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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BA/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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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성2. 유로비전 우승3. 전성기
3.1. 1975년3.2. 1976년3.3. 1977년3.4. 1978년 ~ 1979년3.5. 1980년
4. 사실상 해체, 그리고 ABBA의 부활 5. 재결합, 40년만에 컴백

1. 결성

1966년 6월 비에른 울바에우스(1945년 출생)가 벤뉘 안데르손(1946년 출생)을 처음 만난다. 비에른 울바에우스는 매우 인기 있는 포크 음악 그룹인 후테나니 싱어즈의 멤버였고, 벤뉘 안데르손은 1960년대 스웨덴의 가장 인기있는 팝 그룹인 헵 스타즈[1]에서 키보드를 연주했다. 3주 후 두 번째 만남에서 그들은 울바에우스의 부모님 집에서 파티를 한 후, 나중에 헵 스타즈가 발표한 첫 번째 공동곡인 'Isn't It Easy to Say'를 썼다. 이들은 이후 대중음악사에 남을 송라이터로써 역사적인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후테타니 싱어즈는 이후에 ABBA의 매니저가 된 스티그 안데르손[2](1931~1997)이 소유한 폴라 뮤직 음반 레이블에 자신들의 음반을 공개하기도 했다. 스티그는 또한 ABBA의 그룹 활동 초반 기간 동안 ABBA의 히트곡들에 가사를 쓴 인물이기도 하다.

1969년 봄,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그들의 미래의 배우자이자 ABBA의 나머지 멤버들이 될 두 여자를 만났다. 프리다라고 알려진 노르웨이 태생인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1945년 출생)는 1967년에 국가적인 재능 경연에서 우승했으며, 향후 몇 년간 어느 정도 유명해졌지만 상업적으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재즈와 포크 가수로 활동했다. 린스태드는 노르웨이 태생이었지만 매우 어린 나이에 스웨덴으로 이주했다. 안데르손과 린스태드는 1978년 10월에 결혼했다. 앙네타 펠트스코그(1950년 출생)는 1967년에 발표한 첫 싱글부터 히트를 기록했던 솔로 가수였다. 앙네타는 1968년 가수 겸 작곡가로서 국가적인 경연에서 우승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으며 ABBA 결성 이전의 솔로 경력 동안 주로 스웨덴의 전통 음악을 선보였다. 1969년 5월, 앙네타 펠드스코그와 베이른 울바에우스는 처음으로 함께 텔레비전 쇼에 출연했고, 이후 여러 차례 투어를 함께 했으며 1971년 7월에 결혼했다.

린스테드는 1969년 3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스웨덴 대표를 뽑기 위한 예비 결정전에서 "Härlig är vår jord"라는 노래로 4위를 차지했다. 이 행사에서 린스태드와 안데르손은 처음 만났고 곧 둘은 사귀기 시작했다. 안데르손은 헵 스타즈를 떠나 1969년 8월에 린스태드와 약혼했으며, 곧 그의 솔로 데뷔작인 싱글 피터 팬을 녹음했다.

1969년,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울바에우스는 스웨덴 영화인 '인가 2'의 사운드트렉 'Ljuva Sextal'을 함께 제작한 것을 계기로 친구가 되었고, 스웨덴 음악 듀오 Svenne & Lotta와 함께 여러 차례 TV에 출연했다.

1970년,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의 첫 번째 공동 싱글인 'She’s My Kind of Girl'이 발매되었다. 한편, 울바에우스는 펠트스코그의 솔로 앨범 'Som jag är' 작업을 도와주었고 안데르손은 이 앨범의 프로듀서 역할을 맡았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스티그 안데르손의 음반 회사인 폴라 뮤직에서 'Lycka'라는 제목의 첫 번째 공동 앨범을 녹음했다. 이 LP 제작으로 음악 엔지니어 마이클 B와 협업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ABBA의 사운드 개발에 크게 관여했던 인물이다.

이 당시 여러 가지 백 보컬로서 참여한 펠트스코그와 린스태드는 이미 몇 몇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웨덴 노래 'Hej Gamle Man'은 ABBA 멤버 4명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첫 번째 곡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앨범에는 "비에른 울바에우스 & 벤뉘 안데르손"의 이름만이 언급되어 있다. 녹음 외에도, 4명의 음악가들은 같은 해에 '페스트 포크'라는 쇼를 연출하고 1970년 11월 1일에 출연했다.

1970년 11월 고테보리에서 이들 4명은 처음으로 합동 공연을 했다. 1970년 12월, 이들은 처음으로 함께 Festfolket"이라는 제목의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여 Nostalgiere view에서 미국의 노래 클래식 'California, Here I Come in Western costumes'를 선보였다. 펠트스코그와 울배우스는 1971년 7월 6일에 결혼했다. 1972년 예테보리에서 펠트스코그는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스웨덴 판에서 마리아 막달레나 역할을 맡았다.

당시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 콤비의 싱글들은 'Hej Gamle'을 제외하고는 스웨덴에서 히트하지 못했다. 그러나 1972년에 'She’s My Kind of Girl'이 일본에서 발매되었고, 그곳에서 판매 차트 7위, 그리고 몇 몇 다른 히트 차트의 선두에 올랐다. 그들의 영어 노래 중 하나가 다른 나라에서 성공했다는 사실은 두 음악가들이 이후 영어로 된 팝송을 더 많이 선보이는 계기가 된다. 힌편, 펠트스코그와 린스테드는 일부 곡에서 함께 녹음을 하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잘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때 마침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그들의 연인들과 함께 음악 작업을 하기를 원했고 네 사람은 1972년 3월 'People Need Love'라는 곡을 공동으로 작업한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헤도 그들은 자신들을 그룹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멤버들은 당시 그들 자신의 솔로 커리어로 바빴기 때문이다. 'People Need Love'는 1972년 6월에 발매됐고, 솔로 앨범 커버에는 밴드 이름 대신 "Bjorn & Benny, Agnetha & Anni-Frid."라는 그들의 이름만 기재되어 있었다. 싱글은 스웨덴 싱글 차트 3위, 싱글+앨범 판매에서는 17위를 차지했다. 이 성공은 이 네 명의 아티스트들이 비교적 큰 성공을 위해 공동 작업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 가을에 이들은 새 작업물들의 제작을 완료했다. 이들은 당시 많은 스웨덴 가수들처럼 해외에서 더 높은 판매량을 얻기 위해, 스웨덴 노래인 Hej Gamle Man(헤이, 아저씨)와 Livet går sin gång(삶은 제 길을 간다) 외에도 영어로 된 노래인 Ring Ring과 Another Town, Another Train(사랑의 대기실)을 녹음했고 그 중 'Ring Ring'이 'He Is Your Brother'과 함께 1972년 11월에 새 싱글로 발매되었다. 이 때 이들은 독일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 앨범 속지에 독일어로 된 가사도 포함시켰다.

1973년 1월 6일, 밴드는 독일 TV에서 첫 출연을 했다. 음반 쇼 진행자 일자 리히터는 첫 싱글 'People Need Love'를 소개하면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스웨덴 밴드의 이름을 소개했지만, 무대에는 비요른 울바에우스, 벤니 안데르손,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 인거 브룬딘이 있었다. 인거 브룬딘은 린스태드의 친구인데, 펠트스코그가 임신중이라 해외에서 스케줄을 이행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밴드는 당시 독일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무명 밴드였기 때문에 관객들 중 누구도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1973년 2월, 이 네 명의 음악가들은 'Ring Ring'으로 스웨덴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연했으나 아쉽게도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 이 싱글은 스웨덴 음악 차트에서 1위를 다투며 스웨덴에서 그 해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다. 또한, 'Ring Ring'은 15개 국가에서 발매되었고 덴마크와 벨기에에서도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다. 1973년 3월 이들의 데뷔 앨범 'Ring Ring'이 나왔고, 그들은 이 앨범으로 스웨덴 차트의 3개의 순위에서 정상을 차지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의 계속되는 성공으로 인해, 4명의 음악가들과 그들의 매니저인 스티그 앤더슨은 다음 해 스웨덴 멜로디 페스티벌에 다시 참여할 계획을 세웠다.

2. 유로비전 우승

1973년 9월, 4명의 멤버들은 여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그들의 밴드 이름을 "ABBA"로 확정짓고 두 번째 앨범의 녹음을 시작했다. ABBA는 스웨덴의 통조림 생선 회사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다행히도, 이 회사는 그들의 이름을 ABBA가 쓰는 것에 동의했다. 한편, ABBA는 1974년에 열리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스웨덴 대표를 뽑는 경연에 다시 초청되었다. 당시 ABBA는 유로비전 콘테스트 참가 곡으로 'Hasta Mañana'라는 발라드를 만들었는데, 이 발라드는 지난 해의 우승 타이틀 스타일과 상당히 비슷하게 만들어진 곡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유로비전 콘테스트 참가 곡을 'Waterloo'로 변경했는데, 'Waterloo'라는 노래가 당시 유행하던 발라드 방식에서 벗어난, 새롭고 혁신적인 스타일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신의 한수가 된다. 또한 'Hasta Mañana에서는 펠트스코그만이 리드 보컬을 맡은 반면 'Waterloo'는 두 여성 가수들의 듀엣이었고, 따라서 그룹으로서의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Waterloo'와 함께, ABBA는 1974년 2월에 처음으로 멜로디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1974년 3월 4일 'Waterloo'라는 타이틀을 가진 새 앨범과 싱글이 발매되었다. 이 밴드의 새로운 이름인 ABBA를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새로운 이름인 ABBA 뒤에 괄호로 그들의 성(Bjorn, Benny, Agnetha & Anni)이 배치되었다. 이 LP는 빠르게 스웨덴 차트의 최고 순위에 도달하였고 당시 스웨덴의 음반 판매 기록을 갱신했다. 한편, 매니저 스티그 안데르손은 유로비전 콘테스트가 열리기 전에 이미 여러 유럽 국가들에게 싱글 'Waterloo'를 홍보했다. ABBA는 1974년 4월 6일 영국 브라이튼 앤 호브에서 열린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그랑프리 결승에 진출했고 'Waterloo'를 불렀다. 그 결과 ABBA는 점수 평가에서 17개 참가국 중 최고점을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한다. 이 승리는 그들의 국제적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싱글 'Waterloo'는 54개 국가에서 발매되었고, 그 중 많은 나라의 차트에서 선두에 올랐다. 영국에서는 데뷔 후 첫 1위를 기록했으며 500만장 이상이 팔려나갔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TOP 10 히트곡이 되었다. 이 성공 이후, 일부 국가에서 'Waterloo'라는 앨범이 발매됐지만, 아쉽게도 이 앨범은 몇 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차트에서 그리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1974년 4월에 발매된 싱글 'Honey Honey'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만 성공적이었다.

1974년 여름, ABBA는 새로운 앨범을 녹음했다. 같은 해 11월, 새 앨범의 첫 싱글 'So Long'이 발매되었고 이와 동시에, ABBA는 첫 번째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1974년 11월, 독일 도시 프랑크푸르트, 브레멘, 하노버 등 7곳에서 투어를 시작한 이들은 30개국에서 투어를 돌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별로였고, 어떤 콘서트도 매진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시청에서 진행된 공연은 좌석의 1/4정도 관객들만이 입장했다. 더셀도르프 음악회와 스위스에서 열리는 유일한 음악회는 심지어 낮은 사전 판매로 인해 취소되었다.

그래도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문화권에서에서는 ABBA의 인기가 계속해서 높아져 갔다. 1975년 1월에 열린 스칸디나비아 순회 공연도 모두 매진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스웨덴의 국내 언론들은 점점 더 대세가 되어 인기를 얻고 있는 이 그룹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논지는 "이 그룹의 음악이 너무 상업적이면서 진지하지 않고 가볍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당시까지만 해도 멤버들은 ABBA라는 그룹 활동에만 매달리지 않았고 각자 자신들의 경력에 대한 다른 선택사항들을 열어두고 있었다. 1975년에 펠트스코그와 린스태드는 각각 스웨덴에서 솔로 앨범을 발표했으며, 린스테드는 코러스 가수로서도 활동을 지속했다.

1975년 3월 21일, 그들의 3번째 LP가 ABBA라는 단순한 제목을 지닌 셀프타이틀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1975년 4월 연말까지 스웨덴에서 45만장이 판매되었다. 이는 그 당시 발매되었던 스웨덴 가수들의 다른 앨범들보다 더 많이 팔린 것이었다. 동시에 발표된 싱글 'I Do, I Do, I Do, I Do, I Do'는 스위스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만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영국 시장에서는 싱글이나 새 앨범이 큰 인기를 끌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 당시 영국 대중들은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우승자들을 원 히트 원더라고 여겼기 때문이다.[3] 또한 이 때까지만 해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우승자라는 '꼬리표'로 인해 ABBA의 음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3. 전성기

1974년 유로비전에서 우승한 ABBA는 지난 4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1970년대까지 비틀즈가 1960년대와 같은 존재였고, 두 그룹 모두 다른 현대 예술가가 아닌 것처럼 대중음악을 지배했다. 벤뉘 안데르손과 비에른 울바에우스의 훌륭한 작곡, 아름다운 프리다와 앙네타의 환상적인 퍼포먼스. 완벽한 팝 밴드 –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가장 위대한 밴드가 되었다.
― uDiscover Music#

3.1. 1975년


한편, ABBA는 1975년 여름 스웨덴 투어에서 그 전까지 보다 더 많은 관객들을 확보했다. 예를 들면 스톡홀름 놀이공원 Grena Lund에서 열린 이들의 콘서트는 19,000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이와 동시에 이들은 앨범의 세 번째 싱글로 'S.O.S'를 발매했다. 이 새로운 팝 타이틀은 영국 차트에서 6위, 독일에서 1위를 차지하는 히트 싱글이 된다. 이 당시 ABBA는 곡의 사운드 품질의 개선뿐만 아니라 새 곡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ABBA는 그들의 새로운 앨범과 싱글의 홍보를 위해 출연한 TV 공연 외에도, 새 싱글들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여 유럽 이외의 국가에서 방송되도록 하는 홍보 전략을 이용했다. 이때 ABBA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는데 이는 정말로 빡빡했던 당시 스웨덴의 세금제도 하에서 합법적인 세금 공제를 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전해진다. 간단히 요약하면, 실생활에선 도저히 입고 다닐 수 없는 정도 파격적 의상이어야 공연 활동을 위한 무대의상으로 인정받아 비용처리가 가능했기 때문.

1975년 8월, ABBA는 'Mamma Mia'로 호주 ABC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음악 프로그램인 카운트 다운에 출연했고 호주 시청자들은 ABBA의 새로운 음악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 결과 방송국에 ABBA 츌연본을 다시 재방송해 달라는 전화가 쇄도했고 이에 ABBA의 담당 레이블 폴라 뮤직은 호주 음반사 RCA로부터 Mamma Mia를 새 싱글을 발매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매니저 스티그 안데르손은 이미 앨범에서 충분히 많은 곡들이 싱글 컷 된 바 있었고, 곡보다는 그룹 ABBA를 먼저 홍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는 하나의 앨범에서 너무 많은 곡들을 싱글 컷 해버리면 음반 회사의 주요 수입원인 앨범 수익이 감소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주 대중들의 엄청난 수요를 그대로 내버리기 아까웠던 RCA는 요청을 포기하지 않았고 폴라 뮤직은 결국 Mamma Mia를 싱글로 발매하는데 동의했다.

이 시기부터 ABBA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이 급격히 증가하여 1975년 10월, 'I Do, I Do, I Do, I Do'가 호주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3주 후에는 'Mamma Mia'가 10주 동안 1위를 차지하며 그 해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싱글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후 'Mamma Mia'는 세계적으로 메가 히트를 기록하고 독일과 영국에서도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또한, 1975년 11월, ABBA는 일부 국가에서 'The Best of ABBA'라는 제목의 첫 번째 베스트 앨범도 발표했다. 이 앨범은 LP 시장에서도 세계적인 메가 히트를 기록 했고, 이들의 경력에서 가장 큰 판매 성공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앨범은 스웨덴에서만 30만장이 넘게 팔리고 8주 동안 앨범 차트의 최고 순위를 유지하였다. 영국에서는 1970년대 두 번째로 가장 성공한 앨범이 되었으며, 호주에서는 100만장 이상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 이 앨범은 1981년, 폴라 뮤직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700만 장 이상의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또한 'S.O.S'가 'Waterloo' 이후 첫 히트 싱글이 되어 영국 시장에서 톱10에 진입하는 등 ABBA는 원 히트 원더가 아닌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발돋움하게 된다.

3.2. 1976년


1976년 ABBA는 마침내 그리고 확고하게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룹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Mamma Mia'와 베스트 앨범 'Greatest Hits'의 역대급 성공으로 ABBA의 성공적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룹의 큰 인기는 호주와 영국에서 ABBA의 광적인 팬덤 집단 '아바 매니아(ABBA Mania)'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ABBA는 1976년 3월 첫 번째 싱글로, 'Fernando'를 발표했다. 이 노래는 본래 1975년 발매된 린스태드의 두번째 솔로 앨범 'Frida ensam'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였고 가사도 스웨덴어였다. 'Fernando' 역시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여, 독일에서만 600만장 이상이 판매됐다. 같은 해에 ABBA는 4개의 1위 싱글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비틀즈 외에는 지금까지 어떤 밴드도 기록하지 못한 기록이었다. 'Fernando'는 영국 음반협회에 의해 골드 음반을 수상했다. 이 싱글은 최소 13개국에서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1,0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Fernando'는 호주 역사상 가장 긴 1위(1위 14주, 차트인 40주)를 기록했으며, 2017년 5월 1위로 15주를 달성한 에드 시런의 'Shape of You'에 추월될 때까지 4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Fernando'는 오스트리아, 벨기에, 프랑스, 독일, 영국, 헝가리, 아일랜드, 멕시코, 네덜란드, 뉴질랜드, 남아공, 스위스, 스웨덴에서도 차트 상위권에 올랐다. 또한 "Fernando"는 1976년 영국에서 네 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며 영국 톱10에서 10주를 보냈으며 또한 ABBA 3연속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다.

ABBA의 세계적인 인기는 프로모션 투어와 TV 스페셜을 통해 더 높아졌다. 호주에서는, 특집 TV쇼 The Best of ABBA가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방송보다 더 많은 시청률인 58%를 기록했다. 독일 TV 방송인 뮤직 스토어는 독일 방송 사상 최초로 ABBA라는 하나의 그룹을 주제로 한 연속 시리즈를 제작했고, 스웨덴 방송국에서 방영한 ABBA 특집 방송은 1976년 최고의 인기 쇼가 되었다. 영국의 탑 오브 더 팝스나 독일의 디스코와 같은 유럽의 많은 TV쇼들이 ABBA의 새 싱글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심지어 호주의 한 TV 팀은 ABBA를 인터뷰하기 위해 스톡홀름을 수 차례나 방문하기도 했다. 1976년 여름, 일본-오스트레일리아 전기기기 제조업체인 'National'은 ABBA의 멤버들을 자사의 새 광고 모델로 결정했고 모델로 채택된 이들을 광범위하게 홍보하기 위한 홍보 캠페인을 제작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ABBA는 이 광고 계약을 위해 100만 호주 달러를 받았다. 'Fernando'의 멜로디를 광고로 들을 수 있는 다섯 개의 다양한 광고 외에도 밴드 멤버들의 동기가 담긴 광고, 브로슈어 및 기타 광고도 진행됐다. ABBA는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유명인이 된 것이다.
우리는 이 노래는 듣고 무조건 히트칠 것이라고 생각했죠. 우리는 전율을 느꼈어요. 그것은 특별한 노래였어요.
― 아그네타 펠트스코그, Dancing Queen에 대한 질문에 대답

1976년 6월 18일, 4명의 ABBA 멤버들은 드레스와 정장을 입고 스톡홀름의 왕립 오페라 극장에서 새 싱글 곡인 ''Dancing Queen'을 선보였다. 이 노래는 실제로 1976년 초에 이미 완성되었고 독일 TV에서 공연된 바 있었다. 이 공연에는 스웨덴 왕 칼 16세 구스타프와 그의 약혼자인 실비아 좀멀라트가 참석했는데 이 공연은 이들의 결혼식 전날 밤이기도 했다. 'Dancing Queen'은 1976년 8월 전세계 시장에 출시되었고, 전세계적으로 600만장 이상 판매되는 역대급 히트를 기록한다. 'Dancing Queen'은 ABBA의 모국 스웨덴에서 14주 1위, 호주, 벨기에, 브라질, 캐나다, 독일, 영국, 아일랜드, 멕시코, 네덜란드, 뉴질랜드, 남아공, 로디지아, 노르웨이(32주 1위) 등 10여 개 국가에서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Dancing Queen'은 미국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했으며[4], 오스트리아, 핀란드, 프랑스, 스위스에서 톱 5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 곡은 1976년 영국에서 네 번째로 많이 팔린 싱글이기도 하다. Dancing Queen은 종종 ABBA의 대표적인 히트곡,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팝 타이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호주에서 공연을 펼친 ABBA

1976년 말, ABBA의 4집 앨범 'Arrival'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 역시 전세계 전역을 강타했고 호주에서만 60만장, 독일은 50만장, 폴란드에서는 80만장이 판매됐다. 심지어 폴란드는 ABBA 멤버들을 국빈으로 대접하고 그들만의 특집 TV 스페셜을 제작하기도 했다. 동양권 국가에서도 ABBA의 곡들은 인기가 많았고 무엇보다 동양권에서는 서구권보다 먼저 그들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동양권 국가에서의 상업적 성공은 제한적인 수준으로 유지되는데 그쳤다. 당시 일본을 제외한 대다수 동양권 국가들의 정치적 상황이 그리 좋게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당시 ABBA는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5]에서 추가 프로모션 투어를 했다. 또한 'Arrival' 앨범은 'Money, Money, Money'과 'Knowing Me, Knowing You'와 같은 히트곡들을 낳았다. 1976년 11월부터 ABBA는 전 세계 순회 공연을 준비했다. 1977년 1월부터 시작된 ABBA의 월드 와이드 투어는 공연의 모든 좌석이 매진되는 등 엄청난 성공을 기록했다.

3.3. 1977년


1977년 2월 14일, ABBA는 런던 로얄 앨버트 홀에서 두 번의 공연을 했는데 총 12,000명의 좌석이 매진됐고 350만명이 이 티켓을 사려고 문의했다. 유럽 투어는 28일에 시작되었다. 1977년 1월, 오슬로에서 16개의 콘서트를 개최했으며 스웨덴, 덴마크,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등지에서 열린 콘서트들은 총 84,000명을 동원했다. 호주에서는 팬덤 '아바 마니아'가 최고조에 달했는데 9일 만에 시드니, 멜버른, 아델라이드, 퍼스에서 총 11개의 콘서트가 열렸고 모두 매진되었다. 총 관객 145,000명을 동원했는데 이는 당시 호주 인구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당시 호주 역사상 가장 큰 콘서트 투어였다. 여섯 개의 야외 공연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들이 봉쇄 작전을 펼쳤고 밖에서 수천 명의 팬들이 공연을 보려고 애를 썼다. 또한 Lasse Hallström의 감독 하에 투어 다큐멘터리 영화 'ABBA - The Movie'가 제작되었다. 'ABBA - The Movie'의 전세계 프리미어는 1977년 12월 15일에 호주 시드니와 퍼스에서 열렸고 ABBA의 매니저인 스티그 앤더슨도 참여했다. 이 영화에서 ABBA의 공연을 보려고 애를 쓰는 팬들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계속해서 상승해가는 인기로 인해 ABBA 멤버들은 지쳐있었고 혹사된 상태였다. 펠트스코그는 두 번째 임신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최대 12시간까지 일했는데, 이는 결국 1977년 여름에 유산으로 이어졌다. 이 일 때문에 ABBA의 5번째 앨범인 ''ABBA: The Album'의 작업은 몇 주 동안 지연되었다. 새 음반의 첫 번째 싱글은 1977년 10월에 발매되어 영국 차트 6위에 오른 'The Name of the Game'이었다. 이후 이들의 5번째 앨범 'ABBA: The Album'이 1977년 12월 12일에 발매되었다. 'Arrival'이 전형적인 디스코 앨범이었다면 이 앨범에서는 '더 성숙해진'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이 앨범의 히트곡으로는 'The Name Of The Game'과 'Take A Chance On Me'가 있다. 'Take a Chance on Me'는 ABBA의 7번째 영국 차트 1위[6]를 기록하며 ABBA의 최전성기를 증명했다. 1978년 봄, ABBA는 미국에서 대대적인 홍보 캠페인을 시작했으며, 'Take A Chance On Me'는 빌보드 차트에서 Top 3 히트, 'ABBA: The Album'의 Top 20 진입을 이끌었다. 이 앨범의 마지막 싱글은 1978년 5월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펠트스코그와 올바에우스의 관계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긴장감은 레코딩 스튜디오에서도 이어졌고 녹음 시에 두 사람 사이에 큰 말다툼이 자주 일어나서 앨범 제작이 계속 지연되고는 했다.

밴드 내부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ABBA는 1978년 4월 말에 2주 동안 미국 투어를 펼쳤다. 지난 몇 년 동안 미국에서 열린 3번의 프로모션 투어가 원하는 돌파구를 이루지 못한 후, 매니저 스티그 안데르손은 애틀랜틱 레코드와 함께 50만 달러를 투자해 미국 프로모션을 준비했다. 이 당시 ABBA는 미국에서 수천 달러짜리 광고 캠페인 계약을 채결했으며 로스엔젤레스의 선셋 스트립에 ABBA가 스튜디오 음악 역사상 가장 수익성이 높은 밴드라며 칭송하는 광고판이 부착되었다. 또한 ABBA는 올리비아 뉴튼 존앤디 깁의 쇼에서 잼 세션을 가졌고 이들은 해당 공연에서 ABBA의 노래 일부를 선보였다.# 특히 'Take a Chance on Me'는 이 홍보 효과의 덕을 톡톡히 받아 빌보드 핫 100의 3위를 차지하며 골드 히트를 기록했다. 'Greatest Hits'와 'ABBA - The Album'도 미국 차트에 올라 플레티넘을 기록했다. 이 당시 ABBA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기에 1977년 5월부터 1978년 5월까지 ABBA는 5천만 크라운의 수익을 창출했으며, 이는 빌보드 매거진에 따르면 1,2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기준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이다.

3.4. 1978년 ~ 1979년

ABBA는 지금까지의 녹음 작업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깨달았고 다음 앨범을 위해 작업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했다. 그 결과 1978년 5월 18일 스톡홀름 에릭스가탄에서 폴라 뮤직 스튜디오가 문을 열었다. 한편, 그 해 초부터 여러 곡들이 작곡되고 제작되었지만, 그 중 많은 곡들이 다시 폐기되었다. 펠트스코그와 울바에우스의 부부 문제도 영향을 미쳤다. 1978년 여름, 그들은 부부 상담을 실시했지만, 그 상담으로도 부부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중 앞에서, 그 둘은 계속해서 커플로 활동했다.

1978년 9월에 'Summer Night City'가 녹음 세션의 첫 번째 싱글 곡으로 발매되었다. 그러나, 이 싱글은 높은 차트 순위에 도달하지 못했고, 따라서 LP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애틀랜틱 레코드 담당 매니저인 제리 그린버그는 이 싱글이 미국에서 발매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1978년 10월 6일, 린스태드와 안데르손은 9년 간의 동거 후에 결혼했다. 한 달 후, ABBA는 TV 출연, 라디오 및 TV 인터뷰와 더불어 일본에서의 인기가 높아져 자신만의 TV 스페셜을 촬영하는 등 일본에서 또 다른 홍보 투어를 했다. ABBA의 다음 앨범이 나올 때까지 일본에서는 ''ABBA: The Album'이 히트를 기록한다. 1978년 12월 25일, 펠트스코그는 울바에우스와 함께 공동 빌라를 떠나 폴라 뮤직 스튜디오와 가까운 게스트하우스로 이사했다.

1979년 1월 8일, ABBA는 뉴욕에서 열린 유니세프 행사에서 1주일 후 싱글로 발매될 새 노래 'Chiquitita'를 대중들에게 최초로 선보였다. 많은 비평가들이 ABBA의 커리어가 여기서 더 인기를 끌 수 있다고 믿지 않았기에, 그 당시 ABBA는 다시 세계적인 히트곡을 발매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리고 Chiquitita는 라틴 아메리카의 영향으로 인해, 역대급 히트를 기록한다. 스페인어 버전으로 발매된 버전은 그 때까지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매된 노래들의 판매량응 뛰어넘은, 가장 큰 히트곡 중 하나가 되었고 아르헨티나에서만 5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라틴 아메리카 뿐만 아니라 많은 유럽 국가에서도 이 노래가 히트하였다. 스페인에서는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고 10만장 판매를 기록하며 그 해 최고 히트 싱글이 되었다. ABBA는 이 싱글의 판매 수익을 유니세프에 기부했으며, 이후 이 노래에 대한 라이선스 소유권자도 유니세프가 되었다. 2004년까지, 이 노래는 유니세프에게 100만 파운드의 수입을 준 것으로 추산된다.

1979년 2월, ABBA는 특집 TV 쇼 ABBA를 촬영하기 위해 며칠 동안 스위스에서 투어를 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Chiquitita'를 위한 뮤직 비디오가 제작되었다. 또한 ABBA는 스위스 공연에서 그들의 새로운 앨범인 Voulez-Vous의 일부 수록곡을 최초로 선보였다. 이 앨범은 1979년 4월 23일에 발매되었다. 그 당시 트렌드를 반영한 디스코풍 노래가 많이 담긴 디스코 앨범이었지만 의외로 가장 크게 히트한 곡들은 디스코가 아니라 발라드 곡들이었다. 'Chiquitita'와 함께, ABBA를 대표하는 발라드 트랙 'I Have a Dream[7]'이 해당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1979년 한 해 동안, 'Does Your Mother Know'와 'Voulez-Vous'를 포함한 앨범의 세 개의 싱글이 전세계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앨범은 스웨덴과 영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앨범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또한 1979년에 ABBA는 그들의 두 번째 베스트 앨범과 새 싱글 "Gimme! Gimme! Gimme! (A Man After Midnight)"가 영국과 독일 양쪽에서 또 한번 1위를 기록하며 히트를 쳤다. 이 싱글은 6개국에서 동시에 1위를 기록했다.
일본에서 공연중인 ABBA

이 당시 ABBA는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하며 수많은 곳에서 투어를 개최했고 가는 곳마다 공연이 매진됐다. 1979년 여름, ABBA는 북미유럽에서 또 다른 큰 스케일의 투어를 시작했다. 투어는 1979년 9월 13일에 시작했으며 1979년 9월 15일 캐나다 에드먼턴에서는 15,000명 관객을 동원했다. 이 투어에서 ABBA는 'Arrival', 'ABBA - The Album', 'Voulez-Vous'의 주요 수록곡을 불렀다. 그런데 이 투어 중에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1979년 10월 3일, ABBA는 공연을 위해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심한 폭풍우로 인해 비행기가 거의 추락할 뻔 한 것이다. 그 비행기는 미국 도시인 매사추세츠에 비상 착륙했고 ABBA는 어쩔 수 없이 밴으로 보스턴까지 갈 수 밖에 없었다. 콘서트는 예정된 시작 시간에서 90분이 흐른 후에야 시작할 수 있었다. 수년 동안 비행에 대한 공포로 고통받았던 펠트스코그는 저녁 무대에 섰지만, 그녀는 너무나 많은 충격을 받았기에 다음날 열릴 예정이었던 워싱턴 DC에서의 공연은 취소됐다. 1979년 10월 5일 ABBA는 백악관에 초대되어 환영회를 가졌지만 펠트스코그는 비행기 사고 후유증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10월 중순, 스웨덴의 고테보르그에서 ABBA는 제3차 유럽 투어를 시작했으며, 또 다른 다섯 번의 공연을 위해 독일로 향했다. 두 레그에 걸쳐 개최된 40여 개의 콘서트에서 ABBA는 약 3만명의 관중을 동원했다. 또한 런던 웸블리 아레나에서 열린 총 6개의 콘서트는 촬영되었고, 다큐멘터리인 ABBA In Concert를 위해 편집되었다. 이 공연은 ABBA Live at Wembley라는 제목으로 2014년에 정식 발매되었다. 투어는 1979년 11월 15일에 더블린에서 열린 최종 콘서트를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1980년 3월, ABBA는 일본 투어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 ABBA의 인기는 대단했기에 도쿄일본 무도관에서만 6번의 공연을 했으며 티켓은 모두 매진되어 총 100,000명을 동원했다.

1980년 초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바베이도스로 여행을 떠났고, 그 후 새로운 앨범에 대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펠트스코그와 린스테드는 'I Have a Dream'의 스페인어 버전을 녹음하여 발매했고 Chiquita와 마찬가지로 매우 큰 히트를 치게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은 8개의 다른 ABBA 노래를 스페인어로 녹음하여 발매했다. 1980년 6월, ABBA는 라틴 아메리카 시장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베스트 앨범 'Gracias por la musica'를 발매했는데, 이 앨범은 그 동안 녹음된 10곡의 스페인어 곡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울바에우스와 안데르손은 이 프로젝트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 앨범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은 아르헨티나, 멕시코, 스페인에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일본에서도 오리콘 앨범 차트 상위 30위에 올랐다.

3.5. 1980년


다음 앨범 'Super Trouper'의 녹음은 1980년 2월에 시작되었고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1980년 7월에 'The Winner Takes It All'이 첫 싱글로 발매됐고, 영국, 미국 등 21개국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이 노래는 비에른 울바에우스의 말에 따르면 작사하는데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종종 ABBA의 노래들 중 가장 좋은 가사를 가지고 있는 곡이라 평가된다.

1980년 7월 펠트스코그와 울바에우스는 공식적으로 이혼을 발표한다.

새 앨범은 1980년 11월 3일에 발매되었고 역시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다. 영국에서만 100만장이 미리 예약되어 결국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고 연말까지 전 세계 400만장의 LP가 판매되었다. 싱글 'Super Trouper'도 독일과 영국 등 많은 나라에서 1위를 기록한다.

1981년 2월 중순, 벤뉘 안데르손과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는 법원에 이혼을 신청했다고 발표했다. 이혼 발표는 그간 그들의 결혼 생활 동안 고된 싸움이 수 년간 지속됐다는 것을 표면화했고, 벤뉘 안데르손이 린스테드와 결혼 생활 도중 1981년 11월에 결혼한 또 다른 여성 모나 뢰르클릿을 만났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1981년 3월, ABBA의 8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인 The Visitors의 녹음이 시작된다. 1981년 4월 이미 미국 진행자 딕 캐벳이 출연한 텔레비전 특집에서 새로운 노래 두 곡이 소개되었다. LP는 마침내 1981년 11월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ABBA의 음악 스타일을 크게 발전시킨 9개의 곡이 포함되었다. 앨범은 많은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았으며, ABBA가 발표한 앨범들 중에서 음악적으로 가장 평가가 좋은 앨범이기도 하다. 수록된 노래들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고뇌가 느껴질 정도로 어두웠으며, 그 가사들은 이별의 고통과 전쟁의 공포에 대한 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나마 행복한 요소가 있는 노래들 조차도 멜랑콜릭한 언더톤을 가지고 있다. 이 앨범의 첫번째 싱글 'One of Us'가 1981년 12월에 발매되었다. 이 곡은 ABBA가 독일에서 이룩한 9개의 1위 싱글 들 중 마지막 싱글이 되었으며, 남아공과 영국에서도 마지막으로 탑 탠에 진입한 ABBA의 곡이 되었다. (남아공에서는 5위, 영국에서는 3위에 오름). 또한 The Visitors는 음악 역사상 최초로 발매된 오디오 CD 중 하나였다. 이 앨범 역시 영국에서 1위를 기록한다.

4. 사실상 해체, 그리고 ABBA의 부활


1982년 1월, ABBA는 폴 매카트니,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당대 인기 아티스트들과 당시 미국 대통령로널드 레이건,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 독일 총리헬무트 슈미트와 같은 고위 정치인과 함께 'Let Poland be Poland'를 후원했다. 폴란드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이 방송은 미국 TV에서 방송됐고 40개 이상의 국가에 방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 인민 공화국소비에트 연방공산당 지도부는 이러한 기획에 참여한 ABBA를 '자본주의의 끄나풀'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1982년 봄에 ABBA는 새로운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향했다. 하지만 곧 4명은 그룹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잃었다. 여름 휴가 전에 녹음된 곡은 'Just Like That', 'You Owe Me One', 'I Am the City' 등 달랑 3개밖에 없었다. 이 음악들은 ABBA의 예전 음악 스타일을 더 많이 표현했고, 공통적인 느낌들이 있었다. 특히, 이 곡들은 모두 조금 더 즐거운 느낌이었다.

이 시기, 린스테드는 필 콜린스와 함께 최초의 영국 솔로 앨범인 'Something's Going On'을 제작했으며, 펠트스코그는 스웨덴 영화 'Raskenstam'에 음악에 참여, 안데르손과 올바에우스는 또 다른 뮤지컬 '체스'를 함께 작곡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개인 활동으로 인해 언론과 대중 매체에서는 점점 ABBA가 곧 해체할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고 그 때마다 멤버들은 항상 이를 부인했다. 그래서 1982년 8월, 4명의 멤버들은 스튜디오에서 다시 만나 세 곡의 노래를 녹음했다. 이들 중 "The Day Before You Came"와 "Under Attack"이 싱글로 발매되었다. 또한, 1982년 11월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 "The Singles - The First Ten Years"에서 'Cassandra'와 'You Owe Me One'라는 두 싱글이 발매되기도 했다. 1982년 11월 6일, 노엘 에드먼즈의 영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Late Late Late Breakfast Show"에서 4명의 ABBA 멤버들이 게스트로 초대되었고, 인터뷰에서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펠트스코그는 'Fernando', 린스테드는 'Dancing Queen', 안데르손은 'Chiquitita', 울바에우스는 'The Winner Takes It All' 이라고 말했다. 후기 인터뷰에서 펠트스코그는 돌이켜 보면 'The Winner Takes It All'이 ABBA의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고 말하기도 했다. 같은 방송에서 앤더슨과 울바이어스는 이미 여러 신문에서 추측한 밴드의 해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부인했다.

1982년을 거치면서 벤뉘와 비에른이 뮤지컬 체스[8] 집필을 목표로 삼고 앙네타와 애니가 솔로 활동을 부활시키면서 점차 그룹의 활동은 둔화되기 시작했다. 이 해 ABBA의 LP로 발매된 유일한 앨범은 신곡 2곡을 포함해 The Singles – The First Ten Years라는 제목의 히트 싱글 베스트 앨범이었다. 이 앨범에 수록된 'The Day Before You Came' 역시 히트를 기록한다.

1982년 말에 ABBA는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ABBA는 11월 11일 서독 TV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1982년 11월 마이클 샨즈와 함께 쇼 익스프레스에서 독일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했다. 2년 전 이미 예정되어 있는 쇼 익스프레스에서 있었던 공연은 납치 위협으로 인해 공연이 취소되어야 했고, 스웨덴에서 20분간의 라이브 방송으로 대체되었다. 1982년 12월 11일, ABBA는 한 번 더 Late Late Breakfast Show에서 'I Have a Dream'과 'Under Attack'을 함께 공연했다. 그들은 스톡홀름의 스튜디오에 있었고 위성으로 생중계되었다. 인터뷰에서, 이들은 ABBA를 위한 "잠정 휴식"을 발표했는데, 이는 돌이켜 보면 이 밴드의 해체라고 생각될 수 있었다. 그러나 ABBA의 멤버들은 만약 그들이 원한다면, 멤버들이 몇 년 후에 언제든지 다시 모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기한 휴식에 들어가기 직전에 싱글로 발매한 'Under Attack'이 아바의 마지막 곡이 되었다. 원래는 새 스튜디오 앨범을 발매할 예정이었으나 이미 지칠대로 지쳤던 멤버들은 계획을 접고 사실상 해산을 결정했다. Under Attack을 들어보면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The Visitors와 비슷하면서도 더 진일보한 사운드를 보여주는데 이 새로운 앨범이 제대로 발매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1982년 대인관계 긴장이 고조되면서 ABBA가 조용히 해체될 무렵, 그들은 이미 대중음악사에서 전설적인 자리를 확보했고, 전세계 대중 문화 전반에 정착 할 준비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비록 아쉽게도 1982년을 끝으로 ABBA는 활동이 중단 되었지만, 이들의 역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해체 된 이후 1980년대 중후반까지 ABBA의 인기는 차츰 차츰 떨어졌으나 ABBA의 음악은 1990년대에 완벽하게 부활한다. 이것을 ABBA 부활(ABBA Revival)이라고 부른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이 ABBA의 노래를 커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2년 영국 신스팝 듀오 이레이저(Erasure)는 4개의 ABBA 노래인 Lay All Your Love on Me, SOS, Take a Chance on Me[9] 및 Voulez-Vous의 커버 버전인 EP 싱글 'Abba-esque'를 발표했다. 이 싱글은 영국에서 1위, 독일에서 2위(총 19주), 오스트리아에서 1위(8주) 그리고 스위스에서 3위를 기록하며 대성공을 했다. 이 예상치 못한 성공으로 인해, 다양한 음악가들이 ABBA 노래들을 연이어 커버했다. 대표적으로 U2, 너바나[10], R.E.M.과 같은 당대 최고의 인기 밴드들이 ABBA의 곡들을 커버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마돈나[11]티나 터너, 딥 퍼플의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는 ABBA의 팬이라고 공개적으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1992년 6월 11일, 안데르손과 울바에우스는 스톡홀름에 있는 에릭슨 글로브에서 U2의 콘서트에서 공연하여 보노와 함께 Dancing Queen을 불렀다.

그 이후 수많은 TV 쇼, 영화에서 ABBA의 노래를 사용한 작품들이 생겨나면서 ABBA에 관해 많은 대중들의 많은 관심이 생기며 ABBA의 부흥이 시작된다. ABBA 재부흥의 정점을 찍은게 바로 1992년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 'ABBA Gold'였다. 이 앨범은 ABBA의 활동 중단 이후 나온 앨범이지만 ABBA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앨범이다. 얼마나 중요하냐면 2019년 피치포크는 이 앨범을 "ABBA에게 무한한 명성을 가져다 준 앨범."이라고 평했다.# 이 앨범이 중요한 이유는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기록해서 그런것도 있지만 ABBA가 해체된 이후 10년 동안 CD가 LP를 대체하고 피지컬 매체의 지배적인 형태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80년대 말부터 CD 시장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동안, ABBA의 카탈로그를 다루는 리이슈 앨범들이 전세계 음반 판매점에서 눈에 띄게 사라졌다. 그러한 타이밍에 나온게 이 베스트 앨범이다. 이 앨범은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3,100만 장 이상이 팔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기 되었다. 또 영국에서만 558만장이 팔리며 역대 2번째로 영국에서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심지어 이 앨범은 2020년 현재진행형으로 영국 앨범 차트에서 966주 동안 차트에 진입하고 있다.[12] 그 이후 나온 1993년의 베스트 앨범, More ABBA Gold는 계속해서 300만 장이 팔렸다. 1994년에 이어 박스 세트인 "Thank You For The Music"은 모든 히트곡, 선택된 앨범 트랙, 그리고 희귀하고 이전에 발표되지 않았던 음반들을 포함하고 있다.

ABBA의 곡은 현재까지도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으며, 특히, ABBA의 노래 24곡을 사용한 뮤지컬 "맘마미아!"가 현재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2008년2018년에 개봉한 아만다 사이프리드, 메릴 스트립 주연의 맘마 미아!, 맘마 미아! 2 두 편 모두 흥행에 성공함으로서 ABBA의 노래가 시대를 초월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2010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2010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된다. 연사는 비 지스배리 깁로빈 깁이 했다. 모든 멤버들이 참석하지는 않았고, 벤뉘 안데르손과 애니 프리드 린스태드만 참석했다. 2015년에는 그들의 대표 명곡 중 하나인 Dancing Queen이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10년대에는 꾸준하게 재결합 떡밥이 돈다. 그러나 2011년 올바에우스는 "우리가 무대에 설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부정했으며, 2013년 펠트스코그는 "ABBA 재결합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늙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멈춰선 지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고, 우리를 다시 합친다는 건 정말 의미가 없어요."라고 강하게 부정을 하며 재결합은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5. 재결합, 40년만에 컴백


그리고 2016년 6월에 멤버들이 30년만에 다시 모여 현역시절의 The Way Old Friends Do를 불렀다. 영상이 올라온 직후 한동안 불가능할 거라 여겨 잠잠했던 재결합의 목소리가 현재까지도 끝임없이 늘어나고 있는등 웹에선 멤버들의 행보에 대해 기대가 날로 커지고 있다.

결국 2018년 35년만에 재결합했다. 2곡의 신곡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링크 또한 아바 아바타 투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한다. 멤버들의 홀로그램 등을 통해 전세계에서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다. 아바의 대변인인 고렐 한세르는 “새 노래들의 사운드는 낯익지만 현대적”이라고 전했다. 그는 "그 중 하나는 팝송이고, 매우 춤추기 쉽다. 다른 하나는 더 시대를 초월하고, 더 성찰적이다, 그것이 내가 말할 전부이다. 슬프면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어 아바가 아바타 투어 프로젝트에서 홀로그램 말고 직접 무대에 나와 연주를 하는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한세르는 “멤버들이 무대에 함께 올라 힘을 합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2018년에 발매 예정이었으나 그룹 사정으로 2019년 가을로 연기됐다가 2020년으로 또 연기됐다. 현재까지 5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예 싱글 발표에서 앨범 쪽으로 선회한 듯. 2020년 현재 새 앨범을 위해 벤뉘가 작곡한 8곡의 노래 중 5곡이 두 여성 멤버들에 의해 녹음되었고, 뮤직비디오 촬영도 결정되었다고 한다. 1500만 파운드를 투자한 신기술을 적용한 새로운 뮤직비디오도 촬영했다고 한다. 2020년 7월 아바의 대변인 제프 로이드는 새로운 ABBA 음반 발매는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고 말했다.# 코로나 여파로 아바타 투어도 2022년으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2021년 4월 비에른 울바에우스의 인터뷰

2021년 4월, 비에른 울바에우스는 헤럴드 선과의 인터뷰에서 "올해에는 새로운 음악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더 이상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스튜디오에 돌아온 그룹의 시간에 대해 "우리는 정말 정말 좋은 친구입니다. 저희 4명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스튜디오에 섰고, 우리가 겪은 일을 아는 데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사이에는 매우 강하고 강한 유대감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2021년 8월 25일 The Sun은 ABBA가 39년만의 신곡을 9월 3일에 발매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ABBA는 "ABBA Voyage"라는 투어를 개최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으며, 젊은 시절의 자신들의 모습이 담긴 홀로그램 무대에서 명곡을 선보인다고 한다. 'ABBA Voyage'는 그룹의 컴백과 2022년 5월 오픈 예정인 홀로그램 쇼 이스트 런던에 건설된 전용 극장의 제작을 쫓은 새로운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도 제작된다고 한다.# 다만, 출처가 The Sun이라 확실하지 않은 뉴스였다. 그러나 ABBA Voyage라는 공식 홈페이지트위터 공식 계정이 생기고 팬들 사이에서는 이 뉴스가 기정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BBC 뉴스에 따르면 신곡 5곡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I Still Have Faith In You Don't Shut Me Down

2021년 9월 2일 약 40년만에 컴백을 발표했다. 동시에 신곡 I Still Have Faith In YouDon't Shut Me Down을 공개했다. 가디언지는 신곡의 5점 만점을 주며 "활기차고 감동적인 복귀곡, 팝의 최고봉"이라고 평을 내렸으며#, 인디펜던트는 "시간은 흘러가지만 아바는 결코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라고 평을 내렸다.# 11월 5일에는 10곡의 트랙이 담긴 정규 앨범 'Voyage'를 발표한다. 2022년 봄부터는 ILM에서 만든 전성기의 본인들을 재현한 홀로그램 투어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홀로그램 투어를 위해 영국 런던에서 본인들만의 콘서트장인 아바 아레나(ABBA Arena)를 건설하고 있다.[13]#

또한 커리어 최초로 크리스마스 노래를 발표할 예정이며, 새로 발표된 앨범 'Voyage'는 3일만에 영국에서 8만장의 예약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이는 그들의 레이블인 유니버설 뮤직 UK의 새로운 기록이다. 이 기록은 이전의 기록 보유자였던 테이크 댓의 앨범 Progress와 III로 능가하는 기록이다.# 이 앨범은 영국 음반 차트에서 204,000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1위로 데뷔했으며, 이 중 90%가 피지컬 판매량이었다. 이 음반은 에드 시런의 2017년 음반 《÷》 이후 영국에서 가장 빨리 팔린 음반이 되었고, 29,900장의 바이닐이 팔려 2021년 음반 중 가장 빨리 팔린 음반이 되었다. 이 앨범은 1992년, 1999년, 2008년에 1위를 차지한 ABBA 골드 이후 ABBA의 첫 번째 1위 음반이다. 독일에서도 2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앨범 차트 1위로 데뷔했다. 미국에서는 2위로 데뷔했는데, 이 순위는 ABBA의 정규 앨범 중 빌보드 200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 것이다.

데뷔하고 해체한지 수십년이 지낫지만 이번 앨범이 2022 그래미 제너럴필드에 후보로 지명된것으로 그 실력과 음악성이 여전히 명성에 걸맞은 행보를 보여주고있다.

2024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는데, 50년 만의 스웨덴 내 기사 작위라는 점이다.#


[1] 인기가 워낙 많아 당시에는 스웨덴의 비틀즈라고 불리기도 했다.[2] 스티그 안데르손은 음악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권위 있는 상 폴라음악상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스웨덴 왕립음악원에 내놓은 기부금으로 ‘뮤직어워드 재단’이 설립되었다.[3] 이건 지금도 그렇다. ABBA, 셀린 디옹 같은 극소수의 아티스트들만이 예외적인 케이스다.[4] 이 곡은 ABBA의 노래들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 차트에서 1위를 한 노래이다.[5] 특히, 네덜란드에서 ABBA의 앨범과 싱글들은 당시 네덜란드 음반 판매량의 신기록을 매번 갱신했다.[6] "Knowing Me, Knowing You"와 "The Name of the Game"에 이어 3회 연속 차트 1위[7] 웨스트라이프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8] 벤뉘와 비에른이 아바 앨범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곡들과 활동 당시의 곡들, 새로 작곡한 곡들을 이용해 유명 작사가 '팀 라이스'와 손잡고 만들었다. 스토리가 막장 드라마급은 아니지만 미국인들이 싫어할 만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결과적으로 실패가 돼 버렸다.[9] ABBA 노래 최고의 커버 중 하나라고 불리기도 한다.[10] 커트 코베인은 개인적으로도 ABBA의 팬이기도 했다.[11] 마돈나는 ABBA의 'Gimme! Gimme! Gimme!'를 샘플링한 리드 싱글 'Hung Up'은 음악적으로도 성공했으며 전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마돈나는 당시 부진에 빠져 있어서 재기가 시급한 상황이었는데 그때 만든 노래가 'Hung Up'이다. 앨범 제작중의 'Hung Up'은 메인 리드싱글 느낌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녀의 프로듀서들이 그녀와 같이 앨범에 메인 테마인 복고에 대해 샘플링 할만한 곡을 찾다가 발견한게 아바의 'Gimme! Gimme! Gimme!'다. 그러나 아바는 많은 히트곡을 낸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타가수의 샘플링을 허용한적이 없었다. 자신들이 만든 창작물에 샘플링하는 행위가 날로 먹는 행위라고 느껴서 허용하지 않았다. 마돈나도 처음에는 메일로 샘플링 허락을 구했지만 ABBA가 단칼에 거절했고, 그 다음에 전화로도 집적 의사를 물었지만 역시나 거절한다. 하지만 'Gimme! Gimme! Gimme!' 곡이 마돈나 마음에 들었고 결국 마돈나가 직접 비오는날 ABBA의 작곡가 안데르손의 저택으로 찾아가 부탁을 했고 결국 샘플링을 허락했다. 이게 ABBA의 최초이자 마지막 샘플링 허락으로 남았다.[12] 역대 최장 기간 차트인 1위[13] 동원 인원은 3,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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