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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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桓石康(? ~ 404)
동진의 인물. 예주 초국(譙國) 용항(龍亢) 출신으로 환온의 동생인 환활의 아들이다.
2. 생애
원흥 원년(402년) 3월, 평소 사촌인 환현의 총애를 받았던 덕에 환현이 정권을 잡자 진위장군에 임명되었다.원흥 2년(403년) 8월, 누차 승진해 형주자사에 임명되었으나, 미처 부임하기 전에 신야 사람 유측(庾仄)이 거병해 양양(襄陽)에서 옹주자사 풍해(馮該)를 격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주에 도착한 환석강은 바로 군대를 동원해 유측을 격파하고 양양에서 몰아냈다. 패배한 유측은 강족의 후진으로 망명하고, 환석강은 유측의 난을 토벌한 공로로 무릉왕(武陵王)에 봉해졌다.
원흥 3년(404년) 4월, 무도제 환현이 유유에게 수도 건강(建康)을 빼앗기고 강릉(江陵)으로 도망쳐 환석강에게 의탁했다.
원흥 3년(404년) 5월, 도저히 유유를 당해낼 수 없다 생각한 환현은 서쪽으로 이동해 한중(漢中)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를 들은 익주자사 모거의 조카인 둔기교위 모수지가 환현 무리를 촉으로 유인했고, 모거는 장수 모우지(毛祐之), 비념(費恬) 등을 보내 매회주(枚回洲)에서 환현을 습격했다. 환현은 익주독호 풍천(馮遷)에게 참수되었고, 환석강도 이때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