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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9 21:04:31

조원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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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입문 전2. 정치 입문

1. 정치 입문 전

1959년 음력 1월 7일(양력 2월 14일), 경상북도 대구시 원대동(현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종로초등학교, 협성중학교 졸업 후 청구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재학 중에 상경하여 인창고등학교에 전학해 졸업했다. 이후 한국외국어대학교 법정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1980년 7월 8일 육군에 입대하여 1983년 3월 17일 하사로 만기전역하였다. 이후 복학하여 교내 예비역청년협회장에 취임했고, 학생운동에 앞장서서 당시 총장이던 황병태의 퇴진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2. 정치 입문

총장직에서 물러난 황병태가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에 참여할 때 자신의 반대 진영에 섰던 조원진을 불러들여 그도 통일민주당 당원이 되었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황병태가 출마하면서 국회의원 입법보좌관(4급 상당)이 되었다.[1] 그러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황병태낙선하자 정계를 잠시 떠났다.

이후 1993년 황병태의 주선으로 김우중[2]을 알게 되어 대우그룹에 채용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병태가 문민정부에서 주중대사로 발령받자 그 또한 대우그룹 중국기획조사부장에 발령되어 34살의 나이로 최연소 대우그룹 부장에 오르는 한편, 베이징시 주재원으로서 중국에 진출했다. 1996년에 대우그룹을 퇴사한 후 먼저 귀국해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 중이던 황병태의 신한국당 캠프에 보좌관으로 다시 합류했다. 하지만 황병태가 1997년 한보사태에 휘말려 의원직을 상실하자, 조원진은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이인제가 이끌던 국민신당에도 가담해서 대구 수성구 갑 지구당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던 1998년 7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국민신당을 탈당하고[3] 무소속 후보로 대구광역시 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면서 처음 선거 경력을 시작했다. 이때는 한나라당 박승국 후보에 밀려 4위로 낙선했다. 1999년 영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책분석학과에서 정책분석 전공으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년 후인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다시 무소속 후보로 대구광역시 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또 다시 한나라당 박승국 후보에 밀려 4위로 낙선했다. 이 때까지는 극우 성향은 아니었고, 오히려 학생운동에 참가하던 민주계 출신인 만큼 개혁 성향에 가까웠다. 낙선 후 중국 베이징으로 다시 건너가 개인사업을 하는 한편, 재중국한인회 부회장 겸 세계한인무역인협회(OKTA) 베이징(北京)지부 회장을 지내면서 정치와는 거리를 뒀다.

그렇게 8년간 소식이 없던 조원진은 2008년에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불과 열흘 전에 입국하여 친박연대 소속으로 대구광역시 달서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유재한 후보를 불과 808표(1.51%p)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회동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사실 조원진이 대구광역시 출신이기는 하지만, 달서구와는 정치적 기반이고 연고고 아무것도 없었고, 정치 경력도 상대 유재한은 주택금융공사 사장 출신인 반면 조원진 본인은 두 차례의 국회의원 출마와 중국에서의 소규모 기업 경영이 경력의 전부였다. 더군다나 친박연대에서 해당 지역에 송영선의 출마를 검토하는 바람에[4] 실제 출마 여부도 선거 등록 당일에서야 결정되는 등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도 이 당시 선거에서 불었던 친박 바람에 힘입어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 때 이후로 3선 의원이 되는 동안 내내 쭉 친박 세력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YS계 황병태의 비서이던 그가 어떻게 박근혜와 연결되어 갑자기 공천을 받을 수 있었는지는 명쾌히 알려진 바가 없다.[5] 이후 제18대 국회에서 환경노동위원회 간사를 맡았고,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 과정에서 추미애 위원장 중재안을 통과시키느라 야당 의원과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4년 후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다시 새누리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서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통합당 김철용 후보를 49.55%p 차이로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퇴진하고 정책위의장이던 원유철 원내대표 체제가 새롭게 출범한 2015년 7월에 새누리당의 원내수석부대표 겸 국회운영위원회 간사에 취임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와의 대립 과정에서 최경환경제부총리와 함께 ‘진박(眞朴) 감별사’를 자처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다시 새누리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서구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조석원 후보를 42.26%p 차이로 꺾고 3선에 성공했다. 원 구성을 하면서 같은 당 소속인 신상진 의원[6]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1년씩 나눠서 맡기로 했다.[7] 그리고 같은 해 8월 9일 실시된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남경필경기도지사가 2016년 12월 탄핵국면에 폭로한 9명의 친박 의원 모임의 일원이다. # 이른바 진박 9인회.[8] 최씨 일가와 문고리 3인방 등이 사라져 생긴 박근혜정부의 권력 공백을 2016년 10월 25일 1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날부터 이들이 메우고 지원하고 있다. 서청원, 최경환, 윤상현을 축으로 정갑윤, 원유철, 정우택, 홍문종, 유기준, 조원진이 포진하고 있다. 매일 작전회의를 하여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전해준다고 하였다. 정황상 탄핵 정국에 혼란을 야기하였던 제3차 대국민 담화도 이들의 전략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국회의원들 중 가장 먼저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16명에 속했다.[9]

2.1. 제19대 대통령 선거

2017년 4월 8일 탄핵반대 집회에서 자유한국당 탈당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바로 새누리당에 입당하였으며 새누리당의 대선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조원진의 대선출마에 대한 여론은 꽤 싸늘하다. 심지어 극우 신문인 뉴스타운마저 조원진의 대선출마를 대차게 까고 있는 실정이다.[10] 그의 대선출마로 인해 보수진영은 또 한 번의 분열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두 갈래로 갈라져버린 상황에서 자유한국당보다 더 극우인 새누리당이 등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국가정보원장남재준 역시 출마함에 따라 보수표도 성향에 따라 강성 친박극우 표인 조원진과 남재준[11], 비박과 온건친박의 보수 표인 홍준표, 비박 또는 반박의 중도보수 표인 유승민과 강성 친이이재오 이렇게 다섯 갈래로 갈려져버리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박근혜 즉각 석방, 박근혜 탄핵 주동자 심판, 언론에 대한 강력한 제재, 5.18유공자 전수조사, 동성애 금지(반동성애법 제정), 박근혜 정부에서 개발한 역사 국정교과서 의무화[12], 세월호 관련 조사 중단 및 금지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13] 여론조사 지지율은 1% 안팎이다.

2017년 4월 24일 열린 19대 대선 비초청 후보 토론회에서는 김선동 민중연합당 후보에게 종북몰이색깔론을 들이대다가 '철 지난 메뚜기'란 조롱을 들었다. 기사 1 기사 2 나머지 후보들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이 비초청후보 토론의 최대 승자는 이재오 후보라는 게 중론이다.[14]

19대 대선 선거송으로 유명 동요인 곰 세 마리를 각색하여 쓰고 있다. 그 외에도 실제로 곰을 닮은 외모를 의식해서인지 19대 대선 후보 중 유일하게 캐릭터를 내세워 홍보했다.

파일:external/blogfiles1.naver.net/2b6975968e63b0d968b4ae60a55438fe.jpg

심지어는 선거 현수막에 공약이 아니라 "박근혜를 석방하라!"라는 문구로 박근혜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선거 1주 전가량 바른정당에서 보수 단일화를 요구하며 15명의 국회의원이[15] 탈당하고 자유한국당에 복당하려 하자 '자유한국당도 탄핵 주역에 배신자이다'라 비난하며 홍준표와의 단일화 협상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다 홍준표 후보 측의 댓글부대 운용 의혹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기사

투표 당일인 5월 9일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넣은 현수막이 등장했다.

한국갤럽이 조사한 조원진 후보의 예상 득표율은 0.3%라고 한다. # 1%도 못 넘은 예상 득표율이지만 그나마 원외정당 후보들보단 높은 수치이다.

개표 결과, 42,949표(0.13%)를 획득해 6위로 낙선이 확정되었다. 이는 5위를 한 심상정의 약 47분의 1 정도 되는 득표 수이다. 당초 박근혜 탄핵에 반대했던 유권자들의 대거 지지를 기대했으나 예상 득표율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초라한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대부분의 탄핵 반대자들이 좀 더 당선 가능성이 높은 홍준표에게 투표했으며 보수후보의 재집권이 어려워지자 박사모 등 극렬 새누리 지지자들도 일부는 홍준표에게 투표한 것으로 보인다.[16] 이 정도면 확실히 정치 약체이며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주낙영이 경주시장 선거에서 얻은 47,656표보다 4,707표를 적게 받았다. 참고로 주낙영은 당선되었다. 이렇게 조원진은 무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시장, 그것도 군소 시장에 출마한 후보보다 표를 더욱 적게 받을 정도로 처참한 결과를 냈다. 심지어 "무공약이 공약"이라던 대선 후보 14대 대선에서의 김옥선(86,292, 0.36%)보다도 절반 정도밖에 표를 받지 못하는 굴욕도 달성했다.

여담이지만 5월 7일 eUnited 팀의 팬미팅 때 옆에서 유세를 하고 있었는데 해리슨 폰드를 보러온 학생들이 자신들을 도우러 온 것이라며 주장을 하다가 빈축을 사기도 했다.

2017년 6월 1일 새누리당에서 13개월 당원권 정지를 당했다. # 그리고 15일 뒤인 6월 16일, 공식적으로 제명 처리되었다고 한다. # 하지만, 정당법 33조[17]에는 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제명처리가 진행되지 않는다. 소속 의원의 1/3의 동의가 필요한데 소속 의원이 자기 자신뿐이라 애초에 성립이 안 되기 때문이다.

2.2. 대한애국당/우리공화당 시절

2017년 6월 30일, 신당 창당을 결의했다고 한다. 그 해 8월 30일, 대한애국당을 공식 창당했다. 이후 똑같은 친박계 4선 중진인 홍문종 의원을 영입하여 우리공화당으로 당을 확대 개편하였으나, 당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고, 다시 홍문종계가 이탈했다.[18] 이후 김문수계와 8선의 서청원 의원을 영입하면서 자유공화당으로 개편하였으나, 이 쪽도 다시 김문수계가 이탈하면서 도로 우리공화당으로 돌아갔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신의 원 지역구인 대구광역시 달서구 병 선거구 출마를 확정지었다. 하지만 대구에서조차 강성 친박[19]은 부담스러웠는지 미래통합당 김용판 후보에게 크게 밀려 4선 연임에는 실패했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 김대진 후보의 득표율(27.61%)보다도 낮은 15.08%(12,707표)의 득표율을 올리는 데 그쳤다.[20] 그나마 간발의 차이로 선거 비용과 기탁금 전액을 보전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보수의 텃밭이다 못해 성지이자 더불어민주당의 지옥대구광역시 지역구에서조차 더불어민주당에서 나온 후보보다도 더 적은 표를 받는 바람에 조원진은 이제 선거 경쟁력을 아예 완벽히 상실해버렸음을 만천하에 입증하고 말았다, 나중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 기성 빅텐트 보수정당으로 복귀하여 출마한다면 모를까 나중에 또 극우 성향 소수정당 후보로 출마한다면 21대 총선과 똑같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매우 높다.

2020년 7월 6일, 우리공화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

2.2.1. 박근혜 사면

대선이 75일쯤 남은 시점에 2021년 12월 31일 자로 박근혜의 사면이 결정되자 우리가 승리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내곡동 자택이 수감 중 경매로 넘어가 거처가 없어진 박근혜를 대구로 모시겠다고 하고 있다. 박근혜를 잡아넣은 윤석열에 대해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

2022년 2월 12일에는 반윤이라는 공통 기치하친민주당계 유튜버시사타파 TV에 출연했다. #

2.3. 제20대 대통령 선거

"잘못된 탄핵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면서 20대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 #

2022년 2월 22일에 열린 비초청 후보 토론회에 김동연과 함께 불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석방되어서인지 선거홍보물에는 박근혜와 악수한 사진을 제외하고는 관련 언급이 없이 양당 비판과 공약 위주로 올라왔다.

결과는 총 25,972표(0.07%)를 얻어 6위로 낙선하였는데 순위상으로는 지난 선거였던 제19대 대통령선거와 동일하지만 해당 선거에서 얻은 42,949표(0.13%)보다 못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거기다 박근혜 정부가 해산시켰던 통합진보당 출신 김재연한테 37,366표(0.11%)에 밀렸다는 결과에 우리공화당 안팎에선 지지자들이 심한 충격과 논란에 휩싸였다.[21]

2022년 3월 10일 우리공화당 선대위 해단식에서 대선에 대한 결과에 책임지고 조원진은 정계은퇴를 시사했고 이에 조원진 지지자들은 적극 만류하고 있다. # 하지만, 이후 행보를 보면 고심 끝에 은퇴를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정계은퇴 시사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언론사는 커녕 제2, 3 언론사로도 취급받지 못하는 매우 작은 언론사에 기사 몇줄 난 것으로 보아 정당의 영향력은 커녕 조원진이라는 정치인의 영향력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

놀랍게도 이재명, 윤석열 마저 제치고 가장 많은 대선후원금을 모은 것으로 밝혀졌다. 25억 6500만원이다.# 이 보도에 대해 화난 모양인지 '대한민국의 선거 역사에서 처음으로 100% 순수 자원봉사자들의 자원봉사와 순수한 민초들의 후원금만으로 선거를 치렀다'고 했다. #

2.4. 20대 대선 이후

말 그대로 박근혜의 충신 그 자체로 변희재[22]와 반윤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23] 이 때문에 윤석열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계속 쏟아내면서도 예전과 달리 비교적 논리적으로 비판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보수정당 지지자들의 문재인 사저 집회에 맞불을 놓겠다고 서울의소리에서 박근혜 사저에 집회 신청을 하자 전화를 걸어 문재인 사저 시위자들은 친박이 아닌 친윤이라며 집회를 철회하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박근혜 사저 앞에서 하지 말라고 했지 윤석열 사저 및 집무실 앞에서 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 했다는 것이다. 결국 서울의소리는 진짜로 집회 장소를 서초 아크로비스타 앞으로 옮겼다. 우리공화당 측에서는 그렇게 먼저 전화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지만, 진실은 저 둘만 알 것이다. 본디 둘이 서로 으르렁거릴 정도로 적대 관계인 것을 고려할 때[24] 이러한 둘의 행보를 보면 조원진 입장에서도 어지간히도 윤석열이 싫은 모양이다.[25]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우리공화당 후보들의 선거를 도왔다. 서산시 서태모 후보 등(#)의 개소식에 참가하기까지 했지마 결과는 전원 낙선.

2022년 8월 27일 일산 킨텍스에서 개최된 우리공화당 제3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한근형 후보를 꺾고 대표로 선출되었다.

2022년 8월 이후 여러 시사 프로그램이나 뉴스의 패널로 출현하였다. 보수 성향이기는 하지만 무조건 친 국민의힘 성향보다는 객관적인 제3자의 측면에서 평가하고 있는 모습이 평론가로서의 장점이라는 평을 받았다.

2023년 1월 12일 2019년 광화문광장 불법 천막을 철거하는 데 반발해 서울시 공무원과 용역업체 직원을 폭행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아 1심에서 징역 1년2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조원진 대표의 주도 아래 당원 등 200여명이 모여 서울시의 행정대집행을 방해했고, 이 과정에서 공무원들을 폭행했다며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조원진은 이 사건 당시 현직 국회의원이면서도 적법한 절차를 준수하지 않는 등 공권력을 경시하는 모습을 보였고, 법정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반성하지 않는 등 범행 후의 태도도 좋지 않다"고 질타했다. 그리고 서울시의 행정대집행이 위법했다는 피고인 측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조원진은 선고 직후 취재진에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바뀐 아주 잘못된 판결"이라며 항소할 뜻을 밝혔다.# 국회의원 시절에도 3선밖에 하지 못한 준 중진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4, 5선 중진 정치인에 비해 갑질, 폭언, 폭행 논란 등이 월등히 많은 것으로 미루어보면 서울시 공무원 폭행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바뀐 아주 잘못된 판결"이라는 말은 신빙성이 아예 없다.

2023년 9월 26일, 본인이 그토록 추앙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앙일보와의 단독인터뷰에서 이듬해 총선에서 정치인은 자기 정치를 하면 된다. 선거에 나서면서 제 사진을 내걸고 ‘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출마하는 것’이란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식의 인터뷰를 통해 밝히자 더 이상의 박근혜 대통령을 언급하지않겠다며 정치적 결별 선언을 했다. 이후에는 박근혜 명예회복 주장보다 서민을 위한 정당으로 만들겠다며 방향을 바꾸었다.

2023년 12월 20일 대구신문과의 전화인터뷰에서 내년 총선때 본인 지역구였던 대구 달서구 병 출마를 할것이라며 일치감치 말한데 이어 여당인 국민의힘과 아예 합당까지 하겠다며 밝혔다. 하지만 한동훈 비대위 체제가 들어선 이후 국민의힘은 공천작업과 총선준비에만 보여 2월 중 합당하겠다는 부분도 3월로 넘어간 시점에서 합당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블러핑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2024년 2월 23일 우리공화당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지금까지의 선거는 박근혜의 무죄석방과 탄핵무효가 아닌 우리공화당의 독자적인 선거를 치른다며 밝혔고 국민의힘과 통합을 하지 않겠다면 엄중한 마음으로 독자적 총선을 준비할 것이며 현재 우리공화당의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창당 이후에 7년 6개월만에 후원방송에 참여하겠다고 했는데 이번 총선에 필요한 자금이 총 17억이라고 밝히면서 독려했다.

2024년 3월 1일 우리공화당 지지자들과 함께 자유대한민국을 살릴 용기있는 보수대통합 촉구하며 여의도역과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보수대통합을 촉구하는 태극기 집회를 개최했으나 정작 현재까지도 국민의힘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반응조차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선거 기간 내내 총선 후 바로 국민의힘과 합당하겠다는 현수막을 걸은 것이 확인되었다.

2024년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리공화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달서구 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국민의힘 권영진 후보에 밀려 결국 2위로 또다시 낙선했다. 그러나 67.08%를 기록한 당선인 권영진에 비해 16.82%를 얻으면서 4년 전때 처럼 확실히 또 모자란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선거비 전액보전은 건진 것이 위안거리다. 다만 이번에는 소소한 성과가 하나 있었는데, 더불어민주당진보당, 새진보연합의 야권단일후보였던 진보당 최영오 후보를 꺾고 2위를 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26][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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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내분규에 책임을 지고 쫓겨나다시피 외대 총장직을 사퇴한 황병태를 따라간 행적은 훗날 조원진의 정치적 위치를 생각해보면 실로 묘하다고 할 수 있다.[2] 김우중이 80년대 운동권들을 특채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3]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신당은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합당이 이뤄진다.[4] 대신 송영선비례대표로 옮겨가 당선되었고, 이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남양주시 갑으로 옮겨서 현직 당협위원장인 심장수의 지역구를 빼앗아 논란이 있었다. 알다시피 송영선은 이후 비리로 당에서 제명되었고, 그 후 탈박하여 비박계로 전향했다.[5] 더군다나 황병태 전 의원의 정치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박근혜와의 접점은 거의 없다시피 한 수준이다.[6] 신상진 의원은 4선, 조원진 의원은 3선으로 둘 다 상임위원장을 지낸 이력이 없다. 그래서 위원장 임기 2년을 1년씩 쪼개서 위원장 직을 하게 되었다. 상임위원장 자리는 한정되었지만 하고 싶은 사람은 여럿이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7] 그러나 조원진이 새롭게 창당한 새누리당에 합류한다고 중도에 탈당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8] 이정현 당대표까지 합해서 진박 10인회라고 하기도 한다.[9] 김진태, 이우현, 홍문종, 서청원, 최경환, 이완영, 김종태, 김상훈, 조원진, 이장우, 정갑윤, 윤상현, 민경욱, 이정현, 정진석, 정우택[10] 다만 뉴스타운은 대선후보로 남재준을 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비난할 수밖에 없다.[11] 2017년 4월 29일,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면서 사퇴했다.[12] 그러나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후 국정교과서는 사형선고를 받게 됐다.[13] 재미있는 점이라면, 박근혜의 석방만 외쳤을 뿐 대통령직 복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14] 하지만 이재오 전 의원은 하위권으로 낙선했다. 72세의 고령이라는 것도 약점이긴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5선 의원 출신에 전국적으로 인지도도 높던 그가 낙선한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MB의 최대 실세였다는 것 때문이었다. 철저한 친이 비박이라서 친박한테는 원수 같은 존재였고, 진보 야권은 노무현 자살 사건 당시 MB가 노무현을 너무 압박하여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면서 MB를 박근혜 이상으로 증오하기 때문에 어느 쪽의 표도 가져오지 못해서 극성 친이라는 점이 오히려 가장 큰 디버프가 된 것이다.[15] 김성태, 김학용, 김영우, 여상규, 장제원, 이진복, 이은재, 이종구, 박성중, 홍문표, 홍일표, 권성동, 이군현, 황영철, 김재경을 의미한다. 대다수가 김무성계에 속한다.[16] 정작 무소속으로 나와서 지원이 불리하면서도 7위를 기록한 정치신인 김민찬에게도 밀릴 뻔했다.(당장 울산과 경남, 호남, 세종, 충남, 충북, 제주에서 밀렸다.) 최종 순위는 6위이다.[17] 제33조(정당소속 국회의원의 제명) 정당이 그 소속 국회의원을 제명하기 위해서는 당헌이 정하는 절차를 거치는 외에 그 소속 국회의원 전원의 3분의 1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당 소속 국회의원이 조원진 한 명 뿐이라 자기가 찬성하지 않으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다.[18] 정확히 얘기하자면 홍문종우리공화당에서 제명되었으나 새누리당 시절의 조원진과 같은 이유로 제명이 불가능 했었고 이후 홍문종계가 친박신당 창당에 함께 하기 위해 우리공화당을 탈당했다.[19] 원래는 해당 지역구에서 평판이 나쁘지 않았으나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집회 등으로 인해 지역구 관리를 손 놓으면서 최근 들어 평판이 급속도로 나빠졌다는 게 중론.[20] 그래도 15% 득표로 지역구 관리만큼은 개판으로 하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었다. 정말 지역구 관리를 개판으로 하였거나 기초자치단체장 or 광역자치단체장 시절 무능했던 인물들은 나가봐야 유영록(2020 김포시 갑, 8.09%)처럼 한 자릿수 득표율밖에 못 받는다.[21] 게다가 이 김재연에 대한 이미지가 좋은 편은 절대 아니다. 김재연은 NL계의 조직표에 힘입어 2012년 통합진보당 내에서 비례대표 부정경선을 통해서 국회의원직을 날로 먹은 이력이 있기 때문. 게다가 진보당 특성상 극좌, 친북 이미지가 강했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22] 이 변희재도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반 윤석열의 가치를 내걸고 친 민주당 계열과 행보를 같이하고 있다. 더군다나 변희재가 과거 조원진과 갈등을 빚은 점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23] 다만 이같은 점과 똑같을 뿐 둘 사이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못하다.[24] 2018년 남북정상회담 정국 당시 조원진이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해 "미친XX"라고 대놓고 욕설까지 꺼냈고 이에 서울의소리 백은종이 직접 조원진에게 찾아가서 그 욕을 그대로 돌려줬을 정도다. 이 후에도 조원진의 집회 현장에 가서 조원진이 문 대통령에게 했던 욕설 사건을 다시 꺼내며 조롱하는 방송을 했을 정도.[25] 이전 서술에는 변희재와 함께 민주당과 협력하는 모양새라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거의 친민주당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는 변희재와는 달리 조원진은 간혹가다가 양측의 입장과 마음이 맞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친민주당 행보를 보인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민주당을 "좌파 운동권"이라며 강도 높은 비난을 하는 등 여전히 강경 보수 행보를 보여주고 있으며, 후술하듯 국민의힘과 합당 의사까지 내비치는 등 윤석열에 대해 비판적이더라도 변희재처럼 반국힘 행보까지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26] 다만 이는 진보당의 종북 이미지와 권영진의 소장파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진보당에 반감을 가진 일부 야권 지지층에서 권영진에게 표를 줬을 가능성 또한 배제하긴 힘들다.[27] 실제로 조원진 본인의 득표율은 12,707표, 15.08%에서 12,492표, 16.82%로 이전 총선에 비해 제자리걸음을 했지만 더불어민주당 김대진 후보가 얻은 27.61%에 비해 진보당 최영오 후보는 16.08%로 득표율이 대폭락했다.[28] 다만 제20대 국회 현역 의원이던 4년 전과 달리 4년동안 제도권 정치와 멀어진 상태에 극우 정당의 대표주자라는 이미지도 자유통일당에 빼앗기고 우리공화당 자체의 당세도 하락하는 등의 악재를 감안하면 제자리걸음이라도 한게 선전일수도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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