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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비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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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안토니오 비발디
Antonio Vivaldi
파일:Antonio_Vivaldi.jpg
성명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
Antonio Lucio Vivaldi
출생 1678년 3월 4일 오후 5시 50분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사망 1741년 7월 28일 (향년 63세)
합스부르크 제국
경력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사조 바로크 음악
신장 181cm[1]
말띠
별자리 물고기자리[2]
상승점 처녀자리[3]
종교 천주교
서명 파일:비발디 싸인.png
▲ 현악기와 통주저음을 위한 협주곡 RV 146 전악장.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 연주.
▲ 트리오 소나타 Op.1 No.12 RV.63 "라 폴리아"(La Folia)에 의한 변주곡.[4]
▲ 바이올린 협주곡 Op.8[5] 전악장. L'Arte dell'arco 연주.
▲ 오라토리오 '유디트의 승리' RV 644. Orchestra Lorenzo Da Ponte 연주.
1. 개요2. 생애
2.1. 소년 비발디2.2. 피에타 고아원의 음악교사 비발디2.3. 오페라 작곡가 비발디2.4. 만토바의 궁정악장, 베네치아로의 복귀2.5. 갑작스러운 몰락2.6. 말년의 비발디
3. 이야깃거리
3.1. 사치스럽고 낭비벽이 심했던 비발디?3.2. 비발디의 가수 안나 지로3.3. 기타
4. 비발디의 음악세계
4.1. 기악 협주곡
4.1.1. 협주곡의 악장
4.2. 기악곡 작품 목록
4.2.1. 표제가 붙은 기악곡 모음
4.3. 오페라
4.3.1. 21세기에 부활한 비발디의 오페라
4.4. 종교음악 및 칸타타

[clearfix]

1. 개요

그의 음악은 야성적이고 불규칙적이다.
존 호킨스 경, 『음악원리의 실천과 역사 개관(A General History of the Science and Practice of Music, 1776)』
비발디는 가장 인기있는 바이올린 음악의 작곡가이자 연주자이다. 라 스트라바간차(La Stravaganza)[6]라는 비발디의 작품은 자신의 솜씨를 뽐내려는 연주자들 사이에서 제일 선호되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내 어릴 때만 해도 그의 협주곡은 음악회에 자주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의 경탄과 즐거움의 대상이었다. 만일 날카롭고 빠른 음들이 나쁜 것이라면, 비발디는 속죄해야 할 거리가 많다.
찰스 버니, 『일반 음악사(A General History of Music, 1776)』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오페라, 종교음악, 기악 협주곡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작품을 남겼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 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한명으로 바로크 음악의 대명사격인 바흐헨델보다 7살 연상이다. 다만 다른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과 음악은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이후에야 본격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사계》의 작곡가로 유명한데, 현재는 사계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발굴되어 널리 연주되고 있다.

2. 생애

2.1. 소년 비발디

1678년 3월 4일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와 카밀라 갈리치오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때부터 몸이 약했는지 칠삭둥이[7]가 얼마나 살까 했던 부모는 일단 집에서 급하게 세례를 한 후 정식적인 유아세례를 주지 않고 백 일을 넘겼는데, 그가 그 때까지 죽지 않자 5월 6일에야 유아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유전인 적발 때문에 붙은 별명은 '붉은 사제(il Prete Rosso)'인데, 붉은 머리를 주변 사람들이 썩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적발 문서 참고.

비발디 부모는 맏아들 안토니오를 포함해서 9남매를 낳았는데 현재 이름이 확인된 비발디 형제는 안토니오 비발디를 포함해서 6명이다.[8]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조반니 비발디는[9] 맏아들 안토니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또 안토니오가 12살이 된 무렵에는 자신의 상사였던 산마르코 성당의 음악감독이자 작곡가 조반니 레그렌치(Giovanni Legrenzi)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했다.[10]

하지만 자신의 수입만으로 9남매를 키우기 힘들었던 조반니는 안토니오를 음악가 대신 가톨릭 사제로 만들기 위해 15살에 올레오 수도원에 입회시켰다.[11] 비발디는 건강 때문에 수도원에서 기숙하지 않고 집에서 출퇴근 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았는데, 대신 비발디는 다른 사제 지망생들보다 오랫동안 수련을 받아야 했다. 비발디는 보통 6~7년 정도 걸리는 사제 수련 과정을 10년 만에 마치고 25살인 1703년 3월 23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사제로서 직무에 충실하지 않았고 일선 사목에도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바이올린 연주에 심취하거나 건강 문제를 핑계 삼아 미사 집전을 거르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1706년부터는 아예 미사를 집전하지 않았다. 이정도면 면직당해도 이상하지 않고 변명도 필요없을 수준. 다만 몸이 약해서 미사 집전을 못했다는 비발디의 말을 비겁한 변명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하필 그가 앓고 있던 병이 천식이었기 때문이다. 비발디는 평상시에도 계속 기침을 해댔기 때문에 제대로 미사를 집전하기 힘들었고 실제로 그가 집전한 몇 번의 미사도 기침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사제 본연의 업무를 하기 힘들었던 비발디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본격 발휘할 다른 기회를 얻게 된다.

2.2. 피에타 고아원의 음악교사 비발디

파일:ospedale1.jpg
가브리엘레 벨라(Gabriele Bella)가 그린 1782년 음악회.
당시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파벨이 베네치아에 방문했을 때 베네치아의 고아원이 연합한 음악회.

1703년 9월, 비발디는 사제품을 받은지 몇달만에 베네치아의 소녀 고아원 중 하나인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Ospedale Della Pieta)[12]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었다. 비발디의 공식직책은 사제였지만 딱히 근엄하거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으며 성무보다는 음악활동과 작곡에 더 힘을 기울였다.

당시 베네치아에 있던 고아원은 말이 고아원이지 상당히 규모가 크고 교육수준이 높은 교육기관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과정까지 모두 담당하는 일종의 종합교육기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피에타 학교의 경우 학생과 직원을 합쳐 1천명이 넘었고 병원시설이 갖춰져 있고 고등학문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있었으며 원생으로 구성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도 있었다.

이들 고아원은 가톨릭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았고 후원금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원생들과 직원에 대한 처우도 상당히 좋았는데, 음악교사로 부임한 첫 해 비발디의 연봉이 자신의 아버지의 연봉(15 두카트)보다 무려 4배가 많은 60 두카트였을 정도. 비발디는 피에타 학교에서 금세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그의 연봉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에 따라 그의 업무범위도 확대됐는데 공식적으로는 바이올린 교사였지만 얼마 후에는 실질적으로는 모든 악기를 총괄했으며 합창의 지휘와 감독도 했다. 직장 상사인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가 1713년 베네치아를 떠난 뒤로부터 비발디의 직함은 '합주 교사'로 바뀌었는데 진작부터 비발디가 음악관련 일은 다 맡아서 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발디의 노력 덕분에 피에타 학교의 음악수준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이 피에타 학교의 음악실력은 외국에도 널리 알려졌는데 베네치아를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이 피에타 학교의 연주회는 매우 중요한 볼거리였다. 장 자크 루소도 참회록에서 베네치아 고아원의 음악 수준을 높이 평가했을 정도이며 1739년 프랑스의 여행가였던 샤를 드 브로스는 피에타 고아원의 음악수준이 파리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보다 낫다며 칭찬하기도 했다.[13]

피에타 학교의 음악적 명성은 날로 높아져서 1710년대에는 피에타 연주자와 합창단이 전국 순회공연을 시작했으며 1715년에 피에타의 높으신 분들로부터 표창장을 받고 50 두카트의 특별 하사금도 지급되었다. 피에타의 소녀 연주자들은 정기연주회를 열었고[14] 행사가 있을 때는 고아원들이 연합해서 성대한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비발디는 이 피에타 학교의 합창단과 연주자들의 공연을 위해 많은 곡을 작곡했으며 이 때 대중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기교적으로 어렵고 기법적으로 대담한 곡도 많이 작곡하면서 비발디의 작곡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비발디는 이와같은 음악적 성과를 바탕으로 당시 고아원에 방문하시는 높으신 분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으며 1708년말에는 베네치아로 놀러온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4세에게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집 Op. 2를 헌정했다. 예술 애호가로 이름높았던 프레데리크 4세는 베네치아에서 피에타의 연주를 자주 들었으며 돌아가서도 자신의 궁정에서 비발디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자주 연주시켰다고 한다.

비발디의 '붉은 머리 사제'라는 별명은 바로 이 피에타 고아원의 소녀들이 붙여준 것인데, 나중에는 이 별명이 조롱의 의미로 쓰이기도 했지만 원래는 비발디를 존경하는 뜻에서 붙여준 애칭이었다. 한편 비발디가 본업을 사실상 팽개치고 음악에 몰두하자 교황청은 아예 비발디의 성직 집무권을 박탈해버리고 미사를 집전하지 못하게 했는데 사실 이 조치는 처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고 싶은 일 마음놓고 하라고 풀어준 것에 가깝다.
파일:20180730_161750.png
당시 프레데리크 4세가 베네치아에 방문했을 때 열린 왕을 위한 성대한 카니발.

피에타 학교의 (음악적) 명성이 높아지고 학생들이 일등신부감이 된다는 이야기가 알려지자 원래 고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각지의 귀족과 부자들이 자기 딸을 데려와서 피에타 학교에 입학시켜 달라고 사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후술되는 비발디의 가수 안나 지로도 이런 식으로 피에타 학교에서 공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3. 오페라 작곡가 비발디

명성을 얻은 비발디는 활발하게 연주여행과 작곡활동을 했으며 토스카나 대공국의 페르디난도 대공이라는 후원자도 생겼다. 1705년 비발디는 베네치아에서 첫 작품집을 출간했고 1709년에 두번째 작품집, 1711년에는 유명한 세번째 작품집 조화의 영감(L'estro armonico, the Harmonic Inspiration)을 출간했고[15] 1714년에는 4번째 작품집 라 스트라바간차(La stravaganza,the Extravagance)를 출간했다. 이후 비발디는 1729년까지 총 12권의 작품집을 출간하게 된다.[16] 이후에도 기악작품을 썼지만 왜 작품집이 출간되지 않았는지는 후술되는 내용 참조.

특히 세 번째 작품집 조화의 영감은 베네치아가 아니라 네덜란드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됐는데, 이후 비발디는 자신의 작품집을 가급적 외국에서 간행해서 유럽 전역에 자신의 곡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다. 특히 유럽 전역에 출판망을 가지고 있고 신곡 홍보 능력이 뛰어났던 암스테르담의 출판사를 많이 이용했다.

또한 비발디는 외국에서 왕족이나 귀족들이 베네치아를 방문하면 일부러 찾아가서 작품집을 헌정하거나 곡을 바치면서 그들의 환심을 샀으며 그들에게 작곡을 의뢰받기도 했다.[17] 전술한 것처럼 비발디는 두 번째 작품집을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4세에게 헌정했으며 세번째 작품집 화성의 영감은 메디치 가문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대공에게 헌정했다.

1710년부터 비발디는 사실상 전업작곡가가 됐지만 공식적으로 1733년경까지는 피에타 학교의 선생직을 유지했으며 자신의 학교 학생들을 위한 작품도 계속 썼다. 비발디의 종교음악중에는 여성 합창이나 독창을 위한 곡들이 많은데 이들은 모두 자신이 몸담고 있는 피에타 학교의 여학생들을 위해 쓴 작품이다. 또 자신의 기악 작품집에 수록된 곡 가운데 상당수가 피에타 학교 학생들을 위해 쓴 곡을 손질하거나 개작한 것이다.

비발디는 엄청나게 빠른 작곡속도로 유명했다. 비발디 당시에는 작곡법이 정형화되어 있었고 저작권도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보다 훨씬 빠르게 많은 곡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청중들도 기존에 작곡된 곡을 계속 듣기보다는 신곡을 선호했기 때문에 당시 작곡가의 능력은 곧 속작 능력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비발디의 작곡 속도는 정말 특출나기로 유명했는데, 비발디 스스로 필사가가 악보를 베끼는 속도보다 자신의 작곡속도가 더 빠르다고 자랑을 했을 정도. 그래서인지 당시의 기록들은 'Virtuoso Antonio Vivaldi' 이런 식으로 비발디의 이름 앞에 '비르투오소(거장)'라는 일종의 존칭을 붙이고 있다.

작곡가로 인정받은 비발디는 본격적으로 오페라 작곡에 관심을 갖게 된다. 비발디가 활동할 당시의 베네치아는 로마, 나폴리와 함께 유럽 바로크 오페라의 3대 본산이었으며[18] 베네치아에서 인기 있는 오페라 작곡가나 가수들은 큰 부와 명성을 얻고 있었다. 때문에 비발디도 당연히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려는 욕심을 갖고 있었다.

비발디는 1713년 자신의 첫 오페라 오토네(Ottone in villa)를 상연했으며 1714년에는 아예 산탄젤로 극장(Teatro Sant'Angelo)의 감독이 돼서 작곡 뿐만 아니라 오페라의 공연과 흥행까지 맡았다. 오페라 작곡가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비발디는 오토네를 시작으로 만토바로 가기까지 4년 동안 베네치아에서 무려 10곡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1715년 이후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비발디의 명성은 베네치아를 넘어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졌으며 몇몇 오페라는 이탈리아어 권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비발디 본인은 말년에 쓴 자신의 편지에 평생 94개의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이야기를 남겼는데, 현존하는 비발디의 오페라는 공연기록만 있고 악보가 실전된 경우를 포함해서 51작품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이 오페라의 숫자만 보아도 그가 상당한 인기 오페라 작곡가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4. 만토바의 궁정악장, 베네치아로의 복귀

베네치아 토박이였던 비발디는 가족이나 피에타 학교 학생들과 종종 연주여행을 다니기는 했지만 그의 생활기반은 어디까지나 베네치아였다. 하지만 그의 나이 40살이 되던 1718년 드디어 베네치아를 떠날 기회를 얻었다. 만토바의 영주였던 헤센-다름슈타트의 필리프가 그에게 궁정악장직을 제안한 것. 비발디는 1725년까지 만토바에 있었는데 이 7년의 기간동안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나는 그의 대표작이 된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가 작곡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후반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

다만 비발디가 7년간 만토바에 계속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자신의 고향인 베네치아와 만토바를 왔다갔다 했으며 피에타 학교의 선생직도 계속 유지했다. 또한 로마, 밀라노, 비첸차 등을 방문해서 자신의 오페라를 초연하기도 했다.

만토바의 궁정악장이었던 시기에 비발디는 젊은, 아니 어린 여가수 안나 지로(Anna Tessieri Giro)를 만나게 된다.[19] 비발디가 안나 지로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일단 기록상으로 두 사람에 만난 것이 확실시 되는 최초의 시점은 1723년이다.

비발디는 만토바의 궁정악장이 된지 7년만인 1725년에 사직하고 베네치아로 복귀한다. 비발디가 만토바에서 7년간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베네치아에 돌아오자마자 보라는 듯이 자신의 오페라 4개를 연달아 상연한 것을 보면 음악활동 측면에서 베네치아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

비발디는 1730년대 후반까지 활발하게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특히 안나 지로는 1726년부터 거의 비발디의 전속 가수처럼 비발디 오페라의 여주인공 역을 도맡았는데[21], 이 때문에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후술되는 안나 지로 항목 참조.

비발디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서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자신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한 칸타타를 의뢰하기도 했으며, 특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비발디의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핵심지였던 오스트리아보헤미아프라하에서 그의 오페라가 상연되기도 했다. 이런 카를 6세의 관심에 감읍한(..) 비발디는 자신의 9번째 기악작품집을 카를 6세에게 헌정했고 1730년에는 카를 6세의 배려로 부친과 함께 빈과 프라하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프라하에서 아그리포(Agrippo, 1730)와 고트족의 여왕 알빌다(Alvilda regina de' Goti, 1731) 두 오페라를 초연하기도 했다.

2.5. 갑작스러운 몰락

비발디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오페라 작곡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733년에는 피에타 학교의 선생직을 그만두면서 [22] 산탄젤로 극장의 흥행감독 역할도 다시 맡게 되었다.

한편 비발디는 12번째 작품집 이후 자신의 악보 출판을 전면 중단했는데 출판사와의 수익배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보를 출판사에 맡겨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보다 부자나 귀족들에게 소량으로 비싸게 파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비발디는 돈 많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소량의 필사된 악보를 비싸게 팔았다. 이런 판매전략은 악보를 산 사람 입장에서도 나름 만족스러웠는데, 대작곡가 비발디의 희소가치가 높은 악보를 소유했다는 자부심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간 비발디와 잘 거래를 하던 암스테르담의 출판업자들은 당연히 비발디의 이런 배신행위에 크게 반발했고, 결국 1737년 암스테르담에서 프랑스의 니콜라 셰드빌(Nicolas Chédeville)이라는 작곡가의 소나타 여섯 개를 비발디의 13번째 작품집 '충실한 양치기(Il Pastor Fido)'로 출판하는 위작 출판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일화는 그만큼 비발디의 명망이 높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만 비발디 본인은 이 위작 사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으며 'Op.13'이 출간되고 겨우 4년 뒤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미루어보아 죽을 때까지 이 소식을 접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이 작품집은 두 작곡가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도 거의 200년 동안 비발디의 작품으로 알려졌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위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23]

이렇게 잘나가던 비발디는 1737년을 기점으로 갑자기 몰락하게 된다. 한동안은 이 몰락의 원인을 비발디의 음악양식이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으로 파악했다. 당시 바로크 음악이 점차 저물고 고전파 양식의 음악이 대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덕이 심한 오페라 관객들이 비발디의 음악을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7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탈리아에서도 고전파 양식의 오페라가 점점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발디 생전에는 바로크 양식의 오페라도 여전히 인기가 있었고 비발디 사후에도 얼마 동안은 그의 오페라가 상연된 기록이 있다.

또한 비발디는 몰락시점인 1737년에도 활발하게 오페라를 작곡하고 있었으며 전술한 것처럼 이 해에 위작사태까지 벌어질 정도로 그의 명성은 여전히 높았다. 때문에 단지 고전파 음악의 대두만으로 그의 갑작스러운 몰락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최근의 연구로 그가 말년에 곤경에 빠진이유가 제대로 밝혀졌는데, 1737년에 큰 투자 실패가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산탄젤로 극장의 흥행감독이었던 비발디는 당시 작품선정과 공연일정을 두고 베네치아 오페라계의 다른 실력자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비발디가 작곡가로는 명성이 높았지만 흥행사업 측면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결국 비발디는 베네치아보다 상대적으로 경쟁이 적은 다른 지역에서 오페라 공연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 때 눈에 들어온 곳이 페라라(Ferara)였다. 1736년 가을, 비발디는 만토바 궁정악장 시절 로마에서 인연을 맺은 페라라의 귀족 벤티볼리오 후작(Marchese Guido Bentivoglio)에게 페라라에서 자신의 오페라 파르나체(Farnace)를 공연하고 싶으니 성사시켜달라고 요청하고 이에 벤티볼리오는 당시 페라라 오페라 극장의 감독 아베 볼라니(Abbé Bolani)와 상의해서 추진하라고 허락했다.

그런데 볼라니는 비발디가 자신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을 우려했는지 공연을 성사시켜줄 것처럼 이야기해놓고는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비발디는 이미 공연에 대비해서 가수와 스태프들을 섭외하고 연습시키고 선금까지 걸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공연을 성사시키려고 했지만 볼라니는 계속 비협조적이었다. 벤티볼리오에게 항의를 해봤지만 볼라니와 잘 협상하라는 무성의한 답변만 받았다.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두 해를 넘겨 1738년 초 카니발 시즌에 페라라에서 비발디의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간신히 결정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페라라의 추기경 루포(Ruffo)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공연을 두달 정도 앞둔 시점에서 루포는 비발디처럼 신앙심이 없고 어린 가수와 염문이나 뿌리는 타락한 성직자는 기강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페라라에 들어올 수 없다고 딴지를 걸었고 주연 가수로 낙점된 안나 지로도 페라라에 오면 안된다고 못박았다. 당연히 비발디는 항의했지만 루포는 융통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결국 공연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루포 추기경의 딴지는 정말 어이가 없는 수준인데, 정작 논란의 대상이었던 안나 지로가 루포가 시비걸기 직전까지 페라라에서 아무 문제 없이 공연을 했기 때문이다. 더 웃기는건 안나 지로는 1739년에도 페라라에서 공연을 했는데 당시 그녀의 출연작 중 하나가 비발디의 오페라 페르시아의 왕 시로에(Siroe re di Persia)였다는 것(..).

페라라의 공연에 왜 이렇게 목을 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튼 공연이 무산되면서 여기에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한 비발디는 말 그대로 파산상태가 되었다.[24]

2.6. 말년의 비발디

이처럼 투자 실패로 경제적으로 궁핍에 빠진 비발디는 자신의 열렬한 팬이었던 카를 6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다행히 카를 6세는 비발디에게 빈에 오면 황실 음악가로 받아주고 빈에서 오페라 공연을 주선해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희망을 얻은 비발디는 최대한 빨리 빈에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간 비싸게 팔았던 자신의 명품 악보(...)를 상당히 싼값에 팔아넘겼다.

이렇게 돈을 마련한 후 비발디는 서둘러 빈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그가 빈에 도착했을 때 카를 6세는 위독한 상황이었고, 그가 도착한 직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카를 6세가 죽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면서 빈의 정치상황이 매우 불안정해졌고 카를 6세의 후계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빈과 지척인 헝가리 왕국프레스부르크로 피신해 버렸다(...). 당연히 합스부르크 가문은 비발디의 처우 따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빈의 모든 공연장은 무기한 문을 닫았다.

실의에 빠진 비발디는 결국 지병이었던 천식이 악화되면서 빈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향년 63세.[25] 음악적 능력과 나름의 사업수완으로 전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던 대작곡가 비발디는 말년에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불운이 겹치는 바람에 이처럼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래도 빈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나름 예우를 갖춘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이 때 성 슈테판 대성당의 소년합창단 소속이었던 요제프 하이든[26]도 장례식에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결국 합창은 불러지지 않았다고...[27] 그의 유해는 모차르트처럼 묘지가 이장되는 과정에서 분실된 탓에 현재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다.

음악가 비발디는 사망 후 곧 잊혀졌으며,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기까지 200여년을 기다려야 했다. 20세기 초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자신의 선배 비발디의 곡을 건반 악기 등으로 편곡한 편곡집이 발굴되면서 잊혀져 있던 비발디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3. 이야깃거리

3.1. 사치스럽고 낭비벽이 심했던 비발디?

유럽 최고의 음악가로 잘나가다가 말년에 전 재산을 잃고 초라하게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한동안 비발디가 낭비벽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안나 지로와의 염문으로 베네치아에서 쫓겨나서 객사했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여겨졌다. 또한 그가 성직자였음에도 성무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음악에만 열중했기 때문에 불성실하고 게으른 사람이었다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 비발디가 세간의 인식과 달리 상당히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쓸데 없이 재산을 낭비하거나 방탕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평가가 우세해지고 있다.

그가 음악교사로 부임한지 몇년 만에 피에타 학교가 유럽에서 손꼽히는 음악 수준을 갖춘 교육기관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직업의식과 역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나 지로와의 근거없는 소문을 제외하고는 딱히 여자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다. 물론 그가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성무를 게을리했다는 점은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아무 장점이 없이 게으르고 물의만 일으키는 사람이었다면 가톨릭 당국에서 진작에 그를 면직했을 것이다.

그가 딱히 돈을 낭비했다거나 사치스러웠다는 증거도 없다. 비발디는 평생 자기 가족과 같이 살면서 부모와 형제들을 충실하게 부양했다. 또한 생애 항목에 있듯이 그는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고 돈을 버는데 상당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능력은 부지런함과 경제관념이 필수 요소라는 것을 상기하자. 그가 괜히 산탄젤로 극장의 흥행감독을 맡은 것이 아니다.

비발디의 갑작스러운 몰락은 낭비벽 때문이 아니라 전술한 바와 같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페라라의 오페라 공연이 무산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빠르게 손절했어야 할 프로젝트를 무리하게 끌고 가다가 결국 파산하게 된 것.

3.2. 비발디의 가수 안나 지로

비발디의 삶을 거론할때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수수께끼(?)의 여인, 메조소프라노 가수 안나 지로이다. 그간 안나 지로는 비발디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았는데, 최근에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녀를 둘러싼 각종 루머나 부정적인 인식들이 상당부분 잘못되거나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최근까지도 안나 지로는 비발디의 연인이라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알려져 있었는데 현재는 이게 루머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또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그녀가 비발디의 후광으로 과분하게 출세한 3류 가수 또는 아마추어급 가수라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이런 편견은 그녀가 소프라노가 아니라 낮은 음역대를 가진 가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녹음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현재 안나 지로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대의 평에 의하면 안나 지로는 성량이 다소 작은 대신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였으며 표현력과 연기가 훌륭한 가수였다고 한다. 다만 아무래도 소프라노보다 음역대가 낮은 메조소프라노 성향의 가수였기 때문에 과연 프리마돈나로 적절한지를 두고 당시부터 논란이 있었으며 현재에도 가수로서 그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안나 지로는 비발디 생전에도 비발디 외에 여러 작곡가들이 그녀를 위한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비발디 사후에도 은퇴하기 직전까지 여러 곳을 다니면서 가수로 명성과 인기를 누렸다. 또한 그녀가 주연을 맡은 오페라 상당수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보면 최소한 3류급 가수라고 폄하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으며 나름의 장점과 매력을 충분히 갖춘 가수였다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안나 지로는 만토바에서 1710년에 태어났으며 부친은 나름 재력이 있는 이발사이자 가발 제조업자였다. 안나 지로는 10대 초반인 1720년경부터 20살 연상의 이복 언니 파올리나 지로가 살고 있는 베네치아에서 음악공부를 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 때 피에타 학교에서 공부했을 가능성이 높다.[28] 그녀가 피에타 학교에서 공부한 것이 맞다면 안나 지로는 일찌감치 비발디와 인연을 맺고 있었던 셈인데, 다만 이 때는 비발디가 특별히 안나 지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나 지로는 1723년 베네치아 근처의 도시 트레비소에서 가수로 데뷔한다. 이 때 그녀가 공연했던 오페라 '불행한 행운의 님프(La ninfa infelice e fortunata)'는 비발디가 참여한 공동 창작 오페라였는데, 비발디는 이 때 안나 지로라는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듬해 안나 지로는 베네치아에서 토마소 알비노니(Tomaso Albinoni)의 오페라 라오디케(Laodice)에 출연해서 호평을 받았고, 이 때부터 전업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안나 지로는 비발디가 베네치아로 돌아온 이듬해인 1726년 그의 오페라 템페의 도릴라(Dorilla in Tempe)에서 에우다미아 역으로 출연하는데, 이 때 조연이었던 에우다미아가 주연이었던 도릴라보다 더 주목을 받게 되자 비발디는 그녀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그녀를 위한 작품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안나 지로는 도릴라의 템페 이후 비발디가 새로 작곡한 13개의 오페라와 성악곡에서 프리마돈나로 활약했으며 비발디의 말년까지 함께 일하게 된다.
에우다미아의 아리아 "내 사랑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29]

비발디는 베네치아 외에 베로나 만토바 피렌체 등 이탈리아 내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오페라를 상연할 때도 항상 안나 지로를 데리고 다니면서 자신의 오페라에 출연시켰다. 때문에 사람들은 비발디와 안나 지로가 심상치 않은 사이라고 의심을 하기 시작했으며 비발디의 경쟁자들은 이런 루머를 더 자극적으로 확대재생산해서 퍼뜨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안나 지로가 본격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에 그녀의 나이는 많게 잡아도 10대 후반을 넘지 않은 소녀였다. 때문에 그녀의 이복언니 파올리나 지로가 동생의 보호자이자 매니저 역할을 했고 비발디의 연주여행에 안나 지로가 동행할 때도 항상 파올리나가 따라다녔다. 또 파올리나는 천식으로 고생하는 비발디를 간호하고 가사를 돕는 일도 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이 왜곡돼서 비발디가 두 자매와 동거를 하면서 자매덮밥을 하고 있다는 괴소문이 돌았고 나중에는 비발디와 안나 지로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들 소문은 모두 근거가 없으며 사실상 음해성 루머에 불과하다. 두 사람이 딱히 사제관계를 넘어 깊이 사귀거나 동거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으며 생전의 비발디와 안나 지로 본인들도 모두 이런 소문을 부인했다. 오히려 이런 소문때문에 두 사람이 좀더 조심해서 행동했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애초에 비발디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기본적으로 방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30년간 피에타 여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단 한번도 남녀관계로 인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으며 안나 지로와의 괴소문 외에는 딱히 여자 문제가 불거진 적도 없었다.

따라서 비발디가 안나 지로와의 염문설 때문에 베네치아에서 쫓겨났다던가 사제직을 박탈당했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잘못된 이야기이다. 생애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비발디는 죽기 2년 전까지도 베네치아에서 활동했으며 베네치아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도시의 유명인사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교황청에서도 그와 관련된 루머들을 모두 괴담으로 치부해 버리고 딱히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비발디는 죽을 때까지 사제의 직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안나 지로와의 염문설은 호사가들의 관심사였을 뿐 딱히 비발디의 음악 활동이나 명성에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었다.[30]

각설하고, 안나 지로는 1738년부터 창작 활동을 사실상 중단한 비발디를 떠나 독일의 그라츠에서 활동하는데 1740년 비발디가 빈으로 가는 도중에 그라츠에 들렸을 때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이 때 비발디는 안나 지로에게 빈에서 자신이 재기하면 다시 함께 음악을 하자고 했고 안나 지로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서 비발디와 함께 그라츠에서 빈으로 건너 온다.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비발디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빈에서 죽는 바람에 이 제안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안나 지로는 비발디 사후에 얼마간 그라츠와 빈을 오가면서 활동했으며 빈에서 그의 오페라 메세니아의 신탁(L’oracolo in Messenia)을 공연하기도 했다. 1742년경 이탈리아로 복귀한 안나 지로는 이 때부터 바로크 오페라 대신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나 발다사레 갈루피(Baldassare Galuppi)같은 고전기 오페라 작곡가들의 작품에 주로 출연했다.

1748년, 공연을 위해 피아첸차에 머무르고 있던 안나 지로는 피아첸차의 토박이 귀족이었던 란디 가문의 안토니오 란디(Antonio Maria Zanardi Landi)의 구애를 받게 된다. 당시 돌싱이었던 란디는 안나 지로에게 한눈에 반한 나머지 베네치아까지 쫓아와서 결혼을 하자고 졸랐으며 결국 두 사람은 비밀리에 결혼했다.[31] 결혼 후 안나 지로는 바로 은퇴했으며 이후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어디서 어떻게 언제까지 살다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3.3. 기타

4. 비발디의 음악세계

비발디는 작곡에 대한 엄청난 열정을 가진 노인이다. 나는 그가 사보가가 사보하는 속도보다 훨씬 빨리 협주곡 하나를 작곡해내겠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 샤를 드 브로스, 1739년 쓴 편지에서
나는 그의 음악이 싫증난다. 스트라빈스키가 그를 '똑같은 협주곡을 500번 쓴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나는 비발디가 500곡의 작곡을 시작만 했을 뿐 아무런 결말과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계속 쓰고 또 쓰려고 시도만 했을 뿐이다.
― 찰스 로젠(Charles Rosen), 1987년 뉴욕 타임스

한동안 많은 음악가와 평론가들이 비발디를 매너리즘에 빠진 작곡가라고 비판했으며 20세기 후반까지도 비발디에 대해 이런 인식이 박혀 있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작가인 데이비드 바버는 "비발디는 작품을 수백 개 쓴 게 아니라 한 곡을 수백 번 베껴 쓴 사람이다."라고 비발디를 비판했다.[35] 위에 인용한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평론가 찰스 로젠은 한술 더 떠서 비발디가 만들다 만 미완성곡만 줄창 쓴 작곡가라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비발디 음악이 진가를 인정받은건 21세기에 들어선 이후였다. 비발디에 대한 연구와 음악의 발굴이 진행되면서 그가 결코 그저그런 작곡가가 아니라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취를 이룬 작곡가였다는 것이 확인된 것.

그가 작곡한 곡들은 구성이 천편일률적이며 자기표절이 심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표면상으로 보면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36] 이런 분위기 때문에 최근까지도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은 일반인들은 비발디의 작품 중에 사계 외에는 거의 알지 못했고 어지간한 클래식덕후들도 비발디를 바로크 시대를 풍미했던 작곡가 중 한명 정도로만 평가했다.[37] 하지만 이 비판은 철저하게 현대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본 것으로, 비발디 시절에는 작곡가들이 대부분(사실상 모두) 정형화된 작법으로 빠르게 비슷비슷한 곡을 썼으며 자신이나 남의 곡을 표절하는 현상도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비발디에 대해서만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다.

오히려 비발디가 확립한 기악곡 양식(= 콘체르토 양식)은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혁신적인 측면이 있었는데, 그의 작법대로 작곡하면 음악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빠른 속도로 곡을 작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빠른 시간 내에 많은 곡을 작곡해야 했던 당시의 작곡가들에게는 정말 고맙고도 절실한 돌파구였다. 비발디의 기악곡 양식이 당대에 크게 유행하고 이후의 기악곡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비발디는 세간의 인식처럼 매너리즘에 빠진 작곡가가 결코 아니다. 같은 장르에서 워낙 많은 곡을 작곡했기 때문에 그냥 들으면 그 곡이 그 곡처럼 들리겠지만 그의 음악을 제대로 공부하고 들어보면 다양한 악기 조합과 음악양식, 연주기법을 실험했던 작곡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술되는 내용 참조.

오히려 발상을 전환하면 비발디의 음악은 재활용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클래식 팬들도 있다. 아래 예시에서 사계의 '봄' 1악장의 선율이 어떻게 재활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실제로 묘미를 느낄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
오페라 Dorilla in Tempe의 신포니아 3부

4.1. 기악 협주곡

기악분야에서 비발디의 가장 큰 업적은 알레산드로 스트라델라, 아르칸젤로 코렐리, 주세페 토렐리 등의 선배음악가들이 발전시키고 확립한 합주협주곡(콘체르토 그로소) 양식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코렐리는 합주협주곡을 독주악기 부분(콘체르티노)과 합주 부분(리피에노 또는 그로소)으로 나누었는데, 오늘날로 치면 2~3개의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로 구성된 협주곡이라고 보면 된다. 아래의 예시에 나오는 악보에서 윗부분이 독주부(바이올린 2대와 비올론 첼로)인 콘체르티노이고 아랫부분이 합주부인 리피에노이다.
코렐리의 합주협주곡 Op.6 가운데 8번 곡

한편 토렐리는 리토르넬로(ritornello)라는 양식을 도입했는데, 일종의 론도형식을 합주협주곡에 도입한 것으로[38] 합주부(tutti)와 독주부(solo)가 번갈아가면서 등장하는 것이다. 즉 A-b-A-c-A-d… 이런 식으로 합주(A)와 독주(b,c,d)가 반복되는데, 반복되는 횟수는 곡마다 다르고 독주부에서는(종종 합주부도) 조성이 바뀐다. 또한 토렐리는 협주곡에 급-서-급의 3악장 체제를 도입했다.

비발디는 이와같은 선배들의 업적을 이어받아서 자신만의 합주협주곡 양식을 확립했는데, 빠른 두 악장 사이에 느린악장을 배치한 3악장 체제를 견고하게 했으며 코렐리처럼 독주부와 합주부를 따로 두지 않고 독주악기들이 합주에 함께 참여하도록 했다. 또 바이올린의 대가답게 리토르넬로의 바이올린 독주부가 선배 작곡가들보다 확대되어 있으며 기교적으로 훨씬 어렵고 다채롭게 구성되어 연주자의 역량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했다. 합주부도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조성이나 셈여림을 바꾸는 등 나름의 변화를 주고 있으며 종종 솔로와 합주가 같이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비발디의 협주곡의 리토르넬로는 독주부와 합주부가 상당히 자주 교차되는데, 마치 독주와 합주가 서로 경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39]

아래의 예시는 전형적인 비발디 스타일의 리토르넬로를 보여주는데, 이 예시처럼 독주부가 먼저 등장하는 경우도 꽤 있다.
비발디, 조화의 영감(Op.3)중 10번째 곡인 4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중 1악장

화려한 독주부 덕분에 비발디의 음악은 굉장히 열정적이고 생기가 넘치는 느낌을 준다. 비발디의 협주곡에 나타나는 기교적인 성향은 피에트로 로카텔리주세페 타르티니와 같이 초절기교를 가진 후배 연주자/작곡가들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비발디는 느린 악장(즉 2악장)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음악적으로 보여준 작곡가이다. 당시의 느린 악장은 빠른 악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숨고르기를 하거나 서주 역할을 하는 수준이었는데 반해 비발디는 느린 악장의 규모를 확대하고 독자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이로 인해 비발디의 협주곡은 빠른 악장의 활기차고 역동적인 느낌과 느린 악장의 어둡고 우수에 잠긴 느낌이 선명한 대비 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한편으로 한 악장 내에서도 느리고 짧은 서주를 도입하거나 악장 중간 중간 빠른 패시지와 느린 패시지를 교차시켜서 추가적으로 긴장감을 높이기도 했다(사계의 여름 1악장이 대표적). 괜히 바흐가 비발디의 곡을 열심히 분석하고 연구한 것이 아니다.

아래의 예시는 1악장 초반에 서주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이며 독주부의 기교적이고 화려한 패시지는 덤이다. 또 이 협주곡에서 2악장은 통주저음과 저음역 악기들이 빠지면서 합주가 생략되고 고음역 악기들이 독주 바이올린을 반주하는 구성을 갖고 있는데 덕분에 독주 바이올린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이 두드러지는 효과를 준다. 비발디 협주곡의 느린 악장은 이런 구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계 중 봄과 겨울의 2악장도 이런 구성을 갖고 있다.[40]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RV390 b단조

통상적인 구성에서 크게 벗어난 파격적인 구성을 가진 협주곡도 꽤 있는데, 작품집 4번 'La Stravaganza'의 8번째 협주곡 d단조(RV249)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협주곡은 통상적인 3악장이 아니라 2악장 구성인데, 1악장에서는 반음계적인 선율을 가진 바이올린 독주가 먼저 등장한 후 알레그로-아다지오-프레스토-아다지오의 빠르고 느린 패시지가 번갈아 나타난다. 첫번째 아다지오는 단 1마디에 불과하기 때문에 잠깐 쉬었다가 바로 프레스토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며 두 번째 아다지오는 통상적인 3악장 형식의 느린 악장 역할을 한다[41]. 또 이 협주곡에서 1악장은 바이올린 독주가 거의 카덴차 스타일로 협주의 선율이나 빠르기와 상관없이 별개로 움직이는데 반해 2악장에서는 협주의 선율을 독주가 이어받으면서 상호간에 긴밀하게 움직인다.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RV249 d단조

비발디의 기악 협주곡 중에 독주악기가 등장하지 않고 합주만으로 진행되는 작품은 현악 협주곡 또는 신포니아(sinfonia)라고 명명했는데,[42] 비발디의 신포니아는 대체로 각 악장이 2분을 넘지 않으며 고전기 이후의 교향곡(symphony)처럼 주제의 전개나 발전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일단 제시된 주제를 고음부와 저음부에서 번갈아 연주하거나 주제가 반복되는 중간에 기교적인 패시지를 삽입하는 등의 수법을 통해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몇몇 협주곡과 신포니아 중에는 비발디의 작품중에 흔치않게 대위법적인 경향이 나타나는 작품도 있는데 신포니아 RV134와 RV143의 1악장, RV123의 3악장이 그 예시이다.
비발디, 현악 협주곡(신포니아) RV134 e단조

이처럼 비발디의 협주곡을 제대로 들어보면 기법적으로 챙겨볼만한 요소가 상당히 많다.

비발디는 당대 기준으로 셈여림의 활용에도 매우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사용했던 셈여림 지시들은 현대에 활용되는 ppp - pp - p - mp - mf - f - ff - fff 구분보다 세분화됐다고 한다. 비발디의 셈여림 지시를 크기 순으로 일렬로 늘어놓으면 현대의 크레센도(crescendo)나 디크레센도(decrescendo)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한다.[43] 악장 내에서 동일한 동기나 악절이라도 이 셈여림(다이내믹스)을 바꾸면서 일종의 "메아리 효과" 를 주기도 한다

비발디의 수법에 크게 감명받은 바흐는 비발디의 협주곡을 쳄발로오르간곡으로 편곡했으며, 그가 작곡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등에서도 비발디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다.

4.1.1. 협주곡의 악장

빠른 악장에서의 협주는 대부분의 경우 4번 등장하는 것이 기본인데, 거의 동일한 악절이 조성만 바뀌면서 등장한다. 조성의 변화는 규칙성이 있어서, 예를 들어 C major 에서 시작했다면 2번째 등장하는 협주는 G major, 3번째는 A minor,[44] 4번째는 C major 이런 식으로 계속 옮겨간다. 하여간 잊을 만하면 자꾸 똑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므로 테크닉이 중시되는 독주 파트와는 별개의 중독성 있는 존재감을 갖게 된다. 대조적으로 독주 파트의 경우 선율 중심보다는 화성 중심으로 현란한 아르페지오가 두드러지며, 첼로의 통주저음(basso continuo) 혹은 제1 바이올린의 은근한 반주가 따라붙는다.

빠른 악장에서의 또 다른 유별난 특징은 바로 리듬감으로, 어떤 하나의 리듬을 정해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걸 작정하고 밀어주는 모습을 보인다.[45]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을 잘 캐치해서 강약약 강강강약 강중약을 뚜렷하게 강조할 경우, 비발디의 음악은 가장 무도회 수준의 흥겨움을 자아내게 된다. 에우로파 갈란테(Europa Galante)가 이런 측면을 잘 잡아내고 있으며, 좀 더 하드코어한 해석으로는 앙상블 마테우스(Ensemble Matheus)[46]가 있다. 이런 식으로 연주한다.[47]

느린 악장의 경우 악보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다. 특히 독주 파트에서 뜻밖에도 어린이용 교재 수준으로 간략하게 쓰인 악보를 볼 수 있는데,[48] 이대로 연주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바로크적인 모든 가능한 꾸밈음들과 소소한 애드립들을 넣어서 그럴싸하게 꾸미라는 얘기다. 즉 독주 멜로디의 기본 얼개는 비발디가 대충 던져주고, 그걸 멋있게 꾸미는 건 연주자의 재량. 바로크 당대에 이런 일이 드물진 않았지만 비발디가 유독 그런 게 심했다. 그래도 잘 꾸미면 이건 그야말로 지중해의 우아하고 느긋한 풍미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나온다.

4.2. 기악곡 작품 목록

파일:vivaldi-opus.png
비발디의 작품집 목록

기록상으로 대략 760곡 가량의 많은 곡을 남겼음에도 한동안 대중적으로는 '사계' 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비발디의 작품번호는 모차르트의 쾨헬 번호처럼 Ryom-Verzeichnis(RV, 뤼옴 번호)라는 고유 표기가 있는데, 20세기 덴마크의 음악학자 '페터 뤼옴(Peter Ryom)'이 비발디의 악곡들을 분류한 것이다.

비발디는 첫 두 작품집은 소나타로 Op.1은 트리오 소나타(바이올린 2대 + 통주저음)이며 Op.2는 바이올린 소나타(바이올린 + 통주저음)인데, 선배인 코렐리와 어린 시절 스승이었던 조반니 레그렌치 등의 영향이 나타난다. 특히 Op.1의 마지막 소나타는 비발디 항목 시작부에 링크되어 있는 라 폴리아 변주곡인데 유명한 코렐리의 라 폴리아 변주곡과 비교해서 들어보면 나름 흥미롭다. 항목 참조.

세번째 작품집인 <조화의 영감>(L'estro armonico, Op. 3)부터 본격 합주 협주곡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이 조화의 영감은 비발디 개인적으로도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인데, 전술한 비발디 스타일의 기악 협주곡 양식이 이 작품집에서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대위법보다는 주 선율을 다채롭게 장식하고 부각시키는 화성위주의 전개방식도 이 작품집에서 본격화된다. 이 조화의 영감 이후 비발디는 <라 스트라바간차>(La Stravaganza, Op. 4), <화성과 창의의 결합>(Il cimetno dell' armonia e dell' inventione, Op. 8), <라 체트라>(La cetra, Op. 9)등 다양한 협주곡집을 출판했다. 당대에 바이올린 또는 협주곡하면 비발디라는 이름이 떠오를 정도로 명성을 얻었으며 당대의 많은 음악가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베네치아를 방문했다.

12개의 작품집 외에도 비발디는 수백곡의 기악곡을 남겼으며[49] 바이올린 외에도 꽤 많은 악기를 위한 소나타와 협주곡을 작곡했다. 곡 수가 워낙 많고 대충 들으면 그 곡이 그 곡처럼 들리기 때문에 잘 느껴지지 않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비발디는 다양한 악기와 다양한 양식의 가능성을 계속 실험한 작곡가였다.

특히 당시 통주저음용 악기로만 인식돼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악기들의 독주 가능성을 실험한 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이다. 다수의 바순협주곡[50]첼로협주곡(RV 398-424)이 그 예시인데, 독주 악기로서의 가능성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두 악기의 잠재력을 발견해서 끌어 올린 점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첼로의 경우 협주곡이 아니라 소나타도 있다(RV42, RV44, RV46).

바순과 첼로 외에도 비올라 다모레 협주곡[51], 플루트 협주곡[52], 오보에 협주곡(RV 446-463)[53], 소프라노 리코더(RV 443-445), 류트 협주곡(RV93 - 류트와 2 바이올린, RV540 - 류트와 비올라 다모레) 만돌린 협주곡(RV425, RV532 - 2대의 만돌린), 오르간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RV541,542,554- 오보에 추가,766,767,808)[54] 등 다양한 악기를 위한 협주곡이 있다. 솔로 악기를 협주곡 외에도 아니라 대편성의 합주 협주곡도 여러곡 썼다. 다만 비발디는 하프시코드와 같은 건반악기를 위한 작품은 쓰지 않았다.[55]


▲ Violin Concerto a minor, RV356 1st mov. 이 곡은 작품집 3집 "조화의 영감"의 6번 곡으로 한때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가 운영하는 지하철 환승 알림의 배경음악(연주자는 예후디 메뉴인경)이었다. 다만 국악을 이용하자는 제안 때문에 2012년부터 2023년 1월 15일까지 얼씨구야로 대체되었다가 2023년 1월 16일부터 박경훈의 풍년으로 대체되었다.


▲ Bassoon Concerto in e minor, RV 484 3rd mov.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OST다.


▲ Mandolin Concerto in C major, RV 425.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의 OST로 유명해진 곡이다.

4.2.1. 표제가 붙은 기악곡 모음

비발디 작품들 중 표제가 붙어 있는 것만 따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축일을 위한 협주곡은 제외.

4.3. 오페라

'비발디의 웅장한 《다리우스 왕의 대관Incoronazione di Dario》(RV 719)이 박수갈채 속에 초연되었다'

『팔라데 베네타』(Palade Veneta) 1717년 1월판

현재는 그렇지 않지만 당대의 비발디는 기악 작곡가보다는 오히려 오페라 작곡가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의 기악작품이나 종교음악은 주로 피에타 학교 학생들의 음악 연습이나 연주회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작품집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네덜란드 같은 타지에서 많이 출판되었기 때문에 비발디 입장에서 봐도 가장 큰 경제적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오페라였다.

다만 비발디는 당대에 분명 인기 오페라 작곡가이긴 했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다른 유명 오페라 작곡가들, 예를 들어 안토니오 칼다라발다사레 갈루피, 요한 아돌프 하세, 니콜라 포르포라 등에 다소 밀리는 편이었다. 해외에서 그의 오페라에 대한 인기도 오페라 자체보다 기악곡의 대가로 알려진 그의 명성에 기댄 바가 컸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 수 자체도 당대의 유명 오페라 작곡가들에 비하면 딱히 많은 것은 아닌데, 예를 들어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는 115편, 발다사레 갈루피는 109편, 요한 아돌프 하세는 73편, 니콜라 포르포라는 55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오페라 갯수도 갯수지만 자신이 흥행감독으로 있던 베네치아 산탄젤로 극장을 제외하고는 소위 메이저 극장에 올린 작품수가 적고 작품당 공연 횟수도 적은 편에 속한다. 물론 인기와 작품성은 엄연히 별개이며 비발디의 오페라가 동시대 다른 작곡가에 비해 음악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비발디 자신의 말로는 평생 94편의 오페라를 썼다고 하는데 미완성이거나 악보가 소실되고 공연기록만 남아 있는 것까지 포함한 현존하는 비발디의 오페라는 51개이다.[67] 다만 그의 작품으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그가 다른 작곡가와 공동으로 작업한 오페라가 상당수 있고 다른 작곡가의 미완성작을 자신이 완성해서 공연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68] 자신이 조금이라도 참여한 오페라까지 모두 합하면 비발디가 말한 94개라는 숫자가 허풍만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온전하게 창작한 오페라는 94개는 고사하고 51개보다도 훨씬 적다. 당시 오페라는 대체로 공연 사이클이 짧았기 때문에 작곡가들은 상연 속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이 기존에 작곡했던 곡이나 다른 사람이 쓴 곡을 무단으로 도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비발디의 오페라도 결코 예외가 아니어서 심한 경우에는 절반 이상의 분량을 이런 식으로 으로 채워넣기도 했다. 티토 만리오(Tito Manrio)를 5일만에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분위기 덕분. 그래서 아예 파스티치오(pasticcio)라는 작법이 유행했는데, 자신의 이전 오페라나 다른 작곡가의 곡을 조합해서 새로운 오페라를 구성하는 작법이다. 현존하는 비발디의 51개 오페라 가운데 8개 이상이 이 파스티치오이며, 파스티치오라고 명시하지 않았더라도 곡 상당수를 다른 작곡가나 자신이 기존에 작곡했던 곡으로 채워놓은 오페라가 많다.

또한 비발디는 자신의 기존 오페라를 일부 개작하고 제목을 바꿔서 공연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1716년에 작곡된 '사랑과 증오의 영원한 승리(La costanza trionfante degl'amori e de gl'odii)'는 2년 후 '파르티아의 왕 아르타바노(Artabano, re dei Parti)'로 개작했고 1732년에는 다시 '도리클레아(Doriclea)'라는 이름으로 개작했다. 이런 경우를 모두 제외하면 순수한 비발디의 창작으로 인정할 수 있는 오페라는 그 수가 정말 적다.

그의 오페라 아리아들은 대체로 화려한 가창기교보다는 서정성이 돋보이며 동시대 다른 작곡가의 오페라에 비해 중창이나 합창이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한다. 또한 비발디는 저음역대의 가수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의 오페라에서는 소프라노가 대체로 1명만 등장하며 음역도 경이로운 수준까지는 올라가지 않는다. 그리고 오페라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아리아도 상대적으로 저음역대의 곡이 많다. 그의 전속 가수였던 안나 지로가 콘트랄토 가수라는 점이 많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악보에 충실하게 노래를 불렀을 때를 전제로 한 이야기이다. 당시의 오페라계에서는 가수들이 악보에 적혀 있는 그대로 노래를 부르지 않고 자의적으로 장식음이나 기교적인 패시지를 집어넣어서 부르는 일종의 애드립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애드립 능력은 가수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로 여겼을 정도이며 심지어 기본 선율마저 가수가 멋대로 바꿔 부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따라서 비발디 당시의 공연에서 실제로 불려진 아리아들은 현존하는 악보보다 훨씬 기교적이고 화려했을 것이다.[69] 이 때문에 현대에 공연할 때에도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애드립을 추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다만 아래의 예시는 악보에 충실한 가창에 해당된다.
티토 만리오에서 티토(베이스)의 아리아 "Se il cor guerriero"
몬테주마의 주요 아리아. 모두 메조 소프라노와 베이스를 위한 아리아이다.

한편 비발디의 오페라는 반주도 상당히 인상적인데, 기악의 대가답게 합주 협주곡을 연상시키는 현란하고 색채감 넘치는 현악 반주가 돋보이며 오페라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묘사도 뛰어나다. 반주가 단순히 성악을 보조하는 수준을 넘어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에 비발디 오페라는 이 반주 때문이라도 충분히 들어볼만 하다.

4.3.1. 21세기에 부활한 비발디의 오페라

거의 모든 바로크 오페라가 그랬듯이 비발디의 오페라도 고전파 시대 이후에는 사실상 잊혀져 있었다. 고전파 시기 이후 바로크 오페라는 틀에 박히고 시대에 뒤떨어진 무대음악으로 치부되면서 심지어 비발디의 기악곡이 발굴된지 한참 후인 20세기 후반까지도 그의 오페라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나마 21세기 이후 바로크 오페라들이 본격 부활하면서 그의 오페라의도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아직 공연이나 레코딩이 활발한 것은 아니지만 비발디의 유명세 덕분인지 바로크 오페라 작곡가 가운데에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장필리프 라모 등과 더불어 헨델 다음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다른 바로크 오페라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비발디도 전체 오페라 레코딩이나 공연보다는 주로 오페라/오라토리오 아리아 모음집 형태의 레코딩이 활발한 편이다.

현재 관심을 많이 받고 있는 비발디의 오페라는 대략 다음과 같다.

4.4. 종교음악 및 칸타타

칸타타 "멈춰, 이제 멈춰"(Cessate omai cessate, RV 684) 2악장 "왜 늘 내 슬픔 만을 바라나"(Ah ch'infelice sempre)[81]

현대에 접어들면서 비발디의 종교음악은 그나마 오페라보다는 일찍 빛을 보았는데, 비발디가 작곡한 많은 종교음악 중에 현재 악보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약 50여곡 정도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는 30년간 피에타 여학교의 음악선생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종교음악은 거의 모두 피에타 학교의 종교행사에 사용될 목적으로 작곡되었다. 때문에 성악 파트는 모두 여성합창과 독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악 반주도 학교의 여성 합주단을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다.

비발디는 자신의 특기인 기교적인 협주곡 양식을 종교음악에서도 어김없이 구사하고 있어서 종교음악에 어울리지 않게 기악반주의 비중이 높고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비발디의 종교음악에 나오는 독창을 듣고 있으면 마치 바이올린 협주곡의 화려한 솔로 패시지가 연상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래에 언급된 모테트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의 3번째 곡 알렐루야(Alleluia)가 대표적인 예이다. 동시대의 한 평론가는 비발디가 바이올린의 목(넥, neck)과 성악가의 목(neck)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오페라 아리아야 얼마든지 그렇게 부를 수 있지만 종교음악을 그렇게 부르는건 좀 곤란하지 않냐는게 그 취지.

비발디의 종교음악 가운데 주목할만한 작품으로 RV587의 키리에(Kyrie)와 RV589의 글로리아(Gloria)와 RV591의 크레도(Credo)이다.[82][83] 원래 키리에와 글로리아, 크레도는 각각 미사 음악의 한 파트를 구성하기 때문에 이 곡들이 독립적으로 작곡된 것인지 아니면 전체 미사곡의 일부로 작곡됐는데 다른 부분이 실전된 것인지에 대해 현재까지도 논란이 있다. 당시에 미사의 한 파트만을 연주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현재는 비발디가 미사의 파트를 따로 작곡한 후 행사에서 연주할 때 이 파트를 모아서 전체 미사곡을 구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어떤 의도로 작곡되었건 이 키리에와 글로리아는 비발디의 음악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작품성과 종교적 감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명작이다.
▲ 글로리아 RV 589. 비발디의 당시 피에타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한 연주로,
연주자가 전부 여성인 것과 건물의 구조를 잘 살린 웅장한 연주가 압권.

모테트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Nulla in mundo pax sincera, RV630)는 영화 샤인의 주제곡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주제곡으로 쓰인 첫곡만 잘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전체 3곡으로 구성된 소프라노를 위한 모테트이다. 작자 미상의 라틴어 종교시에 음악을 붙인 곡이다.
모테트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비발디가 쓴 4개의 오라토리오 중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있는 <승리한 유딧>(Juditha triumphans)은 정말 특별한 작품이다. 이 곡은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오스만 제국이 벌이고 있던 전쟁에서의 베네치아의 승리를 염원하면서 작곡했다고 한다.[84] 이 화려하고 웅장한 오라토리오는 현존하는 비발디의 종교음악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는 곡으로, 독창 5부와 혼성 4부(물론 모두 여성 보컬이다)에 현악과 트럼펫, 팀파니, 오보에, 리코더, 샬뤼모, 비올라 다모레, 비올라 다 감바, 류트, 만돌린등 정말 다채로운 악기들이 사용되고 있다. 말 그대로 피에타의 여학생들이 다룰 수 있는 모든 악기를 총동원한 것으로 보인다.[85]


[1] 헨델과 같다.[2] 헨델과 같다.[3] 태어난 시간을 모르면 알수없다.[4] 라 폴리아에 대해서는 라 폴리아 변주곡 참조.[5] 이중 1~4번은 그 유명한 '사계' 이다.[6] 바이올린 협주곡집 op. 4[7] 지진 때문에 일찍 태어났다고 하나 그때 베네치아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8] 당시는 영아 사망율이 높은 시기였기 때문에 성장할 때까지 살아남은 형제가 6명이라고 볼 수 있다.[9] 원래 조반니 비발디의 본업은 이발사였고 바이올린은 취미로 연주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발에 별 흥미가 없었는지 결혼 후에 바이올리니스트로 전업했다.[10] 다만 레그렌치는 비발디가 수업을 받기 시작한지 1년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배우지는 못했다. 그의 첫 작품집 트리오소나타 Op.1에서는 레그렌치의 영향이 엿보인다.[11]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사제는 수입과 안정성이 보장된 직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자식이 많은 집안에서는 보통 아들 한 명을 수도원에 보내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다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굳이 맏아들을 사제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좀 이례적이긴 하다.[12] 비발디 당시 베네치아는 자유와 유흥이 넘쳤던 도시로 그만큼 문란한 곳이었다. 때문에 사생아들이 상당히 많이 탄생했으며 이들은 운하 주변과 성당 근처에 버려졌다. 또한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과 계속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고아들도 상당히 많았다. 비발디 시절에 베네치아 수도원은 이 사생아들을 수용하기 위한 고아원을 4개나 운영했으며 피에타 고아원이 그 중 하나였다.[13] 1739년이면 비발디가 이미 피에타 고아원을 떠난 시점이었지만 다행히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4] 다만 이때는 연주자들이 보이지 않게 커튼을 치고 연주했다.[15] 음악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작품집이다. 바흐가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용으로 개작한 비발디의 곡 가운데 6곡이 이 작품집에 속한 곡이다.[16] 비발디의 대표작인 사계는 8집에 수록되어 있다.[17] 비발디는 일종의 베네치아의 자랑거리였기 때문에 은근히 베네치아 당국에서도 이 만남을 권장했다고 한다.[18] 다만 바로크 중기 이후부터는 프랑스 양식의 오페라도 독자적인 음악성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 장바티스트 륄리의 노력 덕분이었다.[19] 어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이유가 비발디를 처음 만났을 때 안나 지로의 나이가 많게 잡아봐야 10대 중반의 소녀였기 때문.[20] 궁정악장은 작곡과 연주외에도 다른 업무가 많기 때문에 음악활동에만 전념하기 쉽지 않다. 또 비발디는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기 원했는데 만토바보다는 베네치아가 훨씬 활동하기 좋았다.[21] 다만 안나 지로가 비발디의 오페라에만 출연했던 것은 아니다. 또 1726년 이후에 작곡된 비발디의 모든 오페라에 출연했던 것도 아니다.[22] 공식적으로는 1733년경까지 선생으로 있었지만 만토바에 갔다온 1725년 이후부터는 사실상 학교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학생들을 위해 곡을 쓰는 일은 1733년까지 계속 했다.[23] 니콜라 셰드빌(1705~1782)의 본업은 작곡가가 아니라 뮈제트(풀무가 달린 백파이프의 일종) 연주자이자 제작자이다. 그래서인지 '충실한 양치기'도 뮈제트를 위한 소나타집인데 현재는 주로 플룻으로 연주한다. 당연히 충실한 양치기의 음악 수준은 비발디의 작품에 한참 못미치는데, 그래도 의외로 비발디의 스타일을 잘 모방하고 있어서 오랫동안 의심받지 않았다. 이 외에도 셰드빌은 비발디의 사계를 비롯한 여러 협주곡들을 뮈제트나 허디 거디 등을 위해 편곡하여 '즐거운 계절들(Les Saisons Amusantes)'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24] 볼라니와 벤티볼리오 후작이 분명 자신들에게도 이익이 될 공연에 왜 이렇게 비협조적이었는지, 루포 추기경이 무슨 이유로 저런 어처구니 없는 훼방을 놓았는지 등등의 이유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25] 이때 63세면 나름 장수한 거지만, 부친이 81세에 사망하고 모친이 75세에 사망한 것과 대조해 보면 상대적으로 이른 죽음이다. 특히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는 비발디가 죽기 5년 전에 죽었다.[26] 당시 9살의 어린아이였다.[27] 음악을 포함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었는데, 당시 비발디에게는 당연히 그럴 돈이 없었다.[28] 전술한 것처럼 피에타 학교는 원래 여자 고아를 위한 학교였지만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부모 손에 이끌려 찾아온 소녀들이 꽤 있었다. 안나 지로도 고아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피에타 학교에 들어왔을 것이다.[29] "Al mio amore il tuo risponda" 이 아리아는 당시에 큰 인기를 얻었으며 비발디는 자신의 다른 오페라에서 이 아리아를 자주 재활용한다.[30] 다만 생애 항목에 있듯이 이 염문설이 비발디의 몰락에 명분을 제공하긴 했다. 물론 말도 안되는 명분이었지만.[31] 두 사람은 신분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대놓고 결혼하기는 힘들었다.[32] 골도니는 원래 법률을 공부하는 법학도였으나 희곡 작가로 전직한 인물이었다.[33] 당시 유럽에서는 "베네치아 사람들은 생애의 절반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가고, 나머지 절반은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데 바치고 있다"라고까지 평하고 있다.[34] 솔직히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 비발디의 작풍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차이를 찾아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재미.[35] 비발디와 관련된 상당히 유명한 발언으로 세간에는 이 발언이 스트라빈스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정작 스트라빈스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나마 데이비드 바버(David W. Barber)가 1986년에 쓴 책 바흐, 베토벤과 소년들(Bach, Beethoven, and the Boys)이라는 책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현재는 이 발언의 출처를 데이비드 바버로 보고 있다. 왜 이 이야기가 아무 상관도 없는 스트라빈스키가 한 말로 둔갑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36] 대표적으로 RV.179 3악장 솔로와 RV.263a 1악장 솔로는 일부이긴 하지만 아예 대놓고 베꼈다고 봐도 좋을 수준이다. 심지어 RV.179 3악장의 첫 솔로 부분은 RV.180 1악장의 첫 솔로 부분과 아예 똑같다. RV.185 4악장과 RV.188 3악장, RV.447의 3악장, RV.729 서곡의 2,3악장의 도입부도 아예 대놓고 베꼈다고 봐도 된다. 또한 RV.459의 1악장과 3악장이 아예 똑같다. 1악장 3악장[37] 그나마 서도철 이용자라면 2012년 이전의 당시 환승음이었던 조화의 영감 6번 1악장 또한 익숙할 것이다.[38] 정확하게는 론도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고 당시의 다카포 아리아 양식(A-B-A)을 기악음악에 확대적용한 것이다.[39] 원래 협주곡(concerto)라는 명칭 자체가 '경쟁하다'는 뜻의 concertare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보면 나름 어원에 충실한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40] 비발디 이후에도 많은 작곡가들이 바이올린 협주곡의 느린 악장에서 독주 바이올린의 서정적인 선율이 최대한 두드러지도록 관현악에게 반주 역할을 맡기는 수법을 사용했다. 바흐도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에서 이런 수법을 활용했으며 베토벤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2악장에서도 이런 수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41] 실제로 이 짧은 아다지오 패시지를 2악장으로 보기도 한다.[42] RV130은 소나타다.[43] 바로크 시대에서 음의 강약은 포르테랑 피아노 정도 이상은 잘 사용하지 않았고 특히 당시의 건반 악기들은 음량을 조절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는데, 이런 시기에 이와 같은 세밀한 셈여림을 구사했다는 것은 그의 음악적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말해준다.[44] 보통 여기서 협주 주제가 좀 더 심층적으로 전개되곤 한다.[45] 대표적인 사례가 RV.363의 3악장. 전체적으로 |♩ ♪♪♪♪| 리듬이 굉장히 강조되는 걸 알 수 있다.[46] 지휘자는 스피노시(J.C.Spinosi)라는 인물인데, 바이올린을 켜는 게 아니라 거의 두들겨대고, 연주중에 추임새를 넣는 것도 모자라서 무슨 작두무당처럼 펄쩍펄쩍 뛰기도 한다.[47] 이건 비발디 작품은 아니고 텔레만 작품이지만, 전체적으로 이 양반들이 어떤 식으로 연주하는지 감이 잡히는 영상이다. 이런 자극적인 연주 탓에 매우 호불호가 갈린다.[48] 대표적인 사례가 RV.359 (Op.9 No.7) 2악장, RV.347 (Op.10 No.6) 2악장 등등.[49] 전술했다시피 비발디는 1729년 12번째 작품집을 끝으로 더이상 작품집을 출판하지 않았으며 이후에 작곡된 기악곡들은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부자나 유력자들에게 비싼 돈을 받고 필사본으로 팔았다.[50] 37개, RV 466-504 (RV 468와 482는 미완성)[51] RV 392-397[52] RV 426-440 (RV 432는 미완성)[53] 위에 서술했듯이 RV 459의 1악장과 3악장은 완전히 같다.[54] 이 외에 오르간-바이올린 협주곡은 RV774,775 의 미완성 작품이 있다. 한편 RV 542는 비발디의 작품이 맞는지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55] 거의 유일한 건반악기 협주곡인 RV.780도 애초에 비발디가 작곡한 곡이 아니다. 후대의 오해로 인해 RV.546의 편곡 버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바이올린첼로를 위한 RV.546과는 달리 RV.780은 건반 독주를 위한 내용이라고 심하게 말해서 초등학교 근처의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꼬마들도 약간만 연습하면 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56] RV.253과 같은 부제이지만 전혀 다른 곡이며 둘 다 똑같이 유명하다.[57] RV.98, RV.570과 규모만 다른 같은 곡이다.[58] 5악장은 가을 2악장을 재탕(?)한 것.[59] RV.501과는 다른 곡이다. 또한 RV.104와 같은 곡이다.[60] RV.90과 같은 곡이다.[61] RV.431과 살짝 다른 곡이다.[62] RV.102과 같은 곡이다.[63] RV.439과는 다른 곡이다.[64] RV.98, RV.433과 규모만 다른 같은 곡이다.[65] 둘다 같은 곡이다.[66] 이 곡 4악장은 RV.123의 3악장과 동일하다.[67] 최근까지도 비발디의 알려지지 않았던 오페라가 계속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이 숫자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68] 안나 지로의 가수 데뷔작인 '불행한 행운의 님프'가 이런 경우이다. 현재 악보가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것은 알기 어렵지만 공연기록을 보면 주세페 보니벤티의 원작을 비발디가 수정 보완해서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69] 물론 헨델처럼 악보에 세세한 부분까지 철저하게 지정해서 가수들이 멋대로 부르지 못하도록 한 작곡가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였고 비발디의 경우 오히려 이런 애드립을 권장하는 작곡가였다.[70] 비발디의 첫 오페라 작품이다.[71] 만토바에서 5일만에 작곡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듬해에 로마에서 같은 제목의 오페라가 상연되었는데 이름만 같고 전혀 다른 오페라이며 순수 비발디의 창작이 아니라 파스티초다.[72] 1734년 버전의 일부 아리아는 요한 아돌프 하세, 제미니아노 자코멜리, 레오나르도 레오, 도메니코 사로의 작품[73] 전술한 것처럼 비발디와 안나 지로를 맺어준(?) 작품이다.[74] 1714년에도 같은 대본, 같은 제목으로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음악은 다르다. 1714년 버전은 악보가 상당부분 소실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75] 비발디 오페라 중에 당대에 가장 인기있었던 작품 중 하나이다. 1737년 비발디가 페라라 공연을 추진했다가 결국 무산되었을 때 상연하려고 했던 오페라가 바로 이 파르나체이다.[76] 당대 최고의 대본작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첫 작품이다. 인기 작가의 대본답게 비발디 외에도 상당히 많은 작곡가들 (대표적으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요한 아돌프 하세)이 이 대본에 곡을 붙였다. 이 오페라 외에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비발디의 오페라들, 예를 들어 올림피아데와 우티카의 카토 등도 마찬가지로 다른 많은 작곡가들이 곡을 붙였다.[77] 같은 제목의 오페라 RV. Anh 137도 있는데, 조반니 바티스타 페세티, 요한 아돌프 하세, 니콜라 포르포라, 레오나르도 빈치와 알수 없는 작곡가랑 합작한 파스티초다.[78] 아즈텍 제국의 왕이었던 '그' 몬테수마를 소재로 한 작품은 맞는데 스토리는 실제 역사와 거리가 멀다.[79]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요한 아돌프 하세, 리카르도 브로스키, 제미니아노 자코멜리의 아리아가 들어간 파스티초.[80]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레오나르도 빈치, 요한 아돌프 하세,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 심지어는 1738년 기준 21살의 새내기 안토니오 마리아 마초니등 여러 작곡가들의 아리아가 들어간 파스티초.[81]친절한 금자씨 메인 테마곡』으로 널리 알려진 칸타타다. 제시된 영상에서는 모두 카운터테너가 불렀다. 왼쪽의 두 영상의 연주는 통주저음을 푸지게 차렸는데 맨 왼쪽 영상은 첼로 두 대, 비올로네 한 대, 비올라 다 감바 한 대, 테오르보 한 대, 하프시코드 한 대, 오르간 한 대로 무려 일곱 대나 통주저음을 맡았고 그 다음 영상도 첼로 두 대, 비올로네 한 대, 테오르보 한 대, 하프시코드 한 대로 다섯 대가 통주저음을 맡아서 아니 적다.[82] 글로리아로 RV588 한 곡이 더 있는데 589만큼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 한편 악보가 실전된 글로리아 한곡이 더 있는데 RV590의 작품번호만 부여받았다.[83] 크레도 RV592는 요한 아돌프 하세의 작품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84] 유딧의 스토리가 이런 승리의 염원과 딱 맞아 떨어진다. 유딧 항목 참조.[85] 다만 이처럼 다양한 악기 연주자를 모으기 쉽지 않은 탓에 현재까지도 자주 연주되지는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