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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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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 추존 군주
손책 | 孫策
파일:attachment/e4dde71190ef76c6671105509d16fdfaae51678e.jpg
출생 175년
후한 양주 오군 부춘현
(現 저장성 항저우시 푸양구)
사망 200년 5월 5일 (향년 25세)
후한 양주 오군 단도현
(現 저장성 전장시 단투구)
능묘 미상
재위기간 후한의 오후(吳侯)
198년 ~ 200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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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8B0000><colcolor=#ece5b6> 본관 부춘 손씨
책(策)
부모 부황 시조
모후 무열황후
형제자매 5남 3녀 중 장남
자녀 1남 3녀
백부(伯符)
작호 오후(吳侯)[1]
시호 장사환왕(長沙桓王)
}}}}}}}}}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원술 휘하에서2.3. 유요를 격파하다2.4. 왕랑을 격파하다2.5. 엄백호를 격파하다2.6. 원술로부터 독립2.7. 유훈을 격파하다2.8. 조조와의 관계2.9. 고대를 죽이다2.10. 허공을 죽이다2.11. 피습을 당하다2.12. 우길을 죽이다2.13. 죽음2.14. 사후
3. 평가4. 가족 관계5. 기타6. 미디어 믹스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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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이며 는 백부(伯符)로 손견무열황후 오씨의 장남, 손권의 형이다.

손씨 군벌의 2대 지도자이지만 손견은 죽을 무렵까지도 원술의 휘하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 세력을 이끈 손씨로는 초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손견은 자신의 일가족을 수춘에 머물게 하였고 따라서 그는 수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10살부터 교우 관계를 맺어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손책과 동갑인 주유 또한 영리했고 손책의 소문을 듣고 서현(舒縣)에서 찾아와서 손책과 매우 깊은 관계가 되었다. 주유가 손책에게 자신이 사는 서현으로 이주해 살 것을 권하자 손책이 이 말을 따라 모친 무열황후 오씨를 데리고 서현으로 옮겨가서 살면서, 주유 등 여러 사대부들과 친교를 쌓는다.

191년 아버지 손견이 유표를 치기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는데 그때 나이가 고작16살이었다. 손견이 난전 속에 전사하자, 아비의 시신을 수습해 돌아와 곡아(曲阿)에 장사지냈다. 위서에 따르면 손책은 아버지의 오정후(烏程侯) 자리를 이어야 했으나, 동생 손광에게 양보해주었다. 장례가 끝난 후 장강의 북쪽 강도(江都)로 이사갔으나 서주목 도겸이 손책을 싫어했으므로 떠나게 되었다. 오력에 따르면 손책이 강도에 있을 때 장굉은 모친상을 지내고 있었는데 손책이 눈물까지 흘려가며 장굉을 등용하고 어머니 무열황후와 동생들을 장굉에게 맡긴다.

손책은 모친 무열황후를 곡아로 옮겨놓고 여범, 손하와 같이 외숙부인 단양태수 오경에게 가면서 이를 기회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수백 명을 얻는다.

2.2. 원술 휘하에서

194년, 거의 모든 손견 휘하의 장수들이 그러한 것처럼 손책은 원술 밑으로 들어가 벼슬살이를 한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지름길로 가서 수춘에 가서 원술과 만나 눈물을 흘리며 부친 손견과 원술 간의 옛 인연을 언급하며 등용해달라고 한다. 원술이 그가 매우 뛰어나다 여겨 손견의 옛 부곡들을 손책에게 돌려주었다.

원술손견을 대등한 위치에서 서술한 《삼국지연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원술은 손견에게 유표를 치도록 부탁해 유표에게 죽게 했는데 손책이 아버지의 원수 같은 원술 밑으로 들어가다니 불효막심하다고 여길 수 있으나 정사에서는 손견은 원술의 수하의 위치였다. 원술은 그런 손책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손랑(孫郞, 손책의 별명)과 같은 아들이 있으면 두려울 게 없겠다'고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제한적인 관직에 임명하고 전선에 내보내는 등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썼다.

《강표전》에 따르면 원술이 손책을 귀하게 여기긴 했지만 아직 그의 부친 손견의 병사를 돌려주려 하지는 않았다. 원술이 손책에게 손책의 친척인 오경손분을 각각 단양태수와 도위로 삼았으니 그 땅에서 병사를 모아보라고 한다. 손책이 단양으로 가서 외숙에게 의지해 수백 명을 얻었는데 경현(涇縣)의 대도적 수령 조랑에게 기습당했고 정보와 그 휘하 기병 1기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는다. 그러나 병사를 모두 잃었고 이에 다시 원술에게 가니 원술이 손견의 잔여 병력 1천여 명을 손책에게 돌려주었다.

마일제가 수춘에 있을 때 손책을 천거하면서 표를 올려 회의 교위로 임명하도록 하자 손책은 원술 휘하의 장수인 교유, 장훈 등의 공경을 받는다. 원술은 "이 원술에게 손랑 같은 자식이 있다면, 죽어서도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어느날, 손책의 기병 병사가 죄를 짓고는 원술의 진영으로 도망쳐 들어가 안쪽 마구간에 숨었는데 손책이 사람을 시켜 가서 참수하게 하였다. 일이 끝난 후 원술에게 가서 사과하자 원술은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좋아하는데, 응당 같이 그런 자를 미워해야지, 어찌해서 사과까지 하오?"라고 말했고 이후 군중의 사람들이 손책을 더 두려워했다.

손책은 이전에 원술로부터 구강태수의 지위가 약속되어 있었으나 원술은 나중에 바꾸어 단양진기를 등용하여 삼았다.

원술은 유비와의 싸움에 앞서 여강태수 육강(육손의 숙조부)에게 군량을 청했으나 그가 이를 거부하자 분노한다. 손책이 예전에 육강에게 갔을 때 육강이 직접 만나주지 않고 주부(主簿)를 시켜 접대하게 해서 손책이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으니 원술은 손책을 보내 육강을 공격하게 하였고 그에게 여강태수직을 약속한다. 손책은 2년의 여강 공성 끝에 육강을 격파하나 원술은 약속과는 달리 유훈을 임명한다.

당연하지만 이렇게 두 번이나 약속된 태수직을 받지 못하자 이에 실망하고 원한을 품어 빡친 손책은 원술로부터 독립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2.3. 유요를 격파하다

194년, 양주자사 유요단양에서 오경손분을 쫓아내며 원술과 전쟁을 시작한다. 유요는 번능우미를 횡강진에 주둔하게 하고, 장영은 당리구에 주둔시켜 원술에 맞서도록 했다. 원술은 혜구양주자사로 삼고, 오경을 독군중랑장으로 삼아 손분과 함께 병사를 거느리고 장영 등을 치게 했으나, 1년이 넘게 이기지 못했고 이에 손책이 원술에게 참전을 요청했다.[2] 《강표전》에 따르면 원술은 그가 태수직을 안 줘서 손책이 품은 원한을 기억했지만, 유요가 곡아를 점거하고 있고, 회계에 왕랑이 있어서, 손책이 쉽게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 이를 허락했다. 단양태수 오경을 도우러 양주 방향으로 진출한 손책은 그야말로 양민 학살이 뭔지 확실히 보여주게 된다.

원술이 표를 올려 손책은 절충 교위와 행(行) 진구 장군 임명되어 출병한다. 처음 병사는 천여 명에 기병 수십 필이었으나 따르기 원하는 자가 수백 명이라 역양(歷陽)에 도착할 즈음에는 5~6천명을 얻었다. 손책은 역양에서 병사를 인솔하여 온 주유와 합류했고 손책의 모친 무열황후가 먼저 곡아에서 역양으로 이사와 있었으니, 손책이 다시 무열황후를 부릉(阜陵)으로 옮긴다. 손책군은 장강을 건너 단양군을 치는데 손책은 군사적인 재능이 있어 유요군을 격파한다.

<태사자전>에 따르면 태사자와의 처절한 일기토는 정사에도 기록으로 남아서 그가 싸움꾼으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3] 이 싸움은 양측의 군사들이 몰려나오는 바람에 무승부가 되었다.

《강표전》에 따르면 이듬해인 195년, 손책이 유요의 우저산에 있는 진영을 공격하여, 창고의 양곡과 군수품을 모두 얻었다. 말릉성(훗날 건업)을 지키던 팽성상 설례와 하비상 착융[4]은 유요를 맹주로 삼고 있었는데 손책이 착융을 선공격하여 5백 여명을 죽이니 착융은 성문을 닫고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선 손책은 장강을 건너 설례를 공격하자, 설례는 갑자기 달아나서는 번능, 우미 등과 함께 우저의 진영을 습격해 탈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손책이 돌아가 번능 등을 공격하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았다.[5] 다시 내려와 착융을 공격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서 허벅지에 상처를 입어서 말에 탈 수 없게 되자, 직접 수레를 몰고 우저영으로 돌아갔다.

어떤 배신자가 착융에게 "손랑이 화살에 맞아 이미 죽었다."고 알리자 기뻐한 착융이 장수 우자(于慈)를 보내어 손책을 향해 가게 했다. 그러나 손책은 우자를 도발하여 배후에 매복시킨 복병으로 격파하여 1천 여명을 베었다. 이후 손책이 착융의 진영 아래로 가서 주변인들에게 "손랑이 마침내 어찌되었다고 하더냐!"고 외치게 하자 놀란 적의 병사들은 두려워 밤중에 달아났다. 착융은 손책이 아직 살아있음을 듣고는 다시 도랑을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면서 수선하며 우주방어 모드로 들어가 그가 있는 곳은 지키는 데 성공하지만 그 틈에 손책은 유요의 본군을 공격한다. 손책군은 별장(別將)을 공격해 격파하고, 돌아서 호숙(湖孰)과 강승(江乘)을 공격해 모두 항복시켰다.

손책은 용모가 빼어나고 사교성이 좋아서 민심을 얻었고 유요가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자, 여러 군의 태수들도 모두 성곽을 부수고 달아났다. 유요가 예장으로 도망칠 때 태사자는 저항하나 결국 손책에게 사로잡혀 투항한다.

《강표전》에 따르면 백성들은 모두 손책을 손랑(孫郞)이라 불렀고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는다. 손책은 장수 진보(陳寶)를 보내 부릉으로 가서 모친 무열황후와 동생들을 데려오게 하고 은혜를 베푸는 영을 내리자 사람들이 모여 병사 2만여 명과 말 1천 필을 얻었다.

사실 유요는 원래 조정이 공식 임명한 관리였으나, 조조예주의 패권을 두고 싸우다 패배한 원술이 주도인 수춘을 점령하고 회남에 일대 세력을 구축하자 그걸 두려워해 곡아를 임시 주도로 삼고 손분, 오경을 쫓아내는 등 나름대로 주권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 때 유요의 장수인 번능, 장영, 우미 등이 원술을 막았는데, 원술군은 이들을 1년이 지나도록 격파하지 못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힘이 좀 빠졌을 즈음 손책이 들이친 상황이었다. 즉, 손책의 첫 스타트는 1년 동안 원술군 상대하느라 진이 빠진 양주군을 학살하면서 시작되었던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당시 손책군보다 유요의 군대 훨씬 대규모였으며 원술군과의 1년여의 대치로 훈련된 군사라고 봐야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2.4. 왕랑을 격파하다

손책은 주유에게는 단양의 수비를, 주치에게는 오군의 평정을 맡기고 자신은 회계로 진군한다. 오경엄백호를 먼저 칠 것을 진언하였는데, 손책은 엄백호를 도적 무리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왕랑을 먼저 공격하였다.

<왕랑전>에 따르면 왕랑은 항복하라는 우번의 조언을 듣지 않고 손책과 싸웠는데 손책이 손정의 계책에 따라 사독을 습격하여 왕랑은 주흔과 함께 손책을 막았지만 패배하여 바다에서 표류하게 된다. 표류하다 동야(東冶)에 닿았는데 손책은 또 동야까지 추격하여 왕랑의 군사를 대파시킨다. 손책은 왕랑이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문책만 했을 뿐 죽이지는 않았다.[6]

《오록》에 따르면 이때 왕성(王晟) 등이 최대 만여 명에 달하는 무리를 모으고 있어서 손책이 병사를 이끌고 쳐서 토벌했다. 모친 무열황후가 손책에게 왕성은 아버지 손견과 친분이 있었고 왕성의 형제와 자식은 다 죽었으니 나머지는 죽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손책은 듣지 않고 나머지 일족들도 모두 죽였다.

2.5. 엄백호를 격파하다

오군태수 허공은 이미 주치에게 격파되어 호족 엄백호에게 몸을 의탁한 뒤였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엄백호를 공격하자 엄백호는 엄여사자로 보내 화의를 청했는데, 엄여가 들어오자마자 손책이 책상을 칼로 부수면서 겁을 주니 엄여는 이에 위축되었다. 이를 본 손책은 엄여가 그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상대라 판단해 그대로 창을 던지자 엄여는 그것을 맞고 선 채로 죽었다.

손책이 엄백호는 단순한 도적의 무리라며 절강을 건너 회계를 근거로 삼아 진군하여 동야를 도륙내고 엄백호를 격파하자 엄백호는 허소에게로 달아난다. 정보가 달아난 엄백호를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손책이 말하길 "허소는 옛 주군에게 의를 지켰고, 옛 벗들에겐 진실함이 있으니, 이는 장부의 뜻이오."라면서 허소의 의로움을 감안해서 치지 않았다.

그 뒤 자신은 회계태수가 되고 주치오군태수, 오경단양태수로 삼고, 장소, 장굉, 진송, 진단 등을 모주(謀主)로 삼았다.

2.6. 원술로부터 독립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이 봉정도위 유유(劉由)와 오관연 고승(高承)에게 하여금 허도로 가서 천자에게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했다.

손책은 이후 원술과 대립하였고, 원술이 임명한 단양태수 원윤서곤으로 파견해 쫓아냈다. 그 뒤 원술이 칭제하게 되자 손책은 그를 꾸짖는 서한을 보내고[7] 관계를 끊는다. 그 서한은 《오록》에 따르면 손책이 장굉에게 짓게 했다고 하는데 《전략》에 따르면 장소의 글이라 한다.[8]

197년, 조조에게 옹립되어 있던 헌제로부터 손책에게 작위를 내리고 원술을 공격하라는 조서가 내려온다. 《강표전》에 따르면 처음엔 관직으로 기도위를 받고 아버지의 작위인 오정후 승계를 공식으로 추인받는데, 손책은 장군직을 원했으며 오정후 작위는 손광에게 이미 양보했던 터라 조정에서 온 사신 왕포(王誧)에게 아부를 하니 왕포가 손책을 임시로 명한 장군으로 임명했다.

헌제의 조서에 따라서 손책은 조조, 여포, 진우(진등의 친척)와 함께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한다. 그러나 수적으로는 불리했으므로 장소의 진언에 따라 조조의 원병(구원군) 포지션을 맡아서 주된 싸움은 조조에게 떠넘긴다.

도중 진우가 몰래 손책을 치려고 조랑, 엄백호[9] 등에게 내부에서 호응하게 하고 손책이 원술과 싸우는 그 순간 공격하기로 한다. 이를 알아챈 손책이 여범, 서일(徐逸)을 파견해 진우를 대파시킨다.[10]

198년, 손책이 또 천자에게 이전에 올린 것의 배가 되게 방물을 바치니 헌제는 조서를 내려 손책을 토역장군[11]에 임명하고 오후로 고쳐 봉했다.

2.7. 유훈을 격파하다

199년, 원술이 죽고 원술의 일가족인 원윤, 원요, 원부인 등은 원술의 관을 매고 유훈에게 간다. 또한 양홍, 장훈 등 원술 휘하 장수들이 원술의 병사를 거느리고 손책에게 가려고 했는데 여강태수 유훈이 도중에서 습격하여 모두 사로잡는다.[12] 더불어 유엽까지 정보(鄭寶)[13]를 죽이고 그 세력을 이끌고 유훈에게 의탁하러 오자 유훈의 세력이 커져서 군량이 부족해졌다.

유훈은 사촌동생 유해(劉偕)를 보내 예장태수 화흠에게 군량을 요청하였다. 화흠도 군량이 적어 유해에게 해혼(海昏)과 상료(上繚)로 가서 거기의 여러 일족의 우두머리들에게 곡식을 얻으라고 했다.

유훈이 큰 세력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은 손책은 유훈과 거짓으로 동맹을 맺고 뇌물을 주어 유훈에게 상료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유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훈은 이를 취하기 위해 해혼과 상료로 갔지만 일족의 우두머리들이 군량을 들고 도주해서 유훈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손책과 주유는 이 틈을 타서 유훈의 본거지인 환성을 빈집털이했고 원술의 일가족을 사로 잡는다. 그리고 그 곳의 미녀 자매 이교를 취한다. 또한 여남태수였던 이술여강태수로 등용하여 환성을 지키게 한다.

손책이 보낸 손분손보는 성 밖에 나가 있는 유훈을 격파한다. 본거지 환성이 털렸다는 것을 들은 유훈은 황조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황조의 구원군으로 보낸 큰아들 황역도 손책과 주유에게 털려서 유훈과 유해는 조조에게 귀부했다.

유훈의 세력을 얻은 손책군은 이 기세로 하구의 황조를 공격한다. 유표가 황조에게 조카 유호남양한희를 원군으로 보냈으나 손책군은 황조를 격파하고 유호와 한희도 죽는다.

유훈과 황조를 격파하고 돌아오던 중 예장태수 화흠을 종속시키고 손분예장태수로 삼는다. 단양 사람 동지가 예장군의 한 지방을 나눠 여릉군(盧陵郡)을 만들어 스스로를 여릉태수라 칭했는데, 손분과 손보가 평정했고 손보여릉태수가 되었다.

2.8. 조조와의 관계

손책이 강남을 평정하고 배후를 위협할 조짐을 보이자 조조는 그를 신경쓰게 되었고 오력에 따르면 조조는 "미친 개 같은 아이와 예봉을 다투기 어렵도다."라고 탄식했다.[14]

조조는 동생의 딸을 손광에게 시집보내고, 자신의 아들 조창손분의 딸을 혼인시켰다.[15] 또한 손책의 동생인 손권손익을 천거하고, 또한 양주자사 엄상에게 명하여 손권을 무재로 천거하게 했다. 이렇게 조조는 손책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손책이 오히려 대장군 자리의 직책을 요구하자 관계가 완전히 어긋나 버린다.

2.9. 고대를 죽이다

오록에 따르면 손책이 고대좌전을 잘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를 시켜 고대를 데려오게 해 좌전에 대해 강론을 받고자 했다.

이때 한 부하가 "고대는 손책님이 단지 무력만 있는 우장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 말이 맞다면 그는 좌전을 논할 때 손책님을 상대하기 싫어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또 고대에게는 "손책님은 지는 것을 싫어해 만약 모든 손책님의 의문에 대답을 한다면 손책님은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끔씩 모른다고 대답해 그의 뜻을 어느 정도 맞추어 주십시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대님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라고 했다.

고대는 과연 그 부하의 말이 옳다고 여겨 좌전을 손책과 논할 때 몇 번씩 대답에 모른다를 섞어 대답해 주니 손책은 분노했고 "이 녀석이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라며 그를 투옥한다.

그가 투옥되자 고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땅바닥에 엎드려서 그를 풀어줄 것을 청했다. 문제는 손책이 누각에 올랐더니 수 리가 엎드린 사람들로 가득 차있던 것. 이에 손책은 고대가 민심을 잡고 있는 것에 화가 나 그를 죽인다.

요약하면 누군가가 고대는 명망이 있는 학자로 손책을 업신여기며 모든 질문에 모른다고만 대답할 것이라 한 뒤에 고대를 찾아가서는 손책은 자기가 학식에 뒤지는 걸 꺼리므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모른다는 대답도 해주라고 얘기하고 고대도 나름대로 손책을 배려한다고 그렇게 했다. 그런데 손책은 고대의 해명은 들을 생각도 않고 옥에 가뒀으며, 백성들이 고대를 풀어달라고 간청하자 자기보다 인기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처형했다는 얘기. 고대를 옥에 가둔 건 부하의 이간질 때문이었지만 결국 고대를 죽인 건 그 부하의 말대로 손책의 강한 자존심 때문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 열등감과 시기심 많고 잔인한 성격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며, 이 일화의 일부를 각색한 게 야사인 도사 우길 이야기로 보인다.

2.10. 허공을 죽이다

200년, 조조원소관도에서 대치하자 손책은 허도를 급습할 계획을 꾸민다. 이때 손책의 척후 관리가 허공헌제에게 보낸 밀서를 얻어 손책에게 보여줬는데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손책은 용맹한 자로 항우와 비슷한 부류이니 마땅히 총애를 더하여 경읍(허도)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서를 받들면 들어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나, 외방에 놔둔다면 반드시 세상을 어지럽히게 될 것입니다.

손책은 당장 허공을 불러 심문했다. 허공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손책은 바로 그를 죽이게 했다.

2.11. 피습을 당하다

이후 손책은 허도를 급습할 계획에 따라 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는데, 광릉태수 진등과의 접전이 먼저 이루어졌다. 진등은 예전에 손책이 격파한 진우의 조카로, 손책에게 당한 것을 복수하고자 했다. 손책은 진등과 대치하면서 단도에 머물며 군량 수송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피습을 당하게 되었다. 손책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의 이름은 허소(許昭)로, 그가 허공의 빈객인지, 진등이 보낸 엄백호의 잔당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뉜다.

건강실록》에 따르면 진등이 엄백호 잔당을 활용해 손책을 잡으려고 하였으며, 손책이 이를 파악하고 진등을 토벌하려고 움직였다. 이때 진등이 보낸 엄백호 잔당 허소가 손책의 얼굴을 피습한다. 이에 따르면 진등의 계책이 성공한 것이고, 진등은 조조군 소속이라 손책 암살의 배후는 조조가 되게 된다. 배송지는 군을 대치하던 중 사냥에서 손책이 암살당했다고 평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책은 평소에 사냥을 좋아해서 수차례 사냥을 나갔는데 허공식객들이 이때를 노려 허공의 복수를 하려고 했다 한다. 손책은 사냥을 하러 나갔다가 그 군졸로 있었던 허공의 식객 3명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손책이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저희들은 한당 장군의 병사들인데, 사슴을 잡느라 여기 있는 것입니다."라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손책은 "개소리 집어쳐라! 그의 병사들이라면 내가 이름과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지만, 너희같은 X끼들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라고 화를 폭발시켰고, 이에 식객들도 정체와 본색을 드러내며 도발하고 공격하자 전투 끝에 한 사람을 로 쏘아 죽였다. 겁에 질린 나머지 둘은 손책의 뺨과 몸에 화살을 적중시키거나 칼과 창으로 찌르는 등 손책에게 제대로 치명상을 입혀서 손책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다행히 잠시 후에 (손책의) 기병들이 도착하여[16] 남은 두 식객들도 마저 다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7]. 그렇게 손책은 어렵사리 목숨을 건졌으나, 하도 상처가 심해서 곧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당히 위급한 상태였다[18].

2.12. 우길을 죽이다

《강표전》에 따르면 사람들이 도사 우길이 탁문(度門) 아래로 오자 대부분의 여러 장수와 빈객들이 누각을 내려가 우길에게 절했다 한다[19]. 빈객을 담당하는 자가 하지 말라고 했으나, 사람들은 도통 듣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도사 우길을 흠모하여 따르는 것에 화가 난 손책은 그를 잡아 들였다. 우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부녀자들을 시켜 손책의 모친 무열황후에게 우길을 구해주라고 청하게 했다. 무열황후와 여러 장수들은 손책에게 제발 우길을 살려 달라고 말렸으나, 손책은 듣지 않고 기어이 우길을 죽여버렸다. 우길을 섬기던 여러 사람들은 아직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시체만 남겨두고 혼백은 빠져 나가 신선이 된다고 말하면서 제사를 하면서 복을 구했다.

수신기》에 따르면 손책이 허도를 습격하고자 하는 군행의 도중에 장수와 관리들이 우길 부근에 많이 있는 것을 보고는 질투가 난 손책은 우길을 당장 잡아 들일 것을 명했다. 그리고는 지금 마침 날씨가 가물었으니 비만 내리게 하면 사면하겠고 그러지 못하면 당장 죽이겠다고 했다. 정말로 대낮에 큰 비가 한꺼번에 내리자 장수와 병사들은 기뻐하며 우길에게 가서 경축하고 위로했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민심이 본인보다 우길에게 향한 것에 질투로 분노한 손책은 끝내 우길을 죽여버렸다[20]. 장수와 관리들은 슬퍼하며 함께 그의 시체를 묻었다. 밤이 되자, 홀연히 다시 구름이 일어 우길의 무덤을 덮었는데, 다음날 아침 가서 보니 그 시체가 사라져 있었다.

수신기》에 따르면 우길을 죽인 뒤 손책은 우길의 환영만 봤다 하면 피폐해져갔다고 한다[21]. 이후에 상처의 회복에 약간의 차도가 있자 거울을 봤는데, 충격적이게도 거울 속에 우길이 있었다. 돌아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거울 속에는 우길이 있으니 손책은 거울을 깨트리고 크게 소리쳤고, 상처가 모두 터져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삼국지연의》에는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나, 손책이 우길을 죽일 때 연의의 묘사가 실존인물인 유학자 고대를 처형한 사실에서 상당 부분 차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간 최후에 대한 연의의 괴이한 묘사 때문에 손책의 이미지가 실추됐다고 여겨졌지만 실상 꼭 그렇지만도 않은 셈. 차라리 연의에서 우길을 죽인 건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도사를 일벌백계한다'는 최소한의 명분이라도 갖추고 있었지만[22] 실제 역사상에서 고대를 죽인 건 완전 억지로, 전적으로 학식에 대한 콤플렉스와 민심을 잡고 있는 고대에 대한 질투에서 기인했다. 이 때문에 손책은 본인보다 잘난 인재를 허용하지 않은 폭군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부하들과 백성들에게 심어주었고, 부하들이 감히 그에게 간언을 하지 못하여 손책이 전혀 컨트롤 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극적으로 허공의 식객들에게 보복당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된다.

흔히 손책과 손권 형제를 비교하는 논의에서 목표가 천하통일인지 할거인지 불분명한 손권보다 대국적 안목을 갖추고 확실한 비전을 내세웠던 손책을 리더십 측면에서 더 높게 평가하는 시각이 많지만, 고대와의 일화를 통해 보이는 모습을 보면 마냥 고평가하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당대의 일류 브레인이기에 나름의 인적 네트워크를 가동해 꾸준히 정보를 수집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손책과 일면식도 없는 적 세력의 책사 곽가의 입에서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자멸할 것"이라는 혹평[23]이 나올 정도이니 잔혹한 성정을 짐작케 한다.

2.13. 죽음

《오력》에 따르면 손책이 상처를 입었을 때,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 의원[24]이 백일 동안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손책이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더니 "내 얼굴이 이와 같은데, 아직도 다시 공을 세우고 대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며 책상을 치고 화를 내니 상처가 모두 파열되어 더는 가망이 없어졌고, 결국 그날 밤에 죽었다.

손책은 상처가 심하자, 장소[25] 등에게 손권을 잘 살펴 달라고 청했고, 아우 손권을 후계자로 정해 뒷 일들을 모두 맡긴 뒤, 밤에 한창 때의 나이인 25세로 생을 마감했다.

2.14. 사후

후에 손권이 황제를 칭하면서 손책을 장사환왕으로 추존했다. 아버지 손견처럼 황제가 아니라 왕으로 추존한 이유는 차남장남을 제쳤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정통성 문제 때문이었다. 훗날 진수는 "네가 네 형 아니었으면 그 위치에 있었겠냐!"라면서 대접이 박하다고 대차게 깠다.[26][27]

송서 예지에 따르면 손권이 건업에 형(손책)의 장사환왕부를 주작교 남쪽에 세웠다. 손권이 병에 걸리자, 태자가 소도(所禱, 병이 낫기를 기도함)하였는데, 바로 손책의 사당이다.

손책의 아들 손소(孫紹)는 손권이 황제가 된 뒤 처음에 아버지처럼 오후(吳侯)에 봉해졌다가 이후 상우후(上虞侯)로 바뀌었다. 오후라고 하면 국명인 '오'와 겹치기 때문에 바꾼 듯하다. 아무리 정통성 때문이라도 조카를 왕작도 아니고 겨우 후작에 봉한 것은 푸대접이라고 손권이 까이게 되었다. 손소의 아들 손봉(孫奉)은 상우후를 세습했으나, 손호 때 제위에 오를 거라는 뜬소문 때문에 주살당하고 만다.

3. 평가

손견은 용감하고 강인하며, 가난하고 비천한 지위에서 집안을 일으켰다. 그는 동탁을 죽이라고 장온에게 간하였고, 동탁이 파헤친 제왕의 능묘를 덮어 가지런하게 했으며, 충성스럽고 장렬한 절개를 지니고 있었다. 손책은 기개가 호방하고 실행력이 뛰어났으며, 용맹함과 예리함은 세상을 덮었고, 비범한 인물을 살펴 취했으며, 뜻은 중국을 통일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경솔하고 함부로 결정을 내려 몸을 잃고 실패하는 데 이르렀다.
진수의 평가

손책은 전투에서 패배한 일이 없었고 짧은 시간안에 강동을 제패하였다. 그래서 패왕(覇王) 항우에 걸맞은 용맹을 지녔다 하여 소패왕(小覇王)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인중여포니, 만인지적이니 하는 다른 칭호와 달리 손책이 소패왕으로 불린 것은 근거지가 항우와 마찬가지로 강동 일대라는 점이 크다. 항우 또한 강동에서 거병하여 천하를 제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패왕의 칭호가 칭찬이 아니라 저놈도 언젠가 항우처럼 일찍 비명횡사할 거라고 붙여준 멸칭이라는 설도 존재한다.[28] 확실히 항우의 생애를 보면 마냥 칭찬이라고 보긴 힘든 부분이다.

동오 패권주의를 펼치며 강동을 정벌하고 기틀을 다지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른 죽음으로 강동의 호족들을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했고 이 점은 후대에 길이길이 이어져서 손가의 발목을 잡게 된다.

우선 눈여겨 볼 것은 손책의 자수성가적인 업적과 리더십 덕목이다. 손견이 전사하고 기반이 상대적으로 부실한 상태에서 원술 휘하에서 나름대로의 독자 세력을 구축하고 원술에게 독립한 점은 그가 그래도 난세에서 살아남을 자질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손책의 패권가, 전략가적 자질과 리더로서의 대국적인 안목 역시 훌륭하다. 그는 강동 통합의 기치를 내걸고 강동의 한 군소 호족에 불과한 손씨의 깃발 아래 내로라하는 호족과 무장들을 뭉치게 했고, 진작부터 서주허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 손오의 한계를 파악하고 빠른 중앙 집권화를 위해 외정을 통한 친위 세력 육성과 호족들의 세력 약화를 기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제안한 허창 기습 작전은 협천자(挾天子)의 이점과 한 황실이 가진 권위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실의 권위를 헤아리고 이용하려는 생각이라도 했던 사람도 당대에 몇 되지 않으며, 이중 창업에 성공한 사람은 헌제를 이용한 조조와 자신의 황실 혈통을 이용해 스스로 황제를 참칭한 유비 정도니 과연 삼국의 하나를 이룰 수 있을 만 하다. 《건강실록》에 따르면 손책도 천하삼분지계를 생각했다고 나오는데(策雖外見受官,內懷三分之計。) 그냥 그랬다는 말 밖에 없고, 상세한 계획의 내용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걸 구체적인 천하삼분지계로 포함시키기엔 애매하다. 아마도 당시 원소와 조조가 싸우는 사이 자신이 제 3의 세력으로 부상한다는 식의 계획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다.

그에게는 아버지를 잃고 절박한 상황에서 원술 같은 소인배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후일을 도모한 불굴의 의지[29], 태사자조랑과의 일화나 부유한 호족 출신인 주유를 평생 손가에 헌신한 충신으로 만든데서 엿보이는 용인술[30] 등이 있었다. 또한 손파로토역전 주석 강표전에 따르면 유요가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을 때 손책의 군대는 민간인 약탈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손책이 온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혼비백산했으나 손책 도착 후 군사들이 명을 받들어 함부로 약탈하지 못하고 가축을 건드리는 자가 없었다. 특히 이 시대에 민간인 약탈을 하지 않았던 군벌은 유비 정도나 있었던만큼 드문 일이었다. 이래서 백성들이 너무 기뻐 앞을 다투어 소고기와 술로 군사들을 위로했다고 한다. 또 손책은 곡아로 입성해 장사들의 노고를 위로하며 물품을 내리고, 은혜를 베푸는 영을 내려 여러 현에 알리길 "유요와 착융 등의 옛 부곡으로 먼저 항복해 오는 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기꺼이 종군하는 자는 그 한사람만 가고, 그 집안의 부역은 면제한다. 싫어하는 자도 강제하지 말라"고 했다. 열흘 사이에 사면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니, 병사 2만여 명과 말 1천 필을 얻어, 그 위세가 강동에 진동하고 형세는 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사대부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를 본 사람들 중 그에게 마음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모두 즐거이 목숨을 바쳐 그의 명령을 따랐다고 한다. 이는 그만한 보급을 갖출 능력과 인심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고서야 불가능하다.[31] 이를 보면 손책은 분명히 패업을 이룰 자질과 명군의 자질이 아주 없지는 않은 인물이었다.

손책이 강동의 호족들을 부수고 다니면서 인재들을 포섭해 국가급 권력기관을 구축해놨기에 손권이 무난하게 권력승계를 할 수 있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손책이 온화하게만 나갔다면 서량 같이 어중간한 군소세력 연합체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 상태에서 손권이 권력을 이어받는다면 마초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할 수 있었다. 손책이 어느 정도 국가체계를 구축해놓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주유라는 걸출한 군부 인맥이 뒤를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손권이 군주로서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었을까.

종합하면 손책은 용인술과 리더십, 대국적 안목, 인심을 얻는 능력 등의 덕목을 갖춘 인물로 호족들을 억누르고 조금씩 중앙 집권화를 이룩하기 위한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히 대업을 이룰 인물이지만, 문제는 그 시도가 너무 급하고 잔혹해서 나중에는 자신에게 화로 돌아왔다. 아직 충분히 젊고 건강한 나이때에 이렇게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것 같이 조급하게 성급함과 잔혹성을 보일 필요없이 느긋하게 강동의 기반을 다질수도 있지 않았는가는 평가는 이 때문에 나온다. 결국 이게 자신의 죽음을 초래한 문제가 되기도 했고. 그래서 20대에 강동 정벌을 벌여서 그렇지 실제론 부풀려진 면이 많다는 평가도 있다. 그가 강동을 정벌하면서 상대한 적들은 엄백호같은 도적떼 두목이거나 왕랑, 유요, 육강, 주흔, 허공 등 한나라의 관료이자 지방 호족으로, 속된 말로 양민학살에 가까운 행위였다. 따라서 군사적 실적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손책의 능력을 깎아내릴 수 있다.

손책이 지배자로서 한계를 보인 부분은 정치적 능력과 장기적 안목의 부재와 본인의 포악한 성품 때문이었다.[34] 이런 면에서 '소패왕'이란 별명은 정말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35]

기실 손책이 이렇게 급하게 살면서 보여준 행보는 대부분이 무력으로 강압적으로 억누르는 것이었다. 특히 손책은 원소나 조조, 유비처럼 정치적 능력이 뛰어났다던가 그런 것도 없다.[36]그래서 세력확장 속도는 빨랐는데 정작 손책 본인은 자신이 만들어 낸 적들에 대한 적당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해서 살해당했던 것이다. 집권자가 살해당한 것도 문제지만, 내실과 명분을 다지기 전에 사망해버린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손책이 죽자마자 강동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 조조와 내통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고, 그 중에는 손보 같은 손씨 가문의 구성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손권이 그 후폭풍을 전부 감당했어야 하는데, 그걸 꾸역꾸역 다 처리하니 적벽대전이 눈앞.동오 내부에서는 의견조차 통일되지 못해 장소를 위시한 주화파의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왔고 결국 손권은 오를 통치할 명분조차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서 결국 유비와 동맹을 맺은후 같이 조조를 물리치는 한편 유비의 이름을 빌려 거기장군에 오르는 식으로 해결해야 했다.그리고 결정적으로 손책은 병들거나 수명이 다해 죽은 게 아니다. 본인이 정복한 지역을 제대로 다스리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고 본인의 짧은 활동 기간은 본인이 초래한 꼴이었다.

특히 은원관계를 확실히 하는 당시 사족사회에서 손책의 포용력 없는 철권통치 방식이 긍정적일 수가 없었다. 실제로 손책이 젊은 나이에 살해당해 손권이 뒤를 이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 손책이 강약 조절할줄 알았다면 손권이 아닌 손책의 자손들이 이어받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노숙도 유엽에게 꾀여 나가려던 걸 주유와 손권이 설득한 것이다. 손책 시절의 노숙은 손님 포지션이었는데 이때부터 제대로 된 손권의 동반자로 활약한다.

그래서 손책의 행보에 박한 평가를 내릴수 밖에 없는 건 자기가 저질러서 터진 내분을 수습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세력이 공중분해 당할 뻔했던 것. 이를 수습한 게 다름아닌 손권이고. 조조가 연주에서 장막과 여포, 호족들을 상대로 생존한 뒤 연주의 패자로 군림한 것과 반대의 모습이다.

사실 당시 중원은 조정의 붕괴로 지방 통제력이 박살나면서 이를 틈타 독립한 군벌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려고 충돌하면서 완전히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는데 비해서 강동은 커다란 충돌없이, 고만고만한 지방 호족들과 지방관들, 백성들이 협조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손책이 오기 전까지는 당시 중국 전토에서는 평화로운 편에 드는 지역이었다고 봐도 무방한 셈. 즉 손책은 평화로운 강동 지방을 [[원술|꿀물좌]]의 명령으로 닥치고 유린하는 동네 깡패로 보일 여지도 충분히 있었고[37] 그의 성급하고 잔혹한 성격 덕에 이런 면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되었다. 엄여를 대뜸 죽이는거야 그렇다 쳐도, 명문장가 고대를 쳐죽이는 스토리 등에서 열등감과 시기심 많고 잔인한 손책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특히 이간질에 넘어가 고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투옥한 것도 모자라, 그를 석방하라고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그를 질투해 고대를 죽인 이야기는, 연의의 우길을 살해해 죄값을 받는 것의 오리지날이다. 결국 손책의 목숨마저 앗아간 것도 그의 잔혹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것도 바로 죽었으면 또 모르겠는데, "선생은 중환자입니다. 흥분하면 다시 출혈을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3달 정도만 잘 쉬면 완쾌될 겁니다." 하는데도 얼굴에 스크래치 난 거 때문에 급빡해서 날뛰다 상처가 터져서 죽는 삼국지에서 손꼽히는 병맛 사망씬까지 연출한다. 물론 왕랑, 조진 등 연의에서 빡쳐서 피토하고 죽는 인물은 많지만, 이 양반이 이렇게 죽은 건 정사다(...). 당시에도 외모가 뛰어나면 인정받고 외모가 부실하면 멸시받는 일화들이 있는것을 보면 얼굴이 엉망진창이된 것에 흥분해서 자기 인생이 끝나버렸다고 혈압이 오르는것도 어느정도 감안해 줄 만은 하지만 손책의 다혈질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최후라 하겠다.

위나 촉이 중앙집권 구도고 그에 비해 오가 봉건적인 성격이 강했던 건 단순히 위와 촉에 비해 오의 호족들의 힘이 세서가 아니다. 위와 촉에도 호족과 이민족은 많았지만 그걸 누를 수 있는 군사력과 관리할 수 있는 행정력이 발달했던 것이다. 남북조 이후 동진이 체제를 정비하고 북벌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손씨의 집권을 통한 강남발달도 한 원인이지만 그보다는 북쪽에서 전란을 피해온 식자층들이 그대로 관료체계에 흡수되어서였다. 하지만 손씨는 그런 덕을 못봤고 조정의 핵심이 된 인물층들도 고씨나 육씨 같은 지역 호족들 중 손씨와 가까운 명문가들 위주였다. 게다가 손책 대에서는 주유와 장소 외에는 그런 기반 자체가 없어서 손권 때보다 더 열악했고. 아마 내부정비에 너무 오래 시간을 끌다가 다시 암살당하거나, 혹은 조조가 화북 통일하고 남하할 때까지 내부정비에 시간을 들였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지.

그러나 그는 아직 너무나도 젊었으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비극적으로 잃었고 어린 시절부터 전쟁터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성격이 거칠어진 면도 감안해야 한다.[38] 또 주위의 영걸들이었던 주유나 장소 같은 인물들의 보좌를 계속 받았다면 그가 젊은 시절부터 보여준 대국적인 안목으로 보아 나이가 들면서 군주로서 완숙함을 갖추고 변하지 않았으리라고 무작정 단정할 수는 없다. 까놓고 말해서 그의 뒤를 이었을 때 손권 역시 후계자로선 못 봐줄 수준이었음에도 나중엔 삼국의 한 축으로서 자리매김한 것을 생각하면 그에게도 그런 성장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고 볼 순 없다. 물론 동생처럼 말년 흑화를 겪지 말란 법도 없긴 하지만, 그것 자체도 손책 자신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문제가 고질병으로 남은 후유증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으니까. 그 조조나 유비조차도 손책보다 앞 세대여서 그렇지, 손책과 같은 나이 대에는 아직 영웅으로서 완전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39] 삼국지 팬들 사이에서는 주유와 함께 이른 나이에 사망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아쉬워하기도 하는 오나라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저지른 악행과 별개로 말년을 말아먹은 손권보다는 인기가 훨씬 좋다. 초반엔 분명 천하통일에 대한 의지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할거인지 천하제패인지 오락가락하면서 대체 대전략이 있는지나 의문이 되어 버린 동생과 달리 그는 천하를 경략할 식견이 있는 당대의 영웅으로 평가되었으며 상기했다시피 항우의 현신처럼 여겨지기도 했는데, 유독 조조의 군사인 곽가만은 그의 인물됨을 폄하하며 말하길, '제 성질을 못 이겨 자멸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40]

손책이 심하게 일찍 죽는 바람에 동오의 손씨 가문은 다른 군벌들과는 달리 군벌로서 자신의 나라를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한 채 손권이 그 상태로 그대로 끌고 가야만 했다. 이랬기 때문에 오나라는 다른 나라들인 위랑 촉과는 달리 군주가 토호들을 완벽하게 제압하지 못해서 툭하면 토호들끼리 밥그릇 싸움을 하게 되고 막상 전투를 하게 되면 토호가 삐질까봐 걱정하게 되었다. 위나라나 촉나라가 하지 않아도 되는 근심거리 하나가 오나라에 추가된 것으로, 이 근심거리 때문에 합비 공방전 등 잘될 일을 망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나라를 하나로 규합 시켰어야할 손책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오나라는 시종일관 규합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손권은 그대로 끌고나가야만 했기에 이는 이궁지쟁과 아주 연관성이 없다고 보기 힘들다. 게다가 이것도 호불호가 갈리는등 좀 문제가 있긴해도 군주의 자질은 확실히 있었던 손권이니까 그나마 거기까지 끌고 갔던거지 능력면에서는 아버지와는 비교조차 안되게 무능력한 조비나 유선 같았다면 손씨 가문은 적벽대전까지 가기도 전에 끝이거나 적벽대전에서 망했다.

4. 가족 관계

5. 기타

손책의 딸 손씨육손의 아내가 되는데 이것은 손책이 육강을 죽인 이래로 호족 육씨와 원수 관계가 된 것을 봉합하려는 정략결혼의 의미가 강하다. 이 결혼은 육손에게 있어서도 꽤 마음에 드는 일이었는지, 그는 선대의 원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고 손가를 충실히 섬겼다.[42][43] 물론 말년의 육손 관련으로 이궁의 변 문제를 터뜨려 손권이 까이긴 하지만 그거야 굳이 멀쩡하게 봉합되어 있던 양가의 묵은 갈등을 손권이 지 성질 못이기고 억지로 터뜨린거지, 이 정략 결혼 자체가 문제였다고 볼 순 없다.

손책이 죽을 때 후계자로 손책의 둘째 아우이자 손견의 삼남 손익이 거론됐다. 그러나 그 잔인한 손책이 보기에도 손익의 성질머리는 도저히 지도자감이 아니라고 봤는지[44] 죽을 때가 돼서야 내 성질 때문에 내 스스로 명을 재촉했으니 같은 꼴을 반복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손권에게 물려주라고 못을 박은 뒤 눈을 감았다. 손권도 잔인한 것과 불같은 성질은 자기 아버지와 형, 아우 손익에 버금갔지만 자기 성격 때문에 명을 재촉한 형과 아우와 달리 덜 성질을 부려서 오나라 역대 군주 중 가장 장수했다.[45]

동갑이었던 주유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 정사에는 쇠도 끊을 만한 우애(단금지교)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녀 자매인 대교소교를 얻었을 때도 대교를 아내로 삼으면서, 소교는 주유의 아내로 삼게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부분이 매우 간략하게 되어 있지만, 청춘 남녀의 사랑이 느껴지는 일화라서 그런지 여러 경극으로 로맨틱하게 각색돼서 널리 퍼졌다. 참고로 경극에서는 어쩐지 엄백호가 대교와 소교를 노리는 악역을 맡는 경우가 많다.[46]

손책의 정실부인이 누구인지는 기록이 없어서 그 행적을 전혀 알 수 없다. 손책의 아들 손소 및 육손의 아내를 비롯한 손책의 딸들의 친어머니가 누구인지도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손책의 가장 유명한 아내는 대교이지만, 정사의 기록을 보면 약탈혼이며, 으로 삼았다. 손책이 1년 뒤 요절했기에 대교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은 없다.

연의에서는 이 때문에 제갈량이 주유의 성질을 슬쩍 건드리는데 적벽대전 전 주유와 대화에서 "실은 조조에게 뭐만 주면 걘 강동은 뒤도 안 바라보고 갈 거임" 이라고 하자 주유가 그게 뭐냐고 물었는데 이에 제갈량은 이교라 대답한다.[47] 그런데 제갈량은 이 이교는 대교와 소교를 가리킨다고 말했고 그 말인즉슨 "조조랑 싸우기 싫거든 대교와 소교를 바치면 됨" 즉 "조조랑 싸우기 싫으면 너님의 아내와 전 주인님의 아내를 바치셈" 이라는 말이 되는지라 NTR 당하기 VS 한판 붙기의 양자택일이 강요되었다고 생각해 빡친 주유가[48] 한판 붙기를 택한다.

동진 시기 지인 소설 '어림'에 따르면 손책이 어렸을 때 유비와도 만남을 가진적이 있다고 한다. '유예주가 손백부의 걸음걸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유예주는 유비. 유비가 수양에 있던 원술을 방문했는데 이때가 손책이 14살일 때 였다. 손책이 곧 유비에게 가겠다 청하자 원술이 "유예주는 군(君)과 어떠한 관계인가?"라고 묻자, 손책이 원술에게 답하여 말하길 "그를 모릅니다만, 영웅은 뛰어난 사람을 꺼리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고는 곧 나가서는 동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이때 유비가 동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데 다만 손책의 걸음걸이를 돌아보고는 (그 걸음걸이에 넋을 잃고 바라보느라고) 거의 다시 나아가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 얘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를 역산하면 188년이 되는데, 이 시기 유비는 예주자사가 아니며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조조를 만나러 갔다. 나중에 예주자사가 됐을 때도 원술과는 서주 시절부터 적대 관계였기 때문에 직접 원술을 방문할 이유도 없다. 이 이야기는 당대의 영웅이었던 유비도 손책을 준걸로 봤다는 시각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인듯 싶다. 출처부터가 역사서가 아닌 소설이다.[49]

바둑사에 남는 인물 중 하나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바둑 서적인 '망우청락집'에 그와 여범이 둔 기보가 남아있다. 현존하는 기보 중 가장 오래 된 기록이다. 다만 이에 대해선 진위성이 의심된다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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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초 손책은 아버지의 작위인 오정후(烏程侯)를 승계해야 했으나, 이를 동생 손광에게 양보했다.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197년에 조정에서 손책에게 공식 관직을 내리면서 오정후 계승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2] 연의에서는 원술에게 전국옥새를 담보로 하여 군사를 받았고 황개 등 옛 가신들이 합류한다.[3] 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서 1차로 말 추격전, 2차로 칼&창싸움, 3차로 주먹다짐까지 세세하게 설명했다. 4차로 공성전 당시 싸움 중에 뺏었던 태사자의 수극과 손책의 투구를 내걸어 욕배틀을 하기도 한다.[4] 조조의 공격으로 치소인 팽성국하비국을 떠났다.[5] 연의에서의 허구로 번능은 손책의 고함 소리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죽었고 우미는 손책이 옆구리에 끼우고 끌고 오다가 질식해 죽었다.[6] 이게 어떻게 보면 나비효과 격인데 왕랑은 이후 다시 몇 년을 표류하다 조조의 신하가 됐고, 이후 위나라 조정에서 일했다. 그리고 그의 손녀 왕원희사마의의 차남 사마소에게 시집갔고, 사마씨가 들고 일어나 위나라를 집어삼키고 사마소와 왕원희 사이에서 태어난 사마염이 수저만 들고 거저먹기로 삼국을 모두 집어삼켰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외증손자가 복수를 해준 격이다.[7] 연의에서는 앞서의 옥새 건을 언급하며 "옥새는 왜 안 돌려주고 역적 짓을 하냐"는 내용을 추가했다.[8] 배송지는 장굉이 글을 더 잘 쓰니 장굉이 지은 것이라 여겼고 《건강실록》에 따르면 장굉의 글이라고 한다.[9]건강실록》에 따르면 엄백호는 손책에게 항복했다가 손책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10] 패배한 진우는 도망가서 원소에게 귀부한다.[11] 때문에 손책을 손토역이라고도 한다.[12] 다만 이 기록이 적힌게 다름아닌 <손책전>인 것과 양홍, 장훈 등도 원술의 최측근으로 있던 시절 손책파벌과 사이가 나쁜 편이었음을 고려하고 이후 손책이 유훈을 노린 것을 보면 실제로는 이리 순순히 이들을 받아들이려 했을거라 보긴 힘들다. 이때문에 실제로는 유훈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손책측이 이 둘 사이를 이간질했거나 아니면 그냥 순순히 항복하여 유훈 휘하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13] 손가 3대를 섬긴 정보(程普)와는 동명이인[14] 연의에서는 조조가 손책이 급속도로 동오를 평정하자 그를 두고 "사자 새끼와 같구나. 그와는 젖을 주지 않고 싸움을 피해야겠다."라고 말한다.[15] 조창은 손책이 죽을 때 9세-14세 사이의 어린 아이였으므로 엄청나게 조혼을 한 듯하다. 손분의 딸 또한 손분이 손책의 사촌 형제임을 감안할 때 매우 어렸을 확률이 높다.[16] 무엇보다 손책이 사냥감을 쫓는다고 말을 너무 빨리 모는 바람에 호위 기병들과 떨어지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17]삼국지연의》에서는 조금 다르게 나오는데, 이들과 우연히 마주한 손책이 "너희들은 누구냐?"라고 묻자 식객 3총사가 그냥 한당의 군사들이라고 태연하게 말하자 손책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사슴의 위치를 물어보았고, 그들이 위치를 알려주자 그 사슴을 향해서 다시 가려다가 기습을 당하는 내용으로 약간 바뀌었다. 이문열 삼국지에도 이렇게 나온다. 만화판에서는 손책에게 기습공격을 가한 뒤 아예 첨부터 그의 눈앞에서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다!"라는 대사를 쳤다.[18] 더군다나 갑옷도 안 입고 가벼운 복장의 상태로 기습을 당했으니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19]삼국지연의》에서는 이 과정이 조금 각색돼서 나오는데, 원소의 부하 진진이 찾아와 동맹을 청하자 마침 그러고 싶었던 손책은 기뻐하며 진진을 크게 대접하는 잔치를 베풀었고, 잔치 도중 많은 신하들이 우길을 보자마자 일부가 내려갔다. 이후의 줄거리는 강표전과 동일.[20] 손책 본인의 손으로 우길을 손수 죽이지는 않고 한 병사에게 우길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고, 그 병사가 망설이자 손책은 "만일 저 자식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을 줄 알아라!"라고 위협하자 병사는 마지못해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 대체되는 버전도 있고, 처형 전에 병사는 우길에게 죄송하다며 용서를 빌었으나, 우길은 괜찮다며 어서 형을 집행하라고 명했다. 이문열 삼국지에는 이렇게 나온다.[21] 아예 정신 이상 증세까지 생겼는지 손책의 눈에는 사람이고 사물이고 다 우길로 보여서 빨리 사라지라고 칼을 마구마구 휘둘러댔고, 급기야는 전에 우길을 대신 죽인 그 병사가 우길로 착각한 손책의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는 일까지 발생했다.[22] 황건적의 난 발발이 불과 16년 전 일이었고, 황건적의 완전 소탕까지는 한참이 더 걸렸다. 즉 당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도사가 저질러 놓은 사건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걸 감안하면, 사이비 도사를 벌한다는 것 자체는 그럭저럭 받아들여질 만한 명분이 됐다.[23] 실제로도 손책은 강동의 호족 허공의 식객에게 보복당하고 그 상처가 악화돼 요절했다.[24] 화타의 제자로, 본래는 화타가 이 치료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이 때 화타는 멀리 출장을 간 상태여서 그의 제자가 대신 치료를 맡았다.[25]건강실록》에 따르면 장굉에게도 맡겼다지만, 장굉은 정사에 따르면 이때 허도에 가 있어서 그 자리에는 없었다고 한다.[26] 사마염도 자신의 백부 사마사를 황제로 추존한 것은 비슷하지만, 이 경우는 아들이 없었던 백부의 뒤를 친부 사마소가 이어받았던 것이라 딱히 정통성에 문제가 별로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27] 북제고양도 자기 형인 고징을 세종 문양제로 추숭하고 고징의 아들 6명이 모두 왕작을 받고 금의 완안아골타도 형 완안오아속을 강종 헌민공간황제로 추숭한 사례 때문에 손권의 손책 무시는 당시의 관례로 볼 때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저들이 모두 이민족 왕조라는 점을 간과한 주장이다.[28] 참고로 항우의 사망 당시 나이가 31세다.[29] 라고는 하지만 사실 택도 없는 소리다. 애시당초 원술은 적어도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술은 군재가 없었기 때문에 손견, 손책이나 여포 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만약 원술의 능력이 좀 더 뛰어났다면 남중국을 아우르는 건 손가가 아니라 원술이었을 것이며 어느 정도 손가가 남중국의 지배자가 된 것도 원술의 세력을 흡수하고 그의 큰 그림을 일부 흉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견이든 손책이든 원술에게 의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답이 없어서 알아서 기어들어간 거고 특히 손견은 원술에 대해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다만 손책의 경우 아버지 손견의 군대를 돌려주지 않고 자신을 붙잡는 원술에게 점점 불만이 쌓여서 칭제를 핑계로 갈라선 것이다. 결론적으로 손견이나 손책은 소인배 원술에게 굴욕을 참고 그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만한 이득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밑에 들어갔고 아들 손책은 점점 원술에게 불만이 쌓였기 때문에(=원술의 밑에 있어서 자신이 얻게 되는 이득이 점점 줄었기 때문에) 뛰쳐나온 것이다.[30] 참고로 삼고초려 비슷한 일화나 '후계자의 자질이 모자라면 님이 대신 주공 해 주시오' 운운하는 일화는 손책도 가지고 있다.[31] 후일 여몽같은 이들도 점령지에서 약탈을 금했는데 손책의 이 같은 방침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32] 조조는 유비, 원소, 여포, 장수 같이 군사적으로 뛰어난 군벌들과 싸워 이겼다.[33] 조조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미 29세였으며, 25세 시절엔 아직 거병하기도 전이었다. 조조가 손책 나이이던 시기엔 영제 말기로 후한이 분열 직전까지 가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난세가 시작된 것은 아니라 조조는 후한의 관리로 활동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아직 군사적 활동도 없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활동 시기도, 상황도 전혀 달랐으므로, 두 사람 모두 군재가 뛰어났다는 평가를 할 순 있어도 둘 중 누가 군사적 재능이 더 뛰어났느냐는 누구도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34] 이런 식의 한계를 보인 인물은 원소의 장자 원담이 있다. 삼국지 창작물에서 비중이 공기지만 원담이 청주자사로 부임할 당시 원소 세력은 청주 내에서 힘을 거의 못 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공손찬의 부하 전해를 결국 몰아내 청주를 완전히 지배하게 된 원담의 군공은 뛰어나다고 봐야한다. 그러나 지배자로서 그는 폐급에 가까웠는데, 본인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는데다가 호족들을 지배하는 정치력, 행정능력이 부재한 터라 평판이 극히 낮았다. 이와 같이 군사능력이 뛰어나도 지배자로서 능력이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현실은 소설과 달리 정복하면 끝이 아니라, 이 지역을 지배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 물론 원담은 손책과 비교해서도 정치력이 더 한심한 수준이였다.[35] 사실 이렇게 군사적으로는 유능했지만 정치/행정에는 무능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파로 패왕 항우이다.[36] 그나마 본인들의 정치력도 대단했고 기반을 다지는데 주력한 이 셋만 해도 공백이 생기자 반발하는 세력들이 들고 일어났음을 상기하면 손책의 방식은 지나치고 강압적이였다. 원소는 관도대전 패배 후 기주의 수많은 군현들이 조조에게 투항하는 등 원소의 위상은 심각하게 흔들렸으며 패잔병을 수습하고 반대파 전풍을 죽여 내부의 결속을 가까스로 잡았지만 본인이 갑작스레 사망해 원소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원가는 순식간에 분열되어 조조세력에 흡수된다. 그나마 왕조를 개창한 조조나 유비만 해도 조조는 한실의 근왕세력을 짓밟는데 성공은 했지만 적벽대전 패배 후 레임덕에 빠져 그동안 숨어있던 반조조 세력들인 경기 위황의 난, 이풍의 난, 유비의 한중왕 즉위 등 조조 세력을 끊임없이 흔들었고 유비 역시 이릉대전 패배 후 촉 내부는 물론 남중의 이민족의 준동 등 일시적인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고 유비 사후 제갈량이 유비의 유지를 이어받고 유선의 전폭적인 신임을 뒷받침으로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37] 실제로 손책이 독립 이전에 원술의 명령으로 격파하고 죽인 육강은 그냥 동네 군벌이 아니라 엄연히 정상적으로 돌아가던 시절의 동한 조정에서 태수직을 임명받은 사람이였다.[38] 다만 아버지 손견과 동생 손권, 조카인 손노반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손씨 가문 사람들이 서로 다투듯이 잔인함을 보였던 것을 보면 몇 몇 돌연변이급으로 천성이 잔인하지 않은 이들을 제외하면 태생적으로 잔혹한 성품이 물 만난 고기처럼 여과없이 드러났다고 볼 수도 있다.[39] 같은 나이대로 보면 이 둘과 처한 처지도 다르다. 조조야 워낙 집이 잘 살고 부유했으니 손책이 전장터에 나가고 패업을 이루던 나이때는 한량처럼 놀면서 마음 편히 독서나 사냥 등에 열중할 수 있었고, 유비 역시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여 돗자리를 짜서 먹고 사는 등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지만 집안 어른들의 도움으로 노식 같은 대학자 휘하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손책은 아버지가 비명에 간 이후로 아무런 기반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십대 후반부터 계속 자신과 가족들, 가신들의 앞날을 고민하면서 전장터에 나서야 했다.[40] 이것 때문에 곽가가 손책 암살을 사주했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이건 너무 곽가를 치켜세운 것이고, 얼굴을 본 적 없는 곽가가 알 정도로 손책의 지나친 급진성과 잔혹함이 널리 알려져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 손책 암살을 시도한 건 진등이다.[41] 육손의 아내[42] 만약 육손 및 육씨 세족이 계속 등을 돌린 상태였다면 이릉 대전에서 오나라가 어떤 꼴이 났을지 생각해 봐라.[43] 육손의 아들이자 손책의 외손자인 육항은 아버지가 손권의 병크로 홧병 걸려 죽고, 장례식에서 손권이 20가지 질문을 던지며 핍박함에도 침착하게 대답하여 그의 의심을 풀었고, 나중에 손권이 궁색한 변명으로 용서를 구하자 받아들이고서는 그 자신도 오나라의 수호신으로서 활약했다. 육씨 가문의 또 다른 거물인 육개 역시 오나라의 충신으로써 손호의 폭주를 조금이나마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이였다. 육항의 아들들이자 손책의 외증손자들인 육안육경은 오나라가 망하는 280년에 서진과 싸우다 전사하기까지 했으니 손책은 자기가 멸망시킨 육씨 가문을 다시 회유함으로써 오나라가 멸망하는 280년까지 본인 사후에도 오나라가 존속되는 80년 가량의 시간 내내 잘 써먹었다.[44] 손익은 명백히 손책보다도 더 심각한 성격이였다. 손책은 분명히 적의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에게 죽기나 했지 손익은 자기 부하들에게 가혹행위로 인한 원한으로 살해당했다.[45] 그래도 합비 공방전 등의 모습에서 보면 분명히 그 성질 때문에 대업을 그르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46] 손책이 쳐부순 적들은 대부분 한의 지방관인 경우가 많지만 엄백호만큼은 명백한 도적떼들이며 1만여 명의 병졸을 거느릴 정도로 세력도 컸고 원래 캐릭터 자체가 이런 일에 어울리기도 하고 또, 동생 엄여도 있어서 대교 및 소교와도 맞아떨어져서 그런 듯하다.[47] 물론 이는 제갈량이 구라친거다. 발음은 같은데 뜻이 다른 한자로 살짝 바꿔치기한 것[48] 안 그래도 정사든 연의든 조조의 여색은 알아주는지라 어쨌건 정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도 빡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연의에서는 조조가 교공과의 친분을 언급하며 "아 내가 교공의 딸들도 먹으려고 했는데 손책과 주유라는 작자들이 먼저 훔쳐갔네?" 요런 소리를 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제갈량은 진실을 말했던 것.[49] 애시당초 원술과 유비는 당시 숙적관계였기 때문에 당시 원술의 신하였던 손책과 유비가 만날 일 자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