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8:21:56

히사히토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BD0029 20%, #BD0029 80%, #AF001F); color: #DCA600"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황사(일본 황실)|
황사
]]
[[친왕비|
황사비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gcolor=#DCA600><bgcolor=#B48900> [[황적이탈|
장녀
]] || [[친왕|
내친왕
]] || [[친왕|
친왕
]] ||
[혼]: 결혼으로 인한 황적이탈
}}}}}}}}}}}} ||

히사히토 친왕
悠仁親王
파일:c63dc8d5-f724-44f8-8a08-48c2818655ae_4c7d05c3.webp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2006년 9월 6일 ([age(2006-09-06)]세)
도쿄도 미나토구 시바우라 아이이쿠 병원
학력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 (수료)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소학교 (졸업)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 (졸업)
쓰쿠바대학 부속고등학교 (졸업 예정)
쓰쿠바대학 (생물환경학군/입학예정)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
어머니 키코 비
형제 큰누나 코무로 마코, 작은누나 카코 내친왕
종교 신토
신장 173~175cm
계승 서열 2위

1. 개요2. 황실 가계도3. 상세4. 생애5. 불안한 미래
5.1. 황실의 장래 구성5.2. 후사와 자녀5.3. 결혼 문제
5.3.1. 사촌 누나 아이코 공주와 결혼 가능성
6. 논란
6.1. 반응
7. 여담
7.1. 성격

[clearfix]

1. 개요

일본의 황족.

현재 일본 황실의 유일한 남자 황손으로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의 늦둥이이기도 하다. 친남매로는 15살 위의 큰누나 코무로 마코와, 12살 위인 작은누나 카코 공주가 있고, 친척 형제로는 5살 위의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가 있다.

2019년 5월 1일부로 할아버지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하고 큰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가 일본 제126대 천황으로 즉위했다. 일본에서는 황실전범에 의거, 남계의 황족 남자만 황위를 계승할 수 있고, 나루히토 천황에게는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밖에 없기 때문에, 히사히토는 현재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에 이은 황위 계승 서열 2위가 되었다.

2. 황실 가계도

         
 ╟─
 ╟─
 ╟─
         
         
         
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
 ╟─
 ╟─
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
고노에 다다테루
 ╟─
센 소시츠
 ╟─
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3. 상세

일본 황실로부터 받은 문양은 금송(金松). 언론에선 주로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秋篠宮悠仁) 친왕전하(親王殿下), 뉴스에서는 보통 히사히토님(悠仁さま)이라고 불린다. 본래 아키시노노미야라는 미야고(궁호)는 현재 당주인 후미히토 친왕에게만 붙는 것이 원칙으로, 친왕가를 이을 아들에겐 '와카미야(若宮)'라는 칭호가 붙기 때문에 정식으로는 아키시노노와카미야(秋篠若宮)가 될 것이나 공식적으로는 미야케와 관련된 경칭은 부여되지 않았고 편의상 아키시노노미야라는 미야명을 성씨 대신으로 쓰기 때문에 편의상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라고 불리는 것이다. 다만, 전후 황실의 규모가 줄어들고, 형법상의 불경죄가 폐지되는 분위기 등으로 인해 경칭 사용을 까다롭게 규제하지 않게 되었으며, 구황족황적이탈 이후, 토모히토 친왕 이래로 60년 가까이 와카미야가 토모히토 1명 뿐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 호칭 자체가 사문화되었다.[1]

1965년 출생인 아버지 후미히토가 41세인 2006년[2]에 태어난 남성 황족이기 때문에, 태어난 직후부터 황태손에 준하는 극진한 예우를 받고 있다. 좀처럼 남성 황족이 태어나지 않는 상황이었던 탓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때 여성의 천황 승계와 미야케 창설을 허용하도록 황실전범(皇室典範)을 개정하려 했으나 자민당 내 보수파벌들이 강한 반발로 포기했었을 정도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루히토의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가 나루히토를 이어 장래 천황이 된다.

하지만 히사히토가 태어나면서 이러한 시도들은 흐지부지, 무산되어 버렸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황위의 남성 승계를 골자로 하는 현행 제도를 견지하겠다.'고 밝혔고# 일본 정부도 황실전범 개정을 사실상 단념해# 여성 승계는 물 건너간 듯. 여성 천황 관련 논의가 완전히 폐기되었다. 고이즈미 내각 때 여성 천황을 허용하려고 하던 기조에 선두에 서서 반대 의견을 내세워서 결국 포기하게 만든 경력이 있는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 황실부계(父系)로 잇는다."라고 아예 못박았다.

후미히토 내외가 나루히토 일가를 10년 이상 괴롭힐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 황손이었던 히사히토였지만, 이로 인해 큰누나 마코 공주와 작은누나 카코 공주성차별편애에 시달리고 억압과 방임으로 인해 좋지 못한 성격이 되었다.[3] 그리고 히사히토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황실전범이 개정됐다면, 당시 황태자 나루히토의 외동딸이었던 아이코 내친왕이 황태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2017년 황실에서 정식으로 황위 계승 서열을 확정해 나루히토 - 후미히토의 뒤를 이어 천황이 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후미히토가 안 되면 히사히토가 황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애매한 결론도 내렸다. 아버지 후미히토가 하룻밤 뿐이라고 해도 일단 즉위를 해야 본인의 입지가 탄탄해지는데, 하나뿐인 남계 후손이기는 하나 ‘천황의 외아들’로서 즉위하는 것과 ‘천황의 조카’로서 즉위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관건은 후미히토의 나이인데, 나루히토가 즉위하기 전에는 궁내청에서 후미히토를 밀어준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질 정도로 궁내청이나 자민당 내부에서 후미히토는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후미히토가 살아있는 동안에 나루히토가 병이나 노환 등으로 인해 사망할 경우 별 문제 없이 황위를 이어받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후미히토 역시 (형제 치고는 터울이 좀 있긴 하지만) 형 나루히토와 나이 차이가 5살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루히토가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거나 본인이 이례적으로 오래 살지 않는 이상 오래 재위하지는 못할 것이다. 히사히토가 장성해서 20~30대가 되고 이왕이면 중압감 심한 천황 자리를 물려받기 전에 결혼을 해서 아들까지 보게 하려면 2040년대까지는 나루히토, 후미히토 형제가 버텨야 하는 상황이다.

4. 생애

4.1. 탄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사히토/탄생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히사히토의 탄생부터 유치원 입학 전까지의 행보를 서술해 놓은 문서이다.

4.2. 소학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사히토/소학교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히사히토의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 소학교 진학부터 현재까지의 행보를 서술해 놓은 문서이다. 본래 일본 황족들은 전통적인 황족/귀족 학교인 가쿠슈인에서 공부하는 게 오랜 관습이자 전통이었는데, 2008년 9월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입학한 후부터 그 전통이 슬슬 깨지고 있다.

히사히토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가쿠슈인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공주들은 몇 있었지만, 소학교(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쭉 가쿠슈인을 다녔고, 그 이후에야 가쿠슈인대학이나 가쿠슈인여대가 아닌 다른 대학에 진학했다. 의무교육[4]을 가쿠슈인이 아닌 다른 학교에서 받은 황족은 히사히토가 처음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

4.3. 중학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사히토/중학교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과 부속소학교를 거쳐 2019년 4월부터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오차노미즈여대 부속 학교는 중학교까지만 남녀공학이고 고등학교여고다. 그래서 히사히토의 진학에 대해 논란이 있었는데, 남녀공학이자 부속초~부속고 모두 국내에서 손꼽히는 명문인 국립 쓰쿠바대학 부속중학교에 진학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유치원부터 소학교까지 부정입학 의혹이 많아, 이 중학교에도 뒷문 입학할 것이라는 논란이 심했다. 히사히토가 입학하기 전 학년도부터 히사히토가 입학하는 그 해까지 추천 전형이 도입되는데, 이게 히사히토를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고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어머니 키코 비가 예전부터 히사히토를 명문대학인 도쿄대학에 보내려고 기를 쓰고 단단히 벼르고 있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지금 도쿄대에서 추진 중인 특별 추천 전형으로 히사히토를 도쿄대에 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2018년 이후 아키시노노미야 家에 대한 대대적인 반발 때문에 일단은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에 내부진학하기로 했다.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본모습을 본 일본인들이 "아버지부터 까지 하나같이 부정입학이 아니면 학교를 갈 수 없는 거냐", "천황 부부[5]아이코 공주[6]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진학하는 게 아니라면 용납할 수 없다"고 반발하여, 그냥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로 보낸 것이다.

히사히토의 학업과 진학에 대한 묘사는 한마디로, 학업 성취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일본 국민들도 잘 알고 있다. 이전에는 그냥 알고 있어도 황실의 유일한 승계자인 만큼 어쩔 수 없이 대충 눈감아 주던 수준이었지만, 큰누나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발생한 2018년 이후에는 '학교를 갈 거면 제대로 공부해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시험치고 정정당당하게 가라.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도 자기 능력으로 공부해서 도쿄대학 갈 수 있는 수준의 성적을 달성하는 거 봤지? 안 그러면 절대로 인정 못 한다.'로 여론이 바뀌었다고 보는 게 맞다.

2022년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히사히토는 아버지가 객원교수를 지내온 도쿄농업대학 부속 제1고등학교, 혹은 히사히토의 중학 입시를 앞두고 5년 한정으로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에서 일부 남학생을 시험없이 특례로 보낼 수 있는 쓰쿠바대학 부속고등학교 중 어느 곳으로 가게 될지 거취를 주목받았다. 주간지 등으로부터 히사히토의 고교 진학지로 확정짓게 된 쓰쿠바대 부속고등학교[7]는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와 가까우며 편차치가 78카이세이고등학교 등과 비등한, 전국 1만개 고교 중 1, 2위를 다투는 극상위권 학교라#,일본 내에서 황실 특권을 이용해서 분수에 맞지 않은 학교[8]로 진학하는 것에 히사히토의 매형인 코무로 케이[9]와 뭐가 다르냐는 반발이 상당히 강한 편이다.

거기에 작년부터 쓰쿠바대학 부속 고교에 대한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진행 중인데, 그 동안 선생들과 학생들이 지적해도 방치해두던 건물을 급히 리모델링하는 것 자체가 이미 히사히토의 쓰쿠바대 부속 고교 진학이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는 반응이 나왔다.[10] 사실 전형도 이미 다 만들어 놓았으니 누구나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2022년 1월 24일, 히사히토의 특례 입학이 2주 이상 언론들의 타겟이 되고 네티즌들의 강한 비판 여론이 계속 이어지자 황사 일가의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인 궁내청 황사직의 장관인 황사대부가 정례 기자회견에서 해당 보도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드러냈는데, 일본 내에서는 진짜 거짓말을 하는 건 주간지나 국민들이 아니라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이라면서 해당 발언을 후미히토가 작년 생일기자회견에서 언론 검열을 공공연하게 언급한 것에 대한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다. 이후 궁내청 장관까지 나서서 히사히토의 진학 보도에 대해서 언론검열을 시도하였고 이에 일본 내 주요 언론들은 침묵하고 주간지들만 반발하면서 히사히토에 대한 진학 관련 의혹 보도를 계속했다.

2022년 2월 13일, 쓰쿠바대학 부속고교의 일반 입시 시험장에 히사히토가 깜짝 등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 반응은 특권을 사용해서 이미 합격한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일반 국민들의 여론을 의식해서 만들어진 쇼라고 취급받을 정도로 히사히토에 대한 평가는 최악.[11]

2022년 2월 16일 궁내청에서 쓰쿠바대학 부속고등학교 합격과 진학 예정을 발표했다. # 하지만 히사히토가 대놓고 특례조치를 써서 들어간 게 궁내청 발표로 확인되면서 일반 국민들이 히사히토에 대한 반감이 커진 상태이다. 가뜩이나 합격 발표 전에 그동안의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에 의한 언론 통제에 잔뜩 반감을 가진 주간지의 폭로로 작년에 한 대회에서 2위 가작을 받은 작문 오가사와라 제도 방문 수기가 오가사와라 제도 가이드북 등을 그대로 복붙한 사건[12]이 터진 시점이라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였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미성년자이고 일련의 사태에 키코 비가 적극적으로 주도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서 히사히토에게 그렇게 큰 비난이 돌아가지는 않지만,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한 일이라면서 대놓고 불법 행위들을 하는 걸 보고도 별도의 의사표시 없이 이를 조용히 따르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도 상당하다.

2022년 2월 24일 츠쿠바대학 학장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해당 제도가 히사히토만을 위한 특례인 게 아니냐는 것에 공식적으로 부인하면서 해당 제도는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 학생들 중 성적 우수자들을 대상으로 일반 입시와 같은 시점에 소정의 시험을 통과해야 가능하다고 밝히는 동시에 원래대로라면 올해 마지막 기간이지만 관계협의 결과 2027년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하기로 밝혔다. 주간지가 일반시험 전부터 떠들 때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학장이 나와서 부연설명하는 것과 동시에 히사히토의 작문 카피캣 문제에 대한 언급 자체나 그동안 해당 제도로 입학한 사람이 있는지에 대한 대답 등도 모조리 회피하는 등 여러모로 수상한 모습.[13] 이미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 자체가 사과나 반성없이 오로지 사건 은폐에 몰두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거짓말을 늘어놓고 그것도 안 통하면 황족이라는 걸 악용해서 탄압하는 오만불손한 황족 집안이라는 인식이 강해 이번 기자회견 역시 히사히토에 대한 비난 여론을 덮기 위하여 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작문 도작(표절) 의혹과 부정 입학 의혹이 연달아 터지면서 히사히토에 대한 일본 대중들의 인식은 더욱 나빠졌다. 인터넷 일각에서는 급기야 "즈루히토(ズル仁)"라는 별명이 지어져 구글 자동완성으로 뜰 지경이 되었다. 즈루히토는 일본어로 "교활하다, 약았다" 등을 뜻하는 즈루이(狡い)와 히사히토를 합한 별명인데,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치사히토"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미야고도 "아키시노노미야"가 아니라 일본어로 표절이라는 뜻의 "파쿠리"를 섞은 "파쿠리노미야(パクリの宮)", 뒷문이라는 뜻의 "우라구치"를 섞은 "우라구치노미야(裏口宮)" 등으로 불리며, 적어도 일각에서는 완전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히사히토의 입학 확정으로 그동안 고학력 진학고임에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교풍으로 유명한 쓰쿠바대학 부속 고교도 다른 진학고들처럼 여러가지 규제가 걸려서 자유로운 교풍이 심대하게 훼손되는 게 아닌가라는 학부모들의 우려가 튀어나왔다. 실제로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초등학교ㆍ중학교도 히사히토가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명문학교치고는 여러 가지로 자유로운 교풍으로 유명했으나 히사히토의 입학 후로 경호 문제를 이유로 많은 부분을 제약당했다고 한다.[14] 대표적인 사례로 운동회 때 입장 가능한 가족 수가 제한당하거나 운동회 때 각종 촬영도구 반입 금지 등이 있었고 히사히토가 참여한 운동회 때는 입구마다 황궁 경찰 등이 서서 엄격하게 소지품 검사까지 했었다고 하는 걸 감안하면 틀린 우려는 아닌 셈. 거기다가 히사히토의 특례 입학에 따라 해당 학교에 지망했다가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황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 사람도 제법 되는 모양이다.[15]

여담으로 2022년 기준 츠쿠바대학 부속고등학교의 시험 합격자의 중도포기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속출하여 중도포기률은 역대 최대치인 50%대를 기록했다는 게 알려졌는데 한국과 달리 고교 진학도 각 학교마다 다른 편이라서 한 번 합격한 학교를 포기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성적보다 낮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러한 결정은 장래 진학 대학을 선택하는 데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엄청난 각오가 필요한 것임을 감안하면 히사히토가 속한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얼마나 강한지 증명해 주는 또 다른 사례가 되었다.

히사히토가 중학교 졸업 후 궁내청이 언급한 바로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초등학교ㆍ부속중학교는 성적을 공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히사히토의 성적은 상위권이였고 문제 1개라도 틀리면 분해하는 등 학업 의욕이 상당하다고 했지만 일본 내에서 이러한 걸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4.4. 고등학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사히토/고등학교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5. 대학교

2024년 12월 11일, 츠쿠바대학 생명학부에 학교추천입시로 합격하였다.#

5. 불안한 미래

2019년 할아버지 아키히토 천황이 고카쿠 천황 이후 202년 만에 생전 퇴위로 물러나고 맏아들 나루히토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는데, 황실전범에 따라 후미히토황사(皇嗣)가 되고, 그 아들인 히사히토가 황태손 지위에 걸맞은 차기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 여기까지야 황실전범이 바뀌지 않았으니 자연스러운 흐름인데 히사히토가 정말로 즉위한다면, 훗날 황족의 수가 부족하여 천황 공무 수행은 힘들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5.1. 황실의 장래 구성

일단 남성 황족이 사실상 거의 없어진다. 할아버지 아키히토 상황(1933년 12월 23일 생)과 작은할아버지 마사히토 친왕(1935년 11월 28일 생)이야 말하면 입만 아프고, 히사히토의 큰아버지 나루히토 덴노도 1960년 2월 23일 생,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은 1965년 11월 30일 생이다. 2006년 9월 6일 생인 히사히토가 만 40세가 되는 2046년 9월 6일에 즉위한다고 가정해 보자. 히사히토를 제외하고 그나마 가장 젊은 남성 황족인 아버지 후미히토조차 80세가 되는데, 이들이 대외활동을 왕성하게 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거기에 그나마 존재하는 여성 황족들도 모두 히사히토보다는 나이가 많으니, 공주들은 평생 독신으로 살거나 나루히토 천황의 치세에 황실전범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모두 결혼으로 인하여 황적에서 이탈하고 평민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즉, 히사히토가 즉위할 때가 되면 '미카사노미야 궁가를 지키기 위해 독신으로 남겠다'고 선언한 7촌 고모 아키코 공주 한 명만이 남아서 히사히토의 공무(公務)를 도와줄 수 있다.

그런데 일본 황실의 공무량은 상상을 초월해서 지금도 성인이 된 공주들도 공무로 머리를 싸매고 있고 황실에서도 공무 부담이 너무 큰 까닭에 2019년 5월 이후로는 사실상 황실과 의절한 상태였던 노부코 비에게마저 어떻게 설득해서 황실 공무를 맡기는 상황이라, 달랑 두 명의 황족이서 이 엄청난 공무를 모두 감당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결국 시집간 공주들에게도 공무를 맡기기로 했고, 극단적인 가정으로 현재 미혼인 모든 공주들이 모두 다 결혼을 포기하고 평생 독신처녀로 늙어죽는다 해도 결국 시간벌기밖에는 안 되는 미봉책일 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독신으로 살면 자식을 낳을 수가 없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도 현재의 황실전범상 그 자식은 평민의 자식이지, 여계로는 황족이 될 수 없기 때문. 즉 현 상태로는 당장 공무를 맡을 사람들의 수가 유지되거나 줄어들망정 늘어나는 것은 못 해도 10년 이내로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라 이쪽이나 저쪽이나 조금 더 버티냐 덜 버티냐의 문제일 뿐, 한마디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이다. 그런 고로 황실전범을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결국 대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은 시퍼렇게 젊은 피, 어린 히사히토뿐이다.

이대로 가면 아예 일본 황족의 씨가 마르다시피 할 형편이다. 일본에는 황실에 중대한 일이 날 때 이를 결정하는 황실회의가 있는데, 히사히토 치세에는 황실회의에 참여할 황족이 아무도 없어서 황실회의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판이다. 현재는 고인이 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살아생전 90대 중후반의 오늘내일하는 고령에도 은퇴하지 못하고 황실회의 참석 의원으로 불려갔을 정도로 황족회의 구성이 불안정했고 2020년 기준으로 생전퇴위 등에 의하여 황실회의 참여 황족이 줄어들게 되어 현 시점에서 그나마 젊은 게 후미히토 부부와 히사코 비 정도로 고령화된 상태이다. 거기에 원칙상 황실회의에는 내친왕과 여왕은 참석이 불가능하기에 현 시점에서 추가 유입은 히사히토가 결혼해서 아내를 얻는 것 외에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2019년 5월 1일부, 새로운 천황이 된 나루히토의 즉위 행사 때, 성인 남성 황족만이 참석해야 하는 행사에 참석 가능한 남성 황족은 마사히토 친왕과 후미히토 단 둘 뿐이었다. 히사히토는 아직 미성년[16]이어서 공식석상에는 불참했다. 1989년 아키히토 상황이 천황에 등극했을 때 동일 행사에는 남성 황족 6명이 참관했던 것[17]과 너무 비교되어서, 지금 일본 황실의 불안정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 때문에 즉위 행사 때 공항에서 황족이 외국 손님들을 맞이하는 의전 행사도 인원 부족으로 취소해야 했다. 이런 맞이 행사 역시 성인 남성 황족만이 해야 하는데, 마사히토는 나이와 건강 때문에 일일이 의전을 수행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고 후미히토 혼자서 다 떠맡자니 이 또한 무리여서 아예 의전 자체를 취소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에 그동안 '황실에서 어떻게든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 여기던 일본 국민들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빨리 정치권에서 여성 궁가나 여성 천황을 용인, 허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할 정도였다. 일본 정치권 내에서도 2019년 3월달 아베 총리를 불러서 생전 퇴위 특례법(ご生前退位特礼法)에 근거하여 명시된 황실의 안정 후계 계승을 위한 조사를 당장 실행하라고 했지만 2019년 하반기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 내 보수파의 눈치를 보면서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느라 아베가 이를 계속 무시했다. 자민당과 연립 정권을 수립한 공명당조차도 여성 미야케 및 여성 천황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야당은 일제히 여성 미야케 및 여성 천황에 대해서 호의적인 입장[18]인 걸 감안하면 선거 후에는 어떻게든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후미히토아베 신조 총리에게 '나의 두 딸 마코 공주카코 공주가 결혼해서 미야케(황족 가문)를 창설할 수 있게 하여, 히사히토의 공무 부담을 덜어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코 공주의 결혼 상대로 거론된 코무로 케이와 그의 집안에 대한 논란이 한창 극심하던 시절이라, 아베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둘의 사이가 많이 안 좋아진 상태라는 의견이 많으나, 아베가 여성 미야케 창설을 허용하고자 하더라도 천황이 반대하면 아베 입장에서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인지라, 이 문제로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졌다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마코 공주 및 카코 공주가 이상하게 황실을 나가고 싶어하는 주요한 계기도 히사히토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다만 이건 히사히토 본인의 문제 때문은 아니고, 삼남매의 어머니인 키코 비의 잘못에 가깝다. 원래는 키코 비가 두 딸은 언젠가 황적이탈할 몸이라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공무에 돌리면서도 공무 이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지내도록 했는데, 문제는 히사히토가 태어나는 시점 즈음해서는 한동안 남성 황족이 나올 수 없음을 깨달은 키코 비가 두 딸들을 되도록 황실에 남도록 하려고 강요에 가깝게 두 딸을 압박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5.2. 후사와 자녀

황실의 다른 황족 남자 인원들은 현실적으로 더 이상 자식을 보기 어려운 나이이므로, 오직 젊은 히사히토만이 다음 세대[19]를 이어나갈 아들들을 다 만들어야 한다. 비슷한 처지였던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니콜라우스 폰 올덴부르크(6남 3녀)처럼 아들을 많이 낳으면 해결 되겠지만 20세기 초반에는 다들 애를 많이 낳던 시대라서 현대에 와서 자녀를 저렇게 많이 낳을 확률은 높지 않다.

히사히토가 천황의 외동딸을 제치고 황태손이 된 명분은 아들이기 때문인데 정작 천황의 자리에 오른 히사히토가 아들을 못 보게 된다면, 2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 황실의 유일한 독자이며 2021년 이후에도 별 다른 문제 없이 현상 유지가 되어서 사실상 황실의 유일한 황족이 되어있을 히사히토[20]가 적자를 못 얻어서 벌어지는 여러 논란은 상상 이상을 초월할 것이다.

원래 천황의 방계는 적당한 세대가 지나면 분가를 해서 신적강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천황 직계의 대가 끊어질 수 있다는 문제 때문에 1654년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당시의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에게 황실에 새로운 세습친왕가를 둘 것을 건의하여 후시미노미야·가츠라노미야·아리스가와노미야·간인노미야의 4대 세습가문을 정했고[21], 후시미계 방계 9개까지 총 13개 궁가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가츠라는 1881년, 아리스가와는 1923년 대가 끊겼고 후시미 직계도 후손이 없어 문을 닫을 예정이다. 간인(閑院)은 그나마 보험으로서 작동해 지금의 천황 계통인 직황족(直皇族)을 배출했지만, 그건 1947년 구황족 이야기이다. 직계는 1842년에 나루히토(愛仁)대에서 적통이 끊어지고 후시미의 방계에서 양자를 들였지만[22], 이마저도 1988년에 단절되었다.

족보를 뒤져서 듣도 보도 못한 구 황족의 방계 자손들 중 그나마 적당한 인물[23]을 들여 천황으로 삼을 생각이 아니라면, 히사히토 친왕이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지 일본 황실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야만 헤이세이 시대에서 레이와 시대로 이어진 현재에도 만세일계(万歳一系)를 표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훗날 히사히토의 비(妃)가 될 여성은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아들을 2명 이상은 꼭 낳아야 한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둘 중 한 명이 불임이거나, 딸부잣집을 차릴 가능성이 없지 않다.[24] 한편 그 아들이자 차기 천황을 성인이 될 때까지 건강상 문제 없이 잘 키워야 하고, 또한 미래를 위해서는 그 아이(들)도 반드시 아들을 낳아 후사까지 계속 고정, 확립해야 한다.

하술하듯, 이런 이유로 아예 결혼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힘들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남동생이라는 안전빵이 있고 그나마 아키히토 부황이 막 즉위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자 친척들이 여럿 살아 있던[25] 나루히토 황태자 시절만 하더라도, 그가 결혼 적령기에 이르자 황태자비로 물망에 오르던 명문가의 미혼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결혼을 서두르거나 외국으로 빠져나가버렸다. 이는 장래의 황후라는 중압감과 사생활 포기, 미치코 황후가 수십 년간 당한 악독한 시집살이를 비롯한 황실의 오랜 악습이 황실로 시집가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던 것. 실제로 마사코 황후가 맞이한 현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남동생이 있는 나루히토 천황의 아내 마사코 황후조차도 상상 이상의 남아 출산 요구를 궁내청, 황실, 그리고 일본 국민들[26]로부터 받아야만 했는데, 히사히토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현 황실전범이 수정되지 않는다면, 히사히토 미래의 아내가 다방면으로 받아야 할 중압감은 마사코 황후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더 나아가, 히사히토가 즉위할 즈음 일본의 황족이라고는 사실상 부모님이나 집안을 지키기 위하여 영구 독신 선언한 아키코 공주 정도만이 남아있을 것이며, 여기에 운이 좋다면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황실에 남아있는 몇몇 공주가 여기에 추가되는 정도로 대폭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니 히사히토의 아내로서 수행해야 할 공무들은, 현재 모든 여성 황족이 해야 하는 거의 모든 공무들을 한데 모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이 될 것이다. 시집살이는 고되고, 반드시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만 하며 낳지 못하는 순간 황실 자체가 사라진다는 사실에서 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한 부담도 있는데다가 수많은 공무들을 수행하여야 하기에 여러가지로 고생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갓 결혼한 마사코 황후(당시 황태자비)도 이러한 것 때문에 유산을 반복했고 도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을 낳은 이후 황후가 되기 전까지 매우 긴 시간 동안 요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001년 기준으로 나루히토 황태자를 제외한 4명의 남성 황족들이 40대 전후라서 그나마 무리 없이 자녀를 더 낳을 수 있는 연령대였음에도 이러한 상황이 펼쳐졌는데, 히사히토 이외의 남성황족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에서 마사코 황후가 겪은 것 이상이 될 것이 뻔하다.

장래에 히사히토가 결혼할 때가 오면, 히사히토 또래의 딸을 둔 일본 고위층들 사이에서 히사히토와 결혼하지 않기 위한 일대 붐이 더욱 큰 규모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궁내청일본 황실은 여태껏 말이 평민이지 재벌가 영애였던 쇼다 미치코, 아버지를 이어 외교관이 된 촉망받는 엘리트이자 상류층 집안 출신인 오와다 마사코, 현재까지 황실에 시집을 온 여성들 중에서 격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일본 셀럽의 상징인 귀국자녀에다 800만 엔의 연봉을 받던 교수의 딸[27] 가와시마 키코와 같은, 일명 오죠사마들과만 혼인을 시켰던 과거와는 달리 코무로 케이[28] 같은 진짜 평범한 사람을 골라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마음대로 원치 않는 결혼을 시키고 남의 집 딸을 멋대로 정략결혼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망신거리나 다름없다. 결정적으로 "어차피 나는 남자친구 있는데 어쩌라고?"라고 거절하면 할 말도 없는 것이고.

어쨌든, 히사히토가 맞이할 아내가 최소 2명 이상의 아들을 낳거나, 아들이 하나뿐이더라도 손자를 둘 이상은 두어야 적어도 황실이 끊기지 않을 상태이다.[29] 즉, 늦으면 2060년대2070년대까지 일본 황실은 매우 불안한 상태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즉 히사히토의 손자, 손녀가 태어날 무렵을 예상했을 때.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통령이 열 번 이상 바뀌는, 약 31대~33대 대통령 취임 무렵까지 일본 황실은 불안정한 상황이 된다는 뜻이다. 그때까지 누가 그 많고 무거운 황실 공무 중 일부를 대신할지도 문제고.[30][31]

그나마 이마저도 후계를 낳을 때까지 무사히 아무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성립되는 개념이다. 아무리 철저한 경호와 의료 서비스를 받는다지만 사람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심지어 이 정도로 압박이 심하면 스트레스성 불임이라도 올 만하지 않느냐는 말도 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5.3. 결혼 문제

앞서 언급한 결혼 역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히사히토가 영국의 에드워드 8세처럼 '나는 천황 자리를 포기한다.'라고 공개선언을 하거나[32] 선진국인 일본에서 황태손의 비가 되는 일인 만큼 궁내청이 이미 리스트를 선별하고 있으며 이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기만 해도 영광이고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가문의 격이 일약 급상승하기 때문에 그 리스트에 자기 딸을 끼워넣기 위한 경쟁이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다.[33]

문제는 히사히토 그 자신으로서 본인의 결혼의사가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외부에서 결혼압력을 주고 그 상대마저 정해놓았다는 식이 되어버리니 혹시라도 본인이 그에 반감을 가져서 코무로 케이처럼 하자 있는 집안의 여성을 고르게 되면, 천황가의 일개 공주인 마코 공주 때와는 다르게 천황 자신의 비로서 파급력이 차원이 다르다. 그냥 별다른 이유없이 결혼을 미루기만 해도 관심종자에 의한 암살이나 병사의 위험이 있어 후사 문제가 지속적으로 거론될 것이고, 혹시라도 독신 선언이나 커밍아웃이라도 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당혹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히사히토는 2006년생이므로, 일반적으로 결혼 적령기는 2030년대 정도다. 하지만 그의 경우 황실의 남성후손이 매우 적기 때문에 성년이 되자마자 결혼하라는 압력이 들어갈 확률이 크다. 당연히 그 혼사가 일본 사회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예상된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히사히토의 아내가 되어 미래의 황후로서 일본 황실에 시집가기를 원하는 여성은 정말 큰 부담이 될 것이다. 당장 히사히토의 할머니인 미치코 상황후, 큰어머니인 마사코 황후, 어머니인 키코 비가 황실로 시집와서 겪고 있던 고난들을 생각하면[34] '황실에 편입되어 자녀를 황족으로 만들고 천황의 모후가 될 수 있다'는 달콤한 이야기의 대가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5.3.1. 사촌 누나 아이코 공주와 결혼 가능성

일본에서는 법적으로 사촌 이상부터 결혼이 가능하며, 황실에서는 오래 전부터 근친혼이 잦았던 만큼 불가능한 건 아니다. 사실 아이코 공주나 히사히토나 즉위한 이후에 문제가 생길 게 자명한 자들인 만큼 황실 입장에서 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는 건 약간 꺼림칙했겠지만 황실의 안정이라는 대의적인 측면에서는 그렇게까지 나쁜 방안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근대 군주들 중엔 사촌 또는 그 이상의 근친혼을 한 사례가 꽤 있기도 하고.[35]

아이코 공주는 여성이기는 하나 남계 여성인 만큼 전례에 따라 천황이 돼도 별 다른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현 황실전범에 근거하면 아이코 공주의 자손 즉, 여계 황족의 자손이 되는 이들 후손의 황족으로서의 처우 자체가 상당한 문제이며, 따지고 보면 방계에다 집안인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의 수많은 추태와 치부가 발목을 잡고 있고 무엇보다도 본인에 대한 과잉 보호 등으로 국민들이 히사히토에 대한 걸 제대로 잘 모르는 상황이다.

만약에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이 지금처럼 대놓고 형의 자리를 빼앗겠다고 덤비는 게 아니라 동생을 몹시 아끼던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좋은 동생으로 남고 집안 단속을 잘 해 두었다면 형인 나루히토도 방계인 히사히토의 정통성 문제를 직계 천황의 친딸인 아이코 공주와의 결혼을 통해서 해결시켜서 존폐 위기에 직면한 황실을 최대한 안정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볼 여지(?)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라는 이유로 방임되고 있던 탓에 황족으로서의 품위 같은 것이 일절 없이 자라 온 남동생 후미히토는 형 나루히토에 대한 질투인지 어쨌는지 대놓고 황위를 노리며 온갖 난동을 부렸는데, 히사히토가 남자 황족이기에 성년이 되면 별 다른 문제없이 미야케 창설이 가능하고 천황 계승 가능성도 높으니까 당시 기준으로 지위가 심하게 흔들리던 황태자 집안과 엮이면 귀찮아진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키히토의 생전퇴위 선언에 의하여 아버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형인 나루히토가 천황에 즉위하는 것으로 완전히 물먹은 꼴이 되었고, 형과 후계 다툼을 벌이는 와중에 자기 자녀들을 방치[36]시키는 바람에 마코 공주코무로 케이가 천황제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만들었고, 뒤늦게라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자기 발로 걷어차버렸다.

현재 천황의 유일한 자녀 아이코 공주의 결혼 상대들을 미리부터 고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황실에서는 만일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되었을 때 그 이후 튀어나올 수 있는 여계 천황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존재인 구 황족들 중에서 쇼와 천황의 장녀인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와 결혼해서 현 황족들과 가장 가까운 친척[37]이자 현재 일본 황실의 계승 문제를 촉발한 주 원인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집안과의 결혼도 검토하고 있는 와중에도 히사히토와의 결혼을 사실상 배제하는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을 하고 있다.

구황족황적이탈 원흉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메이지 천황소노 사치코의 딸인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내친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4명이 있었다. 그들 중 장남인 모리히로(盛厚)는 쇼와 천황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과 결혼해서 3남 2녀를 낳았고, 시게코가 1961년 만 35세에 사망하자 데라오 요시코(寺尾佳子)를 후처로 맞아들여 2남을 더 낳았다. 당주 자리는 모리히로와 시게코의 장남인 노부히코(信彦)에게 계승되었다.

현재 히가시쿠니 가문은 2019년 3월 74세에 사망한 노부히코를 이어, 노부히코의 외아들 유키히코(征彦)[38]가 당주직을 맡고 있다. 유키히코의 슬하에는 2010년에 얻은 외아들([age(2010-01-01)]세)이 있는데, 쇼와 천황의 후손인 만큼 그나마 가장 가까운 혈족이다.[39] 이외에 시게코 3남인 나오히코(真彦, 1953년생, [age(1953-01-01)]세)에게 손자가 한 명 있는데 이쪽은 2004년생([age(2004-01-01)]세)이다. 참고로 아이코 공주는 2001년 12월 1일생([age(2001-12-01)]세)이므로 그다지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 황실 내에서도 어른의 사정으로 히사히토 쪽은 논의하지 않고 있는 게 확실시되고 있는 상태다. 아이코 공주의 최대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힘으로는 자식에게 계승권을 부여해 줄 수 없다는 문제는 황족 출신 부마를 들이는 것으로도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히사히토와 결혼시켜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키코 비가 두 딸을 구 황족 가문의 남자들과 결혼시켜 궁가를 창설해 히사히토를 돕게 하려던 계획을 한 층 더 큰 규모로 구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히가시쿠니노미야 이외에 하마평에 오르는 구 황족 가문은 다케다노미야, 가야노미야라는 미혼 남성이 2명 이상 존재하는 가문들이라고 한다. 가야노미야는 쇼와 천황의 여계후손인 히가시쿠니노미야에 비해서는 혈연관계가 멀지만, 1947년 기준으로 현재 가문이 이어지는 구황족 가운데 계승 서열이 제일 높았고 적당한 연령대의 남자 후손이 2명 있다. 다만 다케다노미야는 메이지 천황의 여계후손이면서 자손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이지만, 다른 두 가문에 비해 논란이 많은 편이라 혼인이 성사될 가능성이 낮다. 자세한 것은 다케다 츠네야스 문서로.

여담으로 2022년 초에 구 황족의 종가격인 후시미노미야의 당주인 후시미 히로아키 씨의 다단계 회사 광고 논란과 10월, 다케다 츠네야스의 부친이자 JOC 전 회장 다케다 츠네카즈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수사에 돌입[40]하면서 그동안 츠네카즈가 벌였으나 황족의 말예[41]라는 이유로 묻혀버린 여러가지 악행들이 다시금 주목받으면서 사실상 구 황족들 역시도 일반인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게 증명됨에 따라서 다케다 츠네야스를 위시한 구 황족 복귀파의 주장이 사실상 묻혀버린 상태이며 여기에 구 황족 출신 남성을 여성 황족과 결혼시키자는 안까지도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태다. 다만 저 논란에서 비껴나 있는 다른 가문의 복귀 논의는 계속되고 있는데, 나루히토 일가와 가깝고 아이코 공주와도 친분을 가진 동년배 구성원이 있는 데다, 딱히 구설수에 오른 적도 없는 가야노미야 가문의 황적 복귀 가능성은 후시미노미야 가문과 다케다노미야 가문이 물의를 일으키는 와중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논의되는 상황이다. 여전히 일본 내 여론이 히사히토의 즉위를 반대하는 쪽으로 압도적으로 기울어 있으므로, 일부 구 황족 가문의 복귀 여부는 꾸준히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6. 논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히사히토/논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사실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만큼 히사히토 개인이 저지른 것보다는 가족들의 문제가 더 큰 편으로 특히 어머니인 키코 비에게 너무 휘둘려 사는 것과 실력이 부족한데 황족 찬스로 스펙 쌓기 특혜를 받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제일 크다.

6.1. 반응

7. 여담

7.1. 성격

아키시노노미야 궁저에 히사히토와 친한 친구가 놀러오지 않아서[45] 아키시노노미야 일가 시종들이 돌아가면서 놀아주는데 한 시종은 "게임에서 지실 때마다 바로 히사히토 님이 화를 내셔서 눈치껏 져줄 수밖에 없다."라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서 여론은 "저런 일로 화를 내다니..."라며 별로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사실 자신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사고방식부터가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15세의 사춘기라고 해도 겨우 비디오 게임에서 진 것 가지고 상대방에게 화를 표출하는 모습은 유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편 대범한 성격으로 부모인 후미히토 내외처럼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의 자유로운 교풍을 좋아하고 있다고 한다.

혹자는 차라리 사촌누나인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돼서 히사히토는 방계 황족으로서 마음 편히 사는 게 히사히토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아이코 공주의 결혼 후 자녀에 대한 계승권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는 상태에서 천황이 안 되더라도 승계서열 2위인 히사히토가 부모, 특히 키코 비의 공부에 대한 압박이든 아이코와 결혼하라는 압박이든 강한 압박으로부터 해방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는 여론이 더 많다. 아이코와 히사히토가 서로를 결혼할 이성으로 보고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2019년 7월에는 친구 및 가족들을 하대(下對)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해당 보도에 대해서 일본 내 극우들조차도 우려의 시각을 표시할 정도. 사실 극우들 중에서도 후미히토 일가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제법 되는 편이다. 거의 대부분의 정치 세력이 그렇듯이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얼핏 의견이 완전히 통일된 것처럼 보이나, 이건 어디까지나 주변국이나 정치쪽에 국한된 이야기이고 황실쪽 이슈에 대해서는 극우라고 하더라도 큰 틀에서는 비슷할 지 몰라도 상세한 부분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제법되는 편이다. 물론 이는 일본회의국가신토와 관련이 있는 세력이 아닐 경우이며 일본회의나 국가신토 관련자라면 얄쨜없이 무조건 후미히토 일가를 옹호한다.

키코 비로부터 사실상 아치에너미로 취급받으면서 자라 온 아이코 공주와의 관계는 의외로 상당히 친밀한 것으로 보인다. 집안 내의 분란으로 심란해하자 아이코 공주가 히사히토와 함께 내야 펑고 1000번을 하면서 건전한 방향으로 스트레스 해소를 시켜주거나 아이코 공주의 책을 빌려받거나, 자신의 작문을 보여주고 첨삭을 요구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주간지에서는 키코 비가 어느 날 히사히토한테 황실에서 존경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히사히토가 할아버지아버지, 그리고 금상(今上)인 큰아버지 대신 사촌 누나 아이코 공주를 말해서 키코 비가 심울해했다는 보도가 있다.


[1] 토모히토 친왕이 아버지 다카히토의 미야고로 자신을 부르는 것과 황족을 さま로 부르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알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와카미야'라는 호칭을 깍듯하게 쓴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다케다 츠네야스 같은 구황족 출신, 또는 자민당 내 극우계 인물이다. 이 칭호를 쓰는 언론은 산케이신문밖에 없다.[2] 일본 연호로는 헤이세이 18년이다.[3] 물론 히사히토의 탄생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다. 실제로 카코 공주는 아버지가 자신들이 할 땐 혼냈던 행동을 남동생 히사히토가 하면 혼내지 않는 걸 보고 불만을 제기한 적이 꽤 있는 듯하다.[4] 일본의 의무교육 역시 한국과 동일한 중학교까지이다.[5] 나루히토 천황은 가쿠슈인 대학 대학원 졸업을 했으며 마사코 황후는 하버드 대학교, 도쿄대학을 다니다가 외교관 시험에 합격했다.[6] 가쿠슈인 초등과 시기부터 편차치 72점대의 높은 점수를 가진 수재로 고교 3학년 당시에는 도쿄대학 합격 안정권까지 끌어올렸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가쿠슈인 대학을 선택했다.[7] 쓰쿠바대학 부속의 또다른 최상위권 진학교인 부속 코마바(駒場) 고등학교와 오인하면 안된다. 코마바는 세타가야 소재의 남고이고 부속고는 분쿄 소재의 남녀공학이며, 진학 실적은 코마바 쪽이 훨씬 높다. 2021년 기준 츠쿠바부속은 도쿄대에 29명이, 츠쿠바부속 코마바는 89명이 진학했다. 현역 도쿄대 합격률로는 전국 1위로 꼽히는 학교가 코마바다.[8] 애시당초 히사히토에 대한 정확한 성적이 공개되지 않았으나 부친 후미히토 친왕과 누이들이 하나같이 성적이 안 좋아서 황실 특권으로 겨우겨우 학창생활을 보낸 걸 감안하면 히사히토 역시도 그다지 성적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9] 코무로 케이는 결혼 이후에도 히토쓰바시 대학원 부정입학 의혹, 미국 로스쿨 부정입학 등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을 정도다.[10] 참고로 쓰쿠바대학 부속 고교는 특례입학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연간 9,000만엔 정도의 후원을 받았으나, 특례 조치 도입 이후 연간 3~4억엔 가량의 후원이 매년 들어온다는 게 주간지 보도를 통해서 확인되었다.[11] 궁내청이 합격발표를 하면서 밝힌 특별전형의 조건이 '일반 입시를 치를 것'이었다고 하나 불과 얼마 전까지 궁내청은 특례입학을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을 뿐더러 2017년에 해당 제도가 만들어진 이래로 최근까지 주간지 보도 등을 통해 알려진 해당 제도의 조건에 '일반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렇기에 일반 대중들은 궁내청이 대중들의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하여 내뱉은 허위 사실로 취급하고 있다.[12] 참고로 표절 사건에 대해서는 궁내청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인정했으나 문제는 그 이후 대회측이나 궁내청 측이 확실한 대회 규정 및 저작권법 위반임에도 자격 박탈 등과 같은 별도의 조치를 일절 하고 있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 상태.[13] 하필이면 이 날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화제가 쏠려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14] 여기에 중학교 때 발생한 사건 이후로 이러한 경향은 더욱 더 강해졌다고 한다.[15] 실제로 한 주간지와 인터뷰를 한 쓰쿠바대학 OB의 조카도 모의평가에서 합격 안정권이라고 했으나 시험에 떨어졌다면서 그 조카분은 통화를 통해서 히사히토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기도 했다.[16] 만 18세가 되면 성인식, 즉 加冠の儀를 통해 일본 황실의 대례관복인 소쿠타이를 입고 비로소 정식 남성 황족이 된다.[17] 이 자리에 참석했던 황족들 중 후미히토를 제외한 그 누구도 남계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다카히토 친왕은 딸 둘과 아들 삼형제를 낳았으나 당시 고령이었던지라 불참했고 마사히토 친왕은 불임으로 자녀를 아예 얻지 못했으며, 나루히토 친왕은 외동딸 하나, 다카히토 친왕 소생의 아들들은 토모히토가 딸만 둘, 요시히토는 평생 독신, 노리히토 친왕도 딸만 셋 두었기 때문이다. 현재 생존자는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 나루히토 천황,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18] 단, 국민민주당은 여계 천황은 거부했으나 그 이외 정당들은 여계라도 허용하자는 입장이다.[19] 후대 황위를 계승할 남자 황족 후손.[20] 참고로 히사히토가 25세가 되면 아버지 후미히토는 60대 중반이며, 이때 즈음이면 누나들은 물론 자신과 나이가 5살 차이로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사촌누나인 아이코 공주조차도 결혼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 이때까지도 황실전범에 별다른 개정이 없다면 정말 황실엔 히사히토, 후미히토 부부(그리고 그때까지 퇴위하거나 사망하지 않았다면 나루히토 부부) 그리고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독신을 선언한 아키코 공주 정도가 남아있는 전부일 수도 있다. 이것조차 그때까지 그 누구도 사망하거나 어떤 이유로든 황실을 나가지 않았다는 전제 하의 일이니 막상 정말로 그때가 되면 남는 사람이 더 적을 가능성도 있다.[21] 근거: https://ja.wikipedia.org/wiki/%E6%96%B0%E4%BA%95%E7%99%BD%E7%9F%B3[22] 이 때문에 정통성이 떨어져서 1947년 구황족의 황적이탈 당시에도 계승순위가 최하위였다.[23] 만일 구 황족들 중 누군가를 새로운 천황으로 삼는다면 쇼와 천황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가 시집간 히가시쿠니 가문이 그나마 유력한 후보라고 할 수 있다. 이 집안은 아이코 공주의 부마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24] 참고로 현 일본 황실은 극심한 여초 현상을 보이고 있다.[25] 다카히토 친왕의 아들들인 토모히토,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삼형제가 건재했고 당시 기준으로 3명 모두 40대~50대 정도로 모두 아직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멀쩡한 나이였다.[26] 실제로 마사코 황후2001년 아이코 공주출산한 직후, 일본 국민들은 "공주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인사와 동시에 은연 중에 "다시 임신해서 아들을 낳으라"고 맹목적으로 강요하는 발언들이 쏟아졌다. 물론 궁내청이나 황실은 국민보다 더 노골적으로 이를 강요했는데, 이러한 것은 마사코 황후가 이후 장기간 요양을 받는 큰 원인이 되었다.[27] 시어머니 쇼다 미치코와 형님 오와다 마사코처럼 상류층 집안은 아니었으나 가쿠슈인에 재학하면서 남편 후미히토 친왕의 고가큐우로 지냈다는 것은 아무리 못해도 집안 형편이 중산층 이상은 된다는 소리다.[28] 큰누나 마코의 남편.[29] 물론 알바니아조구 1세 왕의 직계 자손이 전부 외동아들로 대를 잇고 있기는 하다.(레카 조구 - 레카 조구 2세) 다만 이 쪽은 공화정이라 왕위 요구자에 불과하니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것일 뿐. 만약 알바니아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면 지금의 일본과 비슷한 상황이 될 것이다.[30] 만약 여성 천황 내지는 여계 천황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만일 히사히토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결국 천황, 나아가 황실의 혈통이 그대로 단절되어 버리는 결과가 도출됨으로써, 최종적으로 일본의 천황제는 완전히 폐지되고 국체(国体)가 공화정으로 전환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31] 실제로 2019년쯤부터 일본 인터넷에서는 히사히토의 천황 승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나루히토 황태자의 직계 딸인 아이코 공주가 천황을 계속 이어갈 것이 아니면, 그냥 천황제를 폐지해 버리고 차라리 공화제를 도입하라"는 노골적인 의견도 상당히 빈번하게 나오고 있다.[32] 이쪽은 이쪽대로 큰 문제를 일으킬 일인 게,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가 황위를 거부한다면 일본 사회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가 된다.[33] 일본은 귀족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자발적으로 혁명이 일어나서 폐지된게 아니라 전쟁에 져서 폐지된 것으로서 인식상으로는 여전히 봉건적 기운이 만연하다. 따라서 돈만 있다고 해서 가문의 격이 올라가는게 아니다. 구화족 집안은 가문의 격이 높다는 인식 때문에 취업이나 혼사에서 매우 우대를 받는다. 큰 돈을 번 졸부들이 가문의 격을 올리기 위해 화족집안과 혼례를 맺는 일이 결코 드문일이 아닌데 황족과의 혼사가 성사된다면 장래 천황의 외가가 되므로 일약 일본내 최고위급 가문의 격을 가질 수 있다.[34] 게다가 키코 비의 '악명'이 알려질 정도로 정평이 나 있으므로, 이런 사람을 사돈으로, 시어머니로 모시고 싶은 여성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시어머니의 성격이 순한 양과 같아도 어려운 게 황실 생활인데.[35] 당장에 한국사를 보더래도 고려 광종이복 여동생을 왕비로 맞고 자식을 봤다. 그리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샤를로트 여대공이나 올라프 5세의 경우에서 보듯 유럽 왕실만 하더라도 20세기 초까지 사촌간의 결혼이 드물지 않았다.[36] 사실상 교육 과정에서 후미히토가 기여한 것보다는 아내 키코 비가 주로 기여했는데 키코 비도 사실 자녀 교육 면에서 그렇게 좋은 엄마는 아니라는 게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등으로 확인되었다. 그에 반해 나루히토 부부는 두 사람 모두 주변에서 온갖 패싱을 당하면서도 아이코 공주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지메 사건이나 거식증 문제 등이 있었으나 적절한 훈육과 칭찬 등으로 아이코 공주를 바른 길로 이끌어서 일본 궁내청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황실의 재원으로 키워냈다.[37]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의 직계 자손과는 대략 7촌 정도라고 하는 데 아이코 공주 입장에서는 미카사노미야 가문/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의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 쓰구코 공주도 7촌 관계인 걸 따지면 상당히 가까운 편이다.[38] 1973년생. [age(1973-01-01)]세.[39] 히사히토와 아이코 공주의 기준에서 고모할머니 히가시쿠니 시게코 기준의 증손자가 되니 칠촌조카가 된다. 참고로 히사히토에게 미카사노미야 가문도 대략 이 정도 촌수이다.[40] 아베의 암살 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조치에 그동안 수사를 아베가 방해한 걸로 추정된다. 실제로 츠네카즈의 장남 츠네야스는 아베와 사적으로 온천을 즐기는 등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41] 사실 츠네카즈는 황족에서 민간인으로 격하된 이후 출생자이나 가족들이 전부 구 황족이라 그냥 구 황족 취급받았다.[42] 쉽게 말해 자기가 무엇을 알고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는 의미.[43] 대한민국은 미정발이지만 해외에선 인피니티 M35h, 인피니티 Q70으로 판매되었다.[44] 14세 생일에는 산에서 아버지인 후미히토와 사진을 찍으러 다녔는데 후미히토의 인중 근처까지 성장했다. 후미히토가 나이를 먹고 키가 줄었어도 대략 175cm 정도라고 보면 히사히토는 적어도 160cm 이상은 된다.[45] 사실 히사히토에게는 친구가 없다고 봐도 무방한 게, 초등학교 시절은 대부분 집에서 두문불출하던 편인데다가 어쩌다가 학교에 와도 수업은 듣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이 잦고, 경호 등을 이유로 무서운 남자들이 다수 근처에 붙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사히토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사전에 궁내청 등의 까다로운 조사를 통과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기에, 히사히토에게 무례(결례)를 범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동갑내기들일 가능성이 높다. 만에 하나 이러한 사전 교육을 안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진심으로 우정을 느껴서 히사히토를 가까이 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을 것이다. 결국 어느 쪽이든 진정한 친구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부류들이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