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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28 10:48:02

조이(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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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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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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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刁彝
(? ~ 374)

동진의 인물로 자는 대륜(大倫). 기주 발해군(渤海郡) 요안현(饒安縣) 출신으로, 아버지 조협동진 원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대장군 왕돈의 난에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

2. 생애

아버지 조협이 왕돈에게 살해당해 가세가 순식간에 기울면서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왕돈의 난이 평정되자 조이는 아버지의 원수 무리를 모조리 참살하고 그 수급을 모아 아버지의 묘에 바쳐 제사를 지냈다. 사실상 연쇄살인을 저지른 조이는 정위(廷尉)[1]에게 나아가 자신의 죄를 자수했다. 어차피 조이가 죽인 것은 반역자인 왕돈의 무리라 조정에서는 그를 특별히 사면해주었다. 이 일로 조이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퍼졌고, 이후 관직에 임용되어 상서사부랑, 오국내사를 역임했다.

함강 연간(335 ~ 342), 조이가 상소해 부친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을 청했다. 성제 사마연은 그의 청을 수락하고 태뢰(太牢)의 예로 다시금 조협의 제사를 지낼 것을 허락했다.

함안 2년(372년) 4월, 대사마 환온이 폐제 해서현공(海西縣公) 사마혁을 오국(吳國) 서채리(西柴里)로 귀양보내고 오국내사 조이에게 명해 그가 허튼 짓 못하게 감시하도록 했다.

영강 원년(373년) 9월, 서연이주자사(徐兗二州刺史), 북중랑장으로 옮겨져 서주 광릉(廣陵)에 진수했다가, 이듬해인 영강 2년(374년) 정월에 사망했다. 동진 조정은 중서령 왕탄지를 서연이주자사로 삼고 광릉으로 파견해 조이를 대신하게 했다. 아들 조규, 조창(刁暢), 손자 조홍(刁弘)은 역적 환현의 측근으로 활동했고, 남들 눈치보지 않고 온갖 방법으로 사리사욕을 채웠으나 훗날 유유에게 패하면서 멸족당했다.[2]


[1] 구경(九卿) 중 형벌과 옥사를 담당하던 관직명.[2] 하필 조규는 과거 유유에게 30,000냥의 빚을 갚지 않았다며 말뚝에 묶는 수모를 준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