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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반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B]: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개최일 연기, 고척 스카이돔 중립경기 개최. | }}}}}}}}} |
[[KBO 한국시리즈|]] 역대 KBO 한국시리즈 | ||||
1993년 해태 타이거즈 | → | 1994년 LG 트윈스 | → | 1995년 OB 베어스 |
1994년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 | ||
1994 KBO 준플레이오프 | 1994 KBO 플레이오프 | 1994 KBO 한국시리즈 |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 |
LG 트윈스 | |
MVP | 김용수[1] |
[clearfix]
1. 개요
1994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 |
태평양 돌핀스 | LG 트윈스 |
3차전, 4차전 하이라이트 영상
1994시즌 페넌트레이스 1위 LG 트윈스와 2위 태평양 돌핀스가 맞붙었던 시리즈. LG 트윈스가 4연승을 거두며 V2를 달성했다. 한국시리즈 MVP는 1990년에 이어 김용수가 차지했다.[2] 김용수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MVP를 2번 차지한 선수가 되었다. 이후 이종범이 1997년, 정민태가 2003년, 오승환이 2011년, 양의지가 2020년에[3] 2번의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였다.
4연승으로 싱겁게 끝났지만, 2차전만 빼고는 모두 한 점차 접전을 펼친 시리즈이기도 했다.[4] 특히 1차전에 태평양 돌핀스의 좌완 에이스 김홍집의 141구 완투패[5]가 명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LG팬들에게는 추억의 리즈 시절이나 해도 다름 없었던 시절로 이 우승 이후 2023년까지 29년 동안 우승 기록이 없었다.[6]
태평양 돌핀스도 비록 아쉽게 스윕패를 당했지만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 그리고 태평양 초창기의 암울한 만년 꼴찌 시절을 딛고 인천광역시 연고 프로팀 최초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달성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받을 만한 시즌을 보냈다. 특히 이때 구축한 정민태, 정명원, 최창호, 김홍집 등 막강 투수진은 이후에 인수되는 현대 유니콘스로 이어져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에 군림한 투수 왕국 현대 왕조의 기반을 닦은 시리즈로 평가할 수 있다. 1994년 준우승은 이후 1996년 준우승, 1998년 우승으로 연결되며 인천팬들의 패배의식을 떨쳐버리게 하는 시작이 되었으며 비록 2000년 현대가 인천을 떠난 이후에도 잔류한 삼청태현 팬들에게는 이후 2006년까지 13년간 1994-1996-1998-(1999)[7] -2000-2001-2002-2003-2004-2006[8]으로 이어지는 4강 황금기의 시작으로 1994년이 회자된다. 삼청태현 팬에게는 정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아련한 시리즈.[9][10]
한편 정동진 전 태평양 감독은 1990년에 이어[11] 1994년에도 LG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무르는 바람에, 2023년 이강철 kt wiz 감독이 준우승을 하기 이전까지 LG 트윈스를 상대로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거둔 유일한 감독이란 기록이 있었다.
1990년 한국시리즈와 묘하게 공통점이 많다. 둘 다 LG가 4연승으로 스윕했고, 한국시리즈 MVP는 같은 선수가 차지[12], 상대팀 감독이 동일인이라는 것과 큰 점수차 승부, 11회말 끝내기 승부, 역전 승부 등이 각각 한 번씩 존재한다는 것[13], 그리고 두 시리즈 모두 일요일에 끝났다는 점이 있다. 1차전~3차전 승리투수도 김용수-정삼흠-김기범이다.[14] 거기다 LG가 원정팀인 상태에서 우승을 거뒀다.[15] 중계한 방송국 순서도 MBC-KBS-MBC-KBS다.[16] 덧붙여서 1990년 한국시리즈는 양팀의 모기업이 전자업계 라이벌[17]이었고, 1994년 한국시리즈는 양팀 모기업이 화장품 및 생활용품 라이벌[18]이었다는 점도 있었다. 먼 훗날 세 번째로 정규시즌 1위 확정 후 직행한 2023년 한국시리즈는 양팀의 모기업이 통신업계 라이벌전이 된다.[19]
1994년 한국시리즈는 원년 이후 도중에 모기업 및 팀명이 바뀐 팀끼리 처음 맞대결한 시리즈이다.[20][21] 그리고 양팀 감독인 이광환, 정동진 이 두 감독은 각각 자율야구와 선수를 혹사시키지 않는 관리야구[22]의 정점에 달한 인물들이라 최근들어 선수 혹사와 권위주의 등으로 지탄을 받는 감독들에 비해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지도자들이기도 했다.
LG 트윈스의 이광환이 투수 분업화 도입을 통해 KBO의 경기 내적인 요소를 바꿨다면, 정동진은 과감하게 팀의 주축 투수들을 재활시키고 그것이 성공하면서 경기 외적인 요소를 바꿨다. 아무튼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대결한 두 감독이 우리나라 투수들의 선수생명을 연장시키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런 점을 들어서 "1994년은 한국프로야구의 기념비적 분기점"이라고 평가하는 주장도 있을 정도.
또한 구단 연고지가 비수도권인 영남·호남·충청 지역이 아닌 팀끼리 붙은 최초의 시리즈이자 수도권 도시 연고팀끼리 붙은 최초의 시리즈이기도 하다.[23] 특히 양 팀의 홈구장인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과 숭의야구장을 지하철로 오갈 수 있다고 해서[24][25] "지하철 시리즈"라는 이름이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붙은 시리즈[26]이기도 하다.
2. 시즌과 플레이오프까지의 전개
1994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LG와 태평양이 4강에 들 것이라는 예상을 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시 LG는 주력 타자였던 송구홍이 군입대로, 김상훈은 한대화와 맞트레이드로 해태로 이적했고, 태평양은 지난 시즌 투수진들의 연쇄 부상으로 꼴찌로 처진 데다가 그 투수들이 살아날지도 미지수였고, 타자도 김경기, 윤덕규, 김동기를 빼면 별 볼일 없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시즌이 시작하자 두 팀은 완전히 달라지는데 LG는 류지현-김재현-서용빈-인현배 등 신인들이 투타에서 맹활약하고 한대화와 노찬엽, 김동수도 타선에서 제몫을 해주었으며 이상훈-김태원-정삼흠의 선발 3인방과 차동철-김용수등의 불펜진으로 구성된 투수진도 탄탄했다. 태평양 또한 김홍집-안병원-최상덕-최창호-정민태의 선발진이 1994시즌 돌풍을 일으켰고, 마무리 정명원은 역사상 최초로 40세이브를 기록했으며 '미스터 인천' 김경기는 리그 2위인 23홈런을 쳤고 윤덕규와 김동기도 준수한 활약을 했다.
시즌이 끝나자 LG와 태평양은 각각 1위, 2위를 차지하는 대이변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10월 초부터 시작한 KBO 포스트시즌은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과 겹쳐 별로 주목을 못 받았다.[27]
준플레이오프에서는 당시 공동 3위를 차지했던 한화 이글스와 해태 타이거즈가 만났는데, 한화가 해태를 2연승으로 물리치며[28]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플레이오프는 정규시즌 2위 태평양과 한화의 대결이었는데 3차전 연장 11회초 김경기의 홈런으로[29] 태평양이 한화를 3연승으로 초살, 인천 연고 팀으로는 12년 만이자 리그 출범 이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다.[30]
정규시즌 1위 LG와 태평양의 대결이 성사되면서 처음으로 경인선 시리즈가 열리게 되었는데, 당시 팀타율이 0.244로 최하위를 기록한 태평양의 타선이 LG 투수진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유독 LG전에 약한 정명원이 LG 타자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가 태평양의 고민이었다. 반대로 LG는 떨어진 경기 감각과 그 전 해 포스트시즌에서 홈경기 전패를 당한 안 좋은 기억이 있었고, 해결사 한대화에 대한 상대 투수진의 견제를 뚫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3. 일정
1994 한국시리즈 태평양 돌핀스 VS LG 트윈스 | |||||||
<rowcolor=#FFFFFF> 경기 | 경기 시간 | 경기장 | AWAY | 결과 | HOME | 방송사 | |
1차전 | 10월 18일 18:00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태평양 돌핀스 | 1 | 2 | LG 트윈스 | |
2차전 | 10월 19일 18:00 | 0 | 7 | ||||
3차전 | 10월 22일 14:00 | 숭의야구장 | LG 트윈스 | 5 | 4 | 태평양 돌핀스 | |
4차전 | 10월 23일 14:00 | 3 | 2 | |
4. 엔트리
4.1. LG 트윈스
LG 트윈스 199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 ||
감독 | 1명 | 이광환 |
코치 | 6명 | 김명성, 천보성, 최정우, 김용달, 오영일, 유종겸 |
투수 | 10명 | 김용수, 정삼흠, 김태원, 차동철, 김기범, 민원기, 이상훈, 강봉수, 인현배, 차명석 |
포수 | 3명 | 김동수, 서효인, 김정민 |
내야수 | 8명 | 한대화, 김선진, 윤찬, 이종열, 박종호, 서용빈, 류지현, 허문회 |
외야수 | 5명 | 김영직, 노찬엽, 박준태, 최훈재, 김재현 |
4.2. 태평양 돌핀스
태평양 돌핀스 199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 ||
감독 | 1명 | 정동진 |
코치 | 5명 | 김재박, 김시진, 고원부, 정진호, 금광옥 |
투수 | 8명 | 박은진, 정명원, 정민태, 가내영, 안병원, 최상덕, 최창호, 김홍집 |
포수 | 2명 | 김동기, 장광호 |
내야수 | 9명 | 김경기, 이숭용, 김성갑, 하득인, 손차훈, 김용국, 권준헌, 염경엽, 이근엽 |
외야수 | 6명 | 윤덕규, 여태구, 이희성, 김인호, 계기범, 김갑중 |
5. 결과
5.1. 1차전
한국시리즈 1차전, 10월 18일 화요일, 18:00 ~ 22:00 (4시간),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R | H | E | B |
태평양 | 김홍집 | 0 | 0 | 0 | 0 | 0 | 0 | 1 | 0 | 0 | 0 | 0 | 1 | 6 | - | - |
LG | 이상훈 | 0 | 0 | 1 | 0 | 0 | 0 | 0 | 0 | 0 | 0 | 1X | 2 | 5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송인득 | 해설: 허구연[타사중계1] |
- 승리: 김용수 (8회, LG)
- 패배: 김홍집 (완투, 태평양)
- 홈런: 김선진 (11회 1점, LG)
LG의 선발 투수는 이상훈, 태평양의 선발 투수는 김홍집. 3회말에 LG가 서용빈의 2루타에 이은 김동수의 보내기번트, 류지현의 희생 플라이로 선취점을 얻어냈다. 반면, 태평양은 계속해서 득점권 찬스를 만들어내고도 이상훈의 구위에 완전히 눌리면서 작전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다 7회초 김동기의 2루타[32]에 이어 왼손투수 상대 전문 대타로 쏠쏠히 활약해 온 하득인의 깨끗한 좌전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며 스코어 1:1을 만들었다.
이후 LG는 이상훈에 이어 차동철, 김용수[33]가 이어던지며 태평양의 타선을 봉쇄했고, 태평양은 김홍집이 11회말 1사까지 140구에 육박하는 공을 홀로 던지며, 승부의 추는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운명의 11회말 선두타자 류지현이 1루수 땅볼로 물러나면서 1아웃, 다음타자는 6회말부터 최훈재의 대주자로 나온 김선진. 시즌 타율도 2할 6푼에 홈런도 1개 타점도 7개에 불과했을 정도로 대주자와 대타로만 나왔던 선수였다. 김홍집의 141구째 슬라이더가 김선진을 향해 날아왔고...
역대 KBO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 달성자 명단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순서 | 달성자 | 소속팀 | 달성 일자 | 달성 경기 | 상대 투수 | 상대팀 | 달성 구장 | 비고 |
1 | 김선진 | LG 트윈스 | 1994년 10월 18일 | 1차전 | 김홍집 | 태평양 돌핀스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역대 최초 KS 끝내기 홈런 | |
2 | 마해영 | 삼성 라이온즈 | 2002년 11월 10일 | 6차전 | 최원호 | LG 트윈스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최초 우승 확정 끝내기 홈런 | |
3 | 나지완 | KIA 타이거즈 | 2009년 10월 24일 | 7차전 | 채병용 | SK 와이번스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34] | 최초 시리즈 최종전 우승 확정 끝내기 홈런[35] | |
4 | 김강민 | SSG 랜더스 | 2022년 11월 7일 | 5차전 | 최원태 | 키움 히어로즈 | 인천 SSG 랜더스필드 | 최초 다득점&대타&역전 끝내기 홈런 | }}} |
왼쪽~ 큽니다! 왼쪽~ 넘어갈 듯~ 넘어갑니다~ 홈~런~! 끝내기 홈런~ 김선진! 2대1! 끝내기 홈런~ 김선진!
LG 김선진의 1차전 끝내기 홈런 당시 MBC 송인득 캐스터의 중계 멘트
그는 그 공을 통타. 좌중간 담장을 넘기는 끝내기 홈런으로 4시간이 넘는 승부를 마감한다. 한국시리즈 사상 첫 끝내기 홈런이다. 이후 한국시리즈 끝내기 홈런은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과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 2022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나오는데 2002년과 2009년은 시리즈를 끝내는 끝내기 홈런이다.LG 김선진의 1차전 끝내기 홈런 당시 MBC 송인득 캐스터의 중계 멘트
태평양은 강력한 투수력과 부실한 타력의 부조화라는 전통적 팀 컬러가 이 경기에서 그대로 나타났는데 8회초 1사 만루를 만들고 선발 이상훈을 끌어내리고도 김동기가 김용수의 묘수에 걸려들면서 병살타를 친 것이 치명타가 되고 말았다.
여담으로 이 경기에서 열렬한 야구팬으로 알려진 김영삼 전 대통령이[36] 시구를 하고 9회까지 경기를 관람했다.[37] 현직 대통령이 한국시리즈에서 시구한 것은 사상 최초의 일.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듬해인 1995년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도 시구를 한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이 각각 2013년 한국시리즈 잠실 3차전과 2017년 한국시리즈 광주 1차전에서 시구를 했다. 다른 대통령 시구는 1982년 원년 개막전의 전두환, 2003년 올스타전에서의 노무현이 있다. 참고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프로야구 출범 이전인 1967년 제1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때 시구를 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치러진 2003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서울특별시장 신분으로 시구를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 초반이었던 2008년 시즌 개막전에서도 시구를 할 예정이었으나 계획이 사전에 유출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비록 김홍집은 혼신의 역투[38]를 하고도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완투패를 기록하고 말았으나 1984년 최동원의 40이닝 역투, 1993년 박충식의 연장 15회 역투와 함께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훗날 인천 출신의 삼청태 키드였던 작가 김은식이 쓴 책 '야구의 추억' 1권의 부제인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는 것은 바로 김홍집이 1차전 때 던졌던 투구수를 의미한다.
5.2. 2차전
한국시리즈 2차전, 10월 19일 수요일, 18: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태평양 | 안병원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3 | - | - |
LG | 정삼흠 | 0 | 1 | 0 | 0 | 3 | 0 | 3 | 0 | - | 7 | 10 | - | - |
중계방송사: [39]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타사중계2] |
LG는 정삼흠(15승 9패, 평균자책점 2.95), 태평양은 안병원(11승 10패, 평균자책점 3.40)이 선발 투수로 나왔다. LG는 2회말 노찬엽의 안타와 안병원의 실책으로 만든 2사 3루의 찬스에서 김동수가 적시타를 기록하며 선취득점을 한다. 5회말 태평양은 최상덕으로 투수를 바꾸는데 이것이 태평양에게 결정적인 패인이 된다. LG가 박종호의 3루타로 한 점을 더 달아나자 태평양은 최창호까지 투입하지만, LG가 특급신인 유지현-김재현의 연속 안타와 폭투로 2점을 더 보태면서 스코어 0:4로 달아났다. 이후 LG는 7회말 서용빈의 2타점 2루타와 노찬엽의 적시타가 터지며 7점차까지 벌여놓았다. LG 선발 정삼흠은 9회까지 태평양 타선을 꽁꽁 막으며 역대 한국시리즈 네 번째 완봉승을 이뤄냈다.
역대 KBO 한국시리즈 완봉 달성자 명단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순서 | 달성자 | 소속팀 | 달성 일자 | 달성 경기 | 상대팀 | 비고 |
1 | 최동원 | 롯데 자이언츠 | 1984년 9월 30일 | 한국시리즈 1차전 | 삼성 라이온즈 | 역대 최초 | |
2 | 문희수 | 해태 타이거즈 | 1988년 10월 22일 | 한국시리즈 3차전 | 빙그레 이글스 | ||
3 | 김태한 | 삼성 라이온즈 | 1993년 10월 19일 | 한국시리즈 2차전 | 해태 타이거즈 | 좌완 최초 | |
4 | 정삼흠 | LG 트윈스 | 1994년 10월 19일 | 한국시리즈 2차전 | 태평양 돌핀스 | ||
5 | 이강철 | 해태 타이거즈 | 1996년 10월 19일 | 한국시리즈 3차전 | 현대 유니콘스 | 언더핸드 최초 | |
6 | 정명원 | 현대 유니콘스 | 1996년 10월 20일 | 한국시리즈 4차전 | 해태 타이거즈 | 노히트 노런 | |
7 | 정민태 | 현대 유니콘스 | 2003년 10월 25일 | 한국시리즈 7차전 | SK 와이번스 | 헹가래 투수 | |
8 | 다니엘 리오스 | 두산 베어스 | 2007년 10월 22일 | 한국시리즈 1차전 | SK 와이번스 | 최소 투구수(99구) | |
9 | 아킬리노 로페즈 | KIA 타이거즈 | 2009년 10월 22일 | 한국시리즈 5차전 | SK 와이번스 | ||
10 | 양현종 | KIA 타이거즈 | 2017년 10월 26일 | 한국시리즈 2차전 | 두산 베어스 | 최다 탈삼진(11K) | }}} |
5.3. 3차전
한국시리즈 3차전, 10월 22일 토요일, 14:00, 숭의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LG | 김태원 | 0 | 0 | 0 | 0 | 0 | 2 | 3 | 0 | 0 | 5 | 8 | - | - |
태평양 | 정민태 | 0 | 0 | 0 | 4 | 0 | 0 | 0 | 0 | 0 | 4 | 7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양진수 | 해설: 허구연[타사중계3] |
- 승리: 김기범 (4회, LG)
- 패배: 정명원 (6회, 태평양)
- 세이브: 김용수 (7회, LG)
- 심판: 주심 조종규/1루 김호인/2루 황석중/3루 이규석/좌선 임채섭/우선 허운
태평양 타선이 한국시리즈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던 김태원을 상대로 4회말에 대거 4점을 뽑고, 정민태가 140대의 속구를 바탕으로 5회까지 퍼펙트로 호투하면서 태평양은 반전의 기회를 얻는 듯했다.
그러나 6회 공격에서 LG는 선두 타자 김영직의 우익 선상 2루타로 정민태의 퍼펙트 행진을 깼으며 2사 2루에서 김재현의 타구가 태평양 우익수 김갑중의 낙구 지점 판단 실수로 인해 2루타가 되면서 1점 만회한다. 후속 타자 서용빈의 타구 역시 배트가 부러지는 와중에 바가지 성 안타가 되어 스코어 2:4까지 추격했다. 태평양은 마무리 투수 정명원을 투입했지만 7회초 2사 1루, 2루에서 류지현의 좌전 동점 적시타와 좌익수 윤덕규의 홈 송구를 포수였던 김갑중이 흘리는 실책을 범하며 역전 주자 박종호까지 홈 인. LG가 스코어 5:4로 역전한다.
이후 태평양은 4차전 선발로 내정한 김홍집을 구원등판시키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타선이 LG 클로저 김용수를 공략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무리수가 되었다. 태평양으로서는 이길 수 있었던 경기였으나 실책으로 분위기를 내줬고, 마무리 정명원마저 중요한 순간 무너지면서 시리즈가 LG로 넘어가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5.4. 4차전
한국시리즈 4차전, 10월 23일 일요일, 14:00, 숭의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LG | 이상훈 | 2 | 0 | 1 | 0 | 0 | 0 | 0 | 0 | 0 | 3 | 8 | - | - |
태평양 | 최창호 | 0 | 0 | 1 | 0 | 1 | 0 | 0 | 0 | 0 | 2 | 7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 | 캐스터: 유협 | 해설: 정순명[타사중계4] |
- 승리: 이상훈 (선발, LG)
- 패배: 최창호 (선발, 태평양)
- 세이브: 김용수 (8회, LG)
- 홈런: 서용빈 (3회 1점, LG)
4차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할 것으로 예상된 김홍집을 3차전에 구원투수로 써버린 태평양은 최창호를 선발 투수로 내보냈고, LG는 예상대로 이상훈을 등판시켰다. 1회초 1사 2루, 3루의 찬스에서 한대화가 태평양 선발 최창호를 중전 적시타로 두들겨 2점을 선취한 LG는 3회초 서용빈이 바뀐 투수 최상덕으로부터 우측 담장을 넘기는 솔로포를 뽑으며 스코어 3:0으로 앞서갔다.
이후 태평양은 3회말, 5회말 공격 때 각각 1점을 뽑으며 1점차 까지 접근했지만 고비마다 타선이 침묵을 지키며 더 이상의 점수를 뽑지 못했고, LG는 8회부터 등판한 김용수가 2이닝을 꽁꽁 틀어막으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9회말 태평양도 선두타자 김동기의 안타와 김용국의 보내기 번트로 마지막 희망을 잡았지만, 염경엽의 3루 땅볼 이후 김성갑의 투수 땅볼로 경기가 끝났고, 투수강습 땅볼을 잘 처리한 김용수는 포수 김동수와 감격의 포옹을 나누며[44] 1994년 시즌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태평양으로서는 2차전을 제외한 1차전, 3차전, 4차전 모두 1점차의 접전을 벌인데다 1차전, 3차전의 경우 승기를 갖고 있었기에 정말 아쉬웠던 시리즈였다.
여담으로 LG는 1990년 한국시리즈 1차전부터 이 경기까지 한국시리즈 8연승을 내달렸다.[45]
우승의 순간 |
6. 총평
6.1. 우승: LG 트윈스
6.2. 준우승: 태평양 돌핀스
7. 우승 반지
이상훈의 우승 반지로 보인다. |
8. 여담
- KBO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권 팀들의 한국시리즈 대결이다.[47]
- 1994년의 우승으로 LG는 해태, 롯데에 이어 3번째로 V2를 달성한 팀이 된다. 이렇게 가장 먼저 V2를 달성한 3팀이 10여년 뒤에는 엘롯기라고 묶이며 하위팀의 대명사가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 LG는 1990년에 이어서 이 시리즈에서도 4연승 스윕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팀 우승 2번을 모두 스윕으로 하는 진기록을 세웠다.[49]
- LG는 1990년에 이어서 이 시리즈도 일요일 원정경기에서 4승째를 거뒀다.
- 1990년과 포스트시즌이 준플레이오프 2:0, 플레이오프 3:0, 한국시리즈 4:0으로 똑같이 끝났다.[50]
- LG의 이 시리즈 승리투수는 1990년과 같은 1차전 김용수, 2차전 정삼흠, 3차전 김기범으로 같고 1990년에 김용수와 김기범이 선발승을 하였고 이 시리즈 구원승으로 이뤄낸것과 정삼흠이 1990년에 구원승을 하였고 이 시리즈에서 선발승을 한 것이 다르다.
- 이 시리즈 도중에[51]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터졌지만 28년 후처럼 정부 차원에서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지는 않았다.
- 양팀의 감독 이광환과 정동진은 당시 40대의 젊은 감독으로서 이른바 '신사고'를 야구계에 과감하게 도입한 지도자였다. 이광환이 미국에서 배운 투수 분업화의 국내 도입을 통해 경기 내적인 요소를 바꿨다면, 정동진은 과거 감독이 주도한 혹사로 인해 망가져버린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등 젊은 투수 3인방과 정민태 등 팀의 주축 투수들을 과감히 재활시키는 리빌딩을 실행하고 성공하면서 경기 외적인 요소를 바꿨다고 할 수 있다.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대결한 두 감독이 우리나라 투수들의 선수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는 점에서 1994년은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기념비적 분기점이라고 평가하는 주장도 있을 정도.
- 1994년 폭염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94년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무더운 여름의 한 해였다. 이런 가운데 가장 무더운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역대 최고의 시즌을 만들며 우승을 했기 때문인지 LG 올드팬들 중엔 날씨가 더워지면 은근히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52]
- 2010년대까지 각종 스포츠에서 응원용으로 사용되었던 막대풍선을[53] 이 때 LG 트윈스가 최초로 사용하였다. 정확하게는 2차전에 사용했다. 1차전은 노란색 손수건을 활용했다.
- 5차전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이자 그 해 한국시리즈 직전에 열린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의 금메달로 당시에는 엄청난 국민적 영웅이었던 황영조가 시구를 할 예정이었으나 4차전에서 시리즈가 종료되면서 아쉬워 하는 팬들이 많았다.[54]
- 1994년 우승 멤버들은 이후에도 구단 행사에 꽤 많이 초청되고 있다. 하지만 노찬엽, 서용빈 등 코치로서 팀에 해악을 끼친 멤버들도 상당수 있어 이상훈, 김용수, 김재현 등 팬들에게 좋게 추억되는 선수들과 나쁜 기억으로 남은 선수들이 명확히 갈리고 있다.
- 태평양의 4연패 스윕으로 맥 없이 진것 처럼 기억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1차전, 3차전, 4차전이 1점차의 승부였고 특히 1차전은 연장 혈투, 3차전은 태평양이 유리했던 점을 보았을 때 생각외의 접전이었다. 특히 1차전, 4차전의 경우 흐름상으로 태평양이 앞서나가거나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럿 있었지만 훗날 정동진 전 감독이 술회했듯이 선수들이 모두 초긴장 상태라[55]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3차전은 외야수의 만세 사건 하나로 분위기가 반전되어 5이닝 퍼펙트 피칭이 빛이 바래버린 케이스.
- 2020 시즌 종료 후 류지현으로 개명한 유지현[56]이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는 처음으로 LG 감독이 되었다. 김동수도 LG 수석 코치가 되었다. 그러나 김동수는 2021 시즌 이후 물러나 해설위원이 됐으며 류지현은 2022 시즌 페넌트레이스에서 2위를 차지했으나 플레이오프에서 업셋을 당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며 재계약이 불발되었다. 후임은 공교롭게도 1994년 한국시리즈 준우승 팀 태평양의 주전 유격수였던 염경엽이고, 29년 후 드디어 한국시리즈 직행에 성공했고 29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 프로 데뷔 후 별볼일 없는 성과를 냈던 김선진은 1994년 시즌 직후 방출 예정이었으나 1차전 끝내기 홈런을 계기로 재계약에 성공했고 2000년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다.[57]
- LG와 태평양은 1994년 시즌 개막전과 마지막인 한국시리즈 4차전을 인천 숭의야구장에서 치렀다.[59] 다시 말해 1994년 시즌은 LG와 태평양이 같은 구장에서 시작하고 끝났다.[60][61]
- 1994년 한국시리즈 이후로 1999년과 2006년[62]을 제외하곤 2023년까지 매번 수도권 팀(서울, 인천, 수원 연고팀) 중 한 팀 이상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 LG그룹은 이 당시 '럭키금성그룹'이란 기업명을 사용했는데 LG 트윈스의 이번 우승을 계기로 이듬해인 1995년이 시작되자마자 그룹명을 LG로 바꾸게 되었다는 썰이 돌기도 했다. 정작 LG그룹 자체에서는 이러한 썰을 부인하고 있지만 워낙 LG의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영향을 받지 않았냐는 추측들이 돌았다.
- 2년 뒤인 1996년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가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만 해태 타이거즈에 패해 또 다시 준우승에 머물렀고, 1년 뒤 1997년 LG 트윈스가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우승에 도전했으나 역시 해태 타이거즈에 밀려 결국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1998년 양팀이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에서 맞대결을 펼쳤으며, 태평양-현대는 이때의 패배를 복수하는데 성공하며 구단 사상 첫 우승을 달성했다.
- 이때 태평양에서 주전 유격수로 뛰었던 염경엽은 이후 2023년 LG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9년 만에 정규우승을 확정짓고 21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켰고, 29년 만에 우승을 이뤘다. 한편 LG의 투수 엔트리에 있던 차명석[63]은 29년 후엔 LG의 단장으로써 우승을 이루게 된다.
- 이 시리즈에서 LG는 단 6명의 투수[64]만으로 4경기를 끝내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는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LG가 기록한 4명 등판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다.
- 이 한국시리즈 우승 후 당시 구단주였던 LG그룹 구본무 회장은 다음 해 봄 오키나와에서 아와모리 소주를 3통 사다가 다음에 우승할 때 이 술로 축배를 들자며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 긴 암흑기를 보내는 등 우승과는 무관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고, 구본무 회장은 2018년 5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사이 보관 실수로 술이 증발하는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마침내 29년 만인 2023년 3번째 우승을 하며 29년간 잠들어 있던 술통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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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정보 | 선수단|등번호|유니폼|재계 라이벌 시리즈 | ||||
경기장 | 숭의야구장(1996~1999)|수원종합운동장 야구장(2000~2007)|춘천공설운동장 야구장|원당 야구장(제2 홈구장) |
[1] 최초의 한국시리즈 MVP 2회 수상자. 2023년 오지환이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기 전까지 33년 동안 LG의 단 한 명뿐인 한국시리즈 MVP였으며, 아직까지도 유일한 LG의 투수 한국시리즈 MVP이다.[2] 1990년에는 선발 투수, 1994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MVP를 차지했다.[3] 양의지는 2016년 두산 소속으로, 2020년엔 NC 소속으로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각기 다른 팀에서 한국시리즈 MVP를 한 번씩, 총 2번 차지한 선수가 되었다.[4] 당시만 해도 태평양 돌핀스의 큰 경기 경험이 1989년 플레이오프 이후 가을야구 경험이 전무한 선수단이라 결정적인 고비를 넘지 못하고 실책으로 자멸했다. 결정적인 사례가 후술할 3차전의 김갑중 만세 사건[5] 당시 김홍집으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친 김선진은 입단 후 성적이 좋지 못해 1994 시즌 종료 후 방출 대상이었으나 이 홈런으로 인해 방출되지 않고 살아남았고 2000년 시즌까지 선수 생활을 연장하는데 성공했다.[6] 1994년의 LG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때에는 LG의 야구인들도 팬들도 정말 행복했었다고 한다. 야구장에 갈 때마다 오늘은 어떻게 이길까?라고 생각을 했었다고...[7] 5위였지만 5할 이상.[8] 1994~2007년까지 14년 동안 10회 5할 승률, 포스트시즌 9회 진출, 우승 4회, 준우승 2회. 1995, 1997, 2005, 2007 단 4시즌만 5할 이하.[9] 이후 2008년 히어로즈 창단으로 삼청태현의 인연은 종료. 삼청태현-히어로즈를 응원하는 오래된 팬들에게는 5년의 암흑기 이후 2013년~2022년까지의 10년간 포스트시즌 9회 진출. 준우승 3회의 황금기가 다시 열리며 1994년부터 따지면 28년 동안 포스트시즌 18회 진출. 5할 승률 이상 19회라는 어찌보면 과거 1982~1993까지의 암흑의 10년을 상쇄하는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10] 특히 이 시즌에 경사가 또 있었던 이유는 그 해 7월에 도원역이 개통되어 그동안 야구장을 가려면 동인천역 내지는 제물포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가야 했으나 도원역의 개통으로 접근성이 향상된 시즌이기도 하다.[11] 정동진 전 감독은 1990년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다.[12] 공교롭게도 1990, 1994 리그 MVP는 둘 다 해태 선수가 받았다. 신인왕도 둘 다 한양대 출신의 LG 선수가 받았다.[13] 큰 점수차 승부는 1990년 1차전/1994년 2차전, 11회말 끝내기는 1990년 2차전/1994년 1차전, 역전 승부는 1990년 2차전/1994년 3차전.[14] 1990년에는 김용수-김기범이 선발승, 정삼흠이 구원승이었지만 1994년은 반대로 정삼흠이 선발승, 김용수-김기범은 구원승이었다.[15] 따라서 당연히 우승 순간에 착용한 유니폼 색상도 동일하다. 이 검정 유니폼을 2011년 시즌 중에 갑자기 없애면서 팬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당시에 불펜투수였던 프랜차이즈 선수 중 한 명인 그가 2019년에 단장이 되면서 검니폼을 부활시켜 팬들은 당연히 반가워했다.[16] 왜 SBS가 없는가 라고 궁금해할 수도 있는데 1990년에는 SBS가 개국하기 전이었고 1994년은 SBS가 수도권에서만 나오던 방송이라 단독 중계가 이뤄지기 전이다.[17] 금성사(現 LG전자) vs 삼성전자.[18] 럭키(現 LG생활건강) vs 태평양화학(現 아모레퍼시픽).[19] LG U+ vs KT.[20] 태평양은 1988년 청보 핀토스를 인수, LG는 1990년 MBC 청룡을 인수하며 팀명이 바뀌었다.[21] 신기하게도 1994년과 1998년 한국시리즈의 LG와 태평양-현대 맞대결 이후로 창단 이후 모기업이 변경된 팀끼리 맞붙은 한국시리즈는 전무하다. KIA의 경우는 모기업이 변경된 이후로 LG나 현대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적이 없었고, SK와 키움의 경우는 타 구단의 인수 형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 창단한 구단이며, 두산과 한화는 모기업은 바뀌지 않고 팀명만 변경된 경우다. SK는 2021년부터 신세계로 모기업이 변경되고 팀명도 변경된 상태.[22] 정동진 전 감독의 경우 전전임 감독(...)의 혹사로 인해 몸상태가 안 좋은 여러 선수들이 치료를 받고 컨디션을 제대로 회복할 때까지 오랜 시간 출전을 시키지 않았을 정도였다.[23] 역대 한국시리즈 중에서 영남과 호남 연고팀이 올라오지 못한 시리즈는 이 해 이후 1998년, 2000년, 2003년, 2007년, 2008년, 2018년, 2019년, 2021년, 2022년, 2023년 등 총 10차례가 있었다.[24]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 3개월 전인 1994년 7월에 도원역이 갓 개통됐다. 그 전까지는 제물포역이나 동인천역에서 내려서 공설운동장까지 버스를 타야 했다.[25] 1994년 당시는 수도권 전철 노선이 1호선~4호선에 이 해 9월 부분 개통된 분당선이 전부였다.[26] 지하철 시리즈의 원조는 미국이다. 1921년 뉴욕 양키스와 뉴욕 자이언츠의 사상 첫 월드 시리즈 맞대결 이후 서브웨이 시리즈라는 별칭이 붙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후 1998(도원역~종합운동장역), 2007·2008·2018(문학경기장역~종합운동장역), 2019(종합운동장역~구일역), 2022년(문학경기장역~구일역)에 지하철 시리즈가 성사되었다.[27] 21세기 들어서는 다소 뻔한 대회 결과 탓에 아시안 게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수준이 꽤 적어졌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아시안 게임은 올림픽과 더불어 대한민국 선수단이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주요 스포츠 대회로서 국민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이어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영웅이 된 황영조가 대표적 사례. 그러다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로 아시안 게임에 대한 관심이 차츰 시들해지기 시작한 것이다.[28] 상위 시리즈에 묻혀졌지만 이것도 상당한 파격이었다. 왜냐면 빙그레 이글스 시절을 포함해 한화가 역대 포스트시즌에서 해태를 처음으로 제압한 것이 이때였기 때문이다. 1988년 한국시리즈, 1989년 한국시리즈, 1991년 한국시리즈 등 과거 3번의 맞대결에서는 빙그레가 해태에게 몰살당했다.[29] 플레이오프 3경기 연속 홈런.[30] 이 탓인지 1988년(빙그레 3승), 1989년(해태 3승), 1990년(삼성 3승), 1991년(빙그레 승-빙그레 승-삼성 승-빙그레 승)에 이어 4번째로 비서울 팀끼리의 잠실 플레이오프 중립경기가 성사되지 못했다.[타사중계1] KBS 제2라디오 캐스터 표영준 - 해설 이종도 / SBS 라디오 캐스터 윤영미 - 해설 최동원.[32] 잘맞은 타구는 아니고 투수키를 살짝 넘어 2루 베이스 위로 넘어가는 평범한 타구였으나, 이걸 유지현과 박종호가 쫓아가느라고 2루가 비어버리는 바람에 김동기가 2루까지 진루하게 된 것이다[33] 김용수 본인은 선수시절 경기 중 이 시합이 잊을 수 없는 경기라고 말했다. #[34] 유일하게 중립 구장 경기에서 나온 끝내기 홈런.[35] 1960년 월드 시리즈 빌 매저로스키에 이어 세계 2번째 시리즈 최종전 끝내기 홈런.[36]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태어나고 부산광역시에서 자란 인물답게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었다고 알려져 있다.[37] 당해 4월 9일 잠실에서 열렸던 OB와 쌍방울의 개막전 경기에서도 직접 경기장을 찾아 관람하였다.[38] 1차전 김홍집의 속구가 최대 142km까지 기록되었는데 상대인 이상훈도 최대 143km를 기록했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역투였음을 알 수 있다. 프로에서 평소의 이미지는 김홍집은 속구보다는 제구력, 이상훈은 강속구의 이미지였으니 말이다.[39] 1994년 10월 1일부터 KBS 1TV에서 광고를 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무광고로 시청 할 수 있었던 경기였다. 포스트시즌 전체로 확대하면, 1994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 해태 VS 한화의 경기가 사상 첫 무광고 중계였다.[타사중계2] MBC 라디오 캐스터 한광섭 - 해설 김소식.[타사중계3] KBS 제2라디오 캐스터 윤성원 - 해설 이종도.[42] 3차전이 열릴 예정이었던 10월 21일은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발생한 날이기도 하다. 전국이 초상집 분위기 였던지라 오히려 3차전이 우천으로 열리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을지도.[타사중계4] MBC 라디오 캐스터 고창근 - 해설 허구연.[44] 김용수가 스토킹에서 밝히길 김동수가 먼저 형님이 팔을 먼저 들면 제가 달려오겠다라며 미리 짜놨다고 한다.[45] 이 연승은 1997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해태에게 6:1로 패하면서 끊기게 된다. 만약 이겼다면 2차전을 승리했기에 10연승을 달릴수도 있었다.[46] 먼 훗날인 2023년 LG의 정규리그 우승이 확정되자 1994년 당시 우승의 주역이었던 김용수가 이 사실을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통해 밝혔고 우승 반지 사진도 함께 첨부했다.[47] 이후로는 1998, 2000, 2003, 2007, 2008, 2018, 2019, 2021, 2022, 2023년에 수도권 팀들 간의 한국시리즈가 성사되었고, 이 중 서울팀들 간의 한국시리즈는 2019년 한국시리즈가 유일하다.[48] OB와 삼성이 1982년, 해태와 MBC가 1983년, 롯데가 1984년 한국시리즈를 처음 경험했다. 심지어 원년 구단이 아닌 확장 신생 구단인 빙그레마저도 1군 참가 3년차인 1988년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를 경험했다.[49] 2023년 우승도 1패는 했지만 4연승을 해서 우승하였다.[50] 1990년과 다른점은 1990년에는 4위 삼성이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각각 모두 이겼고, 1994년은 3위 한화가 준플레이오프를, 2위 태평양이 플레이오프를 이겼다는것이 차이가 있다.[51] 2차전 다음날인 10월 21일로 서울특별시에 있던 LG와 태평양 선수단이 인천광역시로 이동하던 날이었는데 이날부터 이틀간 수도권에 비가 내렸다.[52]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후 2020년~2022년에 3년 연속으로 8월 월간 승률 1위를 달성하였다. 이때도 원정 경기에서는 검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2021시즌에는 홈경기가 더 많았고, 무엇보다도 8월 원정 승률은 0.400(2승 1무 3패)로 홈 승률인 0.778(7승 1무 2패)에 비해 썩 좋진 못했다. 다만 오랜만에 정규 시즌에서 우승한 2023년에는 역대급 UTU를 한 KT에 밀려 월간 승률 2위를 달성하였다.[53] 환경 보호 등의 이유로 2020년대부터 자취를 감추었다.[54] 20년 뒤에는 비슷한 이유로 세계 최고의 클로저의 시구가 무산되어 많은 야구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55] 삼청태는 1994년 한국시리즈가 첫 진출이었다.[56] 두음법칙으로 인해 유씨로 살다가 원래 성씨로 다시 쓰게 되었다.[57] LG 입장에선 1차전 승리가 시리즈를 주도할 수 있기 때문에 동점인 상황에서 김용수까지 투입할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상훈과 김용수를 투입한 상황에서 태평양에게 1차전을 내줬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김선진의 끝내기 홈런은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58] 4년 뒤 두 팀은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다시 만나 1차전 LG의 1번 타자로 나왔던 류지현이 6차전 시리즈의 마지막 타자가 되면서 같은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59] LG는 1993년 시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당시 LG가 4위를 하고 OB가 3위를 하면서 최종 순위에서 OB에게 밀리면서 LG는 1994년 개막전을 1993년 당시 8위였던 태평양의 홈에서 치러야 했다. 당시 KBO 리그의 개막전 홈팀은 전년도 순위 기준으로 정해졌다.[60] LG가 한국시리즈 직행 매직넘버를 전부 소멸하고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지은 곳도 같은 경기장이었다.[61] 29년 뒤 V3을 달성할 때도 개막전 수원, 정규시즌 우승 확정일은 휴식일이었는데 전날 매직넘버 1을 남긴 곳도 수원(그런데 LG의 정규시즌 우승 매직넘버가 kt-KIA 경기가 열렸던 수원에서 지워졌다!) 한국시리즈 상대도 수원 연고 kt wiz였기에 기막히게 재연될 뻔했다. 이전처럼 홈 2경기-원정 3경기-홈 2경기였다면 LG와 kt가 이때처럼 수원에서 같이 시작하고 끝날 뻔했다.[62] 공교롭게도 둘 다 한화 이글스 진출 시즌이다. 상대팀은 롯데(1999)와 삼성(2006). 게다가 한화는 빙그레 시절부터 한국시리즈에서 수도권 팀을 상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63] 엔트리에는 있었지만 실제 경기엔 못 나왔다. 선수로서 한국시리즈에 등판한 것은 3년 뒤인 1997년 한국시리즈였다.[64] 이상훈, 김기범, 김용수, 김태원, 정삼흠, 차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