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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10:27:47

조용훈

조용훈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57번
류상문
(2003~2005)
조용훈
(2006~2007)
팀 해체
{{{#fff [[우리 히어로즈|우리]]/[[서울 히어로즈|서울]]/[[넥센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57번}}}
팀 창단 조용훈
(2008~2009)
박성훈
(2010)
이희성
(2011)
조용훈
(2012)
하해웅
(2013)
{{{#fff [[넥센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33번}}}
강병식
(2010~2012)
조용훈
(2013)
유재신
(2014~2017.7.30.)
{{{#fff [[넥센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57번}}}
하해웅
(2013)
조용훈
(2014)
송성문
(2015)
}}} ||
파일:tAEcAku.jpg
조용훈
趙用勳|Cho Yong-Hun
출생 1987년 10월 29일 ([age(1987-10-29)]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화곡초 - 성남중 - 성남고
신체 183cm|91kg|B형
포지션 투수
투타 우사좌타
프로 입단 2006년 2차 4라운드 (전체 32번, 현대)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 (2006~2007)
우리-서울-넥센 히어로즈 (2008~2014)
병역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9년 11월 30일~2011년 9월 21일)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4. 연도별 주요 성적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2. 선수 경력

파일:attachment/조용훈/3731180467_7c9fa70b_07EC9AA9ED9B84EB8B88.gif

성남고를 졸업하고 2006년 현대 유니콘스의 2차 4라운드(전체 32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2006년 현대가 얻은 희대의 대박 드래프트 중 한 축을 담당하는 선수다.[1] 2군에서 1년 담금질을 거친[2] 후, 2007년부터 본격적인 1군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부상으로 인해 주춤한 박준수를 대신해 팀의 주축 사이드암 계투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계투로서 맹활약하면서 한 때 유력한 신인왕 후보로 꼽히기도 했지만, 7~8월에 팀이 꼬라박으면서 결국 신인왕은 두산의 1년차 금지어에게 돌아갔다. 대신 언론사에서 주최하는 야구대상에서 신인상을 타기는 했지만. 이 당시 성적은 4승 7패 9세이브(9위) 15홀드(7위). 평균자책점은 3.21. 문제는 당시 조용훈은 73경기(2위)에 출장해 81이닝이나 던졌다는 것이다. 이 혹사로 인해 조용훈의 선수 생명은 사실상 끝이 난다. 박명환야구TV 출연분에 따르면 이해 이렇게 구르고도 하필 구단이 현대에서 히어로즈로 바뀌었고 당시 사기꾼 사장인 이장석호텔장인 단장인 박노준이 연봉을 후려치는 바람에 빡빡 우겨서[3] 연봉 4천에 재계약[4]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흑역사로, 2007년 8월 22일 3-5로 리드를 잡던 상황에서 최동수에게 본인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 100안타를 기록하는 안타를 허용한 적이 있는데, 이게 끝내기 만루홈런이었다. 결국엔 그 해의 허용투수 등극.

2007년 무리한 덕에 그 뒤로 큰 폭의 발전은 이루지 못한 채, 그냥 저냥 하는 중간계투 정도로만 활약했다. 2009 시즌을 마치고 상무에 입대했다. 박준수의 재기와 마정길의 합류가 아니었다면 팀의 사이드암 계투진은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2011년 말 제대했지만, 2012년 내내 팔꿈치 문제로 1군에 올라오지 못하고 재활에만 매진했다. 사실 상무에서도 팔꿈치 문제가 있어 수술을 받고 전출되었다.[5]

2013 시즌 애리조나 스프링캠프 명단에도 빠졌고, 퓨처스리그에서만 뛰었다. 몸 상태로 인해 별로 경기에 나서지도 못했다. 하지만 시즌 후 마무리 캠프 명단에 포함되었다. 야구대제전에 참가했다. 모교인 성남고는 결승에서 광주동성고에 패배했다.

이후 2군에서 1시즌을 더 보내고 임의탈퇴 공시됐다. 사유는 재활 목적인 듯. 이후 kt wiz 입단테스트를 봤으나 입단이 무산되고 그대로 은퇴했다.

3. 은퇴 후

박명환의 유튜브 방송인 박명환야구TV[6]에 출연하여 말하길 보험회사, 호스트바, 렌트카 회사, 매티스 야구팀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나 전부다 그만두고 나왔다. 본인말로는 남 밑에서 일할수 없는 성격이라고 한다.

'조용훈처럼'이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서 인터넷 방송인으로 활동 중이다. 그러나 야구와 관련된 건전한 방송은 아니고 행인이나 자영업자 상대로 어그로를 끼치는 영상, 웃통을 벗은 채로 방바닥에 와불처럼 누워서 멍한 표정으로 후원을 요구하는 방송을 하고 있다.

옛 팀 후배인 박동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박동원이 구단 유튜브 촬영을 하고 있어서 거절했다.[7] 선배인 김병현은 4분가량 전화를 받아주며 유튜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튜브보단 야구선수 출신이니 본업으로 아카데미를 열거나 유소년 코치를 하거나 유튜브를 할 거면 다른 야구선수 출신 유튜버들과 함께 야구관련 유튜브를 하라는 유익한 조언을 해줬다.[8] 그러나 후술할 일본 민폐 사건이 터진 것을 보면 안타깝게도 김병현의 진심 어린 조언이 통하지 않은 모양이다.

2023년 11월 일본에가서 음주 상태에서 웃통을 까고 일본인들에게 시비를 걸고 길거리에서 독도는 내땅이라고 외치는 영상이 뉴스에 나왔다. 당연히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이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사과를 했지만 반응은 냉담한 편.#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2006 현대 1군 기록 없음
2007 73 81⅓ 4 7 9 15 3.21 65 5 28 6 52 1.1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2008 우리 52 56 1 6 1 6 3.54 55 2 20 9 34 1.34
2009 히어로즈 25 24⅓ 1 0 0 1 4.44 24 2 11 4 24 1.44
2010 넥센 군 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2011
2012 1군 기록 없음
2013
2014
KBO 통산
(3시즌)
150 161⅔ 6 13 10 22 3.51 144 9 59 19 110 1.26

5. 여담

마운드에서 집중타를 맞고 강판되면[11] 덕아웃에서 오른쪽 주먹으로 벤치를 쿵쿵 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중얼거린다. "네가 감히 내 공을 쳐? 내 공을 쳤단 말이야? 내 공을 치다니!" 그럴 때면 같은 팀 동료들도 그 곁에 가지 못한다.

6. 관련 문서


[1] 당시 현대는 강정호, 김영민, 황재균, 유선정, 유재신, 신현철을 이 드래프트에서 모두 뽑았다. 그리고 이 선수들은 2017년 김세현과 유재신이 트레이드로 KIA로 이적한 걸 끝으로 모두 팀에서 사라졌다. 2023년 기준으로 현역은 황재균 뿐이다.[2] 유일하게 강정호만 1군에서 데뷔를 하고 나머지 멤버들은 전부 2군에 있었다. 번외로 신고선수로 들어온 이가 있는데 정훈도 이 해에 2군에서 시작했다. 다만 시즌 후 방출되었고 이후 롯데에 입단했다.[3]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이장석이 플로리다 말린스의 시스템과 탬파베이 레이스의 시스템을 섞어서 구단을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한 적이 있는데 고액연봉자들은 대부분 깎고 저연봉자들은 소폭 상승시키는 다소 엉뚱한 행보를 보며 실천을 했다는 거다.[4] 이 시즌 신인 연봉이 2천만원이었다. 임태훈은 시즌 후 연봉 고과율에서 4천만원 상승인 6천만원 재계약.[5] 박명환야구TV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같이 입대한 롯데 포수 출신인 이동훈에게 맞아 고막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동훈은 이후 동해지역 부대에 일반병으로 전출됐다고 한다.[6] 조용훈 출연편은 현재 삭제됐다.[7] 시청자들은 조용훈과 엮이지 않는 박동원의 대처가 매우 현명했다며 박동원을 칭찬하는 여론이 많다.[8] 유튜브는 천년만년 할 것이 아니니 절대 본업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도 했다. 짜증 하나 안내고 웃으면서 잘 받아주었다.[9] 싸이에 '수정과 같애' 라는 말을 쓴 것에서 비롯됐다.[10] 이에 관련된 정확한 내막은 박명환야구TV 야구썰전 35화에 자세히 나왔다.[11] 참고로 이때 집중타를 때린 타자는 박경완으로 3연타석 홈런을 조용훈을 상대로 때렸다.[12] 어찌저찌 2천만원 인상까지 받아냈고 4천만원이 되었고 2008년 당시 팀의 암울한 성적으로 조금이나마 +@로 1100만원이 더 오른 2009년 연봉은 5500만원까지 상승했다. 단, 이 2년 간 조용훈의 개인성적은 조금 부진했다.[13] 2007년 임태훈은 신인상을 수상했고 2위는 조용훈이었다. 임태훈 이후로 순수 고졸 1년 풀타임 신인 선수가 신인상을 받기까지는 무려 10년이나 걸렸고 투수로는 12년이나 걸렸다.[14] 당시에는 개명 전이라 본명이 김영민이었다.[15] 공중파 프로그램인 나 혼자 산다에 출연했는데 시청자들은 조용훈의 말이 맞네라는 평이었다.[16] 조용훈이 1군 생활을 한 적이 있을때이므로 2007~2009년 사이이다. 이 사건 이후에 경기장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안지만이 증언했기 때문.[17] 안지만은 그자리에 없었고, 그자리에 있던 장원삼에게 바로 다음날 전말을 들어서 식겁했다고 한다.[18] 실제로 전주 월드컵파인지는 불명이다. 다만 안믿는 사람이 대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