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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육군군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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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洲國 陸軍軍官學校.

1. 개요2. 봉천군관학교
2.1. 출신 인물
3. 육군훈련학교4. 신경군관학교
4.1. 출신 인물
5. 참고

1. 개요

만주국의 수도 신경(新京)에 설치되었던 만주국의 육군사관학교. 1939년에 세워졌으며, 1940년엔 만주국 육군비행학교도 세워졌다.

중국 군벌 장학량의 동북군 6만 명을 강탈흡수하여 창설된 것이 만주군의 시초다. 여기에 잡다한 군벌 출신 중국인 간부에 대한 보충 교육을 위해 봉천군관학교가 만들어 졌다. 이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모방하여 4년제 신경군관학교가 생겼다. 이에 봉천군관학교의 역할이 모호해지자 하사관/을 장교화 시키는 육군훈련학교로 개편됐다.

이 항목에서는 이상 3개 학교를 전부 만주국육군군관학교로 묶어서 설명한다.

보통은 신경군관학교라고 불렸다. 2년제 육군사관학교로 만주계와 일본계 학생을 선발했다. 만주계에는 광의의 일본계인 조선인대만인도 포함되었다. 제1기 입학생 중에 조선과 일본, 대만 출신이 172명이었다. 괴뢰국답다면 괴뢰국 답다. 일본계 전원과 만주계 중 성적이 우수한 사관생도일본육군사관학교나 경리학교, 기병학교, 포병학교 등 일본 육군의 각 병과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다. 만주 작전으로 만주국이 소멸되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갑병기술학교로 사용되었다. 7기를 끝으로 폐쇄되었다.

참고로 일본계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던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에서 점수가 아슬아슬하게 모자라거나, 유력가 자제 혹은 전사상자 유족들에 치여 탈락한 이들이었다. 일본 당국은 이들에게 만주국에도 사관학교는 있으니까 만주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칠 것을 종용했고,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것이다.

만주계는 일본계와 성적을 따로 매겼다. 그래서 조선인 수석졸업자라는 것은 만주계 중 수석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만주군관학교를 다룬 책을 보면 조선인이 성적이 좋은 비결을 일본어를 잘해서라고 나와 있다. 모든 과정이 일본어로 되어 있었는데 만주계를 구성하는 몽골, 중국, 대만인들은 일본어를 못하기 때문에 소학교-구제중학교를 거치며 최소 11년간 일본식 정규교육을 받았던 조선인들이 유리하였다.

조선인 생도들은 중국인 생도들을 제치고 두각을 나타냈다. 봉천군관학교에서 5기 송석하, 9기 백선엽, 신경군관학교에서 1기 박임항, 2기 박정희, 4기 장은산, 5기 강문봉이 수석으로 졸업 했다.

만주인이나 대만인은 성적 우수로 일본 육사까지 유학갔다 온 후 중국의 국민혁명군에 가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조선인은 단 1명의 이탈도 없이 일본 측에 헌신 하였다. 그 결과 신경군관학교 5기부터 조선인 생도는 졸업 후 전원 일본육사에 편입될 자격을 얻었다.

일제 패망 이후 40여 명에 달하는 만주군관학교 출신 생존 장교들은 강력한 군부 인맥을 형성했다.

2. 봉천군관학교

1932년 7월에 봉천시 교외의 군 시설인 동대영 강무당 안에 세워진 2년제 군관학교다. 정식 명칭은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이나, 다들 봉천군관학교라 불렀다. 잡다한 중국 군벌 출신 장교들을 재교육하고, 예비역 일본군도 뽑아 단기 교육 후 현역으로 임관 시켰다. 신경군관학교의 전신이며 이후 육군훈련학교로 개편된다.

봉천군관학교에 병설되어 있다가 독립된 학교로는 육군군수학교,(1937년 6월 신경에 설립), 육군군의학교(1934년 하얼빈에 설립)가 있다.

1932년 11월 기간요원으로 육군 소장 나가마치 다케조 이하 22명의 일본 예비역 장교가 부임해 교육을 담당 했다. 1933년 1월 정식으로 문을 열었을 때 초대교장 만주국 중장 왕징슈가 임명되었다. 이후 만주계 군관 후보생은 9기 일본계 군관 후보생은 10기 혹은 11기까지 배출 하였다.

기존 나무위키에는 조선인은 4기부터라고 나와 있었는데 이것은 전투병과만 군인으로 쳐주는 일본군 특유의 정신에 의해 작성된 <만주국군지>에 따른 것이고, 기술병과로 김주찬(군수), 김정호(경리)가 1기 혹은 2기 졸업생이다. 3기라는 말도 있다.

후보생들은 일본계 반, 중국계 반(조선인 포함)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본계 반은 일본군과 동질성 유지를 위해 졸업후 일본 육사에 보내 교육 시켰다. 이 때문에 만주군관학교는 학제나 교육 내용이 일본 육사와 비슷한 것은 물론, 입학·졸업 날짜까지 비슷하게 잡았다.

입학 전 군사훈련 기간, 졸업 후 견습사관 복무 기간을 포함하여 2년제로 운영 됐다. 일본군 특유의 훈련 방식과 만주의 상황이 결합되어 2년간의 훈련이란 곧 만주에서 항일세력 때려잡기라는 실전의 연속이였다. 좋게 말해 비적 토벌 실습이라고 하는데, 일본 쪽 자료에도 나오듯이 비적이란 물론 중국과 조선의 항일 무장집단이다. 물론 마적떼가 득실거린 당대 만주의 현실에서 진짜 비적인 마적떼 때려잡기도 이들의 과제이긴 했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정부에서도 공산게릴라를 공산비적[1]으로 지칭한 데서 알 수 있듯, 일본에 대항하는 항일세력 역시 비적으로 취급했다.[2] 당연히 교전대상으로 공산게릴라만 있던 건 아니며, 국민당 정부의 영향력 안에 있는 게릴라 부대도 상당했다.

군관학교는 교육 기간 중 이런 비적토벌 실습을 중시하고, 이후에도 각 연대에 위탁하여 견습사관 신분으로 역시 비적 토벌을 하는 등 살벌한 상황이었다.[3]

5기의 예를 들면 1936년 4월부터 9월까지 교도대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0월부터 37년 9월까지 1년간 봉천군관학교에서의 과정을 마친후 원소속 군관구로 배속되어 3개월간 견습 군관을 거쳐 1937년 12월 만군 소위로 임명 되었다. 즉 순수하게 학교를 다닌 기간은 겨우 1년이었다.

일본육사 출신이었던 장창국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은 중앙일보에 '육사 졸업생'을 연재했다. 연재된 중앙일보 1982년 11월 10일자를 보면, 홍사익 장군이 관동군사령부로 전속 와서 만주국 군사부 고문을 겸할 때, 식민지 조선인에게도 만주군에서 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래서 정일권 전 총리 등이 봉천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었다고 나온다.

앞서 언급한 1기 혹은 2기로 추정되는 김주찬, 김정호 외에 본격적인 조선인 입교는 4기부터로 5명이 합격 했다고 <만주국군지>에 나온다. 5기 입교때 부터는 응모자격에 선계(조선계)가 명시되면서 만주일대의 조선 청년 다수가 지원했다. 또한 일본인 후보생들이 졸업 후 일본육사로 2년간 유학가는 제도에, 5기부터 성적우수한 조선인들도 가능해졌다. 김석범이 그 첫 사례였고 두 번째가 정일권이었다.(다만 김석범이 일본육사 54기, 정일권 55기)

이렇게 조선인 입교가 가능해 진 것은 관동군으로 온 홍사익과 윤상필의 노력이 컸다. 특히 홍사익은 중좌 시절 일본군이 파견한 봉천중앙육군훈련처 초대 군사고문이었다. 그 후 군사부 교육담당 고문으로 재직하며 후보생 모집자격에 '조선계' 포함을 명문화 했고 응시자의 추천 및 보증인으로 활동했다.

출신자 명단 작성에는 간도특설대 출신인 김석범 전 해병대사령관의 <만주국군지>와, 백선엽 장군의 각종 회고록 및 군사영어학교 출신 장창국 장군의 <육사졸업생>을 토대로 작성 되었다.

출신 인물의 간략한 설명에는 간도특설대 여부와 한국군 최종 계급 및 직위를 표시한다. 간도특설대 여부를 특기하는 이유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서 이들을 전원 친일파로 규정, 주장한 것을 따른 것이다.

2.1. 출신 인물

3. 육군훈련학교

봉천군관학교가 신경군관학교의 출범으로 역할과 위상이 애매해지자, 1940년 12월 체제를 개편해 새 출발하게 되었다. 하사관 중에서 소위 후보자를 골라 단기 교육을 하여 초급장교를 양성했다.

4. 신경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체제를 모방해 1939년 3월에 설립된 4년제 장교 양성 학교다. 신경 남방 교외 7킬로미터 지린 가도에 연한 라라툰 난강 대지에 세워졌고, 교사는 동덕대(同德臺, 퉁더타이)로 불렸다. 정식 명칭은 만주국 신징육군군관학교이었고 줄여서 만주군관학교 라고 불렀다. 현재는 중국군 장갑병기술학원이 들어섰다.

앞서 봉천군관학교가 창군기 한국으로 치면 기존 군사경력자를 재훈련시키는 군사영어학교, 육군훈련학교가 갑종학교라면, 신경군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로 이해하면 편하다. 교육 중에 전쟁이 나서 흐지부지된 것도 비슷하다.[7]

응시 자격은 중등학교 또는 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자로 일본계와 만주계로 나눠서 선발 하였다. 일본계의 경우 일본 육사, 일본 본토 사관학교의 불합격자 중에서 성적이 합격선에 근접한 자를 대상으로 뽑았다.

교육과정은 예과 2년, 본과 2년으로 나뉘어 실시됐다. 1945년 8월 패망할 때까지 3기가 졸업하였고, 4~7기가 교육 중이었다. 대충 기수당 500명쯤 되어 총 3297명이 수학 하였고 조선인이 48명이었다.

신경군관학교 교장은 일본육사 출신으로 만주군 육군 중장이던 중국인 궈언린이었다. 2대 교장은 일본인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8], 3대 교장은 역시 일본인인 야마다 데쓰지로 예비역 중장이다.

1기생은 일본계 250명, 만주계 250명씩 선발하였다. 국적상 일본인인 조선인은 민족상으로 구분하여, 한족, 만주족, 몽골인, 대만인 등과 함께 만주계 범주로 분류됐다.

교육 과정은 만주계와 일본계는 숙사를 분리해서 배정됐고, 식사 시간도 달리해 학생들이 식당에서 만나지 않게 했다. 당시 군관학교에 다녔던 일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군관학교 구내에서 만주계 생도와 마주쳐도 일부러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서로 접촉이 없어서 동기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분리 교육은 관동군 헌병대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 서비스로 일계는 쌀밥을 먹고, 만주계는 수수/기장밥을 먹었다. 차등급식의 이유가 걸작인데, 일본인은 거친 잡곡을 소화하기 힘들어서. 만주계의 항의에 의해 차등급식은 폐지되긴 했다고 한다. 만주계 예과 졸업생 중 성적 우수자는 일본 육사 본과 편입의 기회가 주어졌다. 박정희가 있던 2기의 경우 240명의 동기중에서 70명이 일본 육사 57에 편입되었다. 일본육사내 성적도 따로 매겼다.

그에 반해 일본계는 전원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 되었다. 조선인이 만주계로 계산되는 1기~4기는 조선인 중 절반가량만 성적 우수자로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 되었다. 대만계의 경우 일본육사까지 나와 탈출하기도 했지만,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던 조선인의 경우 명예 일본인으로 격상되어 5기부터는 만주계가 아닌 일본계로 분류되었다. 이 때문에 예과 졸업 후 전원 일본 육사 본과에 편입 될 수 있었다. 6~7기는 예과 1,2학년 때 종전이 되어 그러지 못했다.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마치면 5개월간 사관후보생으로 일선부대에 배속되어 '다이쓰키(대부) 교육'이 라고 불리던 하사관과 사병생활을 체험한다. 이후 일본육사 본과 3학년에 편입된다. 이들은 본국 정규육사예과 출신들과 한데 섞지 않고 '유학생대'로 구분해 관리 하였으며, 강의실과 기숙사도 따로 배정되었다. 하지만 교육내용은 당시 일본 육사출신인 유재흥의 자사전에 의하면 유학생대가 배우지 못하는 과목도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성적도 유학생대, 그중에서도 만주계 몇명 안에서만 계산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유재흥은 일본 육사 출신 조선인들 전체하고(기수당 2~3명)는 매우 친하게 어울렸으나 유학생대 조선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

2기에서 박정희가 15등 입학, 수석졸업 했다는 것은 유명 하다. 이때 동기인 이한림이 2등 졸업이었는데 일본육사를 졸업할 때는 두사람의 성적이 바뀌어 이한림이 수석졸업, 박정희가 3위 졸업했다. 즉 전체 인원중 수석이 아니라 만주계끼리만 성적을 매긴 것이다.

2기의 경우 일본 육사 44년 졸업, 3기는 45년에 졸업하였으며, 4기는 교육중, 전원 일본계로 인정 받은 5기의 경우 막 일본에 도착한 직후 일제 패망을 맞이하여 실질적으로 입학하지 못하였다. 당시 전황히 시급하여 일본육사 예과 교육과정이 6개월로 단축되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 신경군관학교 역시 교육기간이 6개월 단축된다.

관동군은 기본적으로 대소전을 위해 만들어진 부대이기 때문에 만주군의 적은 결국 항일독립군이었다. 중일전쟁의 발발로 게릴라 세력뿐 아니라 국부군, 즉 중화민국 정규군과도 교전이 있었다. 물론 만주국의 실질적 통치세력인 관동군을 보조하는 입장일 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만주군은 어디까지나 중국 군벌군이 토대다보니 관동군에 비해 비중은 공기에 가깝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지근거리에 국부군 부대를 두고 있었으므로, 졸업 이후 자대에 배치받자마자 곧바로 국부군 부대로 탈영해버린 중국인 장교들의 비화가 있다. 관동군의 괴뢰로부터 배운 군사지식을, 관동군과 딸랑이인 만주군을 상대하는 데 써먹게 된 셈이다.

조선인들의 경우 여운형이 조직한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의 군사분맹에 소속됐던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앞서 7기 수석졸업자로 만주군 항공장교였던 박승환이다. 아니, 사실상 만주군에서 건국동맹의 군사분맹을 박승환이 이끌었다고 봐도 좋다. 박승환은 해방 뒤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인민군의 창설요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여운형 암살 이후 북한내 건국동맹 세력이 노출되어, 이들은 줄줄이 남조선 스파이로 몰렸다. 박승환 역시 모진 고문 끝에 옥사했다. 북한판 숙군작업이었던 셈인데, 이를 계기로 건국동맹 세력으로 북한군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한국 전쟁 직전 모조리 월남했다. 특히 1기 방원철의 경우, 역시 고문을 받으며 수감되었으나 탈옥을 감행하여 월남에 성공했다.

이 중에서 1기와 2기는 박정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핵심 인맥이었다.

4.1. 출신 인물

5. 참고


[1] 우리가 아는 공비의 어원이다. 즉 중국 국민당 정부가 공비 어휘사용의 원조인 셈이다.[2] 중화민국 정규군인 국부군을 비적으로 지칭하진 않았다.[3] 간도특설대 항목에도 나오지만 간도특설대 역시 준비기간인 교육 훈련 중에 “창설준비 중인 간도특설대가 비적 토벌”하였다고 만주신문에 나온다. 즉, 이는 만주군의 전반적인 상황이였다.[4] 대한민국 해군 중위로 임관, 해군 통제부 참모장 역임. 해병대가 창설되었을 때 창설요원이 되었다.[5] 여운형건국동맹 군사분맹에서 활약했으나, 여운형 암살 이후 남한의 스파이로 몰려 고문 끝에 옥사.[6] 남로당 군사부 요원.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연대장 신분으로 반란군에 투항, 이후 체포되어 총살.[7] 한국전쟁 발발 시 육사 생도 1기(1년제)는 졸업직전이었고, 생도 2기(4년제)는 입학 4일차였다. 이후 생도 1기는 육사 10기로 대접 받았지만, 생도 2기는 총알받이로 나섰다가 살아 남은 자는 갑종장교 교육받고 전원 장교가 되었건만 육사 역사에서는 낙동강 오리알 돼서 기수 자체가 없다.[8]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11월 한일회담을 위해 수상관저 만찬회장을 방문했을 때, 군관학교 시절 교장이었으며 육군사관학교 편입시험에 추천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며, 큰절을 올리고, “교장 선생님 덕택에 일본 육사를 나왔고 이제 한국을 대표해 일본 총리를 만나게 됐다”며 공손히 술을 따라줬다는 일화의 그 사람 맞는다. 한때 일부 사람들이 나구모 신이치로를 나구모 주이치(南雲忠一)와 혼동하여, 나구모 주이치가 박정희를 진성 친일파라고 추켜세웠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니기도 했는데, 만주군 육군이었던 박정희와, 일본 해군이었던 '나구모 주이치'는 당연히 만날 일도 없었으며, 1944년 7월 8일 사이판 전투에서 '나구모 주이치'는 전사했다.[9] 정일권이 당시 우대받던 장교의 정복을 입고, 모교에서 직접 식민지 출신으로서의 출세욕을 부추겨 입교 권유를 했던 탓이다. 광명중학교 출신으로는 윤동주, 문익환 등이 있으며, 이 탓에 학교 선배인 정일권과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10] 5.16 군사정변 당시 준장으로 가담, 이후 2계급 특진.[11] 건국동맹 군사분맹에서 활동. 조선인민군 창군에 가담, 박승환의 옥사 이후 월남.[12] 월남 이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준장에서 파면된 이력이 특이한데, 육군대학 졸업시험에서 동기 준장 및 후배 대령 3명과 함께 컨닝을 하다 들통이 났다.[13] 건국동맹 군사분맹에서 활동. 박승환의 옥사 이후 월남.[14]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의 동기생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정변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군사정변 성공 후, 군사재판에 형식적으로 회부되었으나 이내 석방되어 유학을 구실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군사정변의 얼굴마담이었던 장도영도 같은 과정을 밟았다. 이후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한림과 면담했는데, 이한림은 박정희의 면전에 대고 "이 자식아, 나 이렇게 미국으로 보내놓으니까 좋으냐?"고 대놓고 면박을 줬다. 그러나 1970년 이후로는 박정희와 화해하여, 정권에 참여하게 된다.[15] 중학교 재학 당시, 박정희가 신경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상뉴스를 보고 지원했다고 한다. 이후 김창룡 암살사건 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