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박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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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치인 박영선의 생애를 기록한 문서.2. 학창 시절
1960년 1월 22일,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신전리에서 교사인 부모님의 슬하 2남 1녀 중 첫째로 출생했다. 부친은 창녕 토박이 출신이었고, 모친은 이북 출신으로 6.25 전쟁 때 삼팔선을 넘어 남한으로 피난와서 부산, 마산을 거쳐 창녕에 정착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박영선이 어렸을 때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것을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며 서울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박영선을 데리고 먼저 서울로 상경했고, 아버지는 나중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명절과 방학 때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지냈다고 한다. 박영선의 어머니는 북녘 고향이 그리울 때면 종종 강화도 마니산 중턱에 올라 북한을 바라보며 망향가를 불렀고, 그런 어머니를 보며 실향민과 북한에 대해 깊은 공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어머니의 등에 업혀 서울로 올라온 후 당시 학비가 비싸서 부자들이 다니기로 유명했던 사립 예일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예일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덕성여자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중학생 시절 방송국에 갔다가 가수 이장희를 보고 매료되어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노래를 부르러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수도여자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방송반에 들어 갔다. 당시 담임이 방송반 하면 좋은 대학 못 간다고 만류했지만, 늦바람이 들어 방송반에 들어갔다고 한다. 수도여고 후배들에 따르면 교사들이 방송반 들어가면 좋은 대학 가지 못한다면서 박영선을 그 사례로 들었다고 한다. # 당시 실제 방송국 PD들이 수도여고 방송반을 자주 찾아와 도와주었고, 덕분에 현직 방송국 PD들과 인연을 쌓을 수 있었고 실제로 고교 시절 MBC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에 가서 편지를 읽어주는 일을 했다고 한다. # 박영선은 본인의 학창 시절에 대해 "학창 시절 놀기도 많이 했고 공부도 잘 못했지만 결국 역전 드라마를 쓰고 있는 게 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다.
1978년 3월, 상명여자사범대학[1] 불어교육과에 입학하여 1년간 다니다가 1979년 3월, 경희대학교 문리과대학 지리학과[2]에 편입학하여 1982년 2월 졸업했다. 경희대에 들어가서도 방송반에 들어가 활동했으며, '퐁퐁 4중창단'을 만들었고, 작곡가 강인원이 곡을 써준 덕분에 1979년, 4중창단으로 TBC '제1회 전국대학축제경연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
박영선은 대학 시절 명문대에 입학하지 못했다는 사실로 큰 좌절감에 싸여 지낸 시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아버지가 "그딴 학교 다녀서 뭐하냐?"라며 입학금만 내주고 등록금도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민주당계 정당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진출한 후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버지가 반대해서 하지 못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정계에 투신했다고 말한 바 있다.
문재인이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대통령과 동문임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문재인 저격수를 자처하며 대표적인 반문 혹은 비문재인 정치인으로 꼽혔었다. 서울특별시장 선거를 준비하면서는 자신의 전공 분야 도시인문지리학도 부각하고 있다.
3. MBC 시절
△ 박영선과 손석희가 MBC 뉴스를 함께 진행할 때 사진
1981년 KBS에 아나운서로 합격, 춘천방송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군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춘천에서 하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출퇴근을 해야 했고, 1982년 11월에 지방 근무가 없는 MBC에 시험을 봐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아나운서로 입사했지만 이후 보도국으로 발령이 나며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입사 5개월 만인 1983년부터 MBC 뉴스데이트를 맡았다. 1984년 10월부터 1985년까지 여기는 MBC의 진행을 맡았다. 1985년에 외교관과 결혼을 하고 나서 미국으로 떠났지만[3] 6개월만에 이혼한 후[4] 1987년 귀국했다.
이후 다시 MBC에서 아나운서, 기자로 일했다. 90년대 초반에는 MBC 마감뉴스의 앵커직을 맡았고 1993년부터 1995년까지 MBC 뉴스와이드의 앵커직을 맡았다.[5] 그러나 MBC 아침뉴스 앵커시절, 김문수 의원을 인터뷰하면서 면전에서 "변절자 아니십니까"라고 말해 논란이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아침 식사 중 이 장면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이후 국제부로 자리를 옮기며 앵커에서 물러나게 되었다.[6]
하지만 이후 전화위복의 계기가 오는데 바로 김영삼 대통령이 '여성 인력'을 강조하면서 각 방송국에 여성 특파원을 발굴하라고 지시했고, 마침 국제부로 있던 박영선이 미국 LA 특파원으로 발령나게 되었다. 이후 LA 특파원으로서 미국영화협회 출입증을 받아 헐리웃 출입기자로 활동하게 되면서 MPAA 주최 각종 행사와 할리우드 영화사 취재를 전담하게 되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취재하기도 했고, 스티븐 스필버그, 스티븐 시걸, 조디 포스터, 클린트 이스트우드, 알 파치노, 토미 리 존스, 메릴 스트립 등을 취재하는 등 헐리웃 유명 배우나 감독들과 인터뷰하기도 했다.[7] 뉴스데스크 40주년 특집 방송에서 배우와 유명 감독들을 대면하면서 알게 된 그 이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특파원 시절인 1997년 3월 미국에서 재혼했다. 정동영이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1997년에 다시 귀국하여 MBC 뉴스센터 500의 진행을 맡았다가, 1998년 9월 19일부터 1999년 12월 26일까지 MBC 뉴스데스크의 주말 앵커직을 맡았으며, 2000년에 피자의 아침 - MBC 아침 뉴스 앵커 직을 맡았다. 2000년대 초에는 '경제매거진'의 진행을 맡으면서 MBC 보도국 경제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증권시황을 보도하는 모습[8]
1999년에는 방송장비 고장으로 방송사고를 겪기도 했다. 옆의 남성 앵커는 권재홍 전 MBC플러스 사장이다.
4. 초·재선 시절
2004년 초 직장 선배였던 정동영의 권유로 정계 입문을 결심, MBC에서 퇴사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공천받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때문에 속칭 DY계, 정동영계로 분류되었으며, 당시 주류인 친노계와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었다.2007년 대선 때 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측의 최종 공격수 역할을 맡았다. 농담이 아니라 정동영 본인이 박영선을 '최종병기'라고 표현했다.[9] 특히 BBK 관련 의혹 제기에 앞장섰다. 이때부터 이명박과의 극도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에 대놓고 "저 똑바로 못 보시겠죠?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고 노골적으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고, 이 말을 듣고 이명박은 박영선에게 즉석에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하면서 맞받아치기도 했다.#[10]][11]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구로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12] 18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 초기에 치러진 선거로 당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였지만, 서울에서 야당의 세가 강한 지역으로 꼽히는 구로였고, 기존에 박영선의 대중적 인지도가 한나라당의 고경화 후보와는 넘사벽이었기에 7%의 득표율 차이로 당선되었다.
박영선은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서울특별시장 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당내 경선에서 나름 거물인 천정배(경선 2위), 추미애(3위), 신계륜(4위)를 꺾고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안철수의 양보로 지지율이 5%에서 40%대로 수직 상승하면서 결국 야권 단일화 경선에서 무소속 정치 신인 박원순에게 패하는 이변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2012년 1월 15일 열린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15.74%를 득표하면서 3위로 최고위원직에 당선되었으나 # 당시 민주통합당은 기존 민주당 계파 빅 3인 정동영, 손학규, 정세균에 더해 공천과정에서 홀대를 받아왔던 친노 출신들, 혁신과 통합에 가담했던 시민단체 출신들까지 공천 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공천을 둘러싼 당내 계파 싸움으로 두달만인 2012년 3월 21일 최고위원직을 사퇴하고 말았다. 사퇴 기자회견에서 박영선은 "공천과정에서 국민이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지 못했기에 책임을 통감했다. 그리고 통감했으면 책임을 지는 것이 정치인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당 지도부 일원으로서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국민 여러분께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13]
4.1. 3선 이후
공천을 둘러싼 내홍으로 최고위원을 사퇴하고 말았지만, 이어진 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61.9%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얻어 당선되었다. 그리고 19대 국회 전반기 법제사법위원장을 맡았다. 이 때 국감장에서 윤석열과 처음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14] 이후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첫 여성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초강경파에서 온건파로 성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김한길 & 안철수 공동대표 체제가 2014년 7.30 재보선 참패로 무너지면서 '국민공감혁신위원회'라고 하는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당대표 권한 대행을 맡게 됐다.그러나 이 와중에 새누리당이 제시했던 세월호 특별법 법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친노 야권 지지자들에게 촉망받던 정치인에서 공공의 적으로 한순간에 이미지가 떨어져 버렸다. 결국 박 위원장은 비대위원 한 명도 인선해보지 못하고 원내대표직과 비대위원장직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 이미지는 20대 국회가 열린 뒤에도 한동안 계속됐었다. 자신의 뒤를 이어 비대위원장직을 맡을 후임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이상돈 교수와 진보적인 성향의 안경환 교수를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또 당내에서 큰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15] 정계에 입문한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한 박영선은 대외적인 연락을 모두 끊고 칩거하며 탈당을 고심하다가 결국 당에 잔류하기로 하고 당권에서 내려왔다.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당시 대구 입성에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던 김부겸에게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라고 권유하기도 했었지만 이렇다 할 특별한 활동 없이 화제의 바깥으로 비켜나 있었다.
2.8 전당대회에서 당선된 문재인은 당시 새누리당 당대표인 김무성과 선거법 협상을 시작한다.# '선거 룰' 핑퐁게임…"내꺼부터 받아줘" 문재인은 절충된 입장으로 대선 경선은 '국민이 뽑은 대선후보'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으나 총선 등은 현역 의원의 인지도와 선거활동의 유리함이 지나치게 보장된다는 이유로 비판적이었다. 김무성은 박영선과 비슷한 입장으로 모든 선거에 오픈 프라이머리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오픈 프라이머리 반대자들은 경선시 반대 지지층의 역선택을 부작용의 예로 들었는데 이에 대해 박영선과 나경원은 동시 오픈 프라이머리를 제시한다.# 김무성은 총선에서도 동시 오픈 프라이머리를 주장하나 민주당 혁신위와 문재인이 조건부 협상 의사를 밝히고 이를 김무성이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된다. 당원 중심 경선은 민심을 잃어가는 정당에서 당내 핵심세력만의 공천 잔치로 변질될 수 있고, 전략공천 역시 당권을 가진 지도부의 내 사람 꽃기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에 박영선은 공천 혁신 방안으로 오래전부터 오픈 프라이머리를 주장했지만, 새누리당도 아니고 자당 대표에 의해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못했다. 박영선은 협상이 결렬되자 문재인과의 갈등이 가속화된다.
2015년 7월 박영선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문재인의 당 대표 출마를 만류했다고 밝혔으며 문재인의 리더십을 비판하기도 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비문~반문 인사들[16]이 탈당하여 국민의당을 만들고 있을 무렵 박영선도 국민의당으로 갈 것이라는 설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표가 김종인 前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선거대책위원장 겸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데려와 전권을 이양하면서, 더불어민주당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비례대표 공천 문제로 당이 한 번 큰 위기에 휩싸이자 다른 비대위원들과 함께 책임을 지고 일괄 사퇴했다. 20대 국회 개원 이후 기획재정부 등을 관장하는 기획재정위원회로 배정받아 재벌 개혁 문제를 다루었다.
5. 2017년 대선 이후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내 경선 당시 박영선은 안희정 충남도지사 측 캠프에 합류하여, '문재인 저격수'를 자처하며 맹활약했었다.본래 박영선은 열린우리당 시절부터 정동영계를 대표하는 의원이자, 동시에 비노계였다. 열린우리당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된 이후에도 비노 그룹의 가장 앞 줄에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문재인 전 대표와도 2014년 이후 꽤 오랫동안 아주 불편한 관계여서 대표적인 비문재인 내지는 반문 정치인으로 손꼽혔다. 박영선 의원과 문재인 전 대표는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이후 문재인 전 대표가 본격 정계에 투신한 후에는 대선 기획위원, 상임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2014년 세월호 사태 및 이상돈 비대위원장 영입 파동 등을 거치며 친노 측과 척을 지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였던 박영선은 세월호 특별법 협상 과정에서 친노 세력이 박영선에게 맹공을 퍼부으면서 박영선은 정치 경력에서 치명상을 입게 되었고, 결국 원내대표를 사퇴하고 말았다. 그걸로도 모잘라 후임 선정을 놓고 당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당시 궁지에 처한 박영선은 이상돈을 비대위원장으로 영입을 추진했다. 이에 관하여 문재인 전 대표 및 친노 중진들과 모두 미리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라는 게 박영선 의원 측 설명이다. 하지만 돌연 친노 인사들이 박근혜를 도운 적장을 비대위원장을 앉힌다니 말이 되느냐며 박영선 의원을 맹공격했다. 이렇게 이상돈 영입 파동으로 친노 세력에게 부관참시를 당하자 탈당설이 나돌았고, 실제로 박영선 본인도 탈당을 심각하게 고민했었다고 한다. 결국 탈당을 하지는 않았지만 당권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한동안 칩거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문재인 대표는 삼고초려 끝에 김종인 전 의원을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김종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박근혜 당선 1등 공신이었다. 이에 박영선 의원 측이 폭발했던 것이다 박영선 측은 "김종인은 되고 이상돈은 안 된다는 친노의 어거지 논리가 어딨냐"며 격분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결국 문재인 및 친노 측에 대한 치유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감정의 골이 생겼다는 분석이다.
2017 대선에서 박영선은 안희정 측 공격수로서 예전에 이명박 전 대통령을 몰아부쳤던 것 못지 않게 문재인 후보 측을 몰아세웠다. 문재인 후보 측에 대해 "지속적인 말바꾸기", "정치적 지향점이 모호하다", "이중잣대", "문 후보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다 떠났다", "문재인 측 친노는 '싸가지 없는 친노'", "문재인 대세론은 없다"는 등 강도 높은 맹공을 이어갔다.
하지만 결국 문재인 전 대표가 당내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최종 승리하였고, 이에 박영선은 이언주처럼 탈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문재인 후보가 박영선을 직접 만나 도움을 요청하였고 박영선이 문재인이 내민 손을 잡은 뒤에는 문재인 캠프에 합류하여 공동선대위원장을 맡는 등, '문재인 후보의 당내부 통합의 상징'이 되었다.
이에 친문 지지층 사이에서조차 '대표 비문재인(반문)이 이젠 친문 좌장이 됐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17] 친문 지지층은 '열심히 뛰어줬으니 고맙긴 한데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변하니 좀 어안이 벙벙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좋게 보면 문재인이라는 인물을 꾸준히 지켜보며 이전에 가졌던 생각이나 입장이 바뀐 것일 수 있다. 반면 계산적으로 해석한다면 문 대통령의 굳건한 지지층을 인정하고 허리를 숙인 정치적 판단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에 에콰도르의 레닌 모레노 대통령 취임식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일부 친문 지지층은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박영선을 에콰도르로 보낸 것을 일종의 토사구팽처럼 여기며 통쾌해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게 볼 것이 아니다. 박영선은 에콰도르의 새 대통령 취임을 축하해 주려고 문재인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에콰도르에 간 것이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2007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를 대리하여 문재인 당시 정무특보를 특사 자격으로 보내서 에콰도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게 한 바 있다. 문재인으로선 박영선에게 상당한 명예를 안겨다 준 셈인 것이다.
여기에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군에 박영선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 등 박영선의 입지가 상당히 좋아지자, '박영선이 친문 좌장처럼 행동한 이유를 알겠다'라며 쓴웃음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 위에 언급한 '정치적 판단'이 열매로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이런 모습들은 마침 국민의당으로 갔다가 이미지가 악화되고 향후 정치 진로에도 사실상 먹구름이 끼었다고 평가를 받는 이언주와 참 비교되는 모습이라 박영선과 이언주를 비교하는 언주야 패러디도 많이 나오고 있다. 또한 박영선이 공식 행사에 참석해서 후한 대접을 받거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는 기사나, 이언주가 정치적으로 어려워지는 일을 다룬 기사를 보면 높은 확률로 '언주야'/'언니는'/'행복하단다' 식의 댓글 놀이가 주르륵 뜬다.
이후 2018년 6.13 지방선거 때 박영선이 서울시장 경선에 나올 거라는 설이 돌았다. 시사IN과의 인터뷰를 보면 스스로도 서울시장 출마에 관심이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 3선 출마에 마음을 굳혔다는 이야기가 있으므로 어찌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통 현역 자치단체장이 연임을 천명한다면 당에서도 경선을 진행하지 않고 해당 자치단체장을 추대하기 때문이다. 다만 박원순은 만약 서울시장 경선이 치러진다면 마다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시사IN 인터뷰에 따르면 박 시장 스스로도 박영선과 로마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중 대뜸 "페어 플레이를 하자"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
그 후 박원순 시장도 3선 도전으로 노선을 결정했고, 박영선도 공식 출마 선언만 안 했을 뿐, '영선아 시장가자' 등의 민생 행보를 보여주는 등 본격적인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위한 활동에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박영선은 영등포구에 있는 꿈이룸학교에서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2018년 3월 18일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후 당내 경선에서 박원순 시장, 우상호와 경쟁을 하였는데 결과는 박원순 시장의 승리였다. 경선 결과가 나온 후 이를 승복하고, 이후에는 지방선거의 각 지역 후보들을 지원하였다. 여기서 극한의 줄타기 능력을 선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낙향한 후 경남 양산으로 돌아올 것이니 도지사와 시장을 민주당으로 해야 한다든가, 그리고 바로 자기 지역구로 올라가 유세를 펼친다든가. 이러한 면모 때문에 친문 지지층에서는 이전부터 불려온 조롱 반 경외반의 의미인 '친문좌장'이라는 별명이 더 유행했다.
2018년 8월 25일 열릴 예정인 8.25 전당대회에 불출마하겠다고 7월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20대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2019년 1월 손금주, 이용호의 입당을 불허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결정의 대해 "순혈주의는 역사적으로 보면 개방과 포용에 늘 무릎을 꿇었다"며 "로마가 천년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힘도 곧 개방과 포용 그리고 공정이었다"라고 비판하였다. 앞서 우상호 또한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 송영길은 신한울 3, 4호기 건설 재개를 주장했고, 우상호, 박영선은 손금주, 이용호의 입당 허용을 주장하는 등 당내 비문계 의원들이 잇따라 당의 방침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는지라, 친문과 비문 간의 갈등이 심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
6. 중소벤처기업부장관
2019년 3월로 예정된 문재인 정부의 개각에서 법무부장관 후보로 유력시 되었다.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맡은 경력으로 법률 비전문가라는 비판을 피해 나갈 예정이었다. 법무부장관에 취임한다면 사개특위 위원장 자리는 사퇴할 것으로 보인다. #2019년 3월 8일 대규모 개각에서 중소벤처기업부장관에 내정되었다. 벤처기업 분야 비전문가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당시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도 높았으며, 마침 지역구인 구로구 을과도 관계가 깊은 부서이기도 해 큰 문제는 없었다.[18]
박영선 본인이 야당 시절 청문회에서 국무위원 후보자들에게 강도높은 발언들을 하기도 했었고, 개각 국무위원 후보자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기에, 박영선에 대한 청문회도 강도는 높았다. 하지만 오히려 박영선은 특유의 역공을 펼쳤다. 청문회 과정에서는 후보자인가 청문위원인가 싶을 정도의 공격력을 보여줬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여당 지지층에서는 지지를 보냈지만, 야당 지지층에서는 오만불손, 내로남불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법사위원장 시절 황교안 당시 법무부장관에게 김학의 사건 관련 CD를 보여주면서 경고했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역공을 취하며 본인에게 제기된 의혹을 비켜나가려 했다.# 박영선은 황교안을 따로 만나 CD의 존재에 대해 알렸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황교안 본인은 왜곡이라고 해명했다.# 박영선이 이 건을 들고 나온 것이 장관 후보자들의 자질 논란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을 상당히 상쇄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의견과 박영선이 진술을 번복한 바, 이로 인해 불거진 선거법 논란 역시 일고 있다.# 이 외에도 전통시장에 갔다왔다는 증거로 영수증을 요구하자 박영선 장관은 "할머니 현금영수증 끊어주세요~" 하지는 않는다고 한 답변과 자신의 유방암 수술과 관련된 질문에선 의원님이 전립선암수술을 받았다고 자신이 물어보진 않는다고 답했다.
한편 중소기업, 소상공인 연합회 등에서는 조속한 임명을 촉구했다. 중소기업중앙회 #1 #2 #3 #4 #5
결국 현직 국회의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2019년 4월 8일 장관직에 공식 임명되었다. 당시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임명 찬성 45.8% vs 반대 43.3%의 결과가 나왔다.#
2019년 9월 13일 쇼호스트로 깜짝 등장해 완판의 과업을 달성했다. 이날 주문금액은 당초 목표인 3000만원을 훌쩍 넘은 5151만 1124원을 찍었다. 시청률도 평소의 3배 가까이 올랐다.
장관으로서 평가는 좋다. 안건준 벤처기업협회장은 “정치인 출신이 얼마나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지 우려했던게 사실인데 정말 놀랐다. 흡수력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구나. 생각하는 방향, 수준, 깊이, 관심 등은 여야나 진보, 보수를 떠나 굉장히 만족한다."라고 극찬했다. 그간 이런 정치인 경제 부처 장관은 그냥 잠시 경력 관리 하고 민원 좀 해결해주는 수준이었다. 이번엔 강력한 장관이 나서서 예산도 많이 끌어다 주고[19] 문재인 대통령도 박영선 장관을 해외 순방에 자주 참여시키며 해외로도 커넥션을 만들어 주는 점이 호평을 이끌어 내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서울특별시장 재보궐선거의 민주당 후보로 최근 자주 거론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이 성추문 의혹을 받은 상황이라 당내에서도 이번엔 여성 후보를 출마시켜야 한다는 중론이 있는데다가, 2011년·2018년 이미 두 번이나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했을만큼 서울시장직을 향한 본인의 의지도 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출마하게 된다면 4선의 풍부한 의정 경험과 국무위원 직을 수행하면서 쌓은 행정 실무 경험이 강점으로 꼽힌다.##
8월 4일 중기부에서 발표된 2020년 상반기 벤처기업 및 벤처투자 받은 기업의 일자리 동향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최악의 경제 상황 속에서도 벤처·스타트업 일자리가 오히려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총 73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됐는데 같은 기간 4대 기업이 창출한 69만 개의 일자리보다도 그 수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12월 8일,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 공무원들에게 실시한 여론조사가 공개되었다. 중기부 공무원의 70% 이상이 계속 중기부에서 같이 일하고 싶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만큼 장관들 중에서도 가장 일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2021년 1월 19일, 한동안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관련해서는 말을 아끼던 박영선 장관이 4월에 열릴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최종 결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당 중진들의 설득으로 출마를 결심하게 됐고 경선 일정을 고려해 20일까지 업무를 보고 사의를 표명했다. 후임으로는 권칠승 의원이 내정되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사임 표명 당일 박 장관의 면직안을 재가했다.#
박영선 장관은 1월 20일 오전 스테판 방셀 모더나 CEO와 화상회의를 했다. 이날 화상회의에서 정부와 모더나는 국내에 호흡기전염 질환 백신 생산공장을 공동 설립하고, 백신 연구개발(R&D) 공동 투자를 진행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인터뷰에서 박 전 장관은 "모더나 공장이 창동[20]에 세워질 수 있는데 이 같은 바이오기업 유치는 일자리를 늘리고 해당 지역을 세계적인 바이오클러스터로 도약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했다.#
7. 서울시장 후보 출마, 그리고 낙선
2021년 1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21분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21분 컴팩트 도시로 서울을 재구성하는 도시공간의 대전환을 이루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 과정에서 창동기지 개발 방향을 지역민들이 바라는 일자리 대신 토지임대부 주택으로 개발한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 슬로건은 서울시 대전환, 합니다 박영선!2021년 2월, 박영선 전 장관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 내부 당원 지지층 여론조사에서 50%대 중후반대 지지율을 보여주며 20%대 후반 지지율을 보이는 우상호 의원을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21] 언론에서는 박영선 전 장관과 안철수 대표와의 양자대결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 다소 묻히는 감은 있지만, 애당초 치열한 경선전이 예상되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22]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진보 성향의 시사 유튜버들 사이에서도 박영선 전 장관에 대해 호의적인 내용의 동영상을 적극 홍보하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23] 트위터에서는 박영선 전 장관이 강세고, 유튜브 및 온라인 커뮤니티(대표적으로 클리앙)에서는 우상호 의원이 강세다. 특히 팟캐스트 방송 월말 김어준의 박영선 후보와의 대담본 방송이 박 전 장관의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재직 시절 전의 잔존 비토 정서를 매우 중화시키는 효과를 줬다.
더불어민주당 더좋은미래 소속 의원 및 원외위원장, 시의원들의 우상호 조직세에 대항하기 위한 현역 의원 영입 및 조직세 규합[24]도 현재까지 나쁘지 않다는 평이 많다. 친문의 복심이라 불리는 윤건영 의원, 고민정 의원[25]을 필두로 이수진[26] 의원, 박성준 의원, 강병원 의원, 정청래 의원, 노웅래 의원, 김병기 의원, 박용진 의원, 임종성 의원, 신현영 의원, 이수진[27] 의원, 김경만 의원, 변재일 의원, 정춘숙 의원, 강선우 의원, 유정주 의원 등이 물밑에서 박영선 전 장관을 지원해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28]
즉, 경선에서 친문 초재선 그룹과 97세대[29] 의원의 표심을 잡는데 다소 성공한 셈이다.[30]
2021년 2월 중반, 야권 후보와의 양자 및 다자대결에서 선전하는 여론조사가 속출하고 맞상대를 펼치고 있는 우상호 의원이 2월 10일 박원순 전 시장과 관련한 2차 가해 논란으로 자책골을 넣으면서 점차 경선레이스의 승기를 굳혀가고 있다.#
만일 2021년 3월 1일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다면,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한명숙 전 국무총리, 나경원 전 국회의원에 이어 역대 네 번째 주요 정당 여성 광역자치단체장 후보가 된다. 결선에서 승리하게 되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광역자치단체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31][32][33] 결국 우상호 후보와 벌인 서울시장 보궐 선거 후보 경선에서 69.56% 득표로 30.44% 우상호 후보를 꺾었다.#
최종적으로 서울시장에 당선된다면, 2021년 재보궐선거를 사실상 민주당의 승리로 이끈 성과로 향후 민주당에서의 입지가 배로 커질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서울시장 선거에 별 어려움 없이 재차 도전할 개연성이 크며 서울시장으로서 차차기에는 대권주자 반열에도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낙선할 경우 전통적으로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선했던 정치인들은 입지가 크게 꺾여 정치판을 떠나거나[34], 긴 슬럼프 끝에 간신히 복귀한 사례[35]가 많은 만큼 이번 선거에 박영선의 정치적 명운이 걸렸다고도 볼 수 있다.
이후 범여권 후보 단일화에 속도를 내고 있는데, 원래는 열린민주당 김진애 의원을 포함한 3자 단일화를 시도했으나 김진애 의원이 거부하면서 먼저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과 양자 단일화를 진행하기로 했다. 3월 6~7일 양일간 여론조사를 진행한 후 그 결과에 따라 단일 후보를 결정한다.# 3월 4일에는 양 후보간 토론회가 열렸는데 부동산 문제, 소상공인 지원 문제를 두고 날카롭게 정책 토론을 펼쳤다.## 3월 7일 발표된 조정훈 의원과의 단일화 경선에서도 승리했다.#
3월 9일, 열린민주당 김진애 후보와의 단일화도 합의했다. TV에서 1번, 유튜브에서 1번 총 2번의 토론회를 연 후 여론조사와 양당 당원 투표를 50%씩 반영하기로 해 17일 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다.#
17일, 여론조사 결과 박영선 후보가 김진애 후보에게 승리하면서 최종 범여권(더불어민주당·열린민주당·시대전환) 단일후보가 되었다. 박 후보는 "매우 유쾌한 단일화 여정이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4·7 승리를 위해 이제 하나가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승리 후 기자회견에서 단일화 논의 중인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겨냥해 "아이들 밥그릇에 차별 뒀던 후보, 부잣집과 가난한집 자녀의 호칭을 차별하는 후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연상하게 하는 이러한 낡은 행정으로는 서울 미래를 기대하지 못한다"며 "낡은 정치의 전형, 철새 정치를 10년간 해온 방황하는 후보로도 서울의 미래를 기대하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출마 선언 직후만 해도 타 후보들을 큰 차이로 따돌리며 당 내 여러 논란 속에서도 승기를 쉽게 잡아 민주당 중심의 정계 질서가 재구축되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당 내부에서 보내는 지지와는 별개로, LH 사태가 터지고 여권 인사들의 투기 의혹까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며 전국민이 분노를 표출한 이후 여론조사상으로 야당의 주요 주자인 안철수, 오세훈과 비교할때 어느쪽과 붙더라도 15퍼센트 이상 크게 뒤쳐지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 야권후보들 역시 3자 구도로 가서 제살 깍아먹기보다는 단일화할 것이 유력한 만큼 본인이 15퍼센트가 넘는 격차를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하느냐가 승부처가 될 것으로 보인다.[36]
결과적으로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가 되면서 오세훈 후보와 경쟁하게 되었다. # 오세훈 후보와의 격차가 안철수 후보와의 격차와는 적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는 희망적인 상황이지만 여전히 지지율이 15프로 넘게 뒤쳐지고 있어서 승부수가 필요한 상황이다.[37] 그러나 여권 인사들의 잇따른 말실수와 본인의 LH 사태 해결을 위한 특검 도입 주장 등으로 인해 돌파구가 잘 보이지 않고 있다. 아무리 사전투표나 재보궐선거가 여당 측에 유리하다고 하지만[38] 15%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을 뒤집는 것은 내부적인 결속만으로는 쉽지 않기 때문. 엎친데 덮친격으로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박원순 찬사 망언#으로 박영선 후보의 어려움은 더욱 커지고 있다.
결국 민주당 내부에서의 팀킬과 LH 사태로 인한 서울 시민들의 분노가 여전함을 반영하듯 민주당의 네거티브 공세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공표 금지기간 직전인 3월 30일 실시된 매일경제의 3차 여론조사 결과 오세훈과의 지지율 격차가 더블스코어급인 27.6%까지 벌어지며 더욱 불리해 졌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지지율이 한 자릿수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거나 샤이 진보들이 훨씬 많고 바닥 민심은 다르다면서 지지자들을 독려하고 있다.[39]
현재 서울시민들이 민주당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인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서도 결국 국민들에게 정책 실패를 인정하며 읍소전략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시면 부동산 안정에 힘쓰겠다'는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 그러면서 주거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무한책임을 느끼며 현재 시행되는 부동산 정책들을 대거 수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이번엔 청와대가 '현재 부동산 정책은 문제가 없으며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혀 또다시 엇박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4월 1일 사실상 마지막 여론조사에선 여전히 20% 넘는 차이를 좁히지 못하며 더더욱 상황이 어려워졌다. 세부적으로는 오세훈 후보 측이 내세우고 있는 '정권심판론'이 박영선 후보 측이 내세우는 '정권안정론'을 20% 넘는 차이로 누르며 현 정권에 대한 분노가 그대로 반영 되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누구에게 투표할지 모르겠다고 밝힌 부동층도 줄었으며 대부분 오세훈 후보 측으로 이동 한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영선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오세훈 후보보다 30% 가량 낮은 24.6%로 나타났다.[40]#
4월 4일 서울 서초구 모 교회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오세훈 후보와 만났다.[41] 예배 초반 악수를 하긴 했으나 별다른 대화는 나누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4월 7일 재보궐선거 출구조사 결과 오세훈 59.0% VS 박영선 37.7%[42]로 큰 표차로 낙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상대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되자 처음에는 결과가 안 나왔다며 인터뷰를 피하려고 했지만, 진심이 거짓을 이기길 바란 분들에게는 감사를 전하고 회초리를 들어준 분들에게는 자신이 다 받아들이겠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남기고 퇴장했다.
개표결과 오세훈 57.5% VS 박영선 39.18% 로 오세훈 후보가 박영선 후보보다 약 90만 표를 더 얻으며 당선이 되었다. 개표 결과를 보면 1년전 총선 때와는 정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25개 구에서 모두 오세훈 후보가 승리했으며, 수도권의 보수 우파 초강세 지역이자 강력한 아성인 강남구와 서초구에서는 30%조차 넘지를 못했다.[43] 또한 박영선 입장에서는 정계 입문 후 출마한 모든 선거 중 처음으로 낙선이 기록되었고, 심지어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였던 구로구에서도 패배를 했다. 거기다가 서울특별시에서 민주당계 정당의 초강세 지역으로 꼽히는 관악구, 강북구, 은평구, 노원구 등에서도 이 선거에서 만큼은 민주당에게 호된 회초리를 주고 싶었는지 오세훈 후보에게 훨씬 더 많은 표를 줬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44] 물론 3월 이후부터 구도 자체가 민주당에게 불리했던 건 사실이므로, 참패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박영선에게 물을 수는 없긴 하다. 그러나, 유세 과정에서의 잦은 말실수 및 망언, 후보자 토론에서 내세운 시종일관 네거티브 전략은 분명 본인의 불찰이므로 당뿐만 아니라 본인의 정치적인 입지에도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45]
박영선은 원래 안희정계[46]였다가 김종민과 함께 친문으로 전향한 정치인인데, 특이하게도 재보궐에서 39%의 득표율을 거뒀다. 이는 중도층이 이탈하고 소위 말하는 강성 친문들의 표만 흡수했다고 볼 수 있다. 청문회 스타 시절부터 저격수로 유명했는데 토론회에서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준비 기간이 부족했냐는 비판도 받는다.[47]
박영선은 우상호 후보와 당원 투표를 거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출마했고 3월 초 LH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오세훈 후보를 오차범위 밖으로 이기고 있었으나 LH라는 치명적인 스캔들로 인하여 큰 격차로 패배했다. 오세훈 시장이 고민정이라는 정치 신인에게 패배하면서 정치 생명이 암울해졌지만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것처럼 1년 뒤 지선에서의 결과에 따라서 행보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48] 선거 당일에는 본인도 패배를 직감했는지 개표일에 불참했다. #
7.1. 낙선 이후
낙선 이후 오세훈 서울시장 당선자를 비판하는 행보를 꾸준히 보이고 있는 중이다.오세훈 시장의 임기가 1년 남짓인 데다, 민주당 내에서도 서울특별시장 후보군이 마땅치 않다 보니 1년 후 있을 차기 지방선거에서 박영선의 재차출설이 꾸준히 나돌고 있다. 하지만 네임드급 서울시장 낙선자는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맞는 징크스[49]를 감안하면, 그리 쉽지는 않아 보인다. 박주선(광주 동구·남구 을)이나 노회찬(경남 창원시 성산구), 안철수(경기 성남시 분당구 갑)처럼 재기를 위해 활동 무대를 옮길 가능성도 있다.[50] 지역구였던 구로 을에서의 평가가 매우 좋기는 하지만 그 자리에 대신 들어온 윤건영 의원 역시 딱히 별다를 논란이나 문제점을 일으키지 않았고, 또 서울시장 선거에서 본인 지역구에서도 오세훈에게 패했기 때문에 본인 지역구로 다시 돌아가기도 어려워 보인다.
대선이 이재명 후보와 민주당의 0.73%p차 석패로 끝난 직후에도 정중동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데,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하마평에 오르던 서울특별시장이나 경상남도지사 선거 중 어느 자리에도 후보로 지원하지 않았다.
한편 4월 12일, 송영길 전 대표가 박홍근 원내지도부가 추진 중인 검수완박 입법안에 대하여 "사법시험 합격해서 변호사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검찰에 비해서 경찰은 훨씬 권력을 잘 따르지 않겠느냐"는 실언을 하자 페이스북을 통해 "경찰비하 발언이 아닌지"라며 "사법시험 선민의식?"이라고 꼬집었다.#
4월 19일, 서울시장에 도전장을 낸 송영길 전 대표, 박주민 의원이 전부 컷오프되면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다시 차출될 가능성이 생겼다. 실제로 전략공천이 유력하고 본인에게 의사를 타진 중이라는 기사도 나왔다.[51]#
4월 22일, 민주당 비대위에서 송 전 대표와 박 의원에 대한 컷오프를 철회하고 김진애 전 의원을 포함해 100% 국민경선을 진행하는 대신 박영선 전 장관의 출마 의사를 계속 타진하고 있는데 박 전 장관은 페이스북에 암으로 투병 중인 어머니 사진을 공개하며 "어머니와 정치, 지금 여기에 대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상황이 참 난감하다"고 토로했다.[52]
그리고 석 달 후인 2022년 7월 18일, 모친이 향년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결국 최종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당내 서울시장 경선은 박영선 전 장관을 제외한 3파전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경선에서 이긴 송영길 전 대표가 서울시장 선거 후보로 나갔지만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에게 대참패하고 말았다.
2022년 7월 4일, 김진표 국회의장을 비롯한 후반기 국회의장단이 선출되면서 양승조 전 충남지사, 이광재 전 강원지사와 함께 신임 국회사무총장 하마평에 올랐으나 이광재가 사무총장이 되며 야인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어느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내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갈 것이라고 하며, 유학가기 전까지는 대학 강단에 설 예정이라고 한다.# 서강대학교에서 초빙교수직을 맡아 수행하였으며 특강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미국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에서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년 연말까지 체류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국에 체류하고 있으면서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여러 정치 현안에 대한 의견을 보이고 있다.
23년 4월 尹 대통령의 방미 일정중 하버드 대학교에서 진행한 연설회에 참석했다.#
23년 5월 전현직 여성 국회의원들을 정회원으로 하고 있는 사단법인인 한국여성의정의 공동대표[53]를 맡았다.#
23년 6월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과 멜란 버비어 전 미국 여성특임대사가 공동으로 주재하는 2023 글로벌 여성 리더 정상회의에 참석하였다.#
제22대 총선에서 마포구 갑에 출마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으나# 결국 불출마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AI 및 반도체 관련 책을 출간하였고, 중소기업중앙회 명예대사를 맡는 등의 행보를 보이고 있으나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7.2. 윤석열 정부 총리 기용설
2024년 4월 17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후 사의를 표한 한덕수 국무총리의 후임으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와 함께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 김종민 새로운미래 공동대표도 각각 대통령비서실장, 정무특임장관 후보로 거론되었다. 대통령실은 이러한 보도에 대해 "검토된 바 없다"며 부인하였다.# 한편, 박 전 장관은 이러한 보도가 있기 하루 전인 16일 SNS를 통해 미국 하버드 대학교 선임연구원 활동을 중단하고 조기 귀국한다는 소식을 전했다.#그리고 18일~주말까지 한국 귀국 전 오사카에 머물 계획이다. 총리기용설에 대해서는 아직 할 말이 없다면서 말을 아꼈다@. 이후 곧바로 밝힌 입장에서는 "지금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너무도 중요한 시기여서 협치가 긴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두 도시 이야기'처럼 보여지고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정치가 양극화 된 상황에서 본인이 총리로 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이다.#.[54] 완전히 부인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대통령실과 어느 정도 접촉은 있었던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2024년 4월 18일,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의 총리 내정설이 나오면서 박 전 장관의 총리기용설은 당분간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0석에 달하는 거대 야당이 버티고 있는데다가 여전히 대통령실에서 메세지 혼란이 이어지고 있어 완전히 떡밥이 가라앉은건 아니다. 실제 일각에서는 조기귀국을 근거로 총리자리와 관련해 상당히 얘기가 오갔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총리설은 여전히 살아있는 카드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총리직을 수락할지는 알 수 없다. 박영선 총리설이 나왔을 때 민주당 측에서 야권 분열공작이라며 거센 반응을 보였을 정도로 당 지지층이 크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만약 국회에서 부결이라도 된다면 그걸로 정치인생이 끝날 가능성이 높다. 설령 민주당이 어찌 인준을 해준다해도 총리로서 뭔가 역할을 하기도 힘들다. 22대 총선 결과를 기점으로 국정동력이 크게 상실된 데다가 지지율을 반등시킬 모멘텀도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며, 또한 대통령이 내각 운영에 있어서 국무총리에게 상당한 재량을 부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경우가 극히 적기 때문에 국무총리에 임명되더라도 결국 방탄총리 혹은 대독총리로 전락해서 정치력만 소모될 우려가 있다.
이와같은 상황들을 인지한 것인지, 5월 3일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정치에 적응하기 힘들다면서 애초 총리설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적이 없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1] 1983년에 상명여자대학이 되었고, 1987년 상명여자대학교(종합대학)로 승격되었으며, 1996년 남녀공학 상명대학교가 되었다.[2] 상명여대 혹은 경희대에 배구선수 경력으로 입학했다는 소문이 널리 펴져 있는데, 중소벤처기업부장관 인사청문회에서도 거론된 바 있다. 이에 대해 박영선은 "저는 배구를 한 적이 없고 운동을 그렇게 잘하는 편도 아닙니다."라며 부인했다. 물론 경희대에 배구부가 실존하긴 하지만, 이 배구부는 여느 대학 배구부들처럼 남자선수 전용이며, 지금도 그렇고 당시 여선수들도 십중팔구가 고졸이었다. 또한 상명대에는 배구부가 아예 실존하지도 않는다.[3] 이때 미국의 소리에서 일했다고 한다.[4] 이때 이혼과 별거로 루머가 많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혼에 대해서 보수적인 풍토가 강했던 시기였다.[5] 박영선 본인이 메인 앵커를 맡았고 신동호 아나운서가 보조 앵커를 맡았는데 그 당시는 파격적이었다. 이후 KBS 9시 뉴스에서 이소정 기자가 메인 앵커 그리고 최동석 아나운서가 보조 앵커를 맡았다.[6] 2021년 TV조선 예능 프로그램인 아내의 맛에 출연해 본인이 직접 이 일화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때 깨알같이 김영삼 성대모사를 하기도 했다. #[7] 단독 인터뷰는 아니고 배우들이 지나가던 길에 가두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 것들이다.[8]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뉴스데스크 증권뉴스 코너를 맡았다.[9] 혹은 언론에서는 저격수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10] 노무현 前 대통령의 대사와 뉘앙스만 다르고 완전히 똑같은지라 재조명받기도 했다[11] 다만, 예전 일과 이명박에게 이런 말을 대놓고 한 걸 봤을 때, 이명박과 예전부터 원래 알고 있었던 사이일 확률이 높다. 박영선 본인도 이명박 BBK 때부터 이명박을 알고 있었다고 하기도 했다.[12] 구로 을 지역구는 기존에 김한길의 지역구였다. 그러나 김한길이 탈당 후 신당 창당 등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벌인 정계개편이 실패하자 총선에 불출마하면서 박영선이 이 지역구를 이어받게 된 것이다.[13] 김낙순 공천을 둘러싼 갈등이 사퇴 이유로 제시되기도 한다. 김낙순 전 의원은 박영선과 같이 구 정동영계의 멤버로, 통합민주당이 강서·양천권에서 전부 쓸려나간 18대 총선에서도 약 3%p차이로 석패하는 등 경쟁력있는 인사였다. 김낙순과 대결한 후보는 문재인, 이해찬, 박원순, 등이 입당한 시민통합당 공동대표 이용선이었다.# 안규백·전현희 등이 반대 기자회견을 연 결과 결국 경선에서 이용선이 승리했으나 본선에서 낙선한다. 마찬가지로 친노세력이 장악한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위해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교수를 영입해 놓고 정동영의 지역구인 전주 덕진에 공천받으려던 걸 수도권 지역구로 부른 다음, 그대로 공천하지 않았다. 박영선은 최고위원 사퇴 이후 김낙순이 민주통합당 불공정 공천의 최대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 유종일, 김낙순은 정동영계와 가까운 사이로 민주당의 최대 문제점인 계파싸움과 무관하지 않은 셈이다.[14] 윤석열은 불출석 사유서를 냈는데, 설득 끝에 출석시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발언이 나오게 되었다. #, #[15] 이상돈 교수는 민주당원들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지는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강도 높게 비판한 인물이기 때문에 민주당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16] 호남계 상당수 + 안철수계 + 김한길계 + 정동영계 + 천정배계 등[17] 나중에 1월 1일 신년인터뷰에서 처음분터 비문은 아니었다고 한다. 2012년 대선 당시에도 총괄선대본부장을 했기 때문이다.[18] 재미있게도 위에 언급한 이언주가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간사로 있다. 즉 이언주가 산자중기위 위원으로서 중기부장관 후보자 박영선에 대한 청문회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19] 중소기업 관련 예산은 31% 상승했다.[20] 이름과는 다르게 도봉구 창동이 아닌, 노원구 상계동 소속이다.[21] 최대한 보수적으로 봐서 산술상 박영선 전 장관이 47.8% 득표로 우상호 의원의 52.2% 득표에 밀렸을 경우를 상정해도[55] 여성후보 가점 10%를 얻으면 52.58% 득표로 바뀌어 52.2%의 우상호 의원을 꺾을 수 있게 된다.[22] 심지어 우상호를 간접 지원하는 입장을 보이는 열린민주당 지지층에서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23] 서울의소리, 새가 날아든다 등이다.[24] 주로 서울시 소속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25] 박영선 캠프 대변인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3월 18일에 자신의 페이스북 게시글에 피해자에 관한 내용과 더불어 박영선 캠프 대변인직을 내려놨다고 전했다.[26] 지역구[27] 비례대표[28] 서울시장 불출마를 선언한 박주민계의 경우 의원 및 조직이 박영선 지지와 우상호 지지로 나뉘었다는 전언이다. 그렇지만 일단 박주민 의원은 2월 10일 은평구 대림시장 유세 당시 밀착해서 동행하며 사실상 우상호 의원 지지 의사를 밝혔다.[29] 90년대 학번, 70년대생 정치인을 일컫는 말[30] 반대로 박홍근 의원, 천준호 의원, 기동민 의원, 남인순 의원, 양경숙 의원, 김성환 의원, 우원식 의원, 진선미 의원[56], 김영배 의원, 양기대 의원, 박정 의원, 정성호 의원, 송영길 의원, 이해식 의원, 김영호 의원, 한준호 의원, 서영교 의원, 김영주 의원, 이용선 의원, 박주민 의원, 유동수 의원의 경우 우상호 후보를 지원한다.[31] 현재까지 한국 최초의 여성시장(관선)은 전재희 전 의원이고 최초의 민선 지방자치단체장은 김영순 전 송파구청장이다.[32] 한국이 유독 지방자치 및 지방정치 영역에서 여성 공직자 활약이 미약한 편이다. 당장 세계 GDP 1위~9위 국가들을 살펴보면 두드러진다. 미국의 경우 넬리 테일러 로스(Nellie Tayloe Ross)가 1925년 와이오밍에서 최초의 여성 주지사로 활약했고 현재 워싱턴 D.C 시장 또한 여성으로서 뮤리엘 바우저가 시장이다. 중국의 경우 민선은 아니지만 1983년 장쑤성에서 최초의 여성 당장 구시우렌(顾秀莲)이 배출되었고, 당서기로 보면 더 이른 1977년에 리위란(吕玉兰)이 허베이성 여성 당서기로 활약했다. 일본의 경우 2000년, 오사카부에서 최초의 여성 도지사 시오타니 요시코(潮谷義子)가 배출되었으며, 도쿄도에서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지사가 최초의 여성 도쿄도지사다. 독일의 경우 1947년 루이즈 슈뢰더(Louise Schroeder)가 베를린 시장을 역임했으며, 최초의 여성 주총리는 1993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총리였던 하이데 시모니스(Heide Simonis)였다. 영국의 경우 에블린 로우(Eveline Lowe)가 1939년 런던 의회 의장으로서 최초의 여성 수도 당국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최초의 여성 자치단체장은 1908년 엘리자베스 가렛 앤더슨(Elizabeth Garrett Anderson) 올드버러 시장이다. 프랑스의 경우 1970년 에블린 바이레(Évelyne Baylet) 타른에가론 주지사가 프랑스 최초의 여성 주지사였으며, 파리의 경우 1972년 니콜 드 오트클로크(Nicole de Hauteclocque)가 최초의 여성 파리 의회 의장이었으며, 현직 파리 시장 또한 여성정치인 안 이달고(Anne Hidalgo)이다. 인도의 경우 최초의 여성 주지사는 인도 최고의 여류 시인인 사로지니 나이두(Sarojini Naidu)이며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우타르프라데시 주지사를 역임했다. 인도 최초의 여성 주총리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재임한 우타르프라데시 주총리인 수체타 크리팔라니(Sucheta Kripalani)총리다. 이탈리아의 경우 1981년의 안나 넨나 단토니오(Anna Nenna D'Antonio) 아브루초 주지사로서 최초의 여성 주지사를 역임했고, 로마 현직 시장 또한 여성변호사인 비르지니아 라지(Virginia Raggi)로 여성 시장이다. 캐나다의 경우, 1991년, 브리티시 컬럼비아에서 최초의 여성 주총리 리타 존스톤(Rita Johnston)이 탄생했으며, 수도 오타와는 40년전인 1951년부터 1956년까지 샬롯 휘튼(Charlotte Whitton)이 최초의 여성 시장으로 활약했다.[33] 당선시 미국 워싱턴 D.C의 뮤리엘 바우저시장, 일본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 프랑스 파리의 안 이달고 시장, 이탈리아 로마의 비르지니아 라지 시장과 더불어 세계 상위 GDP 10위 국가의 여성 수도 단체장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세계 GDP TOP 10 국가의 딱 절반에 해당하는 국가의 수도 수장이 여성이 되는 것이다.[34] 2006년 강금실, 2014년 정몽준은 낙선 후 아예 정계를 떠났다. 그리고 출마 전부터 친박 행세 등으로 인해 하락세였으나 2018년 김문수도 낙선 후 사실상 정계 은퇴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10년 한명숙 역시 낙선 이후 민주통합당 대표에 오르고 본인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민주통합당의 총선 참패로 당 대표에서 사퇴했고, 결론적으로 불법정치자금 수수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으며 정치 생명이 끊겼다.[35]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 의원직 사퇴 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2020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18년만에 국회로 돌아온 김민석이다. 나경원의 경우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박원순에게 패하고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동작구 을에 출마해 당선되며 3년만에 원내복귀에 성공했지만 이마저도 김종철이 노회찬과 단일화에 실패하며 야권 표가 분산됐기 때문에 어부지리로 당선됐다.[36] 3자 구도로 가도 박영선이 이기지 못할 정도로 여론이 매우 나빠지긴 했다.[37] 오세훈 후보는 처음 당내 경선을 치를 때만 해도 10프로대의 지지율로 시작했으나 이후 나경원 후보와 안철수 후보에게 역전의 역전을 거듭하면서 최종 승리자가 되면서 최종 야권 대표로 선출, 현재 지지율은 계속해서 상향세를 타는 중이다.[38] 실제 총선에서 당일 투표에서 앞서가다가 사전투표에서 뒤집혀 패배한 야당 후보들이 적지 않았으며, 재보궐선거는 전통적으로 투표율이 낮기 때문에 국민의힘에 비해 고정 지지층이 훨씬 더 많은 더불어민주당이 유리하다는 예측이 많았다. LH 사태 전까지는.[39] 이는 지난 2018년 지방선거 당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2020년 총선 당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샤이 보수'를 내세우며 "바닥 민심은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특히 당장 1년전 여론조사들을 부정하고 바닥민심과 '샤이보수'를 주장하다 총선 참패를 겪은 미래통합당과 비교되며 불과 1년만에 상황이 뒤집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40] 오세훈 후보는 62.3%로 나타났다.[41] 아이러니하게도 박영선, 오세훈 두 후보 모두 천주교 신자다. 다만 박영선의 경우 원래는 개신교 신자였다가 천주교로 개종했다.[42] 최종 개표결과는 57.5% 대 39.2%[43] 특히 서울에서 민주당계 정당의 상당한 강세 지역으로 통하는 강북구나 관악구, 노원구, 중랑구, 은평구민들 역시 이 선거에서 만큼은 오세훈에게 더 많은 표를 행사했다.[44] 구로3동에서 오세훈을 앞섰지만, 나머지 구로구 지역에서 패배했다. 관외사전투표를 제외하고 오세훈 후보를 이긴 그 외 서울 법정동 지역은 종로구 창신2동, 마포구 성산1동, 강서구 화곡8동 뿐이다. 더 자세한 결과는 2021년 재보궐선거/개표 결과/서울특별시장 참고[45] 특히 이번 2021년 재보궐선거 같은 경우 대한민국 국민들의 시선이 쏠렸던 선거였다. 총선이나 지선 같은 경우에는 수십~수백 명의 사람들이 선거를 뛰지만, 이번 선거 같은 경우에는 오로지 서울시장, 부산시장을 뽑는 선거였다. 부산시장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박형준 후보가 앞서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했었다. 결국 국민들의 시선은 애초에 오세훈과 박영선이 출마한 서울시장 선거에 쏠렸으며, 더군다나 졌잘싸 수준도 아니고 압도적으로 패했기 때문에 정치적 타격은 총선 한 번 떨어진 것보다 몇 배 클 수도 있다.[46] 대선 경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양념 발언을 처음 물고 늘어진 게 박영선이다.[47] 수직 정원 공약은 오세훈에게 지적당하고, 내곡동과 생태탕 이야기만 하다가 끝났다.[48] 사실 1년 뒤에 대선이 있고 지방선거 역시 대선 3개월 만에 치러지는데, 이재명 후보가 대선에서 진다면 무난하게 오세훈이 4선 서울시장이 될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49] 박찬종, 최병렬, 김민석, 강금실, 한명숙, 나경원, 정몽준, 김문수, 박주선, 노회찬, 안철수 등. 군소후보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나경원의 경우는 3년 만에 국회의원으로 복귀했지만, 그조차 야권 단일 후보 노회찬이 김종철과의 표 분산으로 어부지리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순전히 운빨이라고 봐야 한다. 이후 총선에서는 낙선하고 당대표 선거도 떨어지는 등 여러 부분에서 위기를 맞았다. 김민석의 경우, 복귀하는 데 무려 20년이나 걸렸다. 심지어 1년 후 서울시장에 출마한 송영길마저 이 징크스를 피해가지 못했다.[50] 경상남도 지역 신문에 박영선 전 장관의 경상남도지사 출마설이 돌고 있다.#[51] 실제로 오세훈 시장과의 가상대결을 가정하고 나온 조사에서 이낙연 전 총리나 송영길 전 대표, 박주민 의원 등 타 후보군들보다 조금 더 나은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52] 이후에도 경남도지사 후보 차출설등이 있었지만 너무 잔인한거 아니냐는 식의 다소 격앙된 반응을 내놓기도 했다[53] 상임대표는 이혜훈 전 의원이 맡았고, 박영선 전 의원 외에 공동대표를 맡은 정치인들로는 국민의힘 김정재 의원,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있다.[54] 박영선의 측근 역시 박영선 본인이 이렇게까지 표현한 것으로 봐서는 입각은 어렵지 않겠냐는 입장을 남겼다. 참고로 입장문을 낸 이후로는 연락을 받지 않는것으로 보이는데 박지원에 따르면 최초 기사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한다.