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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3 11:57:46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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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진흥왕 순수비
眞興王巡狩碑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창녕 진흥왕 척경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파주 감악산비는 진흥왕 순수비 중 하나로 추정되나 확실하지 않음.

북한의 국보 제110호
<colbgcolor=#ED1C27>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黃草嶺眞興王巡狩碑
Hwangch'oryŏng Chinhŭngwang Sunsubi
파일:황초령비.jpg
함흥역사박물관에 이전하여 전시 중인 황초령비의 사진.
<colcolor=#fff> 주소 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면적 -
건축시기 568년
지정연도 -
관리 중앙문화유물보존지도기관
1. 개요2. 역사
2.1. 발견사
3. 형태와 내용

[clearfix]

1. 개요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 줄여서 황초령비(黃草嶺碑)는 신라 진흥왕이 6세기 중반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던 현재의 함경남도 해안 지역을 정복하고 568년황초령 고개에 세운 순수비로, 위치는 광복 당시 주소를 기준으로 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 진흥리(眞興里)이다. 현재는 북한이 함흥의 함흥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북한의 국보 제11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2. 역사

황초령비는 마운령비와 함께 삼국시대 신라의 전성기 강역을 비정할 단서를 제공하는 희귀한 문화재로, 황초령비의 존재로 인해 진흥왕 시기 신라가 함흥 평야와 개마고원 일대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파일:황초령-마운령비 영토.jpg
진한 녹색은 진흥왕 시기 신라가 확장하였다가 이후 상실한 영토를 나타낸다.

함경남도 지역은 원산만 북쪽 지역으로, 나중에 삼국통일을 한 뒤에도 신라가 다시 차지하지는 못했다. 함흥은 수도 서라벌에서 직선거리로 480 km나 떨어졌다. # 고구려를 완전히 제압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 당시 교통기술로는 함경도를 장기적으로 지배하기가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진흥왕 사후 곧 고구려에게 다시 빼앗긴 것으로 추정된다.

2.1. 발견사

조선 중기 선조 대에 신립이 북병사로 있던 당시 탁본해 왔다고 조선 중기의 문신 차천로가 《오산설림》에 기록한 것으로 봐서 선조 시대까지는 황초령비가 온전히 전해진 것 같은데, 조선 후기에는 이미 세 조각으로 깨져서 이곳저곳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정조 14년(1790) 홍양호가 황초령비의 근황이 궁금해서 함흥 통판으로 부임하는 유한돈에게 거기 가거든 황초령비가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몇 해 뒤 유한돈은 조정에서 이 비의 탁본을 자주 요구하자 그곳 백성들이 벼랑 아래로 밀어뜨렸다고 알려주었다.

이로부터 40여 년이 지나 순조 32년(1832),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한 추사 김정희는 마침 절친한 벗 권돈인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그에게 황초령비의 파편을 찾아볼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권돈인은 마침내 비석 일부를 찾아내 관아에 옮겨 보존했다. 김정희는 비석을 찾아낸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관아가 아니라 원래 있던 제자리에 있어야 신라 진흥왕의 강역이 거기까지 닿았음이 증명된다고 비석을 옮겨달라 부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20년이 지난 철종 3년(1852), 김정희가 북청부에서 두 번째 유배를 살고 있을 때 마침 후배 윤정현(尹定鉉)이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해 오자 김정희는 또 황초령비의 원위치 복원을 부탁했다. 윤정현은 두 조각을 수습해 황초령 고개 바로 아래 중령진에 비각을 세우고, 이건기와 김정희가 써준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동네 이름도 진흥왕에서 딴 진흥리가 되었다.
파일:황초령비 비각2.png파일:황초령비 비각.png
황초령비 비각 (1911년경 촬영). 비석 중 오른쪽에 있는 것이 황초령비.

1931년 나머지 한 조각을 다시 발견해 같이 합쳤고, 이렇게 다시 이어붙이고 깨지고를 반복해서 현재는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많다. 그런데 김정희의 의지와 달리 결국 비석은 다시 원래 자리에서 함흥으로 옮겨졌다. 비석 실물은 지금은 함흥시에 있는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남한에는 모조품과 탁본들이 여러 박물관에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은 신라가 이렇게 북쪽까지 북진했을 가능성이 없다고 봐서, 순수비 비석 자체가 후대의 위작이라거나 고려시대 윤관의 여진 정벌 때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좀 더 남쪽 어딘가에 있던 비석을 북쪽 황초령에 옮겼을 것이라는 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북쪽인 마운령에서 마운령 순수비가 발견되어 설득력을 잃었다.

3. 형태와 내용

황초령비는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3개의 돌이 잘려진 것을 접합하여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몸돌만으로 높이는 130.3~138.2cm, 폭은 약 50.3cm이며, 두께는 24.5~32cm이다. 제작연도는 비문에 기록된 "팔월 이십일일 계미(八月二十一日癸未)일"과 "세차 무자년 가을 팔월(歲次戊子秋八月)"에서 568년(진흥왕 29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무제본기(武帝本紀)》등에서 환산할 수 있는 날짜와 역산했을 때 일치하여, 의심 없이 서기 568년에 제작된 것이라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이미 조선시대에 추사 김정희가 순수비를 연구한 논문 《금석과안록》에서 고증하였다.

비문은 한 면에 13줄 33자씩 적어 429자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읽을 수 있는 부분은 215여자 남짓이다. 서체는 예서체와 해서체가 섞여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정희 판독)
八月廿一日癸未眞興太王巡狩管境刊石銘記也
世道汞眞玄化不敷則爲交競早以帝王建莫不修己以安百姓然朕
紹太祖之基纂承王位兢身自植恐……又蒙天恩開示運記㝠感神祇應
四方託境廣獲民土隣國晢信和使交通府……寸奐有新古黎……謂道化
未有於是歲次戊子秋八月巡狩管境訪採民心以欲勞才……有忠信精誠……
……益有功之徙可加賞爵物以章勲効 廻駕頋行……
氺者矣 于時隨駕沙門道人法藏慧忍 大等喙……居
丿知迊干喙部服冬知大阿干比知夫知及干未知
……大舍沙喙部叧知大舍內從人喙部……
……喙部與難大舍藥師沙喙部兄小人
典喙部分知吉之公欣平小舍
喙部非知沙干人沙喙部尹

(최남선 판독)
八月二十一日癸未眞興太王巡狩境刊石銘記也
世道乖眞玄化不敷則耶爲交竸早以帝王建號莫不脩己以安百姓然朕
紹太祖之基纂承王位兢身自愼恐違……又蒙天恩開示運記冥感神祗應
四方託境廣獲民土隣國誓信和使交通府……忖撫育新古黍上……謂道化
未有於是歲次戊子秋八月巡狩管境訪採民心以欲勞……有忠信精誠……
国盡節有功之徒可加賞爵物以章勲効 廻駕頋行……四……
…者矣 于時隨駕沙門道人法藏慧忍 大等喙部居柒夫
…知迊干喙部服冬知大阿干比知夫知及干未知……奈末
…子大舍沙喙部另知大舍衆內從人喙部……子次
喙部難大舍藥師沙喙部䔍兄小……夫
典喙部分知吉之公欣平小舍……末買
喙部非知沙干助人沙喙部尹知奈末

이 밖의 다른 학자들이 판독한 내용은 국가유산 지식이음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정희의 판독을 토대로 한 현대어역본은 다음과 같다.
8월 21일 계미(癸未)에 진흥태왕(眞興太王)이 관경(管境)을 ▨▨하였으니, 돌에 기록을 새긴다 … 세상의 도리가 참됨에서 어긋나고, 덕화(德化)가 펴지 못하면 간사한 것들이 서로 다투게 되니 …(이에) 제왕(帝王)이 연호를 세웠으며[建号], 스스로를 닦아 백성(百姓)을 편케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짐(朕)은 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서 왕위를 찬승(纂承)하여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고, 스스로 삼가면서 … 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천은(天恩)을 입어 운기(運記)를 열어보았으니 어두운 와중에도 신기(神祇)에 감응하여 … 사방(四方)으로 탁경(託境)하여 민토(民土)를 널리 얻어서 인국(隣國)들이 신의를 맹서하고[誓信], 화의를 맺고자 하는 사신들[和使]이 교통(交通)하는도다.

… 하여 신고(新古)의 여서(黎庶, 서민)들을 길렀으나 오히려 도화(道化)가 있지 않는다고 하니, 이 세차(歲次) 무자(戊子) 가을 8월에 관경(管境)을 순수(巡狩)하여 민심(民心)을 수습[訪採]하고 그 고생스러움을 (위로) 하고자 하니 (만일) 충신정성(忠信精誠)이 있으면서 재주[才](가 있고) 나라에 …하여 절의[節]를 다하면서도 공이 있는 무리들에게 가히 상작(賞爵)과 재물[物]을 더하여 공훈[勲効]을 밝히도록 한다.

수레(駕, 임금의 어가)를 돌려 …로 가니, …14(十四) …자(者)이다. 이 때에 수레를 따른 이들은 사문도인(沙門道人)인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이었으며, 대등(大等)은 훼▨(喙▨)의 ▨▨부(▨▨夫) … ▨지(▨知) 잡간(迊干) · 훼부(喙部)의 복동지(服冬知) 대아간(大阿干) · 비지부지(比知夫知) 급간(及干) · 미지▨(未知▨) 나말(奈末) … 혜(兮) 대사(大舍) · 사훼부(沙喙部)의 무지(另知) 대사(大舍)이며, 이내종인(裏內從人)은 훼부(喙部)의 ▨혜차(▨兮次) … 훼부(喙部)의 여난(与難) 대사(大舍)였으며, 약사(藥師)는 사훼부(沙喙部)의 독형(䔍兄) 소▨(小▨) · 나부(奈夫) … ▨전(▨典)은 훼부(喙部)의 분지(分知) 길지(吉之)이며, 이공(裏公)은 흔평(欣平) 소사(小舍)이며, ▨말매(▨末買) … 훼부(喙部)의 비지(非知) 사간(沙干) · 조인(助人)인 사훼부(沙喙部)의 윤지(尹知) 나말(奈末)이다.

추사 김정희는 비문의 내용 '진흥태왕순수관경간석명기야(眞興太王巡狩管境刊石銘記也)'를 토대로, '진흥왕'이 왕의 사후에 내려진 시호가 아니라 재위 당대에도 쓰이던 호칭일 것이라 추정했다. 그런데 이는 삼국사기 진흥왕본기에서 '시호를 진흥이라 하였다'고 기록된 것과 어긋나는데, 북한산 순수비에서도 '진흥'이라는 명칭이 등장함에 따라 이는 시호인 동시에 생존 당시 사용되었던 존함이기도 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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