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아나톨리예비치 쿠료힌 Серге́й Анато́льевич Курёхин | Sergey Anatolyevich Kuryokhin | |
출생 | 1954년 6월 16일 |
소련 러시아 SFSR 무르만스크 | |
사망 | 1996년 7월 9일 (향년 42세)[1]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
국적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음악가, 프로듀서, 철학가, 송라이터, 예술가, 음향 엔지니어, 정치가, 배우, 영화 작가 |
장르 | 록, 재즈, 일렉트로닉, 아방가르드, 프리 재즈 |
악기 | 건반 악기 |
활동 | 1971년 ~ 1996년 |
종교 | 무신론 → 정교회[2] |
링크 | 공식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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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owcolor=#000,#000> 전기와 말년의 사진 (1987년 - 1995년) |
Всё время хочется невозможного.
А раз невозможного хочется,
значит, оно существует.
모든 시대는 불가능을 추구한다.
불가능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А раз невозможного хочется,
значит, оно существует.
모든 시대는 불가능을 추구한다.
불가능을 추구한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러시아의 예술가, 작곡가, 배우, 감독, 민중예술가, 정치가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유년기와 학창시절의 세르게이 쿠료힌 |
세르게이 쿠료힌은 1954년 6월 16일 무르만스크에서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쿠료힌 해군 중령의 아들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지나이다 레온티예브나 쿠료히나는 수학을 가르쳤다. 쿠료힌이 4살때 그의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사를 간다.
몇 년 후 쿠료힌의 아버지는 쿠료힌이 음악 학교에서 공부 할 수 있게 옙파토리아(Евпатория)[3]의 아파트로 모스크바 공동 아파트를 교환했다. 4살 때 세르게이는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고 그의 귀와 음악적 기억력으로 선생님들에게 자신을 각인 시켰다. 청소년 시절에는 문화의 전당[4]의 버라이어티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1971년 쿠료힌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쿠료힌의 가족은 레닌그라드로 이사한다. 쿠료힌은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문화 연구소'[5][6]에 들어갔다. 쿠료힌은 지휘자, 피아노 및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복수 전공을 하려고 했으나 너무 욕심을 부렸던 탓인지 몇 번이나 연구소에서 퇴학을 당했고, 결국 쿠료힌은 자퇴했다. 마땅한 직업을 찾지 못한 그는 어린이 체조 학교에서 반주자로 일급을 받으며 별다른 수입 없이 지냈다.
상선의 선원인 삼촌으로부터 서방 음악을 전해 받은 쿠료힌은 아방가르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레닌그라드에서 쿠료힌은 레닌그라드 보헤미아니즘과 메타 리얼리즘[7]의 대부 아르카디 드라고모셴코를 만나고 나서 '사이공 카페'[8] 의 단골이 되었고, 즉흥 음악 콘서트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헤비메탈 밴드 POST에서 키보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쿠료힌과 함께 그룹은 예술 록 작곡과 고전 작품의 편곡을 포함하도록 레퍼토리를 확장했다.
2.2. 독립적인 음악 경력의 시작
1970년대 20대 시절의 쿠료힌 |
1973년 밴드 "POST"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그룹명을 바꾸고 타이치(Тайцы)마을의 언더그라운드 뮤직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로써 공연했다. 같은 해 말 밴드 '상트트페테르부르크'는 해체되었고 구성 멤버 니콜라이 코르지닌, 빅토르 코발리예프와 니키나 자이체프는 드라고모셴코의 작사를 기반으로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한 새로운 밴드 '발쇼이 젤레즈니 깔라꼴'의 키보드 연주자로 쿠료힌을 불렀다. 그러나 1년 후 그룹을 탈퇴했다.
1974년 쿠료힌은 '타티아나 파르시나'와 결혼, 동년에 딸 율리아를 낳았다. 몇 년뒤 타티아나와 이혼하여 딸의 양육권을 잃었다.
그 후 쿠료힌은 걸프스트림 록 그룹에서 연주 했던 아크바리움의 뮤지션들과 함께 에릭 고로셴스키의 극장 스튜디오에 참석했다, 쿠료힌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내무군 합창단 지휘자, 레닌그라드 주립대학교 학생극장 반주자, 수영장 피아니스트, 루르드 성모 성당[9]의 오르가니스트를 하기도 하고 아르한겔스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나중에는 코미 공화국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피아니스트로서 정규직을 얻었고 약 1년 동안 팝 앙상블의 일부로 소련 전국을 순회했다. 그 당시 그는 콤소몰의 일원으로서 활동했다.
쿠료힌은 레닌그라드의 재즈 색소폰 연주가 아나톨리 바피로프를 만나 프리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78년 5월, 그는 쿠이비세프[10]에서 열린 축제에서 바피로프 앙상블과 함께 처음으로 공연했다. 그 해 가을부터 바피로프 앙상블의 일원으로서 쿠료힌은 소련 전역의 페스티벌에서 연주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쿠료힌은 다시 앙상블에서 탈퇴를 한다. 그 이유는 메이저한 음악을 선호하던 바피로프가 쿠료힌의 익살스러운 즉흥 연주 기법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80년에 쿠료힌은 비체슬라프 가넬린의 재즈 트리오에서 두각을 나타낸 색소폰 연주자 블라디미르 체카신과 함께 듀오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쿠료힌은 자신의 재즈 작곡을 출판하기 위해 1979년 말에 자신의 레코드 레이블인 Leo Records를 소유한 BBC 러시아 음악 방송인 레오니트 페이긴[11]에게 편지를 써서 외국인 지인들을 통해 전달 했다. 몇 달 후 쿠료힌은 녹음이 포함된 테이프를 해외로 밀수할 수 있었다. 그는 녹음 테이프에 "The ways of Freedom"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Archipelago", "Wall", "No Exit", "Inner Fear", "Another Way"라는 이름들을 붙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테이프를 동반했다. 이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수용소 군도"를 노골적으로 언급한 것이었다. 쿠료힌은 음악 이름들의 순서가 뒤바뀌지 않기를 원했으나 결국에는 뒤바뀐 채 발매되었다.
페이긴은 1981년 말에 바이닐을 발매했으며 쿠료힌을 소련 정부의 탄압의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디스크에 쿠료힌은 발매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비문이 추가되었다. 쿠료힌의 현란하게 무지막지 하게 빠른 피아노곡들과 자유를 향한 반항정신으로 가득찬 앨범 "The ways of freedom"은 서구 예술계에서 훌륭한 반응을 얻었지만 일부 비평가는 쿠료힌의 광속연주 솜씨를 믿지 못해 "테이프를 빨리감기한 것이다" 라고 하기도 했다. 원본 필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이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앨범 "The ways of Freedom"을 들고 있는 앤디 워홀 |
2.3. 아크바리움
1981년 밴드 아크바리움의 리더보컬 '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쿠료힌을 '삼각형'(Треугольник)이라는 차기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불렀다. "삼각형"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크바리움"의 전환적인 앨범이 되었으며, 여기엔 쿠료힌의 전위적이고 익살 맞은 건반 솜씨가 큰 영향을 미쳤다. 앨범 제작 과정에 쿠료힌과 그레벤시코프는 서구 음악과 밀교 철학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친해졌고, 그 우정은 쿠료힌이 죽을 때까지 이어져갔다. 쿠료힌은 아크바리움과 정기적으로 공연하기 시작했다. 또한 1981년 쿠료힌은 아크바리움의 다음 앨범 "전기"(Электичество)의 녹음 작업에 참여했다. 쿠료힌과 그레벤시코프 |
같은 1981년에 쿠료힌은 Crazy Music Orchestra라는 콘서트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쿠료힌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밴드들 부터 콘서트에 초청했다. 콘서트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색소폰과 드럼 연주를 병행하는 즉흥 혼합연주 스타일의 콘서트였다. 참가자 중에는 음악 생활 중에 만난 인연들었던 바피로프, 체카신, 블라디미르 레크샨, 블라디슬라프 마카로프,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 알렉세이 라호프, 발렌티나 포노마레바 등이 있었다. 헤외에서 온 제즈 연주자들도 있었는데 노르웨이의 색소폰 연주자 얀 가르바레크, 재즈 드러머 존 피셔, 독일 출신 재즈 클라리넷 연주자 한스컴프도 콘서트에 참여했다. 이런 지극히 서구적이고 진보적인 콘서트를 진행한 쿠료힌은 이미 소련 문화부에서 주요 감시인물로 낙인 찍혔고 콤소몰에서도 탈당처리 되어버렸다.
쿠료힌과 그레벤시코프는 "공식" 그리고 "언더그라운드" 콘서트를 계속 함께 수행했다. 안드레이 트로필로[12]의 스튜디오에서 체카신과 함께 실험적인 앨범 "Exercise"(1983)를 녹음했다. 쿠료힌과 아크바리움의 협력은 1982년 앨범 Taboo(Табу)에서 계속되었다. 쿠료힌은 이고르 부트만과 블라디미르 그리셴코와 같은 "걸프스트림"의 전 멤버들을 앨범 작곡에 참여시켰고 그 결과 초기의 아크바리움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른 뉴 웨이브에 가까운 스타일이 탄생했다.
1983년, 쿠료힌과 아크바리움 멤버들은 문화부 공무원에게 뇌물을 먹이고 밤마다 키로프 극장에 몰래 들어가 극장 스튜디오에 구비된 오르간과 고급 악기들로 앨범을 녹음했다. 그 결과 아크바리움의 희대의 명앨범인 "Радио Африка"가 작곡되었고, 밴드는 이번 앨범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앨범 "Радио Африка" |
1983년 쿠료힌은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딸 옐리자베타를 낳았다.
쿠료힌과 그의 아내, 딸의 사진 |
2.4. 팝-메카니카
1985년 초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리처드 덴튼은 The Ways of Freedom의 출시 이후 서구에서 이미 명성을 얻은 쿠료힌에 대한 BBC의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레닌그라드에 도착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 "Comrades: All That Jazz"에는 티무르 노비코프의 밴드 "Новый художники", 그리고 "아크바리움"과 "키노"의 뮤지션들이 쿠료힌의 콘서트 리허설에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음악계에서, 저는 완전히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어느날 우리가 모두 모여서 콘서트를 열었는데, 사람들은 재각각 늘 하던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저는 그게 아주 마음에 들어서 모든 친구들을 끌어들였고 그렇게 '팝-메카니카'가 탄생했습니다."
- 세르게이 쿠료힌
- 세르게이 쿠료힌
팝-메카니카의 공연모습 |
"팝-메카니카"의 첫 번째 공연은 1984년 4월 14일 모스크바의 "모스크보레치예" 문화의 전당에서 이루어졌다. 이 거대한 집단의 기반은 "스트란니예 이그리"의 뮤지션들이었으며 공연의 다른 참가자 중에는 세르게이 레토프[13], 이고르 부트만, 발렌티나 포노마레바,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 같은 재즈 연주자들이 다수 있었다. 2부에서는 대략 40명 정도가 무대에 섰다. 첫 공연부터 문화부에게 찍혀 공연 기회가 없어졌었지만 쿠료힌은 포기하지 않고 대학 기숙사와 여러 음악 페스티벌을 떠돌며 불법공연들을 감행했다.
1985년에 세션 뮤지션으로서 쿠료힌은 알리사의 앨범 "Энергия"와 "키노", 캄차트카의 주인 앨범 녹음에 참여했다. 쿠료힌이 마지막으로 참여한 아크바리움의 앨범은 "Дети декабри"(1986)이였다.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쿠료힌은 그룹 리더인 그레벤시코프와의 음악 스타일에 대한 의견 차이와 본인의 자뻑에 가득찬 성격 때문에 멤버들과 마찰을 빚어 결국 아크바리움을 떠나게 된다.
1986년, 미국에서 온 음악 프로듀서 조안나 스팅그레이[14]의 노력 덕분에 "아크바리움", "알리사", "키노" 및 "스트란니예 이그리"의 노래들이 포함 된 합본앨범 "Red Wave"가 미국에서 발매되었고 러시아 록에 대한 관심의 물결에 서구 비평가들은 그 중심에 있었던 쿠료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 덕분에 쿠료힌은 조안나 스팅레이의 중재로 Sequential Circuits Prophet 2000 샘플러 신디사이저를 구할 수 있었다. 이로써 쿠료힌은 소련 언더그라운드계에서는 보기 드문 '좋은 악기'를 가진 뮤지션이 되었다.
"제 생각엔, 쿠료힌이 자신만의 신디사이저를 얻었을 때 그는 혼자서도 작업할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달았고 그때야말로 팝-메카니카가 정말로 시작된 것 같습니다."
소련의 음악 프로듀서 안드레이 트로필로
}}}소련의 음악 프로듀서 안드레이 트로필로
해변에서 휴식 중인 쿠료힌과 조안나 스팅레이 ||
1986년 가을, 팝-메카니카는 레닌그라드 청소년 궁전에서 1000명의 관중 앞에서 공연했다. 그러나 다음 해에 모스크바의 중앙음악학교 공연과 여러 재즈 페스티벌의 콘서트가 취소되었다.
동년에 쿠료힌은 자신의 졸업 단편영화 "Господин оформитель"의 음악 작곡가를 찾고 있던 신인 감독 올렉 텝초프에게 소개되었다. 쿠료힌은 키노의 뮤지션들과 함께 하루 만에 음악을 녹음했다. 이 영화는 소련 국가 영화 위원회에서 좋은 반응을 받아 텝초프는 극장용 영화로 만들기 위해 다시 쿠료힌을 초청했다. 쿠료힌은 극장용으로 스케일이 더 커진 영화를 위해 "Donna Anna"를 작곡했다. 그는 유명한 소프라노 오페라 가수 올가 콘티나를 설득 하여 성악 부분을 부르게 하였다. 쿠료힌은 이게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Donna Anna"는 이후에도 여러번 쿠료힌의 앨범들에 수록되는 사골국이 된다.
1987년 쿠료힌과 "팝-메카니카"는 TV 프로그램 뮤직 링(Музыкальный ринг)에서 공연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나와 공연하는 프로그램으로,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해 느슨해진 검열 규정을 상징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이 방송을 탄 이후에 소련에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에 불과했던 쿠료힌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1988년 여름에 "팝-메카니카"는 핀란드의 이마트라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첫 해외 콘서트를 열었다.
가을에 쿠료힌은 미국에서 일련의 피아노 솔로 콘서트를 열었고 즉흥 기타리스트 헨리 카이저와 함께 Popular Science 앨범을 녹음했다. 둘다 광속 연주를 좋아해서 죽이 척척 맞은 듯.
"Господин оформитель"의 성공은 쿠료힌에게 영화에 대한 길을 열었다. 그 뒤로도 그는 정기적으로 영화용 음악의 작곡 요청을 받았다. 일찍이 1988년에 그의 작곡은 사바 쿨리쉬 감독의 영화 "Трагндия в стиле рок"에 쓰였다. 그러나 쿠료힌은 쿨리쉬 감독이 자신이 예상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사용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 협업에 만족하지 못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다른 작품 중에는 텝초프의 두 번째 영화 "Посвящённый", 세르게이 옵차로프의 "Оно" , 막심 페젠스키의 단편 데뷔작 "치칼로프 동지의 북극 횡단"에서 작곡을 맡았고 연기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인지 "Лох - победитель воды", "Комплекс невменяемости"에서 주연을 맡기도 하였다.
영화 "Лох победитель воды"에서 주연을 맡은 쿠료힌 |
1989년 쿠료힌과 세르게이 레토프의 공동 앨범 "Полинезия: Введение в историю"는 소련 국영 음반사 멜로디야에서 발표 되었으며 소련에서 합법적으로 출판 된 음악가의 첫 번째 앨범이 되었다. 같은 해 2월 팝-메카니카는 리버풀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Полинезия: Введение в историю"는 일본에서도 출판되었으며 쿠료힌은 소련과 일본 음악가들과 함께 일본의 재즈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1991년 가을, "팝-메카니카"는 프랑스 낭트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자매도시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낭트 간의 우정 주간을 기념하여 열린 2시간 반의 콘서트를 "The Filthy Possum"이라는 제목으로 1시간으로 편집해 편집해 발매했고, 이 곡은 쿠료힌의 일생 동안 러시아에 발매된 "팝-메카니카"의 유일한 해외 공연 녹음본이 되었다.
2.5. "레닌은 버섯이었다"(Ленин — гриб) 사건
1990년대 초반 쿠료힌은 레닌그라드 지방의 사회고발 저널리즘 텔레비전 프로그램 "Пятое колесо"[15]에 출연 하여 진행자 중 한명이었던 '세르게이 숄로호프'의 대담자 역할을 했다.숄로호프와 쿠료힌이 책으로 빼곡한 서재에 마주 앉아 "충격의 가설"이라는 꼭지를 진행하려 하자, 시청자들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문화적 수수께끼가 서서히 밝혀지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숄로호프는 진행자들 중에서도 인기가 대단했어요, 젊은 기자 출신으로 스타가 된 축에 속하죠. 겉핥기 식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진지하고, 심각하고, 집요한 취재를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죠.
-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의 저자 알렉세이 유르차크 교수
-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의 저자 알렉세이 유르차크 교수
1시간에 걸쳐 쿠료힌은 전문적인 어휘를 구사하는 학자처럼 나와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다년간 지속적으로 환각 버섯을 섭취해 온 결과 졸지에 버섯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풀어나갔다. 게다가 레닌이 집권하는 계기가 된 볼셰비키 혁명도 바로 이 버섯으로 변태하는 과정에서 촉발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방송 상의 내용에 따르면, 쿠료힌은 멕시코 여행을 하던 중 그곳에서의 20세기 초 노동자 혁명을 그린 미술작품을 발견하였는데, 1917년에 발발한 러시아 10월 혁명의 형상을 거울처럼 빼닮은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지구 서로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끼리 일종의 동시병렬적 사고를 했다는 증거였고,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공통분모는 바로 환각 물질이었다.
러시아와 멕시코 양국에 모두 환각 버섯이 존재하고 섭식된다는 사실을 연결지으며, 쿠료힌은 러시아 혁명사상은 결국 환각 효과에서 나온 것이라고 상정하였다. 그뿐일까, 버섯을 즐겨 먹던 레닌을 어느새 버섯의 포자의 "자아"가 장악했다고 서술하였다. 결말에 이르러 쿠료힌은 자기 주장을 다음과 같이 간결히 매듭지었다.
10월 혁명이 특정 버섯을 다년간 먹어온 사람들에 의해 수행 되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또 있습니다. 이 버섯은 사람에 의해 섭취 되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인격을 대체했습니다. 사람이 버섯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말입니다, 레닌은 버섯이었다 이 말입니다(То есть я просто-напросто хочу сказать, что Ленин был грибом).
쿠료힌이 자기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해 제시한 "증거"는 다음과 같았다. 레닌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쓴 편지에서 버섯을 먹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내용, 서재에 자리한 레닌의 사진 속에 보이는 버섯 형태를 한 정체불명의 물체, 레닌이 명연설을 한 장갑차량의 모양과 환각 버섯의 밑둥 모양과 비교해 보여주는 터무니 없는 도표였다. 쿠료힌은 서재에 보관된 사진과 오래된 다큐멘터리 영상을 나열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근거라고 제시하였다. 그런데 근거 하나하나를 워낙 빠르게 넘겨서 그가 하는 말이 전부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유르차크가 자신의 글에서 지적하듯, 쿠료힌이 엉뚱한 맥락을 갖다 붙인 사료와 사진은 실물이었기 때문에 신빙성 있게 보일 수 있었다.
숄로호프는 여기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쿠료힌이 제시하는 음모론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 연극에 가담했다. 게다가 실제 균류학자와 진행한 환각 버섯 관련 인터뷰 영상을 띄웠는데, 여기에는 블라디미르 레닌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아주 진지하게 진행된 거짓 연극은 혼란에 빠진 대중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불러왔다. 1990년대 초에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면접을 진행한 유르차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해당 방송이 허구라는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방송을 본 뒤 어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혼란, 동요, 불안정을 느꼈다고 회고하였다.
거짓말을 있는 그대로 믿으려는 사람도 있었는데, 텔레비전 방송에 대한 자체적인 신뢰가 있었고 또 레닌 같은 인물을 두고 장난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유르차크에 따르면 당시 시청자들이 오늘날에 비해 더 순진했기 때문이 아니다. 전세계 어디서나 사람이라면 TV에서 나오는 말을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근거 유무를 몰라요. 근거가 있을거라고 짐작하는 거죠. 아니면 저걸 방송할 리가 없으니까, "대중매체에 나온다는 것은 뭔가 있다는 거다." 그뒤로 몇 주동안 수백만명이 어쩔 줄을 몰랐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어리둥절 했던거죠.
유르차크 교수의 글에서 인용된 일화로, 숄로호프가 2008년 러시아 여성잡지 "крестьянка"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이야기가 하나 있다. 쿠료힌 방송이 나간 다음 날, 볼셰비키 혁명 유공자들이 레닌그라드 당 위원회에 나타나 레닌이 버섯이 된게 사실인지 알려달라고 당 간부를 붙잡고 물었다고 한다. 간부는 말도 안 된다고 답하였다.
유르차크 교수는 일화의 진위성에 의심을 표하지만, 해당 음모론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분위기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하다. 레닌이 버섯이었다는 농담으로 인해 시청자들은 자신이 텔레비전에서 듣고 있는 것이 과연 사실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개방정책으로 인해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대한 신뢰를 다시 쌓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쿠료힌의 트롤링으로 인해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뉴스 보도뿐만 아니라 레닌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에까지 의문을 표하게 되었다. 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2.6. 소련 붕괴 이후
1991-1992년에 쿠료힌은 세르게이 데비제프 감독의 영화 Два капитана 2에 출연하였다. 소련의 고전 소설을 제목으로 한 이 영화는 지정학적 음모론을 바탕으로 한 부조리 대체역사극임과 동시에 코미디 장르였다. 두 번째 주연을 맡은 그레벤시코프가 긴 여행 중이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잠깐잠깐 방문할 때마다 촬영했기 때문에 촬영은 매우 오래 걸렸다.영화는 많은 러시아 영화 페스티벌에서 상영되었지만 상을 받지는 못했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쿠료힌과 그레벤시코프는 다시 앨범을 공동 작곡하기 시작했다. 일정의 불일치와 의견 차이로 인해 앨범작업은 매우 오랫동안 지체되었다. 결국 쿠료힌이 모든 가사를 쓰고 보컬을 맡았고 그레벤시코프의 목소리는 단 두 곡뿐이었다. 앨범은 1995년에야 마무리 되었고 쿠료힌의 죽음 이후에 "The children album"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다.
1992년 여름, 쿠료힌은 팝-메카니카의 활동을 중단하고 새로운 음악을 작곡하고 서구문화를 공부하기 위해 몇 달 동안 독일에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그는 출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쿠료힌은 1993년에 일부 번역된 책을 Severo - Zapad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그는 신비주의 철학부터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 바르드까지 다양한 계획을 세웠지만 이 사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러시아의 심리학자 알렉산드르 에트킨트(Александр Эркинд)의 "러시아 정신 분석의 역사" 그리고 두 권으로 구성 된 "Anthology of Gnosis", 단 두권의 책만이 출판 되었다.
그런 다음 1992년에 쿠료힌은 참새 멸종을 막기 위해 행동을 취하자고 주장한 노르웨이 생태학자 욘 멜바이(Jon Melbye)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 1993년 겨울, Lenfilm[16] 스튜디오에서 쿠료힌이 이끄는 앙상블은 비발디의 사계와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동명의 피아노곡집에서 영감을 받은 6개의 작곡을 녹음했다. 같은 스튜디오에서 우연히 포크 그룹 "Яблоко"의 보컬리스트 마리나 카푸로(Марина Капуро)를 만나게 된 쿠료힌은 그 자리에서 그녀를 차기 앨범의 보컬로 발탁하였다. 1993년 말, 앨범 "Sparrow oratorium"은 오슬로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동시에 발매되었다.
1994년에 쿠료힌은 "팝-메카니카"와 함께 러시아와 해외에서 투어를 재시작 했고 세르게이 솔로비요프 감독의 "세 자매"와 알렉세이 발라바노프 감독의 "성채"의 음향 작업을 했다. 1994년 그는 "Чай Вдвоём" 그룹의 첫 번째 프로듀서가 되었다.
또 동년에 쿠료힌은 아들 표도르를 득남했다.
2.7. 민족 볼셰비키당 창당과 정치 활동
1995년 초, 쿠료힌은 민족 볼셰비키당의 창시자인 작가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와 극우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을 만났다. 그는 자유주의자였음에도 두긴과 가까워졌고 민족 볼셰비키당에 입당했으며 짧은 시간에 당의 사상을 선전하는 것이 그의 주요 직업이 되었다.1995년 3월 쿠료힌, 리모노프, 두긴, 노비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록 클럽에서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곳에서 쿠료힌은 정치가 이제 이 시국에 적절한 예술 형식이며 그것이 자신이 지금 할 일이라고 선언했다.
쿠료힌은 정치 활동에 참여하고 나서 많은 친구들과 단절했다. 그는 민족 볼셰비키당을 위해 당 내부를 조직하고 건물을 직접 임대하고 당의 사상과 관련된 서적들을 출판했다.
쿠료힌은 두긴에게 그해 12월에 열린 국가 두마 선거에 지원하기를 제안했다. 두긴을 지원하기 위해 9월 23일에 쿠료힌은 마지막 팝-메카니카의 콘서트를 준비했다. 이 공연에서 첫 시연되었던 "Поп-механика № 418"은 두긴이 좋아했던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의 난해한 사상에서 따온 것이다. 리모노프와 두긴은 콘서트에 직접 참여하여 크로울리의 발췌문을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로 읽었다. 그러나 선거 운동은 대실패로 끝났고 두긴은 1% 미만의 득표율로 17명의 후보자 중 14위로 낙선했다.
민족 볼셰비즘에 대한 쿠료힌의 열정과 진정성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가 있다. 민족 볼셰비키당에서 선전하는 사상들은 쿠료힌의 진보적인 성격과 명백히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아크바리움 그레벤시코프는 이것은 "레닌은 버섯 사건"과 같은 쿠료힌의 일종의 사회적 도발이었다고 말한다.
반면 음악 저널리스트 알렉산드르 쿠시니르는 쿠료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진정으로 믿었으며 이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의 결과라고 말한다.
재즈 평론가 알렉산드르 칸 또한 쿠료힌의 개인적인 신념이 민족 볼셰비키당의 이념과 일치하게 되었다고 썼지만 그의 공개적 행동에는 여전히 농담과 도발의 요소가 있었다고 서술했다.
당시에 쿠료힌과 직접 만나서 대화한 유르차크 교수에 따르면, 쿠료힌의 갑작스러운 정치 활동 또한 당시에 대책없는 낭만적 신자유주의가 러시아를 장악하는 풍조에 대해 어김없이 모순적인 도발로 응수한 것이라고 한다. 유르차크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쿠료힌은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을 뿐더러 진리가 독점된다는 것은 더더욱 믿지 않았다.
실제로 쿠료힌은 두긴이 낙선한 이후에는 민족 볼셰비키당에 잘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두긴과의 연락도 점차 끊어져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쿠료힌은 다시 예술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전에 협업을 했었던 솔로비요프 감독과 다시 협업을 하여 볼쇼이 극장 공연을 위한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 오페라 3부작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996년 1월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다수 출연하였다. 3월에는 Ваша любимая собока라는 자신만의 음악 소개 라디오 프로그램을 창설하고 총 9부작의 프로그램을 송출하였다. 프로그램에서 소개 된 그룹으로는 일본의 노이즈 밴드 "게로게리게게게", 비치 보이스, Bonzo dog doo da band, 중국 재즈, 한국의 아방가르드 색소폰 연주자 강태환 등이 있었다.
2.8. 죽음
1996년 5월 7일 아침, 쿠료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튜디오 중 한 곳에 있었다.[17] 그는 녹음 과정에서 진한 커피를 여러 잔 마셨는데 갑자기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힘들게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지만 갑작스러운 발작이 시작되었고, 쿠료힌의 아내 아나스타시야 쿠료히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쿠료힌을 진찰해 온 의사 블라디미르 볼코프에게 전화를 하고, 구급차를 불렀다.아나스타시야 쿠료히나는 "나는 완전히 히스테리 상태였다."라고 회상한다.
"내가 구급차를 불렀을 때 우리는 매우 운이 좋았다. 영리한 의사가 남편을 즉시 대형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를 잘 알려지지 않은 동네 병원이 아닌 그곳으로 데려간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쿠료힌은 눈을 뜨고 의사를 보자마자 즉시 병원을 떠나고 싶어했다.
"오늘은 검사만 받고, 치료는 독일에 갔다 오면 받을게요" 그는 의사들에게 유쾌하게 말했다.
"함부르크행 표를 끊어놨어요. 빨리 왔다갔다 할게요." 그는 오래 전부터 콘서트를 하기로 약속하고 계속 미루고 있다고 말했다.의사들은 거의 강제로 쿠료힌을 중환자실에 남겨두었다."당신의 심장은 거의 6배나 커졌습니다." 당직 의사가 동요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장이 아니라 거의 축구공 수준입니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아무데도 가지 못할 겁니다."
아내 아나스타시야는 저녁 내내 남편과 함께 보냈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갔다. 한 살 반 된 아들을 방치할 수는 없었고 그녀는 시부모에게 전화할 수도 없었다. 떠나면서 그녀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간호사에게 돈을 남겼다.
늦은 밤 쿠료힌은 심장마비를 겪었다. 부자연스러운 쌕쌕거리는 소리를 들은 간호사는 의사들을 불렀고, 의사들은 제때에 도착해 가슴에 구멍을 뚫고 2리터의 액체를 펌핑했다. 5월 7-8일 하룻밤 사이에에 쿠료힌은 4번의 임상 사망을 겪었다. 의사는 긴급하게 제세동을 하고 아드레날린을 주입하여 그의 생명을 구했다.
트럼펫 연주자 슬라바 가이보론스키는 이렇게 회상한다.
"모스크바에서 아침에 나는 쿠료힌이 중환자실에 실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전직 의사로서 곧바로 의사들과 머리를 맞댔다. 그들은 나에게 X-RAY 사진을 보여 주었고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보고 믿을 수 없었다. 재앙 그 자체였다."
5월 중순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최고의 심장전문의로 구성된 협의회가 소집되었다. 치료 방법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여러 전문가들은 심장육종의 원인이 심장 부위의 악성 종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가슴에 구멍을 뚫고 병세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지켜보자고 주장했다. 다른 의사들은 긴급 수술을 주장했다. 잠시라도 미룰 시간 따위는 없었다.
많은 논의 끝에 그들은 기회를 잡기로 결정했다. 쿠료힌은 즉시 육군 의과 대학의 심장과로 옮겨졌다. 솁첸코라는 이름의 숙련된 심장 외과 의사가 그곳에서 일했다. 그는 수술을 수행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결정한 유일한 의사였다.
그러나 수술비에 들어갈 돈이 필요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아내 아나스타시야는 전화번호부를 손에 들고 하루 내내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최근 쿠료힌과 관계가 소원해졌던 사람들도, 그레벤시코프와 두긴, 레토프에 이르기까지 쿠료힌의 친구와 지인들은 치료를 위해 돈을 기부했다. 기금의 일부는 쿠료힌과 그의 작품과 관련된 수익에 의해 기부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지만 DDT의 보컬 유리 셰프추크는 아파트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돈을 주었다. 심지어 완전히 낯선 사람들도 쿠료힌을 도왔다. 예를 들어, 보리스 옐친의 개인 정신 상담사는 모스크바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 "Пятое колесо"의 편집자인 비탈리 포툠킨에게 전화를 걸어 "제가 쿠료힌을 도울 방법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다음 날, 젊은 부부가 포툠킨의 아파트에 와서 봉투에 $10,000를 가져왔다. 금액의 절반은 루블이었고 절반은 달러였다. 그들은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거부했다.
아무도 쿠료힌에게 질병의 심각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금기시 된 주제였다. 많은 사람들은 쿠료힌이 수술만 받으면 다시 멀쩡해질 것이라 생각했고 쿠료힌 자신도 그렇게 믿었다.
병실에서 쿠료힌은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고, 매일 꾸준히 찾아오는 친구들을 맞이했다. 그는 그간 연락하지 않던 두긴을 다시 만나기 시작했고, 두긴과 함께 새로운 철학적 이론을 구축했다.
알렉산드르 두긴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전쟁터에서 공격을 지휘하는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 같았다.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창의적인 계획, 프로젝트, 활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위기, 피로, 실망, 의욕 부족을 경험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단지 새로운 라운드라고 생각했다. 단지 새로운 시작의 근육통이라 믿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쿠료힌은 가이보론스키의 새 녹음을 주의 깊게 들었다. 데비제프와 메스히예프와는 미래의 영화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실력이 둔해지면 안 된다며 피아노를 좀 갖다 달라고 의사에게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데이비드 보위가 러시아에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트로이츠키는 보위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동안 쿠료힌과 어울리는 것을 제안했다. 나는 보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를 쿠료힌이 있는 병원으로 데려 가고 싶었다 - 그것이 보위가 이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나 보위가 탔어야 할 상트페테르부르크행 비행기가 결항되어 버렸다. 그래서 모스크바에서 콘서트 갈 기분이 아니었는데 때마침 나스탸(쿠료힌의 아내)가 도와달라고 해서 가 보기로 하였다. 집에 돌아온 나는 곧바로 병원에 가서 쿠료힌을 만났다. 직접 가보지 못해 많이 아쉬웠고, 콘서트 소식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5월 말에 쿠료힌은 수술을 받았으나 불행히도 실패했다. 의사들은 심방의 악성 종양을 진단했고, 그것은 최악의 경우로 밝혀졌다. 쿠료힌의 가슴에는 보기만 해도 두려운 거대한 십자 이음새가 달렸다.
예술가 아나톨리 벨킨은 이렇게 회상한다.
"수술 후 다음 날 병동에 들어갔고 쿠료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의사들이 내 복부를 자르고 수많은 오물을 제거했어...사람 속이 그렇게 더러운 줄 몰랐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그의 태도는 놀라우리만치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끝자락에 있었습니다. ... 나는 죽음이 이 방을 걷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지만 이미 그를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쿠료힌의 눈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심장육종"이라는 진단은 마치 문장처럼 들렸다. 그것은 희귀한 질병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심장육종을 치료하는 방법을 몰랐고 미국에서 수술하려면 수십만 달러가 들었다.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교수라는 별명을 가진 블라디미르 올레고비치 볼코프(Vladimir Olegovich Volkov)가 육군 의과대학에 도착했다.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눈 후 그는 아나스타시야에게 쿠료힌이 살 날이 한두 달밖에 안 남았다고 고백했다.
작가인 바실리 솔로비요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의사들은 쿠료힌에게 심장육종이 무엇인지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언론은 러시아 사상 가장 어려운 수술을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돈을 기부하라고 호소했다. 쿠료힌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모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무거운 침묵 속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는 자신의 신비함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쿠료힌은 수술을 받은 후 며칠 동안 집으로 퇴원했다.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그를 친척에게 데려갔다. 모두가 이것이 마지막 만남임을 예감했지만 슬픈 감정을 티내려 하지 않고 그와 함께 있는 시간만은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쿠료힌이 집에 있는 동안 그의 치료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볼코프 박사와 데비제프 감독은 쿠료힌은 무의미한 치료를 받는 대신 집에 있어야 하며, 그에게 진단 결과에 대해 정확히 알려야 한다고 했다. 반대로 세바 가켈과 비탈리 포툠킨은 쿠료힌에게 진단 결과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하루에 15~20시간을 병원에서 보낸 아나스타시야는 남편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설령 가능성이 전혀 없을지라도 그녀는 남편의 치료를 지속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기로 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심장이식 수술을 받기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첼로 연주자 브라긴스카야는 회상한다.
"우리는 세포 성장을 멈추는 약물을 개발한 약리학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당시 약물은 아직 검증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미 모든 처리 단계를 통과한 후였다. 쿠료힌의 주치의는 모든 것을 설명할 의사가 올 때만 그를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약을 찾으러 날아갔다."
6월 초에 쿠료힌은 알마조프 심장 센터의 재활 부서에 입원했다. 가슴이 점차 치유되고 있다고 친절한 의사가 쿠료힌에게 말했다. 그는 조용히 기뻐했고 여가 시간에 타란티노의 영화들을 보았지만 점점 기운이 나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님을 맞이하고 42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6월 16일 그의 생일날, 많은 친구들이 그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 러시아에 있던 브라이언 이노는 그에게 몇 장의 새 CD를, 유리 셰프추크는 거대한 무선 전화기를 선물했다. 파티는 재미있었지만 병원을 나온 친구들은 거리에서 바로 울기 시작했다. 이 날은 아나스타시야가 아들 표도르와 함께 콘스탄틴 스미르노프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표도르의 대부는 세바 가켈이었고, 쿠료힌은 그의 어린 아들을 돌봐달라고 요청했다. 며칠 후 쿠료힌은 고해성사에 동의했고 신부는 쿠료힌과 함께 회개의 성사를 집전했다.
6월 말에 쿠료힌은 바실리옙스키 섬의 병원로 이송되었다. 쿠료힌의 목숨을 구하려는 네 번째 진료소였다. 그 병원에는 현대식 장비가 있었지만 쿠료힌의 상태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느새부턴가 쿠료힌은 진통제에 내성이 생겨 심한 고통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마치 익사하는 것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다리가 마비되고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쿠료힌은 예술가 올레그 코첼니코프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난 좆됐어."
며칠 후 시베리아 출신의 80세의 무당이 쿠료힌을 찾아왔는데, 그는 두긴의 소개로 쿠료힌을 찾아온 것이었다. 무당은 쿠료힌을 보자마자 병동을 나와 천천히 이마의 땀을 닦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7월 8-9일 밤, 쿠료힌의 어머니는 아들의 머리에서 졸고 있었다. 그날 밤 쿠료힌은 생기를 잃어갔다. 아침에 의사 팀이 라운드를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병동을 떠나라고 요청했다. 그녀가 침대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아침 6시에 쿠료힌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딸에게 "다 끝났어."라고 말했다.
바로 그날 밤 세르게이 숄로호프는 다음 촬영을 중단하고 첫 비행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날아갔다. 그는 7월 8일 저녁 ORT에서 30분 프로그램 "Час пик"를 본 직후였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1996년 4월 1일에 녹화된 쿠료힌과의 마지막 텔레비전 인터뷰였다. 호스트 안드레이 라즈바시와의 대화에서 쿠료힌은 만우절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진지했다. 쿠료힌은 그의 운명을 신비롭게 예측했다.
아침에 영화 감독 세르게이 데비제프는 풀코보 공항에서 솔로비요프 감독을 만났다. 그들은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가 텅 빈 복도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죽어가는 것 같았다.
우리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밑에는 에코 슬리퍼가 있었다.
타티아나 브라긴스카야 박사는 쿠료힌이 사망한 후에도 그의 전화기에 있는 자동 응답기가 몇 달 동안 계속해서 그의 목소리로 말을 했으며, 그의 죽음을 알고 있던 발신자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패닉에 빠졌다고 회상했다.
쿠료힌의 장례식 |
쿠료힌이 사망한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하고 단순한 뇌우가 발생했다. 100년에 한 번 정도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번개가 번쩍이고 비의 파편이 도시의 얼굴에 내리쳤다. 넵스키 대로에는 마치 봄에 지붕에 있는 눈들이 녹아 내려 땅에 떨어진 것처럼 진흙탕이 냇가를 이루었다. 풍경은 마치 자연이 분노하는 듯 종말론적이었다.
1년 후, 푸시킨 가옥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쿠료힌 추모의 밤이 열렸다. 일부 음유시인들이 공연하고 시인들은 쿠료힌에 대한 헌정시를 읽었다. 추모회는 쿠료힌이 살아생전 추구했던 스타일과는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2.9. 사후
쿠료힌의 딸 옐리자베타 쿠료히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쿠료힌 사후 2년후에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쿠료힌의 딸 옐리자베타 |
쿠료힌과 그의 딸의 묘지 |
쿠료힌의 아내 아나스타시야 쿠료히나는 남편을 기리기 위해 쿠료힌 재단을 설립하고 세르게이 쿠료힌 국제 페스티벌을 매년 주최하고 있다.
3. 디스코그래피
1980С. Курёхин, Х. Кумпф, А. Вапиров, А. Александров Jam Session Leningrad
1981
С. Курёхин The Ways of Freedom (LP, Leo Records, переиздано на CD другим лейблом Лео Фейгина — Golden Years of jazz)
«Аквариум» «Электричество» (магнитиздат, впоследствии CD)
1982
С. Курёхин, И. Бутман, Б. Гребенщиков «Subway Culture (Подземная культура)» (LP, Leo Records, переиздано в 1999 году на CD и кассете)
«Аквариум» «Треугольник» (магнитиздат, впоследствии CD)
«Аквариум» «Электрошок» (концертный бутлег, CD)
«Аквариум» «Концерт в Эрмитаже» (магнитиздат)
«Аквариум» «Табу» (магнитиздат, впоследствии CD)
«Аквариум» «Я вижу тучи…» (концерт) (магнитиздат)
1983
С. Курёхин, В. Чекасин, Б. Гребенщиков «Exercises» (LP, Leo Records)
(другая версия первой стороны альбома присутствует в компакт-коробке Document, выпущенной Leo Records)
«Аквариум» «Радио Африка» (магнитиздат, LP, CD)
А. Вапиров, С. Курёхин Sentenced to Silence
1984
«Аквариум» MCI (bootleg) (магнитиздат, CD)
«Аквариум» «Электрошок-2» (магнитиздат)
«Аквариум» «2-й Ленинградский рок-фестиваль»
«Кино» «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 (магнитиздат, CD)
А. Вапиров Invocations
1985
С. Курёхин & ПМ «Концерт» (магнитиздат)
А. Вапиров «Линии судьбы»
«Аквариум» «3-й Ленинградский рок-фестиваль» (магнитиздат)
С. Курёхин и Поп-механика «3-й Ленинградский рок-фестиваль» (две последние записи выпущены в 1999 году на одной кассете в серии «Фестивали Ленинградского рок-клуба» Отделением «Выход»)
Валентина Пономарёва Fortune-Teller
«Алиса» «Энергия»
1986
«Аквариум» «Дети Декабря» (магнитиздат, CD)
С. Курёхин «Утренние упражнения в ореховом доме» (магнитиздат, Soundings of planet)
Red Wave (LP, участие в записях «Аквариума» и «Алисы»)
«Стереозольдат» «Асфальт» (магнитиздат)
1987
С. Курёхин & ПМ «Введение в Поп-механику» (LP, CD on Leo Records)
С. Курёхин Popular Zoological Elements (LP, CD on Leo Records)
С. Курёхин «Мир — советские звуковые эксперименты» (магнитиздат)
С. Курёхин & ПМ «Народ гуляет» (магнитиздат)
С. Курёхин & ПМ «Насекомая культура» (магнитиздат, в 1998 году переиздано на CD SoLyd Records)
ПМ & Westbam «Отец и сын» (в 2002 году переиздано на CD в составе «Сергей Курёхин — Поп-механика — Westbam»)
«Аквариум» «Аквариум» (LP)
Н. Корзинин «Камни Санкт Петербурга» (магнитиздат)
1988
С. Курёхин & ПМ Pop Mechanics No 17 (LP, CD on Leo Records)
ПМ & Westbam Live at Leningrad (LP)
С. Курёхин «От музыки тает снег» (магнитиздат)
С. Курёхин «Концерт в Таксоне» (магнитиздат)
1989
С. Курёхин, Г. Кайзер «Популярная наука» (CD on RykoDisc)
С. Курёхин, Б. Гребенщиков Mad nightingales in the Russian forest (Безумные соловьи русского леса" (LP on Leo Records, переиздано на CD в 1997 году SoLyd Records)
С. Курёхин, С. Летов «Полинезия: введение в историю» (альбом на фирме «Мелодия» (C60 28241 009), CD on RCA Victor, переиздано SoLyd Records)
1990
Document (8 CD box on Leo Records)
«Оазис-Ю» «Воспитание детей красотой подводной жизни»
Festival MIMI 89 (LP, сборник)
1991
С. Курёхин & ПМ «Ибливый опоссум — концерт во Франции» (CD, переиздавался на «SoLyd» под названием «Франция. Ибливый опоссум»)
С. Курёхин, Б. Гребенщиков «Live in Paris» (tape)
С. Курёхин, Б. Гребенщиков «Пиратско-детский альбом» (tape, ранняя версия «Детского альбома» — похоже, действительно «пиратская»)
С. Курёхин Rebecca Horn Buster’s Bedroom
1992
С. Курёхин Some Combinations of Fingers and Passion (CD on Leo)
В. Пономарева Live in Japan (CD on Leo)
С. Курёхин «Опера богатых» (LP on «Курицца Рекордс», переиздано в 2001 году на CD SoLyd Records)
1993
С. Курёхин «Воробьиная оратория» (CD)
1996
С. Курёхин, К. Маслак Friends Afar (CD)(переиздано в 2003 году «Manchester Files» (Бомба-Питер)
С. Курёхин, K. Маслак Dear John Cage (CD on Long Arms)(переиздано в 2003 году «Manchester Files» (Бомба-Питер)
1997
С. Курёхин «Трагедия в стиле рок» (CD)
С. Курёхин Just Opera (CD on Long Arms)
С. Курёхин Divine Madness (4 CD box on Leo Records)
1998
С. Курёхин «Ранние фортепианные произведения» (tape, выпущено Manchester Files (Bomba-Piter inc.)
С. Курёхин «Введение в Поп-механику»(tape, выпущено Manchester Files (Bomba-Piter inc.)
С. Курёхин «Два капитана-2» (CD)(tape, выпущено Manchester Files (Bomba-Piter inc.)
С. Курёхин «Детский альбом» (CD)(tape, выпущено Manchester Files (Bomba-Piter inc.)
С. Курёхин и Дэвид Мосс Two for Tea (CD)(tape, выпущено Manchester Files (Bomba-Piter inc.)
1999
С. Курёхин «Господин оформитель» (CD)(tape, выпущено Manchester Files (Bomba-Piter inc.)
Tamizdat Compilation Vol. 1 (CD, сборник)
2000
С. Курёхин & ПМ «Легенды русского рока» (CD, сборник)
А. Вапиров «Забытый ритуал» (2 CD)
С. Курёхин «Ливерпуль» (CD)
С. Курёхин «Полинезия» (CD)
С. Курёхин «Capriccio» (CD)
В. Пономарёва April in Japan (CD-R)
2001
С. Курёхин «Италия» (2CD)
С. Курёхин «Дон Карлос»
С. Курёхин «Опера богатых» (CD)
С. Курёхин «Давкот»
C. Курёхин «Призрак коммунизма»
«Оазис Ю» (А. Рыбин, Н. Кадыров) «Дикая жизнь» (CD) (также издано под названием «Песни восточных славян» — эта версия, скорее всего, пиратская)
С. Курёхин, Б. Гребенщиков «Песни шахматистов прошлого столетия» 2002
Сергей Курёхин — Поп-механика — Westbam (CD)
Kenny Millions & Friends Jazz Fantasy
2004
В. Волков, С. Курёхин, К. Маслак «Время, вперёд»
2007
С. Курёхин, «Господин оформитель», оригинальный саундтрек
2008
С. Курёхин Absolutely Great! (7 CD box on Leo Records)
2012
С. Курёхин «Сергей Курехин в „Аквариуме“» (2 CD, SoLyd Records)
С. Курёхин «США» (2 CD, SoLyd Records)
С. Курёхин «Япония» (2 CD, SoLyd Records)
С. Курёхин, Б. Гребенщиков «Курехин и Гребенщиков приглашают…» (2 CD, SoLyd Records)
«Аквариум» «Сроки и цены» (2 CD, Отделение ВЫХОД)
2013
С. Курёхин «Полинезия. Введение в историю» (LP, Мелодия)[86]
«Аквариум» «Электрошок» (2 CD+DVD, Отделение ВЫХОД)
«Аквариум» «Треугольник» (LP, Bomba Music)
«Аквариум» «Электричество» (LP, Bomba Music)
«Аквариум» «Табу» (LP, Bomba Music)
2014
«Аквариум» «Радио Африка» (LP, SoLyd Records)
«Аквариум» «Дети декабря» (LP, Bomba Music)
2017
С. Курёхин «Оно. Музыка для фильма» (CD+DVD, ГЕОМЕТРИЯ)
4. 필모그래피
음향 감독1987 — Строчка зигзагом (документальный)[87]
1987 — Счастливо оставаться! (также исполнитель музыки на семплере «Prophet 2000»)
1988 — Господин оформитель
1988 — Крик о помощи
1988 — Трагедия в стиле рок
1989 — Оно
1989 — Посвящённый
1990 — Переход товарища Чкалова через Северный полюс
1990 — Спальня Бастера[en]
1991 — Лох — победитель воды
1991 — Пьющие кровь
1991 — Двуликий Янус
1992 — Два капитана-2
1992 — Комплекс невменяемости
1993 — Никотин
1993 — Пленники удачи
1993 — Тюремный романс (в сотрудничестве с Юрием Касьяником)
1993 — Над тёмной водой
1994 — Замок
1994 — Любовь, предвестие печали…
1994 — Три сестры
1996 — Научная секция пилотов
2000 — Námornický valcík
2009 — Анна Каренина
출연
1986 — Диалоги (документальный)[88]
1988 — Трагедия в стиле рок — 까메오
1990 — Сломанный свет — Сергей
1991 — Дом под звёздным небом — пассажир в метро
1991 — Лох — победитель воды — Павел Гореликов
1992 — Комплекс невменяемости — профессор Гендельбах
1992 — Два капитана 2 — Капитан № 1
1992 — Над тёмной водой — Бывший муж Клары
게스트
Музыкальные игры (1989), автор сценария совместно с В. Аксёновым. Режиссёр — Виталий Аксёнов.
[1] 급성심장육종암으로 사망.[2] 임종 직전 정교회 사제에게 고해했다.[3] 크림 반도서쪽에 위치한 휴양도시이다.[4] 소비에트 연방(소련)과 그 외 동구권 국가들의 클럽 하우스를 일컫는 말이다. 문화 궁전은 스포츠, 전시회, 예술 행사 등과 같이 여러 종류의 행사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도록 계획된 공간이다. 일반적인 '궁전'은 하나 이상의 영화관과 콘서트 홀, 댄스 스튜디오(민속춤과 발레, 사교 댄스 등 여러 장르 공연 가능), 여러 DIY 동호회를 위한 공간, 아마추어 무선 라디오 동호회용 공간, 아마추어 극단과 밴드 등을 위한 공간을 포함하고, 렉토리움(강의실)을 포함한 체제 교육용 공간도 포함하여야 했다. 사람들은 여기서 연령대 별로 분류되어 활동에 참여했다. 문화 궁전에는 이러한 취미 활동을 위한 공간 이외에도 공공 도서관을 입주시켰다.[5] 고등예술 전문 대학[6] 소련 붕괴 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문화원으로 개명[7] 소련의 아방가르드 현대 예술[8] 당시 레닌그라드 언더그라운드 예술인들의 성지였다.[9]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리티니 구에 있는 카톨릭 교회이다.[10] 소련 붕괴 후 이름은 사마라로 개명[11] 이스라엘로 망명한 소련 출신 방송인, 1974년부터 BBC 소련 송출방송의 재즈코너를 맡았다.[12] 소련 음반사 '안트로프'의 설립자이자 음악 프로듀서, 80년대 초반까지 소련 언더그라운드 음악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13] 색소폰 연주자이자 록 그룹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리더 예고르 레토프의 형이다.[14] 80년대 레닌그라드 록 클럽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사교계 인사이다.[15] 추적60분처럼 제작진이 직접 집중취재한 내용과 지나간 역사적 사건들을 공산당의 관점이 아닌 세계의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써 가려져 있던 진실을 캐내는 취지로 알려져 시청자들에게 높은 신뢰를 얻고 있던 프로그램이다. 방송시간에는 레닌그라드 인구 절반이 시청했을 정도.[16] 1917년 레닌그라드에 설립된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사다.[17] 일부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그날 오페라 닥터 지바고를 작업 중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