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colcolor=#fff> 출생 | 1880년 11월 13일 |
일본 제국 미야기현 오시카군 헤비타무라 (現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 | |
사망 | 1953년 9월 13일 (향년 72세) |
일본국 도쿄도 도시마구 | |
묘소 |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2초메 20 |
가족 | 배우자 후세 미츠코 아들 후세 간지 |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 | |
학력 | 도쿄전문학교 (법과 / 중퇴) 메이지법률학교 (법학 / 졸업) |
직업 | 변호사, 사회운동가 |
별명 | 우리 변호사[1] |
소속 | 자유법조단[2] |
종교 | 불교 (일련정종)[3] |
서훈 |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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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
[ruby(生, ruby=い)]きべくんば [ruby(民衆, ruby=みんしゅう)]とともに、[ruby(死, ruby=し)]すべくんば[ruby(民衆, ruby=みんしゅう)]のために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4]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4]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일본의 인권 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
현재까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2명밖에 없는 일본인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
2. 생애
후세 다쓰지의 다큐멘터리 |
2.1. 출생
1880년 11월 13일 일본 제국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태어났다.[6]어릴 적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보면서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감[7]을 가졌다. 동시에 묵자의 겸애사상과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을 접하며 이에 많은 감명을 받고 사람들을 돕고 헌신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후 정교회 신학교까지 들어갔으나 3개월 만에 자퇴하였고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우쓰노미야 지검 검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검사로 활동하던 중 생활고로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아들만 죽고 어머니는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녀를 살인미수로 기소하는 법률의 미비점과 적용에 대한 문제점에 회의를 느끼고 검사직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었다.
2.2. 인권 변호사 활동
변호사 시절의 후세 다쓰지 |
이후 그는 주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았다. 1919년에는 2.8 독립 선언의 주체였던 최팔용, 송계백 등을 변호하여 내란 혐의에 대한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1923년에 밀정의 실존 인물 김시현과 황옥의# 변호, 1924년에는 도쿄 궁성에 폭탄을 던진 의열 단원인 김지섭의 변호를 맡았다.
한편 1923년에 발생했던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해당 사건이 일본 정부와 일본 제국 경찰, 군부에 의해 조작된 유언비어로 인한 사건임을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조선일보에 이를 사죄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변호 행적 중 가장 유명한 예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변호다. 두 사람은 천황을 폭살할 계획을 세우다가 검거되어서 천황 폭살을 기획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이 재판은 박열 대역 사건으로 불리며 일본 전역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후세 다쓰지는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중 결혼 수속을 대신 해 주었다.
또 후미코가 의문사하자[8] 그녀의 유골을 수습해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에 안장할 정도로 노력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일본을 방문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유아사 쿠라헤이를 대중신문사 대표 박낙종,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대표 김한경, 신간회 동경지회 대표 조헌영과 함께 찾아가 조선공산당 사건 피고인에 대한 경찰의 고문에 항의했다.
자유법조단의 창립 멤버이며[9] 1928년 제16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노동농민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32년 일본공산당 세력에 대한 탄압이 거세던 도중에 법정에서 공산당 탄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가 법정 모독이라는 근거로 징계를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이후에도 2번이나 더 회복과 박탈을 반복하였으며 신문지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두 차례 선고받아 복역하기도 하였다.
2.3. 광복 이후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하고 나서 한신 교육투쟁(한신 교육 사건)이나 도쿄 조선 고등학교 사건 등 재일 한국인 사건[10] 및 노동운동에 대한 변호를 맡았다. 미타카 사건의 변호인단 중 1명이 되기도 하였으나[11] 변호인단 간 의견 충돌로 도중 사임하였다.[12]6.25 전쟁까지 목격한 그는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9월 13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4. 사후
평생을 한국의 독립운동의 변호에 힘써서 노력해왔던 것에 대한 공로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후세 다쓰지 본인이 이미 고인이 된 관계로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13]가 대리 수령했다.이전까진 독립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것인데 "아무리 조선을 도왔다고 해도 우리의 원수였던 일본의 국민을 독립유공자로, 건국 기여자로 볼 수 있겠는가?"라는 의견도 일부 있었으나, 그는 일생의 행적이 명백하고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에 도움을 주었고 자국에서 온갖 탄압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헌신한 점을 매우 높게 인정받았다.
그의 업적 자체에는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으나 일본인이었다는 점과 사회주의 노동운동가였다는 점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데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
2001년부터 서훈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2004년에 이르러 훈장이 추서되었다. 추서 당시 유일한 일본인 건국훈장 수훈자였고 2018년 후세 다쓰지 본인이 직접 변호했던 가네코 후미코에게 애국장이 추서되면서 일본인 건국훈장 수훈자가 2명이 되었다.[14]
3. 대한민국의 평가
위에서 말했듯 그가 변호했던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인으로서 건국훈장을 수여받았을 정도로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다.한국사 교과서에는 지학사 교과서[15]를 제외하면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동아시아사 교과서에는 등장한다.
2017년 영화 《박열》에 등장하며 야마노우치 타스쿠가 연기했다.[16]
2019년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시 재조명되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도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다뤄졌다.#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2023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4. 일본 내 평가
언론, 학자들의 이야기를 담는다.5. 기타
-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는 후세의 생가가 있으며 이시노마키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센다이역에서 센세키선이나 센세키토호쿠라인 열차를 타는 것을 추천한다. 현재 생가는 평범한 가정집이다. 생가의 맞은 편에는 후세 포목점이 있다. 이시노마키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센다이역에서 열차를 탈 수도 있고 직통 버스편도 있다.
- 이시노마키의 あけぼの南公園(아케보노미나미코엔)에는 후세가 남긴 말인 "살아있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가 적힌 커다란 비석이 있다. 2012년 동일본 대지진 직후 아케보노미나미 공원이 지진 피해자들의 임시 대피소 역할을 하면서 가건물들과 어지럽게 섞여 있기도 했다. 게다가 일본에서 그의 인지도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라서 다소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다.구글 스트리트뷰# 2013년 5월 촬영 사진으로 가운데 빨래대가 있는 부분 옆의 비석.
- 일련정종 신도이다. 원래 일본 정교회에 심취했으나 결혼하면서 아내의 종교인 일련정종으로 개종했다. 사후에는 일련정종 사찰인 죠자이지(常在寺)에 안치되었다. 사찰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주택가 한 가운데 있다. JR이나 도쿄 메트로 이케부쿠로 역에서 도보 10분 이내에 도착 가능하다. 죠자이지에 방문하면 후세 가의 묘소를 참배할 수 있고 일본어가 통하지 않더라도 경내에 한국인 스님이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17] 절의 정면 계단 왼쪽에 보면 공간이 있는데, 그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묘소가 있다.
- 선천적 색맹이었다.
- 배우자인 미츠코는 생계를 위해 하숙집을 했는데 후세가 조선을 위해 이모저모로 노력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하숙생이 되었다고 한다. 외손자인 스스무씨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인 유학생들이 전쟁 때 방공 훈련 등 이모저모로 도움을 주었으며 심지어 조선인 우유 배달부가 자택에 우유를 무료로 배달해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천황제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지지하고 있는 제도를 인위적으로 해체하기보다는 황실의 단절로 자연 소멸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았다.[18] 히로히토의 포츠담 선언 수락에는 높이 평가했다.
- 장남인 후세 간지[19]가 쓴 평전이 있다. 기자들 사이에서 아버지 이름이 오가기에 부끄러워서 'F씨' 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를 지칭하고 책에서도 F씨로 통일했는데 이 'F씨'라는 것 때문에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
- Hearts of Korea에서는 일본의 치안유지법에 반대한게 크게 알려져서 일본의 민주혁명을 이끌고 대통령이 된다.
- 전문 사이트가 있다(일본어).
6. 관련 문서
[1] 한국에서 불리던 별명이다.[2] 창립 멤버중 하나이다.[3] 유교 성리학 → 일본 정교회 → 불교 (일련정종)
한때 일본 정교회 신자였지만 아내를 따라 일련정종으로 개종하였다.[4] 그의 신념을 응축한 문구라고 할 만하다. 평생 동안 일제의 잘못된 정책과 일제의 한국, 타이완 통치를 반대한 몇 안 되는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상재사에 있는 후세 다쓰지를 기리는 '후세 다쓰지의 비'에 이 문구가 적혀 있다. 후세의 고향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아케보노 미나미 공원에도 이 문구를 적은 대형 기념비가 있다. 별도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자기 일생의 모든 일을 스스로 마무리 짓기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어갈 수 있도록 물려줄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5] 20세기에 발발했던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뻔했으며 21세기에도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이해가 충돌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한국의 광복뿐만 아니라 6.25 전쟁의 휴전까지 보고 사망했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이라는 2번의 전쟁을 치르며 기어이 한반도를 장악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을 일으켜 아시아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것을 직접 목격했던 것도 반영된 결과다.[6] 가수 엔도 마사아키의 고향이기도 하다.[7]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의 증언에 의하면 후세가 어릴 적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에 파병된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이 조선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등 당시 경험을 영웅담마냥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당시 후세는 그런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과 그걸 재미있게 듣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너무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8] 1차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 천황의 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감형을 거부한 뒤 이듬해 죽었다. 천황이 내린 명(감형)을 거스르고자 자살하였다고도 하고 당국의 암살 설도 있으나 확증은 없다.[9] 옴진리교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사망한 사카모토 츠츠미가 여기 소속이다.[10] 패전 이후 살길이 막막해진 재일동포들은 막걸리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일본은 그걸 두고 불법이라며 재일동포들을 잡아갔다. 그러자 후세 다쓰지는 "그들을 억지로 끌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며, 그들의 생계수단마저 막고 있다"고 법정에서 일본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11] 주범 타케우치의 무죄를 주장했다.[12] 이유는 공산당원인 변호인들이 자신들의 의뢰인이자 같은 공산당원들의 무죄판결을 위해 비공산당원인 타케우치를 주범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이후 타케우치의 단독범행으로 인정되어 공산당원들은 무죄를 받았고 재판은 타케우치의 단독재판으로 진행되었다.[13] 2024년 기준 89세. 외조부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 시절에 출생했다.[14] 다만 과거 가네코 후미코의 국적은 일본이었지만 이후 아나키스트, 즉 무국적자가 되었다.[15] 박열, 후미코와 함께 소개되었다.[16] 임진왜란 1592에서 카메이 코레노리 역을 맡은 배우다.[17] 2016년 초 기준[18] 여담으로 현재 일본 황실이 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황실에 남자가 아키히토, 마사히토, 나루히토, 후미히토, 히사히토 딱 5명뿐이며 이 중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히사히토 1명뿐인 상황이기 때문. 이걸 해결하겠다고 온갖 아이디어(구 황족 복귀, 여계계승 인정, 황별섭가 복귀, 이혼 및 후궁(...) 인정, 나루히토의 딸 아이코 공주와 구황족 출신 남자 혹은 히사히토의 결혼 등)가 나오고 있지만 전부 저마다 문제가 있어서 진전이 없다. 황별섭가 복귀는 지지를 별로 못 받고, 아이코와 히사히토의 결혼은 일본 법으로는 가능하지만 양측의 아버지인 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사이가 워낙에 나쁘며, 후궁 허용은 그냥 정신나간 소리 취급. 그나마 어느 정도 지지를 받는 것이 구황족 복귀, 여계 계승, 아이코 공주와 구황족 일원의 결혼 정도다.[19] 布施柑治, 1906~1978. 니혼게이자이 신문 기자로 활동했다.
한때 일본 정교회 신자였지만 아내를 따라 일련정종으로 개종하였다.[4] 그의 신념을 응축한 문구라고 할 만하다. 평생 동안 일제의 잘못된 정책과 일제의 한국, 타이완 통치를 반대한 몇 안 되는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상재사에 있는 후세 다쓰지를 기리는 '후세 다쓰지의 비'에 이 문구가 적혀 있다. 후세의 고향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아케보노 미나미 공원에도 이 문구를 적은 대형 기념비가 있다. 별도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자기 일생의 모든 일을 스스로 마무리 짓기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어갈 수 있도록 물려줄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5] 20세기에 발발했던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번질 뻔했으며 21세기에도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이해가 충돌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는 한국의 광복뿐만 아니라 6.25 전쟁의 휴전까지 보고 사망했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일본이 청일전쟁, 러일전쟁이라는 2번의 전쟁을 치르며 기어이 한반도를 장악하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을 일으켜 아시아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것을 직접 목격했던 것도 반영된 결과다.[6] 가수 엔도 마사아키의 고향이기도 하다.[7]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의 증언에 의하면 후세가 어릴 적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에 파병된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이 조선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등 당시 경험을 영웅담마냥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당시 후세는 그런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사람과 그걸 재미있게 듣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너무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8] 1차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 천황의 명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감형을 거부한 뒤 이듬해 죽었다. 천황이 내린 명(감형)을 거스르고자 자살하였다고도 하고 당국의 암살 설도 있으나 확증은 없다.[9] 옴진리교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사망한 사카모토 츠츠미가 여기 소속이다.[10] 패전 이후 살길이 막막해진 재일동포들은 막걸리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일본은 그걸 두고 불법이라며 재일동포들을 잡아갔다. 그러자 후세 다쓰지는 "그들을 억지로 끌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며, 그들의 생계수단마저 막고 있다"고 법정에서 일본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11] 주범 타케우치의 무죄를 주장했다.[12] 이유는 공산당원인 변호인들이 자신들의 의뢰인이자 같은 공산당원들의 무죄판결을 위해 비공산당원인 타케우치를 주범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이후 타케우치의 단독범행으로 인정되어 공산당원들은 무죄를 받았고 재판은 타케우치의 단독재판으로 진행되었다.[13] 2024년 기준 89세. 외조부와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 시절에 출생했다.[14] 다만 과거 가네코 후미코의 국적은 일본이었지만 이후 아나키스트, 즉 무국적자가 되었다.[15] 박열, 후미코와 함께 소개되었다.[16] 임진왜란 1592에서 카메이 코레노리 역을 맡은 배우다.[17] 2016년 초 기준[18] 여담으로 현재 일본 황실이 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황실에 남자가 아키히토, 마사히토, 나루히토, 후미히토, 히사히토 딱 5명뿐이며 이 중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히사히토 1명뿐인 상황이기 때문. 이걸 해결하겠다고 온갖 아이디어(구 황족 복귀, 여계계승 인정, 황별섭가 복귀, 이혼 및 후궁(...) 인정, 나루히토의 딸 아이코 공주와 구황족 출신 남자 혹은 히사히토의 결혼 등)가 나오고 있지만 전부 저마다 문제가 있어서 진전이 없다. 황별섭가 복귀는 지지를 별로 못 받고, 아이코와 히사히토의 결혼은 일본 법으로는 가능하지만 양측의 아버지인 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사이가 워낙에 나쁘며, 후궁 허용은 그냥 정신나간 소리 취급. 그나마 어느 정도 지지를 받는 것이 구황족 복귀, 여계 계승, 아이코 공주와 구황족 일원의 결혼 정도다.[19] 布施柑治, 1906~1978. 니혼게이자이 신문 기자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