 몇몇 가지 구조 장비와 행위를 열거하자면, 모든 구조행위를 일시 멈추고 실종자들의 삐삐 번호로 일괄적으로 전화를 해서 삐삐 소리로 생존자 구조 시도를 여러 차례했고 미군에 의해 생존자 발견에 사용된다는 음파를 이용한 구조 장비인 스톨스(STOLS)가 하와이에서 공수되었지만, 이 장비에 의해서 발견된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18] 방송 밑 구조자 탐색을 위해서 직경 5cm 정도의 시추공 탐지카메라가 다수 투입되었다.

붕괴사고 며칠 후 자원봉사자들이 지하 3층으로 내려가 생존자를 찾아봤지만 철수했으며 구조대원들은 건물 붕괴 위험으로 생존자 수색조차 잠정 중단했고, 사고 초기 서울시는 실종자를 200여 명으로 집계하다 결국 400여 명으로 2배 정정하는 어처구니없는 행정을 보여주었다. 붕괴사고가 단일 사고 최다 인명피해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종자 접수 하나 제대로 못하는 서울시에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다. 더하여 팔다리가 잘려 나간 시신들이 건축 잔해물과 뒤섞여서 유가족의 거센 항의도 있었다. 게다가 당국에서 팔 2개+다리 2개+머리+몸통=시체 1구로 피해자 인원을 추산하여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나중에 겨우 찾아낸 시신의 팔다리가 맞지 않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자 그제야 잔해를 갖다버린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뒤져서 142구의 시신을 추가로 수습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당시 난지도에서 알바 했던 사람의 경험담

유가족들은 거리 시위를 하는 등 격노했으며, 특전사와 민간인 그리고 유가족 등 50여 명이 사비로 절단기 등을 구입해 생존자 구조에 박차를 가했으나, 현장 지휘소에서는 이들에게 철수하라고 했으며 재진입을 허가하지 않았다.

초기에 우왕좌왕하던 구조본부도 시일이 지나며 체계를 갖추어 삼풍백화점 건너편 삼풍주유소를 구조본부로 삼고 구조 작업을 진행했다. 구조본부는 일정 시기 이후에는 자원봉사자를 모두 철수시키고 전문 구조대원만으로 구조활동을 전개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으며, 이에 전문 인력으로 구성된 구조대를 구성했다. 이러한 이유는 자원봉사를 핑계로 삼풍백화점 내에서 절도 및 취득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으로 가장 큰 문젯점은 자원봉사자에게 나눠주는 물품을 취득하려는 목적으로 유족을 사칭하여 자원봉사하려는 사람들이었으며, 더하여 백화점 내의 절도행위였다. 더하여 유족들에게 접근하여 사체 발굴 이유로 금품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구속된 경우도 있다. 애초에 그런 일에서는 일사 분란한 지휘 체계에 의해서 인력과 장비가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인력/장비 이동 등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비효율이 발생한다. 따라서 자원봉사자 등의 일반인은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다르게 사회 각 계층에서 온정이 전해졌다. 근처 군부대 장병들은 혈액이 모자란다는 소식을 듣고 헌혈을 했고 위에도 서술 되어 있듯이 건너편 삼풍주유소는 영업을 중단하고 사무실을 서초구 재해대책본부로 내놓았으며 인근 부녀회원들이 컵라면과 빵 등을 작업자에게 배식했다. 경쟁업체였던 현대백화점도 30~50명의 직원을 사고 즉시 파견해 구조대원들에게 커피와 라면을 제공하면서 "비록 경쟁업체이지만 같은 백화점업계끼리 이럴 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 코미디언 조정현은 운영하던 뷔페 직원들과 사고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리고 한 외국계 호텔에서도 음식을 내놓았다. 또한 용접도구가 필요하다는 방송을 듣고 용접공 수십명이 달려왔고, 한 업체에서는 최신식 조명도구를 설치하여 현장을 밝혔다. 그 외에도 부상자 응급처치를 도와주기 위해 수녀들이 왔었고, 한 상인은 수백장의 우의를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나누어 주었다.

한편 미국, 러시아, 프랑스가 사고 현장에 구조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으나, 정부에서는 자체 수습이 가능하다고 판단, 이들의 제의를 사양했다.[19]

4.1. 최후의 생존자 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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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최후의 생존자 3인 - 유지환, 최명석, 박승현.

최후의 생존자 3인은 각각 최명석 씨(남, 사고 발생 11일만에 구조)[20], 유지환 씨(여, 사고 발생 13일만에 구조)[21], 박승현 씨(여, 사고 발생 17일만에 구조)[22][23]이다. 이후 최명석 씨는 박승현 씨의 고교동창을 소개받아 결혼을 했으며 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을 살려 GS건설에 재직중이다. 유지환 씨는 결혼 후에 조용히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다. 박승현씨는 사고 직후 근로복지공단에 특채되어 '삼풍 참사 최후의 생존자' 라는 타이틀로 산업재해 지원을 담당했으나, IMF 사태 때문에 계약직으로 전환당하면서 2000년부터 그만두게 되었다. 2004년 근황

최명석 씨는 답답하고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는 동안, 자기 주변에 떨어져 있던 장난감 기차를 발견하고는 이를 가지고 놀면서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가지고 노는거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최대한 고통을 잊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하게 해준 물건이었을 것이다.

5. 재판과 손해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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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이영길 시설이사[24], 이한상 사장[25] 이학수 구조기술사, 그리고 뻔뻔하게도 어떠한 사죄의 표정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 이준 회장.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사에 국민들은 분노를 쏟아내며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전해인 1994년 10월에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그 해인 1995년 4월에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가 터지는 등 근래에 유사한 대형 참사가 이미 두 번이나 있었던 데다 이번 사고는 그 둘보다도 압도적으로 참담했다. 또한 앞의 두 사고와는 달리 건물 붕괴 조짐이 사전에 감지되었던 데다 고객들을 대피시킬 기회 또한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경영진들이 경제적 피해로 사실을 묵살하고 영업을 강행하다가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26] 따라서 이준 회장을 비롯한 백화점 경영진들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분노와 비난의 수준연쇄살인범에 대한 비난 수준 이상[27]으로 엄청났으며, 철저하게 진상규명을 하고 엄중한 처벌을 하라는 시위를 벌였을 정도였다.

1996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었다.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에게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여 징역 7년 6개월이 확정되었으며, 삼풍백화점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설계변경 등을 승인해 준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 황철민에게는 각각 징역 10월에 추징금 3백만원과 징역 10월에 추징금 2백만원이 확정되었다. 전 서울특별시 상정계장 정상기, 우성건설 형틀반장 김수익, 전 서초구청 주택과장 김재근 등 피고인 10명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추징금 3백만원에서 선고유예 및 추징금 1백만원의 원심형량이 확정되었다.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삼풍백화점 사장 이한상(회장 이준의 차남) 등 12명은 상고를 포기하여 형이 최종 확정되었다.[28]

당초에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검찰은 수사 결과 고의성을 입증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포기했다. 당시 이 사고의 살인죄에 대한 미필적 고의 여부를 증언해줄 수 있었던 시설부장이 삼풍백화점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그것은 불가능해져 버렸다. 저것만 입증될 수 있었다면 그 설계를 승인해준 구청장까지 살인죄로 넣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무죄추정의 원칙형사소송법에 의해 여러 죄로 해석될 수 있는 사고에서 특별히 중한 죄가 된다는 사실을 행위자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수사기관이 직접 밝혀내지 못하면 중한 죄로 처벌을 못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업무상 과실치사죄(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가 적용되었다. 판단 기준에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쉽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했다면 미필적 고의, '사람이 죽지야 않겠지' 라고 생각했다면 인식 있는 과실, 즉 과실범이다.

거기에 뇌물공여죄까지 적용되었으므로 경합범 가중(1/2배 가중)하면 사실 이준이 선고받은 징역 7년 6개월은 원칙하에서 법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처벌이었다. 이후 그는 2003년 4월에 만기출소했고, 그 해 10월 4일 사망.

한편 삼풍백화점의 사장이었던 이한상은 그보다 앞선 2002년 10월 출소했다. 2000년 당시 이준 회장의 부인, 그러니까 이한상의 모친이 대한민국 법무부에다 가석방을 탄원했지만, 당연히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이후 "삼풍 사고로 상처받으신 분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가 있기를 기도한다. 삼풍 사고가 영적인 전쟁의 한 사고였다고 믿는다. 저와 함께 고난을 받으신 많은 분들의 고난과 헌신이 귀하게 쓰여 하나님 이루시는 일에 진보가 있다면 감사할 뿐" 이라는 인터뷰와 함께 몽골선교사로 출국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교도소에서 겪은 고난(?)을 신앙으로 극복했다는 포교를 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그가 한 말 중에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사죄의 말은 단 한 마디도 찾을 수 없고 자세히 살펴보면 엄연히 자기 때문에 일어난 참사를 하나님이 일으킨 일인마냥 표현하여 단순 사고의 뉘앙스로 말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로 자신들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고 다친 참사였기에 이준 일가는 법에 쓰여지건 말건 아주 당연히 강력한 처벌을 받아야 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형벌은 솜방망이었지만 벌금은 매우 강했는데, 여론의 질타에 떠밀려 이준 일가는 전재산을 추징금 + α 손해배상금 명목으로 서울특별시에 헌납하고 손해배상 처리를 서울시에 일임했다. 징역의 기간이나 벌금의 액수는 형벌이라 법에 써 있는만큼만 부과해야 하지만 손해배상금은 민사재판의 영역이라 '불법행위로 인해 피해를 끼쳤음'이란 사실만 인정되면 법관의 판단 하에 일정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부과할 수 있다.

사상자가 너무 많아서 손해배상액은 재벌인 이씨 일가 전재산으로도 부족했으므로 결국 서울시에서 모자란 금액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사망자 1인당 3억 8,000만원씩 지급되었으며, 배상금 총액은 3,317억원에 달했다.

그래도 금융권 부채를 탕감하고 난 후 추정되는 삼풍그룹의 나머지 자산이 3,000억원 정도는 되어서 보상액의 거의 대부분을 책임진 셈이기에 무임승차로 나 몰라라 한 것까지는 아니었으며, 애초에 삼풍의 부실공사를 눈 감아준 정부와 서울특별시청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서울시 입장에서는 부족분을 책임지는 게 억울하다고도 할 수 없다. 다만 정부가 부담하는 그 결손액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금으로 충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국민들에게 책임을 물린 것이나 다름 없는 꼴이 돼버렸다.

붕괴사고가 발생할 당시까지만 해도 지방자치제가 아닌 관선 체제였기에 서초구청 공무원이 뇌물을 받아먹었으면 서초구청장만의 책임으로 한정 짓지 않고 정부와 서울시의 직접적인 책임까지도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런 놈을 중앙정부가 직접 서울시장으로 앉힌 거니까. 관선제 시절의 전임 서울시장과 서초구청장이 싸지른 똥 때문에 민선으로 선출된 후임 서울시장과 서초구청장이 고생하게 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서초구청장이었던 조남호 씨는 유족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29]

그가 서울특별시에 헌납한 재산 목록 중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여미지 식물원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제주도에 소재한 관광 명소를 서울특별시 시설관리공단에서 경영하는 괴상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민간 기업에 매각된 상태다.

이 사고 이후로 1996년 대기업이던 삼풍은 흑역사를 남긴 뒤 사실상 공중분해됐으며, 사고와 그로 인한 후폭풍으로 인해 1,100여개의 중소기업들이 부도 처리되면서 사고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삼풍에서 일했던 직원, 관련 중소기업 직원 등도 하루 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해 길바닥에 내몰려야 했다. 특히 삼풍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일반 직원은 물론 고위직들마저도 이 사고로 인해 얼마 가지 않아 직장을 잃어버린 또 다른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니던 회사 자체가 국민들에게 악의 축으로 찍히는 바람에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시달렸다. 삼풍그룹 다닌게 죄인가? 저건 오히려 삼풍그룹직원이었다고 욕하는 자체가 잘못된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후 닥쳐 온 1997년 외환 위기와 함께 삼중고를 겪으며 다른 곳에 가서 취직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여러 사람을 실제로 희생시키고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도 여럿 못살게 만든 셈이다.

5.1. 국가배상 부정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붕괴사고와 서초구청 소속 공무원들의 직무의무 위반행위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1999년 12월 21일 대법원 판결에 의해 국가배상이 부정되었다. 인과관계가 부정된 이유는 부실시공,설계,무계획적 건축에 대해 건축법령상 서초구가 관리,감독 할수 있거나 해야 하는 부분이 법령상 거의 없기 때문에 직무의무위반으로 인해 붕괴사고가 발생할 개연성 자체가 인정되기 어렵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공무원의 직무범위 관련해서 사경제작용 제외하고 다 적용되는 광의설을 취하는 국가배상 청구소송이 저런 이유로 인과관계를 부정해서 국가배상을 부정했을 리가 없다. 사실 인과관계가 당연히 있지만 이 사고에서 국가배상을 인정하면 물어줘야 할 것이 너무 엄청나서 부정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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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에 한미은행조흥은행이 입점해 있었다.[2] 기상청 자료에 의하면 1995년 6월 29일 당일 서울의 최고기온은 섭씨 29℃에 육박했고 안개가 낀 날씨였다고 한다. 다들 알다시피 안개가 끼면 날씨는 더 뜨거워진다.[3] 저 거대한 먼지 구름은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서초구, 강남구 전체와 잠실 일대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저 때가 하필 초저녁 시간대라서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하늘 멀리서 웬 먼지폭풍이 날아오더니 아파트 단지 전체를 휩쓸자 놀란 엄마들이 황급히 달려나와 아이들을 도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어리둥절해하다가 나중에 이유를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4] 부상자들은 붕괴 초기에는 "뿌드등"하며 건물이 한 쪽으로 쏠리다 갑자기 밑으로 떨어졌으며, 이에 놀란 쇼핑객들이 여기저기서 "악!", "사람살려" 라고 소리치면서 사고순간을 전했다.(출처: 96' 기자가 본 100대 뉴스, 한국편집기자회. 471 페이지)[5] 전 청와대 부대변인. MBN에서 앵커로 다시 활약중이다.[6] 119 구조원 옷을 빌려입고 붕괴 현장에 들어가 건물의 설계도를 꺼내왔다.[7] 그때가 정확히 임기 마지막 날이었다.[8] 1990년대 중반임에도 CCTV 영상 화질이 너무 좋다는 점 때문에 진위 여부에 논란이 있다. 1995년 당시 CCTV의 화질로 사람의 이목구비와 표정, 들고 있는 물건까지 확실히 나오기는 어렵다. 카더라에 의하면 이 사람은 40대 삼풍백화점 직원이고 추가 붕괴로 인해 사망했다고 하는데 정확하진 않다.[9] 원체 이건 분노한 누리꾼들의 응징으로 역관광 당하거나 자멸한 무개념인들의 사례를 보고 추측한 타 누리꾼들의 카더라이다.[10] 동년 5월 1일에 입사했다고 한다.[11] 사고 당시에는 서울가정법원이 현재의 서울중앙지방법원 1별관 내에 있었다. 2012년에 양재동으로 이전.[12] 최후 생존자 3인 중 첫 테이프를 끊은 최명석 씨를 구출해 낸 분이기도 하다.[13]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 본부 산하의 국민소통실. 단, 방송관련 업무는 현재의 방송통신위원회로 이관되었다.[14] 당시 지상파 평일방송은 밤 12시에는 끝이 났다.[15] 이때 무너진 백화점 주변의 옷들을 훔치면서 웃는 아줌마의 모습도 포착됐는데, 그 웃음이 상당히 섬뜩하여 지금도 종종 언급되고 있다. 보는사람에 따라 공포감이 느껴질수 있으므로 주의하고 볼 것.#[16]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보유 사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4.0 국제[17] 반대로 이걸 안 하고 그냥 싹 밀어버려서 그 '불상사' 가 발생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차우셰스쿠 집권기에 부쿠레슈티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였는데, 구조작업 때문에 복구 속도가 더뎌지자 그냥 무시하고 잔해를 다 싹 밀어버리라(!!)고 지시해서 실종자가 몽땅 사망자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잔해 속에서 실종자들의 분해된 신체 일부분(...) 이 빈번하게 발견되었던 것.[18] 미세한 소리를 탐지하는 장비의 특성상 최대한 조용한 환경을 위해서 탐지하는 동안 구조활동을 멈춰야 하는데, 차라리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구조활동을 하는게 낫지 않겠냐는 실종자 가족들의 의견에 미뤄지다가 우여곡절 끝에 구조활동을 멈추고 탐지를 했다. 하지만 역시나 붕괴현장의 잡소리가 너무 많아서 의미있는 탐지는 해내지 못했다.[19] 실제로 다국적 구조대가 편성되면 명령의 주체가 흐려질 수 있으며, 의사소통이 힘들어 사망자나 체계적인 구조가 힘들어진다. 이러한 구조대는 삼풍과 같은 국지적인 재난보단 광역적인 재난에 효과를 더 발휘한다.[20] 최명석씨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에 속했는데 차차 구조 열기가 식어가면서 물도 뿌리지 않아 갈증에 시달리던 중 장대비가 쏟아져 빗물을 마셔 연명할 수 있었고, 그 다음날 에스컬레이터를 철거하던 중에 굴착기 기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의 옆에는 두 명의 여성도 갇혀 있어서 같이 살아나가자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25세의 직원 이승연과 다른 한명의 중년 여성은 콘크리트에 깔려 부상이 심해 모두 목숨을 잃었다.[21] 유지환 씨는 구조 후에 상당히 유쾌한 모습을 보였는데 구조된 직후의 소감으로 "구조대원 오빠데이트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고 또 아이스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약간 엉뚱한 말을 해서 소소하게 웃음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초대형 참사를 당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인데다가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혼이 빠져서 정신을 못차리거나 할텐데 저렇게 유쾌한걸 보니 상당히 정신력이 강하신듯하다.[22] 이는 1967년 청양 구봉광산 매몰사고 생존자 김창신 씨(앞의 양창신과 동일 인물이다.)의 16일 생존 기록을 10시간 깬 것이다. 특히 김창신 씨의 경우는 매몰된 상태에서 외부 연락이 가능했던 반면(매몰 지점에 광산 전화가 있었고 다행히 전화선이 두절되지 않았다) 박승현 씨는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고립 상태에서 17일을 생존했다. 여담으로 박승현 씨가 국내 최장 기록을 깨면서 김창신 씨도 잠깐 화제가 되었는데 MBC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학생이 장하기 그지 없다면서 자신의 기록은 얼마든지 더 깨져야한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마지막 생존자였다.[23] 최명석은 75년생, 유지환은 76년생, 박승현은 77년생이다.[24] 그래도 이 사람은 건물의 붕괴 조짐을 인지하고 이준 회장에게 적극적으로 고객들의 대피를 요청했으므로 적어도 인간 쓰레기는 아니다.[25] 현재는 몽골에서 선교사로 살고 있다. 이 사람도 잘못이 있는 게, 붕괴될 것을 알고도 이준 회장과 함께 탈출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이준 회장 아들이다. 그래서 사장 자리에까지 오를 수가 있었다.[26] 반대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의 경우에는 사고가 순식간에 벌어진데다 대구백화점보다는 표준개발 쪽의 잘못이 더 컸고 게다가 대백 회장이었던 구본흥회장이 직접 무릎꿇고 사죄를 했다. 그래서 아직까지 회사가 남아있는 것.[27] 특히 이준 회장의 뻔뻔한 태도와 피해자 중에 이준의 며느리가 있다는 것 때문에 (심지어 죽을 때까지 죄송하다는 말조차 안했다.) 더더욱 욕을 처먹었다.[28] 다만 바로 아래 문단을 보면 알겠지만 이 처벌은 당시 법령에서 가능한 최고 형량으로 처벌한 것이다.[29] 조남호 구청장은 민선으로 당선되기 전 관선으로 서초구청장을 역임했고, 1993년 8월 삼풍 백화점에 지하 주차장 증축과 용도변경을 승인해 준 경위 관련으로 조사를 받기도 했기에 유족들 입장에서는 사고와 무관하게 볼 수 없었던 부분도 있다. 다만, 수뢰등의 혐의는 모두 무혐의 처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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