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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0:02:03

지아코모 마이어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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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1E1B><colcolor=#fff> 지아코모 마이어베어[1]
Giacomo Meyerbeer
파일:Meyerbeer_d'après_P._Petit_b_1865.jpg
본명 야코브 리프만 베어
Jacob Liebmann Beer
출생 1791년 9월 5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탄스도르프
사망 1864년 5월 2일 (향년 72세)
프랑스 제2제국 파리
종교 유대교[2]
직업 작곡가
장르 오페라

Giacomo Meyerbeer

1. 개요2. 생애3. 작품 성향
3.1. 마이어베어의 그랑 오페라
4. 바그너와의 관계5. 작품
5.1. 오페라5.2. 기타
5.2.1. 합창5.2.2. 가곡5.2.3. 실내악5.2.4. 관현악&협주곡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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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페라 예언자 중 대관식 행진곡
독일오페라 작곡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특히 프랑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거대한 규모와 낭만적이고 극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그랑 오페라[3]를 주로 작곡했으며 19세기 초중반을 프랑스 그랑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의 오페라는 20세기 이후 한동안 오페라 레퍼토리에서 사라졌으며 마이어베어라는 이름은 바그너와 관련해서만 종종 언급되는 수준으로 잊혀졌다. 20세기 후반 마이어베어의 음악과 오페라가 재발굴, 재평가되고 있고, 현재 그의 대표작 위그노(Les Huguenots) 등은 이색 공연 수준을 넘어 오페라 악단의 레퍼토리가 되고 있다.

2. 생애

마이어베어는 1791년 독일 베를린 근교의 탄스도르프의 유대계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났을때 그의 이름은 야코브 리프만 베어(Jacob Liebmann Beer)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아 재능을 일찍 펼쳤고, 7살때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음악계에 데뷔했고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일찍이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에 대해 "음악가가 작곡을 못한다면 남의 음악만 연주해야 한다는 거잖아! 너도! 나도!"라고 생각해 피아니스트의 길을 버리고 작곡법을 배워 작곡가의 길을 걷는다.

그의 외할아버지이자 부유한 은행가였던 리버만 마이어 볼프(Liebermann Meyer Wulf)는 외손자가 음악 공부에 몰두하라고 30만 프랑을 후원해주고 자신의 사후에는 막대한 유산을 외손자에 남긴다고 선언했다. 대신 자신의 이름인 마이어(Meyer)를 외손자의 이름에 추가하라는 조건을 붙이는데, 이 제안을 받은 야코브 리프만 베어는 당연히 포풍개명을 하여 야코브 리프만 마이어-베어(Jacob Liebmann Meyer-Beer) 라는 이름을 갖는다.

21세였던 1812년 그의 첫 오페라인 '입다(체프타)의 맹세'[4]뮌헨에서 초연하였고 이후 한동안 오페라 작곡과 피아노 연주를 병행했다. 당시 그의 오페라들은 몇몇 음악인들의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크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다만 이 시기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눈에 들었는데, 그는 마이어베어에게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조언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공부를 할 것을 권유한다.

살리에리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는 이탈리아 작곡가들의 오페라를 연구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이 때 마이어베어는 이탈리아에서 젊은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한살 후배인 조아키노 로시니의 오페라에 매료되었으며, 로시니의 오페라를 롤모델로 삼아 '로밀다와 콘스탄차(Romilda e Costanza)'를 비롯한 몇개의 이탈리아어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 시기 그는 이탈리아에서 성공하기 위해 이름 '야코브'를 이탈리아식인 '자코모'로 개명했으며 언젠가부터는 성 마이어-베어도 하이픈을 없애버리고 그냥 마이어베어로 바꾸었다.[5]

1824년에 베네치아에서 상연했던 오페라 '이집트의 십자군(Il crociato in Egitto)'이 1825년 파리와 런던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파리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작품은 그의 출세작이자 최초로 마이어베어의 독창성이 제대로 드러난 작품이었는데, 이 오페라의 성공에 고무된 마이어베어는 아예 파리에 정착했으며 이후 죽을 때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파리에 정착한 직후 부친상, 결혼, 자식들의 요절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한동안 창작활동이 중단되었다. 몇 년의 침체기를 거친 후 1831년에 기존에 자신이 작곡했던 오페라와 상당히 다른 스타일의 오페라(즉, 그랑 오페라)인 '악마 로베르(Robert le diable)'를 발표했는데, 이 오페라가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두면서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하였다. 이어 '위그노교도'(1836), '슐레지엔의 진영'(1844),'예언자'(1849)를 연이어 발표하였으며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잇따른 성공을 통해 그랑 오페라의 대표주자가 된 마이어베어는 본격적으로 프랑스 오페라계의 거장으로 군림하였다.

마이어베어는 성공한 후 파리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지내고 있던 리하르트 바그너를 물심 양면으로 도와 주었으며 바그너가 자신의 오페라를 공연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바그너는 후에 배은망덕하게 마이어베어의 강력한 안티가 돼 버리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

마이어베어는 만년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864년 파리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작곡을 하였으며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아프리카의 여인'은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 유작이 된 아프리카의 여인은 벨기에의 작곡가인 프랑수아 조제프 페티스의 편집으로 1865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3. 작품 성향

마이어베어는 오페라로 큰 성공을 거둔 작곡가였다. 오페라 외에도 다수의 가곡과 합창곡 및 오라토리오, 모테트 등의 종교음악을 남겼으며 발레음악과 소수의 기악곡도 작곡했으나 자주 연주되지는 않으며 현재는 거의 오페라 작곡가로만 알려져 있다.

그의 오페라는 독일 오페라의 기악적 다채로움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선율미와 창법을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글룩 - 모차르트 - 베버 - 바그너로 이어지는 독일 오페라의 계보에서 베버와 바그너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공연되지 않은 작품과 미완성작을 포함 평생 19개의 오페라를 남겼으며 이 중 그에게 큰 명성을 안겨준 그랑 오페라는 유작인 아프리카의 여인을 포함 모두 4개이다.[6]

마이어베어는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을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는데, 그의 오페라 아리아를 들어보면 기본적으로 선율미가 매우 뛰어난 작곡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음향 효과를 높이기 위해 관현악에 다양한 관악기를 포함시키는 실험을 했는데, 특히 그의 오페라 '예언자'에서는 당시 새로운 악기였던 색소폰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또 후배인 바그너가 전폭적으로 사용한 '라이트모티브' 수법의 선구자가 바로 마이어베어이다. 그의 오페라 '위그노 교도들'에서는 신교도(위그노 교도)들이 등장할 때마다 루터교의 유명한 찬송가인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의 선율을 사용했는데 이 선율을 단독으로 사용하거나 다른 음악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면서 사건의 전개를 암시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이처럼 마이어베어의 음악은 나름 독창적인 측면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딱히 혁신적인 작곡가는 아니었다. 낭만파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법은 고전기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고 있다. 또한 그의 음악은 작법이 단순해서 구성적인 묘미가 많지 않으며 모차르트베토벤처럼 효과적으로 주제를 변화시키거나 곡을 전개하지도 않는다. 관현악도 금관악기를 많이 사용해서 웅장하고 화려하긴 하지만 수법 자체는 평범해서 눈여겨볼 점이 많지 않다.

요약하면 마이어베어는 시대를 앞서가기 보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에 좀더 충실한 작곡가였으며 한편으로 공연 예술에 대한 이해가 매우 뛰어난 작곡가였다. 전성기 시절의 마이어베어는 창작능력과 의욕이 정말 대단했는데, 오페라를 작곡할 때 지나칠 정도로 많은 곡을 작곡해 놓아서 실제 공연에서는 상당수의 곡을 생략해야 했을 정도였다. 슈베르트처럼 머리 속에서 멜로디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유형의 작곡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특히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독일에서)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는 '스케일만 크고 음악적으로는 속 빈 강정'이라거나 '음악보다는 화려한 효과와 연출에 치중하는 쇼'라는 악평을 받기도 했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가 이런 식으로 마이어베어를 깎아 내리는데 앞장섰는데, 바그너의 이런 비난은 마이어베어가 사후에 묻혀버린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자세한 것은 후술되는 항목 참조).

한편으로 마이어베어가 거둔 대중적 성공의 상당 부분이 그의 재력과 언론플레이 덕분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마이어베어는 상당히 언론친화적인 인물이었는데, 그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언론 관계자들에게 이런저런 로비를 했고 초연 하루 이틀 전에는 언론사의 중요한 인물들을 초대해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당연히 그의 오페라는 매체에서 호평 일색이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에 대해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마이어베어는 생전에는 불멸의 존재가 됐고 사후에도 얼마간은 기억될지도 모른다. 항상 돈을 먼저 주고 시작하거든" 이라고 조롱하기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 역시 "마이어베어가 막대한 재력과 대중의 취향에 잘 영합하는 능력으로 파리의 오페라를 지배하고 있는 탓에 다른 오페라가 성공하기 매우 어려운 풍토가 형성되어 버렸다. 안타깝게도 그가 죽은 후에도 이런 현상이 10년은 지속될 것 같다."고 비판했다.[7]

이처럼 바그너의 지속적인 디스와 언플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 때문에 사후의 마이어베어의 위상은 그냥 흘러간 인기 작곡가에 머무르는가 싶었는데...... 다행히 20세기 중반 이후 그의 작품은 재평가를 받고 다시 공연되기 시작했으며 21세기에 들어서자 그의 오페라는 간간히 공연되는 수준을 넘어 전체 오페라 레파토리에서 만만치 않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마이어베어의 많은 작품 중에 복권된 작품은 현재까지도 위그노, 예언자, 아프리카의 여인 등의 몇몇 대표작에 국한되어 있다. 또한 공연 방식도 마이어베어 당시와는 크게 달라졌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

3.1. 마이어베어의 그랑 오페라

그랑 오페라는 이름(Grand Opera) 그대로 규모가 매우 큰 오페라로 화려한 무대와 의상 및 장대한 스토리라인을 특징으로 하며[8] 발레와 춤, 곡예, 막간극 등이 포함되어 있는 종합양식의 무대극이다. 큰 규모에 걸맞게 음악도 상당히 화려하고 웅장하며 비주얼을 중시하기 때문에 화려한 연출이 가능한 행진곡과 춤곡 등의 부수음악의 비중이 높다.[9] 반면 레치타티보나 대사가 거의 없이 노래만으로 스토리를 진행한다. 공연시간도 상당히 길어서 대부분 5시간을 넘겼으며 심지어 8시간동안 공연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

역사상 최초의 그랑 오페라는 1828년 초연된 다니엘 오베르(Daniel-François-Esprit Auber, 1782-1871)의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La muette de Portici)를 꼽고 있으며 이 오페라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파리에서 본격 그랑 오페라의 시대가 열렸다.

마이어베어는 주로 신화나 전설속의 영웅 이야기, 큰 역사적 사건 등을 배경으로 해서 비극적인 결말, 화려한 무대효과, 발레 등의 볼거리 등을 결합시켜서 당시 프랑스 청중들의 기호에 딱 맞는 그랑 오페라를 창작했다. 그의 본격적인 성공작인 '악마 로베르'에서는 간음죄를 범하고 죽은 수녀들의 혼령이 등장해서 발레를 춘다. 또 '예언자' 초연 에서는 당시 프랑스의 롤러 스케이트 열풍을 반영한 스케이트 발레가 등장한다. 이처럼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는 당시의 유행과 기호를 반영한 다채로운 볼거리와 무대효과를 연출하고 있으며 이 덕분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후술되는 이유로 그랑 오페라의 유행이 지난 후 한동안 마이어베어(및 다른 작곡가들)의 그랑 오페라는 잊혀지게 된다.

설명을 들으면 바로 느낄 수 있겠지만 그랑 오페라를 제대로 공연하려면 막대한 제작비와 인력이 소요된다. 또한 공연을 할 때마다 무대장치와 내용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해서 변화하는 청중들의 기호에 맞추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그랑 오페라의 작곡가들은 기본적으로 공연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이나 인맥을 갖추고 있어야 했으며 그나마도 소수의 작품만을 남겼다. 그랑 오페라의 상징적인 존재인 마이어베어 조차도 평생동안 4곡(또는 5곡)만 남겼을 정도.

또한 극음악의 관점에서 보면 그랑 오페라는 극적인 요소가 많이 희생되는 문제가 있었다. 스토리와 직접 관련이 없는 볼거리의 비중을 높이다 보니 정작 극의 전개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스토리가 피상적으로 흐르기 쉬웠다. 극의 전개상 중요한 사건들이 휙휙 지나가거나 누군가의 전언으로 간단하게 처리되어 버렸고, 인물간의 갈등을 표현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다 보니 등장인물의 개성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10] 이로 인해 그랑 오페라의 관중들은 극 자체에 몰입하는 대신 다양한 볼거리를 즐기는 방향으로 감상의 촛점을 맞춰야 했다.

결국 그랑 오페라는 유행이 지나자 막대한 공연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무대에 자주 올리지 못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그랑 오페라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한물간 장르라는 인식이 굳어져 버렸다. 바그너나 베르디를 비롯해서 재능 있는 후배 오페라 작곡가들은 화려하고 볼거리가 넘치는 그랑 오페라 대신 좀더 오페라의 본질적인 요소(극적인 요소)에 충실한 작품 성향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어베어의 오페라가 재평가를 받고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현재에도 충분히 청중들에게 어필할만한 작품성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현재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및 다른 그랑 오페라)는 마이어베어 당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공연되고 있다. 극의 전개에 불필요한 발레나 막간 공연은 모두 생략되고 무대장치도 극의 전개에 필요한 수준으로 간소화시켰으며 철저하게 스토리 위주로 연출을 한다. 이로 인해 5시간이 넘었던 공연시간도 3시간 내외로 짧아졌다.

4. 바그너와의 관계

바그너는 출세하는 과정에서 마이어베어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며 음악적으로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바그너의 출세작인 리엔치의 공연이 성사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이 바로 마이어베어였다. 게다가 음악적으로도 이 리엔치는 한스 폰 뷜로가 '마이어베어 최고의 걸작 오페라'라고 농담을 했을 정도로 마이어베어의 스타일을 그대로 베낀 작품이었다. 리엔치 외에도 바그너의 오페라가 전반적으로 큰 스케일에 신화, 전설, 큰 역사적 사건 등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대사 없이 노래로만 극을 전개하는 것 역시 마이어베어가 그에게 물려준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바그너가 특유의 '라이트 모티브' 수법을 확립하는데 영감을 준 사람도 바로 마이어베어였다.

하지만 바그너는 오페라 탄호이저, 로엔그린를 발표하면서 음악적으로 마이어베어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나게 되며 이 때부터 바그너는 지인들에게 마이어베어의 작품들이 깊이가 없다거나 작품성보다 언플을 통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식의 비판을 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 시기에는 대놓고 마이어베어를 비난하지는 않았고 단지 편지나 사석에서 험담을 늘어놓는 수준이었다. 바그너가 확실하게 마이어베어의 안티로 돌아서게 된 것은 음악성향의 차이보다는 현실적인 이유(정확하게는 속물적인 이유) 때문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바그너가 1846년 마이어베어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이 때부터 마이어베어에 대한 적개심이 본격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바그너는 1849년 드레스덴 폭동에 참여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한동안 심한 생활고를 겪었는데, 이 때 프랑스에서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예언자'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마이어베어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결국 열폭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망명생활 동안 잡지사에 글을 기고해서 돈을 벌었는데 이 때부터 대놓고 마이어베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음악적인 측면에서의 비판이야 할 수 있지만 마이어베어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걸고 넘어졌다는게 문제였는데, 당시 그의 글에는 유대인 음악가들이 돈을 벌기 위해 대중들의 천박한 취향에 기꺼이 영합한다거나 이들이 독일 음악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등 지금 관점에서 보면 전혀 근거 없고 위험한 주장들이 난무했다.[11]

바그너는 본격적으로 명성을 얻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자 마이어베어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자신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그랑 오페라 스타일로 개작해서 1861년 파리에서 공연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로 인해 마이어베어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심해졌으며 얼마 후 마이어베어가 사망하자 그는 더욱 노골적으로 마이어베어를 비난했다. 그나마 마이어베어 생전에는 마이어베어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것을 가급적 피했고 가명으로 글을 쓰기도 했지만 마이어베어가 죽자 거침없이 마이어베어 지우기에 열을 올렸다. 나중에는 '마이어베어같은 유대인의 작품은 이 땅에서 말살을 시켜야 한다'와 같은 극언도 서슴치 않았을 정도.

결국 바그너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반대 급부로 마이어베어의 오페라의 입지는 줄어들었으며 공연횟수도 점점 바그너의 오페라에 밀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에 퍼지기 시작한 반 유대주의 경향이 마이어베어의 위상 하락을 가속화시켰다. 20세기에 들어서자 마이어베어의 본거지였던 파리에서조차 그의 오페라 공연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을 정도.

이처럼 마이어베어의 오페라가 '깊이 없는 음악' 또는 '돈 밝히는 음악'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몰락하게 된 데에는 바그너의 비난이 크게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의 오페라가 재평가된 현재에는 이런 식의 비난은 당연히 불식된 상황.

5. 작품

5.1. 오페라

굵은 글씨로 표기된 오페라들이 그랑 오페라이며 현재 주로 공연되는 작품들이다.

5.2. 기타

5.2.1. 합창

5.2.2. 가곡

5.2.3. 실내악

5.2.4. 관현악&협주곡

6. 여담




[1] 독일식으로 하면 기아코모가 정확하다.[2] 그의 무덤이 유대인 묘지에 있다.[3] 영어식으로 그랜드 오페라라고 하기도 한다. 이 문서에서도 그랑 오페라와 그랜드 오페라를 혼용해서 사용한다.[4] 정확하게는 처음으로 공연된 오페라이다. 입다의 맹세를 작곡하기 전 해인 1811년에 '제독, 또는 패소(敗訴)'라는 코믹 오페라를 작곡한 적이 있는데 공연되지는 않았다.[5] 이후 그는 평생동안 '자코모 마이어베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 이름은 현재까지도 통용되고 있다.[6] 다만 그의 출세작인 '이집트의 십자군'이 초연 당시에는 그랑 오페라가 아니었지만 이후에 계속 개정되면서 그랑 오페라 스타일로 공연되었기 때문에 이 오페라를 그랑 오페라 목록에 포함시키기도 한다.[7] 다만 베를리오즈의 이 비판은 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베를리오즈 역시 마이어베어처럼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기를 염원하고 있었는데 그가 야심차게 작곡한 오페라는 아쉽게도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베를리오즈는 그 이유를 마이어베어 탓으로 돌린 것인데,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베를리오즈의 오페라가 실패한 것은 당연히 마이어베어 때문은 아니었다.[8] 기본적으로 등장인물이 많고 부수인력도 상당히 많이 동원된다.[9] 그래서인지 그랑 오페라의 대표곡 상당수가 행진곡이나 춤곡이다.[10] 바그너를 비롯한 마이어베어의 반대파들이 이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11] 사실 음악 분야에서 유대인을 공격한 사람이 바그너가 처음은 아니었다. 바그너 외에도 유대인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음악계를 장악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로베르트 슈만도 오페라 '위그노 교도들'에 대해 기독교를 믿지도 않는 유대인이 인기를 얻기 위해 기독교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위선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다만 슈만은 유대인 작곡가였던 멘델스존과 친하게 지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바그너처럼 유대인 자체에 적개심을 가진 음악가는 아니었다.[12] 이 항목을 작성할 때 많이 인용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