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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3:33:00

유로마이단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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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Euromaidan_01.jpg
키이우, 2013년 11월 27일
<colbgcolor=#ffd500> 우크라이나어 Революція гідності (레볼류치야 히드노스티), Євромайдан(예우로마이단)
러시아어 Евромайдан(예브로마이단), Переворот на Украине в 2014 году(2014년 우크라이나 쿠데타)
영어 Revolution of Dignity (존엄의 혁명), Euromaidan(유로마이단)
프랑스어 Euromaïdan
독일어 Euromajdan

1. 개요2. 상세 및 진행 요약3. 명칭4. 원인5. 전개6. 절정: 존엄의 혁명7. 러시아의 개입8. 서방의 개입
8.1. 미국 정부와 CIA의 배후 지원8.2. 빅토리아 눌런드 녹취록 파문
9. 그 이후
9.1. 2014년9.2. 2015년9.3. 2016년9.4. 2017년9.5. 2018년9.6. 2019년과 그 이후
10. 매체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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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라루스 락밴드 랴피스 트루베츠코이(Ляпис Трубецкой)의 노래 "빛의 전사들"(Воины света).
2012년 공개된 노래로, 이후 유로마이단 시위대가 애창하는 민중가요로 자리잡았다.[1]
2013년 11월 21일부터 2014년 2월 22일까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혁명이다.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축출과 2014년 크림 위기, 돈바스 전쟁, 그리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이어지는, 21세기 우크라이나 역사의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된 혁명이다. 시위 과정에서 총 121명[2][3]이 사망하고 2050~2200명[4]이 부상을 입었으며 166~300명이 실종[5]되었다.

2. 상세 및 진행 요약

2013년 11월 21일, 당시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당시 진행 중이던 EU 가입 논의를 전면 중단하고 친러 정책을 천명한 것에 반대하여 수도 키이우를 포함한 서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대적인 시위가 유로마이단 혁명의 시발점이다.[6]

시위 군중들에게 실탄을 발포하는 등 야누코비치 정부의 폭동적 시위진압과 이에 자극 받은 시위대의 봉기로 시위는 유혈 사태로까지 격화되었다. 여기에 야누코비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파괴하고 경찰의 범죄행위를 대놓고 합법화하는 반시위법 패키지를 입법 절차를 무시해가며 날치기로 통과시켰다.[7] 2014년 2월 경찰은 자동소총과 저격총을 동원해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시위는 절정에 달했다.[8] 이때를 기점으로 민중들의 목적이 친러정책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에서 독재정권의 축출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혁명으로 급변했다. 결국 야누코비치와 그 측근들이 키이우에서 러시아로 야반도주 하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독재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모든 의원의 만장일치 표결에 따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야누코비치를 탄핵하고 새로운 과도정권을 수립하였다.

친서방 정책에 회의적인 지역들에서도 야누코비치는 이미 지지를 잃어버렸기에 대부분의 지자체와 군경은 과도정부를 인정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우크라이나를 속국으로 여겨온 러시아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세력권을 이탈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2013년에 야누코비치의 무능한 대처를 보고 실망한 러시아는 친러정권 유지를 포기하고 직접적인 개입과 하이브리드 전쟁을 통하여 '말 안 듣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뒤엎기로 결정했다. 이후 일어난 2014년 크림 위기러시아는 자신감을 얻었으나 뒤이어 발발한 돈바스 전쟁은 러시아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이는 결국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어졌다.

3. 명칭

유로마이단에서 유로유럽을, 마이단은 페르시아어 '메이단'(میدان)에서 온 단어로 광장을 뜻한다. 특히 이번 시위의 중심인 키이우의 마이단 네잘레지노스티(Майдан Незалежності, 독립광장)를 의미하는 것으로 직역하면 유럽광장이 된다. 이것이 트위터를 통해 전파가 되기 시작했다.[9][10] 우크라이나어에서 '광장'이라는 뜻을 가지나 러시아어와 유사성이 보이는 '플로시차(площа)'를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러시아적 정체성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11]

러시아에서는 2014년 우크라이나 쿠데타(Переворот на Украине в 2014 году)라고 부른다.

4. 원인

파일:attachment/ukraineendanger.jpg
우크라이나가 위험하다!
유로마이단 사태를 풍자한 프랑스의 만평[12]
2013년 11월 시위가 일어나던 당초에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연합 가입 및 경제협력 진행을 포기하고 러시아와 우호적인 협력조약을 맺기로 한 것에 반대하면서 발생했다. 그러나 근본적 동인에는 야누코비치 정권의 독단적 국정 운영과 부정부패 그리고 경제적 실정이 있었고 그 외에 다음과 같은 배경 상황들이 있다.

등등이 다 들어가야 하지만, 이럴 경우 원인이 내용, 전개, 결과보다 더 길어지는 관계로 직접적 원인이 되는 것들에 대해서만 서술한다. 또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은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유로마이단을 직접적으로 촉발시킨 원인은 2013년 11월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의 EU협력협정 체결 거부와 러시아와의 협력강화 선언이었다. 하지만 근본적 동인은 야누코비치 정권의 실정과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국정운영이었다. 2010년 야누코비치는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정적 탄압, 권위주의적 정치 회귀, 경제적 실정, 부정부패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에 취임한 야누코비치는 정적을 탄압하였는데, 2011년 우크라이나 경찰청은 야권 거물인사이자 차기 대권 유력 주자인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에 대해 러시아와의 가스협상에서 배임혐의로 구금 수사하였고 법원은 7년형을 선고하였다. 이러한 판결에는 티모셴코가 러시아의 제안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이 작용했는데 단순히 협상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이 죄목이 될 수 있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 판결에 대해 러시아서방을 비롯한 국제투명성 위원회, 국제사면기구, 프리덤하우스, 국제인권 감시기구 등이 정치적 탄압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외에도 티모셴코 내각의 필립축 환경부 장관, 루첸코 내무장관, 다릴리신 경제장관도 수사하였고, 루첸코는 4년형을 선고 받고 다릴리신은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를 수립하였다. 2010년 9월 헌법재판소는 2004년 오렌지혁명의 결과로 채택된 헌법개정안을 절차상의 하자를 이유로 무효화함으로써 1996년 헌법으로 회귀하였다. 2004년 헌법개정안은 총리를 다수당이 선출하고 총리가 내각을 지명하면 의회가 인준하여 임명하는 등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견제하고 우크라이나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는 대통령제내각책임제를 절충한 개정안이었다. 그런데 이를 폐기하고 1996년 헌법 회귀함으로써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총리와 내각을 직접 임명하고 의회 동의 없이 내각을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자신의 정적 빅토르 유셴코가 대통령이던 과거에 2004년 헌법개정안을 이용해 총리의 자리에 올랐고 유셴코 정권의 국정 운영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대통령이 되자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2004년 헌법개정안을 폐기한 것이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고질적 문제이던 부정부패 문제가 심화되었다. 국제투명성위원회가 발표하는 투명지수에 따르면 2007년 우크라이나의 투명성은 179개국 중 118위였는데, 2012년 176개국 중 144위로 크게 악화되었다. 2012년 국제투자자문회사 언스트 앤 영(Ernst & Young)은 우크라이나를 콜럼비아, 브라질과 함께 세계 3대 부패국으로 꼽기도 하였다. 이후 유로마이단 혁명의 결과로 구성된 과도정부에 따르면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도피한 후 외국지원금을 포함한 700억 달러가 국외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경제위기에 빠진 우크라이나를 회생시킬 것이라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두 가지 정책을 시행하였다. 첫 번째는 2010년 4월 러시아와 협정을 체결하여, 흑해 함대의 우크라이나 기지 사용권한을 연장해주고 그 대가로 러시아산 가스를 30% 할인된 가격으로 수입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기준 가격을 국제유가에 연동시켰고 하필 2011년부터 국제유가는 치솟았다. 두 번째는 2010년 8월 IMF로부터의 구제금융을 제공받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IMF가 제시한 이행조건을 매번 어김으로써 두 차례에 걸쳐 20억 달러를 제공받은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런 일련의 정책으로 인해 2010년~2011년 간은 우크라이나의 경제가 약간이나마 회복되었지만 2012년부터 다시금 악화되는 한계를 맞았고 결국에는 외환보유고가 터무니없이 부족해지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에 돈을 꿔주겠다는 세력이 2개 존재했고, 빅토르 야누코비치 행정부는 둘 중 하나를 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 두 세력은 유럽 연합으로 대표되는 서방 세력, 그리고 러시아였다. 미리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이 두 세력 중에서 권위주의적 체제와 정적 탄압을 용인해줄 수 있는 러시아의 손을 잡았고 그 결과 유로마이단이 발생한 것이다.
파일:attachment/143462_60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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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당시 상황을 다룬 각종 만평들
당시 러시아는 150억 달러의 차관을, 유럽연합은 200억 유로의 차관을 제공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유럽연합의 지원안은, 차관액 자체는 높았으나 우크라이나에게 '강도 높은 개혁'을 선행조건으로 내걸었다는 문제가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이미 IMF로부터 몇 차례 차관을 제공받았으나 이를 상환하지 못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유럽연합으로서는 당연히 수행되어야 할 선행조건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강도 높은 개혁'에 연금을 일부 삭감하거나 천연가스의 소비자 가격을 인상하는[14] 등 우크라이나 경제 체제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성하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15] 당연히 이걸 받아들였다가는 지지율이 쪽박나기 딱 좋았다.

반면 러시아의 조건은 차관액은 낮았으나 어떤 선행조건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추가로 우크라이나가 수입하는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가격을 인하시켜 주겠다는 선물도 붙어있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야누코비치 정권이 친러시아 성향에 우크라이나 동부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러시아계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으로[16] 러시아 입장에서는 야누코비치 정권이 아무 탈없이 존속하기만 하더라도 자국의 이익을 충분히 챙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얼핏 러시아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구상은 우크라이나 경제를 유라시아 경제연합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야누코비치 정권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가 친서방 세력과 친러시아 세력으로 나누어지며 양측의 대립이 매우 격해졌기 때문이었다. 경제적 실익을 생각한다고 해도 반대 세력이 강하게 반발할 것이 분명해지니 우크라이나 정부는 그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17]

이 곤란한 상황에서 결국 야누코비치 정권은 2013년 12월, EU의 조건을 거절하고 러시아와 협정을 맺기로 결정내렸다. 이 결정에는 우크라이나가 이전부터 러시아에게 진 빚이 상당하고[18], 천연가스의 공급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어 EU의 조건을 받아들였다간 우크라이나는 내외부적으로 큰 위기에 빠질 것이[19] 당연하다는 이유가 큰 영향력을 미쳤다.

여기에 배경설명을 좀 더 붙이자면, 러시아는 자국 주도의 관세동맹에 우크라이나가 참여하면 당장 차관을 빌려주고 그 130억 달러 나중에 받거나 탕감시켜 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당연히 경제적인 위기를 타결하고 싶어했던 야누코비치 정부에게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독립국가연합에서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유라시아 경제연합의 일원으로서 관세동맹 편입은 말이 좋아 경제 협력이지 사실상 러시아에 대한 완전한 경제 종속이나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우크라이나로서는 탐탁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크라이나가 유라시아 경제연합에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이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경제적으로 압박했다. 2013년 중순 EU와 가까워지려 하는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수입산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였다. 그러자 우크라이나의 산업생산성은 8월, 9월, 10월 각각 전년 대비 4.9%, 5.6%, 5.4%씩 떨어졌으며, 수출은 10%나 폭락했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게 경제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고 있고, 러시아가 그 상황을 이용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였다.

비록 야누코비치 본인은 친러 성향이었고, 이미 러시아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겠지만, 적어도 유럽연합과 경제협력을 포기해 이로 인한 정치적 후폭풍을 그대로 받아들일 바보는 아니었다. 야누코비치는 우크라이나 의회에 대놓고 EU가 요구하는 대로 법개정을 주문하는 등 EU와의 협상에 최선을 다했고, 2013년 9월까지만 하더라도 우크라이나 국회의장은 법 개정에 긍정적이었다. 허나 국내 정치적으로 서방의 차관제공 조건에 따르는 경제개혁 폭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야누코비치 행정부가 서방과 협상을 하고, 경제개혁과 함께 서방의 차관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당장 물가상승 및 개혁개방으로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야누코비치와 집권 지역당이 서방과 차관협정을 맺고, 러시아의 차관지원을 포기한다는 건 정치적 역학관계상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야누코비치 본인부터가 친러 쪽인 동부를 정치기반으로 삼고 있었고, 더군다나 친러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적절한 유화책으로 친서방 세력을 달래기에는 전전임이었던 쿠츠마 같은 정치력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야누코비치가 서방과 러시아를 적절하게 잘 타이르려 했어도, 전임이었던 빅토르 유셴코와 결과가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애초에 야누코비치 정부는 독단적인 정국 운영으로 인해 2013년 들어서 지지율이 급감하여 레임덕 일보직전을 찍고 있었다.[20]

5.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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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1일, EU는 우크라이나를 영향권내로 진입시키려는 구상이 실패한 것에 아쉬워하기는 했으나 주권국가의 정당한 결정이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친서방 세력이[21] 우크라이나 경제가 러시아에 완벽하게 예속당할 것이라 주장하며[22] 크게 반발해 대규모 시위에 나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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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내무부의 특수부대인 베르쿠트가 시위대를 공격하는 것이 생방송되는 모습.

11월 30일, 베르쿠트가 시위대를 공격하면서### 79명 이상이 부상당했고, 이로 인해 다음 날인 12월 1일 키이우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76px-Euromaidan_in_Kyiv_early_evening_2013-12-10_%28016%29.jpg
12월 8일에는 키이우의 레닌 동상을 시위대가 무너뜨려 아작내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 깃발[23]을 꽂아버렸고, 이는 야누코비치 정부와 러시아에게 충격을 주었다.

야권, 반러, 친서방 세력의 반대는 격렬했고, 야누코비치는 이에 굴복하여 서방과의 협상을 재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시위가 잠시 잠잠해졌으나 문제가 야누코비치는 위의 결정을 뒤엎고 오히려 이참에 반대파를 억누르기로 결정한다. 특히 시위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시위를 금지하는 반민주적 법안인 반시위법을 제정, 공표한 것을 계기로 반대파가 완전히 폭발하여 2014년 1월 이후부터 대대적인 반정부운동이 시작되었다.

결국 반시위법에 대한 반대가 반시위법을 공표한 정부와 정권 전체에 대한 반대와 불복으로 이어지면서 EU와의 협상 재개를 요구하던 시위는 반시위법 폐지까지 요구하며 전면적인 반정부 투쟁으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야누코비치 정부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강경진압을 천명하여 수도 키이우는 1월에서 2월 초중순까지 대규모 시위와 이의 진압이 반복되었다. 이 시위에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 참여해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시위였다.

시위가 확대되면서 정부 역시 대규모의 경찰과 헌병대[24], 티투쉬키(тітушки)[25], 내무부 소속 특수부대인 베르쿠트까지 투입하여 더욱 과격하고 강압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진압이 점점 과격해지자 시위대는 정부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며 진압부대에 맞서기 위해 갑옷방패, 철퇴[26], 심지어 투석기까지 동원해 무장을 했기 때문에 수도인 키이우에서는 중세 시대까지나 보였던 중장보병들간의 라인전이 벌어지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도심 곳곳에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며 사실상 해방구를 형성하고 진압하려는 경찰들과 격전을 벌였다.[27] 게다가 무력충돌의 수위가 심각해서 돌과 화염병이 날아드는것은 물론이고 중장보병들끼리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각목이나 봉에 불꽃놀이용 폭죽(스틱처럼 생긴)을 달고 경찰들에게 발포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시위대는 경찰이 쏘는 최루탄에 맞서기 위해 방독면까지 가져와서 쓰고 저항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정교회에서 시위대와 경찰에게 폭력을 쓰지말고 물러설것을 호소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정부 측이 총을 발포하고 시위대도 활과 새총같은 원거리 무기로 대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에 의문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28], 최초 시위대 사망자는 2013년 12월 22일 베르쿠트에 폭행당해 사망한 파벨 아나톨리요비치 마주렌코다. 그 이후에도 2014년 1월 18일 시위를 주도한 유리 타라소비치 베르비츠키가 납치당한 뒤 고문사한 시체로 발견됐으며, 시위대의 첫 총상 사망자는 2014년 1월 22일 세 발의 벅샷을 맞고 사망한 세르히 니고얀이다. 그 이후에도 2014년 2월 18일 직전까지 시위대 여섯 명이 더 사망했다. 이 여섯 명의 사인은 각각 총상, 총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물대포로 인한 폐렴, 교수형[29], 폭행, 차량 폭발로 인한 전신화상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 우크라이나 경찰이 이미 산발적으로 총기를 사용하고 있었음은 물론 야누코비치 정부의 폭력행위가 도를 넘었다는 건 변명할 여지가 없으며, 이러한 맥락을 모조리 지워버린 다음 경찰측 집단발포로 사망자가 폭증하기 시작한 2월 18일 누가 먼저 발포했는가를 논하는 것 역시 명확한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경찰측 사망자는 경찰측이 집단발포를 시작한 2월 18일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경찰측이 집단 발포를 시작해 유혈 참사가 본격적으로 확대된 2014년 2월 18일 역시 마찬가지로 시위대의 첫 사망자는 오후 12시경 사망한 블리디미르 자하로프였으나, 첫 경찰 사망자이자 경찰 총상 사망자는 17시경에 발생했다. 이날에만 시위 참가자 23명이 사망했다. 상당수가 총상과 수류탄 폭발 사망자였다. 경찰 사망자는 다섯 명이었다. 2월 19일에는 시위대 8명, 경찰 3명이 사망했다. 최악의 유혈사태는 20일 벌어졌는데, 시위 참가자 47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측 사망자는 4명이었다. 사망자 발생 시점과 극도로 불균형한 폭력의 강도, 그리고 경찰이 이전부터 간헐적으로 총기를 사용해 시위대를 사살했음을 감안하면 어느 쪽에 발포 책임의 무게가 실리는지는 명확하다. 심지어는 아예 지붕 위에서 시위대에게 총을 쏘는 저격수도 있었다. 당시 사진 또 경찰이 노동조합 건물에 불을 지르면서 두 명이 사망했고, 다른 한 명은 참수된 채로 발견되었으며, 비아체슬라프 베레미라는 기자는 티투쉬키를 촬영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구타당하고 총에 맞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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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키이우 시가전 중 시위대의 새총.


키이우 시가전 중 화염병을 맞는 경찰측 장갑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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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사실상 내전이나 다름없다. 10년 전 오렌지혁명이 심장마비로 발생한 사망자 1명을 제외하면 사실상 무혈혁명이었던 데 비해 이번 시위는 이미 본격적인 유혈사태로 넘어간 상태다.

6. 절정: 존엄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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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발포에 숨진 시민들)


BBC가 촬영한 당시 영상


VICE가 촬영한 2014년 2월 21일의 우크라이나.

결국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2014년 2월 19일 이후 야권과 정부간 협상도 성과 없이 결렬되고, 양측의 충돌은 갈 데까지 다 가버려 본격적인 무력 동원과 유혈 충돌로 확대되었다. 야누코비치 정부는 시위대의 도심 집결을 막기 위해 지하철 운행을 중지시켜 버렸다. 또한 키이우로 향하는 고속도로#, 철도 등#도 완전히 운행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진압에 나선 정부는 시위 진압에 대놓고 총기를 발포하기 시작했다.

2014년 2월 18일-23일 사이의 "존엄의 혁명(Революція гідності)" 기간 동안 80명 이상의 시위대가 경찰의 발포로 사망했고, 특히 저격에 의한 사망자는 20명 이상이 집계되었다.[30] 한국의 광화문에 해당되는 마이단 광장은 위 사진과 같이 불탔으며, '티투쉬키(Тітушки, Titushky)'라 불리는 정부가 고용한 폭력배 또는 사복경찰이 시위 가담 여부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이는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어 시위만 늘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역에는 비상사태가 발령되었고, 정부는 군대를 동원할 계획을 검토했다. 내전과 다름없는 상태에서 학교 및 관공서는 휴교-휴업에 들어갔다. 주민들이 식량을 사재기하면서 마트의 재고는 텅텅 비었고, 길거리에서는 사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정권 교체 이후 알려진 일이지만, 이때 야누코비치 정부는 군 부대를 진압에 투입하려 하였으나 군이 진압작전에 투입되면 사태가 악화되기에 폴란드 외무장관의 말에 의하면 바로 그 푸틴이 전화를 걸어 군병력 투입에 반대했다고 한다.[31] 사실 최소한의 정치적 상식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시위대를 다짜고짜 유혈진압하면 사태만 심각하게 악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32] 그런데 시위대를 협상을 통해 달래기보다는, 군대를 동원해 총기로 유혈진압을 하겠다는 시점에서 이미 상식적인 판단이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언론들은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비난을 퍼부었고 야권은 심판하겠다며 반발했다. 특히 야누코비치의 지지세력인 우크라이나 동부와 친러측에서도 지나치다고 비난을 하고 나섰다. 서방 측 역시 야누코비치 정부를 비난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윈터 온 파이어"를 보면 총기 발포는 도덕과 윤리를 떠나서 완벽한 자충수였다. 이미 이 시점에서 시위대는 의회로 돌파하는 행진에 실패하면서 해산될 위기에 처했고, 타이어를 태우면서 저항하던 상황이었다. 물론 이전처럼 버텨낼수도 있었지만, 집단발포를 하면서 사태는 급속도로 악화되고, 대통령은 밤에 헬기를 타고 도주한다. 이 와중에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싸고 EU, 미국 및 나토 등 서방 측과 러시아 측의 의견대립이 격렬해지면서 이들이 각자 지지-지원하는 야권과 정부 모두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참조 기사

2월 21일, 사태가 확산되고 사망자가 급증하자 독일, 프랑스, 폴란드 3국 외무장관의 중재하에 정부와 야권간 타협안이 통과되었다.

‘2.21합의(Agreement on the Settlement of Crisis in Ukraine)’으로 불리는 이 합의의 주요 내용은 2014년 이내 대선 실시와 야당이 참여하는 거국적 연립내각 구성으로 서방은 이 중재안으로 우크라이나 위기가 종식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야당과 시위대 내에선 '시간을 벌려는 정부의 꼼수'라며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어 시위가 곧바로 끝날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야당 대표간 합의(대통령 권한축소를 골자로 한 2004 헌법 복귀, 거국내각 구성, 12월 조기 대선 등)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야누코비치 대통령 퇴진이라는 강경 입장을 고수한다.[33]

2월 23일, 결국 반야누코비치 시위대는 시위를 계속하여 키이우의 대통령 집무실을 점령했고,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의 석방과 동시에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탄핵되었다. 즉 지지세력에게도 버림받았다.[34] 같은 시각, 야누코비치는 동부의 거점 도시 하르키우(러시아명 하리코프)로 피난을 갔다. 의회에서는 전날 국회의장으로 선출된 원내 최대 야당인 조국당 소속 올렉산드르 투르치노우 의원을 임시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를 지지하였다.

한편 야누코비치는 하르키우에서 TV중계를 통해 "의회 결정은 불법이며 쿠데타 행위, 나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며 물러나지 않겠다." 고 밝혔다. 이 부분은 러시아 정부의 논조와도 일치한다. 특히 러시아 정부는 2월 22일 서방 3국 외상이 중재한 협정이 야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된 것을 들어 서방을 맹비난했다. 그 후 새벽에 동부 국경 도네츠크[35] 주의 공항에서 뇌물을 주고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국경수비대에 걸려 실패하고 그를 호위하던 무장군인들과 함께 사라졌다고 전해졌다.

같은 날 의회에서는 동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러시아어의 제2 공용어 지위를 박탈하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정확히는 우크라이나 국내에서 제2공용어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2012년 제정된 제2공용어법은, 지역별로 특정 외국어를 쓰는 소수민족의 비율이 10%를 넘기면 그 언어를 해당 지역 제2공용어로 인정하게끔 되어 있다. 물론 러시아어권의 혜택을 위한 법이었지만, 서부의 일부 헝가리, 루마니아인들도 이와 같은 혜택을 받았다. 이 법의 폐지 역시 동서부 구분 없이 이뤄진 것이지만 주 타겟이 러시아어권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 가령 러시아어만을 사용하는 공무원은 새로운 법에 의하면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어 웬만한 시민은 거의 모두 우크라이나어/러시아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다.

2012년 당시에 법을 통과시키면 우크라이나어가 사라질것이라고 주장하는 친서방 야권 세력의 반발이 심했는데[36] 친러세력에서는 그걸 그냥 무시했었다. 타협이라곤 없는 우크라이나 정치의 일면이다. 그러나 3월에 투르치노우 권한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즈음에 집권여당이었던 야누코비치의 지역당마저 대통령을 축출하는데 찬성했고, 지역당 소속 의원 및 키이우 시장이 집단으로 탈당하는 등 전면적인 집권세력의 붕괴가 현실화되었다. 이후 지역당은 야권과 공조하여 야누코비치 축출 및 신정부 수립에 협조하였다.

이런 가운데 야누코비치와 대선 경쟁을 벌였다가 패배 후 구속되었던 율리야 티모셴코가 석방되고, 5월에 조기 대선을 치르기로 해 키이우 정가(政街)는 빠른 속도로 '포스트 야누코비치' 체제로 접어들었다. 2월 25일에 5월 선거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티모셴코 전 총리도 후보로서 결격이 없음을 선거위원장이 천명했다. 그녀는 지난 22일 석방되었다. 한편, 우크라이나 경찰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대해 수배령을 내렸다. 공항을 통한 출국 실패 후 하르키우를 전전하던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경호원들에게 떠날 것인지 남을 것인지 선택권을 주었고, 남은 경호원들과 함께 3대의 차에 나눠타 러시아로 도망갔다고 한다. 그리고 3월 2일 러시아에서 기자회견에 나타났다. 지역당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배신자라 부르며 선긋기를 시도하고, 동남부 지지세력의 반발이 예상보다 시원찮은 것 등의 이유로 정권 탈환을 포기, 망명을 시도 중이라고 보는 분석이 있다.

7. 러시아의 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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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푸틴이 유럽연합에게 다가가는 우크라이나를 막다
푸틴: 자, 우리 러시아인들은 경제 정책의 사소한 차이점 때문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의리를 절대 버리지 않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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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내 전처는 소유욕이 좀 강해서...
데니킨[37]대러시아소러시아의 관계로 표현했다.]은 우리들(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에 어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오직 러시아의 권리다.
블라디미르 푸틴, 2009년 데니킨이 안장된 돈스코이 묘지를 참배 도중.
우리는 더이상 형제가 아닐 겁니다.
유로마이단에 참가한 어느 시민의 시 중.출처[38]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옛 소련 국가들을 고르바초프가 구상했던 신연방조약과 같이 독립국가연합으로 재편성하려 했던 러시아의 시도는 신자유주의로 경제개혁이 좌절되면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동유럽 국가들과 옛 소련 국가들은 자신들의 압제자였던 러시아를 벗어나 서구권에 빠르게 편입되었고,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러시아에 반감이 심했던 폴란드나 발트 3국같은 나라들은 EU와 NATO에 가입하면서 러시아에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1999년 안보리에서의 러시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NATO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진 베오그라드 공습은 러시아 입장에서 자신의 옛 세력권에 대한 서방의 패권행사 그 자체였고, 이는 러시아가 서방에 반감을 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91년 소련 붕괴로 독립을 맞은 우크라이나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국가로서 독립적인 정책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오랜 시절 동안 몽골, 폴란드, 크림 칸국,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많은 시련을 감당해야 했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과거든 미래든 언제든 다시 자국을 보호국 내지 위성국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기존의 러시아 의존적인 사회구조를 탈피해 서방과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는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지방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러시아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었다.

비록 러시아와 서방은 공식적으로는 1989년 몰타 회담 이후 서로 협력 관계였지만, 서방과 러시아 모두 서로의 이해가 달랐다. 특히 냉전 이후 정치와 군사, 경제 등 전 분야에서 서방이 러시아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력권 구축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특히 2000년대 후반 남오세티아 전쟁 등으로 러시아는 자신의 세력권을 다시 구축하려 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서방과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해 왔다. 특히 2010년대 초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해서든 자국의 영향력에 두고자 했고, 이를 위해 우크라이나 내 친러세력의 기반이었던 야누코비치 정권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야누코비치는 대통령 집권 이후 자신과 가장 치열하게 맞섰던 경쟁자인 율리야 티모셴코를 살인누명으로 투옥시키는 초대형 악수를 두었고,[39] 이는 우크라이나 개혁세력에게 단지 경각심 차원을 넘어 큰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야누코비치 정권에 꾸준히 제기되던 부패 의혹과 권위적 통치는 국민들의 신뢰를 대폭 떨어뜨렸다.

한편 유라시아 경제연합 등으로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세력권 편입이 코 앞에 있던 찰나에, 야누코비치 정권이 붕괴하면서 친서방세력이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를 둘러싼 권력투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 정확히 말하며 원래 동부 지역은 친러 경향이 높았지만, 러시아가 사태에 개입하여 돈바스 반군에 물자와 병력을 지원하고 심지어 직접 군사행동까지 벌이자, 원래부터 반러 성향이 강했던 서부뿐만 아니라 일종의 나이롱 친러였던 동부마저 점령지만 빼고 죄다 반러로 돌아서버린 것이다. 그리고 친러 세력은 러시아로 피난가거나 돈바스로 가거나 아니면 아예 편을 바꿔버리고. 이제 우크라이나가 평화적, 자의적으로 러시아 품안에 돌아올 가능성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사실 러시아는 이 사태가 발생하고서도 본격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2014 소치 동계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다가, 미국의 반발로 반쪽짜리 올림픽을 개최했던 일이 있었다 보니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러시아는 소치 동계올림픽이 끝날때까지는 참고 있다가, 올림픽이 종료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에 개입하게 되었다.

7.1. 유로마이단에 침투

새로운 정책을 떠맡은 주역은 콘스탄틴 말로페예프Konstantin Malofeev가 발탁한 러시아군 정보총국GRU 대령 이고르 기르킨Igor Girkin이었다. 러시아에서 "정교회 올리가르히"로 알려진 말로페예프는 반동성애 활동가이자 노골적인 러시아 제국주의자였다. 그가 보기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다. 나는 우크라이나인을 도저히 비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러시아는 유럽으로부터 우크라이나를 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전통적인 우크라이나 사회에 하나의 규범으로 남색을 확산시켜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말로페예프는 러시아 정책의 방향성을 표현한 셈이었다. 유럽을 문명의 적으로 묘사하고, 동성애는 전쟁으로, 우크라이나는 전장으로 묘사하는 정책이었다.

말로페예프가 채용한 기르킨은 비정규전 경험이 있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러시아 지원병으로 세르비아 편에서 싸우면서 종족 청소와 대량 강간이 벌어진, 유엔이 선포한 "안전지대"와 보스니아 소도시들에서 교전에 참여했다. 또한 러시아가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체첸에서 벌인 전쟁에도 참전했으며, 파시스트 알렉산드르 프로하노프가 편집장인 언론에 이 경험들에 관해 글을 쓴 바 있었다. 기르킨은 2014년 1월 22일부터 2월 4일까지 키예프에 체류했으며, 이후 크렘린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서 분할하자고 권고한 것으로 보인다.

티머시 스나이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유강은 옮김), 서울 : 부키, 2019. p 184-185

7.2. 2014년 크림 위기


2014년 3월 말, 크림반도는 러시아에 병합되었고, 친러 성향의 11개 국가가 이를 승인했다. 당연히 우크라이나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UN 소속 대부분의 국가가 반대 의사를 내비쳤다. 더불어 친러 성향이 강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도 유로마이단 시위대와 반유로마이단 시위대의 충돌이 격화되어 반유로마이단 시위대의 분리독립 후 러시아에 병합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가 되었다.

2014년 3월 말, 러시아 자유민주당 당수를 지낸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우크라이나를 동서로 분할해 러시아폴란드가 나눠갖자는 제안을 담은 공식 서한을 폴란드 외무부에 보내 파문이 일었다. #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2014년 3월 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경지역에 러시아군 10만명을 배치했다고 한다. CNN 방송은 미국 정보 당국의 기밀 보고서를 인용해 러시아가 크림반도와의 육상 운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동부를 침공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는 2014년 5월 28일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인도주의적 지원'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 외무부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충돌지역으로부터 시급히 '인도주의적' 지원을 해달라는 계속된 요청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외무부는 대부분 의료지원이 될 것이라고는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지난 2월 이후 우크라이나 정국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인도주의적' 지원의 시급성에 대해 경고했다.

6월 18일 러시아 국방부 장관 세르게이 쇼이구가 러시아 국가의회 폐회식에서 발언하길,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 언제라도 신속히 움직일 준비가 끝났다고 발언했다. 사실 러시아군의 동원문제라면 이미 3달 전 3월 2일에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국가의회에서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러시아 연방군의 사용요청을 승인받았는지라, 극단적으로 말해 지금 당장 러시아군 전차들이 우크라이나 국경선을 돌파해도 러시아 내부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국제여론과 압력인데, 이것도 이라크의 막장화되는 사태 때문에 이쪽에만 미국이 관심을 쏟기가... 아무래도 러시아가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을 하게 될 듯하다.

2014년 6월 16일, 러시아 총리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이제 그들(서부 우크라이나)을 보살펴 주는걸 끝낼 때가 왔다."라고 언급했다.

7.3. 2014년 우크라이나 친러 시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2014년 우크라이나 친러 시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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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돈바스 전쟁


도네츠크와 루간스크는 5월 12일 정부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분리독립 투표를 치러 가결하였으며 주의 많은 영역을 통치하고 있다. 이후 이들은 '노보로시야 연방국'으로 통일을 선언했으나 도네츠크 측은 연방국가라는 입장, 루간스크는 국가연합이라는 입장이다.

2014년 6월부터 일진일퇴의 교전과 전투가 진행되다가 7월 말부터 정부군이 서서히 승리를 거머쥐는듯 보였으나 8월 중순부터 반군들이 다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2015년 2월 6일에 러, 프, 독 3국 정상이 회동을 가졌으며 협상 타결 등의 가시적 성과는 없었으나 프랑스 측에 따르면 건설적인 회담이었으며 러시아, 우크라이나 측의 의견이 포함된 문서를 작성중이라고 하였다. # ## 아울러 2월 8일 프, 독, 러에 우크라이나 포로셴코 대통령이 포함된 4자 전화회담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일단 분위기는 괜찮아 보이나 향후 진행 방향에 따라 사태가 어떻게 달라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또한 밸브 잠가라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천연가스 동결은 자원수출 위주로 돌아가는 러시아 경제에도 타격이 큰 양날의 검이다. 게다가 미국과 EU의 각종 경제제재 때문에 S&P는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BBB-(부정적)으로 떨어뜨렸는데, 여기서 한 단계만 더 떨어지면 투자주의등급이다. 덕분에 연초부터 골골거렸던 러시아 주식시장(Micex)은 더욱 급락했으며, 러시아 10년 만기 국채 이율은 9.6%로 폭등했다. 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최고치다. 참고로 당시 러시아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이자율을 7.5%까지 끌어올린 상태.

5월 31일 유리 보리소프 러시아 국방차관은 우크라이나가 3월 이후 러시아에 무기와 기타 군수품 및 부품들을 공급하지 않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러시아가 이미 선불한 무기들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이타르 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보리소프는 그 대금이 약 1억4300만 달러로 우크라이나의 그런 행동은 이 나라의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6월 25일, 러시아 정부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오는 방산수입품 95%를 수입취소시킨다고 발표했다. 일단 아주 필수적인 것들만 받고, 나머지 95%는 올해 말까지 전부 수입취소절차를 밟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아예 우크라이나에서 부품이나 물건을 들여와야하는 방산물품을 완전히 차단. 대체제를 찾거나 아예 러시아에서 자체생산하기까지는 대략 2년 6개월 정도가 걸릴 거라고 예상되었다.

8. 서방의 개입

Q3.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이 발생 전에도 혁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
2014년 유로 마이단 혁명을 이해하려면, 2004년 오렌지 혁명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두 혁명은 연장선상에 있다.
오렌지 혁명이 발생하기 전 대선에서 야누코비치와 유쉔코가 맞붙었다. 유쉔코의 성향은 친서방, 친미로 그는 EU와 NATO에 가입하겠다는 것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반대로 야누코비치는 친러 성향이었다. 선거 결과 야누코비치가 승리했다. 하지만 부정선거에 대한 의혹이 일었고 우크라이나 전역에서는 재투표에 대한 요구가 이어졌다. 결국 대선 재투표에 대한 헌법 소원이 이루어졌으며, 우크라이나 헌법재판소는 이를 받아들였다. 재선거 결과 유쉔코가 승리했다. 이 선거를 오렌지 혁명이라고 하며, 당시 혁명은 무혈 혁명으로 진행되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유쉔코는 친서방 기조를 내세웠다.
사실 오렌지 혁명 배후에는 미국과 러시아가 있었다. 당시 미국은 과거 소련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들을 러시아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서 민주 정부를 구축하려 했다. 조지아의 장미 혁명(2003), 우크라이나 오렌지 혁명(2004)이 바로 그 결과였다. 혁명 이후 조지아는 친 서방 국가로 변모했으며, 우크라이나 역시 오렌지 혁명 이후 친서방 국가가 되었다. 이러한 친서방 민주 정권의 탄생을 이른바 “색깔 혁명”, 혹은 “과일 혁명”이라고 한다.
크렘린의 푸틴은 이를 미국의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의 최종 목표가 자신의 제거라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방어에 나섰다. 서구의 지원을 받은 NGO의 단체 등록 등이 이에 속한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은 곧 미국에 대한 러시아의 패배를 뜻한다.
홍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교수,
(인터뷰)혁명 이후 우크라이나-EU 협력 현황과 유라시아 정세 전망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EMERiCs 인터뷰.
III. 우크라이나 위기의 국제정치적 함의

10년의 세월을 간격으로 두고 정권교체를 야기한 2004년의 오렌지 혁명과 2014년 유로마이단은 모두 국내정치적 요인, 즉 우크라이나 정치권의 무능과 정쟁의 일상화, 만연한 부정부패, 만성적인 경제위기, 고질적인 동서 지역갈등 등이 응축되고 중층적으로 오버랩되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헌정질서를 교란한 두 차례의 권력변동에는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강대국들, 특히 미국과 러시아의 배후 공작이 깊게 작동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홍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교수,
「2014 우크라이나 사태의 국제정치적 함의와 한반도」,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2. 우크라이나 사태의 변화 추이와 요인
(중략)
작년 11월 말부터 본격화된 반정부 시위는 12월 들어 점차 규모가확대되고 과격해졌으며, 지역도 서부 도시로까지 확산되었음. 야누코비치 정부는 이에 대응해 금년 1월 중순 ‘반시위법(Anti-ProtestLaw)’을 제정해 본격적으로 시위를 진압하였으며, 그 결과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음.- 반정부 시위가 격화된 것은 야누코비치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한민심이반과 서방 시민단체의 지원, 올리가르히(재벌)와 야누코비치 간의 갈등 심화와 반정부 데모 지원, 동·서 지역 간 분열심화 등에 기인함.
고재남 국립외교원 교수,
「우크라이나 사태의 주요 쟁점과 국제적 함의」

유로마이단에 대해 러시아의 개입과 함께 미국의 개입 또한 함께 지적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우크라이나를 떼어내기 위한 마지막 수단은 오렌지 혁명을 조장하는 것이였다. 미국과 유럽에 있는 미국의 동맹국들은 과거 소련의 통제 하에 있었던 국가들에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 깊이 관여해왔다. 그들은 서구적 가치와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동유럽 국가들의 친서방적인 개인과 조직에 대한 지원을 의미했고, 비 정부 기구(NGO)는 물론 공식적인 정부기구를 통해서 자금 지원이 이루어졌다.
(간접인용) 존 미어샤이머, 『미국 정치의 거대한 환상(The Great Delusion)』(번역:이춘근), 06 문제의 근원으로서 자유주의, pp. 291, 445.

일각에서는 야누코비치 정권의 부패를 유로마이단 혁명의 정당성으로 핑계로 대며 주장하지만 이는 내로남불로 집권한 친서방 세력들도 웃기지도 않게 자신들 또한 청렴함과는 거리가 멀은 존재들이였다. 이게 다 러시아 탓이라고 하며 야누코비치만 강제로 내몰아내면 전부 해결될 것 마냥 실컷 떠들었지만 야누코비치를 내쫓은 친서방 성향의 정치인, 엘리트들, 지식인들이 한 것은 이제는 자신들이 해먹겠다는 것이였다.

8.1. 미국 정부와 CIA의 배후 지원

직접적인 원인들

키예프에 새로 성립된 정부는 완전한 친서방 반러시아 정부였다. 게다가 새로운 정부에는 신파시스트라고 불려도 될 수 있는 인물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비록 어느 정도 지원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 정부가 이 쿠데타를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예로서 유럽 및 유라시아 담당 국무차관보인 빅토리아 눌런드(Victoria Nuland)와 상원의원인 존 매케인(John McCain)이 반정부 시위에 가담했으며, 키예프에 파견되었던 미국 대사는 쿠데타가 성공한 다음날, 오늘은 "역사책에 기록될 날"이라고 선언했다.

누설된 통화 기록에 의하면 누랜드는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했고 친서방 인물인 아르세니 야체뉴크가 새로운 정부의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새로운 정부의총리가 되었다.
존 미어샤이머, 『미국 정치의 거대한 환상(The Great Delusion)』(번역:이춘근), 06 문제의 근원으로서 자유주의, p. 292.
2014년 크림 합병도 NATO 확대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 사태와 함께 친서방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이때 미국의 빅토리아 눌런드(Victoria Nuland) 국무차관보[40], 제프리 파예트(Jeffrey Payette) 미국 대사, 존 매케인(John McCain) 상원의원이 시위에 가담하는 등 미국 정부가 키예프 쿠데타를 배후에서 지원했다.7) 위기감을 느낀 크림 공화국은 러시아 편입을 위해 주민투표를 추진하였으며, 결국 러시아의 지원으로 순조로운 주민투표 끝에 96%의 찬성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이어 러시아로 편입에 성공했다.
김규철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초빙연구위원,
「러시아와 NATO의 적대 관계: 연원과 무장충돌 가능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EMERiCs 이슈분석.
"자유로운 세계가 당신 곁에 있다, 미국이 당신들과 함께 하며 나는 당신들과 함께 있다" - 존 매케인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의 지지선언
머니투데이, EU, 우크라이나와 협상 중단..시위 재고조 #

현실주의 학계의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는 저서 『The Great Delusion[41]을 통해 미국에서 이 '쿠데타'[42]를 배후에서 지원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미국의 행보에 대해 유럽 시민들 사이에서는 우크라이나 내부 문제에 미국이 개입할 게 아니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반면 미국도 크림사태에서 당분간 발을 빼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혁명을 통해 친러시아 정부가 물러나고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 마당에 크림공화국을 러시아에 넘긴다는 것은 반쪽의 승리에 불과하다.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에 접경한 지정학적 요충지인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기 위해 이번 혁명에 물심양면으로 막대한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예프 유로마이단에 있는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4개월 넘게 광장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들에 대한 외부의 재정적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매일경제 Luxmen 제43호, 다시 갈등의 핵으로 `크림반도` #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금 지출은 계속 이어진다. 미국의 유럽 담당 국무차관보인 빅토리아 눌런드 본인이 2013년 12월,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자신이 획득할 수 있는 미래를 획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1991년 이후 "50억 달러" 정도를 지출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출처]

독일 언론 '빌트'지는 CIA 브레넌 국장이 가명으로 우크라이나에 들어와 우크라이나 내전에 개입하고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빌트지는 CIA와 FBI 요원들이 미국 정부 지시로 과도정부를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014년 초에 비밀리에 이루어진 브레넌 CIA 국장의 키이우 방문으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다. CIA 국장의 방문 사실을 처음 폭로한 우크라이나 의회 소식통은 브레넌이 가명으로 키이우를 방문했으며 현지에서 우크라 정부 지도자와 우크라 정보기관, 수사기관 수장 등을 두루 만났다고 한다.

8.2. 빅토리아 눌런드 녹취록 파문

녹음파일에서 눌런드 차관보는 유엔이 우크라이나에 특사를 보낼 수도 있으며, 그렇게 되면 훌륭한 해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유럽연합(EU)에 대해서는 “망할 EU”라고 욕설을 써가며 비난했다. 미국과 유럽 간 공조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눌런드는 또 우크라이나 야당 정치인들을 실명 거론해가며 품평했다. 권투선수 출신인 비탈리 클리츠코는 ‘클리치’라는 약칭으로 부르면서 “클리치가 내각에 들어가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반면 재무장관을 지낸 젊은 정치인 아르세니 야체뉵에 대해서는 호평하면서 “야츠(야체뉵의 약칭)가 알맞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5일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총리를 해임한 뒤 야체뉵에게 총리직을 제안했다. 눌런드와 파야트 대사의 대화가 이뤄진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파야트 대사는 눌런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러시아가 ‘어뢰처럼’ 우크라이나 문제에 끼어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우크라이나 내정에 개입해온 것은 미국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우크라이나 시위 뒤에 ‘미국의 공작’ 있었나?

미국 유럽/유라시아 담당 국무차관보 빅토리아 누랜드,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인 존 매케인이 반정부 시위에 가담했으며 키예프에 있던 미국 대사는 쿠데타 성공 다음날 오늘은 "역사책에 기록될 날"이라고 선언했다고 썼다. 여기에 누설된 통화 기록에 누랜드가 정권 교체를 강하게 요구했고 특정 인물이 우크라이나의 총리가 돼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도 지적했다. 눌랜드는 추가로 EU가 미국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자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에게 유럽연합에 대해 헐뜯는 막말을 퍼붓어버렸다.

이번 녹취록이 드러나면서 미국 국무부 관리와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 간의 적나라한 대화 내용이 유출되 우크라이나를 서방 쪽으로 끌어당기고 야당 지도자를 내각에 앉혀야 한다는 등 내정 간섭과 노골적인 개입 의도를 보여주는 대화가 드러났다 이에 러시아는 격앙됐으며, 미국은 대화 유출에 대해 당혹해하면서도 내용은 크게 문제될게 없다고 주장하며 유출 자체가 문제라고 변명하였다.

8.2.1. 티머시 스나이더의 반론

미국 국무부 차관보와 키예프 주재 미국 대사가 나눈 전화 통화가 러시아 비밀 정보부에 도청되어 2월 4일에 유출됐는데, 이를 통해 미국의 정책은 야누코비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정부를 지지하는 것임이 드러났다. 이 계획은 마이단광장에서 나온 요구와 일치하지 않았고, 실제로 전혀 무관했다. 적어도 2014년 1월 22일 학살 이후 마이단 광장에서 목숨을 걸기로 선택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야누코비치의 통치는 이미 끝난 상태였다.
티머시 스나이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유강은 옮김), 서울 : 부키, 2019. pp.173-174.

예일 대학교 역사학 교수 티머시 스나이더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러시아 비밀 정보부에 의한 도청의 유출본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이 야누코비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새로운 정부를 지지하는 것임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또한 위 문단에서 미국의 지원의 근거라고 가져온 자료에 상원의원인 존 매케인(John McCain)이 포함됐는데 존 매케인은 버락 오바마 당시 후보와 대결했던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자이자 야당이었다.

9. 그 이후

9.1. 2014년

9.2. 2015년

9.3. 2016년

9.4. 2017년

9.5. 2018년

9.6. 2019년과 그 이후

10. 매체

11. 둘러보기

2014년 우크라이나 위기
유로마이단 혁명 크림반도 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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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당 노래는 벨라루스 민주화 운동 당시에도 시위대가 자주 제창한 바 있다. 이후 2022년 7월 보컬 세르게이 미할리크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연대하는 의미로 노래를 우크라이나어로 번안하여 유튜브에 공개하였다. 여담으로 미할리크는 본인 스스로를 "루카셴코의 적"이라고 부르는 반체제 운동가이기도 하며, 2014년 이후에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2] 경찰 13명 포함[3] 사망자들은 거의 모두 2014년 1~2월, 특히 2월 18~23일 있던 존엄의 혁명에서 발생했다. 존엄의 혁명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천상의 100인 또는 천상의 중대로 불리고 있고, 2015년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매년 2월 20일을 '천상의 100영웅의 날'로 기리고 있다.[4] 경찰 200~300명 포함[5] 정황상 납치로 추정된다고 한다.[6] 친러정책으로의 노선 전환이 촉발 요인이긴 하지만, 야누코비치의 독단적 국정운영과 부정부패로 인해 축적된 불만이 촉발요인을 통해 터져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7] 의회에 전자 투표 시스템이 있었음에도 거수로 투표를 진행했다.[8] AK-74로 실탄을 자동사격 하는 경찰과 조준사격에 맞고 쓰러지는 구급대원, 조준사격을 당했으나 주변에 있는 진압방패 덕분에 목숨을 구한 정교회 신부등의 모습이 카메라를 통해 생중계됐다. 또한 외신의 구급대원 인터뷰에 따르면 총상부위가 대부분 머리나 가슴이였다. 참고로 대테러부대를 포함한 경찰들은 민간인을 상대로 하므로 사살이 아닌 체포를 우선시 하는것이 정상이다.[9]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와 가까운 터키 이스탄불의 유명한 관광지인 '탁심 광장'도 현지어로는 Taksim Meydani이다. 같은 어원에서 온 것이다.[10] 우크라이나의 남부에 위치하며 2만㎢의 작은 면적의 크림반도에는 킵차크 칸국러시아에 망하고 타타르인들이 도망쳐 15세기에 세운 크림 칸국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 타타르인들은 18세기까지 오스만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공격했는데 이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종속되었고, 이 시기에 튀르키예어를 통해 메이단→마이단으로 터키어 어휘가 우크라이나어에 유입된 걸로 보인다. 현재 분쟁지역으로 전락한 동부 우크라이나는 원래 타타르인이 살았으나 러시아가 크림 칸국을 멸망시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으면서 타타르인들을 시베리아중앙아시아로 강제추방하고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그 자리에 러시아인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아직도 적은 수의 타타르계가 크림반도에는 거주하고 있다.[11] 실제 1991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기 전까지 마이단 네잘레주노스티의 이름은 10월 혁명 광장(Площа Жовтневої революції)이었다.[12] 우크라이나가 친서방이 되는 것을 원하는 미국과 EU는 그녀를 앞으로, 친러가 되는 것을 원하는 러시아는 뒤로 끌고 가려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13] 타타르어를 쓰는 소수민족.[14]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사들인 천연가스를 구매 가격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국내기업과 소비자에게 판매하고 있었다.[15] 실제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세력들도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엔 반대하지만 서방의 지원조건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도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16] 실제로 야누코비치는 젤렌스키 집권기 이전까지 역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가운데서 평균적인 지지율이 가장 높았다. 크라우추크와 쿠치마는 동서쪽 양쪽에 모두 발을 걸쳤기 때문에 양쪽에게 지지를 받을수있었지만 동시에 지지도가 빨리 빠져나가기 좋았고, 유셴코는 율리아 티모센코와 갈등이 생기면서 지지기반이 1년만에 공중분해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야누코비치는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가지고 잇던 셈인데 다만, 야누코비치는 티모셴코 수감으로 상대 정파에게 원한을 잔뜩 산데다가, 눈치없는 행보를 보이는 바람에 그걸 다 망쳐버린것이다.[17] 우크라이나 경제의 가장 큰 축은 동부 공업지대와 러시아계 세력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손을 붙잡는 순간 러시아계 세력와 비슷한 규모의 친서방 세력이 대거 반발하고 나선다. 그렇다고 양 손을 모두 내치게 되면 경제적으로 내몰리게 된다.[18] 당장 갚아야 할 액수만 100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19] 러시아가 빚을 독촉하거나 천연가스 공급을 끊어버리는 것.[20] 다만 레임덕을 찍는 것은 크라우츠크나 쿠치마, 유센코도 이미 겪었던 일이라서, 야누코비치가 마냥 특별한 것은 아니기는 했고, 실제로는 젤렌스키 이전까지 우크라이나 대통령 가운데서 평균적인 지지율이 가장 높았을 정도로 그나마의 지지기반도 있었다. 다만 야누코비치는 대놓고 해먹는 주제에 상대정파에게 원한을 파워풀 충전을 했고, (가령 정적숙청도 부패척결 같은 그럴싸한 명분이 있어야 되는데, 야누코비치는 자신들이 자기 수하에게 사업권을 나눠주는 등 대놓고 해먹는 티를 냈다.) 타 우크라이나 대통령들과 달리 대통령직에서 순탄하게 퇴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21] 야권, 우익, 반러시아 세력들까지 다양하게 뭉쳤다.[22] 특히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대를 대규모로 배치시킨것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불안이 우크라이나에서는 크게 증폭된 상황이었다. 한국의 경우 북한과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국경에 군을 배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으나, 일반적으로 한 국가가 타국과 마주한 국경에 군을 배치하는 행위는 전쟁을 암시하는 도발로 인식된다.[23] 흑과 적색.[24] 보안군으로 언급되기도 한다.[25] 야누코비치 시절 우크라이나 보안 기관을 지원한 우크라이나의 용병 요원으로, 종종 스포츠 의류를 입은 거리 폭력배로 가장하여 친유럽 및 반 야누코비치 정치 집회에서 도발자로 활동하여 시위대를 체포하기 위해 폭력을 조장했다. 야누코비치 시절에는 정치 집회 뒤에서 민간인 옷을 입은 신원 불명의 남자들이 저지르는 거리 구타, 자동차 강탈 , 납치 행위를 티투쉬키 습격으로 부를 정도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26] 이 장비를 얻기 위해 박물관까지 습격해서 가져오기까지 했다.[27] 특히나 군 출신들이 선두에 나서서 경찰과 쌈질을 했다.[28] 예를 들어 미국에 고용된 조지아인 저격수들이 시위대와 경찰 양측에 발포하여 사태를 격화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러시아측 미디어들은 이런 가짜뉴스들을 대대적으로 유포하였다.# 이 가짜뉴스들에 대한 반박은 다음 사이트들을 참고하라.###[29] 시위 참가자를 적법한 절차를 거쳐 처형했어도 상당한 반발을 샀을 일인데, 가로수에 목매달아버렸다. 이런 짓은 패전 직전의 나치나 하던 행위다.[30] 이 당시 사망한 민간인 시위자 100명을 '천국의 100인(Небесная сотня)'이라고 부른다.[31] 심지어 푸틴이 오렌지 혁명안디잔 학살 당시 레오니드 쿠치마이슬람 카리모프에게 전화로 발포를 명령했다는 조지 소로스의 주장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야누코비치가 얼마나 생각이 없는 인간이었는지 알 수 있다.[32] 실제로 그 이전 4.19 혁명, 루마니아 혁명, 8월 쿠데타와 훗날 일어날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에서도 군이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며 독재자의 몰락을 유발한 바가 있다.[33] 출처: 주우크라이나대사관우크라이나 정세(2014년)[34] 사실 야누코비치는 친러 성향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콘크리트 지지층 덕분에 집권 말에도 과거 우크라이나에서는 높은 편이었던 2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기록할 수 있었다.[35] 축구팬들에겐 우크라이나 최강 축구 클럽인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연고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치안이 불안정해지면 샤흐타르같은 중상위권 강호가 유럽 무대에 나올 수가 없으므로 축구팬들의 이목이 이곳으로 집중되기도 했다. 참고로 샤흐타르의 홈구장 돈바스 아레나는 결국 경기장 일부가 포격당하고 현재 친러시아 반군에게 점령당했다. 따라서 샤흐타르는 임시로 연고지를 우크라이나 서부의 도시 리비우로 이전하게 된다.[36] 실제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어만 알아도 적어도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지장이 없다. 현재 러시아와 대립이 격화된 이후 러시아어가 공문서 등에서 우크라이나어로 점진적으로 대체되어 가는 추세다.[37] 안톤 데니킨은 제정 러시아의 장군으로, 적백내전 때 백군의 편에서 싸웠다. 데니킨은 생전 우크라이나 전선에 대한 서방국가의 개입에 반대하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를[38]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형제'라는 애국주의적 인식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를 주무르려는 러시아를 비난한 것. 워낙 감정적으로 민감한 소재인지라, 양국 시민들의 치열한 키배가 일어났다.[39] 이게 왜 악수인가 하느냐면, 티모셴코가 친서방 세력을 대표하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40] 2021년부터 미국 국무부 서열 3위인 정무차관이며, 2023년 7월부터는 서열 2위인 부장관 대행이다.[41] 한국어 번역본: 미국 외교의 거대한 환상. 이춘근(정치학자) 번역.[42] 미어야이머 본인의 표현임에 유의.[출처] 445p.미국 외교의 거대한 환상. - 존 미어샤이머[44]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도네츠크 출신 부인과 결혼하여 우크라이나에서 투자은행가로 살다가 내각 입문 직전 우크라이나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다.[45] 우크라이나의 모든 주들, 자치공화국, 그리고 특별시들을 합한 것보다 한 개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