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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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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 대첩
鴻山 大捷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파일:최영 장군의 홍산대첩 박창돈 작 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공공누리).jpg

▲ 홍산대첩(鴻山大捷) 기록화, 박창돈의 작품
시기 1376년 (우왕 2년) 7월
장소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원인 왜구의 부여, 공주의 약탈에 대한 고려 조정의 대응
교전 세력 고려
(공세)
<rowcolor=black> 왜구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최영 (철원부원군)
지휘관

[[왜구|
倭寇
]] 지휘관 불명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려의 대승
- 고려-왜구 전쟁의 국면 전환.

1. 개요2. 배경3. 개전4. 평가

[clearfix]

1. 개요

고려 우왕 2년(1376년) 고려의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에서 왜구를 격퇴한 사건. 최무선진포 대첩, 이성계황산대첩, 정지관음포 전투, 박위제1차 대마도 정벌 등과 함께 고려 말 왜구와의 전투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다만 전투의 규모도 작은데다 왜구의 침공 국면에 있어서 영향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라서 전투 자체를 두고 대첩(大捷)이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황산대첩에서 1만명 진포대첩에서 약 1만여명 관음포 전투에서 2800명을 죽였지만 홍산대첩은 700명에 불과하다.

2. 배경

우왕 2년(1376년) 7월 왜구가 20여 척의 함선으로 전라도 원수의 군영을 공격했고, 나주로 이동하며 고려군의 함선을 불태웠다. 마침 이 지역을 방어해야 할 전라도원수 겸 도안무사 하을지(河乙沚)는 탄핵당해[1] 류영(柳濚)[2]으로 교체되었는데 인수인계할 때까지는 방어 임무를 맡아야 했는데도 그냥 자기 농장이 있는 진주로 돌아가버려, 피해가 더욱 커졌다.[3]

부여군을 거쳐 공주까지 온 왜구[4]에 맞서 당시 공주 목사 김사혁(金斯革)은 정현(鼎峴)[5]에서 왜구를 막아세웠으나 패배하고(공주 역시 왜구에게 함락되었다.) 양광도원수 박인계(朴仁桂)는 회덕현(懷德縣)의 감무(監務) 서천부(徐天富)를 김사혁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를 물어 잡아 처형하고 자신이 왜구를 막기 위해 나섰으나, 현재의 연산(지금의 논산시) 개태사 부근에서 전투 도중에 말에서 떨어져 전사했다.

3. 개전

고려군이 연이어 패배하고 왜구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생각한 최영은 자신이 나서 왜구를 토벌하겠다고 우왕에게 허락을 구했다.
"보잘 것 없는 왜구들이 이처럼 방자하고 난폭하니, 지금 제압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다른 장수를 보내면 꼭 이길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으며, 군사들도 평소에 훈련되지 않은지라 전투에 투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 왕실을 보위하려는 뜻은 결코 쇠하지 않았으니, 빨리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놈들을 격퇴하게 허락하여 주소서."
─ 고려사 최영전

당초에 우왕은 최영이 나이가 많다고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6] 최영이 계속해서 출병을 요구하자 결국 승낙했고, 최영은 그 즉시 자지도 않고 출병했다.[7]
至鴻山, 先據險隘, 三面皆絶壁, 唯一路可通.
홍산에 이르렀는데, (최)영이 먼저 험준한 곳을 차지하여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였고 길 하나만이 겨우 통했다.
- 고려사 최영열전
至鴻山, 先據險隘, 三面皆絶壁, 唯一路可通.
홍산에 이르렀는데, 왜가 먼저 험준한 곳을 차지하여 삼면이 절벽으로 둘러싸였고 길 하나만이 겨우 통했다.
- 고려사절요

총사령관 최영과 양광도도순문사 최공철,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兵馬使) 박수년(朴壽年)이 이끄는 고려군이 홍산(鴻山)[8]에 도착했을 당시의 정세에 대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미묘하게 다른데, 왜구를 진압할 당시에 고려군이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왜구를 공격했는지 왜가 고려군을 막기 위해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고려군을 막은 것인지 서로 말이 다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고려사절요가 맞고 고려사는 오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고려사절요의 기록처럼 왜구는 험한 요지에 자리 잡고 있고, 삼면이 모두 절벽에 길이라고는 한 길 뿐이라 그 길로 진군하는 것은 어그로 맞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이에 최영이 직접 사졸들의 선봉에 서서 정예병을 이끌고 앞장서 돌격했고, 적들이 바람 앞의 풀처럼 쓰러졌다.[9] 이렇게 앞장서서 돌격하다보니 당연히 최영 본인도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는데, 풀 속에 숨어있던 왜구 한명이 벌떡 일어나 화살을 쏘자 최영은 입술에 화살을 맞았다. 그런데 최영은 그 직후에 적을 쓰러뜨리고 입술에 박힌 화살을 뽑아버린 뒤 피를 철철 흘리면서 싸워 적을 완전히 무찔렀다.

이후 최영이 판사(判事) 박승길(朴承吉)을 보내 이를 보고하자 우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소식을 전한 박승길에게도 백금을 주고, 삼사우사(三司右使) 석문성(石文成)[10] 등을 보내 최영에게 재물을 주고는 의원 어백평(魚伯評) 등으로 하여금 약을 지어 최영을 치료하게 했다. 이후 최영이 개선하자 우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임진강에서 이를 맞이했는데, 마치 황제의 사신을 맞이하는 듯 했다고 한다.

홍산대첩의 공을 논해 최영은 시중이 되었으나, 최영은 “시중이 되면 바깥으로 함부로 나가지 못할 텐데 왜구가 모두 평정되고 나면 받겠습니다.”라며 사양했고, 이에 철성부원군(鐵原府院君)으로 봉하였고, 이때 최영의 비위를 맞춰주려고 최영의 처조카인 전라도 원수 류영도 불러다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를 삼았는데 이에 대해서 최영은 굳이 막지 않았다고 한다.[11]

4. 평가

홍산대첩의 정확한 전과는 애매한데, 우왕은 술을 따라주면서 최영에게 "왜구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느냐." 고 물었지만 최영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고 대답했다. 이에 재상들이 다시 한 번 물어보았지만 최영은 또 적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적이 많았다면 이 늙은이가 살아 올 수 있었겠느냐." 고 대답했다.

최영의 겸손이었을 수도 있지만, 홍산대첩이 벌어진 현장으로 비정되는 홍산 태왕산성을 답사한 이영 교수 등은 지형적인 여건을 볼 때 대규모 전투가 일어나기는 어려운 지형이라고 지적했다. 정상의 넓이가 150평 남짓으로 대규모 병력이 수용될 수 있는 곳은 아니라는 것. 이곳의 지형은 고려사의 기록대로 삼면이 절벽에 가까운 경사를 이루고 정상까지 자동차 한 대 겨우 올라갈 폭의 길만 있으며, 올라가는 길도 정상까지 가는 데 이리저리 지그재그로 꼬여 있을 뿐만 아니라 정상에서는 주변 지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아울러 정상부 북쪽으로는 태봉산 줄기로 이어져 있는데, 이영은 고려군의 공격에 밀린 왜구들이 이 능선을 타고 해안 쪽으로 퇴각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홍산·진포·황산 대첩의 역사 지리학적 고찰> 中)

홍산대첩은 그 자체로도 상당한 왜구를 물리친 대승리였지만,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전까지 왜구에 완전히 농락당하며 한반도 전역을 유린당하던 고려가, 더 나아가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육지'에서 반격을 할 수 있게 된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왜구와의 싸움은 왜구가 여러 고을을 초토화하고 있으면, 지방의 병력이 힘겹게 버티다가 뒤늦게 도착한 정규군이 간신히 막아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육지에 상륙한 병력은 내지의 왜구와 연계하여 거대한 규모가 되었고, 개태사 전투에서 고려 관군이 무참하게 적에게 대패할 정도였다. 만약에 또다른 대패를 당한다면 대규모의 왜구가 무사히 상륙하여 또다시 한반도를 유린하거나, 더 최악의 가정으로는 한반도 남부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일본 본토에서 패한 남조 조정이 아예 점령한 한반도 남부로 옮겨와 자신들의 국가를 세워버렸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임나일본부의 현실화.

이러한 상황에서 홍산대첩은 왜구의 세력이 대거 집결하여 건너온 세력을 궤멸시킴으로써, 심리적으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혼란기의 마무리를 장식한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거의 국가 영웅을 대하듯 하는 최영에 대한 찬양은 장장 30여년간 왜구에 유린되어온 고려 조정의 심정을 어느 정도 보여준다. 그러한 일대 반격의 시점이 왜구의 아주 거대한 침략이 이루어진 순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어찌보면 극적이다. 이는 최영의 친병을 비롯한 고려의 정예군이 후대의 사람들의 생각보다 강성했다는 점을 증명하기도 한다. 즉, 대함대를 동원하여 여러 지점의 왜구들이 하나의 장소에 결집했기 때문에, 최영에게 박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양파처럼 깔수록 괴물 같은 기록이 나오는 인간흉기 최영.

그리고 홍산대첩은 장기적으로 보았을때 왜구의 세가 약해지는 기점을 가져왔다. 물론 왜구는 어느 한순간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기에, 이후 황산 대첩이 벌어진 후 즈음에도 침입 자체는 계속되었지만, 대함대를 동원했던 정규군 수준의 왜구의 힘은 분명히 지방 호족 정도의 활약으로 크게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도 홍산전투의 승리는 왜구의 공격에 있어 변화를 가져왔다.
이때 한 동자가 적중에서 도망쳐 돌아왔는데, 뭇 장수들이 적의 상황을 묻자 말하였다.
“적들은 늘 말하기를 ‘두려워할 만 한 자는 머리가 허옇게 센 최 만호 뿐이다. 홍산 싸움에서 최 만호가 오니 사졸이 다투어 말을 타고 유린하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고 하였습니다.”
- 고려사 최영열전

또한 홍산대첩이 중요한 이유는 이 전투에서 보여준 최영의 활약상 때문이다. 홍산대첩 이전에 최영이 본격적으로 왜구와 교전하고 구체적인 전승을 거둔 기록은 공민왕 7년(1357년)에 왜의 배 4백여 소가 오차포(吾叉浦)를 약탈하였을 때 복병을 숨겨두고 맞서 싸워 크게 이겼던 것이 유일하며, 공민왕 14년(1364년)에 왜구가 교동(喬桐)·강화(江華)로 쳐들어와 세조[12]어진을 훔쳐가는[13] 사건이 터지자 당시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로써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계림윤으로 좌천되기도 했다.[14] 대부분은 북쪽에서 쳐들어온 홍건적이나 최유의 난 당시 덕흥군을 따라 고려를 공격한 원나라군, 제주도에서 세력을 떨치던 원나라 목호들이 최영의 상대였었다. 홍산 전투 당시 최영의 나이는 61세로, 총사령관으로써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왜구의 화살에 입술을 맞아 부상당했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그 화살을 뽑아서 자기를 쏜 왜구를 쏴 죽였다. 이 용맹한 모습은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뿐 아니라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다 주어 왜구에 대한 적극적 공세를 취하는 계기가 되었고, 고려군을 가볍게 보던 왜구들은 고려군에 대한 두려움을 사게 되었다.[15] 이러한 두려움은 이듬해 왜구에게 잡혀갔다 도망쳐 온 아이가 "고려에서 두려워할 것은 머리가 허옇게 센 최 만호"라고 말했다고 한 기록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이듬해 강화도의 왜구들이 양광도를 공격하고, 수원부사였던 박승직(朴承直)이 왕안덕, 인해, 홍인규 등 세 원수가 양광도를 구원하러 온다는 소식에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가 밭을 매는 자들에게 "원수들이 온다고 하는데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 물었고, 밭 매던 사람들은 "적이 이미 물러나 원수들이 쫓고 있다." 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사실 변장한 왜구들이었고, 이것을 모르고 속아 넘어간 박승직은 안성에 들어서자마자 왜구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군사를 잃었다. 왕안덕도 패배하면서 수원, 양성, 안성 부근의 고을들은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말았는데, 왜구의 포로 한 사람을 잡을 수 있었는데, 강화도의 왜구들이 양광도를 친 이유는 "양광도를 쳐서 최영을 양광도로 끌어내고, 그 사이에 비어있는 개경을 급습하려는 것." 이라는 경악스러운 계획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이는 그만큼 최영이 왜구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16]

물론 왜구가 "두려워할 것은 최 만호 뿐이다"라고 말한 것은 뒤집어 말하면 "나머지는 두려울거 없다"는 뜻이고, 실제로 고려군의 상태가 그만큼 개판이기도 했다.[17] 훗날 여말선초 최강의 무장한테 호되게 두들겨 맞고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던 정몽주와 화해를 맺어야 했으니 그 판단은 틀린 것이었지만(...)

[1] 고려사절요에는 "재주와 행실이 없고, 또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방이 있었다. 권력 있는 귀인에게 뇌물을 바쳐 외방의 중임을 얻으니, 사림(士林)들이 더럽게 여겼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과 관련이 있는 듯.[2] 최영의 처조카였다. 하을지의 후임으로 있다가 패하기는 했지만 이후 낭산(朗山)ㆍ풍제(豐堤) 등 현(縣)을 침범한 왜구를 전주 목사 류실(柳實)과 함께 격퇴하고 왜구가 노략하였던 2백 필을 빼앗아 그 주인에게 돌려 주는 등의 공을 세우기도 했다.[3] 때문에 패전 뒤 하을지는 하동군으로 유배당한다.[4] 이들이 나주를 공격하고 북상한 왜구들인지 새로 등장한 왜구들인지는 불분명하나 그 기세가 상당히 강력했다.[5]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정치리로 추정된다.[6] 당시 최영은 60살이었다.[7] 당시 왜구의 기세가 대단히 흉흉하여 "왜구가 곧 도성에 오려고 한다." 는 출처불명의 헛소문까지 퍼져 개경의 분위기는 흉흉했고, 조정에서도 군사를 풀어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왜구가 송악산으로 온다는 소문에 송악산의 승려들을 징발하여 병사로 삼아 대비하기까지 했다.[8]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홍산초등학교 뒷산에 있는 태왕산성으로 비정된다.[9] 원문 그대로의 표현(披靡)이다.[10] 홍산대첩 이듬해인 우왕 3년(1377년)에 왜구가 강화도에 쳐들어왔을 때 왜구들은 "막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이 진정 낙토로구나"하며 마구 약탈하고 다닐 때 이를 막기 위한 회의 중에도 "여기 노래 잘 하는 기생 안 왔냐" 하는 개드립이나 치고 있었던 그 인간이다.[11] 고려사절요에는 경복흥ㆍ이인임ㆍ지윤이 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있었는데, 지윤과 이인임이 종군도 하지 않는 사람한테까지 마음대로 벼슬을 주는 것을 경복흥이 막지 못한 것은 지윤과 이인임의 견제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최영을 다소 비하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류영이 홍산 싸움에 참가도 하지 않았음에도 상을 받은 것으로 보아 논공행상에서 불공평한 부분이 있기는 했던 듯.[12] 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륭으로 후세에 세조로 추존된다.[13] 여담으로 일본의 무라이 쇼스케는 이 세조를 (원나라) 세조로 해석해 왜구는 그저 도적떼가 아니라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움직인 존재들이었고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어진을 훔쳐낼 정도면 원이나 고려의 정치적 이해 상황에 밝을 것이니만큼 강화를 침범한 왜구 세력 또한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이나 고려의 유민들이 주도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가 한국의 이영에게 사료를 잘못 해석하고 엉터리 주장을 냈다고 까였다. 이영은 왜구는 세조의 어진 말고도 충선왕과 한국공주 부부의 어진도 훔쳐갔다며 단순히 왕의 어진이라서 가져간 것이라기 보다는 그냥 돈 될만한 것은 이것저것 들고 나온 것인데 그 중에 왕의 어진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목적도 원이나 고려에 대한 정치적 목적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본의 남북조 동란에서 군자금으로 쓸 재물을 노린 것 뿐이라고 보았다.(출처 : 이영 <잊혀진 전쟁, 왜구>)[14] 이 점은 당시 권력자였던 신돈의 참소도 한몫했다.[15] 이영, 홍산·진포·황산 대첩의 역사 지리학적 고찰 中[16] 뱀발로 최영이 홍산에서 왜구를 상대로 벌인 전투를 홍산파진도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그려 바친 사람이 있었는데, 이 그림을 받은 우왕은 이색에게 명해 찬을 짓게 했다. 이색의 문집인 목은집 및 동문선에서는 이 시기가 우왕 5년(1379년) 4월 을축일의 일로 되어 있는데, 홍산대첩도를 바친 이 해에도 고려는 여전히 왜구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바로 이듬해 진포 대첩에 이어 황산 대첩이 벌어진다. 홍산에서의 전투가 고려군에게 무엇인가 심리적으로 고무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던 듯.[17] 왜구를 만났는데 "도망가지 말고 여기서 우리와 같이 왜구와 싸워요"라고 간절히 비는 병사들을 뿌리치고 내빼는 사령관이 있지를 않나, 평소 기생들 모아 소주나 마시고 군사들한테 똥군기나 부리다가 왜구가 쳐들어오자 "우리 말고 같이 소주 마시던 기생들한테 싸우라고 하시던가요"라며 병사들에게 엿먹고 대패하지를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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