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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Kumārajīva[1][2]
한자: 鳩摩羅什[3]
(344년 ~ 413년[4])
1. 개요
쿠차 왕국[7] 출신의 승려.
생전에 300권에 달하는 불경을 번역하였으며 그가 번역한 불경은 동아시아에서 손꼽히는 발자취를 남겼다. 4대 역경가[8]의 한 사람으로써, 현장이 천축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갖고 와서 번역한 불경이 퍼진 뒤에도 쿠마라지바의 불경은 구역(舊譯)으로 불리며[9] 오늘날까지 한역불경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2. 생애
아버지 쿠마라야나는 인도 카슈미르 태생의 명문 귀족 출신이었고, 어머니 지바는 쿠차 왕국의 공주였다. 고승전에 따르면 지바가 쿠마라지바를 임신하고 나서 갑자기 생전 배운 적도 없는 언어를 모두 알아듣고 구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쿠마라지바가 태어나고 나서는 그런 능력이 다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이는 쿠마라지바라는 인물이 후대에 불경 한역(漢譯)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룰 것을 예고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해석된다.356년에 쿠마라지바는 어머니를 따라 출가해, 원시 경전이나 아비달마 불교를 배우며 자랐고, 369년에 대승불교로 전향, 불경 공부를 이어나갔다. 고승전에 보면 쿠마라지바가 불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산길에서 어느 아라한을 만났는데, 그 아라한은 쿠마라지바를 두고 "이 아이가 서른다섯 될 때까지 파계하지 않으면 우바급다[10]와 같은 인물이 될 것이고, 파계를 하더라도 매우 뛰어난 법사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384년에 중국 전진(前秦)의 장군 여광이 쿠차로 쳐들어왔을 때[11] 쿠차국왕 백순이 살해되고, 여광의 포로가 된 쿠마라지바는 이후 18년 간 양주(涼州)에서 여광의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이후 여광은 양주에서 후량(後凉)을 세웠다.
여광은 쿠마라지바를 잡아놓고 "네까짓 중놈이 도사들보다 나은 게 뭐냐?" 하며 온갖 수모를 주었는데, 그를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지게 하기도 하고, 쿠차 왕녀[12]를 강제로 쿠마라지바의 방에 밀어넣어 "동침하지 않으면 여자를 죽이겠다." 하고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이때 쿠마라지바는 여동생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율을 어기고 만다.
401년에 후진(後秦)의 요흥이 그를 맞이해 장안으로 옮기고, 402년부터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 원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흔히 알려진 불교 용어 극락, 지옥,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들이 모두 그가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
쿠마라지바의 번역 불경은 그때까지와 다른 엄격한 규칙을 세우고 번역한 것으로, 그 정확성이나 번역 수준이 그전까지의 불경에 비해 상당히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번역 스타일은 후대의 번역가인 현장의 것과 비교하면 의역과 직역의 차이로 설명된다. 현장의 번역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충실한 '직역'이고,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한문에 맞게 번역한 '의역'인 것. 다시 말해, 쿠마라지바는 중국 사람들이 산스크리트어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중국어에 맞고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에 더 친숙한 방식으로 번역을 한 것이다. 일례로 쿠마라지바는 불교 원전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아미타경 번역에서 공명지조[13]처럼, 원전에는 없지만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과 내용을 추가했다.
<십주경(十住經)>은 쿠마라지바 자신이 가져온 경전이 아니라서 쿠마라지바도 내용을 명료하게 알질 못했다. 이 때문에 쿠마라지바는 원본을 받고도 한 달을 묵혀두었다가 해당 <십주경>에 대해 잘 아는 승려 불타야사(佛陀耶舍)를 초청하여 자세히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번역에 들어갔다. 먼저 다른 사람이 작업한 번역본이 있으면 그 옛 번역본의 장단점을 확실하게 파악한 다음 번역을 시작하였고, 번역 용어 선택이나 잘못된 곳을 고칠 때도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상의를 거쳐서 진행하였다고 한다.
옛 번역본의 오류뿐 아니라 원어 사본의 오류도 교정을 시도했다. 서역의 음이 틀린 곳은 인도어로 고치고, 중국어가 틀린 곳은 글자의 뜻을 교정하였으며,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바로 기록하고, 다른 이름은 올바르게 고쳤는데, 고친 서역의 음이 반 이상이었다고. 나아가 경전만으로는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 싶으면 관련된 논서를 찾아 대조하는 과정까지 거쳤다. 그야말로 현대의 전문 번역가 못지 않은 수고를 들인 셈.[14]
쿠마라지바는 여광의 협박으로 쿠차 왕녀와 동침하면서 불사음계를 깨고 말았고, 장안에 온 뒤에는 그의 학식과 재능에 놀란 요흥이 "당신 같은 위대한 사람의 후사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며 또 궁녀를 열 명을 내려주어 부인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쿠마라지바는 승려이지만 파계승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15] 당연히 "위대하신 부처의 가르침을 저런 파계승이 설법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는 항의도[16] 있었던 것 같은데, 쿠마라지바는 불경을 강설할 때마다 첫머리에서 '나를 보지 말고 내가 설하는 법을 보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만이 연꽃은 피어난다. 모두들 연꽃의 향기만을 취할 뿐 더러운 진흙은 보지 말아주기 바란다.
죽기 전에 "내가 번역한 불경에 조금의 틀린 점이 없다면 내가 죽은 뒤 내 혀만은 타지 않고 남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실제로 그를 화장하고 나서 보니 그의 혀는 온전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쿠마라지바의 혀 사리 부도탑은 현재 장안의 초당사에 남아 있다.
쿠마라지바, 현장 번역이 있는데, 오늘 현장의 번역이 중국입장에서 했으니 벌써 260년 후에 나온 것이니 더 좋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훨씬 쿠마라지바가 아름다운 번역이에요. 현장은 훨씬 인도식 스타일이에요. 인도에 충실하게 번역한 거에요. (현장의 번역 : 직역 스타일 쿠마라지바의 번역 : 의역 스타일) 직역이고 음사도 너무 심하게 하고, 그래서 중국인의 감정의 흐름을 봐도, 현장의 번역이 쿠마라지바의 번역에 비해 떨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 쿠마라지바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해당 강의록 전문 |
또한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이 중요한 점은 그의 불경 번역으로 불교계의 폐단으로 지목되었던 격의불교를 벗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때까지의 중국, 한국 등에서 불교는 기존의 토착 종교[17]와 습합되어 설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18] 이러한 격의불교는 포교에 유용하기는 했지만 포교 과정에서 불교 본래의 가르침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쿠마라지바가 불경을 번역하고 나서부터는 이러한 경향이 다소 완화되었다는 것.
또한 알게 모르게 한국사에서도 영향을 상당히 많이 남긴 사람이다. 고구려의 승려 승랑이 배운 것으로 알려진 삼론종은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불경을 소의경전[19]으로 하는 불교 종파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십성의 한 사람인 혜공이 쿠마라지바의 제자였던 후진의 승려 승조(僧肇)가 지은 <조론>을 보고 "이거 전생에 내가 지은 거야"라고 대답했었다고 전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국 국문학사에서도 쿠마라지바는 언급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인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쿠마라지바가 불경 번역에 대해 남긴 말[20]을 인용해 한글로 창작된 정철의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중국식 칠언고시로 번역하려 하는 것을 두고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하며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21]가 소위
쿠마라지바 번역의 생명력은 당장 관세음보살 항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당장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관세음보살(관음보살)이라는 단어보다 현장이 번역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말이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더 가까운 번역이라 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관세음보살을 더 많이 찾고 더 익숙해하는 편이다.
3. 언급된 원문
天竺國俗, 甚重文製. 其宮商體韻, 以入絃為善. 凡覲國王, 必有贊德. 見佛之儀, 以歌歎為貴. 經中偈頌, 皆其式也. 但改梵為秦, 失其藻蔚, 雖得大意, 殊隔文體, 有似嚼飯與人, 非徒失味, 乃令嘔噦也.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양고승전(梁高僧傳)>권2, 진장안구마라집(晉長安鳩摩羅什)[22]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양고승전(梁高僧傳)>권2, 진장안구마라집(晉長安鳩摩羅什)[22]
鳩摩羅什有言曰, "天笁俗最尙文, 其讚佛之詞, 極其華羙. 今以譯秦語, 只得其意, 不得其辭理." 固然矣.
쿠마라지바가 말하길, "천축에서 가장 훌륭한 문학으로 삼는, 그 찬불가의 가락은,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답다. (근데) 지금 이것을 한문(秦語)으로 옮기려니, 그 뜻은 얻을 수 있는데, 그 말의 이치까지 전할 수는 없도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다.
김만중, 서포만필(西浦漫筆) 下 647-648쪽(권한 필요)
쿠마라지바가 말하길, "천축에서 가장 훌륭한 문학으로 삼는, 그 찬불가의 가락은,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답다. (근데) 지금 이것을 한문(秦語)으로 옮기려니, 그 뜻은 얻을 수 있는데, 그 말의 이치까지 전할 수는 없도다." (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다.
김만중, 서포만필(西浦漫筆) 下 647-648쪽(권한 필요)
因法相遇, 殊未盡伊心. 方復後世, 惻愴何言. 自以闇昧, 謬充傳譯. 凡所出經論三百餘卷. 唯十誦一部, 未及刪煩. 存其本旨必無差失. 願凡所宣譯傳流, 後世咸共弘通. 今於眾前發誠實誓. 若所傳無謬者, 當使焚身之後舌不燋爛.
불법을 인연으로 서로 만났거늘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이제 세상을 뒤로 하려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어쩌다 잘못 역경을 맡았다.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역출하였다. 오직 『십송률(十誦律)』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깎아내어 다듬지 못하였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크게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하게 맹서한다. 만약 내가 번역하여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23][24]
불법을 인연으로 서로 만났거늘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이제 세상을 뒤로 하려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어쩌다 잘못 역경을 맡았다.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역출하였다. 오직 『십송률(十誦律)』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깎아내어 다듬지 못하였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크게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하게 맹서한다. 만약 내가 번역하여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23][24]
4. 여담
}}} ||'색즉시공 공즉시색' 구마라습과 쿠차왕국 - 동으로 간 푸른 눈의 승려 |
[1] 산스크리트어로는 '꾸마라지와'로 들린다. 본 항목의 제목 '쿠마라지바'는 로마자 표기를 곧이 곧대로 읽은 것이다.[2] 현재 산스크리트어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될 외래어 표기법이 없다. 개별 질문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답변은, (일단은) 로마자 표기를 그대로 읽으면 된다고 한다. 만약 산스크리트어의 표기법이 생긴다면, 무기음과 유기음을 구별하는 언어의 파열음은 각각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그 표기를 구별하는 관습에 따라(태국어, 베트남 어 등), 'k'는 'ㄲ'으로 옮길 것이다.('kh'는 'ㅋ'이 된다.) 'v'는 'ㅂ'이 될 것 같지만 외국어의 접근음은 한국어의 비슷한 반모음으로 쓰기에 '꾸마라지와'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 불교학회의 산스크리트어 표기법과도 일치하게 된다.[3] 마지막 글자를 습 또는 집으로 읽는데 이에 따라 구마라습 또는 구마라집이 되기도 한다.[4] 또는 350년~409년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5] 인도의 불교에서는 번뇌를 멀리하는 것이 깨달음의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쿠마라지바는 이 번뇌야말로 깨달음의 장소이며 번뇌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깨달음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번뇌를 멀리하려고 할수록, 그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은 점점 더 늦어질 것이다. 그러니 번뇌 자체를 혐오하거나 멀리하지 말고, 번뇌의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그 번뇌 속에서의 평온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6] 현장이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직역한 설무구칭경에서는 식제번뇌시묘보리(息諸煩惱是妙菩提) 즉 '모든 번뇌를 가라앉히는 것이 바로 묘한 보리'라고 말한다. 수행을 하겠다면서 굳이 조용하고 깨끗한 곳만 찾아다니는 광엄동자를 향해서 유마거사가 "뭐하러 따로 도량을 찾냐? 꼭 깨끗하고 조용해야만 그게 도량이냐? 어디든 네 번뇌를 가라앉힐 수 있으면 그게 어디든 도량이고 수행처지."라고 일침을 놓으면서 한 말이다.[7] 지금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아크수 지구,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 가장 자리 무자트 강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국가 가운데 하나.[8] 중국 불교에서는 현장과 쿠마라지바와 함께 진제(眞諦, 인도명 파라마르타, 499 ~ 569)와 불공금강(不空金剛, 인도명 아모가바즈라, 705 ~ 774)을 포함시켜 4대 역경승(譯經僧)으로 꼽는다. 불공금강 대신 의정(義淨, 635 ~ 713)을 넣어 4대 역경승으로 꼽기도 하는데, 현장과 쿠마라지바가 워낙 넘사벽이라서 나머지는 다소 묻힌 경향이 있다.[9] 현장이 번역한 불경은 신역(新譯).[10] 인도의 정복군주로 불교를 세계 종교로 발돋움하는 데에 기여한 아소카 대왕의 국사였던 인물이다.[11] 양고승전에 따르면 여광을 비롯한 전진군이 쿠차를 공격한 것은 쿠마라지바를 중국으로 데려오라는 부견의 명령 때문이었다. 덤으로 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해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았던 쿠차 왕국을 정복하려는 욕망도 있었다. 부견이 쿠마라지바를 중국으로 데려오게 된 것도 중국의 승려 석도안의 진언 때문이었다.[12] 즉, 쿠마라지바의 사촌 여동생[13] 공명조라고도 하며, 몸 하나에 머리 두 개가 있는데, 두 머리가 사이가 안 좋아서 밤낮으로 티격태격 싸우다 결국 한 쪽이 다른 한쪽에게 독을 먹여 죽이지만 몸을 공유하니 나머지 한쪽 머리도 죽고 만다는 전설. 이렇게 사이 나쁜 새도 행복의 노래를 부르는 곳이 바로 극락이라는 것이 아미타경의 설명이다.[14] 출처: 불교신문[15] 이러한 쿠마라지바의 파계도 이미 예언된 것이었기는 하다만.[16] 인도의 고승 불타발타라가 장안에 왔다가 쿠마라지바의 이름을 듣고 와 봤다가 그가 열 명의 여성을 거느린 것을 보고 경악했다고 한다. 이후 불타발타라는 쿠마라지바를 떠나 남쪽의 여산혜원에게로 갔으며, 그곳에서 60권 화엄경을 번역하게 된다.[17] 중국의 경우는 주로 도교[18] 당장 공(空)이라는 단어부터가 불교 재래 전까지 중국에서는 주로 도교의 용어였다.[19] 어떤 종파가 그 종파 교리의 뿌리로 내세우는 경전.[20] 위의 쿠마라지바의 발언 가운데 밑에 있는 것[21] 즉, 한자로 표기하지 않은 순수 한국어[22] 해당 전기는 현재 고려대장경 및 다이쇼신수대장경에 실렸다.고승전2 구마라집전(국역 한글대장경) 국역 한글대장경 사이트에서 양고승전의 원문을 제공하고 있는데 검색할 때는 양고승전이 아니라 고승전으로 입력해야 나온다.[23]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전한 말. 마찬가지로 양고승전에 실린 쿠마라지바의 전기에 실려 있다.[24] 당시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통강, 즉 강의를 하면서 하는 번역이었다 쿠마라지바가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해석하면서 강의하면, 제자들이 정리하여 윤문하고 그걸 다시 쿠마라지바가 원문을 참조하여 수정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쉽게 말하면 구술 번역. 그래서 손이 아닌 혀를 언급한 것이다. 후대 번역자인 현장 법사도 이런 식으로 번역하였으리라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