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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9:10:19

몽케 칸

뭉케 칸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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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대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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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db1> 몽골 제국 제4대 대칸
몽케 칸 | ᠮᠣᠩᠺᠡ ᠬᠠᠭᠠᠨ
원 추존 황제
헌종 | 憲宗
파일:몽케 칸.jpg
출생 1209년 1월 10일
몽골 제국 막북 초원
사망 1259년 8월 11일 (향년 50세)
남송 조어산성 인근
(現 중화인민공화국 쓰촨성 허촨구)
재위기간 몽골 제국 대칸
1251년 5월 9일 ~ 1259년 8월 11일
(8년 1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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孛兒只斤(패아지근)
ᠪᠣᠷᠵᠢᠭᠢᠨ
몽케(Мөнх)
夢哥(몽가)
ᠮᠣᠩᠺᠡ
부모 부황 예종 보르지긴 툴루이
모후 현의장성황후 케레이트 소르칵타니
종교 텡그리교
묘호 헌종(憲宗)
시호 환숙황제(桓肅皇帝)
칸호 몽케 칸
夢哥汗(몽가한)
ᠮᠣᠩᠺᠡ ᠬᠠᠭᠠᠨ
언어별 표기 둘러보기 }}}}}}}}}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생애4. 가계5. 여담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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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제국의 제4대 대칸. 원나라 건국 후 받은 묘호헌종(憲宗), 시호는 환숙황제(桓肅皇帝). 휘는 몽케(夢哥). 몽케 칸의 시대에 몽골 제국은 최대 판도에 이르렀다.[1]

2. 언어별 표기

언어별 표기 파일:뭉케.jpg
한국어 몽케 칸
중국어 蒙哥汗
일본어 モンケ・カン
몽골어 ᠮᠥᠩᠬᠡ ᠬᠠᠭᠠᠨ
Мөнх хаан
영어 Möngke Khan

3. 생애

칭기즈 칸의 4남인 툴루이의 큰아들이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 일 한국의 창시자인 훌라구의 큰형이다. 젊은 시절에는 대금 전쟁과 서방 원정에 참여해 상당한 전공을 세웠다.

사촌인 귀위크 칸이 사망한 후 주치 가(家)의 바투와 제휴하여 쿠릴타이에서 칸의 자리에 추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모친 소르칵타니 베키의 정치력이 상당히 발휘되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아들 몽케의 칸 즉위를 위해 바투에게 오고타이 군대의 동태를 전달하는 등 주치 울루스와의 친밀한 관계를 다져나갔고 툴루이가 보르테 소생[2][3]의 아들 중 말자임을 골자로 툴루이 가(家)의 정통성[4]을 주장했다. 따라서 툴루이가 가장 많은 몽골족 인원과 재산을 받았는데[5], 이후 대칸이 된 오고타이는 툴루이 소유의 재산을 빼앗고자 한 것으로 추측된다.[6] 사실 대칸은 분배된 초지를 제외하고, 정주지역등 분배되지 않고 공동으로 관할하는 곳들을 직접 통제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오고타이는 야금야금 이를 어겼다.

바투는 귀위크 칸 사망 직후 툴루이 가(家)와의 연대감을 공공연하게 표현했다. 1250년 알라카마크에서 툴루이 가(家)와 주치 가(家)의 주도 아래 쿠릴타이가 개최되었으나, 반대 세력의 비판을 의식해 오난 - 케틀란 지역에서 즉위 후 쿠릴타이를 재소집한다. 1251년 여름 쿠데우 아랄에서 모든 가문이 참석한 공식적인 쿠릴타이가 개최되었고 몽골 4대 대칸으로 추대되었다. 쿠데우 아랄은 1206년 칭기즈 칸이 쿠릴타이를 연 곳으로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7]

파일:조어성 중국.jpg
충칭 외곽 허촨 (합천)구의 조어성

동생 훌라구로 하여금 중동 지방을 침공하게 하고, 동생인 쿠빌라이 칸으로 하여금 남송을 치게 했지만, 쿠빌라이가 독립적인 세력으로 움직이려는 모습을 보이자 쿠빌라이를 뒤로 물리고 본인이 쳐들어갔다가 성도를 비롯한 사천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8], 합주 조어성에서 왕견과 그 부장 장각의 방어에 막혀 병[9]을 얻었고 사망했다. 조어성 전투 참조. 남송의 격렬한 반격에 의해 화살을 맞고 조어성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몽케 칸이 이끌던 우익군의 장수들 다수가 남송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걸로 봐서 병사가 아닌 전사일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의 즉위 과정에서 몽케의 후견인 격이었던 바투와 귀위크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바투가 귀위크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이 부분은 그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와 연관이 있는데 그녀가 귀위크가 바투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나가자 바투에게 편지를 보내 경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위크가 병사한 일화 때문에 나온 주장이다.

기독교, 정확히는 경교를 믿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가 경교도[10]였지 몽케 그 자신은 기독교도가 아니었다.[11]

툴루이의 후손들이 오고타이 칸의 시대에 엄청난 핍박을 받은 탓에 툴루이 울루스는 제자 울루스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았다. 바투가 귀위크 칸 사후에 몽케를 칸으로 세운 까닭 역시 이 때문이었다. 바투는 '얘들은 너무 약하니까 내가 몽케를 칸으로 세우면 몽케는 내게 의지하느라 주치 울루스에 참견 못 하겠지' 정도 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12]

단 바투는 예전부터 귀위크를 위시한 오고타이[13], 차가타이 쪽과 사이가 안 좋았다. 서방 원정 도중에는 대놓고 귀위크가 술자리에서 깔본 일도 있었고 한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차가타이가 주치를 아버지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했던 일도 있다. 심지어 귀위크는 바투를 정벌하려는 찰나에 사망해버렸으니... 몽케의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도 한몫해서 이미 예전부터 이런 바투와 귀위크의 알력 다툼을 알고 따로 라인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툴루이 가문이 상당히 약했기 때문에 몽케는 즉위 후 곧바로 숙청을 행하게 했다.[14] 그리하여 몽케가 행한 숙청은 몽골 제국에서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집사에 의하면 최고위층의 77명이 사사되었다. 특히 칭기즈 칸으로부터 왕권을 영구히 부여받은 오고타이계가 당한 숙청이 대표적이었다. 전대인 귀위크 칸이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을 추구한 결과 오고타이계는 인망을 잃었다. 그래서 그들을 보호하려는 몽골 귀족들이 없었다.

이후 오고타이의 후손들 중 가장 잘 나간 인물이 바로 우구데이 울루스카이두였는데, 그나마 카이두도 차가타이 울루스의 바락이 몰락하기 전까지는 반 쿠빌라이파 가운데 최약체였다.

이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동안 칭기즈칸의 피를 이은 일명 황금 씨족을 공개적으로 숙청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는데, 몽케는 이 숙청을 단행하면서 권력 기반을 다지는 한편, 이 숙청을 뛰어넘을 업적을 이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에, 급하게 남송 정벌을 서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충분한 준비 없이 남송 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는데, 중간에 한 군을 이끌어야 하는 만주의 타가차르는 약탈 문제로 양양을 공격하다가 휙 돌아가버리고, 결국 자신이 좌천시켰던 동생, 쿠빌라이를 다시 부르는 등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사천 지방에서는 성도를 점령하고는 1년도 넘게 고전하게 된다.[15] 많은 장군들이 퇴각을 건의했음에도 듣지 않다가 결국 그 자신이 사망하게 된다.

그의 치세 때 프랑스의 사자 자격으로 온 사제가 있었고, 그는 몽케 칸에게 교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지만, 몽케 칸은 당연히 그런거 신경쓰지 않았고[16] 대신 기독교 사제들과 이슬람 교도들과 불교 승려들로 하여금 토론으로 서로 겨루어 보라고 시켰다. 이 세 종파들은 서로를 성공적으로 교화시키지 못했고, 결국엔 기독교인들이 마유주를 마시다 취해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고, 무슬림들은 질세라 쿠란을 외우고, 불교도들은 조용히 명상을 시작했다.[17]

그리고 이 프랑스인 사제가 돌아갈 때 몽케 칸은 신이 손에 다른 손가락들을 내려주셨듯이 인간에게도 다른 방식들을 내려주었다며 몽골인들의 포용성을 설파했다. 근데 중국의 다른 기록을 보면, 그 뒤에 스님에게 가서 "다른 종교가 손가락이라면, 불교는 손바닥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는 막내 동생인 아리크부카를 아껴서[18] 자기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가 죽은 후 계승 다툼에서 승리한 것은 생전 그가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했던 바로 아랫 동생인 쿠빌라이였다. 그의 아버지인 툴루이가 막내였고, 친 형제인 오고타이에게 제거되었던 것을 생각하면...[19] 심지어 방식도 비슷하게 죽었다. 참으로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가계

5. 여담

자신과 남에게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라 그의 치세에 몽골에는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21]

몽케의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는 몽골 역사 상 가장 강인했던 여걸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케레이트 부족 출신에, 칭기즈 칸의 후원자이면서 훗날 대립하다 죽은 옹 칸의 조카 딸로 전리품처럼 툴루이에게 넘겨졌다가 남편이 죽은 후에는 칸으로부터의 혼인 명령이 내려왔으나 거절, 수없이 정치 공작을 펼치고 힘을 기른 끝에 아들 넷을 전부 칸의 자리에 올렸으니…[22]

부각되지는 않지만 고려 입장에서는 최악의 적국 군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여몽전쟁 때 고려를 가장 심하게 공격했던 칸이 바로 이 인물이기 때문. 물론 여몽전쟁 자체가 30여 년 동안 진행되었을 만큼 상당히 장기전으로 흘러갔고 이전 오고타이 칸 시절 벌어진 공격 역시 제법 격렬한 편이었지만 몽케 칸 때 이루어진 파상공세로 인해 고려는 국력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23]

그 와중에 고려의 외교적 술수에 당한 적도 있다. 3차 침공 당시 고려에선 종친인 영녕공 왕준을 고종(고려)의 동생으로 속여서 인질로 보냈다. 이후에 민칭(閔偁)이란 자가 사실을 고발해서 영녕공이 고려의 왕자가 아니라 친척임을 알렸다. 이에 대해 영녕공은 어렸을 때부터 궁궐에서 자라 자기가 국왕의 친자가 아닌 줄은 몰랐다고 우겼으며 그와 함께 온 참지정사 최린도 '왕의 친자(親子)는 아니지만 왕의 사랑하는 자식(愛子)이니 그게 왕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우겼다. 당연히 몽케 칸은 당연히 믿지 않고 전에 고려에서 몽골에게 보낸 표문을 읽어 보았는데 정말로 표문에도 '친자식(親子)'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식(愛子)'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즉 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 몽케 칸은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 일에 대하여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24] 그래도 영녕공 왕준이 맘에 들었는지 자신의 딸을 시집보낸다. 그리고 홍복원이 왕준을 개로 칭하자 공주가 그 무례한 말을 몽케에게 전했고, 장사 수십 명을 보내 홍복원을 몽둥이로 때려죽인다.

죽기 전 조어성을 함락할 때 성내 군민들을 몰살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6. 대중매체에서

신조협려에서는 친히 몽골군을 이끌고 양양성을 공격하다가, 격전 끝에 신조대협 양과가 던진 돌에 맞아 죽는다. 물론 칭기즈 칸의 후예답게 양과의 첫 돌이 말의 엉덩이에 맞아 말이 울부짖으며 앞다리를 드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몸을 돌려 말 위에서 양과를 활로 쏘는 위엄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양과가 화살을 피하고 재차 돌을 던져 등짝에 명중시켜 그대로 전사하고 말았다.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무공을 익힌 무림고수, 그것도 천하오절에 속하는 최강자에게 맞선 것만도 대단한 거지만.[25]

신조협려 게임에서는 최종보스로 등장하는데, 원래 무예를 익힌 평범한(?) 인물이 쟁쟁한 고수들을 제치고 최종보스가 되다 보니 뭔가 아스트랄한 묘사가 이루어진다. 2번이나 변신하는데, 처음에는 말에서 내려서 벌크업을 하는 정도지만 두 번째는 꿇어앉은 몽케의 몸 위로 금색 영령이 튀어나와 폼을 잡는다.
파일:몬케.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게임 징기스칸 4에서는 파워업키트에서 추가된 시나리오 3(1229년 늑대 무리의 포효)에서 등장한다. 능력치가 정치 86, 전투, 84, 지모는 91을 찍는다. 평균 능력치가 동생 쿠빌라이를 능가한다. 특기는 농업, 상업, 건설, 외교, 돌격, 공성, 병과 적성 보병 B, 궁병 A, 기병 A, 수군 E이다. 기하학이나 외국어에 능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모 고득점을 받은 듯 하다. 시나리오 1에서도 징기스칸일 때 왕비로 아들을 낳고 이름을 투루이, 몬케, 흐라그, 쿠빌라이로 지으면 PK와 같은 능력치를 가진 아들이 생긴다. 하지만 쿠빌라이와 달리 이렇게 이름지은 몽케와 훌라구, 툴루이는 전용 얼굴이 없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선 템플 기사단으로 등장한다. 어쌔신 크리드 라스트 디센던츠 - 칸의 무덤(Tomb of the Khan)에 따르면 몽골에 템플러 지부도 만들었다. 동북아시아 지역에(몽골 제국 영향권이 미치는 곳) 기사단의 영향력을 강화시켰고 제국의 엘리트 계층에서 기사단원을 모집하였다. 남송의 암살자에 의해 사망했다고 한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어렸을 때는 몽골 제국 및 일 한국[26] 궁정에 있지만, 연도를 뒤로 돌려서 몽케 칸의 즉위기간으로 맞추면 원나라 황제로 중국에 있다.[27]

활협전에서는 작중의 히로인 중 하나인 하후란 루트+ 강호 은퇴 엔딩에서 은거무림인으로 살아가다 몽송전쟁에 참전한 주인공 조활에게 암기술을 당해 암살당하며, 몽골의 송 침략이 끝내 좌절당한다.

7. 둘러보기

원사(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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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아지근 홀필렬 패아지근 철목이 패아지근 해산
24·25·26권 「인종기(仁宗紀)」 27·28권 「영종기(英宗紀)」 29·30권 「태정제기(泰定帝紀)」
패아지근 애육려발육팔달 패아지근 석덕팔랄 패아지근 야손철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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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아지근 의린질반 패아지근 타환첩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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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내아팔적등전(來阿八赤等傳)」 130권 「철리등전(徹里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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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형 · 왕진 · 양걸지가 · 유통 · 악존 · 장자량 · 당경 · 제영현 · 석천록 · 유빈 · 조유
153권 「유민등전(劉敏等傳)」
유민 · 왕즙 · 왕수도 · 고선 · 왕옥여 · 초덕유 · 석천린 · 이방서 · 양환 · 가거정
154권 「홍복원등전(洪福源等傳)」 155권 「왕세현등전(汪世顯等傳)」 156권 「동문병등전(董文炳等傳)」
홍복원 · 정정 · 이진 · 석말안지 · 알지리 · 정온 왕세현 · 사천택 동문병 · 장홍범
157권 「유병충등전(劉秉忠等傳)」 158권 「요추등전(姚樞等傳)」 159권 「송자정전(宋子貞等傳)」
유병충 · 장문겸 · 학경 요추 · 허형 · 두묵 송자정 · 상정 · 조자량 · 조벽
160권 「왕반등전(王磐等傳)」
왕반 · 왕악 · 고명 · 이치 · 이창 · 유숙 · 왕사렴 · 이겸 · 서세륭 · 맹기 · 염복
161권 「양대연등전(楊大淵等傳)」 162권 「이홀란길등전(李忽蘭吉等傳)」
양대연 · 유정(劉整) 이홀란길 · 이정(李庭) · 사필 · 고흥 · 유국걸
163권 「이덕휘등전(李德輝等傳)」
이덕휘 · 장웅비 · 장덕휘 · 마형 · 정사렴 · 오고손택 · 조병
164권 「양공의등전(楊恭懿等傳)」
양공의 · 왕순(王恂) · 곽수경 · 양환 · 양과 · 왕구 · 위초 · 초양직 · 맹반린 · 상야 · 이지소
165권 「장희등전(張禧等傳)」
장희 · 가문비 · 해성 · 관여덕 · 조갑랄 · 주전 · 공원 · 주국보 · 장립 · 제병절 · 장만가노 · 곽앙 · 기공직 · 양새인불화 · 선비중길 · 완안석주
166권 「왕준등전(王綧等傳)」
왕준 · 수세창 · 나벽 · 유은 · 석고산 · 공언휘 · 채진 · 장태형 · 하지 · 제병절 · 맹덕 · 장영실 · 석말구구 · 초정 · 번즙 · 장균 · 단신저일 · 왕석랄 · 조굉일
167권 「장입도등전(張立道等傳)」
장입도 · 장정진 · 장혜 · 유호례 · 왕국창 · 강욱 · 장초 · 여질 · 담자영 · 왕운
168권 「진우등전(陳祐等傳)」
진우 · 유선 · 하영조 · 진사제 · 진장경 · 조여표 · 요천복 · 허국정
169권 「하인걸등전(賀仁傑等傳)」
하인걸 · 가석랄 · 유합라팔도로 · 석말명리 · 사중온 · 고휴 · 장구사 · 왕백승
170권 「상문등전(尙文等傳)」
상문 · 신도치원 · 뇌응 · 호지휼 · 왕이용 · 창사문 · 장소 · 원유 · 장방 · 학빈 · 고원 · 양식 · 오정 · 양덕규
171권 「유인등전(劉因等傳)」 172권 「정거부등전(程鉅夫等傳)」
유인 · 오징 정거부 · 조맹부 · 등문원 · 조원용 · 제이겸
173권 「최빈등전(崔斌等傳)」 174권 「요수등전(姚燧等傳)」
최빈 · 최욱 · 엽이 · 연공남 · 마소 요수 · 곽관 · 협곡지기 · 유갱 · 야율유상 · 학천정 · 장공손
175권 「장규등전(張珪等傳)」
장규 · 이맹 · 장양호 · 경엄
176권 「조백계등전(曹伯啟等傳)」
조백계 · 이원례 · 왕수 · 왕의(王倚) · 유정(劉正) · 사양 · 하약우 · 조사로 · 유덕온 · 울지덕성 · 진기종
177권 「장사명등전(張思明等傳)」 178권 「양증등전(梁曾等傳)」 179권 「하승등전(賀勝等傳)」
장사명 · 양원규 · 장승 · 장몽해 · 진호 양증 · 유민중 · 왕약 · 왕결 · 송도 · 장백순 하승 · 양타아지 · 소배주
180권 「야율희량등전(耶律希亮等傳)」 181권 「원명선등전(元明善等傳)」 182권 「장기암등전(張起巖等傳)」
야율희량 · 조세연 · 공사회 원명선 · 우집 · 게혜사 · 황진 장기암 · 구양현 · 허유임 · 송본 · 사단
183권 「왕수성등전(王守誠等傳)」 184권 「왕도중등전(王都中等傳)」
왕수성 · 왕사성 · 이호문 · 패출로충 · 이형 · 소천작 왕도중 · 왕극경 · 임속가 · 진사겸 · 한원선 · 최경
185권 「여사성등전(呂思誠等傳)」 186권 「장정등전(張楨等傳)」
여사성 · 왕택민 · 간문전 · 한용 · 이직 · 개묘 장정 · 귀양 · 진조인 · 성준 · 조감 · 장저
187권 「오고손양정등전(烏古孫良楨等傳)」 188권 「동단소등전(董摶霄等傳)」
오고손양정 · 가로 · 녹로증 · 공사태 · 주백기 · 오당 동단소 · 유합랄불화 · 왕영 · 석말의손
189·190권 「유학전(儒學傳)」
조복 · 장수 · 김이상 · 허겸 · 진력 · 호일계 · 황택 · 한택 · 동서 · 안희 · 호장유 · 웅붕래 · 대표원 · 모응룡 · 정저손 · 진부 · 동박 · 양재 · 유선 · 한성 · 오사도 · 주문규 · 주인영 · 진려 · 이효광 · 우문공량 · 합랄로백안 · 섬사
191·192권 「양리전(良吏傳)」
담징 · 허유정 · 허즙 · 전자 · 복천장 · 야율백견 · 단직 · 암도랄 · 양경행 · 임흥조 · 관음노 · 주자강 · 백경량 · 왕간 · 노기 · 추백안 · 유병직 · 허의부
193·194·195·196권 「충의전(忠義傳)」
이백온 · 석규 · 유합랄발도 · 임지 · 야율특말 · 보바르 · 합랄보화 · 유천부 · 소경무 · 장환 · 이보 · 이제 · 곽가 · 저불화 · 주희동 · 변침 · 교이 · 안유 · 왕사원 · 양박 · 조련 · 손총 · 석보 · 성소 · 양승 · 납속랄정 · 백안불화적근 · 번집경 · 전보암철리 · 주당 · 섭병 · 유경손 · 유술조 · 계완택 · 추려 · 패라첩목아 · 팽정견 · 왕백안 · 유준 · 타리불화 · 조야준대 · 진군용 · 복리아돈 · 조해 · 위중립 · 보안불화 · 민본 · 배주 · 조홍의 · 정옥 · 황후 · 백첩목이 · 질리미실 · 박새인불화 · 정호례
197·198권 「효우전(孝友傳)」
왕윤 · 곽도경 · 소도수 · 곽구구 · 장윤 · 전개주 · 영저구 · 필야속답립 · 번연 · 유덕천 · 곽회 · 공전 · 장자기 · 진걸아 · 양일 · 장본 · 장경 · 원선 · 조육 · 호광원 · 진소손 · 조일덕 · 왕사총 · 철철 · 왕응초 · 정문사 · 왕천 · 곽전 · 양호 · 정문충 · 소경조 · 호탁 · 손수실 · 이자경 · 종기 · 조영 · 오호직 · 여병 · 서옥 · 윤신 · 유정양 · 유통 · 장왕구 · 장사효 · 두우 · 장수 · 손근 · 장공 · 자여도 · 왕용 · 황윤 · 석명삼 · 유기 · 유원 · 축공영 · 진사효 · 강겸 · 호반려 · 왕사홍 · 하종의 · 합도적 · 고필달 · 증덕 · 근병 · 황도현 · 사언빈 · 장소조 · 이명덕 · 장집 · 위경익 · 탕림 · 손억 · 석영 · 왕극기 · 유사경 · 여우 · 주락
199권 「은일전(隱逸傳)」
두영 · 장특립 · 두본 · 손철 · 하중 · 무각
200·201권 「열녀전(列女傳)」
왕추추 · 진로화진 · 마영 · 조옥아 · 풍숙안 · 조왜아 · 주숙신 · 갈묘진 · 장의귀 · 이동아 · 탈탈니 · 주면가 · 귀가 · 이지정 · 채삼옥 · 범묘원 · 서채란 · 우숙정 · 진숙진 · 야산홀도 · 여언능 · 반묘원 · 유취가 · 나묘안 · 이새아 · 도종원 · 안정동
202권 「석로전(釋老傳)」 203권 「방기전(方伎傳)」
팔사파 · 구처기 · 전절 전충량 · 근덕진 · 장강 · 이호 · 손위 · 아로와정 · 역사마인 · 아니가
204권 「환자전(宦者傳)」 205권 「간신전(奸臣傳)」
이방녕 · 박불화 아합마 · 노세영 · 상가 · 철목질아 · 합마 · 삭사감
206권 「반신전(叛臣傳)」 207권 「역신전(逆臣傳)」
이단 · 왕문통 · 아로휘첩목아 철실 · 패라첩목아
208·209·210권 「외이전(外夷傳)」
고려 · 탐라 · 일본 · 안남(진조) · 면국 · 점성 · 섬국 · 유구 · 삼서
(1) 121권의 속불태(速不台)와 122권의 설불태(雪不台)는 동일인물이므로 122권에서는 생략한다.
(2) 131권의 완자도(完者都)와 133권의 완자도발도(完者都拔都)는 동일인물이므로 133권에서는 생략한다.
(3) 150권의 석말야선(石抹也先)과 152권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은 동일인물이므로 152권에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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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통일 몽골 제국의 마지막 대칸을 쿠빌라이 칸으로 본다면 쿠빌라이 치세가 최대 판도이다.[2] 칭기즈 칸에게는 여러 부인들이 있었지만, 첫째 부인인 보르테의 자식들만이 재산을 받았다. 딸들도 몽골에 복속된 오이라트, 위구르 등의 수장과 혼인을 해서 각 세력들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다. 물론 칭기즈 칸이 총애하던 부인 중 일부는 몇몇 을 분배받기도 하였다.[3] 정확하게는 몽골의 분배방식에 따라서 몽골의 초지와 대부분의 인원들은 막내 툴루이가, 서쪽의 가장 먼 초지에서부터 일부 인원을 받은 형태로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가 받았고, 동쪽은 자신의 동복형제들에게 분배하였다. 여기에 보르테 소생의 딸은 혼인한 지역에 공동 통치자가 되었고, 보르테는 칭기즈 칸의 정실로써 이미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밑에 다른 일부 아내들이 몇몇 강을 받았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아들들에게 분배된 것은 초지였고, 정주 지역들은 공동 통치 구역으로 그곳에서의 수익은 예케 몽골 울루스 전체의 수익이었다. 그러나 우구데이가 대칸에 오르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게 하는 과정 속에서 우구데이 가(家)의 독주와 공동재산 사유화는 점차 주치 가(家), 차가타이 가(家), 툴루이 가(家)에서도 시행되면서 1차적으로 우구데이 가(家)의 귀위크 사후 툴루이 가(家) 몽케의 즉위와 주치 가(家)의 독립적인 권한 보유를 불러왔고, 이후 쿠빌라이아리크부카와의 대립 속에서 서부의 3가(家)가 독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4] 당시 몽골족의 재산 분배는 막내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지역을 받고, 맏이가 가장 먼 지역을 받았다. 칭기즈 칸도 몽골제국 영토 중 몽골초원에서 서쪽으로 가장 먼 킵차크 초원에서부터 순서대로 주치-차가타이-오고타이에게 분배하였고, 막내인 툴루이가 몽골초원을 받았다. 그외에 동쪽의 만주지역은 동복동생 3명에게 분배하였다.[5] 이때문에 칭기즈 칸 사후에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를 선출하기 전까지는 툴루이가 대칸을 대리하였다.[6] 카라코룸의 위치 자체도 툴루이의 분배지역으로 보이며, 우구데이 시절 동원된 병력도 대부분 툴루이의 관할이였고, 툴루이 사후 소르칵타니-베키를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키고자 한 것에서도 그렇다.[7] 몽케가 바투의 지원을 받아서 카간이 되었기 때문에, 바투의 울루스는 독립적인 위치를 갖게 된다.[8] 여기서 왕덕신이 이끄는 군대가 선봉으로 활약했다.[9] 이질이라고 추측된다.[10]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11] 몽케는 동복 형제들과 달리 텡그리 신앙을 숭배했던 걸로 알려져 있다.[12] 귀위크 칸의 시대부터 바투가 잘 나가서 반독립적인 칸국을 세웠다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는데, 이는 몽케 시대의 일을 소급한 것이다. 단, 몽케 시대에도 바투의 권한은 해당 울루스 소속의 유목민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하위 칸들의 권력이 정착민들에게도 행사된 것은 쿠빌라이 칸 시대 이후의 일이다.[13] 삼촌 오고타이 칸 자체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는데 그 후손들과의 사이는 나빴다. 귀위크는 오고타이의 아들이다.[14] 복수의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 아버지인 툴루이의 일도 일이고, 큰 아버지인 오고타이는 아예 어머니인 소르칵타니 베키를 자기 아들인 귀위크와 혼인시키려고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가 이 순간을 위해 이를 갈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15] 이게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쪽이 엄청나게 더울 뿐 아니라 지형도 험난한 곳이라 몽골군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지형인데다가, 수비군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고, 돌아간 타가차르 대신 다시 데려온 쿠빌라이는 아주 느릿느릿 진군해서 몽케를 고립시켜버린다.[16] 당시 몽골 제국은 세계 최강이라 봐도 좋을 정도였다.[17] 당시 몽골의 관습에선 싸움이 끝날 때 마다 마유주를 한 잔씩 마시는 것이 있었는데, 그 관습에 따라 토론이 한 회전씩 끝날 때마다 마유주를 한 잔씩 마셨고, 기독교인들이 먼저 취해버리는 바람에 정상적인 토론이 불가능해지자, 기독교도들은 찬송가를 불러대고, 불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은 명상과 코란 암송으로 대응한 것.[18] 심지어 어머니조차도 무척 아꼈다.[19] 원조비사에 따르면 금나라가 멸망한 후 오고타이가 죽을 병에 걸리자 툴루이는 자기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오고타이를 살려 달라고 하늘에 기도했고, 얼마 후 오고타이가 살아나자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툴루이가 한때 대칸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어서 사실은 오고타이와 퇴레게네, 테무게 옷치긴에게 모살당한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20] 영녕공 왕준과 결혼한 공주로 보인다.[21] 이런 점은 큰 아버지인 차가타이를 쏙 빼닮았다.[22] 아리크 부카도 어쨌든 칸은 칸이다. 오히려 정통성 면에서는 이쪽이 쿠빌라이보다 훨씬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23] 몽케 본인이 칸 위에 오른 지 2년 째인 1253년부터 공격을 재개하였고, 세상을 떠난 1259년까지 무려 5번씩이나 쳐들어왔다. 특히 1254년 한 해 동안 이루어진 침략이 고려에 가장 큰 피해를 입혔는데 포로만 해도 무려 20만 6천 8백여 명에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고려사에 나올 만큼 엄청났다.[24] 고려사 열전 12권 최유청 중 부 최린 부분[25] 2006년 드라마판에서는 아예 양과가 날린 창에 멧돼지처럼 꿰뚫리고 창이 그대로 땅에 수직으로 박히면서 그 위에 대롱대롤 매달리는 굴욕적인 최후를 맞았다.[26] 게임에서 툴루이는 1227~1234년 사이에 일 한국의 초대 군주로 있다.[27] 크킹에서 중국 왕조는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금나라, 원나라가 구현됐다. 남송은 없어서 북송에서 금나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