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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20:47:50

레프 트로츠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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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트로츠키와 우리 조선 빨갛게 빨갛게 · 무지갯빛 트로츠키
관련 인물 블라디미르 레닌 · 이오시프 스탈린
트로츠키주의
사상 트로츠키주의,(공산주의),
분파 파블로주의 · 신트로츠키주의(클리프주의) · 제3의 진영 · 포사다스주의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주의 }}}}}}}}}

1. 초기 이력2. 혁명가 활동3. 전성기의 시작, 10월 혁명
3.1. 최전성기를 달리다
3.1.1. 혁명을 사수하라! : 붉은 군대의 건설자
3.2. 내전 전후 경제정책3.3. 내전 이후의 권력투쟁
4. 일국사회주의론 VS 연속혁명론5. 몰락
5.1. 제2의 망명생활5.2. 대숙청5.3. 비극적인 암살과 죽음
6.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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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이력

러시아 제국 헤르손현 옐리사베트그라드군[1]의 작은 마을 야놉카(Яновка)[2]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다비트 레온티예비치 브론시테인(Давид Леонтьевич Бронштейн)은 폴타바 출신의 유대계 우크라이나인으로 그의 가정에서는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가 섞인 피진 수르지크를 사용하였다.
파일:1888년의 레프 트로츠키.jpg
1888년, 8살의 트로츠키

트로츠키의 아버지는 부농이었다. 그는 트로츠키가 9살이 되던 해 그를 오데사로 보내 독일 루터회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오데사는 여러 인종이 살던 국제도시였으므로 트로츠키는 국제주의에 눈뜨게 되었다. 이는 조지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러시아 민족주의를 강조한 이오시프 스탈린과 대비되는 점이다. 트로츠키는 수석 졸업을 할 정도로 학업 성적이 우수했으며, 독일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에도 유창했다. 트로츠키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학 능력이 평범하다고 이야기했고, 특히 영어는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한다고 했으나 사실 트로츠키의 영어 연설을 보면 발음이 어색할 뿐, 문장 만드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황제의 전제 정치하에 있었고, 러시아에는 여러 사상적 배경을 가진 혁명 세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조금이라도 깨어있는 사람은 모두 혁명 사상에 물들고 있었다. 수학을 전공하고 있던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러시아 전통 사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보자는 인민주의자(народники)였으나 후에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트로츠키는 보수주의자에서 인민주의자, 다시 마르크스주의자로 바뀌는 사상적 변화 과정이 무척 빨랐다.

그는 학생의 신분으로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고, 우크라이나 남부 미콜라이우의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조직 능력은 두각을 나타내었다. 게다가 연설 실력도 출중해서 2월 혁명 이후 반혁명적 장군인 라브르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부대가 수도에 진입하자 트로츠키는 이들을 막아서서 쿠데타 부대에 일장 연설을 했고, 그의 연설만 듣고 쿠데타 부대는 자진 해산해서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는 실패하게 된다. 필력도 출중하여 레닌이 후에 "그 사람의 글은 훌륭하기는 하지만, 너무 문체가 화려하다."라고 할 정도였다. 소련 연구가로 유명한 영국인 역사학자인 로버트 존 서비스(Robert John Service, 1947년 10월 29일 ~ )는 트로츠키가 혁명가가 되지 않았더라도 문필가나 평론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것이라고 평할 정도다.

트로츠키는 당시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해서 혁명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때 첫 번째 아내인 알렉산드라 소콜롭스카야(Александра Соколовская, 1872년 ~ 1938년 4월 29일)와 만나게 되었다.

2. 혁명가 활동

그러나 제정 치하에서 혁명 운동은 곧 감옥행이었고, 트로츠키도 감옥에 간다. 이후 1900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으며, 1902년 탈출하여[3] 유럽으로 망명하였다. 이때부터 예전 감옥 생활 당시 간수의 이름을 가명으로 쓰게 되는데, 그래서 '트로츠키'가 되었다.

국외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출신 망명객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여러 혁명가들을 만나고 당 기관지인 《이스크라(Искра, '불꽃')》의 편집진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이스크라 지상(誌上)에서는 필명 '페로(перо, '펜'이라는 뜻)'를 썼고, 눈부신 필력으로 레닌의 마음에 들어 이스크라에서 가장 중요한 필자 중 한 명이자 7인의 책임 편집 위원으로 임명하고자 했다.[4]

당시 20대의 젊은이였던 트로츠키가 이스크라의 책임 편집 위원이 된 것은 대단히 신선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전격적인 발탁에는 편집 위원회에 젊은 피를 좀 집어넣어봐야겠다는 고려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한 짝수인 6명으로 구성되어 의사 결정 과정에서 가부동수가 자주 발생하는 불편한 상황을 위원을 하나 늘려서 해결하자는 정치적인 고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편집 위원들은 블라디미르 레닌·율리 마르토프·알렉산드르 포트레소프의 소장파와 베라 자술리치·파벨 악셀로트·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노장파로 나뉘어 있었다. 마르토프가 때로는 선배들의 요구에 굴복하기도 했지만 당시 이스크라의 편집 회의 투표에서 기본적으로 레닌과 마르토프는 같은 편이었다. 이런 3대 3의 교착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레닌은 트로츠키를 추천했고 마르토프 등 대다수의 위원들도 찬성했다. 유일하게 반대한 것이 노장파의 플레하노프였고[5] 이 덕분에 트로츠키는 편집 위원이 되지 못하였다. 트로츠키가 '레닌의 곤봉'으로 불린 것은 바로 이 시기의 일로 그가 경제주의자들의 주장을 무자비하게 반박하면서 생긴 별명이다.[6]

이때 파리에서 두 번째 아내[7] 나탈리야 세도바(Наталья Седова, 1882년 4월 5일 ~ 1962년 1월 23일)를 만났다.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는 당의 노선을 두고 레닌과 마르토프가 대립하고 있었다. 레닌은 당이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들의 전위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르토프는 "여러 계층의 인물들이 참여하는 대중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둘의 대립은 결국 분당 사태로 이어졌고, 레닌 일파는 볼셰비키(다수파), 마르토프의 일파는 멘셰비키(소수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레닌은 자신의 세력을 다수파라고 불렀고, 마르토프를 소수파라고 했지만 실제로 두 세력은 비슷했다. 그러나 '다수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던 볼셰비키는 심리적인 우위를 가지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양 계파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으면서 사안에 따라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곤 했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보충해서 설명하자면,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주도하는 조직은 당 기관지인 '이스크라'였다. 즉 이스크라의 책임 편집 위원이 됨으로써 트로츠키는 사회민주노동당의 실질적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볼셰비키에 약간 가깝긴 하지만 사안에 따라 멘셰비키의 편도 들 수 있는 독립적 지도자로써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트로츠키의 입장은 그를 추천했던 레닌과 그 추천을 받아들인 마르토프가 예상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국면 속에서 트로츠키는 독자적인 명성과 영향력을 쌓아올리기 시작했고, 이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까지 트로츠키의 정치적 입장을 규정하는 중요한 특징이 된다.

이후 1905년에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자, 비밀리에 러시아로 돌아와 혁명을 조직하려 한 트로츠키는 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진다. 1907년, 트로츠키는 다시 시베리아를 탈출하여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고, 이후 프랑스, 스위스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혁명 활동을 펼쳤다.[8]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종군 기자로 전선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고,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군 포로를 학살하는 협상국의 만행을 보도했다가 프랑스 당국의 신경을 거슬렀다. 이러한 반전적인 논조 때문에 프랑스 당국에 의해 국외 추방되었다. 이후 스페인은 그를 입국시켰으나 신분이 드러나 추방당했다. 이 과정에 대해 자서전에 서술된 바[9]에 따르면...
* 당시 스페인 경찰은 트로츠키를 체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체포했지만, 그 이유는 모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트로츠키가 시치미를 떼고 대체 왜 자신이 체포당한 것이냐고 묻자, 대답하지 못하고 여권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거나(당시 러시아의 행정에는 오류나 실수가 많았으므로) 혹시 스페인 내의 아나키즘 활동에 연루된 것이 아니냐거나(당시 스페인 내에는 아나키즘 운동이 크게 성행했으므로)는 등의 가능성을 두서없이 늘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 이런 설명에 대해 트로츠키가 "하지만 내가 우리나라 정부와 당신네 나라 아나키스트에 대해 한꺼번에 책임질 수는 없지 않느냐"고 짜증을 내자, 경찰들은 우리는 그저 짐작해서 예를 든 것 뿐이지, 정말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고 허둥지둥 트로츠키를 달랬다. 결국, 왜 자신들이 이 사람을 체포한 것인지 한참 고민하던 경찰서장은 트로츠키의 정치적 신조에 대해 물어봤고, 트로츠키가 가능한 한 간단하고 알기 쉽게 자신의 신조를 설명하자 박수를 쳤다. "아! 이제 왜 체포되신 건지 아셨겠군요!"[10]
* 그 후 조서 작성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일체의 진술과 수사 협조를 거부했고, 결국 경찰은 조서에 트로츠키의 지장을 찍기 위해 직접 트로츠키의 손을 붙잡고 지문을 하나하나 손으로 눌러 찍어 줄 수밖에 없었다.
* 그 뒤 국외 추방이 결정되고, 트로츠키는 추방될 국가로 미국을 선택했다. 그래서 미국행 여객선이 출항하는 카디스까지 경찰에 의해 호송되었는데... 카디스행 기차에서 만난 승객들은 멀끔해보이는 외국인 신사가 경찰의 호송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인지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에 트로츠키를 호송하던 경찰은 다른 승객들에게 "이 분은 훌륭한 신사 분이지 사기꾼이나 위조지폐범이 아닙니다. 다만 부적절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신 탓에 이런 재난을 겪게 되신 겁니다"라고 설명해 주었고,[11] 이 말을 들은 승객들은 카디스는 기후가 좋은 곳이니 가 보시면 마음에 드실 거라면서 트로츠키를 위로했다.[12]
* 카디스에서 미국행 배가 출항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경찰의 감시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자유로운 행동이 허가되었는데, 이때 트로츠키를 감시하던 경찰은 길거리 행상에게 삶은 새우를 사 먹는 트로츠키가 바가지를 쓰게 되자 멀뚱한 트로츠키 대신 격분해서 행상에게 호통을 쳤다.

그야말로 소설이나 영화에서 찍어낸 것 같은 이 사례를 봄으로, 19세기 말~1차대전까지의 (서)유럽에서 얼마나 낙천주의적이고 관용적인 분위기가 대세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이 시절을 프랑스어로 벨 에포크라고 하는데, 프랑스 대혁명에서 19세기 중후반 사이의 서유럽은 정치적으로는 피비린내나는 혁명을 거듭 겪었지만 이 과정을 통해 언론이나 사상의 자유와 같은 사회의 발전 또한 이루어졌고, 동시에 과학기술과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도 함께 겪으면서 인류의 앞날에는 진보와 발전만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감과 세계관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역시 프랑스어로 '톨레랑스'라고 하는 정치적 관용주의또한 어느정도 자리잡게 된 것. 물론 이러한 '좋은 시절'과 낙천적 세계관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겪으며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스페인만 하더라도 전간기 이후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시절로 들어선 뒤 일체 관용도 없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을 무수히 처형하는 피의 시대가 찾아온 것.[13]

결국 이래저래 해서 트로츠키는 미국뉴욕으로 갔다. 직후인 1917년 2월, 러시아에서는 2월 혁명이 일어났고, 니콜라이 2세는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트로츠키는 수배령이 풀리자 5월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3. 전성기의 시작, 10월 혁명

귀국 후 트로츠키는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에 가담하게 된다. 당시 볼셰비키는 자본주의의 발전 정도와 상관없이 사회가 사회주의로 이행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멘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에 따라 일단 부르주아 정부가 수립된 후에 자본주의가 발달해야 사회주의 체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2월 혁명 직후, 여러 정파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레닌은 취리히에서 스위스 공산주의자였던 프리츠 플라텐(Fritz Platten)의 도움을 받아 독일 제국 정부의 허가를 얻고 독일 국경을 통과해 스웨덴스톡홀름을 거쳐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임시정부는 러시아의 국력이 이미 소진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나 "그동안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오판을 범했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를 이용해 "평화"를 외치며 즉각 강화를 요구하면서 임시정부 전복 공작을 시작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제정 시절 만들어진 의회인 두마로부터 만들어졌으나, 당시 다른 곳에서는 전선을 탈주한 병사들과 노동자들에 의한 평의회(소비에트)가 만들어졌다. 물론 소비에트에서는 볼셰비키를 비롯한 좌파 정당의 입김이 더욱 강했다.

노동자들은 전쟁에 지쳐 볼셰비키의 공작을 믿고 7월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레닌은 다시 임시정부에 의한 수배령을 피하여 수염을 깎고 가발을 뒤집어쓴 채 핀란드로 도피했고, 트로츠키가 이런 배경 하에서 볼셰비키를 지도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으며 은밀히 무력 전복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평화를 요구하던 러시아인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고, 이 틈을 이용하여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의 지배적 정당으로 나섰다. 임시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었음을 파악한 레닌과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에서 1917년 11월 7일 당시 볼셰비키의 무력이었던 적위대[14]를 이용해 임시정부를 무혈로 전복하였다. 이것은 율리우스력으로 10월 25일에 벌어진 일이라서 10월 혁명으로 불린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볼셰비키에 참여한지 1년도 안 되어 2인자로 떠오른다. 볼셰비키와 완전히 남남은 아니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트로츠키가 단숨에 레닌의 뒤를 이은 볼셰비키의 2인자로 부상한 계기는 아주 간단했다. 10월 혁명에서 적위대를 동원해서 임시정부를 전복하자고 주장한 사람이 사실상 레닌과 트로츠키 둘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적위대는 병력이나 무력 모두 그리 충실하다고 말하기 힘든 상태였으며, 또한 2월 혁명으로 제정을 전복시키고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또 혁명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긴 대부분의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무장봉기에 반대하고 있었다.

유력 지도자들이었던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모두 무장봉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그나마 스탈린은 레닌의 의중이 무력봉기라는 것을 알아채자 입장을 바꿔 봉기를 뒤늦게 지지하기라도 했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아예 당 밖으로 무장봉기 계획을 폭로해 버린다(...).

그런데 케렌스키 정부가 7월에 독일군에 대해 케렌스키 공세를 폈다가 대패한 이후, 군부에 실패의 책임을 전가하면서 군부에 대한 지배력이 급속하게 소진된데다가,[15] 아예 러시아군은 부대단위로 탈주사태가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레닌은 이 상황을 매우 긍정적 신호로 봤고 쿠데타로 임시정부를 전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트로츠키가 적위대를 동원하여 임시정부를 공격하자 임시정부는 무기력하게 붕괴하고 말았다.

군부가 임시정부를 외면했기 때문에 케렌스키 편에 선 부대는 500명도 안되는 여군 대대뿐이었고, 그나마 이들도 수천명의 볼셰비키 적위대가 몰려오자 바로 항복했다. 10월 혁명(사실상의 쿠데타)은 거의 무혈로 성공했으며, 이 당시 사망자가 불과 6명였다. 똑똑 노크하니 바로 문 열어준 수준(...). 게다가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독일군에 대한 공세를 폈다가 대패하고 오히려 책임을 뒤집어쓴 군부는 임시정부를 지켜줄 생각은 전혀 없었고, 대다수는 아직까지 제정에 대한 향수가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볼셰비키 당을 지지하지는 않을지언정 임시정부를 보호할 의사도 없었다. 결국 볼셰비키는 어부지리로 임시정부를 전복한 것이다. 게다가 케렌스키는 러시아에서는 거의 패전의 원흉으로 몰린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처단을 주저했고, 독일과 전쟁을 계속 한다는 입장을 펴서, 대중 역시 임시정부에 큰 실망을 느끼고 있었다.

이 무장봉기를 통해 볼셰비키는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며, 사실상 이를 주도한 트로츠키의 입지 역시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특히 볼셰비키의 최고지도자인 레닌의 계획을 다른 지도자들도 반대하는 상황에서 지지하고 동참하였으며, 완벽하게 성공시키기까지 하였고 더구나 레닌이 국외에 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봉기를 주도하여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한 트로츠키가 레닌을 맞이하는 형국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10월 혁명 이후 트로츠키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 내에서 트로츠키의 세력은 매우 미약했다. 당시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당의 최고지도자인 레닌이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공격에 직면할 정도였다. 당시의 정국에서 트로츠키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증거인 동시에, 당 내에서 트로츠키의 지지기반이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또한 다른 고참 볼셰비키들이 사상적으로 레닌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간주된 데 비해 트로츠키가 독립적인 이론적 분파의 지도자로 여겨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16]

처음에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했던 이유는 볼셰비키가 두마에서 과반수도 차지하지 못했고, 이래저래 두마 안의 좌파정당은 볼셰비키 단독정부에 딴지를 걸었기 때문이다. 볼세비키 내에서도 두마 안의 다른 좌파정당과 권력을 분점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를 거부하면서 볼셰비키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후 한 걸음 더 나아가, 농촌 선거구의 숫자가 더 많았던 관계로 볼셰비키당이 아닌 사회혁명당이 제1당이었던 두마를 해산했다. 당시 러시아의 두마는 인구 비례에 관계없이 행정구역 1단위당 1명씩 선출을 했기 때문에, 농촌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는 사회혁명당이 원내 1당 자리를 차지했다.

도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고, 소비에트 인민회의에서는 본인들이 헤게모니를 틀어쥘 수 있는 볼셰비키당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구 비례나 실제 사업장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행정구역 한 단위당 1명씩 뽑는 두마가 아니라 실제 사업장별로 1명씩 뽑는 소비에트 인민회의가 인민의 정치적 의사를 더 잘 반영한다는 이유를 들어서 두마를 해산한 것이었다.[17] 또한 당시에 사회혁명당이 볼셰비키와 손잡은 마리야 스피리도노바의 좌파와 빅토르 체르노프의 우파로 분열되었는데, 선거구와 공천 등이 사회혁명당 분열 이전 기준이어서 선거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볼셰비키는 공약대로 독일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 트로츠키를 대표단으로 한 볼셰비키 대표들은 독일과 협상을 하게 되었다.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은 거대한 영토를 할양하기를 원했다. 이는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으나, 러시아가 전쟁을 계속하기란 무리였다. 레닌은 일단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하면 서유럽에서 연속혁명이 발발하여 구체제는 쓰러질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영토를 주고, 일단 내전에서 승리하려고 했다. 결국 러시아는 엄청난 땅을 떼어주고 독일과 강화를 맺었다. 레닌의 예상대로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한 후, 레닌의 말처럼 핀란드발트 3국, 폴란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는 조금 비자발적이었지만 어쨌든 볼셰비키 러시아가 되찾게 되었다.

3.1. 최전성기를 달리다

파일:attachment/trots-poster.png
<rowcolor=#ffe400> 트로츠키를 악마로 묘사한
반(反) 볼셰비키의 포스터
독사(반혁명세력)를 잡는 성 게오르기우스로 묘사한
볼셰비키의 포스터

3.1.1. 혁명을 사수하라! : 붉은 군대의 건설자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완벽한 군대를 건설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소.
블라디미르 레닌, 붉은 군대를 조직한 트로츠키의 군사적 재능을 칭찬하며.
제국주의자들과 반동세력들을 분쇄한 것은 모두 트로츠키 동지의 노고 덕입니다.
이오시프 스탈린, 내전 승리 후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를 찬양하며.

볼셰비키 당은 대중 다수의 지지를 받은 봉기로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각지에서 왕당파, 공화파,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등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들고 일어났다. 게다가 소수민족들도 이 틈을 타 독립하려고 했다. 이리하여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였다.

볼셰비키 당은 적위대로 임시정부를 전복할 수 있었으나, 지휘관이 투표로 임명되던 오합지졸 적위대는 형편없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각지의 반란군에게 패배를 거듭했다. 여기에 단독강화를 반대하는 협상국뿐만 아니라 강화 후에는 동맹국마저도 반혁명군을 지원하면서 볼셰비키 정권은 풍전등화의 상태가 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이자 국방장관을 겸임하게 된 트로츠키는 이전까지 군대 경험은 전혀 없는 서생 혁명가에 불과했지만, 더 이상 반혁명세력에 밀리다가는 혁명이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적위대를 개편하여 징병제를 도입하고 붉은 군대(노동자와 농민의 붉은 군대)로 재편하였다.

군문에 관한 트로츠키의 역량은 정치인으로서의 군부, 특히 장교라는 전문가 집단을 통제하여 높은 효율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능력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개혁의 핵심은 반동적이라고 여겨졌던 러시아 제국군 장교들을 "군사전문가"로서 적위대의 지휘관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성향이 의심스러운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정치장교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한다는 혁명가들의 몽상적인 주장에 대해 "닥쳐!"라고 일갈하고 "전쟁은 검증된 전술을 써야 이긴다." 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 이를 통해 1차대전 이후 실업자가 된 러시아 제국군 출신 장교들이 붉은 군대에 입대하였고, 붉은 군대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이는 반혁명군에 참여할 수 있는 제국군 장교들을 볼셰비키 측에 잡아두는 효과도 있었다. 트로츠키의 이런 단호한 태도는 1918년 동부전선의 지휘관들에게 그가 하달한 명령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귀하들에게 경고한다. 만약 어떤 부대라도 허가 없이 전선을 이탈할 경우, 첫째. 부대의 정치장교는 처형될 것이다. 둘째. 지휘관도 처형될 것이다. 그리고 용맹한 병사들이 지휘관으로 임명될 것이다. 겁쟁이, 이기주의자, 반역자들은 총알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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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을 선동하고 있는 트로츠키

트로츠키는 이렇게 선동과 조직 부분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전략적 안목도 탁월했기 때문에[18] 처음에 밀리던 볼셰비키는 결국 승기를 잡고 대부분의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이 즈음에서 트로츠키는 권력과 영광의 정점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트로츠키의 군사적 역량과 선동, 조직부분 능력과 별개로 붉은 군대 소집은 공포와 폭력에 기반한 것이었다. 강제징병을 실시하였고, 탈주병은 즉결처형되었다. 탈주병 뿐만 아니라 탈주병이 발생한 부대에서는 고대 로마 제국에서나 도입하던 10분의 1형을 도입하여 부대원 10명 중 1명을 재판없이 무작위로 총살했다. 10분의 1형은 과거 로마 제국에서도 거의 집행되지 않았으나, 내전 당시 붉은 군대는 트로츠키의 명령에 따라 실제로 이루어졌다. 한 부대에서는 이와 같은 즉결처형으로 죽은 이가 스무명을 넘었다. 트로츠키는 포섭된 러시아 제국 장교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서 불온행위시 가족을 총살하겠다고 협박했으며 불온행위를 저질렀다고 의심받은 이들은 재판 없이 체카 또는 정치장교에 의하여 즉결처형당했다. 농촌에서는 총을 앞세워 식량을 강제로 징발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농민은 총살했다. 공산주의의 이상을 부르짖으며,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군인을 위한다는 소비에트는 체제수호의 이름 앞에 국가적 폭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의 복원자로서 트로츠키를 내세운 것과는 달리, 그들이 비판하는 1936년 이후 스탈린과 다를바 없는 행위를 적백내전 기간동안 저지르고 있었다. 붉은 군대의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이며 잔인한 병력운용은 스탈린 시절이 아닌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한편 붉은 군대는 러시아 국내에서는 러시아 내전을 치르면서도, 국외로는 유럽으로의 혁명 수출을 시도했다. 독일 제국이 항복한 지 이틀 후인 1918년 11월 1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한 볼셰비키는 뒤이어 러시아 제국이 점유했던 동유럽의 모든 신생국가를 침공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국토 대부분이 점령당했다가 해방되었고, 우크라이나키예프를 비롯한 국토 대부분을 빼앗기고 멸망 직전으로 몰렸으며, 벨라루스는 끝내 1919년 1월 5일 멸망했다.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되리라 직감한 폴란드는 1919년 2월 벨라루스의 붉은 군대를 공격, 이로써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폴란드는 초기에 벨라루스 서부의 빌뉴스민스크를 점령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쟁은 전면전보다는 국경분쟁에 가까웠다.

하지만 전쟁은 우크라이나를 폴란드가 원조하면서 전면전으로 격화된다. 우크라이나가 폴란드와 동맹을 체결하여 갈리치아 전역의 폴란드 영유를 인정하는 대가로 폴란드의 군사지원을 받게 된 것.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은 1920년 5월 키예프를 점령했고,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한 우크라이나의 분리독립을 좌시하려 들지 않은 볼셰비키는[19] 이에 반격을 개시했다. 미하일 투하쳅스키, 세묜 부됸니를 비롯한 명장들은 폴란드군과 우크라이나군을 털어버리고 키예프를 재점령, 뒤이어 엄청난 속도로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바르샤바 침공을 지휘하던 투하쳅스키의 전략적 실수와 조국을 수호하려는 폴란드인들의 맹렬한 저항으로 폴란드군을 추격하던 붉은 군대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대패하면서 다시 재역관광을 당했고, 폴란드군은 다시 우크라이나까지 진격하였다. 경제가 파탄난 양측은 1921년 3월 리가 조약을 체결,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3.2. 내전 전후 경제정책

1917년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이후 볼셰비키는 붕괴된 유통-공급 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농촌을 극단적으로 쥐어짜는 정책을 실시했다.[20] 총칼을 이용한 위협으로 농촌 수확물의 거의 대부분을 공출해 간 것이다. 이를 전시공산주의 체제라고 한다. 이 때문에 도시민들은 대규모 아사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으나, 농촌에서는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트로츠키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이런 농촌의 반란을 가차없이 진압했다. 당시 볼셰비키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정책을 밀어붙였다. 당시 러시아 농촌의 분위기는 "볼셰비키가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망할 놈의 공산당이 와서 곡물을 빼앗아갔다"라는 식. 대다수의 농민들이 문맹이라 볼셰비키와 공산당이 같은 정치세력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그러자 1921년 2월, 이제는 농촌 출신이 많은 혁명 지지세력(탈주병으로 구성된 병사 소비에트)조차 볼셰비키에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발트 함대의 본부였던 크론슈타트 기지에서 벌어진 해군 수병의 반란은 볼셰비키 지도부를 대경실색하게 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예전부터 골수 볼셰비키 지지자로 간주되고 있었고,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것도 포템킨의 수병 반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위기감에 휩싸였고 이를 빨리 진압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트로츠키가 감독하고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지휘한 진압군은 3월에 이 반란을 진압했으나, 어떤 학자들은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트로츠키가 제 살을 잘라먹은 셈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봉기자들은 잠재적인 트로츠키 지지자였는데, 이들을 깡그리 진압함으로써 자기 세력을 날려버린 상황이 되었다는 것.[21]

볼셰비키에 대한 반란에는 이렇게 가차없는 강경책을 펼쳤지만 레닌은 유화책도 병행했다. 이후 신경제정책 (네프, NEP)을 제안하여 통제경제를 완화하고 어느정도 자본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레닌은 이를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옹호했고, 통념과 달리 트로츠키 역시 1920년 2월 강제징발 중지와 현물세 도입 등을 주장함으로써 볼셰비키들 중에서 가장 먼저 신경제정책을 옹호하고 나선 인물이었다. 1922년에 이르러 소위 '가위 위기'라 하여 농산물 가격은 상승하고 공산품 가격은 하락하여 곡물 공급과 공산품 공급에 모두 차질이 빚어지는 사태가 벌어지자 트로츠키는 농촌의 자본주의 관계 심화를 지적하면서 이를 교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기존 연구들과 달리 '농촌에 대한 계급전쟁'[22]을 비롯한 급진적 주장을 하진 않았고 1923년 12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외국 자본 도입과 곡물 수출을 통해 자본을 마련해 공업을 육성하고 농촌에 대해서도 일방적으로 수탈하여 농공동맹을 깨서는 안된다고 국가의 농촌 개입에 대해서도 신중한 입장을 드러냈다.

결국 스탈린과 트로츠키가 신경제정책을 두고 대판 싸워 결렬됐다는 테제는 오류인 것이다. 스테판 코트킨, 맥닐 같은 연구자들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과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까지 보고 있다.

3.3. 내전 이후의 권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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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에서 승리 후 붉은 광장에서 기념 행진을 하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트로츠키

기본적으로 트로츠키는 정통 볼셰비키라기보다는 볼셰비키와 연합한 독립적인 분파 수장의 위치였다. "이스크라" 지상에서 혁명노선을 둘러싸고 펼쳐지던 키배에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 율리 마르토프 등의 전설적인 혁명가들과 어깨를 겨루며 화려한 배틀력을 보여주던 트로츠키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레닌과 거의 동급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볼셰비키-멘셰비키와 같은 거대 파벌은 아니었지만 독립적인 독자 파벌을 거느리고 있다고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십 년간 레닌을 따르던 정통 볼셰비키 세력이 겨우 1년 남짓 볼셰비키에 참여한 트로츠키가 레닌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 등과 권력을 분점했던 시기에는 비 볼셰비키 파벌이 레닌을 트로츠키주의자라고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볼셰비키 외부에서도 트로츠키를 레닌파 볼셰비키 세력과는 별개의 정파 지도자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트로츠키가 '레닌보다 더'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가 아닌 평의회 공산주의 계열)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트로츠키가 권력을 잡을 수 없었던 건 당내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해서였다. 트로츠키는 "젊은 독수리"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영웅주의적인 성격이 있었으나, "고독한 늑대"이라는 다른 별명만큼이나 자신의 세력이 없었다. 이는 볼셰비키에 늦게 참여한 탓도 있고, 지나치게 거만하고 잘난 척하는 그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23] 그에게 개인적으로 모욕당한 인물도 적지 않았다. 후일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같은 경우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근면한 것 외에는 장점이 없는 평범한 관료에 불과했는데, 트로츠키가 대놓고 그런 몰로토프를 조롱하자 몰로토프가 부들부들 떨면서 "동무, 모두가 (동무처럼) 천재가 될 순 없소."라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고 할 정도.[24][25]

트로츠키가 가지고 있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국방장관이라는 자리는 군권을 휘어잡은 자리였기 때문에,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트로츠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처럼 군사독재자가 되어 혁명을 퇴색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많았다.[26] 그래서 여러 지도자급 인사들은 힘을 합쳐 트로츠키를 견제했다. 그러나 트로츠키에게 지도자급 동료는 거의 없었고, "반대 좌파(Left Opposition)"라는 분파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이들은 주류가 아닌데다가 반대 좌파, 또는 좌익 반대파는 사실 트로츠키를 지지하던 분파가 아니다. 좌익 반대파는 노동조합을 정부의 완전한 통제와 지배하에 두려는 시도를 우파적 독재로 보고 반대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탄생한 것인데, 문제는 노동조합을 정부의 통제하에 두려는 정책을 처음 추진하던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좌익 반대파가 성립된 직후에는 오히려 트로츠키가 그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27]

이들은 스탈린이 당권을 장악하면서 트로츠키의 주장보다 훨씬 심하게 정부와 당의 권력을 확대하는 노선을 취하자 같은 적을 둔 동지라는 식으로 연합한 것에 가깝다.[28] 스탈린과 그 추종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을 정부에 복속시키려는 트로츠키는 독재자 워너비라고 까고, 동시에 노동조합에 대한 당의 지도를 부정하는 좌익 반대파는 아나키스트, 아마추어, 좌파 모험주의자라고 까는 정도의 자기모순은 별로 문제될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트로츠키에는 개인적 지지자들도 있었고, 정치 무대에서 영향력도 상당히 있었지만 당 내의 자기 계파는 핵심인사급 정치인으로는 자기 하나밖에 없는, 일종의 1인 정파에 가까운 상황이었던 셈이다. 시라소니??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다는 것을 눈치 챈 트로츠키는 이것이 스탈린의 음모라고 여기고, 당 중앙위원회 공개 편지를 보내 스탈린이 자신을 야합을 통해 몰아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스탈린을 비난했으나 스탈린은 트로츠키에 대해서 현실도 모르고 정책에 트집을 잡아대는 분파주의자이며, 레닌의 뜻을 거스르는 이단아라고 맞섰고 그가 실용적인 비판을 한 일이 없다고 깠는데 대다수의 볼셰비키들은 트로츠키가 잘못하고 있고 스탈린의 주장이 대단히 옳다고 여겼다. 1923년 말에 열린 당중앙위원회-당통제위원회 연석회의에서 트로츠키는 "정치국 안에 또 정치국이 있고 중앙위원회 안에 또 중앙위원회가 있다."고 항변하며 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카메네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트로이카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스탈린은 "나는 트로츠키의 비판 중에 구체적인 제안을 본 일이 없다.", "트로츠키는 예나 지금이나 레닌의 뜻을 어기며 분열을 조장할 뿐이다."고 정면 비판을 했고 이날 회의에서 스탈린의 제안에 114표의 찬성표가 나와 트로츠키를 분파주의자로 규정했다. 반면 트로츠키 옹호표는 겨우 2표였다.

연석회의에서 참담하게 두들겨맞은 트로츠키는 회의를 통해서는 정치적 열세를 뒤집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언론 활동과 저작 출판 등을 통해 공개 논쟁을 전개했고 당 중앙위원회 반대 운동을 열었다. 하지만 이는 트로츠키에게 독으로 작용했다. 이듬해 열린 1924년 1월 14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트로츠키는 참석하지 않고 언론 활동만 계속했지만 이 때문에 전체회의는 레닌의 뜻을 따라 당의 완전한 단결을 결의하며 트로츠키를 분파주의자로 지목하여 더욱 거세게 비판할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레닌은 뇌일혈을 못 이기고 결국 사망했다. 레닌은 유언장에서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당내의 차세대 투 톱으로 보았으나 그러면서도 유언장을 통해 둘 다 디스해버렸다. 스탈린에 대해서는 "스탈린 동지는 너무 성격이 급하고 잔인하다. 그를 서기장에서 해임하라." 고 써놨으나, 트로츠키에 대해서도 "그의 능력은 대단하기는 하지만, 너무 오만하고 잘난 체를 하는 경향이 있다."고 디스했다. 이 밖에도 후계구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후계자군으로 거론되는 사람들의 단점만을 써놨다. 이래서는 후계자 문제가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의 유언장 내용을 분석하자면, 거론된 인물은 트로츠키,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파탸코프의 6명이었고, 엄밀히 말하면 단점만 써 놓은 것은 아니다. 장점도 써 놓긴 했다. 특히,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파탸코프에 대해서는 칭찬을 더 많이 했다. 다만 칭찬을 실컷 한 뒤에, 레닌의 후계자로서 당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이유를 딱 하나씩만 제시했을 뿐이다.
예시: 부하린 동지는 당 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다. 당 내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얻고 인망이 높은 지도자는 없다. 이러저러한 점에서 정말 부하린 동지는 뛰어난 인물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충실하지는 못하므로[29] 최고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에 비해 스탈린에 대해서는 상당한 비난으로 가득하며, 결국 명시적으로 "대부분의 책임있는 지위에서 해임해야 한다." 고 까지 이야기하고 있고, 트로츠키에 대한 평가는 "당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오만하고 독단적인 면이 강하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부분을 바로잡아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각 인물에 대한 평가를 보면 후계구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아서 트로츠키가 밀려났다는 대중의 오해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레닌의 유언장이 트로츠키를 격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임을 인정하고 있고, 다른 당원들에게는 그의 단점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견제하면서 도와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후계자로 거론되는 인물 다섯 명을 평가하면서 '최고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평을 받지 않은 인물이 딱 하나 있다면 현실적으로 레닌이 그 인물을 후계자로 지지한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레닌은 트로츠키를 후계자로 지목하되 트로츠키의 거만함을 경계하며 나머지 인물들이 그를 보좌하고 때에 따라선 비판, 견제해 주는 집단지도체제를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레닌의 진짜 실수는 가장 분명해야 할 사항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살아있을 때 위험인물로 찍은 스탈린을 최고권력에서 물러나게 하지 않은 것이다.
스탈린 동지가 서기장으로서 무제한의 집중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 권한을 주의깊게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면 트로츠키 동지는 (중략) 개인적으로 현재 가장 중앙위원회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과도한 자만심을 보였고 문제를 순수하게 관리하는 측면에 몰두하는 경향[32]이 있다.
레닌의 인민위원회에 보내는 유언장 중 1922년 12월 24일 작성된 부분.[33]

결국 정치국원들은 레닌의 유언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첫째로는 레닌이 자신들을 디스했다는 것을 대중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둘째로는 공개되면 스탈린이 사임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트로츠키에게 서기장 자리가 돌아갈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모두가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래서 레닌의 유언을 비공개로 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가 되어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트로츠키는 정치국원이었지만 여기에 대해 침묵했는데, 결국 이것은 훗날 그에게 있어서 치명타가 되었다.

사실 정치국원들의 결정을 트로츠키의 언변으로 뒤집을 힘이 없던 건 아니지만, 트로츠키는 아직도 자신이 목숨을 건 권력투쟁의 장에 있다는 감을 잡지 못했거나, 스탈린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매우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쫓겨난 후에 쓴 스탈린의 전기에서도 잘 나타난다.[34] 당시의 트로츠키의 행동들은 스탈린 정도는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쫓아낼 수 있으며, 스탈린이 뭘 해봤자 자신을 능가할 수 있겠냐는 오만함이 철철 넘쳐난다. 만약 볼셰비키에 가담한지 얼마 안되는 자신이 지도자가 되려고 마음먹었으면, 그는 자기 세력을 불렸어야 했지만, 그는 지나치게 영웅주의적인데다가 오만해서 주위에 사람을 모으지 못했으며,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눌 수 있는 정적을 얕잡아봤기 때문에 군권을 쥐고 있었음에도 스탈린의 정치공세에 무력하게 당했다.

또 레닌이 사망했을 때 트로츠키는 지방 순방 중이었는데,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축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레닌의 장례식 일자를 일부러 잘못 알려주어 트로츠키의 불참을 유도한 후 나중에 이것을 가지고 반레닌주의자로 몰았다. 이미 그 전부터 모든 군인, 관료, 정치인들이 스탈린의 편으로 접수된 이후여서 대세에는 큰 영향이 없긴 했지만, 트로츠키의 불참은 대중에게 트로츠키와 레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걸핏하면 회의에 불참하던 트로츠키가 모스크바 근교에 오리 사냥을 나갔다가 앓아누웠다. 몸져누운 트로츠키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반박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이는 큰 악영향으로 작용했다.

1924년 5월의 13차 당대회도 트로츠키를 해당분자, 분파주의자, 프티부르주아적 편향주의자로 비난했고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는 트로츠키를 비레닌주의자로 몰아갔다. 1925년 1월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임박해서는, 트로츠키가 정치적으로 승리할 가능성은 없었다. 레닌의 사망 후에도 트로츠키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겸 국방장관(육해군 인민위원)을 맡고 있었는데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자신에 대한 일방적인 조리돌림이 될 것을 직감한 트로츠키는 국방 인민위원회 의장에서 사임했고, 후임으로 미하일 프룬제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주도한 정치국 회의에서는 트로츠키에 대한 영구 제명 요구가 높았으나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옹호한 덕에 트로츠키는 정치국에 잔류할 수 있었다.[35] 어쟀거나 최종적으로 스탈린은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나중에 트로츠키는 "우리는 혁명이나 전쟁을 예측할 수 있지만, 오리 사냥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 회상하면서 자신의 몰락이 뜻밖의 것인 양 묘사했지만 1923년부터 트로츠키의 정치적 수세는 명백했다.

트로츠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독일 공산당 등에서는 트로츠키를 모셔가려고도 했는데, 당시 독일 공산당에서는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 혁명가들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고, 그 중에서도 화려한 문필을 자랑하는 트로츠키의 명성은 대단해서(다른 정치적 행동들의 영향력이 제한적인 데 비해, 논설은 널리 퍼지기가 쉬우니까) 독일 공산당의 가두행진에 트로츠키의 초상화가 자주 등장할 정도였다. 그러니 소련에서 트로츠키가 필요없다면 독일 혁명에 보탬이 되도록 보내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활한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외국에 가서 혁명을 성공시킨 뒤 자신의 연속혁명론을 입증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이런저런 우스운 핑계로 트로츠키를 묶어 놓았다. 트로츠키가 회의석상에서 독일 혁명을 돕기 위해 기꺼이 가겠다고 발언하자 당시 스탈린과 결탁한 상태였던 지노비예프가 벌떡 일어나서 현재의 소련에는 트로츠키 동지의 탁월한 재능이 반드시 필요하니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외치고, 그 뒤를 따라 명성이나 활약상 면에서 트로츠키는 커녕 지노비예프와도 비교가 안 되는 스탈린파의 쪼렙 정치국원들이 줄줄이 따라 일어나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아우성쳐댔다고 한다. 그렇게 어중이 떠중이가 죄다 나대니 자기도 거기 끼어 웃음거리가 되는 것 같아서 트로츠키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고. 당시 스탈린으로서는 외국 공산당의 지원 요청을 공식적으로 거절하기는 부담이 커서 이런 개드립을 쳤던 것.

물론 외국인인 트로츠키가 독일 공산당의 활동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는 알 수 없고, 트로츠키가 있었다고 해서 독일 공산당이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을지는 현재로써든 당시로써든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나 당시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공산당의 세력이 커져가면서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 가능성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만에 하나, 트로츠키가 독일 혁명에서도 지도적 역할을 해낸다면 트로츠키는 두 나라의 혁명을 성공시킨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버리고 스탈린으로서는 무슨 짓을 하건 트로츠키를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이었다.

다른 견해로는, 스탈린은 원래부터 타국의 혁명에 무관심했고, "일국사회주의론"도 결국은 서유럽과 담쌓고 지내자는 건데, 트로츠키를 독일로 보낸다는 것은 독일의 정치에 소련이 간섭한다는 의심을 받을 우려가 있고 이는 서유럽 각국의 어그로를 끌 수 있기 때문에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서유럽의 적화보다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스탈린의 성향상, 트로츠키가 소련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서약했어도 아마 곱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둘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고립주의적인 성향을 견지했던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트로츠키를 독일에 보낸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익이 거의 없었고, 만약 트로츠키를 독일로 보냈다가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그곳에서도 트로츠키가 성공할 경우 감당해야 했던 정치적 후폭풍은 무지막지했던 것.[36]

이후 소련의 정치적 대립은 기존의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VS 트로츠키의 구도에서 스탈린 VS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기존에 트로츠키가 사용했던 '당내 민주주의'라는 떡밥을 들고 왔으며 스탈린과 '부자 되시오' 발언으로 큰 충격을 불러 일으킨 부하린을 공격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사용한 문필 활동을 활용한 이 '통합반대파'라는 급조된 연합을 두들겨 부숴버렸다. 통합반대파는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를 비판하고 레닌의 유언까지 들먹이며 버텼으나 지노비예프는 13인 선언을 발표했다가 분파주의자로 몰려서 정치국에서 쫓겨났고 1926년 10월에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에게 정치적 전쟁의 휴전을 구걸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대파 수뇌의 무조건적인 항복과 이들이 당내에서 이견을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을 교환하자고 제의했고 통합반대파들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트로츠키주의자 막스 이스트만이 레닌의 유서 전문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하면서 합의는 파기되었다. 트로츠키는 15차 당 협의회에서 스탈린이 공산당의 무덤을 파는 인간이라고 공격했다가 카메네프와 함께 정치국에서 쫓겨났다. 1927년 9월 정치국-중앙통제위원회 연석회의에서 부하린이 트로츠키를 분파주의자로 지목하여 인신공격을 퍼부었고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당에 도전하고 있다고 규정지었다. 10월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중앙통제위원회 연석회의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레닌에게 불충하고 무례했던 분파주의자라고 비판했지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반레닌 분파주의자라고 주장했고 라자르 카가노비치는 트로츠키를 아예 반혁명주의자로 몰았다. 거기에 트로츠키를 싫어하던 지방 당서기들의 드잡이까지 이어지면서 결국 트로츠키는 지노비예프와 함께 당에서 제명당했다.

과거에는 그 전설적인 선동과 연설, 웅변의 힘으로 군중을 휘어잡을 힘이 있던 트로츠키였지만, 이제는 그가 가서 스탈린을 반대하는 연설을 좀 하려고 하면 스탈린의 패거리들이 몰려와 야유를 퍼붓고 폭력까지 행사하는 형편이었다.[37] 트로츠키는 궁지에 몰린 끝에 마침내 시베리아에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아예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트로츠키에 거부감을 가진 것은 어디까지나 지도층일 뿐이었고 소련 성립 과정에서 트로츠키의 민중에 대한 영향력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유배 과정에서도 '트로츠키가 유배된다더라' → '그거 헛소문이라더라' → '트로츠키가 진짜 유배된다더라' 하는 식의 소문을 반복적으로 퍼뜨리는 과정을 통해 트로츠키가 유배된다는 빅 뉴스의 충격을 줄이려는 꼼수를 썼을 정도.

4. 일국사회주의론 VS 연속혁명론

기대를 모았던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이 멀어진 1920년대 중반, 소련 지도층은 국가 운영방향을 놓고 두 패로 갈라졌다.

첫 번째로 스탈린 등이 제창한 '일국사회주의론'[38]이 있었다. 이는 서유럽의 혁명에 관계없이 소련의 생산력을 증대시킨다면,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부르주아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공산주의로 넘어갈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러므로 소련 공산당은 다른 나라의 혁명에 간섭할 것이 아니라 소련의 발전에 중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념보다는 빵을 원하는 러시아인 대부분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특히 제정 시절부터 내려오던 관료집단과 군 고급장교들의 성향에도 잘 맞았다. 이는 러시아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러시아 국수주의라고도 볼 수 있었다.

반면 트로츠키는 일국사회주의론과 대비되는 '영구혁명론' 혹은 '연속혁명론'을 주장했다.[39] 이는 러시아 홀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룰 수가 없으므로, 공산당의 정책은 서유럽의 혁명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유럽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관점은 공산주의의 국제주의적 성격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으로 트로츠키가 혼자 만들고 주장한 독특한 것은 아니다.

레닌의 사상에는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일국사회주의론과 국제주의적인 연속혁명론 두 가지 성격이 모두 있었는데,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그 중 각자 하나씩을 강조하면서 앞으로 소련이 나아갈 길을 두고 다툰 것이었다.

이 항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당시 소련이 처한 상황에서 일국사회주의론과 연속혁명론의 입장 차이를 간단히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혁명관이 다르기 때문에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국내-국제정책 모두에서 번번이 의견충돌을 빚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다수파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소련의 정치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에게 트로츠키를 체포해서 처형하자고 말했으나 이때의 스탈린은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가 결국 동지의 처형으로 이어졌음을 상기하며 "오늘 한 명의 동지의 목을 치면, 내일 다시 한 명을 쳐야 하고,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러면 몇 명의 동지가 남아있을 수 있을까?" 라고 말했다. 정작 저 말을 한 스탈린이 훗날 대숙청을 일으킨 주동자임을 생각하면, 저 발언이 얼마나 섬뜩하고 모순되기 그지없는 발언임을 알 수 있다.

이때만 해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처형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시점의 스탈린으로서는 트로츠키를 처형하는 것이 오히려 정치적 자충수에 가까웠다. 스탈린은 일단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실각시키고, 그 뒤 부하린과 연합하여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까지 실각시킨 후 마지막으로 부하린을 실각시키는 일종의 정치공학적 갈라치기로 최고 지도자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이들 5인이 모두 건재했던 트로이카(지노비예프 & 카메네프 & 스탈린) 상태에서 트로츠키를 체포하여 처치해 버린다면 트로이카 체제 역시 자연스럽게 해체될 것이고, 트로이카의 3인+부하린은 트로츠키를 쳐낸 시점에 각자 갈라서서 각각 소련 공산당의 주도권을 두고 경쟁을 시작할 터였다.

이 시점의 스탈린에게는 지노비예프나 카메네프 역시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적이었다. 소련의 유일한 권력자가 되는 스탈린의 빅 픽쳐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스탈린이 언제나 다수파에 속해 있을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하여 다수파의 결집을 유지시키고 스탈린의 권력을 강화시켜줄 '대상'으로서의 적인 트로츠키가 필요했다. 한편 이 시점에서 트로츠키를 처형했을 경우 감당해야 할 후폭풍 역시 상당했다. 트로츠키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것은 1923년 무렵부터지만 실제로 트로츠키가 당에서 제명당한 것은 1927년 말에 이르러서였고,[42] 이 시점에서 스탈린은 부하린과 손을 잡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까지 거의 실각시킨 상태였으며 한때 스탈린과 손을 잡고 트로츠키를 실각시켰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1926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스탈린에게 정치적 휴전을 구걸하거나, 한때 자신들이 몰아냈던 트로츠키와 다시 손을 잡고 스탈린에 맞서려 시도해야 하는 처지까지 몰렸다.

말하자면 지노비예프나 카메네프만 해도 한때 스탈린과 대등한 적수였지만, 최강의 적수인 트로츠키에 비하면 이 둘조차도 '일단 트로츠키를 꺾은 뒤 막간에 짬을 내서 격파할 수 있는' 잔챙이에 불과했다는 것(그토록 위협적이니 트로츠키 vs 나머지 구도가 성립되는 거다). 그리고 트로츠키를 당에서 제명한 후 일단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냈다가 소련 바깥으로 추방한 것이 29년이지만, 추방당한 상태에서도 소련 국내의 지지자들, 심지어 스탈린 세력의 핵심인 체카 요원들과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할 만큼 소련 내에서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강력했다. 심지어 스탈린이 소련의 절대권력자가 된 40년대 후반까지도 굴라크의 수용자 중에는 스스로를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지칭하는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이 살아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20년대 중반에 트로츠키를 처형했다면 엄청난 반작용과 후폭풍이 덮쳐왔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당시 소련군은 트로츠키의 주요한 지지기반 중 하나였다. 스탈린의 집권 과정에서 소련 국내의 트로츠키파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는 데 들어간 시간이 거의 10년이고, 실제 역사에서 트로츠키가 암살된 것은 이런 과정을 거친 이후 시점임을 생각하면 아직 트로츠키의 영향력이 상당한 상태에서 트로츠키를 일단 처형하고 보자던 지노비예프의 주장이 오히려 탁상공론에 가까웠다. 이런 트로츠키의 숙청에 의한 후폭풍을 감소시키기 위해 '트로츠키는 반혁명주의자'라는 선전활동도 함께 이루어졌지만... 이 역시 대숙청을 통한 이념적 세탁을 거친 30년대 중반 이후면 모를까 20년대 당시 기준으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선동이다. 불과 수년 전에 볼셰비키의 정권 획득 과정에서 트로츠키가 제정, 케렌스키 정권, 백군을 모두 앞장서서 때려잡는 것을 본 기억이 생생했을 시절인데...

스탈린은 처음에는 트로츠키를 질투하는 볼셰비키의 지도자인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와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고립시켰고, 이후 트로츠키가 실권을 잃어버리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버리고 부하린과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공격했다.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그리고 카메네프는 결국 1927년 당에서 추방되었고, 트로츠키 추종자들도 추방되었다. 이후 많은 트로츠키 추종자들은 자신의 과오를 자아비판하고 스탈린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겨우 복당되었다.[43]

그러나 트로츠키는 단순히 순진한 피해자는 아니었다. 당시 트로츠키는 인격적 문제로 당내 인망이 별로 없었고,[44][45] 레닌을 19세기 말부터 따라온 대부분의 볼셰비키당 중앙위원들은 트로츠키를 문자 그대로 "증오"하고 있었다.[46]

트로츠키가 권력으로부터 거의 밀려났을 때, 아직 트로츠키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던 붉은 군대의 추종자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스탈린 일당을 몰아내자고 제의했다.[47]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를 거부했는데, 말로는 "나는 폭력에 호소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트로츠키의 소심함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가 많다. 오만하고 영웅주의적이면서도 소심한 것은 트로츠키가 가진 모순적인 양면성이었다. 이것이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 자서전이나 여러 자료를 볼 때, 트로츠키에게 오만하고 영웅주의적인 성격과 소심한 성격이 공존했다는 관점에는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는데, 10월 혁명은 "자신이 반대한 체제에 대한 폭력"이었으나 이번 쿠데타는 "자신이 일으켜 세운 체제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게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함부로 쿠데타를 일으켜 전복시킬 수는 없었다는 얘기다.[48] 물론 어떤 이유로 쿠데타를 거부한 것인지는 트로츠키 본인만 알겠지만.

5. 몰락

5.1. 제2의 망명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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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결국 1929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소련에서 추방하였고, 튀르키예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소련의 눈치를 봐서 트로츠키를 받아주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소련에서 추방하면 트로츠키의 영향력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지만 트로츠키는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무기인 펜을 가지고 스탈린을 디스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비판하며 만드는 잡지인 <반대파 통신>은 비밀리에 소련에 배포되어 많은 공산당원들이 읽었으며, 심지어는 스탈린조차도 계속 이것을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동지들이 튀르키예로 와서 트로츠키를 만났고,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감소하지 않았다.[50] 이에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만나고 온 체카 요원 야코프 블룸킨[51]을 처형하는 것으로 트로츠키와 접촉할 만한 당원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이후 프랑스에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프랑스로 옮겨가려고 했으나 이것은 좌절되고 1935년 노르웨이로 망명지를 옮겼다. 이 당시에 배반당한 혁명을 집필하는데, 십여년 동안의 망명 생활과 그 이전 레닌 사후 권력투쟁에서 느낀 게 뭔가 있기는 했는지 이 책이 사실상 현대의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정립한 저작이 되었다.[52] 독일에 잠깐 체류한 적도 있었는데, 당시 독일의 총리였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좌우익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는 '군복을 입은 물음표'라는 평을 남겼다.

1937년 노르웨이 정부는 트로츠키를 추방했고, 트로츠키는 보다 안전한 미국으로 망명하고 싶어했으나, 미국은 이런 거물 공산주의자의 망명을 거부했으며, 할 수 없이 유일하게 망명을 받아주는 멕시코로 발길을 돌렸다. 이 망명은 멕시코의 유명 화가이자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가 주선해준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에 대립하는 국제 트로츠키주의자 연합인 제4인터내셔널을 창립한다. 이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황을 자처하는 스탈린의 심기를 매우 건드렸다. 이 제4인터내셔널의 포스터는 디에고 리베라가 그렸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디에고 리베라와 멕시코 혁명에 관한 견해 차이로 결별하고, 리베라가 마련해준 거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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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인터내셔널 로고

5.2. 대숙청

한편 트로츠키가 떠난 소련에서는 1930년대 중반부터 대숙청이 벌어졌다. 이는 사실 스탈린이 추진한 무리한 중공업화의 후유증이 엄청나자 스탈린이 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이 모든 것을 트로츠키파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우면서 벌어진 것이다. 스탈린은 모든 트로츠키의 좋은 정책, 특히 소비에트를 부농 중심의 농업국가에서 노동자 중심의 산업국가로 이행시키기 위한 중공업 정책을 흡수해서 아주 잔인한 그의 스타일로 밀어붙였고 그에 거슬리는 요소는 마구 쳐냈다.

직접적인 계기는 레닌그라드 당서기였던 세르게이 키로프가 암살당하면서 비롯되었다. 키로프는 당의 차세대 주자로 각광을 받고 있었는데, 석연찮은 정황에 의해 암살되었고[53] 스탈린은 이 암살의 배후에 "파시스트 및 트로츠키 추종자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광범위한 체포가 뒤따른 것이다. 이렇게 잡힌 "암살의 배후"들은 간단히 "트로츠키주의 테러분자"로 기소되었다. 실제로는 이것은 마구잡이 체포였으나, 단순한 지각이나 실수조차도 "트로츠키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혐의가 돌아갔다.

사보타지나 테러 모의 혐의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스탈린에 반대한 경력이 있거나 혹은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인물들이었다. 스탈린에 반대했던 경력이 있는 자는 물론, 한때 트로츠키파였으나 후에 자아비판을 하고 스탈린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맹세를 한 자들도 예외없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체포 후 심한 고문을 받고 거짓 자술서에 서명을 했고, 공개재판정에서 "저는 트로츠키의 명령을 받고 소련에 반역행위를 했습니다."라고 자백했다. 고위급은 거의 예외없이 사형 선고가 내려져서 그날로 처형되었고, 하급직들은 운이 좋으면 시베리아의 굴라크로 끌려가 강제노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1920년대 스탈린과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실각시켰던 지노비예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트로츠키파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고, 처형 직전에 "내 인생 최대의 실수는 트로츠키와 손을 잡지 않은 것이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만으로는 분이 안 풀렸는지, 러시아에 남아있던 트로츠키의 첫 번째 처 알렉산드라와 자식들마저도 모두 살해했다고 한다. 첫번째 처는 트로츠키와 이혼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수용소로 끌려가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두번째 처의 큰 아들 레프는 파리에서 암살, 둘째 아들 세르게이는 수용소에서 처형되었다. 물론 둘째 처의 첫 아들은 파리에서 열심히 아버지의 활동을 지원한 것 때문에 암살당했지만 둘째 아들은 러시아 모스크바 공대에서 공학 교수를 하며 정치적으로는 인연이 없었는데도 공장 노동자를 독살하려 했다는 신빙성 없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트로츠키의 여동생 올가 카메네바[54]와 카메네바의 아들 두 명도 1941년 9월 11일에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는 공산국가에서 악당의 대명사가 되었다. 트로츠키는 193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국가전복 기도혐의와 나치 독일스파이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 측에서는 존 듀이를 위원장으로 한 사문위원회를 위촉해 독립적인 조사를 부탁했고, 1937년 4월 트로츠키의 망명지인 멕시코에서 열린 재심 재판에서 이 위원회는 조사 끝에 모스크바 재판의 트로츠키에 관한 혐의는 전혀 근거가 없으며 트로츠키는 무죄라고 결론 내렸다. 듀이는 유명한 교육철학자로서 미국의 자유지상 민주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그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민간위원회일 뿐이었다.[55]

5.3. 비극적인 암살과 죽음

망명지에서 여러 번 트로츠키에 대한 암살이나 테러 음모가 있었으나, 트로츠키는 여러번 죽을 위기를 넘기며 살아남았다.

마지막에는 멕시코에서 철통같이 방비한 자택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모면했지만, 결국 1940년 8월 20일, 스탈린이 보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Jaime Ramón Mercader del Río/1913~1978)가 찾아왔다. 메르카데르는 스페인인으로 NKVD에 포섭되어 트로츠키 암살의 특명을 받았다. 그는 트로츠키의 여비서이자 신봉자인 실비아 엥겔로프(Sylvia Ageloff/1910~1995)에게 캐나다 출신인 프랭크 잭슨이란 가명으로 위장해서 먼저 접근해 1년 넘게 그녀와 사귀었으며 결국 애인이 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렇게 트로츠키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피습일 오후 5시, 그를 자객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트로츠키는 그날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메르카데르는 준비해 둔 등산용 피켈[56]로 뒤에서 머리를 찍었다. 트로츠키는 비명을 질렀고 다른 방에 있던 비서들이 메르카데르를 체포했다. 트로츠키는 머리를 가격당한 직후 얼마간 의식이 있었으나 곧 혼수상태에 빠졌고,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사경을 헤메다 피격 25시간 후, 이튿날인 8월 21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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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가 공격받은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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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를 암살한 피켈

메르카데르가 피켈로 트로츠키의 머리에 1차로 상처를 입히고 다시 휘두르려는 순간 트로츠키는 안간힘을 다해 메르카데르의 손과 팔을 잡고 그 손을 물어 피켈을 놓치게 하려고 했다. 그러고는 거실로 나가 도움을 청했다. 수 명의 경호원이 달려와 메르카데르를 짓누르고 사정없이 때려눕히면서 트로츠키에게 죽여도 되냐며 지시를 청하자 트로츠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대답했다. "죽여서는 안된다. 자백을... 시켜야... 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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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습 이후 쓰러져 누워 있는 트로츠키

트로츠키의 사망 이후 메르카데르는 재판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I laid my raincoat on the table in such a way as to be able to remove the ice axe which was in the pocket. I decided not to miss the wonderful opportunity that presented itself. The moment Trotsky began reading the article, he gave me my chance; I took out the ice axe from the raincoat, gripped it in my hand and, with my eyes closed, dealt him a terrible blow on the head.

나는 주머니에 있던 얼음 도끼(피켈)를 꺼낼 수 있도록 비옷을 탁자 위에 놓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완벽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트로츠키가 기사를 읽기 시작한 순간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비옷에서 얼음 도끼를 꺼내 손에 쥐고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머리를 심하게 때렸다.
(유혈 주의) 영화 <The Assassination Of Trotsky>에서 재현한 암살 장면[57]

스탈린은 그의 죽음을 두고 '난 몰라~' 하며 부정하고 모른 체했다. 그러나 메르카데르의 어머니에게 "훌륭한 어머니"라고 직접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이 암살을 지시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메르카데르는 잡혀서 심문을 받았는데, 자신이 트로츠키와 싸우다가 우발적으로 그를 죽였다고만 말할 뿐, 죽을 때까지 스탈린이나 소련과 연관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20년형을 언도받았기에 스탈린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지 못 하고 스탈린이 죽고 나서인 1960년에 석방되면서 받게 되었다. 라몬은 석방된 다음 소련으로 건너갔는데, 스탈린을 디스했던 니키타 흐루쇼프조차 자기 입장에서 트로츠키는 "성가신 작자"로 생각했는지 메르카데르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내리고 거액의 포상금을 내렸다. 왜냐면 트로츠키는 소련이 노동자 국가라는 것을, 국가 정체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스탈린과 관계없이 소련의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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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데르의 늘그막 사진

결국 메르카데르는 훈장도 받고 연금도 받으면서 늘그막을 평온하게 살다가 1978년에 65세로 사망했다. 비서 실비아도 1995년 85세로 사망할 때까지 천수를 누렸지만 존경하던 트로츠키를 죽게 하는데 관여한 점으로 평생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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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이후 부검을 위해 꺼내진 트로츠키의 뇌[58]
한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트로츠키의 시신에서 뇌를 추출했다.

6. 유언

1940년 2월 27일에 죽음을 직감했는지 다음과 같은 유언장을 남겼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 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59]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1940년 2월 27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레프 트로츠키


[1] 러시아 제국령 당시 중심 도시가 '옐리사베트그라드(Елисаветград)였다. 소련 시절 지노비옙스크(Зиновьевск, 1924년 ~ 1934년), 키로보(Кирово, 1934년 ~ 1939년), 키로보흐라드(Кіровоград, 1939년 ~ 2016년)를 거쳐 2016년 유로마이단 이후 탈공산화 작업을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정부에 의해 이곳 출신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작가 마르코 크로피우니츠키(Марко Кропивницький, 1840년 5월 7일 ~ 1910년 4월 21일)의 이름을 딴 '크로피우니츠키(Кропивницький)'로 이름이 바뀌었다.[2] 우크라이나어로 야니우카(Янівка).[3] 유명한 러시아 혁명가치고 시베리아 유형 한 번 안 간 사람이 없는데, 또 탈출을 시도해서 실패한 사람도 거의 없다. 애시당초 당시 시베리아 유형은 그냥 시베리아 중소도시에서 경찰의 보호관찰 받는 거였고 일부는 연금도 나왔다.[4] 실제로는 되지 못했다.[5] 악셀로트, 자술리치 등은 트로츠키를 좋아했다.[6] 트로츠키를 추가하려다 실패한 레닌이 훗날 이스크라 편집진에서 악셀로트, 자술리치, 포트레소프를 제외하자고 제안했다. 악셀로트, 자술리치 등과 친밀했던 트로츠키는 이 제안을 듣고 경악해 레닌을 비판하고 레닌이 편집진에 남기고자 했던 마르토프조차 레닌이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한다. 그렇게 사이가 벌어지더니 나중에는 당의 구성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생기고 점점 갈등이 과격해지며 결국 마르토프와 레닌까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트로츠키는 악셀로트, 자술리치 등과 친하고 플레하노프와는 사이가 끔찍이 안 좋았는데, 레닌이 자기와 친밀한 동료들을 내치려고 하면서 사이가 안 좋은 플레하노프와 연합하자 당연히 마르토프의 편에 섰다. 레닌은 트로츠키를 영입하려고 했을 정도로 그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트로츠키를 설득하고 회유했지만 트로츠키는 레닌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로부터 10여년간 트로츠키와 레닌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트로츠키는 이에 대해 후일 크게 후회하고 스스로 멍청했다고 자책하였다.[7] 러시아에 남아 있던 첫 번째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을 하지 않고 동거를 시작했으니 법적으로는 아내가 아니다.[8] 두번의 유형과 탈출 과정에서 트로츠키 역시 적지 않은 개인적인 일화들을 남겼는데, 그의 영원한 반대항인 스탈린이 남긴 일화들과 비교할 때 꽤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스탈린이 유형지에서 남겼다는 일화들은 '죄수들을 선동하여 싸움을 붙였다'거나 '주변 여인과 연애를 했다'와 같이 마초적이고 거친 것이 많은데 비해, 트로츠키의 일화는 '소규모 공동체들의 모임으로 구성된 탈 중앙집권적 사회를 예찬하는 아나키즘 성향의 다른 정치범에게 "그럼 그 아나키즘 세상에서 철도는 누가 운영하오?" 라고 받아쳐서 한판 이겼다'느니, '탈출 과정에서 자신을 안내하던 사회혁명당 지지 성향의 소년과 사회민주노동당 기관지의 기사 내용을 가지고 언쟁하다 화난 소년이 더이상 트로츠키의 길을 안내하지 않겠다고 하자, "당 기관지의 기사 내용에 나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라고 반론하여 계속 길을 안내하게 만들었다는 등 키워스러운 것들이 많다. 인물의 성격이나 성향 차이가 이런 면에서도 드러나는 모양이다.[9] 다만 자서전이 흔히 그렇듯이 왜곡되거나 문학적으로 다듬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스페인 경찰을 조사해서 교차검증한 내용은 아니다.[10] 사실 체포 이후 트로츠키가 스페인 경찰을 대한 태도는 나쁘게 말하면 '작정하고 골탕을 먹이려 든' 것이고, 좋게 봐주더라도 '일부러 놀려먹은' 것에 가까웠다. 공산주의자로써 유럽 각지의 반정부활동과 연관을 맺고 있던 그가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는 말은 당대인이든 현대인이든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정말 오해로 인한 체포였다고 하더라도 정치적 이유로 체포된 것이라고 넘겨짚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즉 경찰서장이 "아, 이제 왜 체포되신건지 아셨겠군요?" 했다는 것은 "당신, 뻔히 알면서 시치미 뚝 떼고 우리를 놀려먹었군요?" 라고 비아냥거리는 의미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보인다. 그리고 이후 조서 작성 과정에서도 트로츠키는 심하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계속 보여주었지만 스페인 경찰은 그에게 공손해 보일 정도로 정중한 태도를 계속 유지한 모습을 보면, 당시 스페인 사회의 계급관념, 즉 '신사 계층에 속한 사람에게는 존경심을 보여야 한다'는 관념이 얼마나 강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이하 문단에서 언급된 '당시 사회에서 전형적인 범죄자로 여겨지던 하층계급 파락호' 출신 잡범이 경찰에게 이처럼 도발적인 태도를 취했다면? 당시 사회의 분위기나 인식상 가혹하고 폭력적인 보복을 당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11] 즉 근대적 계급질서에 익숙하던 20세기 초 스페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범죄자상은 '깡패짓이나 도둑질, 강도질 등을 일삼는 천박하고 무지한 하층계급 출신 파락호'였고, 트로츠키는 겉보기에도 교양 있는 신사계급에 속하는 사람이지 그런 파락호 범죄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하층민 범죄자상'은 무수한 근대 리얼리즘 문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유명작 중에서라면 특히 레 미제라블이나 올리버 트위스트 등에서 근대인들이 '범죄를 직업으로 삼는 하층계급 부랑자'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는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경찰이 굳이 '사기꾼이나 위폐범이 아니다'라고 해명한 것은 당시 사회에서 사기나 위조와 같은 지능형 범죄자는 '겉보기에는 멀쩡한 신사처럼 위장한 범죄자'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쪽 전형 역시 많은 근대문학(특히 이 경우는 리얼리즘계 작품이 아니더라도 종종 등장하는 인물상이다)에서 다뤄지는데, 현대 한국인이 접하기 쉬운 작품이라면 아가씨(영화)의 등장인물 고판돌 후지와라 백작을 생각하면 딱 맞다. 즉 당시 트로츠키를 호송하던 경찰은 트로츠키가 전형적인 진짜 범죄자(금전을 목적으로 한 잡범)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꽤나 세심하게 신경을 쓴 것이다. 또한 이 일화를 통해 19세기 말~20세기 초, 근대 특유의 계급정서, 특히 범죄는 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하층계급의 전유물이고, 신사 계급에 속하는 이들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편견이 당대에 팽배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12] 전근대 사회에서는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정치범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다른 형사범에 비해 훨씬 우호적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일단 법치주의나 민주주의 원칙이 확립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당시의 집권 세력에 반대하는 것 자체가 범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기에 정치범 중 상당수는 단지 정권에 반대했을 뿐 실제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은 경우가 많았고, 정치범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 활동을 해야 하니 당연히 정치범의 대다수는 당시 사회에서 특권층으로서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신사 계급이나 지식인 계층 출신이었으며, 이후 정치적 국면 변화에 따라 어제의 정치범이 내일의 권력자가 되는 일도 가끔은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독립운동가들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등도 일제와 독재정권 치하에서는 정치범이었고, 트로츠키 자신도 불과 수년 후 소련의 2인자가 되었다. (물론 스페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머나먼 다른 나라 이야기인데다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실각했지만.)[13] 이러한 '서유럽의 황금기'에 대한 평가로 버트런드 러셀E.H 카 사이의 짧은 논쟁이 유명하다. 20세기 초반의 사상적 개방성과 관용에 비해 훨씬 경직된 분위기로 변모한 냉전기의 서유럽에 대해 러셀이 "20세기 초반에 비해 오늘날의 세계가 훨씬 부자유한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라고 평가하자 이에 대해 카가 "러셀처럼 똑똑한 사람이 왜 저런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며 "서유럽인들의 자유가 세계의 다른 지역 사람들의 자유보다 더 중시될 이유가 있느냐?"(=서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은 20세기 초반보다 20세기 중후반이 더 자유롭지 않으냐, 즉 러셀의 주장은 너무 서유럽 중심적이지 않으냐)고 반론한 것. 이에 러셀은 카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반론하지 않았다.[14] Red guard, 중국 문화대혁명 때 중국 사회를 헬게이트로 몰아넣었던 홍위병은 여기서 파생된 말이다.[15] 이때 공세를 억지로 떠맡게 된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해임되었는데, 러시아군에서 거의 유일하게 1차대전에서 눈에 띤 전공을 세운 지휘관이었다.[16] 이 시기 트로츠키는 '동반자'(직역하면 '길동무'(...). 중국어로는 동로인同路人인데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어로 파푸트치크(Попутчик)라는 용어를 널리 퍼뜨린다. 이는 공산당의 전신인 사회민주노동당을 지지했던 지식인들과 예술인, 특히 작가들 중 혁명정부에 동조하지만 딱히 공산주의자라고 자신을 표명하지는 않는 이들을 일컫는 말인데, 이들을 적극적으로 볼셰비키에 영입한게 트로츠키이다. 즉 본래부터 본인이 볼셰비키가 아니었기에, 본래부터 좌파연합을 주장하는 레프 카메네프보다도 더 나아가 비볼셰비키 좌파를 끌어들이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한국문학사에서도 카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에 동질감을 느낀 이들을 동반자 문학가라고 한다.[17]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의 활동이 금지된 건 러시아 내전 때 이야기다.[18] 트로츠키는 철도가 승리의 관건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철도 장악과 유지와 수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붉은 군대는 처음에는 여러 문제점 때문에 고전했지만 철도를 확고히 장악한 기반위에서 시스템과 전력이 정비되자 병력과 물자를 집중시켜 단 1년만(1919년)에 전세를 역전시키고 1920년이 되면 대부분의 반혁명군을 토벌할 수 있었다.[19] 소련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2009년 안톤 데니킨이 안장된 돈스코이 묘지를 참배하던 도중 "데니킨은 우리들(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오직 러시아의 권리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20] 이때 농민들이 트로츠키를 찾아왔는데 트로츠키는 오히려 여자들이 자기 자식을 먹을 때가 비로소 기근이니 그때가 되면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 정말 현실이 되고 만다.[21] 진압 당시에는 이러한 봉기자들이 트로츠키의 잠재적 지지자라고 볼 근거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과의 정권투쟁에서 열세에 빠지게 되었을 때 트로츠키와 연대한 세력 중 상당수가 이 때 트로츠키가 미처 다 못 밟은 봉기자들이긴 했다. 레닌과 레닌의 후계자 후보군을 통틀어 '그나마 그 중에' 좌파공산주의나 다른 평의회 민주주의 등의 지지자와 성향이 가까운게 트로츠키였기 때문이다.[22] 집단농장화. 기존 농민들에게 분배했던 모든 농토를 몰수해서 집단농장으로 재편해서 일거에 농촌에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청산하고 단숨에 사회주의 경제를 이행하자는 주장.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조차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고 반봉건 상태에 머물렀던 중국과 소련에서 이런 급진적인 집단농장화는 엄청난 농민반란과 대기근을 불러왔다. 그리고 중국과 소련 공산당 정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총칼로 농민을 더욱더 가혹하게 수탈했고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 무자비한 독재체제가 확립되었다.[23] "똘똘이 스머프"가 트로츠키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4] 트로츠키의 동지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 그나마 높은 사람이라면 공산당 내에서 가장 말빨이 좋은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카를 라데크나 안드레이 부브노프, 중국 대사였던 아돌프 요페(흥미롭게도 셋 다 중국국공내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다), 프랑스 대사를 지냈던 크리스티안 라콥스키나 소비에트 러시아의 2대 국방장관을 지냈던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 1925년에 의문스럽게 급사한 혁명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에프라임 스클랸스키,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게오르기 퍄타코프, 급진적 중공업화를 지지한 경제학자의 대부격인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 등인데, 나름대로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긴 했지만 트로츠키의 경쟁자들에 대적할 만한 인물들은 아니었다.[25] 황당한 것은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는 체카를 필두로 정적 제거가 횡행했던 국가로 트로츠키의 오른팔 스클랸스키조차 의문사를 당할 정도였는데, 트로츠키는 '자기가 말빨로 이기면 되기에' 다른 정적이나 다른 정파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려는 시도를 상대적으로 적게 하였다. 이후 크론시타트 수병반란의 생존자나 다른 좌파공산주의 계열 인사들이 트로츠키 밑으로 모인 것은 순전히 이 때문이다.[26] 당시 흔히 사용되던 표현으로는 '군사적 보나파르트주의자'.[27] 사실 노동자 반대파가 다른 사람을 지지하려 해도 의미가 없었다.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레닌 생전에 노동자 반대파를 탄압한 장본인들이었으며, 부하린은 본디 좌파공산주의 계열로 노동조합의 자주권이나 지도권 등을 인정하지 않는 인사였다. 결국 최후에 남는 것은 트로츠키 외에는 없었다.[28] 트로츠키가 완전히 실각할 때까지 이 공조노선이 유지되기는 했다.[29] 일단 부하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아닌 기계론자였고, 당시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학자로 손꼽히던 인물이어서 그랬는지 경제 분야에서도 시장경제적 요소를 받아들여도 상관없다는 독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NEP 추진 과정에서 농민들에게 했던 '부자 되시오' 발언 등이 좋은 예. NEP를 먼저 추진하기 시작한 레닌이 이걸 가지고 부하린을 까는 건 좀 뻔뻔하다 싶을 수도 있겠지만, NEP를 위기 극복을 위한 임시방편 정도로 여기던 레닌에 비해 부하린이 좀 더 과감하게 NEP를 지지한 것은 사실이다.[30] 위에도 여러번 설명된 것처럼 트로츠키의 가장 큰 정치적 약점은 레닌주의 정당이 된 소련 공산당 내에서 명확한 레닌주의자(=레닌파)가 아니라고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레닌 자신이 트로츠키를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로 지명해 버리면 레닌의 정통 후계자로 레닌파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게 되니 이 약점이 해결되어 버리고, 그만큼 트로츠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강해지며, 이것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결과로 돌아올 수도 있었던 것.[31] 다만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잔인하고 난폭한 본성을 드러낸 것은 레닌이 병상에 드러누운 이후 시기였다.(나데즈다 크룹스카야에 대해 무례하고 거친 태도를 보인 것을 직접 질책하지 못하고 사과하라는 편지를 보낸 것 자체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즉 레닌이 더 이상 건재하지 못한 상황이 되자 더이상 자신의 본성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위장을 그만둔 것일 가능성도 높으므로, 레닌이 건재했다면 스탈린이 계속 본성을 숨겼을 가능성도 높다.[32] '문제를 순수하게 관리한다'는 표현은 당시 볼셰비키 당 내부에서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원인에서부터 차근차근 해결하지 않고 문제 자체만 기술적으로 해결해 버리려고 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었다. 극단적인 예를 든다면 테러리즘을 은유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개념을 트로츠키의 경우에 비추어 본다면 트로츠키는 정책 추진 과정에서 반대파가 나올 경우 차근차근 대화와 토론을 거쳐 의견차를 줄이고 공감대와 합의점을 찾아서 반대파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문필과 언변으로 상대를 압도해서 닥치게 만들거나(키보드 배틀이건 아가리 배틀이건 볼셰비키 최강의 논객이니까) 군대를 끌고 가서 조져버림으로써(붉은 군대의 창설자니까) 반대파가 말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형태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는 비판이다. 이런 특성은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당 내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었고, 자기 자신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일 똑똑한 내가 당연히 옳은데 왜 멍청한 쟤들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는 거임?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나름대로 낭비를 피하고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기 위해 한 짓이라는 것이 후세의 평가.[33] 일주일 정도 뒤에 작성한 서한에서는 스탈린을 훨씬 가혹하게 원색적으로 비난했고, 조금 뒤에 작성한 서한에서는 스탈린을 제르진스키와 함께 소수민족 문제 담당으로 남겨둘 것을 요구했다.[34] 이 전기에서는 심지어 스탈린을 매독 환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트로츠키의 개인적 원한에 의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스탈린의 실체를 보기보다는 스탈린의 이런저런 약점만을 보면서 무시하고 있다.[35] 스테판 코트킨 교수는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살려두어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려고 했다고 추정한다.[36] 독일로 내보내면서 두 번 다시 소련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서약 같은 걸 받았다고 하더라도 스탈린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 즉 트로츠키가 독일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 독일을 공산화하여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런 서약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독일 소비에트 공화국 역시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의 일부임을 천명하면 그걸 거부할 명분은 전혀 없고, 그 경우 독일과 러시아 양대 소비에트 공화국 건설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 낸 트로츠키가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걸 부정할 명분도 전혀 없다시피 하니까.[37] 참고로 이 방법을 완벽하게 벤치마킹해서 간 사람이 김일성이었다. 1956년 8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반대파들이 자신의 개인숭배를 비판하자 즉시 자기를 지지하는 중앙위원들을 풀어서 야유하고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구타까지 해가면서 제대로 된 발언도 못하게 만든 다음에 반동이라고 제명해버리는 식의 조리돌림이 김일성의 대응이었고, 나중에 이것이 쿠데타였다고 역사왜곡까지 해서 뒤집어씌워버리는 부관참시까지 자행한다.[38] 영어로는 Socialism in one country라고 하며 일부에서 "국가사회주의"로 오역을 하는데, 국가사회주의는 나치의 사상을 말한다.[39] 영구혁명이란 permanent revolution의 번역인데, permanent는 영구적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무엇인가에 연속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지칭하기도 한다.[40] 소련이라는 국가의 명칭 자체가 지역이나 민족이 아닌 이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고, 이 점 때문에 당시 소련의 지지자들은 소련이 영토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국가의 연합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국민국가는 그 나라 국민에게만 조국이지만 소련은 전 세계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국제혁명을 부인한다는 것은 당시 소련의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런 명명은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거듭나서 이 연합체에 합류하도록 이끌어 나가는 것을 국가의 기본적인 방침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2차대전 이후 위성국 형성을 통해 보인 소련의 확장욕조차 원론적인 면에서는 건국 초기의 확장욕에 비하면 많이 온건해진 것이다.[41] 이는 소설 동물농장에서도 원래 스노볼의 아이디어였던 풍차를 나폴레옹이 건축하자고 나서는 것으로 패러디된다.[42] 바로 중국혁명의 실패라는 큰 명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트로츠키파의 주요인사인 요페, 라데크, 부브노프가 국민당의 1차 북벌에 매우 깊숙히 개입했다.[43] 물론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실각한 뒤에는 부하린도 스탈린에 의해 실각하고, 당에서 추방된 데다가, 처형당하기까지 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처형이 1936년, 부하린의 처형이 1938년인 것을 생각해 보면, 트로츠키는 이 세명보다 더 오래 산데다가, 죽음의 형태도 처형이 아니라 암살이었다. 결국, 스탈린과 협력해서 트로츠키를 몰아낸 세 사람이 오히려 트로츠키보다 일찍 최후를 맞은 셈.[44] 붉은 군대 내에는 추종자들이 좀 있었지만, 그들은 사실 전문적인 군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이었다. 이들은 트로츠키 자신처럼 혁명 후 군문에 진입하여 군인들을 감독하고 사상적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맡으면서 군내에서 승진해 온 인사들이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군부 내 트로츠키 추종자인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는 혁명 이전에는 군 경력이 전혀 없었다. 90년대 들어 대숙청이 (40대 전문지휘관들의 약진을 불러와) 붉은 군대에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설이 나왔는데, 바로 이렇게 대숙청에서 날아간 인간들이 상당수 트로츠키파로 분류되었던 당료형 군인이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대숙청으로 유능한 군인도 많이 날아갔지만, 군에 동맥경화를 일으키던 똥별들도 상당수 날아갔다. 안토노프옵세옌코는 후에 스탈린에 충성을 맹세하고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외교관으로 파견되었으나, 대숙청 기간 후 체포, 처형되었다.[45] 다만, 안토노프옵세옌코는 트로츠키의 추종자였음에도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바로 복권이 될 정도였고 10월 혁명의 그 순간에 겨울궁전을 습격한 지휘관이며 러시아 내전 때 적군 총참모장으로 재임한 것은 물론 탐보프의 녹군 반란을 진입한 당사자였다. 이후의 스페인 내전에서 인민전선 관련 소련의 공작원 역할도 했었던 사람. 안토노프옵세옌코를 비롯한 '트로츠키파'를 숙청하고 스탈린이 군에 앉힌 건 군내 대숙청을 주도하고 스스로도 파멸한 표트르 스미르노프미하일 프리놉스키, 크림 반도에서 대참사를 일으킨 레프 메흘리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그리고리 쿨리크 등이었고 이들은 트로츠키가 기용한 정치군인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마찬가지의 똥별들이었다.[46] 이들 중앙위원들 중 많은 이가 대숙청으로 사망했지만 99%가 처형되었다거나 하는 정보는 과장이다. 보로실로프, 미코얀, 카가노비치 등 스탈린의 측근들은 거의 살아남았고 칼리닌, 콜론타이, 로잘리야 제믈랴치카 등 무파벌 인물들도 많이 생존했다.[47] 이들은 대숙청 기간 중 모조리 처형된다. 문제는 누가 트로츠키의 지지자인지 아닌지 제대로 구별할 수 없어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전부 죽여버린 것이 독소전쟁 초반의 대참사로 이어진 것이다.[48] 잘못하여 수틀리기라도 한다면 트로츠키파 vs 스탈린파의 2차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순조롭게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대외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쿠데타는 좋게 보지 않기 때문에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인기가 다소 부정적이게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혁명의 수출을 주장한 트로츠키주의 입장에서는 불리하게 작용할 근거도 있었다.[49] 사진은 권위있는 트로츠키 연구서로 꼽히는 아이작 도이처의 '예언자' 3부작 중 마지막인 '추방된 예언자 트로츠키'의 영문판 표지이다. 국내에서는 시대의 창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출판됐다.[50] 추방 이후에도 소련 내에 트로츠키의 영향력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는 점은, 트로츠키의 암살이 1940년에 일어났다는 점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이 시기는 스탈린과 손잡고 트로츠키를 몰아낸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까지 모두 처형되고, 소련 내에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규모의 대규모 숙청이 마무리된 이후인데, 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그런 대규모 숙청으로 국내를 정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트로츠키를 제거하기 껄끄러웠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다.[51]사회혁명당원이었다.[52] 위쪽 트로츠키의 잔악한 독재자나 다름없는 행적을 생각하며 배반당한 혁명을 보면 좌파공산주의도 아니고 평의회 직접민주주의에 기반한 노동계급의 다당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책 내용에 골머리를 싸매게 된다. 진짜 좌파공산주의자들이 보면 코웃음 칠 내용이지만, 트로츠키 이후 노동계급에 정치적 실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 인사는 아이스크림 좋아하던 아나스타스 미코얀(미그사를 창립한 아르툠 미코얀의 형으로, 흐루쇼프의 오른팔이었다)과 먼 훗날의 미하일 고르바초프밖에 없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느낀게 확실히 많았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53] 흐루쇼프는 이 암살이 차세대 주자를 제거하기 위한 스탈린의 음모였다고 주장하였고 한때 키로프는 스탈린이 죽였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현재는 정황상 허술한 이론으로 수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대숙청에서 스탈린의 주도적인 역할에 대해서 배제하였던 아치 게티 류의 수정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통설 자체가 기존의 스탈린 배후설은 이론의 여지가 매우 많다고 본다. 다만 스탈린이 키로프 암살에 관한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다거나, 키로프 암살을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2차 수정주의 연구도 나오고 있긴 하다.[54]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스탈린의 정적 레프 카메네프의 아내였다. 트로츠키의 여동생이라는 신분이 아니었더라도 사실상 숙청 확정이었던 셈.[55] 이때 존 듀이는 트로츠키와 대면하면서 질의를 했는데, 트로츠키의 사상에는 동의하진 못했지만 꽤나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듀이와 트로츠키 간에 오갔던 논쟁은 책으로도 나왔으며, '그들의 윤리, 우리의 윤리(원제: Their Morals and Ours: The class foundations of moral practice)'라는 제목으로 한국에도 출간되었다. 참조 자료는 에듀인뉴스 - <왜, 지금 존 듀이를 읽어야 하나> 자유주의자 듀이, 공산주의자 트로츠키를 만나다.[56] #, 그 이전엔 얼음깨기용 망치 또는 얼음깨기용 송곳 또는 도끼를 트로츠키 암살에 썼다고 국내 교련 교과서나 신문에까지 다양하게 썼다. 영어 문헌에서 ice pick 혹은 ice axe라고 한걸 직역한 흔적이다. 이원복도 만화에서 얼음송곳으로 암살했다고 그렸으며 1990년대 국방부 정신교육 책자에선 도끼로 나왔다. 물론 반공 이념으로 써먹은 것 뿐, 트로츠키의 사상은 일절 거론 안 했다. 국방부 입장에서는 트로츠키는 스탈린보다 더 빨갱이인데 사실 피켈도 얼음송곳이라고 하니 틀린 건 아니다.[57]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1972년작 영화. 러닝타임은 103분이다. 사이트마다 한국어 번역 이름이 다른데, 제목을 단순히 직역하면 <트로츠키의 암살>, 다음 영화는 <트로츠키 암살사건>, 네이버에는 간단히 <트로츠키 암살>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1972년 영화인 만큼 사건의 진상이 100% 다 밝혀지기 전이긴하다.[58] 자세히 보면 얼음 송곳으로 찔린 자리가 푹 들어가 있다.[59] 이탈리아의 걸작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의 제목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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