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타리의 매출 폭락을 보도한 당시 기사 |
아타리 쇼크를 설명한 영상(영어) |
1983년의 상황은 뭐랄까... 마치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비상구로 달려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아타리에서 덤핑 경쟁에 뛰어들면서 모든 것의 종말이 오기 시작했죠. 이때부터 게임산업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 짐 레비, 액티비전 회장
― 짐 레비, 액티비전 회장
정말이지 게임 업계에 지독한 세월이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했죠. 애플 II 게임을 내놓더라도 1만 5,000개를 팔기 힘들었습니다. 일렉트로닉 아츠를 시작한 때에는 카트리지 게임이나 플로피 디스크 게임을 만드는 회사가 130여 곳이나 되었지만, 그 가운데 오늘날에 살아남은 회사는 불과 6곳뿐입니다(1983년 아타리의 몰락 이후 상황).
― 트립 호킨스, EA 창업자
― 트립 호킨스, EA 창업자
【언어별 명칭】 | |
영어 | (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1][2] |
일본어 | アタリショック |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일어난 북미 비디오 게임 산업계가 침체기에 있던 시기를 일컫는 말로, 비디오 게임계의 거장이자 선구자인 아타리를 몰락시킨 사건이다. 구체적으로, 1982년에 30억 달러까지 간 시장 규모가 1985년에 거의 3% 수준인 1억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아타리 쇼크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특정 게임사의 실패라는 두루뭉술한 의미와 다르게, 당시 아타리의 최대 주주였던 워너사에서 아타리의 운영에 직접적으로 간섭하게 되면서 생긴 경영 실패를 지칭하는 것이다.
2. 개념
'아타리 쇼크'라는 단어 자체는 오일 쇼크나 닉슨쇼크 같은 말을 빗대어 만들어진 것으로, 미국 토이저러스의 부사장 하워드 무어가 1990년 닛케이 일렉트로닉스를 통한 발언에서 사용한 것이 최초로 알려져있다.[3] 야마우치 히로시조차 공식적으로 입에 담은 것은 199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조제남조'라는 말과 함께 잡지 등지에서 서드 파티[4] 제도나 쿠소게를 거론할 때면 어김없이 거론되는 개념이었다. 때문에 아타리쇼크를 '시장에 쿠소게가 넘쳐나게된 결과 소비자들은 게임에 흥미를 잃고 떠나갔다'는 사건 정도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오해는 이후 2006년 혜성처럼 등장한 니코니코 동화에서 E.T.(게임)을 소개하는 영상이 올라오며 더더욱 크게 증폭되었다.
서양에서는 아타리 쇼크라는 단어 자체는 알려져있긴 하지만 잘 쓰이진 않는다. 잘해야 'atari crash'라고 쓰는 정도.[5]
한국에서는 게임잡지를 통해 알려졌다. 당시 콘솔게임이란 곧 일본게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레퍼런스도 당연히 일본의 미디어가 될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니코동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AVGN으로도 알려지기는 했으나 "아타리 = 똥겜으로 망함"으로 단편적으로 알려졌다.
3. 배경
3.1. 아타리의 탄생과 성공
놀런 부슈널은 1972년 6월에 회사 아타리를 만들었고, 같은 해 11월에 퐁을 내놓았다. 그는 퐁을 통해 비디오 게임 비즈니스 영역을 개척하여 게임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1976년부터는 게임기 개발에 착수했다. 같은 해에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 2800만 달러 이상의 막대한 자금을 받고 회사를 매각했고, 1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투입하고 1977년에 아타리 2600을 9개의 출시 게임과 함께 발매했다.
아타리 2600의 초반 성적은 그저 그랬다. 기계가 너무도 조악하고 불량이 많아 반품되기 일쑤였다. 1978년 2월의 워너는 아이비 리그 중 하나인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굴지의 섬유 기업 벌링턴 인더스트리의 부사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레이몬드 에드워드 카사르(Raymond Edward Kassar)[6]를 영입해 아타리의 부사장에 임명했다.
반면 부슈널은 아타리 2600의 판매 부진과 그에 따른 워너와의 불화로 1978년 11월, 5년 동안 동종업계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회사를 떠났다. 당시에 아타리는 판매 부진을 겪고 있던 아타리 2600을 대체할 차세대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워너는 이 시스템을 개인용 컴퓨터로 만들 것을 원했고, 부슈널이 이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부슈널은 아타리를 떠나고 본인이 원하던 피자 프랜차이즈 사업[7]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사업을 늘려나갔지만 아타리 같은 새로운 게임 회사를 만들지는 않았다.
부슈널이 아타리를 떠난 이후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스티브 로스는 레이몬드 카사르를 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카사르는 체계가 잡혀있지 않은 개판 5분 전의 아타리를 재정비하고 크게 성장시키는 데 일조했다. 아타리 2600의 판매량은 매년 두 배씩 증가하여 1979년 크리스마스에는 1백만 대가 팔렸고, 타이토의 대히트 아케이드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아타리용으로 이식하여 1980년 1월에 발매했다. 이때부터 아타리는 재고로 쌓여 있던 게임기들을 소진시켰을 뿐 아니라 매출이 두 배 이상으로 늘면서 1980년 한 해에만 2억 달러 이상 성장했다. 그가 사장으로 있던 시기에 1977년 7500만 달러 수준이었던 아타리 매출액을 시장 붕괴 직전인 1982년 20억 달러 수준까지 크게 성장시켰다.[8]
3.2. 서드파티의 탄생
아타리에 서드파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이 모든 것을 독점했다. 그러나 개발자들에게는 성과급은 커녕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9] 물론 아타리가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해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발매한 1980년이지만, 개발자들은 여러모로 참을 수 없었는지 1979년 5월에 아타리의 프로그래머 몇 명은 레이몬드 카사르에게 자신들을 레코드 레이블처럼 판매량에 따른 성과급과 게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릴 수 있기를 요구했다. 카사르는 그 요구에 대해 그들에게 '수건 디자이너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나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다'라며 그들을 모욕했다.[10] 결국 그들은 회사를 떠나 1979년 10월에 액티비전을 창업했다.액티비전에서 만든 게임들은 판매량과 평가 면에서 모두 상위권에 들어가는 명작 아타리 게임들이었다. 하드웨어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물론이고, 슈퍼 마리오의 선조격으로 불리는 피트폴이 바로 액티비전 작품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이 서드파티였다. 아타리는 자신들 밖의 누군가가 자신들 게임기의 게임을 만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게임 회사들은 기기를 분해하고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아타리 게임기를 연구하여 무허가로 게임을 개발했다. 아타리에서는 그들에게 특허 침해 혐의로 소송을 걸었다. 결국 1982년에 아타리가 특허료를 받는 조건으로 게임 회사들과 화해하면서, 다른 게임 회사에서도 아타리에게 특허료를 지불하면서 아타리 게임기에 게임을 출시하는게 가능해졌다. 서드파티라는 개념은 이 때 탄생했다.
3.3. 소프트웨어 범람과 경쟁자들의 출현
비디오 게임이라는 금맥을 향한 골드러시는 이 무렵 시작되었다. 아타리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비디오 게임기도 여러개 생겨났고, 애플 II를 비롯한 홈 컴퓨터들까지 우후죽순으로 발매되었다. 그리하여 시장은 대 비디오 게임 시대가 열렸고, 정말이지 수많은 업체들이 게임 개발에 참여했다. 근데 이 업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14개의 아타리 2600 게임을 낸 US GAMES는 식품회사 퀘이커 오츠[11]의 게임 개발 부서였다.
- 11개의 아타리 2600 게임을 낸 게임즈 바이 아폴로는 커리어 컨설턴트용 영상음향 교재를 만들던 회사의 자회사였다.
- Spider Maze와 Vulture Attack을 퍼블리싱한 K-tel vision은 컴필레이션 음반 전문 회사였던 K-Tel의 게임 부서였다.
당시 게임 회사는 아직 도덕적, 법적 의식이 갖추어지지 않은 해이의 시기였다. 이런 현상은 게임계에서도 나타나 자본이 들어오자 게임의 지나친 상업화가 시작되었다. 과일음료 '쿨에이드' 마스코트 Kool-Aid Man을 이용한 광고 게임도 그런 주류의 한 축이고, 남의 게임을 뻔뻔하게 베껴 파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한 게임이 4번쯤 복제되는 것은 놀랍지도 않았으며, 똑같은 게임들이 콜레코비전과 인텔리비전, 오디세이, 아카디아 2001, 볼리 아스트로케이드, 스펙트라비전 등등 갑자기 쏟아진 경쟁 기종별로 이름만 바꿔 등장했다. 한가지 게임이 수십 종류의 기종으로 똑같이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사태는 악화일로로 나아가 마침내 아타리 2600용 저질 포르노 게임까지 등장하게 됐다. 무엇보다 현대의 연령별 게임 등급 분류 제도도 없었기 때문에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포르노 게임 중에는 '커스터의 복수(Custer's Revenge)'라는 게임이 가장 유명하다. AVGN의 리뷰로 잘 알려진 게임인데, 그 유명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여 화살의 방해를 뚫고 인디언 여자가 있는 자리까지 가 강간하는 것이 주 내용. 시기도 시기이지만 그래픽이 조악해서 아이가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봤을 때 어른은 '커스터 장군이 춤을 춘다'고 변명했다. 게임 매뉴얼의 뒷면의 주의문에 그렇게 하라고 적혀 있다. P.S. If the kids catch you and should ask, tell them Custer and the maiden are just dancing.(추신: 만약 아이가 당신이 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을 볼 경우, 커스터와 여자가 춤을 추고 있다고 말하면 됩니다.)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 그것도 인디언 전쟁 내내 이어진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전쟁범죄에 관련된 인물을 가지고 포르노 게임에다 인종차별에 고인드립까지 친 탓에 출시 당시(1980년대) 미국 사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고 원주민 단체 및 여성 단체로부터 엄청나게 비판을 당해 판매 금지 소송에 걸린 바 있다. 오늘날 미국 대학 내의 게임 관련 과목에서도 다룬다.
또한 홈 컴퓨터가 대두되며 아타리의 자리를 위협했다. 1970년대부터 등장한 애플 II, 코모도어 PET 등의 컴퓨터는 원래 사무용 기기를 노리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세계 최초의 스프레드시트인 VisiCalc의 애플 II 출시로 인해 사무용 컴퓨터 시장은 애플 II의 승리로 끝나자, 코모도어는 박리다매 전략으로 바꿔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노리게 됐고, 1981년 코모도어 VIC-20을 출시했다.
$299이라는, 아타리 2600과는 불과 $100밖에 차이나지 않은 다소 공격적인 가격으로 출시됐으며, 왜 단순히 비디오 게임기를 사냐는 도발적인 TV 광고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컴퓨터는 비디오 게임기들과 같이 게임도 할 수 있을 뿐더러 교육적인 기능도 할 수 있는 다목적 기기라는 내용이다. 광고를 위해 당시 인기 드라마 스타트렉의 주인공, 커크 선장 역할을 맡았던 주연 배우 윌리엄 샤트너까지 기용했다.
왜 비디오 게임기를 사냔 코모도어 VIC-20의 광고.
두 아이 다 훗날은 일자리를 구해야 될 것이란 코모도어 VIC-20의 광고.[12]
이 광고는 북미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2년만에 컴퓨터 역사상 최초로 100만 대나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듬해인 1982년에는 그 유명한 코모도어 64를 $595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출시했다. 코모도어 64 관련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코모도어 64가 출시한 해의 이듬해인 1983년이 되자마자 $399까지 인하해 더욱 거세게 가격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고, 4월이 되자 코모도어 VIC-20의 가격을 $99까지 인하했으며, 타사 컴퓨터나 비디오 게임기를 가져오는 조건으로 코모도어 64 구입자에게 $100 추가 할인해 주는 보상판매 프로모션을 실시했다. 6월에는 코모도어 64의 소매점 가격이 사실상 $200~$230까지 인하됐다. 이러한 코모도어의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13] 때문에 1993년까지 1700만 대가 팔려나가 북미 시장에서는 단일 기종으로 가장 많이 팔린 컴퓨터 기록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으며, 비디오 게임기 시장은 상대적으로 크게 움츠러드는 결과를 낳았다. 코모도어가 일으킨 치킨 게임은 비디오 게임기 시장에만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었다. Texas Instruments에서는 1983년 3분기에 막대한 적자 피해를 입고 가정용 컴퓨터 사업을 그만두었으며, 아타리도 아타리 400/800을 내놨다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콜레코 역시 콜레코 아담이 파산의 주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됐다. 심지어는 코모도어 64의 후속작인 코모도어 128과 그 이후 코모도어 가정용 컴퓨터 후속 모델의 판매에도 영향을 미쳐서 1985년 이후로 몇 번이나 생산 중단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이러한 무모한 물량 전술은 게임기 고르는 데 1주일, 다시 게임 고르는 데 1주일, 게임을 하는 데 1시간, 후회하고 욕하는 데 1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대해졌다.
3.4. 자폭 버튼을 누르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북미 게임계는 계속 성장 중이었고, 1982년에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막대한 성장이 모두의 눈을 가리게 했고, 아타리의 셀 수 없는 미스 사이에서도 중대한 미스를 불러들였다. 아타리에서는 급성장으로 수요예측을 감당하기 어려워 1981년 10월에 각 도매상에 1982년에 판매할 수량을 미리 주문시켰다. 그때는 아타리에서도, 증권가도, 소매상에서도 모두 성장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다들 미칠 듯한 물량을 써냈고, 그렇게 결정된 것이 팩맨 카트리지 1200만장이라는 주문량이다.1982년 3월에 아타리 전용 팩맨이 발매되었고, 무려 800만 장이 판매됐다. 하지만 4백만 개는 고스란히 남아 크나큰 부담이 되었고, 조악한 품질로 반품되어 돌아온 것들은 상황을 악화했다. 그럼에도 1982년 6월까지는 누구도 성장을 의심하지 않았고, 증권가 역시 최대 300% 성장이라는 분석안을 내놓아 장작을 쌓는 데 보태었다.
1982년에 북미 게임계는 최고전성기를 맞은듯이 보였지만, 비디오 게임기는 경쟁자의 범람과 더불어 저가격 가정용 퍼스널 컴퓨터와도 경쟁했다. 이는 결국 시장 포화로 이어졌고, 뒤늦게 우후죽순처럼 끼어든 서드파티들은 슬슬 탈락할 위기를 맞고 있었다.
결국 1982년 말부터 시장 붕괴의 신호탄이 쏘아졌다. 1982년 12월 8일의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서는 1982년 수익이 예상보다 훨씬 적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아타리 가정용 게임기 부서 부장에게 책임을 물어 해임했다. 이는 뉴욕 증권 시장에 쇼크로 이어져 모회사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주가 폭락을 촉발했다. 마텔, 콜레코 같은 경쟁사에서는 물론이고, 코모도어 같은 홈 컴퓨터 메이커에, 토이저러스 같은 유통 쪽까지 관련된 주식들은 모조리 곤두박질쳤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크리스마스 연말 대목을 대비해 만든 비장의 소프트 아타리 2600판 E.T.가 화려하게 망하면서 아타리는 또 다시 크나큰 손해를 입었다. 아타리의 판매 예상량은 400만 개였지만 팔린 것은 약 250만 개 정도였다. 사실 팩맨의 케이스와는 다르게 이 경우에는 영화의 흥행정도를 봤을 때 결코 무리한 예측이 아니었다. 게임이 쓰레기로만 안 나왔으면. 판매시기를 무리하게 앞당겨 겨우 5~6주만에 게임을 만들었고, 결국 참혹하게 망했다. 이는 당시 워너 커뮤니케이션즈 CEO인 스티브 로스의 탐욕에 따른 무리한 시도였고, 아타리 사장인 레이몬드 카사르 역시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이듬해인 1983년, 1982년 4분기와 연간 실적을 발표했는데, 1982년에 20억 달러의 매출액을 발표해, 1981년의 11억 달러 매출액에 비해 얼핏 고무적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982년 4분기 영업이익을 고작 120만 달러라 발표했다. 1981년 4분기의 영업이익 1억 3650만 달러에 비해 큰 폭으로 감소한 것이었다.
3.5. 1983~1985년, 북미 게임 시장 붕괴 후 2년
1973년 ~ 2013년, 2012년 기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미국 게임산업의 통계 (단위: 10억 달러)[14] |
1983년에도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는 여전히 팔렸다. 도표 참고. 하드웨어도 660만대나 팔렸고, 게임 카트리지는 오히려 1500만 개가 더 팔렸다. 콜레코비전을 만든 콜레코에서는 자신들의 기기는 별로 팔리지 않았지만 인텔리비전과 아타리에도 소프트를 공급해서 1983년 8월에 8백만 개의 소프트를 출하했다고 발표했을 정도다.
사실 이렇게 팔린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먼저 포화 상태가 된 시장에 늦게 뛰어든 얼치기들이 도산을 시작했다. 그 다음에 도산한 회사의 게임 카트리지를 반품도 못하고 둘 공간도 더 이상 없게 된 소매상들이 게임 덤핑 판매를 시작했다. 그래서 기존에는 가격이 30달러 남짓이었으나 보통 5달러, 심지어는 2달러까지 떨어졌다. 이어서 낮아진 가격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이 제 가격을 주고 게임을 사지 않게 됐다. 마치 번들 CD 경쟁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니 게임이 지난 해보다 1500만 개나 더 팔렸는데도 마진이 없으니 수익이 오히려 더 감소했다. 그리고 수익이 줄어든 개발사들은 정리해고 등으로 버티다 결국 줄도산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독특한 소비 문화 문제도 있다. 타깃 같은 대형 양판점들은 소비자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서 게임기를 반품한다고 하면 영수증이 없어도, 심지어 구성품이 없어도 그냥 반품을 받아줬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는 1990년대 넘어서까지도 계속되었고 그래서 미국에 SNES가 출시될 당시까지만 해도 몇 년이나 쓰고 구성물도 몇 개 빠진 NES를 환불받아 SNES를 사는 이용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상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미국에선 일어났고, 견디지 못한 닌텐도는 도소매상에게 '90일 환불 정책'을 내세워 상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15]
다만 이에 대해서 블랙 컨슈머는 소수일 뿐이고, 대부분 잘 모르거나 착각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 뿐이라는 미국 백화점 프랜차이즈 노드스트롬의 주장도 있다.# 지금의 미국은 소매점마다 환불 정책이 제각각인데, 어떤 소매점은 영수증을 요구하고 태그를 부착하긴 하지만, 영수증 없이도 환불해주는 일부 소매점들이 아직도 있다.(물론 영수증을 갖고 오지 않으면 환불에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또한 어떤 소매점들은 Price adjustment 제도나 Rebate[16] 제도를 통해 환불 남용을 억제한다. 전자는 최저 가격 보상 제도이고, 후자는 구매 제품을 일정 기간 사용 후 영수증을 제출하면 현금을 일부 돌려주는 제도이다. 또 어떤 소매점들은 환불해도 현금이 아닌 마켓 크레딧을 주기도 한다. 미국의 환불 정책은 까다로워지고 있는 게 추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타 국가들에 비해 매우 너그러운 편이며, 미국에 진출한 모든 기업은 이런 미국 특유의 너그러운 환불 문화에 익숙해졌다. 저 수많은 반품된 팩맨과 ET 카트리지의 수를 보실 것.
당시 최대 게임기 회사였던 아타리는 1983년 한 해에만 5억 3600만 달러 손실을 입었다. 1984년 1분기에는 손실 2800만 달러를,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자회사로 마지막 시기였던 2분기에는 손실 4억 2500만 달러를 입었다.[17] 1년 6개월 동안 무려 10억 달러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것이다.
결국 아타리의 경영난으로, 모기업이었던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에까지 영향을 끼쳤는데 1983년 말부터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의 적대적 인수합병 공격에 노출되었다. 대략 3개월간 분쟁 결과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는 루퍼트 머독이 사들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즈 지분을 1억 7260만 달러에 되사들이기로 했다. 이 때문에 루퍼트 머독은 4천만 달러 이득을 봤고,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는 그만큼 손해를 입었다.#
워너 커뮤니케이션즈의 CEO, 스티브 로스는 루퍼트 머독의 적대적 인수합병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아타리를 매각해야 한다고 이사회에 주장했다. 이듬해인 1984년부터 아타리를 아케이드 사업부였던 아타리 게임즈와 아타리 홈 컴퓨팅 & 게임기 사업부 그리고 비디오 전화기 사업부, 3등분으로 분할해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문서 최상단에 이미지로 인용된 기사가 이 소식을 다룬 것이다. 아타리 홈 컴퓨팅 & 게임기 사업부는 1984년 6월 2일 코모도어의 창업자 잭 트러멜이 코모도어를 퇴사하고 세운 트러멜 테크놀로지에게 2억 4천만 달러에 매각했으며, 비디오 전화기 사업부였던 아타리텔은 미쓰비시에 매각했다. 아타리 게임즈는 이듬해 1985년 남코에 매각됐다. 이후 아타리의 운명은 아타리 2.4번 항목을 참고.
당시 본업이 게임이 아니었지만 게임기 시장 2위였던, 인텔리비전을 개발한 마텔에서는 1983년 8월 마텔 일렉트로닉스를 대규모 구조조정 했음에도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1983년 한 해 동안 손실 3억 9400만 달러를 입고 이듬해 1984년 1월 20일 인텔리비전 생산을 중단하고 마텔 일렉트로닉스를 청산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기업인 마텔이 1984년 2월 4일, 파산 보호 제도 챕터 11을 법원에 신청해야 했다.# 이후 인텔리비전의 운명은 해당 문서를 참고.
3위였던 필립스는 마그나복스 오디세이2 후속 게임기의 북미 시장 출시를 포기하고 1983년에 유럽 시장에만 한정적으로 출시했다. 그러나 한정적인 수량만 생산 후 그마저 생산 중단해 버리고 이듬해인 1984년부터 게임기에서 가정용 퍼스널 컴퓨터 MSX로 종목을 변경했다.
콜레코비전으로 4위였던 콜레코는 가정용 컴퓨터 콜레코 아담 사업 실패와 겹쳐지면서, 1983년 743만 달러, 1984년에는 장난감 부문에서 2억 달러가 넘는 영업이익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총 7982만 달러 손실을 입었다.[18] 그로 인해 이듬해인 1985년 10월 19일 전자 기기 사업 자체를 철수했으나 1988년 7월 11일 파산 보호 제도 챕터 11을 법원에 신청해야 했다. 결국 1989년 6월 15일 해즈브로에게 8천 5백만 달러에 팔려나가는 신세가 됐다.
아타리의 첫 번째 서드파티 게임 소프트웨어 기업이었던 액티비전은 컴퓨터 게임으로 옮겨 목숨만은 겨우 부지했다.[19] 그러나 두 번째 서드파티 게임 소프트웨어 기업이었던 이매직(Imagic)은 원래 기업 공개하려는 목표가 있었지만, 쇼크의 여파로 1983년 9월 17일 170명의 종업원 중 40명을 정리해고 했다. 그랬는데 불구하고 결국 1985년은 파산했다.[20] 그 외에도 아타리에 참여하던 중소 게임 소프트 메이커가 거의 사라졌다.
그렇게 2년 동안 게임을 만들 사람도, 게임을 팔아주는 사람도, 또 게임을 제 값에 사주는 사람도 모두 잃었고, 북미 가정용 게임 산업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아케이드 게임도 비슷하게 하락세를 겪었으나 게임기 게임과 달리 처참하게 몰락하지는 않았다. 단 드래곤즈 레어만큼은 유일하게 특유의 안드로메다 그래픽으로 선보여서 히트를 기록했다.
3.6. 일본의 세계 게임시장 점령
1982년 ~ 2013년, 2012년 기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일본 게임산업의 통계. (단위: 10억 달러)[21] |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NES)의 북미 광고 |
닌텐도의 NES 동시 발매 게임인 슈퍼 마리오브라더스의 큰 인기로 NES의 성공을 넘어서 북미 비디오 게임 산업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덕에 미국에서 ‘닌텐도를 하다’는 말 그대로 ‘게임을 하다’라는 의미가 되었으며, 기존의 게임기 개발사들이 떠나간 탓에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가 나오기 전까지 미국의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한동안 닌텐도와 세가, 소니를 비롯한 일본 회사들에서 쥐고 있는 것과 같았다.
사실 닌텐도 자신도 서드파티를 만들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가[23], 남코의 패미컴 참여 사건[24]을 경험한 뒤 아타리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북미판 패미컴에는 하드웨어적으로 락아웃칩인 10NES칩을 도입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표면적으로 닌텐도에게 정식 라이선스를 받은 제품의 커버에는 Seal of Quality 표식을 붙이게 하는 등 서드파티 라이선스 관리와 카트리지 제조를 직접 관리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아타리 게임즈의 자회사였던 텐겐 게임즈와 EA[25] 같은 업체들로부터 제멋대로 하겠다는 도전을 모조리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반독점법 위반 혐의로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의 개입을 유발하게 됐다. 1991년 4월 FTC가 지적한 가혹한 라이선스 조항들을 제거하고 5달러의 게임 할인 쿠폰을 사용자들에게 지급하기로 합의하면서 종료됐다.
이러한 닌텐도의 플랫폼 비즈니스는 현대의 애플의 App Store나 스팀 같은 온라인 플랫폼 비즈니스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후 미국의 게임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한 동안 게임기보다 PC 게임 위주로 출시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질 좋은 게임을 낸 서드파티 제작사는 많이 남아 있었고, 또한 가정용 컴퓨터(Home Computer)의 개념으로 애플 2와 유럽시장 홈 PC의 제왕 코모도어 64 등의 8비트 PC가 보급되고 있던 때였다. 그 뒤를 이어서 16비트에서는 꾸준히 명성을 이어온 IBM은 물론, 코모도어에 이은 유럽시장의 강자 아미가도 선보였다. 이 아미가는 당대 IBM PC보다 약간 우월한 성능을 가졌기에 아미가로 나온 게임(주로 유럽시장을 대상으로 한 게임들)이 IBM PC로도 이식되는등 PC게임에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가교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접어들어 16비트 PC로 넘어가자 하드웨어 환경이 IBM PC 호환기종으로 통일되고, 어포지가 셰어웨어 게임 유통망 모델을 성공시키고 이드 소프트웨어가 둠 시리즈 혁명을 일으키면서 미국 PC게이밍 시장에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어쨌든 이들 서드파티 제작사들은 PC 환경으로 게임을 내놓으면서 미국의 자국산 게임들은 한 동안 게임기와 PC로 양분됐다. 이후 미국 게임 시장은 엑스박스가 나온 2000년대 초중반까지 PC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성장을 하였고, 게임기 게임들 못지 않은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다. 흔히 "미국 게임은 PC 위주, 일본 게임은 콘솔 위주"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된 것도 이 사건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4. 요약
- 아타리에서 1977년에 아타리 2600을 발매했지만 잘 팔리지 않았다.
- 아타리는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기점으로 1980년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 이윽고 비슷한 게임기와 홈 컴퓨터가 계속 발매되고, 수많은 회사[26]에서 똑같은 게임을 각 기종으로 발매하여 시장은 금방 포화상태가 되었고 소비자의 불만은 높아졌다.
- 아타리에서는 서드파티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으나, 통제할 수도 없었다.
- 게임 회사, 소매상, 증권 시장 등, 시장 참여자들의 낙관 속에 경영진들의 누적된 판단 실패로 회사의 재정을 맞추기 위해 게임 카트리지를 미친 듯이 찍어냈다.
- 공급 과잉으로 게임이 반품되고, 게임 제작사들이 망해 반품마저 안 되는 게임이 헐값으로 팔리자, 소비자들은 제값을 치르지 않게 되었다.
위에서 계속 설명했듯, 아타리 쇼크는 세간에 알려진 '소프트웨어의 질적 하락과 저질 게임 범람으로 인한 소비자 외면' 뿐 아니라 급속도로 성장한 시장을 통제하지 못하고 공급자 스스로가 자멸하게 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이후 일본의 세가 vs 닌텐도 혹은 vs 소니와 같은 양강 혹은 2~3강 체제가 아닌 아타리 이외에도 수많은 가정용 게임기가 넘쳐났고 덤으로 개인용 컴퓨터 시장과도 경쟁을 해야 했음에도 스스로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낙관만 하다가 큰 실수를 연발하게 된 것이 거대하게 터져버린 것이다.
위의 팩맨 주문건수와 같은 사례는 이후 일본에서도 쉽게 재현이 됐는데, 인기 소프트의 최신작이 발매된다고 했을 때 동네에 몇 군대씩이나 있는 작은 소매점에서 들어오는 주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모든 주문이 500만개 정도가 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나마 일본이 터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슈퍼)패미컴 소프트의 제조비가 부담스럽고 제조에도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주문이 들어오는대로 찍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고, 도매상이 소매상을 컨트롤 하기 위해 물건을 달라는 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 두 가지로 볼 수 있다.[27]
아타리 쇼크는 경제학 뿐만 아니라 경영학, 응용윤리학에도 큰 의미가 있다. 경제학에는 시장에 풀린 상품, 그것도 대체재가 풍부한 것들의 전체적인 품질이 지나치게 떨어지면 시장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아주 좋은 사례가 되어 주었고, 경영학과 응용윤리학에는 각각 '지속 가능한 경영'과 '윤리경영'의 경각심을 일깨워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16비트 시절까지는 게임 개발의 고정비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게임 산업은 고작 2~3명의 직원만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가져오는 꿈의 산업 정도로 인식되었을 정도. 지금처럼 500명 이상이 5년 이상 투입되어야 하는 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온전히 자신의 시장을 잘못 판단하고 1200만개나 물량을 찍어내는 판단(이는 1981년 총 판매량의 1/3 정도 해당되는 사항)이 정신나간 것이다.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
리뷰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아서 소비자의 판단을 흐렸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틀린 얘기이다. 왜냐하면 아타리의 성공으로 인해 1980년대부터 여러 비디오 게임지가 창간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컴퓨터 게이밍 월드'도 1981년에 창간되었다. 그러나 리뷰할 게임도, 게임 회사도 사라져 버린 바람에 1984년 즈음에 대다수의 게임 잡지가 폐간하게 됐다. 컴퓨터 게이밍 월드 1988년 8월호에 설립자 '러셀 사이프'가 이에 대한 회고록을 남겼는데, 1984년 겨울까지 몇 개의 잡지만 살아남았고, 1985년 여름에는 자신들이 발행했던 컴퓨터 게이밍 월드가 유일한 풀 컬러 게임 잡지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게임 잡지들은 비디오 게임이 인기를 끌면서부터 다양하게 발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제2의 아타리 쇼크의 가능성
F2P, 가챠, DLC 등에 비판적인 게이머들이 게임사들을 비판할 때, "머지않아 소비자들이 이런 저질 게임들에 질려 게임을 외면하고 게임 시장이 망할 것이다"라며 아타리 쇼크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2의 아타리 쇼크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고, 설령 일어난다고 가정하더라도 같은 국면으로 전개되진 않을 것이다. 2020년대의 게임시장은 아타리 쇼크가 일어났던 40여 년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타리 쇼크가 올 수 있었던 것은 아타리가 당시 게임 산업을 거의 독점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차라리 아일랜드 대기근[28] 같은 사례가 아타리 쇼크와 더 비슷한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게임 리뷰어들이 아타리 쇼크를 인용할 때, 아타리 쇼크의 전말을 단순히 "저질 게임의 범람과 그로 인한 소비자들의 외면" 정도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 아니다. 일례로 엔씨소프트가 리니지라이크 게임들을 양산하다가 주가가 폭락한 것을 아타리 쇼크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엔씨소프트는 아타리 쇼크 당시의 아타리는 커녕 오늘날 3대 콘솔 플랫폼 회사(마이크로소프트, 소니, 닌텐도)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일개 기업이 저질 상품을 만들다가 고꾸라지는 것은 비단 게임 시장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시장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 아타리 쇼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비디오 게임 업계가 지금과 비교하면 한 줌도 안 되는 소규모였고, 당시 게임산업 자체가 과대평가되던 신흥 산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아타리는 신기술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기업 같은 위상이었다.[29] 그래서 당시의 좁고, 혁신적이고, 실험적이었던 게임 업계 그 자체로 여겨지던 아타리가 실책을 저지르면 업계 전체가 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의 비디오 게임 시장은 당시의 아타리처럼 한 기업이 좌지우지하는 게 아닌 여러 게임 기업들이 춘추전국시대처럼 경쟁하는 구도 속에서 엄청나게 커지고 다양화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아타리 쇼크를 겪었던 시절부터 비디오 게임을 즐겨온 세대들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이제는 중장년층에까지 접어들게 되었다. 당시에는 비디오 게임이 실험적인 신생 산업으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 들어선 영화, 대중음악과 같은 주요 대중매체 중 하나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시장 규모만 따지면 영화와 음악 시장을 전부 합친 것의 2배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시장이 게임 시장이다.[30] "제2의 아타리 쇼크가 머지않아 일어날 것이다."라는 주장은 영화 시장에 비유하자면, "미국의 주요 영화사들[31]이 저질 영화를 양산한다면 영화 산업 전체가 붕괴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특정한 장르와 분야를 거의 반독점하고 있는 회사가 아타리처럼 궤멸한다고 해도, 시장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극히 일부분적 쇠퇴와 대체재의 등장만이 보일 뿐이다. 게임 산업 안에서도 50년 전에 비해 수천 배는 커진 규모를 생각하면 워낙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회사, 글로벌 거대 시장과 함께 수많은 안정적인 게임 소비층들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겪을 일은 없다. 다만 장르에 따라 소멸하는 장르와 새로 뜨는 장르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겠지만. - 당시의 게임산업은 아타리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구조였지만 지금의 게임 시장은 하나의 회사가 독식하는 구조가 아니다. 게임기 시장은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닌텐도, 마이크로소프트가 나눠먹고 있다. 퍼블리셔 쪽도 액티비전 블리자드, 일렉트로닉 아츠, 유비소프트, 테이크 투 인터랙티브 등 대형 퍼블리셔들이 나눠먹고 있다. 만약 한 곳에서 큰 실책을 저지른다 해도 이탈한 고객들을 다른 경쟁업체에서 흡수할 것이기에, 사실상 아타리 쇼크처럼 망할 수 없는 구조이다.
- 게다가 온라인 유통으로 인해 대형 퍼블리셔의 도움을 받지 않는 소규모 개발사들도 수도 없이 많다. 물론 이들 중 성공하는 사례는 드물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수작들이 다수 존재하며 수십만 장 이상을 판매한 사례도 여럿 등장하고 있다. 설령 대형 퍼블리셔들이 모두 망해서 AAA급 대작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단기간에 비디오 게임의 수요 자체가 크게 감소할 가능성은 낮으며, 여러 중소 게임사들을 통해 할 만한 게임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이들 중에서 새로운 대규모 개발사로 성장할 회사들이 나올 만큼 시장이 성숙화되어 있다.
- 게임의 유통과 수익구조도 아타리 쇼크 때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아타리는 유통비용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시장 상황을 판단하지 않은 채 무작정 하드웨어를 최대물량으로 찍어냈기에 아타리 쇼크 발생에 대비하지 못했다. 그래서 게임의 반품과 덤핑 판매로 매출이 서서히 줄었기에 망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스팀 같은 ESD의 발달로 비상식적인 덤핑 판매는 줄어들었고, ESD에서의 반품은 1980년대보다 깐깐해졌기에 '해보고 반품하기'가 힘들어졌다. 부분유료화 모델 역시 게임 수익 모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고, 그 중에서도 가챠, 랜덤박스 등의 확률형 콘텐츠는 아예 반품이 안 된다.
- 아타리는 게임기와 게임을 모두 공급하는 절대적인 공급자였지만, 지금의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게임 회사에서 공급되는 것이 아니며, 준 생필품이 되어 있는 상태이다. 설사 게임회사들이 동시에 갑자기 증발하여 게임 업계가 엎어진다 해도 컴퓨터 시장과 스마트폰 시장은 멀쩡히 있을 것이며, 게임 업계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다.
- '게임성이 좋아야 잘 팔린다'는 명제도 2010년대 들어서 부정되고 있다. 게임성이 별로여도 대중성과 IP를 이용해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많은 게임들이 증명하고 있다. 페이트 그랜드 오더, 리니지M 등의 게임들이 게임성이 별로라는 평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구급 매출을 자랑하고 있다. 게임 기업들이 대중성을 확보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 게임 개발의 방법론이 아타리 쇼크 당시에 비해 성숙해졌다. 주먹구구식 개발 위주였던 아타리 쇼크 당시와는 달리, 현재의 게임 개발은 다른 프로그램 개발과 마찬가지로 시장조사 등 기획 절차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더불어 모든 단계에서 품질 관리가 제대로 이뤄져야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 테트리스, 마리오 시리즈, 마인크래프트 등이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성공한 게임들로, 이들은 게임성을 갖춤과 동시에 그 자체로 거대한 IP 구성이 되었다. 당연히 팬덤도 자연스레 거대해졌기에, 해당 IP에 위기가 온다면 팬덤의 자문을 얻어 신작을 개발하거나 패치를 진행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중성에 의존하는 게임도 그러한 계획의 산물이다.
- 게임에 비판적이거나 적대적인 세력도 기능성 게임, 시리어스 게임을 통해서 포섭할 수 있다. 이들은 다른 게임들에 비해 악영향이 적다는 것이 이미 수 차례 증명된 바 있고, 학부모 및 학계의 수요가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를 이용해, 잘 만든 기능성 게임을 통해서 회사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게임 업계를 부활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 아타리 쇼크를 NES로 극복한 닌텐도가 바로 이 방법을 썼다.
5.1. 모바일 및 서구권 게임 질적 저하와 아타리 쇼크의 인과 관계 오해
2020년대에 들어 iOS, 안드로이드 플랫폼을 필두로 한 모바일 게임 업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새로운 기획 및 창의성이 없는 몰개성적인 양산형 게임, 혹은 데드 카피 (카피캣) 게임 난무
- 랜덤박스를 필두로 한 확률형 아이템 BM에 의존하여 사행성 및 과금 강요
- 무료 게임에 불쾌감을 주고 게임 이용에 크게 방해하는 저질 광고 범람
또한 서구권 게임계에도 출시되는 신규 게임들에 대한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면서 서구권 게임계 위기론이 거론될 만큼 사정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상술된 바와 같이 이전에 발발됐던 아타리 쇼크는 같은 게임 산업계에서 대체재가 마땅히 없어 시장이 붕괴되는 것이 문제였고, 현재는 특정 플랫폼이나 국가권에서의 게임 품질이 나쁘더라도 소비자가 얼마든지 다른 플랫폼[32]이나 국가권의 게임을 대체할 수 있어 시장 붕괴 문제가 형성되지 않기에 아타리 쇼크와 접점을 붙여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모바일 플랫폼에서의 게임 시장이 타락되는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전체 시장의 매출이 감소되지는 않기 때문에 각 게임 플랫폼에 대해서 시장이 변질되고 타락되는 문제에 대해서만 초점을 두어 개별적으로 비판의 시각을 바라봄이 필요하다.
6. 기타
- 아타리 쇼크와 비슷하게 1977년에 비디오 게임 산업이 붕괴된 사건이 있다. 미국에서는 아타리 쇼크인 North American Video game crash of 1983을 빗대 'Video game crash of 1977'으로도 부른다. 원인은 퐁 클론의 범람인데, 반도체 기술의 발전으로 1976년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에서 Pong-on-a-Chip이 개발되고 나서 너도 나도 퐁 클론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1977년 연말 상전부터 퐁 클론 판매 실적이 저조해지면서 이듬해인 1978년부터 대기업 RCA를 포함한 수많은 퐁 클론을 만들던 회사들이 게임기 만드는 것을 포기했다.
- 마그나복스는 퐁에 대한 저작권이 있었기 때문에 1974년부터 법정을 통해 저작권 행사를 시작했다. 또한 전자 대기업인 페어차일드에서 '채널 F'라는 최초의 롬 카트리지 타입 게임기가 공개되었다. 아타리와 마그나복스는 비디오 핀볼과 오디세이 4000 게임기로 퐁과 차별화되는 전용 게임기를 출시했고, 이어서 아타리 2600과 오디세이2로 카트리지 게임기를 만들어 내면서 버텨냈다. 1978년의 대형 히트 게임이었던 타이토의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아타리가 타이토와 계약을 맺고 아타리 2600에 이식해 1980년 1월에 출시하면서, 침체된 비디오 게임 산업이 부흥기를 맞았다.[33]
- 한편 아타리 쇼크 때문에 아케이드 게임장에도 사람이 빠지고 고수들만 남아 적자에 시달리자 난이도를 높여 회전률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기존에 오른손으로 조작하는 것이 기본인 조이스틱의 위치를 좌측으로 바꾸게 되었다는 썰이 존재한다. #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조이스틱, 듀얼쇼크, 경로의존성 참고.
- 웹툰 전자오락수호대에서 검은 금요일의 모티브가 되었다.
- 아타리 쇼크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아 오락실 산업 & 아케이드 게임이 쇠락하지 않은 평행세계를 다루는 대체역사물이자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인 아케이드 스피릿츠(Arcade Spirits)#가 있다. 인기가 많아 후속작 더 뉴 챌린저즈(The New Challengers)도 나온 상태.
- 의외의 사실일지도 모르겠지만, 1983년 10월 23일자 조선일보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보도한 적이 있다.
7. 관련 문서
- 관련 게임
- 악성 재고
- 닌텐도
- NES: 닌텐도의 미국 진출은 미국 게임계의 부활을 알리고 한동안 게임계는 닌텐도가 지배하게 되었다.
- 문화 지체
- 아타리
- 코모도어 64
- 대한민국 게임업계 연쇄 파동
- 서구권 게임계 위기론
8. 외부 링크
다음 링크들은 본 문서와 관련하여 읽을 만한 내용이 많다.- 아타리 쇼크 당시 CEO 레이 키사르의 인터뷰 내용[34]
- 하워드 스콧 인터뷰
- IGN 83년 비디오 게임 대붕괴의 10가지 사실
- 코모도어 64 영어 위키 1982~1983년 마케팅 전쟁 항목
- 任天堂文脈でのアタリショックと史実のアタリショック
- ATARI GAME OVER 일본판 제작자 인터뷰
- アタリショックの真実(1)「それは暴落から始まった」
- アタリショックの原因は「海賊ソフト」ではない
- 「アタリショック」の嘘と誤解
- 비디오 게임 역사(영문 위키)
- 아타리 쇼크에 대한 짤막한 다큐멘터리
[1] 1983년 북미 비디오 게임 시장 붕괴 사건. 주로 쓰는 명칭은 1983년 비디오 게임 시장 붕괴 사건이나, 일본과 같이 영향을 미치지 않은 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 용어를 쓸 때 위기가 크게 발생했던 북미 지역을 넣는다.[2] 애초에 영미권에서만 영향이었고 일본같은 아시아권에서는 영향이 없었다.[3] 일본 잡지이기 때문에 원래 발언이 무엇이었는지는 알수없다.[4] 서드파티제는 '사전검열'같은게 아니라 생산량을 통제하는데 의미가 더 크다. 당연히 닌텐도는 게임 내용에는 간섭하지 않았다.[5] 'In the U.S. and Europe, the event is usually referred to as “the 1983 video game crash”, or simply “the video game crash”, while in Japan it is referred to as “the Atari shock”' - Mirko Ernkvist, Down Many Times, but Still Playing the Game: Creative Destruction and Industry Crashes in the Early Video Game Industry 1971-1986[6] 1928년 1월 2일(뉴욕 브루클린)~2017년 12월 10일(플로리다 비로비치)[7] 처키치즈(Chuck E. Cheese)라는 프랜차이즈로, 피자를 주문한 후 조리 시간동안 오락실 게임을 하거나 애니매트로닉스 로봇들의 공연(2019년 이후 사라짐)을 관람하는 컨셉트의 사업모델을 갖추었다. 2020년 현재 시점에서도 현역이고 2017년 기준 전국 607곳의 매장을 두고 있다.(위키피디아 영문 문서/공식 사이트) 그리고 이걸 모티브로 만든 공포게임이 바로 FNaF 시리즈.[8] 그러나 1982년 연말 충격적인 실적 발표 직전, 주식을 5천 주를 매각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서 내부자 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이를 책임지고 사임했다.[9] 당시에 아타리의 <Adventure>(1979)를 만든 워렌 로비넷은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면 자기 이름이 나오는 이스터 에그를 만들었다고 한다. 미로 속 어딘가에 열쇠가 숨어있는데, 작은 회색 점 모양의 열쇠를 찾으면 자신의 이름을 몰래 숨겨둔 비밀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비디오 게임에서의 첫 번째 이스터 에그로 알려져 있다. 이 에피소드는 어니스트 클라인의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2011)에도 소개되어 있다.[10] 이에 대해 레이몬드 카사르는 훗날 비 게임 개발자 출신과 서부 사람들의 뉴욕 사람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확대생산된 유언비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주간 경제 잡지 포춘에 오프 더 레코드로 '신경질쟁이 프리마돈나'라고 말한 것이 실렸는데 이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말했다.[11] 간혹 한국 수입식품점이나 주한미군 PX 유출품으로도 볼 수 있는, 퀘이커교도의 얼굴이 새겨진 오트밀을 만드는 회사다.[12] 저 광고는 '대학교를 가야겠죠' 등의 여러가지 변형된 버전이 있다.[13] 이는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놓고 Texas Instruments 99/4A와의 경쟁도 원인이었다. 이는 그보다 10여년전인 1970년대 북미 전자 계산기 시장을 두고 코모도어에 대한 Texas Instruments의 가격 공세의 복수전이기도 했다.[14] 1982년 이후 급격히 그래프가 내려간 모습. (빨간색 선) 참고 자료[15] 이런 일을 도소매상들이 흔쾌히 벌인 이유는 바로 이런 사용자들이 대부분 충성고객들이기 때문이었다. 현재로 치면 하드코어 게이머, 고정 유저층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 이렇게나 관대하게 환불/반품 정책을 내세워도 어차피 이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신작, 새로운 게임기, 혹은 다른 종류라도 게임을 즐기는 고정된 시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상식적인 일이 일어났다.[16] 이런 리베이트 제도는 보통 소비자가 꼼꼼하게 챙기지 않으면 혜택을 받아먹기 어렵도록 설계되었다. 요즘 한국 TV홈쇼핑에서도 상품평 댓글을 달거나 버튼을 눌러 신청해야 적립금이나 사은품을 주도록 바뀐 것도 비슷한 맥락.[17] 특히 1984년 2분기의 어마어마한 손실은 악성재고를 특별손실로 반영한 결과이다. 참고로 아타리의 악성 재고 앨라모고도 사막 매립은 1983년 9월 26일에 있었던 일로, 그 이후로도 약 9개월 동안 거의 팔리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으니 산더미 같은 악성 재고가 되었을 것이다.[18] 1984년의 실적은 1985년 1월에 사업 철수한 콜레코의 가정용 퍼스널 컴퓨터 아담의 특별 손실 1억 1860만 달러가 반영된 결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레코비전은 2140만 달러 손실을 보았다. 이 결과는 1982년 4490만 달러 수익을 본 것에 비하면 상전벽해나 다름없다.[19] 그러나 필립스와의 퐁 특허 분쟁 관련, 1988년 연방 항소법원에서 660만 달러와 소송 비용을 필립스에 지급하라는 판결 때문에, 1991년 법원의 파산 보호 제도 챕터 11를 신청한 이력이 있다.[20] 이매직의 CEO, 브루스 데이비스는 파산한 해의 이듬해인 1986년까지 이매직을 정리하고 1987년은 액티비전의 CEO가 되었다.[21] 아타리 쇼크가 터진 1982년 이후 급격히 그래프가 올라간 모습. 이후 게임시장은 한동안 일본이 점령한다. 참고 자료[22] 마블 코믹스의 현 CCO인 조 케사다가 이때 상황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한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던 당시 안 팔린 게임팩 재고가 창고를 가득 채웠다고.[23] 패밀리컴퓨터문서 참고.[24] 남코가 패미컴을 리버스 엔지니어링 하여 자사의 아케이드 게임을 이식하고 닌텐도에 들고가 참여의 허가를 요구하게 되고 부랴부랴 서드파티 관련 조항을 만들게 된다.[25] 세가를 협박하는 데에는 성공하여 좋은 조건으로 라이선스 협약을 따낸다.[26] 게임 회사 뿐만 아니라 식품 회사나 유통 회사등.[27] 91년 당시 게임 유통, 특히 닌텐도 프랜차이즈 시스템과 관련된 참고 영상# 수백만엔이라는 큰 돈을 들여 프랜차이즈 가입하고 지정한 만큼의 공간을 확보하고 전용 인테리어까지 해야했지만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마저 팔리지도 않는데 물건은 계속해서 들어오고, 다른 판매점에서는 물량을 빨리 털기위해 아예 첫날부터 가격을 할인해서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28] 단, 이쪽 역시 독점보다는 영국 정부의 수탈과 정책 실패가 더 큰 이유다.[29] 비슷한 예를 들자면, 과거 스마트폰의 태동기 시절의 애플,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이 이루어지던 시절의 마이크로소프트, 전기차가 대중화되고 있는 상황의 테슬라 등이 있다.[30] 영화 시장은 게임 시장의 1/3도 안되고, 음악 시장은 게임 시장의 1/8에도 못미친다.[31] 워너 브라더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유니버설 픽처스, 파라마운트, 소니 픽처스 등.[32] 모바일 플랫폼에서 거치형 콘솔 플랫폼으로[33] 스페이스 인베이더의 아타리 2600 출시덕에 기존 판매량에서 무려 4배의 속도로 팔려나갔다.[34] E.T. 프로젝트에 반대했으며, 경영자로서 회사의 성장과 책임감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는 내용이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