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2세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12세기 레온 국왕에 대한 내용은 페르난두 2세(레온) 문서, 포르투갈 국왕에 대한 내용은 페르난두 2세 문서
참고하십시오. 스페인 트라스타마라 왕조 초대 국왕 페르난도 5세 Fernando V | ||
<colbgcolor=#A2A0BA><colcolor=#000000> 아라곤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4대 국왕 페란도 2세 Ferrando II | ||
이름 | 아라곤어 | 페란도 다라곤 (Ferrando d'Aragón) |
카스티야어 스페인어 | 페르난도 데 아라곤 (Fernando de Aragón) | |
페르난도 데 트라스타마라 이 엔리케스 (Fernando de Trastámara y Enríquez) | ||
출생 | 1452년 3월 10일 | |
아라곤 왕국 소스 사다 궁전 | ||
사망 | 1516년 1월 23일 (향년 63세) | |
엑스트레마두라 마드리갈레호 | ||
재위 | 아라곤 왕국의 왕 | |
1479년 1월 20일 ~ 1516년 1월 23일 | ||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 | ||
1475년 1월 15일 ~ 1504년 11월 26일 | ||
배우자 | 이사벨 1세 (1469년 결혼 / 1504년 사망) | |
제르맹 드 푸아 (1506년 결혼) | ||
자녀 | 알론소(사생아), 이사벨, 후안, 후아나, 마리아, 카탈리나 | |
아버지 | 추안 2세 | |
어머니 | 후아나 엔리케스 | |
형제 | 후아나 | |
종교 | 가톨릭 | |
서명 |
[clearfix]
1. 개요
<colbgcolor=#A2A0BA> 아라곤어 | Ferrando II |
스페인어 | Fernando II |
카탈루냐어 | Ferran II |
이탈리아어 | Ferdinando III (나폴리) / Ferdinando II (시칠리아) |
아라곤 왕국, 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 나바라 왕국의 왕이다. 또한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의 부군이기도 하며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공동왕을 겸했다.
이름은 스페인어로는 '페르난도(Fernando)', 아라곤어로는 '페란도(Ferrando)', 이탈리아어로는 '페르디난도(Ferdinando)'가 되는데 다 같은 이름이다. 국가에 따라서 넘버링이 다른데 아라곤에선 '2세', 카스티야-레온에서는 '5세', 나폴리에선 '3세'로 칭해진다.
흔히 이사벨 1세의 남편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위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듯 뛰어난 책략가로, 프랑스를 상대로 한 이탈리아 전쟁에서 우위를 점해 유럽 대륙에서 스페인의 세력을 넓히는 데 크게 공헌했다.
2. 생애
1452년 아라곤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이후 왕세자가 되었다. 1468년 아버지로부터 시칠리아 왕위만 일찍 물려받았다.1469년에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왕위 계승권자인 이사벨 공주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이베리안 웨딩'이라고도 불리는 역사적인 결혼이었다.
1479년 아버지가 죽자 아라곤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1474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여왕이 된 아내 이사벨 여왕과 함께 양국의 공동왕이 되면서 카스티야-아라곤 동군연합이 시작되어 스페인을 형성시켰다.
그는 이사벨 여왕과 명목상 동등한 위치에 있었고, 둘의 상의 하에 왕국은 지배되었지만, 카스티야-레온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영토, 인구 등 국력에서 거의 네 배 차이가 났던 만큼, 남존여비 따위 쌈싸먹고 이사벨 여왕의 입김이 더 셌으며, 페르난도 2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결혼 당시 이사벨은 나중에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페르난도가 카스티야 왕국의 정치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을 것임을 서약하도록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또 페르난도 2세는 이사벨 1세에게 다소 눌려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3][4] 이사벨 여왕은 자신이 왕비가 아닌 여왕이며, 페르난도보다 연상(1살)임을 자주 남편에게 주지시켰다고 한다.[5]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1492년 나스르 왕조를 무너뜨리면서 레콩키스타를 완수했다. 그들은 스페인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를 추방하고 스페인의 종교 재판을 결정하였다. 같은 해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스페인 왕국을 선포했다.
이어 프랑스와의 전쟁을 통해 1504년에는 나폴리 왕국을, 몇 년 후에는 카탈리나 여왕의 나바라 왕국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504년 이사벨 여왕이 죽자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의 왕위를 차지하여 자신의 아라곤 왕국에 병합시키려는 야욕을 품었다. 그러나 카스티야 귀족 의회인 코르테스가 카스티야의 계승법에 따라 이사벨 여왕과 그의 딸인 후아나 공주를 왕위계승권자로 지명했고 공주가 후아나 여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딸인 후아나의 정신병을 이유로 자신이 섭정 자격으로 카스티야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후아나의 정신병이 심각했기 때문에 카스티야 의회는 이를 받아들여 페르난도 2세가 단독으로 스페인 전국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된다.[6]
그러나 후아나 여왕의 남편인 사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는 여왕의 남편인 자신이 공동왕 자격으로 스페인을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카스티야 귀족 의회는 논의 끝에 결국 필리프의 주장을 받아들였다.[7] 그리하여 필리프가 펠리페 1세로 즉위하여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고, 페란도 2세의 섭정권은 소멸되었다.
그러나 펠리페 1세는 즉위한 지 2달 만에 갑작스럽게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펠리페 1세 죽음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펠리페 1세와 후아나 여왕의 아들인 부르고뉴 공작 카렐이 왕위를 계승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페란도 2세는 "부르고뉴 공작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8]는 이유를 들어 자신의 섭정권을 주장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페란도 2세는 다시 스페인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페란도 2세는 프랑스 왕국 루이 12세의 외조카인 제르맹 드 푸아[9]와 재혼해서 아들을 낳아 아라곤은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카스티야까지 물려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페란도는 끝내 아들을 낳는 데에는 실패했다.[10] 결국 말년에는 아들을 낳는 것을 포기하고 합스부르크 가문 혈통의 외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네덜란드에서 자란 첫째 외손자인 부르고뉴 공작 카렐이 아닌 스페인에서 자란 둘째 외손자이자 자신의 이름을 딴 페르난도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장자인 카렐에게 물려주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는 이를 포기했다.
1515년 부르고뉴 공작 카렐이 성년에 이르자 다시 합스부르크 측에서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페란도 2세는 순순히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분쟁으로 비화되려는 찰나 1516년 64세로 사망했다.
유언장에서 자신의 모든 영지를 딸 후아나에게 상속시켰고 섭정으로는 외손자 카렐, 즉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지명했다.[11] 유언에 따라 첫번째 아내 이사벨 1세의 곁에 묻혔다.
3. 가족 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포르투갈의 왕비 이자벨 (Isabella, Queen of Portugal) | 1470년 10월 2일 | 1498년 8월 23일 | 포르투갈 공 아폰수 |
마누엘 1세 슬하 1남 | ||||
1남 |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 (John, Prince of Asturias) | 1478년 6월 30일 | 1497년 10월 4일 |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
2녀 | 후아나 1세 (Joanna I) | 1479년 11월 6일 | 1555년 4월 12일 | 펠리페 1세 슬하 2남 4녀[12] |
3녀 |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Maria, Queen of Portugal) | 1482년 6월 29일 | 1517년 3월 7일 | 마누엘 1세 슬하 6남 2녀[13] |
4녀 | 잉글랜드의 왕비 카탈리나 (Catherine, Queen of England) | 1485년 12월 16일 | 1536년 1월 7일 | 웨일즈 공 아서 |
슬하 1남 1녀[14] |
첫 번째 부인 이사벨 1세와의 사이에 다섯 자녀를 낳았고, 두 번째 부인 제르맹 드 푸아와의 사이에서도 아들 한 명 후안을 두었지만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죽었다.
그 외에도 3명 정도의 사생아가 있었다. 그 중 카탈루냐 귀족 출신의 정부 알돈사 루이스 데 이보레 이 알레마니 사이에서 두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아들인 알폰소 데 아라곤은 사라고사의 대주교이자 아라곤의 총독이 되었으며 페르난도 2세의 사망 후 카를 5세가 에스파냐에 올 때까지 섭정을 대행하기도 했다. 딸인 후아나 데 아라곤은 프리아스 공작과 결혼했다.
4. 여담
- 부인 이사벨 1세와 함께 로마 제국의 마지막 제위 요구자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로부터 로마 황제 칭호를 사들였는데, 이미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상태라서 그 칭호는 허울에 불과했다. 또한 당시 안드레아스는 궁핍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고,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 부부는 그 칭호를 구입만 하고 실제로 사용하진 않았기에 말이 구입이지 사실상 적선이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사돈인 막시밀리안 1세가 신성 로마 황제로 있었기 때문에 굳이 로마 황제 칭호를 쓸 필요가 없었다.
[1] 2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의 뒤통수를 후려갈겨 남부 이탈리아에서 깨끗이 몰아내고, 나폴리 왕국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권을 확실히 한 직후에 한 말이다. 당시 프랑스의 왕은 루이 12세로, 연거푸 전쟁을 벌이면서도 재정을 안정시켜 삼부회로부터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고 마키아벨리의《군주론》에도 긍정적인 사례로 언급된 인물이다. 그런 사람을 대상으로 이런 호기있는 발언을 남겼다는 것 자체가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다.[2] 실제로《군주론》에는 페르난도 2세도 언급되어 있는데, 평화나 신의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도 이런 말들을 입에 달고 살며 만약 말하는 대로 행동했더라면 명성과 권력을 모두 잃었을 거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 페르난도 2세가 다스린 아라곤보다 이사벨 1세의 카스티야가 더 강국이었다.[4] 이와 관련해서 한 사례가 당시에는 부부를 함께 그리거나 조각할 때 남편을 더 크게 묘사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이들 부부는 부부의 크기를 서로 똑같이 묘사해야 했다고 한다.[5] 실제로 이사벨 1세가 부계의 트라스타마라 가문상 6촌 누나다. 이 때문에 본디 교황청을 비롯한 일부에서 이 결혼에 반대했으며(당장 이사벨의 이복 오빠였던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부터 이사벨과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두 사람은 톨레도 대주교가 위조한 교황의 특면장을 내세워 겨우 결혼할 수 있었다.[6] 다만 카스티야에서는 페르난도 5세로 칭해졌다.[7] 그런데 사실 카스티야 사람들은 필리프도 싫어했다. 후아나와의 결혼 덕분에 카스티야의 계승권까지 부여받았으면서, 정작 아내인 후아나를 잘 대해주지 않고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필리프보다 페란도 2세가 더 싫어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8] 미래의 카를 5세가 될 이 부르고뉴 공작 카렐의 나이는 당시 고작 6세였기에 페란도 2세의 말대로 너무 어려서 통치에는 무리가 있었다.[9] 루이 12세의 누나 오를레앙의 마리와 나르본 자작 장 드 푸아의 딸로 나바라 여왕 레오노르의 손녀였다.[10] 이사벨 1세와 제르맹 드 푸아에게서 낳은 아들들이 전부 요절한 데다 남은 아들 1명조차 왕자가 아닌 정부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라서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11] 다만 카를 5세는 섭정을 넘어 후아나의 공동왕이 된다.[12]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왕비 레오노르, 카를 5세, 덴마크의 왕비 엘리사베트, 페르디난트 1세, 헝가리의 왕비 마리어, 포르투갈의 왕비 카타리나[13] 주앙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후 이자벨라, 엔히크 1세 등[14] 메리 1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