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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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吳逵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불명. 양주 오흥군(吳興郡) 출신.
2. 생애
당시 양주에 기근이 들고 질병이 유행하여 부모를 비롯한 13명의 가족들이 사망하고 말았다. 오규 역시 병이 위독해 상을 치를 수 없었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아픈 오규를 대신해 사망한 가족의 시신들을 모두 삿자리로 말아서 땅에 대충 묻었다. 오규는 제대로 된 묘지를 만들고자 했지만 겨울에 입을 옷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했기에, 낮에는 그의 아내와 함께 일을 나가 품삯을 벌었고, 밤에는 산에 올라 장작을 패거나 벽돌을 구웠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산에 오르다 보니, 독충과 맹수를 만나 길을 잃기도 했으나, 1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7개의 묘와 3개의 관을 완성하였다.마을 사람들은 그런 오규 부부를 안쓰럽게 여기고 돈을 보태려 했지만 오규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오흥태수 장숭(張崇)은 재물을 보내 부부의 의로움을 표창했다. 이후 오규는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